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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을 떠받치고 강화하는 ’생각‘
크리슈나무르티 : 꺼지지 않는 불꽃, ‘자기로부터의 혁명’을 위하여
-- “聖人”의 시대를 살면서, “내가 바뀌지 않으면 세상은 변하지 않습니다.”
Any movement of thought is the deepening of sorrow. Thought with its memories, with its images of pleasure and pain, with its loneliness and tears, with its self - pity and remorse, is the ground of sorrow. Listen to what is being said. Just listen -- not to the echoes of the past, to the overcoming of sorrow or how to escape from its torture -- but listen with your heart, with your whole being to what is now being said. Your dependence and attachment have prepared the soil for your sorrow. Your neglect of the study of yourself and the beauty it brings, have given nourishment to your sorrow; all your self-centred activities have lead you to this sorrow. Just listen to what is being said: stay with it, don't wander off. Any movement of thought is the strengthening of sorrow. Thought is not love. Love has no sorrow.
생각이 일어나기만 하면 바로 슬픔이 깊어지는 겁니다. 기억을 바탕으로 하기 마련인 생각은, 쾌락과 고통의 이미지며 외로움과 눈물이기도 하고 자기연민과 후회이기도 한, 그 생각은 바로 슬픔의 토대거든요. 얘기를 잘 들어보세요, 그냥 듣기만 해요 -- 과거의 메아리로 듣는다거나 슬픔을 극복하려 한다든지 그 왜곡을 회피한다든지 할 게 아니라 말이지요 -- 온전히 자신의 가슴으로, 자신의 전존재로써 이 얘기를 들어보시란 말입니다. 여러분들의 의존이나 집착은 슬픔의 씨를 뿌릴 토양을 마련해왔습니다. 자기 자신에 대한 공부와 그 공부가 가져다줄 아름다움을 팽개치는 것은, 자신의 슬픔에다가 자양분을 공급해주는 것이지요. 그 모든 자기중심적인 행위들이 스스로를 슬픔으로 몰아가는 거거든요. 지금 하는 말을 그냥 듣기만 하세요. 그 뜻과 함께 머무르시란 말입니다. 이 생각 저 생각으로 오락가락하지 말란 말이지요. 생각의 그 어떤 움직임도 슬픔을 강화시킬 뿐입니다. 생각은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에는 슬픔이 없거든요.
J. Krishnamurti, Krishnamurti's Journal, September 28, 1973, p. 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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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석머리 20230129] “인생을 슬프게 살지 마세요..”
‘생각’이 떠오르기만 하면 그게 바로 ‘슬픔’이라고.. 하.. ‘생각이 나중에 슬픔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도 아니고, 그냥 “생각 = 슬픔” 그렇답니다. 도대체 어쨌으면 좋겠습니까? 거기서 그냥.. 제 속으로 이걸 ‘으째야 쓰까이..’ 그런 웅얼거림으로 이어지기만 할 뿐입니다. 어쨌거나 ‘생각’은 “슬픔”을 깊어지게, 강렬하게 할 뿐이라고..
그러니까 우짜든지 간에, 부디, “생각”이라는 게 바로 ‘슬픔’이니까 그걸 해결하라, 그 말씀이지요? 그렇기에 다들 ‘생각’으로만 살아온 우리네 인생이 바로 “고해”라는 얘기 아닙니까? 그러니 ‘생각’이라는 거 자체를 문제로 안 삼고 어쩌겠느냐, 그런 말씀 맞지요? ‘만물의 영장’ 운운하면서, 인생의 바탕은 ‘생각’이라며 떠들고 살아들 가는 건데, 막상 그 ‘생각’ 때문에 인생 전체가 “고해”에서 어푸어푸 허우적거려야만 하는 신세를 면해보라는 말씀이겠지요. 실상 ‘인간’의 “두뇌”라는 게 ‘생각’을 위해서 진화한 것도 아니라지요?
얘기가 엇나가는 걸까요? 잠시, 어떻게 이링공뎌링공 하다가, 아래 달린 글을 얼핏 읽어봤습니다만, 젊은날 그때그시절, 의식화 공부나 운동권 활동에 머뭇머뭇 기웃거렸더라면, 아마도 제 인생, 더 슬퍼졌을 터입니다. 글쎄요, 소심한 성격에 구태여 앞장서고 하는 심성이 아니라서, 어디 잡혀가고 기어이 가막소 들낙거리고는 안 했을 거 같지만, 그렇다고 우째 인생 “슬픔”을 문제 삼기라도 했겠습니까? ‘교리’도 마찬가지지만 ‘이념’ 역시 “생각” 아니고 뭡니까? 결국은 저 인생 “슬픔”의 소재일 뿐이지요? 차원이 조금 다르다고 대접해줄지는 몰라도, 그런 것들이 끝내 저 “고해”의 소도구들임에는 변함이 없지 않습니까?
우리 세대는 이제 다들 사회에서 퇴물로 되어가고 있는 시절입니다. 좀 더 능력 있는 친구들은 아직 현장에 머물고 있지만, 대충 다들 밀려나서 이제 ‘손주봐주는’ 나이 쯤 된 거지요. 요새는 그런 경우에도 ‘월급’ 준대나 어쩐대나 하는 소리도 있던데 말씀입니다. 소위 ‘베이비부머’세대로서, 그저 산업화에 일생을, 산업역군으로서 한평생 다 바친 친구들이 대부분입니다. 제 얘기라서 그렇습니다만, 그렇게 오로지 산업역군을 길러내는 게 최상의 ‘교육’이라고 주창하던 시절, “공대”를 졸업하고서도 “인문학”하겠답시고 ‘국문과 대학원’으로 진학을 했었지요. 참, 어떻게 그럴 수 있었는지.. 한때는 스스로 대견키도 했었습니다만.
내 인생에서 과연 얼마만큼 저 “슬픔”이 멀어져갔나.. 별로 자신이 없군요. 인문계·자연계 나누지 않더라도, 소위 “관례적인 교육”으로는 저 “슬픔”을 문제삼아보라는 ‘말’도 한마디 해볼 틈이 없는 거 아닙니까? 더구나 초·중·고 과정에서는 단 한 시간 배려해 주지도 않지요? 드물게 그런 말을 해주는 선생님이 계신다 해도 말입니다. 그만큼 다들 ‘어쩔 수 없다’면서 거의 체념상태인 듯합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인생은 고해여!” 하는 말이 바로 “진리”가 될 수는 없지 않습니까? 더구나 ‘종교’라면 그 말부터 해줘야지요.
더구나 누구 인간 하나, “인생은 고해가 아니다!” 그 한마디를 왜 못 하게 한단 말입니까? 맨날 하는 소리라고 하시겠지만, 우리가 지나온 저 20세기는 말씀이지요. 인류사 지성사 종교사 문화사에 무려 “새로운 성인”께서 오신 시대였단 말씀이지요. 도대체 어째서 그 “사실”을, 왜, 어린애 옹알이로 맴돌게 한단 말입니까? 핑계지만, 그래서 더 슬픈 거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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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글은 몇 년 전에 달아놓은 ‘사족’인데요, 그저 내다버리지 못 하는 ‘집착’ 때문에 달아놓은 것뿐입니다. ‘이딴 걸 왜 못 버리냐?’ 하시겠지만, 이런 게 바로 저 ‘집착’이라는 거 아니겠습니까? 행여, 혹시나 관심 있으신 분, 흘낏, 얼핏 읽어라도 보시라고 그대로 달아놓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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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129] ‘언제까지나 언제까지나..’
Any movement of thought is the strengthening of sorrow
생각의 그 어떤 움직임도 슬픔을 강화시킬 뿐입니다
대한민국, 우리 사회에서 명색이 종교랍시는 저 조직들의 무자비와 부패·타락, 그리고 한국외국어대학교의 저 수구꼴통주구갑질에 마음을 빼앗기고 있는 한, 어찌 꼭 그것뿐이겠습니까마는. 하여튼 그러면 나는 끝내 슬플 수밖에 없겠습니다.
마음 바닥에는 분명히 그런 것들이 존재하고 있고 말씀이지요. 존재하는 것만 아니라, 아주 휘둘리고 있을 터입니다. 그래서 결코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못 되는 거지요. “슬픔이 끝나야 사랑할 수 있다”고 하셨으니까요. 그래서 더 슬픕니다. 아직도 슬픔이 안 끝나서 더 슬픈 거지요. 이 단순한 사실만으로도 설령 성직자들이라고 해봤자, 진짜로 사랑하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고 해야 하겠습니다. 젯밥에나 관심이 있으니까요. 시주·헌금 말입니다. 아니라면 서로들 만나서 등이라도 치고지고 했겠지요.
그러면 도대체 어떻게 되면 ‘생각’이 발광을 안 할까요? 오로지 그것만이 문제겠군요. 그러나 생각이 발광하는 이유는 간단합니다. 심리적으로 욕망, 집착, 야망 따위들의 ‘의지’ 작용이 일어나기 때문이며, 그런 것들이 생각으로 발광하는 것이지요? ‘나’가 설쳐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되는고 하니, 소위 저 ‘유위’의 상태에 있는 한, 생각은 발광을 멈출 수가 없고, 따라서 슬픔은 영원히 죽을 때까지 이어지겠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먼저 해결하는 게 아니라, 일단, 지금 그 사실을 아주 확실하게 ‘깨닫는’ 것이 중요하겠지요? 그래서 ‘그것과 함께 머물러라’ 그러시는 것 아니겠습니까? 다시 말해서 ‘나’가 꼼지락거리는 한, 저 슬픔은 영원하다는 사실과 함께 오롯이 그냥 머무르는 겁니다. 그때는 계속 그렇게 살다 죽든지 말든지, 아니면 무슨 수가 나도 나겠지요?
행여나 ‘무슨 수’가 난다면, 잠시나마 좀 ‘고요’한 순간이 있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잠깐 ‘고요’의 맛이라도 얼핏 볼 수 있겠습니다만, 그러나 그것은 ‘조장된 고요’일 것입니다. 욕망·의지·생각이 모조리 다 사라져서 저절로 ‘고요’해진 것이 아니지요. 어쨌거나 ‘의지’가 관여·개입한 것일 테니까요. 결국은 마음에 걸리적거리게 하는 것들을 아예 안 만들어내야겠지요? ‘걸리적거리는 것’이 있는 한, 죽기 전까지 결코 홀가분하지 못 할 것입니다. 그렇게 좀 가볍고자하니 “지성” 아니면 다 사라져야만 하겠습니다. 그리고 정말 그걸 알았다면, 이른바 욕망과 야망과 쾌락과 탐닉과 습관 따위들이 사라지겠지요. 아니라면 거짓이니까요. 그 거짓들 다 깨달아내면, 그때에야 ‘고요’만이 남을 것입니다. 생뚱맞게 ‘모두가 사라진 숲에는 ~ 고요만이 남겠네 ~’ 그 구절이 생각나네요.
이러니 진짜 고요는 여전히 남 얘기임은 물론이고, 아직도 걸리적거리는 것들에 휘둘리고 부대끼며 살고 있습니다. 모든 거 정리하고 싸그리 새롭게 살 수 있는데도 말씀이지요. 그 꼴에도 처지를 보면, 이런 글을 쓰는 행위도 과분한 거지요. 분에 넘치는 복이고, 우리 사회 아무도 누리지 못 하는 완전 ‘특혜’입니다. 제가 이렇게 여기저기 소개 안 한다고, 크리슈나무르티 가르침이 땅에 묻혀서 사라질 것도 아닌데 말씀입니다. ‘내노라’ 하는 지식인들도 많고, ‘그런 척’ 하는 사이비들도 많습니다만, 그래도 분열 없이 ‘진리’로 가는 모양새를 글로서나마 드러낼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이미 축복, 큰 복 아니겠습니까? 제 친구 하나는, 여전히 ‘살아 있다는 것만도 다행’이라고 하더군요. 자기 얘긴지 누구 다른 사람 얘긴지는 못 물어봤습니다. 아마도 수꼴 권력에 당한 사람들 얘기겠지요?
되돌아갈지도 모르지만, 우리 사회가 여기까지 오는 데에만 해도 참으로 많은 사람들이 핍박당했습니다. 그러다가 끝내 대통령이 되신 분도 계시지만, 또한 그 때문에 일찍 돌아가신 분도 계시지만, 다르게는 아무 보상도 없이, 세 글자 이름마저 남기지도 못 하고, 그냥 한 평생 나가자며 홀연히 사라져간 선열 또한 그 얼마이겠습니까? 마산도 그러하고 부산도 그러하고 광주도 그러하며, 그 전에 온 나라 방방곡곡에 피지도 못 하고 꺾여버린 저 수많은 꽃송이들..
길이 달랐던지, 저로서는 그 어디에도 참여하지 못 했지만, 마음만은 그렇지 않습니다. 친한 친구라도 있었더라면 그쪽으로 기웃거리기라도 해봤을 텐데 말씀입니다. 어쨌거나 참으로 깨달아서 고요하게 살아간다면, 그가 진짜로 해야 할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과연 그런 사람이 ‘종교’라는 분열되고 타락한 조직체를 떠받치고 강화하는 역할, 그런 한 개 나사에 만족하고 말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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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229] 저 ‘한국외국어대학교’라는 이름만 나오면
‘마음 속에 뿌리내린 슬픔의 씨앗!’ 그 쾌락과 욕망과 집착과 기대와 당위 따위들을 해결하라는 말씀이겠습니다. 그러나 이 대목에서 저한테는 풀리지 않은 “거대한 앙금”이 가라앉아 있어서 말씀입니다. 더구나 그게 “진리 · 자유 · 평등 · 박애 · 평화 · 정의 · 교육” 등등에 관한 일이라면, 반드시 기록되고 기억되어야 한다고도 보여서 말씀이지요. “세월호 사건”과도 비슷한 층위에서 말씀입니다.
세월호 사건보다 훨씬 더 일찍 일어났었지만 하나도 안 알려진 일이기도 하고, 그 여파를 본다면 그야 말로 수천 년 수만 년, 자손대대로 이어져 내려가야 하는 일이라는 점에서, 부단히 해석되고 기록되고 새겨져야만 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단순히 “교육”이라는 이름을 내걸고 저지른 “만행”은 저 세월호 수준도 넘어서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게 이대로 묻혀서는 안 된다.’고, “반성하고 사과하라.”고, 기회 있을 때마다 경고했지만, 콧방귀도 안 뀌고 있는 저 ‘자신감’은 그야말로 정말 어디서 나오는 것인지 도무지 모를 일입니다. 써야 하는 게 ‘권력’이고, 부려야 하는 게 ‘갑질’이란 말일까요? “교육”에서까지 말입니다.
그래서 저 ‘한국외국어대학교’라는 이름만 나오면, 그 “적폐”앞에서는 진리고 뭐고 간에 통할 리가 없는 무리들의 “진리 농단”에, 사회는 하루하루 더 망가져가고 있는 모습들이 오버랩 되는 바람에 말씀이지요. 정말로 세월호 사건만큼이나 어이없는 일이고, 나아가서 유대인 학살만큼 비인간적인 짓입니다만, 그런 짓을 하고도 ‘사회적으로는 전혀 이슈가 안 되는 거’라며 ‘나 몰라라!’ 아니, “내가 뭐?” 하고는 멸시의 썩소나 짓고 있을 저 파렴치범들.. 파렴치범은 사면도 잘 안 해주지요? 명색이 “교육”이라면서, 그것도 “대학”이라고 세워놓고 하는 짓이, 동네 양아치 수준도 안 되니 말씀입니다. 다음 세대를 위해서라도 이 말씀은 꼭 해야 되는 일이며, 그 기록은 반드시 후대로 전해져야만 할 것입니다. 이건 누구 ‘개인적인 슬픔’의 문제가 아니거든요. 비록 미약한 흐름이라고 해도 정작 인간을 지키는 최후의 보루 문제이며, 국제 사회에서 대한민국의 역할과 전망이 걸린 문제입니다. 글쎄요, ‘국제사회’까지 들먹이는 건 좀 뻥튀기는 걸까요? 어쨌거나 세계적인 일 맞기는 맞습니다. 잘 하는 말로, 세계사적 · 인류사적 · 지성사적 · 종교사적으로 너무나도 엄청난 일이지요.
20 년도 넘어버렸습니다만, 1997년 말, 1998 초 일입니다. 한국외국어대학교에서 일어난 크리슈나무르티 소개 강좌 관련된, ‘교수 임용 취소 농단’에 얽힌 저들의 조직적 비리와 부조리들이 있었지요. 그때의 트라우마라고 할까요, 제 경우 그게 본문 첫문장 그대로입니다. “생각하기만 하면 슬픔은 깊어질 뿐이다.” 저한테는 바로 그게 “한국외국어대학교”라는 말씀입니다. 반복입니다만, 제 개인적으로도 그러하거니와, 사회 · 역사적으로도 저 짓거리들은 반드시 기억되고 기록되어야만 할 것입니다. 그런 행위에 이름이라도 지어 붙이자면, 저 “국정농단”에 비겨서 “교육농단”이라고 할 수 있으려나 모르겠군요. 이미 “진리농단”이라는 말도 써놨네요. 아명이라는 것도 있고 별명 따위도 있으니까요. 청운의 푸른 꿈을 안고 ‘진학’한 대학에서 한 인문학도의 인생을 싸그리 다 망쳐놓은 것입니다. 등록금 장사만 해먹은 셈이지요. 창창한 나이 27살에 한국외대 대학원으로 가서, 저들의 농간 · 농단 · 뻘짓 · 삽질 따위로 세월 다 허송해버리고, 이제 기어이 환갑이 되었군요. 그 사이 참으로 힘겹게 그들과 싸우면서도, 케이 소개 강의 등을 이어왔습니다. 그 30 년이 넘는 동안의 개인사는 반드시 기록될 것입니다. 설령 당대에 안 된다 하더라도 말씀이지요.
이게 글이 최소한의 완성도 안 되는 바람에 게시하기도 좀 그렇지만, 개인 타임라인에라도 올려놓읍시다. 내년에 또 추억보기로 뜰 테고, 아무래도 그때까지는 너끈히 살아 있을 테니까요. 이런 식으로 간단하게 정리될 일이 아닌데, 괜히 어설프게 말을 꺼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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