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인터넷
꽃보다 아름답다고 했다.
스물아홉살 처녀였다. 가을이 깊어가는 시월의 어느날,200통의 청첩장을 한아름 받았다. 신부 아무개, 가만히 보니 자신의 이름이었다.11월18일이라는 결혼 날짜도 박혀 있었다. 한 남자의 프로포즈였다. 처녀의 가슴은 콩닥콩닥 뛰었다. 곧 ‘그래, 이 남자와 결혼하자.’고 마음먹었다.5일 후였다.
처녀는 갑자기 교통사고를 당해 의식을 잃었다. 한달 후에 가까스로 깨어나보니 자신의 몸은 온데간데 없었다.
구필화가 한미순씨
미동도 할 수 없는 전신마비,
지옥보다 더한 고통의 삶이 시작됐다.
22년 세월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손가락 하나 꼼짝할 수 없다.
혼자서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입으로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리는 것.
‘가난하면 어떠랴
예쁘지 아니하면 어떠랴
있는 그대로 꾸밈없이 살고 싶어서
뒤엉킨 잔가지 잘라내고
호화로운 부귀영화도 싫어
단순하여 성숙하다
발가벗은 순백의 영혼은
채워주실 여백을 남겨두고∼’
시인이자 구필(口筆)화가로 잘 알려진 한미순(51)씨.
그동안 입으로 처절하게 토해낸 시집과 수필집만 다섯권,
또 이빨이 아프도록, 시리도록 그려낸 그림을 모아 두번의 개인전까지 열었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 살면서 오로지 한 조각 삶의 빛을 밝히며 살아왔다.
사지가 멀쩡한 사람조차 이루기 힘든,
전신마비 장애인이 해낸 결과물들이기에
세상 그 무엇과 바꿀 수 없는 소중함이요 아름다움이다.
한씨는 오는 11월1일 구원의 빛을 또 한번 밝힌다.
자신의 3번째 개인전(서울 인사동 인사갤러리,7일까지)을 여는 것.
첫번째 서양화전이자 8년만의 일이어서 더욱 의미가 있다.
그래서 전시 제목을 ‘자연과 삶의 숨소리’라고 했다.
지난 26일 오전 서울 거여동의 한 아파트.
초인종을 눌렀더니 “그냥 들어오세요.”라는 소리가 문 밖으로 희미하게 들려온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이쪽 방이에요.”라는 목소리가 가냘프게 다가왔다. 소리나는 쪽으로 갔더니 병원에서 볼 수 있는 1인용 침대가 눈에 들어왔다. 그 옆에서 한씨는 휠체어에 의지해 컴퓨터 자판을 어렵게 누르고 있었다. 손을 쓸 수 없으니 입에 문 붓대를 사용했다. 한씨는 ‘종료 버튼’을 막 누르고 나서야 “어서 오세요.”라고 손님을 맞이했다. 그러면서 휠체어 바퀴에 달린 브레이크를 풀어달라고 했다. 도우미 아줌마의 행방을 물었더니 방금 전 미장원에 갔단다. 혹시 휠체어가 움직일까봐 아줌마가 브레이크를 잠그고 외출했음을 직감했다. 문득 건강한 게 오히려 민망스러워진다.
잠시 사진 포즈를 취해달라고 요청했다.
“오른손을 오른쪽으로 옮겨주세요.” 손가락 피부가 약간 창백했으나 나이에 비해 무척 고와보였다.“전시 준비하느라 요즘 무척 바쁘시지요.”라고 했다. 지체없이 돌아온 대답이 “뭐, 입만 바빠요. 여기저기 전화하느라, 가볼 수도 없고….”였다.
이때였다. 전화벨이 울렸다.
“저기 전화 좀 갔다줄래요.”
무선 전화기를 들고 와 한씨의 귀에 대주었다. 한 2분쯤 통화했을까. 팔이 약간 불편해짐을 느낀다.
‘20년 넘게 전신마비로 살아온 고통은 정말 오죽했을까.’라는 생각이 머리를 스친다.
“제 그림은 손을 입으로 대신하는 삶이지요.
삶은 그림으로 승화시키는 예술이고요.
처음에는 한국화였지만 이번 전시는 서양화입니다.”
한국화에서 서양화로 방향을 틀게 된 까닭이 도우미에게 부담을 덜 주기 위해서라는 설명은 정말 의외였다.
하긴 누군가가 옆에서 물감칠해주고 붓을 입에 물려줘야 비로소 그림을 그릴 수 있으니 말이다.
도우미들도 처음에는 봉사한다는 마음으로 시작하지만 나중에는 대부분 짜증을 내더란다.
8년동안 개인전을 열지 못하게 된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고 덧붙인다. 이번 전시에는 주변과 일상에서 흔히 접하는 평범한 풍경, 즉 꽃·소나무·물·벼·사람 등을 소재로 했다. 그 안에 살아 있는 예쁘고, 맑고, 고요하고, 향기로운 느낌을 캔버스에 살려 오래도록 곁에 붙잡아두어 아름다운 삶의 합창을 하고 싶어서였다. 전시작품은 모두 38점.
미술평론가 정재규씨는
“입에다 붓을 물고 물감들을 배합해
사물의 형태를 형상화하는 그의 모습을 떠올리면
참으로 정신력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면서
“소나무 그림에서는 풍파를 이겨낸 그의 강인함이 배어 있고,
고개 숙인 벼이삭에서는
열매의 성숙함을 엿볼 수 있다.”고 평가했다.
아울러 원근감과 음양의 심도있는 구사는 감상자들의 마음을 사로잡는다고 전시 팸플릿을 통해 설명한다.
“교통사고는 한 순간에 척수손상 사지마비로 손과 발, 전신을 꽁꽁 결박했지요.
입에 붓을 물고 그리는 그림은 캄캄한 세상에서 한줄기 빛이자 유일한 자유였습니다.”
화제를 바꿨다. 가을날씨가 좋은데 바람쐬러 가끔 나가느냐고 물었다.“도우미 아줌마 눈치봐야지요.”라고 했다. 그러면서 사연 한토막 들려준다. 수년 전 상도동 지하방에 살 때였다. 극동방송을 통해 도우미를 요청했다. 스물한살의 앳된 처녀가 왔다. 하지만 하루만에 한씨를 방치해놓고 사라졌다. 소변이 마려웠지만 꼼짝할 수 없었다.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누워서 소리치는 일뿐이었다.“사람 살려요.”라고 거듭 외쳤다. 물론 전화도 걸 수 없다. 결국 죽기 직전 119요원에 의해 가까스로 목숨을 건졌다. 이후 도우미는 자신에게 하늘 같은 존재였다.
한씨는 한 달에 한 번 도우미 도움으로 ‘기독문학회’ 모임에 나가는 것이 유일한 외출이다. 또 매년 9월 거창고교 예술제에 초대받아 지방나들이를 한다. 자신의 자전 에세이를 읽은 거창고 교장선생의 배려 덕분이다. 이때마다 자연의 아름다움, 또 이웃과 더불어 함께 살아야 할 가치를 소중하게 느끼고 돌아온다.
한씨는 1989년 세계 구족화가 협회에 가입했다. 리히텐슈타인에 본부가 있으며 현재 전세계 회원은 모두 500명. 이중 한국인 정회원은 5명이다.
한씨는 이 협회에서 받는 돈으로 겨우 생활하고 있다. 그나마 돈푼을 아끼고 아껴 이번 전시비용을 충당했다.
한씨의 고향은 충남 부여.
가난한 농가의 2남3녀 중 차녀로 태어났다. 장학생으로 중학을 입학했지만 가난 때문에 고교진학을 포기했다.20세에 서울로 올라와 달동네에 혼자 살면서 모 전자회사에 취직했다. 배움의 열정을 버리지 못해 8개월동안 열심히 공부해 대입 검정고시에 합격했다. 이어 선생님이 되고 싶어 방송통신대 초등교육과를 졸업했다.
그러던 84년 10월 결혼과 학교 선생, 피아노 교습소 운영 등 새로운 삶의 의욕으로 꽉 차 있을 무렵에
교통사고로 모든 것을 한꺼번에 잃고 말았다.
소망이 무엇이냐는 물음에 “단 하루만이라도 남의 도움 없이 살아보는 것”이라고 했다.
아울러 가슴이 따뜻한 도우미와 평생 같이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면
작품활동도 저절로 할 수 있지 않겠느냐며 애써 웃었다.
“전시 끝나면 이빨 치료를 해야 돼요. 그동안 손 역할을 하느라 많이 망가졌거든요.”
km
첫댓글
현재의 모습에 늘 감사하면살고 있습니다
맞습니다.
현재의 모습이 정말 소중하고 감사한 것 같습니다.
오늘도 행복한 하루 보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