***간증: 1140. [역경의 열매] 김임순 (1-12) 6·25 거제 피난길서 전쟁고아들과 운명의 첫 만남
일제의 식민 지배와 광복, 한국전쟁, 고아들과 장애아들을 먹이고 입히고 가르치기 위해 벌인 사투 등 90년 가까운 시간을 살아오면서 어느 하루 특별하지 않은 날이 없었다. 하지만 지금도 가장 선명히 떠오르는 순간은 62년 전 어느 추운 겨울날이다.
한국전쟁 중이던 1952년 11월, 나는 갓 돌을 넘긴 딸을 업고 시어머니가 피난 가 계신 거제도에 내려갔다. 시어머니는 조선신학교(현 한신대학교)를 설립해 한국기독교장로회(기장)의 뿌리를 놓은 만우 송창근 목사의 사모다.
피난생활을 이어가던 어느 날, 갓난아기를 안고 시어머니와 함께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고 나오는데 뒤에서 누군가 ‘김 선생’ 하며 나를 불렀다. 뒤돌아보니 내가 대학 다닐 때 공무원 신분으로 강의하러 오던 김원규씨가 서 있었다. 김씨는 피난민을 관리하기 위해 거제도에 파견돼 있었다. 내가 인사를 하자 김씨는 다짜고짜 나를 거제 앞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장승포 언덕으로 데리고 갔다. 지금은 포장된 도로가 놓여 있지만 당시 장승포 언덕은 땅이 질퍽하고 경사가 급해 오르기 힘든 언덕이었다. 숨이 턱까지 찬 상태로 언덕 위에 오르자 흙벽과 가마니로 엉성하게 얽어 만든 움막들이 서 있었다.
김씨는 나를 그중에서 가장 허름한 움막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움막 안에는 정신없이 울어대는 갓난아기가 일곱이나 있었다. 김씨는 “피난민들이 살기가 너무나 어려워 버린 애들입니다. 김 선생이 이 아기들을 좀 돌봐주세요”라고 말했다. 난감한 부탁이었다. 피난 온 지 얼마 안 돼 집에 돌아가는 길도 모르고, 또 젖먹이 딸아이를 시어머니에게 맡겨 놓고 따라온 터다. 게다가 일곱 아기를 맡는다는 건 상상해본 적도 없는 일이었다.
조심스럽게 김씨에게 ‘몇 시까지 봐주면 되겠느냐’고 물었더니 그는 “몇 시까지가 뭐요, 이렇게 불쌍하고 어린 것들을 돌볼 생각조차 못할 거면 김 선생은 도대체 뭐하려고 공부했소?”라고 되물었다. 그는 ‘부탁한다’는 말만 남긴 채 황망히 언덕을 내려갔다. 주위를 돌아보니 움막 안에는 분유통과 냄비 하나밖에 없었다. 아이들은 정말 ‘악다구니’처럼 울어댔다. 아기들을 안고 업고 달래다 보니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학교 채플 시간에 김활란 총장이 늘 강조하던 말씀이 생각났다. “어떤 일이든 시작하기 전에 기도로 하나님 앞에 응답을 받지 않고 시작하면 그 일은 절대로 성사되지 않는다.”
집에 남아 있는 시어머니도, 어린 딸도 잊은 채 울면서 기도했다. “하나님, 왜 제게 공부를 시키셔서 이렇게 힘들고 어려운 일을 맡기시려 하시나요? 저는 못합니다. 다른 일 시켜주시면 무슨 일이든 하겠지만 이 일은 절대 못합니다. 정말 자신이 없습니다.”
밤새 울면서 기도하던 중 깜빡 잠이 들었다. 멀리서 새벽기도 시간을 알리는 교회의 종소리가 들렸다. 새벽 종소리에 몸을 추스르려는데 어디선가 크고 분명한 소리가 들렸다. “왜 네가 아이들의 수준으로 내려가려고 하느냐. 아이들을 네 수준으로 끌어올리면 되지 않겠느냐?” 이 꾸짖음이 이후 62년간 아이들을 돌보는 일에 나를 이끌었다. 27세 때의 일이다.
곁에서 새근새근 잠들어 있는 아기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하나님, 이 어린 생명들을 지켜주세요. 부족한 저라도 쓰시겠다면 나약한 제게 용기를 주셔서 이 아기들에게 따뜻한 엄마가 될 수 있도록 해 주세요”라고 기도했다.
정리=최승욱 기자 applesu@kmib.co.kr
* [역경의 열매] 김임순 (1) 6·25 거제 피난길서 전쟁고아들과 운명의 첫 만남
* [역경의 열매] 김임순 (2) 엄격한 유교 집안서 어머니와 몰래 교회 출석
* [역경의 열매] 김임순 (3) '출생의 비밀' 큰아버지·어머니가 친부모라니…
* [역경의 열매] 김임순 (4) 전쟁통에도 "고아 돌보겠다" 자원봉사 줄이어
* [역경의 열매] 김임순 (5) 전쟁고아들에 보내주신 주님의 선물 '케어미션'
* [역경의 열매] 김임순 (6) 외동딸도 고아들과 함께… 初校 때야 친부모임 알려
* [역경의 열매] 김임순 (7) 거제에 전염병 창궐… 장기려 박사 "제가 갈게요"
* [역경의 열매] 김임순 (8) 1978년 애광원 '장애아동 보호시설'로 새 출발
* [역경의 열매] 김임순 (9) 막사이사이상 수상 영예에 "주님 감사합니다"
* [역경의 열매] 김임순 (10) 애광학교 신축 위해 정부는 법 바꾸고 기업은 기부를…
* [역경의 열매] 김임순 (11) 아이들 장애 딛고 대학 진학·결혼 '행복한 사건'이
* [역경의 열매] 김임순 (12·끝) 하나님이 맡기신 아이들과 60년 "감사했습니다"
◇약력=△1925년 3월 20일 경북 상주 출생 △1949년 이화여대 가사과 졸업 △1952년 애광영아원 설립 △1980년 애광특수학교 설립 △1989년 막사이사이상 사회지도부문 수상 △현 거제도 애광원 원장, 한국기독교장로회 장승포교회 은퇴장로
***[역경의 열매] 김임순 (2) 엄격한 유교 집안서 어머니와 몰래 교회 출석
나는 1925년 3월 20일 경상북도 상주에서 태어났다. 나의 부친은 내가 갓난아기 때 만주에서 돌아가셨다고 했다. 오빠와 나는 큰아버지 댁에서 어머니와 함께 행복한 유년시절을 보냈다.
어머니는 책을 참 좋아하셨다. 반상이 뚜렷한 유교 가문에서 태어나셨지만, 외할아버지는 어머니가 아홉 살이 될 때까지 남장을 시켜 사랑채에서 한문을 배우게 했다. 어렸을 때 어머니가 촛불을 켜놓고 늘 책을 읽으시던 모습이 지금도 기억이 난다.
큰집 역시 엄격한 유교 집안이었다. 하지만 나는 어머니 덕분에 교회에 다닐 수 있게 됐다. 이웃집 할머니가 어머니에게 성경책을 한 권 선물했는데, 어머니는 성경을 읽고 또 읽으며 믿음을 가지게 된 것 같다. 그 시절에는 과부가 교회에 나가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나는 어머니가 교회에 한 번도 가보신 적은 없지만 분명 믿음으로 구원 받으셨을 것이라고 믿는다.
나는 교회에 다니는 걸 좋아했다. 교회학교 선생님들이 전해주는 ‘노아의 방주’와 ‘홍해의 기적’ ‘오병이어’ 등 성경 이야기가 신기했고 흥미진진했다. 오르간 반주에 맞춰 손뼉 치며 노래 부르고 함께 춤을 추는 것이 ‘시골 어린이’였던 내게 얼마나 신나는 일이었는지 모른다. 단, 큰아버지 눈에만 띄지 않으면 됐다.
어머니는 늘 교회에 다녀오는 나를 마중했다. 여섯 살 무렵의 어느 비 오는 날, 비를 피해 뛰어오는 내게 어머니는 활짝 웃으며 등을 돌려대셨다. 업히라는 신호였다. 어머니의 등은 너무나 포근해서 마치 구름처럼 하늘 위를 떠다니는 것 같았다. 그렇게 어머니 등에 업혀 집에 들어서는데 사랑채 앞에서 큰아버지와 마주쳤다. 긴장해서 꼭 다문 입 안으로 “하나님, 큰아버지가 저를 봤어요. 저 이제 죽었어요. 살려 주세요”라는 기도가 맴돌았다.
큰아버지가 “임순이, 어디 다녀오니?”라고 물으셨다. 덜덜 떨고 있는데, 어머니가 굳은 목소리로 “임순이 예배당 갔다 온답니다”라고 말했다. 심장이 멎는 것 같았다. 그랬더니 큰아버지께서 “아, 그래? 너는 이 다음에 커서 전도부인이 돼서 어머니 모시고 온 데 다 다니면서 전도해라”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닌가. 그때 내 입에서는 “하나님, 이제 나는 살았습니다”라는 기도가 흘러나왔다. 어머니는 내 신앙을 지켜주기 위해 에스더와 같은 용기를 내셨고, 그 신앙이 지금까지 나를 인도하고 있음을 나는 부인할 수 없다. 나는 친척들에게 “교회에 가시자”고 얘기한 기억이 없다. 그런데 지금은 예수를 믿지 않는 집이 없게 됐다.
어머니의 사랑과 보살핌 속에 행복한 성장기를 보냈지만, 고등여학교를 졸업하던 1944년 나는 충격적인 사실과 마주하게 됐다. 졸업을 앞두고 서류에 부모님의 도장을 받아와야 했는데, 그곳엔 큰아버지의 도장이 찍혀 있었던 것이다. 어려서 생부가 돌아가셨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고, 큰아버지의 보살핌 속에 성장했지만, 호적까지 큰집으로 돼 있을 줄은 몰랐다. 시무룩한 표정으로 집에 돌아와 어머니께 자초지종을 물었지만, 내가 원하는 것이면 무엇이든 들어주시던 어머니였지만, 이때만큼은 아무런 말씀이 없으셨다. 며칠을 밥도 거른 채 이불만 둘러쓰고 드러누웠다. 사실을 알기 전까지는 일어나지 않을 셈이었다.
어머니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신 채 속만 태우셨다. 방에서는 어머니가 큰어머니께 “형님, 임순이가 학교도 안 가고 누워만 있어요. 자기 서류에 왜 큰아버지 도장이 찍혀 있느냐고 묻길래 대답을 안 했더니, 며칠째 저러고 있는데 어떻게 하면 좋아요?”라고 말씀하시는 소리가 들렸다. 결국 며칠 뒤 큰어머니의 여동생인 큰댁 이모가 나를 찾아왔다. 그러고는 충격적인 이야기를 전해주셨다. 지금까지 나를 길러주신 어머니가 사실은 작은어머니였다는 것이다.
***[역경의 열매] 김임순 (3) ‘출생의 비밀’ 큰아버지·어머니가 친부모라니…
식음을 전폐하고 드러누워 있던 내게 큰댁 이모는 놀라운 이야기를 전해 주었다.
“임순아, 네 엄마(작은어머니)는 스물일곱 살에 남편을 잃었단다. 자식도 하나 없는 상황이었지. 집안의 어른들은 젊은 나이에 혼자가 된 네 엄마가 너무나도 가여웠단다. 그래서 네가 아직 갓난아기였을 때 너와 네 오빠를 네 엄마에게 양자로 들였단다. 그리고 한집에 살면서 너희 가족을 보살펴 왔던 것이다.”
나를 낳아주신 큰아버지에게는 형제가 넷이었다. 일제의 식민 지배가 시작되면서 작은아버지를 비롯한 친가 식구들이 만주로 피난을 갔다고 한다. 만주에서 자리를 잡은 뒤 어머니(작은어머니)를 모셔올 요량이었다. 하지만 타향에서 작은아버지는 세상을 먼저 떠났고, 어머니만 덩그러니 시댁에 남겨지게 된 것이다.
유교적 전통이 강한 집안이라 작은아버지의 제사를 모실 사람이 필요하기도 했고, 또 젊은 나이에 과부가 된 어머니가 불쌍해 큰아버지는 자녀 7남매 중 둘째오빠와 나를 동생 집에 양자로 들였던 것이다. 아무런 기억이 없는 것을 보니 젖을 떼자마자 일어난 일이었던 것 같다. 나는 나중에 ‘초상집에 흰 가마를 타고 들어갈 딸’이 되기 위해 양녀가 된 셈이다.
큰댁 이모의 충격적인 이야기에 나는 한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하지만 곧 친자식도 아닌 우리 남매를 크나큰 사랑으로 키워주셨던 어머니의 사랑이 얼마나 크고 귀한 일인지 깨닫게 됐다. 그리고 평생 작은어머니를 친어머니로 생각하고 모시기로 다짐했다. 이후 나는 평생 작은어머니를 어머니로, 친부모님은 큰아버지와 큰어머니로 불렀다.
김천고등여학교를 졸업하고 이화여자대학교 가사과에 입학, 1949년 학사모를 썼다. 이후 개성에 있는 고려여자사업관에서 교편을 잡았다. 고려여자사업관은 가정이나 경제적 형편 때문에 중학교에 갈 수 없는 여자 아이들을 위한 교육기관으로 10대 후반 여자 아이들이 다녔다. 나는 이곳에서 일반 중학교 교과목을 비롯해 수공예와 가사 과목을 가르쳤다.
이듬해인 1950년 4월 교회에서 만난 송승규씨와 결혼했다. 남편 역시 교사로 서울의 한 고등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쳤다. 결혼 두 달 만인 그해 6월 중순, 남편과 나는 생부인 큰아버지의 회갑 잔치에 참석하기 위해 고향 상주에 내려갔다. 잔치를 잘 마친 뒤 남편은 수업 때문에 먼저 서울로 올라갔다. 당시 임신 초기였던 나는 몸이 불편해 친정에 며칠 더 머무르기로 했다. 하지만 그것이 남편과의 마지막이 될 줄 그때는 알지 못했다. 남편이 서울로 올라가고 난 뒤 바로 그 주일에 한국전쟁이 발발했다. 그리고 남편과의 인연은 더 이상 이어지지 못했다.
전쟁은 참혹했다. 포탄과 총알이 문자 그대로 비 오듯 쏟아졌다. 마을이 없어졌고, 도로를 비롯한 모든 기반시설이 무너져 내렸다. 주위의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거나 큰 상처를 입었다. 이웃들이 옷가지와 밥그릇 몇 개만 짊어지고 피난을 떠나기 시작했다. 피난길에서 소식이 끊어진 사람도 수없이 많았다. 행여 남편의 소식이 들려오지 않을까 기다리고 기다렸지만 결국 산달이 거의 차서 친정 식구들과 함께 피난길에 오르지 않을 수 없었다.
피난길에 오른 1951년 봄, 나는 사랑스러운 딸 우정이를 낳았다. 열악한 피난길 환경에서도 입을 오물거리며 젖을 빠는 아기 덕분에 희망을 가질 수 있었다. 우정이가 혼자 앉을 수 있게 된 무렵 시어머니께서 거제도로 피난 와 계신다는 연락을 받았다. 나는 딸아이를 업고 난생처음 거제도 땅을 밟았다.
***[역경의 열매] 김임순 (4) 전쟁통에도 “고아 돌보겠다” 자원봉사 줄이어
한국전쟁 당시 거제도에는 전쟁 중에 잡힌 북한군 포로들이 머문 포로수용소가 있었다. 수용된 포로만 17만명에 달한다고 들었다. 게다가 전국에서 수십만명의 피란민이 몰려들어 섬에는 식량은 물론 거의 모든 물품이 모자란 상태였다. 전쟁 중 부모를 잃은 아이들은 먹을 것이 없어 거리에서 구걸을 했고, 병에 걸려 길거리에서 목숨을 잃은 아이들도 적지 않았다. 당시 나는 시어머니와 함께 어린 딸을 키우며 전쟁이 끝나기만을 기다렸다. 이렇게 열악한 상황에서 나는 뜻하지 않게 버려지거나 부모를 잃은 일곱 아기를 만나게 됐다. 전쟁고아를 돌보겠다는 생각은 스물일곱 해를 살면서 단 한 번도 상상해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기도 끝에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이라 생각하고 할 수 있는 데까지 최선을 다하기로 했다.
막상 아기들을 맡아 키우기로 했지만 모든 것이 쉽지 않았다. 무엇보다 아기들에게 먹일 우유가 모자랐다. 배가 고파 칭얼대는 아기들에게 빈 젖만 물릴 수 없어 이곳저곳을 다니며 식량을 구해야 했다. 정부에서 나눠주는 밀가루를 구해 죽을 끓이고, 삶은 콩을 갈아 두유를 만들어 아이들에게 먹였다. 거제도 곳곳을 다니며 헌옷을 얻어와 기저귀를 만들었다. 사용한 기저귀를 차가운 냇물에 빠느라 손이 퉁퉁 불었다. 시어머니 손에 맡겨진 딸을 생각하면 하루빨리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지만, 아기들을 버려놓고 돌아갈 수 없었다.
며칠 뒤, 아기들을 맡기고 내려갔던 김씨가 대형 천막을 구해왔다. 마침 피란 온 청년들이 도움을 자청해 급한 대로 천막집을 만들었다. 그리고 흙벽돌을 쌓아 벽을 만들어 바람을 피했지만 바닥에서 올라오는 한기를 막을 방법이 없었다. 그러던 중 한 청년이 “군부대에서 쓰고 버린 드럼통으로 깔고 그 밑으로 난방을 하면 어떻겠느냐”고 제안했다.
청년의 제안 덕분에 며칠간 추운 움막과 천막에서 고생하던 아기들이 따뜻한 철판 온돌 위에서 생활할 수 있게 됐다. 아기들은 따뜻한 바닥이 좋았던지 이내 곤한 잠이 들었다. 새근새근 잠든 아기들을 보면서 나는 고아들의 엄마가 돼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렇게 1952년 11월 ‘사랑과 빛의 정원’이라는 뜻의 ‘애광영아원’이 문을 열게 됐다.
애광영아원이 문을 열었다는 소식에 아기들을 돌봐 주겠다는 섬 주민들이 한두 명씩 찾아왔다. 대개는 피란길에 남편과 자식을 잃은 목회자 사모나 전도사였다. ‘자원봉사 엄마’들이 늘면서 돌봐야 할 아기들도 금세 수십 명으로 불어났다. 힘겨운 피란생활에 제 몸 하나 건사하기 힘든 환경이었지만 엄마들은 늘 얼굴 가득 웃음을 띤 채 아기들을 돌봤다. 기저귀를 빨리 말리겠다며 축축한 기저귀를 몸에 감고 잠을 자는 보모들도 있었다.
이듬해(1953년) 3월 봄이 되자 전염병인 홍역이 섬으로 밀려 왔다. 홍역을 앓은 아기들 가운데 서너 명이 급성 폐렴에 걸렸지만, 당시 거제도에는 의사도 병원도 없었다. 아기를 치료하기 위해서는 부산까지 가야 했다. 전쟁 통에 유일한 교통수단은 통통배뿐이었다. 부산까지는 3시간이나 걸렸다. 결국 한 아기는 부산으로 향하는 배 위에서 숨을 거뒀다. 세상을 떠난 아기가 영아원에 돌아오자 보모들은 울음을 터뜨렸다.
설립 초기 정신없이 분주한 시간을 보내던 애광영아원은 그렇게 휴전을 맞았다. 피란민과 포로들은 고향을 찾아 도움을 주던 행정기관과 군대시설은 하나둘씩 섬을 떠났다. 휴전은 기쁜 일이었지만, 사람들과 기관들이 섬을 떠나면서 식량을 구하는 것이 더 어려워졌다. 분유는 더 일찍 동이 났다. 밀가루 죽은 더 묽어졌다. 아기들은 허기에 더욱 칭얼댔다. 하지만 밀가루마저 점점 바닥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역경의 열매] 김임순 (5) 전쟁고아들에 보내주신 주님의 선물 ‘케어미션’
전쟁 직후 남쪽의 섬에는 신문이나 텔레비전 등 미디어의 혜택이 전혀 없었다. 당연히 전쟁고아들을 돕는 외국의 구호기관이 있다는 사실도 알지 못했다. 나는 만나는 사람마다 아이들에게 먹일 식량을 나눠달라며 애원하고 다녔다. 정부나 공공기관에 아이들을 도와달라는 내용의 편지를 쓰느라 밤을 지새운 적도 하루 이틀이 아니었다.
“아주머니, 저희 아기들 먹일 밀가루가 필요한데, 있으면 조금 나눠 주세요.”
“읍장님, 구호 양식 남은 것 조금 없을까요? 아기들이 배고파 우는데 먹일 것이 없어서요.”
태어나 이태까지 먹을 것을 구하러 다녀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나나 내 가족이 아닌 생면부지의 생명들을 위해 이렇게 뛰어다니게 될 날이 오리라고는 상상도 해보지 않았다. 하지만 구걸한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비참하지도 않았다. 하나님께서 내게 맡겨 주신 생명을 돌보는 일에 체면이나 자존심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낯선 외국 사람들이 애광원을 찾아왔다. 그들은 미국의 ‘케어미션(Care Mission)’이라는 구호기관에서 왔다고 했다.
“원장님, 우리는 한국의 피난민을 돕기 위해 파견돼 이곳에 오게 됐습니다. 거제도 사무소에 갔더니 언덕 위에 아이들을 키우는 영아원이 있다고 해서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마치 하나님이 보내주신 천사를 만난 것 같았다.
애광원의 상황을 살펴보고 간 케어미션은 쌀과 고기, 설탕과 초콜릿, 과자 등 먹을거리를 잔뜩 보내왔다. 하루하루 아기들을 먹일 밀가루 죽을 마련하기도 어려운 상황이었는데, 얼마나 다행스럽고 감사했는지 눈앞의 구호식량을 보고도 믿기지 않았다.
나는 케어미션을 통해 우리 같은 피난민이나 전쟁고아를 돕는 구호기관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래서 정부나 공공기관 외에도 외국의 구호기관을 수소문해 편지를 보내기 시작했다. 그 결과 세계기독교봉사회, 영연방아동구호재단, 미국양친회 같은 곳에서도 도움의 손길을 보내오기 시작했다. 음식만이 아니라 헌옷과 담요 등 아이들을 돌보는 데 꼭 필요한 구호물자도 속속 도착했다.
케어미션이나 세계기독교봉사회 등의 외국 구호기관이 보낸 구호물자를 받으려면 부산까지 배를 타고 가야 했다. 하루는 물건을 받아 장승포행 배로 옮겨 싣는데, 원래 받기로 했던 것보다 여섯 상자가 더 많은 사실을 알게 됐다. 망설임 없이 손수레를 돌려 케어미션 본부로 돌아갔다. 쌀 한 톨이 아쉬운 입장이었지만, 아이들을 위해 일한다면서 양심을 외면할 수는 없었다. 케어미션 본부로 돌아가자 창고를 지키던 경비원이 눈살을 찌푸리며 소리쳤다.
“아주머니, 더 줄 건 없어요. 돌아가세요.”
경비원은 내가 구호물자를 더 받기 위해 돌아온 줄로 알았던 것 같다.
“아니에요, 아저씨. 배에 짐을 실으려다 보니 우리가 받기로 했던 것보다 여섯 상자나 더 받았다는 걸 알게 돼서요. 그래서 돌려드리려고 왔어요.”
“아, 그래요? 미안하게 됐군요.”
이 일이 있은 후 케어미션은 다른 기관보다 애광원에 조금 더 많은 구호물자를 배정해 주었다. 나중에 들은 얘기지만 케어미션 직원들이 애광원의 정직함에 감동을 받았다고 한다. 나는 그저 기독교인으로서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었는데, 하나님께서 우리의 정직함을 보상해 주셨던 것 같다.
막막하기만 했던 전쟁터에서 하나님은 내게 귀한 생명을 맡겨 주셨고, 또 전혀 예상치도 못했던 사람들과 기관을 통해 아이들을 보살필 수 있게 하셨다. 아기들이 점점 자라면서 1959년 나는 애광영아원의 이름을 ‘거제도 애광원’으로 바꾸고 갓난아기부터 국민(초등)학생에 이르는 아이들을 함께 키웠다.
***[역경의 열매] 김임순 (6) 외동딸도 고아들과 함께… 初校 때야 친부모임 알려
애광원에서는 아이들을 나이에 따라 나비반 참새반 종달새반 등 여러 반으로 나누어 키웠다. 전쟁과 가난으로 많은 아픔을 가진 아이들이었지만, 아이들은 서로 잘 어울렸다. 노래와 춤도 배우고, 고사리 같은 손으로 염소도 기르고 나물도 뜯으면서 씩씩하게 자라났다.
지금 돌이켜 보면 당시 나는 배고픈 아이들이 굶거나 아픈 아이들이 제때 치료를 못 받을까 늘 노심초사 가슴 졸이며 살았던 것 같다. 그러다가도 아이들이 해맑게 뛰어노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나도 모르게 얼굴 가득 웃음을 짓곤 했다.
나는 하나밖에 없는 딸 우정이를 애광원의 다른 아이들과 함께 키웠다. 피란 생활 때는 시어머니께서 우정이를 키워주셨지만, 전쟁이 끝나 서울로 돌아가시면서 다시 내 품으로 돌아왔다. 딸에게는 내가 친엄마라는 사실을 굳이 알리지 않았다. 내게는 우정이나 애광원의 다른 아이들 모두 다 같은 자녀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친엄마가 누군지도 모르며 성장하고 있는 딸을 볼 때면 가끔 가슴이 아려오곤 했다.
내가 친엄마라는 사실을 알린 것은 우정이가 초등학교 5∼6학년에 다닐 무렵이었다. 딸은 그때까지도 어른들 농담처럼 자신을 ‘영도다리 밑에서 주워온 아이’로 알았다고 한다. 우정이는 어른이 된 뒤 “어렸을 때, 엄마가 유독 내게는 신경을 덜 쓰셔서 왜 그럴까 고민하곤 했다”면서 “친딸이기 때문에 오히려 더 조심했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 겨우 이해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아이들이 자라면서 애광원은 더 좁아졌다. 무엇보다 숙소가 협소해졌다. 1956년부터 새 숙소를 짓기 시작했다. 여러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3년 만에 새로운 숙소 3동을 완공했다. 전보다 정돈된 환경에서 아이들을 돌볼 수 있게 돼 마음의 짐을 한결 덜었다. 숙소에 따뜻한 물이 나오는 목욕실까지 갖춰 애광원도 어엿한 복지시설로 자리를 잡아가기 시작했다. 외국 구호 기관에서도 계속 구호물자를 보내왔다. 애광원의 소식을 듣고 정기적으로 기부금을 보내주는 개인 후원자들도 늘어나기 시작했다.
포로수용소가 철거될 때 나온 나무 기둥과 벽돌 등 건축자재를 얻어 2층 강당도 지었다. 그런데 아이들이 학교에 들어가면서 강당이 비어 있을 때가 많아졌다. 힘들게 지은 강당이 한낮에 비어 있는 것을 보며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래서 결혼식장이 필요한 섬 주민들에게 강당을 무료로 빌려 주기도 했다.
전쟁이 끝난 직후라 거제도 주민들의 살림살이는 매우 어려웠다. 작은 배로 물고기를 잡거나 부족한 땅에 소규모 농사를 짓는 게 대부분이었다. 시간이 가도 형편은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나는 주민들이 농업과 어업 이외의 직업을 가질 수 있도록 기술 교육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강당 한쪽에 작업장을 꾸몄다. 이곳에서 주민들에게 옷을 만드는 기술과 기계로 털옷을 짜는 기술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애광원에서 직업교육을 한다는 소문은 금세 퍼졌다. 직업교육을 받으려 사람들이 몰려와 강당 한쪽에 마련된 작업장으로는 감당할 수 없었다.
나는 해군에 도움을 요청했다. 해군 측에서는 흔쾌히 설계에서부터 건축에 이르기까지 많은 도움을 주었다. 1959년 드디어 섬 안에 2층 규모의 ‘직업보도관’을 세웠다. 직업보도관에서는 전쟁으로 가장을 잃은 부인들과 애광원에서 성장한 아이들, 영남 지역의 청년들이 ‘일인일기(一人一技) 습득’이라는 목표 아래 다양한 직업기술을 익혀 사회에 진출했다.
15년간 직업보도관에서 2500명이 넘는 이들이 교육을 받았다. 전쟁의 폐허에서 도움을 받기만 하던 애광원이 드디어 주민들에게 꼭 필요한 도움을 주는 기관이 됐다는 사실에 가슴이 벅찼다.
***[역경의 열매] 김임순 (7) 거제에 전염병 창궐… 장기려 박사 “제가 갈게요”
1960년대 말 거제도 장승포 일대에 갑작스러운 전염병이 돌기 시작했다. 한 달 사이 20여명이 목숨을 잃었다. 섬 전체에 죽음의 공포가 드리웠고 주민들은 불안에 떨었다.
나는 전염병에 속절없이 당할 수밖에 없었던 열악한 현실에 너무나 속이 상했다. 애광영아원을 처음 시작했을 때 부산의 병원에 데려가던 중 배 안에서 세상을 떠난 홍역 앓던 아기가 생각나 더욱 마음이 아렸다. 거제도에서 아이들을 돌보기 시작한 지 15년이 넘었는데 거제도에는 아직도 병원 한 곳 없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부산복음병원의 장기려 박사에게 전화했다. 장 박사는 아기들이 홍역을 앓던 시절 알게 된 분으로 이후에도 많은 도움을 주셨다.
“장 박사님, 장승포에서 사람들이 전염병으로 죽어가고 있어요. 서울 같은 대도시에서는 한 동네에서 개 열 마리가 한번에 죽어도 난리가 날 텐데, 여긴 섬이라 누구도 관심이 없어요. 어떻게 하면 좋아요?”
수화기 너머 울음 섞인 목소리를 듣고 있던 장 박사는 “내가 곧 가겠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거제도로 달려온 장 박사와 의료진은 전염병이 여름철 조개에 생기는 독성 물질에서 기인한 식중독이라고 설명했다. 장 박사는 이후 토요일마다 애광원에서 밤새 환자를 진료하고 주일에 부산으로 돌아가곤 했다. 부산과 거제도를 오가며 혼신을 다해 치료하는 장 박사의 모습에 나는 깊은 감동을 받았다.
장 박사는 전염병이 물러간 뒤에도 4년 동안 주말마다 애광원에서 섬 주민들을 무료로 진료했다. 하지만 주말 진료만으로는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될 수 없었다. 무엇보다 주말에도 쉬지 못하고 섬에서 고생하는 장 박사에게 미안했다. 그래서 내가 어떻게든 장소를 마련해 보겠으니 병원을 한번 세워보자고 제안했다. 장 박사도 흔쾌히 동의하고, 병원에서 사용할 수 있는 기구들을 구해 주기로 했다. 이렇게 해서 1971년 ‘거제기독병원’이 문을 열었다.
거제기독병원은 내과와 외과, 산부인과, 안과, 피부과, 치과 등 거의 모든 분야에 대한 진료가 가능했다. 부산복음병원을 비롯한 여러 후원기관의 도움으로 수술실까지 갖췄다. 지역 학교 학생들에 대한 종합건강진단을 실시하고 장승포 주민 385가구에 대한 가정보건기록부를 작성하는 등 지역사회를 섬겼다.
지역사회를 위해 열심히 봉사했지만 병원은 적자를 면치 못했다. 가난한 섬 주민들이 병원비를 내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진료실 앞에서 이렇게 좋아하는 주민들을 놔두고 돈 때문에 병원 문을 닫을 수 없었다. 거제기독병원은 거제도에 종합병원이 세워질 때까지 7년간 섬 주민들의 건강을 책임졌다.
1970년대 거제도의 청소년 중에는 초등학교만 졸업하고 중학교 진학을 하지 못한 아이들이 많았다. 배우고 싶어도 배울 수 없는 환경의 아이들이 불쌍해 1970년 2월 거제도 내륙의 오지 구천리 골짜기에 ‘애광기술학교’를 세워 중등 교과과정과 기술을 무료로 가르쳤다. 애광기술학교는 중학교 의무교육이 시작된 1975년까지 운영됐고, 203명의 졸업생을 배출했다.
거제도에는 어려운 경제여건 때문에 부부가 함께 농사를 짓거나 갯가에서 일해야 하는 농어민이 많았다. 이들이 낮 시간에 자녀를 맡길 곳이 없어서 속만 태우는 모습을 자주 봤다. 일을 해야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는데, 자녀 때문에 마음껏 일할 수 없는 환경이 야속해서 속이 상했다. 결국 거제도 애광원은 1970년 3월 장승포 능포리에 ‘애광탁아소’를 세웠다. 주민들이 ‘능포어린이집’이라고 불렀던 탁아소에서는 농어민들이 마음 놓고 일할 수 있도록 아침부터 오후까지 무료로 아기들을 돌봤다.
***[역경의 열매] 김임순 (8) 1978년 애광원 ‘장애아동 보호시설’로 새 출발
세월이 흐르면서 아이들이 하나둘 애광원을 떠나기 시작했다. 양부모를 만나 새 가정으로 간 아이들도 있고, 어느새 대학을 졸업해 자리를 잡은 아이들도 생겼다. 1960년대 200명을 웃돌던 아이들이 차츰 줄면서 1977년에는 60명 정도만 남게 됐다.
애광원을 떠나지 못하는 아이들은 신체 일부에 장애가 있거나 발달장애 등을 가진 아이가 대부분이었다. 혼자 앉거나 걸을 수 없고, 심지어 식사가 불가능한 경우도 있었다. 대부분 지능이 낮아 정상적인 학업 과정을 따라갈 수 없었기 때문에 학교에 보내지도 못했다.
남겨진 아이들을 위해 새로운 결단을 해야만 했다. 결국 우리는 1978년 7월 애광원을 발달장애 등을 겪는 정신지체 장애 아동을 위한 보호시설로 새출발했다. 당시만 해도 정신지체 장애아들은 이른바 정박아라고 모멸적 놀림을 받으며 집에 갇히다시피 사는 경우가 많았다. 애광원이 정신지체 아동을 위한 시설로 바뀌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경남 일대에서 아동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정신지체 아동을 돌보는 일은 부모를 잃은 아이들을 돌보는 것보다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훨씬 어려웠다. 고열과 함께 발작 증상을 보이는 아이들이 있었고, 갑자기 시설에서 뛰쳐나가 길거리를 헤매는 아이도 있었다. 바지에 소변을 보면서도 어떤 상황인지 전혀 인식하지 못하는 아이도 적지 않았다.
고된 돌봄이었지만 이 아이들 역시 처음 장승포 언덕 위 움막에서 만났던 고아들처럼 누군가의 보살핌이 필요한 아이들이었다. 나는 보모들과 함께 직접 대소변을 받아내며 애광원을 꾸려나갔다. 손가락 근육이 굳어 숟가락을 잡을 수 없는 아이들에게는 죽이나 밥을 일일이 떠먹여 주었다. 세수조차 할 수 없는 아이들을 안고 목욕을 시키고, 최대한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려고 노력했다.
빨랫감도 엄청나게 많아졌다. 툭하면 옷이 더러워졌고 기저귀와 턱받이, 이불은 수시로 빨아야 했다. 이때만 해도 아직 세탁기가 보편화되지 않아서 나와 보모들, 그리고 직원들이 모두 손으로 빨았다. 포기하고 싶은 순간도 있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장승포 언덕 위에서 만난 고아들을 떠올리며 참아냈다.
약 2년의 시간이 흘러 아이들에게 어느 정도 익숙해지자 할 수 있는 데까지 아이들에게 제대로 된 교육을 시켜주고 싶었다. 그래서 1980년 초 ‘애광특수학교’를 세웠다. 애광학교는 장애를 가진 아이들을 단순히 수용하고 보호하는 차원을 넘어 일반 교육과 직업교육을 통해 사회적으로 독립할 수 있는 단계에 이르게 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애광학교 개교 당시 애광원에는 모두 79명의 장애아 및 성인 장애인이 보호를 받고 있었다. 이 가운데 14명은 일반 학교에 다녔고, 나머지 아이 가운데 변화의 가능성이 있어 애광학교에 입학한 아이는 28명이었다. 특수교육을 전공한 선생님들을 모셔와 아이들의 손을 잡고 다양한 활동을 하게 했다. 구멍 뚫린 천에 동전과 단추를 넣었다 빼는 동작도 하고, 음악에 박자를 맞추거나 노래를 부르게 하는 음악치료도 시도했다.
교육의 효과는 금방 나타나지 않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아이들은 조금씩 변화하기 시작했다. 대소변을 가리지 못했던 아이가 ‘오줌이야!’라고 큰소리로 말할 수 있게 됐고, 제 힘으로 옷을 입을 수 없던 아이들이 누운 상태로 바지를 입고 상의의 단추를 끼울 수 있게 됐다.
하지만 이때까지도 정신지체 아동에 대한 교육을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지, 지금처럼 하는 것이 맞는지 알 수 없었다. 그저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반복에 반복을 거듭하는 것 외에는 별다른 방법이 없었다. 또 당시 시설도 보잘것없어서 더 좋은 교육을 하고 싶어도 할 여건이 되지 못했다.
***[역경의 열매] 김임순 (9) 막사이사이상 수상 영예에 “주님 감사합니다”
1984년 독일의 애광원 후원회장이었던 어빈 크루제 목사의 초청으로 나는 독일 장애인 교육기관인 프뢰벨 특수학교를 견학할 수 있었다. 장애인을 위한 전문 설비가 완비된 프뢰벨 특수학교의 모습과 시스템은 한마디로 대단했다. 학교를 둘러보다 갑자기 눈물이 쏟아졌다. 갑작스러운 나의 울음에 크루제 목사가 걱정 어린 눈길로 불편한 게 있느냐고 물었다.
“목사님, 부러워서요. 독일의 장애인 아이들은 이렇게 좋은 시설에서 효과적인 교육을 받고 있는데, 열악한 시설에서 생활하는 우리 아이들을 생각하니 마음이 아파요. 원장이라는 소리를 듣는 것도 참 부끄럽네요.”
이 말을 들은 크루제 목사도 함께 눈물을 흘렸다.
애광원은 1987년 프뢰벨 특수학교와 자매결연을 맺었다. 1984년 독일 방문으로 시작된 인연은 1986년 프뢰벨 특수학교 측의 애광원 방문으로 이어졌고, 이듬해 양 기관의 자매결연으로 열매를 맺었다. 애광원과 애광학교 선생님들이 프뢰벨 특수학교에서 장애아동 치료법 등을 배워 더 전문적인 교육을 실시할 수 있게 됐다.
1989년 8월, 나는 예상하지 못한 영예를 얻었다. ‘아시아의 노벨평화상’이라 불리는 막사이사이상 사회지도부문 수상자로 선정됐던 것이다. 막사이사이상은 1957년 비행기 사고로 사망한 필리핀의 전 대통령 라몬 막사이사이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1958년 설립된 막사이사이 재단이 수여해 온 국제적인 상이다. 한국인 가운데는 장준하 선생(1962), 김활란 박사(1963), 장기려 박사(1979)가 앞서 수상했다.
8월의 마지막 날, 필리핀 마닐라에서 진행된 시상식에서 막사이사이 재단은 ‘한국전쟁 이후 애광영아원을 설립해 고아와 정신지체 장애아동을 돌보고, 가난한 섬 주민의 복지와 지역사회 발전을 위한 노력을 인정해 상을 수여한다’고 밝혔다.
나는 당시 수상소감문에 “지난 38년간 힘에 겨운 삶을 살았지만 사랑하는 어린 눈망울들의 평화로운 시선이 용기와 희망과 격려가 됐다. 무엇보다 27세의 풋내기가 얼떨결에 하나님께 서원한 기도가 나를 오늘날까지 이끌었다”고 적었다. 그때도 지금도 변함없이 이 상은 내게 주어진 상이 아니라 오로지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기 위해 세상에 태어난 애광원의 장애아동들과 이들을 위해 이름도 빛도 없이 온 정성을 쏟아 준 직원 및 후원자들에게 주어진 것이라고 생각한다.
애광학교는 설립 후 10년 가까이 1950년대에 지어진 낡은 건물에서 수업을 했다. 건물이 오래되다 보니 장애인 특수학교로서의 기능을 하기 어려웠다. 장애아동들이 쉽게 이동할 수 있고, 각종 교육활동을 할 수 있는 새 건물이 꼭 필요했다.
나는 독일 방문 시 소개받은 건축가 강병근 선생에게 연락해 설계를 맡겼다. 독일에서 장애인 건축을 공부한 그는 아름다울 뿐 아니라 장애인들에게 꼭 필요한 건물을 설계해 줬다. 하지만 문제는 건축비였다. 설계도대로 지으려면 당시 돈으로 18억5000만원이 필요했다.
가난한 사회복지단체인 애광원에는 그만한 자금이 없었다. 하지만 돈이 없다고 그대로 주저앉아 있을 상황도 아니었다. 어떻게든 아이들이 제대로 된 교육을 받게 하기 위한 건축을 시작해야만 했다.
막사이사이상 수상금 3만 달러를 마중물 삼아 건축을 시작됐다. 당시 환율은 달러당 600원쯤이었는데 상금은 1800만원 정도여서 건축비의 1%가 채 안됐다. 그때부터 나는 건축비 마련을 위해 전국 곳곳을 돌아다녔다.
***[역경의 열매] 김임순 (10) 애광학교 신축 위해 정부는 법 바꾸고 기업은 기부를…
막사이사이상 상금 1800만원을 들고 가장 먼저 찾아간 곳은 대우그룹이었다. 김우중 회장에게 “상금 1800만원을 다 내어놓을 테니, 우선 건물부터 지어 달라”고 부탁을 했다. 김 회장은 나중에 갚아도 된다며 건축을 시작했다.
신축 과정에서 법률도 일부 개정됐다. 당시는 사립기관이 정부로부터 건축비 지원을 받을 수 없었다. 그래서 국회의원들을 찾아다니며 호소했다.
“장애 때문에 사회에서 받아주지 않는 아이들이에요. 심지어 부모가 버린 아이들도 있어요. 오갈 데 없는 이 아이들을 국가에서 지원해주지 않으면 이 아이들은 어떻게 살아가란 말입니까. 장애인들이 마음껏 이동할 수 있는 좋은 시설에서 보살피고, 조금 더 효과적으로 가르치려는데 법이 가로막으면 저희 같은 사람들은 어떻게 일을 하란 말입니까. 제발 부탁드립니다. 법을 고쳐주세요.”
결국 국회는 법을 일부 수정했고, 애광원은 정부로부터 건축비 일부를 지원받을 수 있었다. 이화여대 가정대학 동문회, 미주지역 후원회, 성신양회 등 그동안 애광원을 후원했던 모든 기관이 애광학교 신축을 위한 모금에 동참해 주었다. 결국 애광원은 극적으로 3년 만에 2억원을 제외한 나머지 건축비를 마련할 수 있게 됐고, 시공사에 건축비를 지급했다. 잔금 2억원은 대우그룹에서 받지 않기로 했다.
신축과 함께 장애인 전문 시설로 다시 태어난 애광원과 애광학교에서 나는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일어설 수 없을 것 같던 아이가 제 발로 섰을 때, 말을 못할 것이라고 포기했던 아이가 어느 날 갑자기 ‘엄마!’라고 소리쳤을 때, 제 힘으로 옷을 입을 수 없을 것 같았던 아이가 누운 채 제 손으로 바지를 갈아입었을 때…. 문득문득 벅차오르는 감동에 눈물을 흘렸던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하루는 영봉이라는 갓난아기가 애광원 문 앞에 버려져 있었다. 내려가 살펴보니 다리가 심하게 뒤틀린 뇌성마비 장애아였다. 영봉이는 세 살이 되어서야 가까스로 몸을 뒤집을 수 있었을 정도로 발달이 느렸다. 나는 영봉이를 위해 독일에서 특수 물리치료를 전공한 교사를 모셔오고, 매일 팔과 다리, 어깨 등 근육이 굳은 부분에 근육이 되살아날 수 있도록 자극을 줬다. 날마다 강도 높은 치료와 훈련을 4년간 지속했다. 안타깝게도 치료의 효과는 거의 없어 보였다.
하지만 영봉이가 일곱 살이 되던 해의 어느 날, 영봉이를 담당하는 교사가 상기된 표정으로 급히 나를 찾아 왔다.
“원장님, 빨리 좀 와 보세요. 영봉이가 일어섰어요!”
바로 달려가 보니, 다소 비틀거리긴 해도 일곱 살 영봉이가 제 발로 서 있었다. 영봉이와 교사·보모들과 함께 흘린 그날의 눈물이 지금도 선명히 기억난다.
그동안 애광학교를 통해 많은 장애아동들이 교육을 받고 학교를 떠났다. 하지만 나는 졸업 후의 아이들이 걱정됐다. 그래서 성인 지체장애인을 위한 직업재활시설 ‘애빈’을 세우게 됐다. 애빈에서는 애광학교를 졸업한 아이들과 성인 지체장애인 중 사회 진출을 목표로 하는 이들이 직업훈련에 임한다. 저마다 제과와 제빵, 도예와 수공예, 섬유직조와 직물 기술, 서비스 기술 등 다양한 기술을 배운 뒤 자신이 가장 잘할 수 있는 것을 택해 사회진출을 시도한다.
애빈 교육생 가운데 성과가 좋은 이들은 취직을 해 사회진출에는 어느 정도 성공했지만, 막상 이들이 생활할 공간이 마땅치 않았다. 그래서 애광원은 1997년 창립 45주년을 기념해 성인 장애인의 공동생활관 ‘성빈마을’을 세웠다. 5층 건물에는 식당과 숙소가 마련돼 있고, 사회복지사의 도움을 받아 아침마다 자신의 일터로 출근한다. 또 요리 등 자립이 가능한 장애인들은 더 작은 규모의 생활공동체를 만들어 서로를 도우며 독립적인 생활을 한다. 이 같은 그룹홈이 현재 여섯 가정 정도 운영되고 있다.
***[역경의 열매] 김임순 (11) 아이들 장애 딛고 대학 진학·결혼 ‘행복한 사건’이
2000년대 들어 애광원은 지역사회를 섬기며 지역 주민들과 애광원의 접점을 늘려가고 있다. 보건복지부의 특별지원사업으로 시작된 원예치료 프로그램은 지역사회에 개방해 주민 가운데 원예치료가 필요한 이들과 함께 진행하고 있다. 거제도 앞바다가 훤히 보이는 애광원의 풍광을 다른 장애인 및 노약자들과 나누기 위한 산책로도 국민은행의 도움으로 마련했다. 애광원을 찾는 이들이 차를 마시며 거제도의 풍경을 감상할 수 있는 윈드밀 테라스도 만들었는데, 이곳에서는 직업재활시설 ‘애빈’ 훈련생들이 지역주민과 대화를 나누며 서비스 실습을 하고 있다.
시간이 지나면서 행복한 ‘사건’도 많이 생겨났다. 2004년에는 성인 지적장애인 공동체 성빈마을에 거주하며 애빈에서 재활훈련을 하고 있던 최화자씨가 재가 장애인과 결혼했다. 장애를 갖고 있지만 서로를 보살피며 가정을 꾸려가는 모습을 보며 참 뿌듯하고 행복했다. 최씨 부부는 명절 때가 되면 찾아와 근황을 전하곤 하는데, 부부가 함께 장애를 극복하며 지역사회에 잘 적응하고 있는 듯하다.
지난해에는 애광원에서 자란 지영모군이 애광원 출신 지적장애아동 가운데 처음으로 일반대학교에 진학했다. 전남 목포에 있는 세한대학교 전통연희학과에 입학한 영모는 애광원에서 10년간 생활했는데, 어려서부터 혼자서 무언가를 생각하고 해결하려는 성향이 강했다. 9살 때부터 음악동아리 활동을 하는 등 꾸준히 애광학교의 교육을 잘 따라와 준 영모가 대학 생활을 잘하고 있는 것을 보면서 그동안의 수고가 헛되지 않았음을 느낄 수 있어 감사하다. 부디 영모가 앞으로 남은 3년여의 대학 교육을 잘 마쳐 좋은 결실을 맺기 바란다.
2008년에는 거제애광학교 음악동아리 ‘해피니스트’가 독일로 연주여행을 다녀왔다. 해피니스트는 2003년 초 애광학교의 교사와 학생들이 만든 음악동아리다. 어려서부터 사물놀이를 통해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몸에 익히고 성장과 발달에도 도움을 주기 위해 시작했다. 학생들은 그해 6월 22일부터 9일 동안 독일 렘스-무어 통합시의 초청으로 장애인 특수학교인 프뢰벨학교와 중증장애인시설 존넨호프, G-Rock 페스티벌 등에서 공연을 했다. 이 여행은 해피니스트 단원들의 성장에 큰 도움이 됐다. 말로 표현하지 못하는 가슴 속 이야기들을 사물놀이를 통해 표현함으로써 삶의 기쁨을 경험하게 됐다고 생각한다.
2012년 11월 27일은 정말로 뜻 깊은 날이었다. 애광원 창립 60주년 기념일이었기 때문이다. 1952년 11월 7명의 전쟁고아와 함께 시작된 애광영아원은 1970년대 말 지적장애인 거주시설로 바뀌었고, 지역 주민을 위한 어린이집과 장애인 특수학교, 직업재활시설과 중증장애인시설, 공동생활가정까지 6개의 시설을 운영하는 종합사회복지법인으로 발전했다. 돌이켜 보면 어느 한 가지도 쉬운 일이 없었다. 특히 장애인시설이 거의 없었던 1980년대 초 전국에서 모여든 지적장애인들과 씨름하며 학교와 직업재활시설, 중증장애인시설 등으로 세분화해 최선을 다해 장애인들을 섬길 수 있었던 것 자체가 기적이며 하나님의 은혜였다.
2005년부터는 매년 교보생명이 여름방학에 실시하는 청소년자원봉사캠프가 진행된다. 이 캠프는 전국의 청소년들이 모여 거제도애광원을 비롯한 7∼8개 시설에서 봉사의 중요성과 보람 등을 경험하는 행사다. 매년 전국에서 다양한 배경을 가진 청소년들이 애광원을 찾아와 지적장애인들과 다양한 프로그램을 통해 서로 친구가 되곤 한다. 자연스러운 교제는 청소년들의 장애인에 대한 인식의 변화와 자아의식 형성에도 긍정적 영향을 준다. 교보생명처럼 장애인에 대한 사회의 인식 개선활동에 나서주는 후원자들이 있어 얼마나 고마운지 모르겠다.
***[역경의 열매] 김임순 (12·끝) 하나님이 맡기신 아이들과 60년 “감사했습니다”
전쟁고아들과 처음 만난 이후로 60년이 넘는 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줄곧 아이들만 생각하며 평생을 살았는데, 이곳을 거쳐 간 아이들 중에 짝을 만나 결혼한 아이들이 생겨나고, 직업교육을 받은 아이들 중에 장애를 딛고 혼자 힘으로 살아가는 아이들도 제법 많아졌다. 하지만 지금도 나는 애광원의 원칙을 지키려 노력하고 있다.
가장 큰 원칙은 예배다. 애광원 직원 중에는 교회에 다니는 사람도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다. 종교를 이유로 채용에 차별을 두지는 않는다. 하지만 직원들은 우리 시설이 기독교 정신에 입각해 세워졌고, 운영된다는 사실을 채용 전부터 알고 들어온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도 매일 아침 직원예배로 하루를 시작한다. 예배에서는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이, 교회에 다니지 않는 사람들을 위해 배려한다. 나는 지금도 주기도문과 사도신경을 일부러 눈으로 보며 읽는다. 그래야 외우지 못했거나 외울 생각이 없는 직원들이 부담이 없다. 직원예배에서는 하나님 앞에 ‘오늘도 정직하고, 부지런하고, 깨끗한 애광원이 되겠습니다’라고 서원한다. 꼭 전도를 목표로 한 것은 아니지만, 직원예배를 통해 복음을 받아들이는 사람들도 더러 있다. 개인적으로 힘들고 어려운 일이 있을 때, 함께 찬송을 부르고, 서로를 위해 기도하는 모습이 때로 큰 위로가 되는 모양이다. 그렇기 때문에 애광원에서는 아이들을 위해서도, 우리들을 위해서도 찬송과 기도가 떨어지면 안 된다.
시설 밖에서 생활하는 아이들은 선생님이 출석하는 교회나 차량과 인솔자를 보내주는 교회에서 주일 예배를 드린다. 주일에는 아이들 옷차림과 행동에 더 신경을 쓴다. 교회에서 상처를 받게 할 수는 없으니까. 옷을 잘 차려입고 교회에 가서 바른 태도로 예배를 드리면 장애아동이라는 사실을 한 눈에 못 알아보는 교인들도 꽤 많다.
우리는 최선을 다해 지적장애아동을 기르고 가르쳐 왔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지적장애인 시설은 인력이 너무나 부족하다. 현재는 장애인 6명당 1명의 보모나 사회복지사를 지원받는다. 선진국에서는 2∼3명당 1명의 인력이 지원된다고 들었다. 지적장애아동은 교사가 잠시만 자리를 비워도 사고를 당할 수 있기 때문에 한시도 눈을 돌릴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공무원들이 하루만 와서 같이 살아본다면 우리의 현실을 알 수 있을 텐데, 대개의 정책이 그저 책상에서만 결정되는 것 같아 안타깝다. 최소한 장애인 3명당 1명의 인력이 지원된다면 평생 장애의 그늘 속에 살아가야 할 우리 아이들이 조금은 더 안전하게 생활할 수 있을 것 같다.
부족한 정부 보조금도 문제지만, 더 큰 문제는 후원금에 대한 소득공제 혜택이다. 보조금으로는 애광원 운영비의 70%를 충당하기에도 빠듯하다. 그래서 후원금으로 버틸 수밖에 없는데, 우리 같은 기관은 후원금의 일부만 소득공제 혜택이 주어진다. 후원자나 후원기업들이 100% 소득공제 혜택이 주어지는 기관에 더 몰릴 수밖에 없는 이유다. 이것은 우리 같은 시설 원장들의 가장 큰 요구이자 절박한 현실이다.
장애인 지원시설에서 일하는 ‘후배’들에게는 ‘우체통 오뚝이’가 되라는 얘기를 하고 싶다. 칭찬의 목소리도 있고, 비난의 목소리도 있겠지만 모든 소리를 가리지 않고 받아들이는 우체통처럼 살라는 얘기다. 그리고 누가 때려도 반드시 일어나 제자리로 돌아와야 한다. 물론 스스로 깨끗해야 함은 설명할 필요 없는 전제다. 그래야만 우리의 도움이 꼭 필요한 장애인과 함께 살아갈 수 있다.
장승포 언덕에서 처음 고아들을 만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단 한순간도 하나님 은혜 없이 지나올 수 없었다. 이제 남은 시간도 하나님께서 내게 맡겨주신 아이들을 위해 최선을 다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