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아버지 이야기
아버님의 어린 시절
우리 아버지가 돌아 가신지도 벌써 44년이 지났다
이제 한 달만 있으면 아버지 제삿날이다
1979년 3월19일, 음력으로 2월21일이 기일이다
생일은 음력으로 1919년 8월20일이시다
할머니 뱃속에서 들으니 너무 시끄러워서 나왔다고 하시며
곧잘 농담을 하셨다. 3.1운동이 있었던 기미생이라는 말이다
오늘 갑자기 돌아가신 아버지 생각이 났다
환갑되시던 해 가을 음력8월20일이 생신이신데
생신을 딱 6개월 남겨 놓고 돌아 가셨다
아버지 고향은 황해도 평산군 고지면 완정리 563번지다
현재의 행정구역으로 하면 황해남도 봉천군 봉암리다
그 곳에서 4남4녀 중 3남으로 태어나셨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셔서 형제들이 함께 서당엘 가면
제일 먼저 글을 깨우치셨다고 한다
붓글씨를 아주 잘 쓰셨다
원래 꽤 잘 살던 집안이었는데
할아버지께서 집안 일에는 별로 관심이 없으시고
팔난봉꾼으로 사셨던 관계로 가세가 많이 기울었다고 한다
결국 46세에 소갈병으로 돌아가셨다고 한다
지금으로 하면 당뇨병으로 돌아 가셨다는 말이다
맏이인 큰아버님께서 집안을 이끄시느라 고생을 많이 하셨다
동생 일곱을 건사하시느라고 본인은 잘 보살피지도 못하고
동생들 챙기시느라 공부도 제대로 못하셨다고 한다
결국은 장사로 성공하셔서 큰 재산을 일구셨다
형제들 중 아버지께서 제일 싹수가 보인다고 생각해
고향에서 소학교를 마친 아버지만 유학을 시켰다고 한다
고지면 누천리에 있는 소학교를 마치고 해주로 유학을 해서
해주고보를 마치셨다고 한다. 나머지 형제들은 농사를 지었다
고지면 누천리에는 아버님 고모댁이 있어 거기서 학교를 다니셨다
아버님의 청년기 - 만주에서의 생활
이후에 이모부가 하셨던 개성 건축사무소에서 일을 하시게 되고
거기서 이런저런 일을 배운 후에 만주로 가셨다고 한다
당시 만주국을 세운 일본이 승승장구하던 시절
만주척식회사라고 우리나라에 있었던 동양척식회사와 같은
토지관리를 주로 하는 회사에 입사하셔서 일을 하셨다고 한다
요즘으로 치면 우리나라의 LH공사쯤 되는 회사였을 것이다
지금 중국의 장춘이라고 불리는 신경이라는 곳에 본사가 있었고
아버님은 주로 지방의 새로 편입된 땅의 측량을 하는 일을 하셨다고 한다
항일투쟁을 하던 중국인 들의 습격이 잦아서 매우 위험한 일이었다
수시로 마적떼들이 습격을 해서 일본군인들의 호위를 받으셨다고 한다
여마적들도 많았다고 하는 말씀을 들은 기억이 난다
이에 따라서 대우가 엄청 좋아서 300원씩을 받으셨다고 들었다
조선의 교사 월급이 15원인가 하던 시절이고
쌀 한가마니가 5원쯤 했다고 하니 꽤 큰 돈이었던 셈이다
그 돈을 고향집으로 부쳐서 큰아버님께서 땅도 많이 사시고
형제들 집도 새로 짓고 그렇게 집안이 피어났다고 들었다
면내에서는 땅을 제일 많이 가졌을 거라고 큰아버지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팔아 먹었던 땅을 아들이 다시 산다고 할아버지께서
매우 좋아 하셨고, 동네방네 자랑을 하고 다니셨다고 한다
둘째 큰아버지께서 겨울 농한기 때 동네 친구들을 이끌고
만주 아버지가 일하시던 곳에 가셔서 잘 놀고 왔다고
살아 생전에 집안네가 모이면 늘 말씀하셨다.
평생에 그렇게 맘놓고 돈쓰고 잘 놀아본 적이 없다고 하셨다
동생 덕분에 실컷 돈 써보고 잘 놀아봤다고 하셨다
오신 분들께 모두 새 신발도 사 드렸다고 했다
신발이라고도 하지 않으시고 늘 지카다비라고 하셨다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실 때에도 아버지가 주고가신 용돈을
이불 밑에 깔고 이거 우리 셋째 아들이 주고간 돈이라고 하시며
아버님이 보고싶다며 편안하게 눈을 감으셨다고 한다
넷째 아들인 작은아버지 결혼식 때도 따로 새 집터에
새 집을 지어서 선물했다고 들었다
어려서 아버지 어머니한테 들은 만주생활이야기가 생각난다
태평양전쟁이 끝나기 얼마 전에는 치치하얼이란 곳에서 사셨는데
구와상이라고 불렀던 일본인 친구와 아주 가깝게 지냈다고 하시며
늘 그 분 이야기를 하셨다. 가고시마에서 온 일본인 단짝 친구.
어머니는 일본식으로 찌찌하루라고 발음하셨다
나중에 찾아보니 지도상으로 거의 러시아에 인접한 고장이었다
치치하얼이랑 북한을 한 눈에 볼 수 있는 구글어스지도
살아생전에 식성도 일본식이셨다
아주 싱겁게 드셨고 김도 마른 채로 구워서 간장에 찍어 드시고
멸치도 기름없이 살짝 볶아서 고추장을 찍어서 드셨다
나도 마찬가지로 김과 멸치를 그런 식으로 먹는게 참 맛있고 좋다
현지 중국인 하녀와 하인들을 부리며 사셨다고 한다
돌아가신 어머니도 그 시절을 늘 그리워 하셨다
버리고 온 집안살림이랑 집이랑 그런 걸 늘 아쉬워하셨다
그리고 그 곳에서 첫째 아들을 낳았는데 죽었다고 하셨다
날씨가 너무 추워서 그랬지 않았나 싶다고 하셨다
나중에 누나와 나 사이에 일산에서 낳았던 두번째 아들도
6.25사변 중에 추위로 얼어 죽었다는 말씀을 하셨다
일본의 패망과 귀국 후의 생활
일본이 패망하리란 걸 직감하시고 회사에 사표를 내고
부지런히 귀국을 하셨는데, 이미 안동(현재의 단동)에 오니
일본돈의 환전이 막혔다고 하셨다. 돈이 휴지가 된 것이다.
어렵게 어렵게 고향에 도착하신 부모님
노동당의 강요로 아버지는 평산군 노동당위원장
그리고 어머니는 평산군 여맹위원장을 맡게 되셨다
그런데 세상이 하루아침에 빨갱이 세상으로 뒤바뀌다 보니
사는게 사는게 아니었다고 한다
아버지 소유의 뒷산에 가서 낙엽을 쓸어 오는 것조차 제지를 받고
평소에 머슴살이 하던 사람들이 완장을 차고 설쳐대는데
이건 아니다 싶어서 바로 밤으로 줄행랑을 치셨는데 그게 1947년 봄
당시 굴레방다리 산7번지라고 하는 곳에 단칸방을 얻어 생활하시며
어렵게 하루하루를 이어가던 중 졸지에 테러를 당하시게 된다
서북청년단 패거리 들에게 빨갱이로 지목되어 거의 죽다 살아나셨다
이 얘기는 내가 철이 든 다음에 아버님 돌아가신 후에
수원사시는 큰아버님한테 들은 얘기다.
너 나 아니었으면 세상구경 못 했을 수도 있다고 하시며...
아버지는 이 일에 대해서는 절대로 얘기하지 않으셨다
함께 월남하셨던 큰아버지께서 어렵게 주선하여 이북에 남아 계셨던
어머니도 누나를 등에 업고 소장수를 따라 월남하셨다고 한다
병구완을 위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고 한다. 1947년 가을.
그 때 이북에 남으신 외할머니께서 소식을 듣고 한번 다녀 가셨다는데
사위 모습을 보고 평생 한이 되셨을거라고 어머니께서 늘 걱정하셨다
그러면서 우리가 지금 이렇게 잘 사는 걸 보여드리고 싶다고 하셨다
둘째 큰아버지와 막내 작은아버지는 고향에 남으셨고
나중에 6.25가 터졌을 때 두 분은 인민군으로 징집되고
이남의 아버지는 경기도청 양곡관리관으로 권총을 차고 다니시며
이곳의 군인아닌 군인노릇을 하셨다고 들었다
그 당시 아버지 신분증명서를 유품을 정리하던 중 발견했다
9.28수복 때 올라가서 고향의 살림살이를 대충 정리하고
1.4후퇴 때 할머니와 큰아버지 큰 딸, 그리고 출가한 고모 세 분
그리고 둘째 큰아버지 부인과 두 아들만 남고 나머지 식구들은
모두 월남을 했다. 얼마 안 있다가 곧 수복할 거라고 생각하셨다니...
둘째 큰어머니는 당시 만삭이라서 못 내려오셨다고 하였다
어머니는 8남매의 맏이신데 달랑 혼자만 월남하셨다
그래도 외할머니 원래 고향이 경기도 일산이시라서
그 곳에 사시던 외가 친척 식구들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나도 어려서 어머니를 따라 거기가 외갓집인 줄 알고 쫓아 다녔다
월남 후의 경기도청 공무원 생활
어쨌거나 월남한 후 아버지는 어렵게 어렵게 시험을 치러
경기도청 산업국 양정과에서 일을 하시게 됐다
당시만 하더라도 쌀농사가 주산업인 우리나라 경제구조상
곡식을 다루는 부서가 중요한 부서였을 터이다
6.25가 터졌을 때는 이미 경기도청 직원으로 일하실 때이다
전쟁 중 경기도청이 수원에 있던 화성군청 자리에서 임시로 일했는데
그 당시에 내가 수원 신풍동에서 태어났다
서울이 완전히 수복되면서 북아현동 능안에 있는 관사로 이사했다
일본식으로 지어진 적산가옥 집들이 즐비하던 동네였다
그 곳에서 나의 유년기를 보냈다
명절 때면 곳곳에서 선물이 쇄도했다
경기도의 정미소와 양조장, 싸전 등을 관리하는 직책이었으니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누군가가 우리 집에 와서 마당 한 쪽에 닭장도 크게 짓고
병아리도 들여놓고 쌀겨같은 사료도 가마니로 쌓아놓고 갔다
그 닭장 공사하던 광경이 눈에 선하다
나중에 나는 닭들이 낳아놓은 계란을 한 개씩 들고가서
동네 구멍가게에서 눈깔사탕을 바꿔 먹었다
내가 5~6세 쯤의 일이다
들고가던 계란을 떨어뜨려 깨진 걸 보고 쪼그리고 앉아
깨진 계란을 아까워하던 내 모습이 뇌리에 남아있다
그러다 보니 집안의 대소사는 대충 다 아버지 몫이 됐다
막내고모 결혼식도 대충 아버지께서 주선을 해서 치렀고
결혼 이후에는 우리 집에서 함께 살았다
고모부는 당시 경무대 경비과장을 했던 경찰이셨다
결혼 전부터 북아현동의 우리집에서 출퇴근을 하셨다고 하는데
내 기억에는 전혀 남아있지 않다
종친회에서 간부모임을 할 때도 우리집에서 자주 모였다
처음 족보를 만들 때에도 우리집에서 만들었다
경기도청 퇴직 후 연탄사업
그러다가 아버지께서 퇴직을 하시고 새로 사업을 시작하셨다
처음엔 분탄장사로 시작해서 나중에는 연탄공장을 하셨다
신촌로타리 서강대 맞은 편에 사업장을 마련하고
석탄을 산더미처럼 쌓아놓고 파셨는데 꽤 괜찮은 사업이었다
거기까지 기차 화물차가 들어왔다
산림녹화정책으로 연료가 장작에서 연탄으로 바뀌는 과정이었다
강원도 탄광에서 열차떼기로 탄을 사다가 넘기는 식이었는데
운반하는 증기기관차 앞의 차 번호가 찍힌 사진이 굴러다녔다
그 때쯤 해서 능안의 일본집에서 한성학교 옆의 한옥으로 이사를 했다
우리시대 아버지들은 누구나 다 고생을 하셨을 것이다
자식들은 많고, 살기는 힘들고 고민도 많으셨을 것이다
농사꾼 집안에서 태어나, 일제 하의 만주국에 가서 일하셨고
조국분단의 와중에 온갖 고초를 겪으신 후 안정된 공무원 생활
이후 개인사업을 하시며 생활이 안정됐던 몇 년을 사셨다
탄장사를 하실 때는 수금을 하시느라 전대를 차고 다니셨다
출장을 다녀 오셔서 전대를 풀어 놓으면 돈다발이 우수수
방안 가득 현찰꾸러미가 쏟아졌다
온 식구가 둘러앉아 꼬맹이들까지 돈을 세었다
돈 셀 때 손에 물을 묻히는 도구도 몇 개 집에 있었다
내가 지금까지도 돈을 세는 건 자신이 있다
돈다발을 묶는 한지끈이 집안 여기저기 굴러 다녔다
다음날이면 그 돈을 큰 가방에 넣어 굴레방다리 상업은행으로 갔다
명절 때면 지점장이 우리집에 인사를 왔고 선물을 보냈다
꿀항아리도 왔고 굴비두름도 왔다
집에는 누나 가정교사와 식모누나도 있었다
내가 5학년 때는 우리 집에서 과외를 했다
과외선생이 기혼이었는데 아예 우리집에서 살림을 하고 살았다
그리고 나를 간판타자로 내세워 아이들을 끌어 들였다
새로 아이들이 오면 그 아이와 엄마가 보는 앞에서
나더러 페이지를 정해 주고 그 부분을 외워보라고 했다
그렇게 소문을 내고 아이들을 끌어 모았다
셋이서 시작했던 과외학생이 날로 불어났다
어중이 떠중이 오합지졸의 과외그룹으로 전락했다
나중에는 15명까지 과외학생 들이 불어났다
그게 너무 싫어서 내가 그만두겠다고 자청했다
과외선생 부인의 배가 남산만 하게 불렀을 때였다
우리가 공부하는 옆에서 둘이서 부부싸움도 하고 그랬다
부인의 성미가 아주 고약했다고 기억한다
나를 설득하려고 두 부부가 나를 붙들고 늘어졌다
하는 수 없이 내가 먼저 다른 과외그룹으로 옮겼다
담임선생의 처남이 하는 다섯명의 과외그룹이었다
서울대 사범대 수학과에 재학했던 학생이었다
상위그룹에 속하는 아이들이 멤버였다
그러자 할 수 없이 과외하던 애 들 중의 한 아이네로 옮겼다
나중에는 이대입구 쪽으로 옮겨가서 전문 과외교습소를 했다고 들었다
홍씨 성을 가진 굵은 테 안경을 쓴 부산출신이었다
연이은 사업실패와 직장생활
그렇게 순탄하게 굴러가던 사업이 하루아침에 곤두박질쳤다
어느 해에 큰 물이 들어서 운송 중이던 탄이 엉망진창이 되고
반은 녹아내리고 남은 찌꺼기도 거의 쓸 수 없게 되었다
그 해 따라 많은 양을 주문하시는 바람에 손해가 컸다
그리고 화물차를 깨끗하게 세척해서 반환을 해야했는데
그 경비가 또 만만치 않았다고 한다
평상시 같으면 양옆으로 막음판만 열면 자동으로 탄이 쏟아지는데
온통 다 늘어 붙는 바람에 일일이 사람을 사서 손으로 긁어내고
긁어낸 후에도 다시 세척을 해서 반환을 했다고 한다
결국 연탄사업을 접고 다른 업종으로 갈아타게 됐다
하시던 사업을 인계받은 것은 삼표연탄이었다
이후 삼표연탄은 대박을 쳤다
새로 하신 사업은 태평양화학 화장품 용기 뚜껑에 무늬를 넣는 사업이었다
금박, 은박, 다른 각종 색깔로 글자와 무늬를 새기는 사업이었는데
당시 태평양화학은 같은 고향 출신인 서성환씨가 주인이었고
또 이 용기 사업도 같은 고향사람과의 동업이었다고 한다
그게 말썽이었다. 그 사람에게 막대한 자금을 투자하고
결국 사기를 당한 것이었다. 그 사람은 몇 개월 징역을 살았다
거의 빈털터리가 된 아버지는 홧병으로 당뇨를 앓게 되고
적십자병원에 입원까지 하시게 된다
뭐가 안 풀리려니까 한 번, 두 번, 그렇게 살림이 기울었다
이후 통인시장 끄트머리에 있는 집을 사서 이사를 하게 되고
집 앞쪽을 개조해서 가게를 3개 만들었다
하나는 어머니께서 식료품가게를 하셨고 나머지 두 개는 세를 주었다
그 중 하나는 양장점이었다
그 때가 내가 중학교에 막 입학했을 때였다
전에 살던 집에 비해 장소도 협소하고, 여러가지로 불편하였다
식모도 두고 편안하게 생활하시던 어머니도
남대문시장으로 물건을 떼러 다니시느라 고생을 많이 하셨다
물건을 떼서 효자동으로 오는 전차로 실어 날랐다
나도 몇 번 함께 가서 물건을 날랐던 기억이 난다
아버지는 매일 아침마다 앞집 싸전 아저씨와 인왕산엘 가셨다
거기 만수암 옆에 있던 샘가에서 매일 냉수목욕을 하시고
등산도 하시고 그랬다. 나빠졌던 건강이 많이 회복되셨다.
앞집 아저씨는 함경도 분이셨는데, 처자식을 모두 북에 남겨두고
단신 월남해서 새로 가정을 꾸리신 분이셨다. 아버님과 또래셨다.
나보다 대여섯살 어린 딸이 하나 있었는데,
매일 우리집에 와서 숙제도 하고 함께 놀았다
병을 대충 추스리신 아버지가 새로 취직을 하셨다
5남매나 되는 자식들을 건사하려면 별 도리가 없었을 것이다
고려개발이라는 회사에 입사하여 현장소장으로 일을 하셨다
안동댐공사, 마산형무소 터파기 공사 등이 아버지가 하신 일이다
늘 현장에서 일을 하셨고 한 달에 한번 정도 집엘 오셨다
그렇게 몇 년이 흐르고 다시 혼자서 독립을 하셨다
마지막 재기의 몸부림, 그리고 실패
72년에 원주 인근 문막이라는 곳에 가서 제방공사를 하셨는데
아주 큰 공사였다. 여름방학 때 동생들과 갔었는데 어마어마한 공사였다.
지금 생각해보니 삼부토건의 하청이었던 듯하다
공사장에 삼부토건의 커다란 안내판이 서 있었다
그해 여름 아주 큰 물이 났다. 공덕동까지 물이 들이찼다
아버지가 거의 완성했던 제방이 다 무너지고 떠내려갔다
다시 홧병이 도졌고, 집안은 거의 파산했으며
그해 가을에 서울대학 병원에 입원을 하셨다
이어서 1973년에 마지막으로 재기의 몸부림을 치셨다
지금의 논현동인 당시 강남개발현장에서 집을 짓기 시작하셨다
무려 다섯채의 집을 짓기 시작했는데 돈이 꽤 들었다
여기저기서 돈을 끌어 모으고 대출을 받고...
나중에 누나 출산하던 날 내가 직접 가서보니 대단했다
줄을 서있던 부동산과 새 집을 짓느라 와글와글하던 그 광경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한남대교를 막 건넌 지점이었다
사방이 온통 시뻘건 흙바닥이었던 시절이다
청담동이 종점인 버스를 타고 갔었다
아침에 기숙사로 걸려온 누나의 전화
몸이 좀 이상하다 애가 나올 거 같다
아침을 먹다말고 서울로 뛰었다
당시는 전화가 아주 귀했던 시절인데
여기저기로 이사를 다니느라 집에 전화가 없었다
거기 가서 아버지한테 누나 병원비를 타서 들고
다시 수원으로 내달렸다. 누나는 이미 아들을 낳은 뒤였다
그 녀석이 지금 대전에 있는 모 회사의 대표이사를 한다
나의 대학 후배이고 수의학을 전공했다
그런데 또 일이 터졌다
집을 짓던 곳에서 불이 났던 것이다
그 것도 다섯채 분의 자재를 쌓아놓은 곳에서 페인트에 불이 붙었다
거기서 숙식을 하던 인부들이 술을 먹고 담배꽁초를 버린게
불씨가 되어 쌓아놓은 자재들과 집이 홀랑 다 탔다고 했다
거기다가 석유파동으로 사채동결이 되고 경기가 가라앉고
주택경기도 따라서 가라앉고 말았다
결국 별 소득없이 급매로 겨우 지은 집들을 처분하고 손을 털었다
마지막으로 해보려던 아버지의 주택사업이 막을 내린 순간이었다
그 이후로는 집을 사서 수리해서 되팔고 다시 이사하고
그러는 과정이 이어졌다. 양도소득세가 없던 시절 얘기다.
내가 입대할 때 살았던 용강동에서 한번 옆으로 이사를 하고
다시 작은아버지가 소개한 가리봉동으로 이사를 했다
내가 첫 휴가를 나왔을 때인데 그 집을 찾아가느라 애를 먹었다
아래 채에 다섯가구를 월세를 주고 2층에서 사는 구조였다
골목길에서 보면 우리가 살던 집이 1층이었고
아래채로 가려면 가파른 계단을 타고 내려가는 구조였다
축대를 쌓아서 세를 주고 살라고 일부러 그렇게 지은 집이었다
화장실에 들어가서 내려다 보면 아래가 까마득했다
그러다가 막판에는 구로4동 동회 뒤로 이사를 하고
내가 제대했을 적에는 그 곳에서 건재상회를 하고 계셨다
그 곳도 내가 제대를 한 후에 처음 가 본 집이었다
그 곳에서의 이야기는 전에 한번 써올렸던 적이 있다
아버님의 죽음
그렇게 76년 11월 가을 내가 제대한 후 2년 여를 더 사시고
병환이 깊어져 79년 봄이 채 오기도 전인 3월19일에 돌아 가셨다
환갑을 불과 6개월 남겨놓은 싯점이었다
아버님 돌아가셨을 때가 내가 사회생활을 딱 1년 했을 때였다
주위에서 모두들 그랬다. 돈 없으면 화장하라고...
그 말이 많이 섭섭했고 그리고 슬펐다
당시 내 월급이 14만원이었는데, 악착같이 돈을 모았다
그 때 삼성이나 현대같은 재벌그룹 대졸초임이 13만원이었다
영업부라서 출장을 가면 출장수당을 몇 천원씩 받았다
기혼인 영업사원 들이 기피하는 출장을 도맡아서 다녔다
지방출장을 가면 내게 접대를 한 고객들이 영수증을 넣어줬다
올라가서 접대비로 올리고 타 먹으라는 뜻이었다
당시에는 병아리를 넣기만 하면 돈이 되던 시절이었다
원종계 부화장 영업사원 들의 위세가 하늘을 찌를 때였다
종계업자, 부화업자들을 찾아 전국을 누비고 다녔다
영업이랄 것도 없었다. 그냥 주문을 쓸어담으면 됐다.
그렇게 1년을 일하고 나니까 통장에 74만원이 모였다
나와 어머니, 그리고 동생 셋이 먹고살고 남은 돈이었다
한 평에 5만원씩 주고 7평을 사서 아버님을 잘 묻어 드렸다
그 공원묘원이 막 새로 생겼을 때 일이다
우리 아버님 매장 순위가 146번이다. 거의 최고참이시다.
묘소 위치도 좋고 아래쪽으로는 작은 호수도 있고
아늑한 산 자락에 숨어있어 아주 좋은 위치라고 생각한다
뒷산 너머로는 공수특전단 훈련장이 있다
그리고 나머지 돈과 부조금으로 장례을 치루었다
장례가 끝나고 나니 통장잔액이 거의 남아있지 않았다
그렇게 아버님을 경기도 광주 모현에 있는 한남공원에 모셨다
17년 후에 돌아가신 어머님을 그 옆에 합장해 드렸다
돌아가신 어머님께서 내게 귀에 못이 박히도록 말씀하셨다
너나 네 아버지는 관록문 먹을 팔자라고 하더라
타고난 팔자소관은 거스를 수 없는 법이다
너는 절대로 사업은 하지 말거라
평생 어딘가에 가서 월급쟁이를 해라
평생 이 말씀을 가슴에 담고 살았다
몇 번 사업을 할 기회도 있었지만 어머님 말씀을 상기하고 포기했다
어머님 말씀을 들은게 과연 잘 한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아직까지는 평탄하게 살아왔다
특히 아버님께서 돌아가신 후로는 잘 풀려서 지금까지 잘 살고있다
모두 돌아가신 아버님의 음덕이라고 믿고 산다
그래도 어머님은 작지만 효도를 해드렸다고 생각한다
1982년에 회사를 옮기고 받은 포니2로 이곳저곳 구경도 다니고
7순잔치도 해 드리고, 집안 일이 있으면 늘 내가 모시고 다녔다
손주, 손녀, 외손자들 해서 자손들의 인사도 받으셨다
환갑도 못 사시고 가신 아버님이 참으로 안쓰럽다
내 나이가 이미 아버님 돌아가셨을 때보다 11년을 더 살았다
얼마나 원통하게 돌아가셨을지 짐작이 되고도 남는다
오늘 아침 갑자기 아버님 생각이 나서 몇 자 끄적거렸다
부디 저승에서라도 편안히 계실 것이라고 믿고싶다
낼모레면 아버님 기일이 다가온다
나는 종교가 없는 사람이다
따라서 아버님, 어머님 제사를 정성껏 모시며 그 때마다 기원한다
이대로 건강하게 사는 날까지 살다가 편안히 갈 수 있게 해 달라고
봄이 되면 성묘도 갈 것이다
무려 44년 전에 모셨던 그 곳에 지금은 산소들이 빼곡하다
요즘은 산소를 개조해 가족묘로 만드는게 유행이다
물어보니 4500만원이 든다고 한다
가족묘를 만들어 볼까 생각 중이다
긴 글 읽어주신 님들께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린다
첫댓글 참으로 긴 시대를 관통하는 대하 스토리입니다.
여느 역사책보다 나아요.
감사합니다
청솔님~
정말 대단한 아버지셨네요
일찍 돌아 가시지 않았다면
더 큰 일을 하실분이셨을텐데 .....
가족 묘 꼭 만드시길 바랍니다
긴 글 잘 읽고 갑니다
그러게요
아버님께서 참 험한 세상을 사셨습니다
탄장사 하실 때가 전성기였던 거 같은데
대홍수로 사업이 기우는 바람에...
감사합니다
27년생이신 제아버지보다 위시지만 같은 정서를 느낍니다. 1세대들은 거의 예외없이 사고무친한 남한에 와서 말로표현할수 없는 고초를 겪으시고 실향의 한을 안고 돌아가셨습니다.
맞습니다. .
월남하신 분들이 대충 다 그랬지요
그래도 저희 아버님은 형제들이라도 있었지만
기정수님 아버님은 혈혈단신이셨다니
그 외로움이 상상이 되고도 남습니다
감사합니다
저의 아버지도 장남 아닌 장남으로 사셨어요 증조부모님 모시고 큰아버지에 큰고모네 가족까지 한집에서 대가족으로 사셨답니다 우리 삼남매도 물론 이고요
다행이 아버지 자수성가하신 분이라
그리 어렵지는 않았지요
우리가 부모님 나이가 됬는데도 돌아가신 부모님 생각하면 참 가슴이 울컥 합니다
대가족이셨군요
저희 아버님은 장남은 아니었지만
살림이 조금 나았다고
집안일을 많이 맡아서 하셨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참 존경스럽습니다
맞습니다
저는 가만있다가도 아버님 얘기만 나오면
목이 메이고 눈물이 왈칵 쏟아집니다.
지금도...ㅜㅜ
감사합니다
격동기 그 시절
가장으로서
마니 고심하시고
무슨일을 해서라도
가족부양을 위해 부단히 노력 하신 아버님
참 훌륭하십니다
다 기억하시고 계시니
총명한 두뇌는 물려 받으셨나
봅니다
맞습니다 격동기지요
거의 맨 땅에 헤딩하시는 식으로 사업을 하시고
닥치는대로 이것저것 하시면서 애쓰셨지요
그래도 저는 감사한 게 한 가지 있습니다
평생을 남의 집에 세 살아보지 않았다는거
어렵지만 식구들과 함께 살았다는거
아버님의 노력에 늘 감사합니다
맨 손으로 이남으로 내려 오셔서
얼마나 황당했을지 상상이 안 갑니다
늘 이쁘게 봐 주셔서 감사합니다
청솔님~
그 시대의 진솔한 이야기 잘 읽었습니다.
아버님 생각이 많이 나시겠어요. 감사합니다.
네 봄이 되면 아버님 생각이 많이 납니다
고생만 하시다가 돌아가신 듯해서...
제 효도를 별로 받아보지 못하고 가셨지요
제가 대학 졸업 후에
이런저런 양계잡지에 글을 많이 썼는데
그걸 갖다 드리면 보시고 무척 좋아 하셨습니다
읽고 또 읽고, 그러셨다고 합니다
감사합니다
그런분이 아버지 셨다니....ㅎ
대단한 분이시네요......
이건 글이 아니라 역사네요......
한가정의 역사...
수원신풍동에서 태어나셨다니..........
그당시 화성군청이 매향동 인근에 있었는데....
내가...초등시절인것 같네요....
당시에는 군청옆울타리 쪽에 말을 모는 마방들이 있었는데.....
네 제가 수원 신풍동에서 태어 났습니다
수원이 고향이시군요. 반갑습니다.
그 인연으로 큰아버님이 수원에 정착하셨지요
아버님은 서울로 오시고...
남문옆 영동시장에서
포목점을 꽤 크게 하셨습니다
수원이랑 주변에 땅도 많으셨구요
사촌누나 둘이
수원여고, 매향여고 나왔습니다
사촌동생은 수원고 다녔구요
북수동 성당 옆에 사셨습니다
방학 때마다 갔지요
팔딱산 올라가서 멱도 감고...
화홍문 아래에서 고기잡고...
연무대 화살터에도 가고...
큰아버님이 활을 쏘셨습니다
저도 수원에서 대학을 다녔고
제 동생은 아주대 나왔습니다
지금도 누님은 고색동 삽니다
조카놈들도 동원고, 삼일고 다녔구요
두 녀석 다 제 대학 후배입니다
매부가 원예시험장 다녔습니다 ^^*
@청솔 내언제고 청솔님을 만나면......
참 반가울것 같아요........
수원에 남다른 애정이 있을것 같아.....
제가 살던곳이 활터 부근이었는데.....
말을하다보면 기억에 남는 아는 분일수도 있겠어요..큰 아버님..ㅎ
영동시장 삼원상회.....? 아닌가요..
@장안 거긴 아니구요
처음엔 이병희 국회의원 동생 이병철씨랑 동업
동신상회를 함께 하셨지요
나중에는 따로 광신상회를 하셨습니다
이병철씨가 저를 꽤 이뻐하셨습니다
남문근처 뒷골목의 명세의원은
절친 매부가 하던 병원입니다
누님은 선생님을 하셨지요
네 제가 수원에 연고도 많고
수원에 대한 애정이 남다릅니다
막내 여동생도 수원에서 삽니다
전에 화성순례기도 올리고 그랬지요
융건릉도 그렇구요
용주사에도 자주 갔었습니다 ^^*
@장안 활터 부근이면 연무동인데
어머님 이종사촌 동생이 거기 살았습니다
제가 기숙사 있을 때 가끔 갔지요
거기서 제품집을 하셨습니다
아저씨는 수원경찰서 형사셨구요
삼풍농원 하는 친구는 고교동기입니다
가끔 만나서 식사도 하는...
청솔님의 파란만장한 가족사 잘 읽고나니
저도 아버님 생각을 하게 되네요
저보다는 아버님일 일찍 여의셨군요
저의 아버님도 1015년 생이신데 78세에 돌아가셨는 데
평생 농사일 하시고 칠남매를 키우고 가시니
저는 장남된 입장에서 아무것도 해 드린 것 없이 보내드려
장례기간 동안 참 많이도 울었습니다
청솔님 인척중에 원예시험장 근무하신분도 계시다고 하니
저도 농촌진흥청 산하 공직을 해서 원예시험장에도 몇 번 출장을 다닌터라
그게 눈에 들어오네요
어머님께는 효도하셨다하니 정말 효자이십니다
저는 아버님 가시고 25년간 어머니와 함께 지냇는데
왜 좀 더 잘 해드리지 못했나 늘 생각한답니다
다큐멘타리 같은 가족사 쓰시느라 수고하셨습니다
늘 건강하십시오
78세시면 원은 없으시겠습니다
저는 아버님 61세, 제가 28세였지요
효자는 아니고 아버님에 비하면
그래도좀 나았다는 말씀입니다
네 매형이 원예시험장 근무했습니다
아 농진청 산하에 근무하셨군요
감사합니다
청솔님도 난석선배님 못지않게
글을 참 잘 쓰십니다.
저의 아버님과 비슷하게 사시다
돌아가셨네요.기일도 비슷 하고요
우리 아버님은 59세.
기일은 1월29일
며칠 전 기일 미사 드렸지요
청솔님 글을 읽다 보니
우리 아버님 눈에 선합니다
한편의 드라마
대단하다는 생각이 드네요.
편안한 밤 되세요.
감사합니다
59세면 너무 일찍 가셨네요
조금만 더 사셨으면 좋았을텐데
제게 효도할 시간을 안 주셨네요
성당에 다니시는군요
저는 종교가 없습니다
제사만 겨우 열심히 모시지요
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