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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편 : http://cafe.daum.net/Europa/1AT/23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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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76년 아르메니아 왕국」
아나톨리아의 영토도 얼마 안남은 룸 셀주크에서 다니슈멘드 왕조가 또다시 반란을 일으키자 아르메니아 왕국 서쪽의 세력인 비잔티움, 파티마, 룸 셀주크 모두가 내부 분쟁에 빠졌다.
덕분에 아르메니아의 서방이 안정되자 그 사이 아이반은 동방 문제를 해결했다.
최근 확장한 시리아 영토를 시리아 공작령으로 조직한 다음 시리아 공작령의 각 지역들을 다스릴 수 있도록 아르메니아 귀족들에게 백작령으로 봉분했다.
하지만 이 지역의 중심지인 보스트라와 수와이다는 왕이 직접 소유했는데, 왕실령으로 만든 것은 아니었고 다른 사람에게 맡기기 전 잠깐 맡아두는 것이었다.
그 사람이란 바크탄기안 가문의 어린 남자아이였다.
바크탄기안 가문의 시조는 바크탄크라는 인물이었는데, 그의 아버지는 아르메니아 왕 슴바트 3세였다.
슴바트 3세는 바그라티오니조 아르메니아 왕국의 마지막 왕 가기크 2세의 삼촌이었다.
하지만 슴바트 3세가 죽고 왕위가 바크탄크 본인이 아닌 슴바트 3세의 동생 아쇼트 4세에게 넘어갔고 아쇼트 4세는 왕위를 아들 가기크 2세에게 물려주었다.
이렇듯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된 바크탄크는 아예 바그라티오니 가문에서 분가하여 바크탄기안 가문을 세웠다.
바크탄크의 아들인 헤이카즈 바크탄기안은 아제르바이잔의 카판을 영지로 받아 그곳을 다스리는 백작으로 대대로 살아왔는데, 투르크인의 침공이 거세지자 알바니아-조지아 중부 지역. 비잔티움인과 아르메니아인은 아그바니아라고 불렀다.-로 이주했다.
시간이 흘러 바크탄기안 가문의 형제가 아그바니아 백작 자리를 두고 다투다 동생 아톰 바크탄기안이 쫓겨나는 일이 생겼다.
형과의 권력다툼에서 밀려나 살길이 막막해진 아톰은 가족과 부하들을 이끌고 조지아를 탈출해 다년간 도망쳐 다니다가 아르메니아에 귀순했다.
「망명자 아톰 바크탄기안」
아르메니아 왕 아이반은 아톰의 귀순을 받아들였는데, 아톰은 죽을 때까지 조지아 정교를 믿었지만 아무렇지도 않게 아이반이 골몰하는 네스토리우스교 종교 업무를 스스로 자처해 맡고 아이반이 직접 하기 껄끄러운 ‘더러운 일’들을 직접 나서서 처리하면서 신임을 얻었다.
아이반은 그에게 영지를 주기로 약속했지만 아톰은 도피생활 동안 건강이 무척 악화되었고 귀순한지 3년 정도밖에 되지 않은 1271년에 건강 문제로 죽었다.
그러나 아이반은 그에게 한 약속을 지키기로 했다.
아이반은 아톰이 남긴 유일한 아들인 어린 타차트에게 각별한 관심을 쏟으며 자신과 나이차가 많이 나는 자기 동생들과 함께 길렀다.
타차트 역시 왕을 자기 아버지처럼 여기며 따랐다.
독신 맹세가 영향을 미친 것일 수도 있겠지만, 아이반은 죽을 때까지 자식이 없었다.
그래서인지 망명귀족의 아들과 아르메니아 왕은 부자처럼 보일 정도로 좋은 사이였다.
「아톰의 아들, 타차트 바크탄기안」
국외로는 방어적인 태도를 취하면서 아이반은 국내 귀족들을 제압하고 왕권을 강화하는 데 집중했다.
이 광정에서 태후, 교회의 협조가 필요했다.
태후 굴리코는 조지아의 공주로 바람둥이 왕 아르타바즈드 예르반드의 마지막 아내였다.
죽은 전 남편이 아르메니아군과 함께 파티마 왕조와 싸우다 죽은 시리아 왕국의 왕자였던 굴리코는 아르메니아, 조지아, 시리아 왕국에 인맥과 정보망을 두어 세 국가에 영향력을 미치던 여걸이었다.
제도적으론 서로 피가 이어지지 않은 어머니와 아들이었지만-아이반의 어머니는 아르타바즈드의 첫째 아내였다가 이혼당한 독일 귀족 여인이었다.- 둘의 나이 차이는 9살 밖에 나지 않았다.
「아르메니아의 태후, 조지아의 공주. 굴리코 니콜로즈쉬빌리 바그라티오니」
아르타바즈드가 죽고 난 뒤에도 굴리코는 왕국의 태후이자 막내 왕자의 어머니로서 궁정 내부에서 높은 권력을 쥐고 국가 외부에선 많은 인맥을 가지고 있었다.
젊은 왕과 태후는 권력을 두고 싸울 위험도 있었지만, 현명하게 아이반과 굴리코는 서로에게 협조하기로 했다.
아이반은 그녀를 왕국의 어머니로 대접하면서 막내 왕자 베드로스를 보호해주는 동시에 그가 다 자라면 영지를 수여하겠다고 맹세했다.
후자는 맹세가 없어도 괜찮았던 것이, 아이반은 바로 아래 동생 아베디스와 나이차이가 12살이나 날 정도로 동생들보다 나이가 많은 편이었고 그만큼 동생들을 잘 챙겨주는 형 노릇을 잘했다.
굴리코는 자신의 영향력과 능력을 아르메니아 왕국을 지키는데 썼고 왕에게도 자주 도움을 주는 조언자 역할을 자처했다.
태후 입장에선 어차피 형들도 많고 베드로스의 나이가 워낙 어리다보니 큰 욕심은 부리지 않았던 것일 수도 있다.
태후를 자기편으로 끌어들인 덕에 아이반은 외부 활동을 나설 때에도 걱정 없이 왕궁을 나설 수 있었다.
나이 차이도 얼마 안 났기에 때때로 이 둘이 내연의 관계라는 소문도 들렸지만 아이반의 성품을 생각해보면 거짓말임이 틀림없었다.
아이반은 죽을 때까지 육욕을 떨쳐내고자 노력했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왕비에게도 충실하지 않았던 아이반은 다른 여자들에게 대하듯 태후에게도 예절을 갖췄지만 감정은 흔들리지 않았을 것이다.
그 다음은 교회였다.
이는 더 쉬웠는데, 아이반은 독실한 신도였고 교회를 돕는데 성심성의껏 일하는 사람이라서 이미 왕자 시절에 교회와 절친한 사이였다.
헤르니카스 예르반드가 안티옥의 총대주교로 임명한 아바 3세를 첫 번째 동방 총대주교로 보는 시점에 따르면, 티모테오스는 제 6대 동방 총대주교였다.
앞서 말했듯 티모테오스는 지중해 각지를 돌아다니면서 소양과 지식을 쌓은 인물로 대중을 잡는 카리스마의 소유자였다.
출신 성분은 불명확했지만 순회 연설로 높은 명성을 쌓은 그는 자신의 말솜씨로 아르타바즈드 왕까지 감화시켰다.
아르타바즈드는 아르메니아 왕국 내에서 귀족 출신의 대주교를 동방 총대주교로 임명하는 관례를 깨고 티모테오스를 안티옥의 동방 총대주교로 임명했다.
티모테오스는 젊은 시절 아이반의 독신 맹세를 설득해 취소시키면서 왕자를 감명시키기도 했다.
그래서 아이반은 티모테오스를 자기 스승처럼 여겼다.
「한미한 출신에서 동방 총대주교까지 올라간 티모테오스」
왕가가 교회를 꽉 잡던 선조 시절과는 달리 아르타바즈드는 귀찮아서인지 교회를 자유롭게 풀어주었다.
뒤를 이은 아이반도 교회에 더 많은 자유와 권력을 선물했다.
귀족들을 때려잡던 모습과 달리 교회에는 많은 돈을 기부하고 교회를 짓도록 지원했으며 토지도 주었다.
이전 아르메니아 왕들도 네스토리우스교를 전파하기 위해 하던 정책이었지만 아이반은 그것이 과했다.
재상 다비트 헤툼이 왕을 말리고자 했지만 재상의 말을 귀담아듣는 편이었던 아이반도 종교와 관련되선 독불장군이었다.
왕의 이러한 종교적 태도 때문에 아르메니아 왕국령 안에 있는 이교도들, 특히 이슬람교도들은 더 심한 핍박을 받아야했다.
중 아르메니아와 모술 지역에선 이미 네스토리우스교도가 대다수가 된지 오래였고 시리아에선 계속된 탄압을 버티지 못하고 이슬람교도들이 파티마조나 메소포타미아의 이슬람 국가들로 도망쳤다.
그들이 도망친 땅엔 네스토리우스교도들을 이주시켜 빈자리를 채웠다.
대 아르메니아에선 아르메니아 사도 교회와 네스토리우스교와의 융합이 국가의 지원 하에 강력하게 진행되었다.
네스토리우스교에서 먼저 교리를 수정하거나-물론 본의가 아닌 예르반드 군주들의 강압에 의한 것이 컸지만- 최대한 우호적으로 접근해오면서 사도 교회를 대접하는 방식으로 차차 교회에 통합되었다.
어느 정도 대우를 받던 정교회와 가톨릭은 이슬람과는 달리 핍박받진 않았지만 아이반은 두 종교에 무관심한 태도를 보이며 신경을 쓰지 않았다.
아르메니아 왕들은 네스토리우스 교회를 가톨릭 산하에 넣는 대신 네스토리우스 교회만의 독립성을 추구했는데 아이반은 거기서 더 나아가 네스토리우스교를 정교회, 가톨릭과 동등한 기능과 권위를 갖는 그리스도교의 제3교회로 만들려고 한다는 의심을 받을 정도로 교회를 성장시키려고 했다.
이는 왕의 종교적 열망이 담긴, 다소 과대망상적인 일이었지만 아르메니아 왕국이 그럴 야심을 품을 정도로 강성해졌다고 볼 수도 있었다.
물론 아이반이 직접적으로 이런 뜻이 담긴 발언을 한 적은 없었지만 아이반과 동방 총대주교 가 서로에게 보낸 서신들에는 이를 암시하는 구절이 종종 나타났다.
종교와 외교에서 중대한 위험을 일으킬 수도 있는 왕의 이러한 태도에 네스토리우스 교회는 찬동했고 귀족과 신민 대부분은 우호적인 중립을 취했다.
가톨릭에 우호적이거나 외교에 능통한 일부 귀족들은 왕의 정책이 유럽 국가들의 경계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고 걱정했다.
감히 가톨릭 산하에서 벗어나 로마, 콘스탄티노플과 맞먹으려는 이러한 태도는 바다 너머 교황과 황제들의 심기를 건드렸다.
예루살렘 총대주교를 통해 아르메니아 교회의 불온한 움직임을 감지한 교황은 공식 항의서와 추기경을 파견하여 네스토리우스 교회를 시찰하고 왕에게 경고를 주었다.
내전 중이라지만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 역시 간접적인 방식으로 불편함을 보였다.
동, 서방 교회의 견제가 바로 들어오자 아이반은 마음에 안 들었지만 고개를 숙였다.
동방 총대주교 티모테오스 역시 추기경에게 직접 사과를 표하며 네스토리우스 교회가 가톨릭 산하에서 벗어나는 일은 없을 거라고 약조해야 했다.
왕과 총대주교가 어르고 달랜 뒤에야 추기경은 돌아갔다.
티모테오스는 이 일이 있은 후로 가끔씩 스스로를 ‘준비되지 않은 자’라고 불렀는데 테오파네스 본인이 속으로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지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발언이었다.
1270년 왕이 신임하던 동방 총대주교 티모테오스가 죽자 아이반은 무척 안타까워했고 다음 총대주교로 임명한 사브리소 3세에게 티모테오스의 시성을 부탁했다.
사브리소 3세 역시 네스토리우스 교회를 크게 부흥시킨 공을 인정해 티모테오스를 시성했다.
1276년 바그다드 지역을 지배하던 나자드 왕조의 에미르 지브릴이 시리아 공작령을 침공하자 공작령 남부를 다스리던 드루즈 백작 네르셰 브 아락이 중앙 정부에 지원을 요청했다.
아이반은 투르코만족과 쿠만족을 용병으로 고용해 나자드군을 막게 했고 그 사이 중앙군을 배에 태우고 유프라테스 강을 내려가 바그다드를 공격하려고 했다.
아르메니아가 고용한 유목민들과 전투를 벌이던 지브릴은 아르메니아군이 바그다드를 노린다는 걸 알게 되자 바로 군세를 돌려 유프라테스 유역의 도시 아나(Anah)에서 아르메니아군을 상대했다.
완승을 거두지 못했지만 해당 지역을 충분히 약탈한 아르메니아군은 휴전 조약을 맺은 다음 배를 타고 다시 아르메니아로 돌아왔다.
지브릴은 허탕만 치고 바그다드로 돌아갔다.
「나자드 왕조의 아르메니아 침공」
나자드 왕조와 싸운 일 이후로 아이반은 외부 전쟁을 억제하고 아르메니아 왕국 내부를 자주 순회하며 영주들을 감찰하고 영토를 개발하는데 집중했다.
또 아버지 아르타바즈드가 텅텅 비게 만들어놓은 국고를 채우는 데에도 노력했는데, 세금뿐만 아니라 아르타바즈드 대에 특권을 누렸던 귀족들을 탈탈 털어서 돈을 뱉게 만들기도 했다.
자영농을 보호하고 대지주의 횡포를 억제하려고 노력했으며 운하 개발에도 박차를 가해 유프라테스-티그리스 상류에 많은 운하도시와 농업 지역을 만들어냈다.
물론 그런 다음엔 세금을 내게 했다.
조지아가 결국 아제르바이잔의 이슬람 토후들을 통제하는데 실패하고 토후들이 부른 셀주크 군대가 아제르바이잔을 점령하자 대 아르메니아 동쪽에 요새를 쌓으며 셀주크 군대의 침공을 대비했다.
1270년대 후반은 아이반에게 가혹한 시간이었다.
타차트 바크탄기안은 영악하고 교활하지만 아이반에겐 당차고 믿을만한 청년으로 자라주었다.
영악하고 교활한 계략가로 성장했지만 아이반에겐 충성스러웠고 아이반 자신도 타차트를 아꼈기에 아이반이 살아있는 동안에는 별 문제가 없었다.
그는 아이반이 약속했던 대로 시리아 공작에 임명되었다.
「건강하게 자란 타차트 바크탄기안」
문제는 아이반의 동생들이었다.
아이반은 동생들이 자신처럼 독실한 기독교도로 자라길 바라며 많은 관심을 쏟았지만 하나같이 특이한 종자들로 자랐다.
바로 아래 동생 아베디스는 심한 남색가였는데 사람들은 아버지 아르타바즈드보다 더 심한 인간이라고 수군댔다.
아베디스가 아버지의 추잡한 모습을 이어받았다고 본 아이반은 그의 욕망을 수정하고자 물적으로 노력하고 의사에게도 맡겨 ‘강력한’ 치료를 시도해 보았지만 아베디스의 성향은 바뀌지 않았다.
사실 아이반의 조치는 심한 감이 있다고 볼 수도 있는데, 아베디스는 남색을 빼곤 능력 있는 인간이라는 기록도 있기 때문이다.
그런 점도 아버지를 닮은 아베디스는 용감하고 정직한 군인으로 명성을 얻었다.
하지만 그의 남색 성향은 계속 그의 발을 잡았다.
사람들은 험담하고 형은 자신의 성향을 억지로 고쳐보고자 별 노력을 다하는 모습을 보면서 아베디스가 어떤 감정을 느꼈을지 알 순 없었지만 그리 좋진 않았을 것이다.
특히 아베디스가 나름대로 야심이 드러나는 행동을 여럿 보인 것, 종교에 무관심해 교회의 불평을 가져오는 언동을 했던 것을 감안하면 아이반은 동생을 고쳐보려고 노력하는 것 못지않게 동생의 권력욕을 견제해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아베디스만 문제가 아니었다.
「남색가이자 유망한 군인. 아베디스 예르반드.」
아르타바즈드의 셋째 아들이 되는 레오도 심상치 않았다.
어렸을 때부터 무서울 정도로 고지능적인 모습을 보였던 레오는 여러 선생들의 칭찬을 들으며 할아버지 티그라네스 왕을 똑 닮았다는 소리를 들었고 사람들에겐 친근하고 사교적으로 행동하며 인기가 높았지만, 독단적이고 비양심적인 모습을 가끔 보였고 왕위에 대한 강한 야망을 숨기고 있었다.
성장기에 무척 조숙한 아이였는데 형 아이반이 많은 관심을 보였지만 같이 자란 타차트하곤 사이가 좋지 않았다.
또 아이반은 감추려고 했지만 자기 어머니의 비참한 죽음을 알게 된 뒤론 정서적으로 불안정한 모습을 보였다.
장성한 레오는 아베디스와 사이가 나빠 둘이 자주 다투면서 왕궁을 소란스럽게 만들었다.
둘 다 권력욕이 있었고 자신의 능력에 자신감을 가졌지만 성향은 반대였다.
레오는 대유럽 무역을 중시하고 행정적인 면에서 두각을 보였지만 아베디스는 앞서 말했듯이 군무에 재능이 있어 이미 형을 따라 여러 번 전쟁에 나섰고 머리 아픈 내정은 관료들에게 맡기자는 태도를 견지했다.
똑똑한 학자이자 능력있는 시인인 레오는 궁중 관료와 외국 인사들에게 지지를 받았고 군인 경력이 많았던 아베디스는 군인과 봉건 귀족들과 편을 이뤘다.
「학자이자 시인. 레오 예르반드.」
나이가 40이 가까이 되가는데 아이반은 아직도 자식이 없었고 두 왕자는 노골적으로 다퉜다.
보다 못한 아이반은 레오를 안티옥의 총대주교와 함께 지내도록 보냈고 아베디스는 자신을 따라 원정에 따라 나서도록 하여 일단 둘을 찢어놓았다.
동생의 싸움이 어지간히 스트레스가 되었는지 아이반은 우울한 모습을 보였는데, 이런 감정을 신앙을 위한 전쟁으로 풀고자 했던 것 같다.
마침 시리아 왕국의 왕 아스 살리흐 3세가 비밀리에 믿던 자신의 이슬람 신앙을 공개적으로 드러내자 시리아 왕국이 둘로 갈라져 내전을 벌였다.
이미 시리아 왕국의 백석들은 대부분 네스토리우스교도들이었지만 귀족들은 아직도 몰래 이슬람을 믿던 자들이 있었고 그런 자들은 아스 살리흐 3세의 편을 들어 장기 왕조를 다시 이슬람 국가로 만들려고 했다.
「본색을 드러낸 이슬람 숭배자 아스 살리흐 3세」
이에 반발한 네스토리우스교도 귀족들이 아르메니아 왕국에 지원을 요청하자 아이반은 네스토리우스교도들을 지키고 이교도를 박멸하기 위해 시리아 왕국의 내전에 끼어들었다.
하지만 원정을 시작하기도 전에 아이반은 유난히 우울해했는데, 후세인들은 아이반이 가족 간의 불화로 인해 심각한 우울증에 시달렸다고 추측하기도 했다.
1280년 초, 일단 루스인 장군 로스티슬라프가 이끄는 선봉대가 모술로 출발했지만 정작 왕이 이끌어야 할 본대가 출발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빨리 전선으로 가야한다고 장교들이 토로했지만 아이반은 하루하루 출정을 미뤘다.
아이반은 답답한 모습을 보이며 출발을 망설였는데 그의 정신질환이 문제라는 추측도 있고 후계자 문제로 동생들과 말싸움을 벌이느라 그랬다는 설도 있다.
그러다 1280년 3월 드디어 출군을 하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출정하기로 되어있던 3월 19일 아이반의 말이 갑작스레 날뛰면서 아이반이 낙마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머리를 크게 다친 아이반은 흐릿한 정신 속에서 가까스로 동생 아베디스를 불렀다.
아베디스가 형에게 오자 아이반은 꺼져가는 의식 속에서, 아베디스가 왕위를 물려받을 것이며 왕이 된 후엔 반드시 시리아 왕국으로 출정해 이교도들을 분쇄해야만 한다는 내용의 말을 가까스로 이어가다가 죽고 말았다.
의심스런 사고로 왕이 죽었지만 아베디스는 당장 왕의 유언을 받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급한 대로 궁정 사제 아비라드에게 즉위식을 치룬 아베디스는 군대를 이끌고 모술로 진군했다.
「아르메니아 제4대 왕, ‘축복받은’ 아이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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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반 예르반드 Ivan Yervand ‘축복받은 자’
1240. 5. 5 ~ 1280. 3. 19
예르반드 왕조 아르메니아 제 4대 왕 (1268. 5. 18 ~ 1280. 3. 19)
중 아르메니아(티그라노케르타) 공작 겸 흐로소스(알렉산드레타) 백작, 성지 안티옥의 수호자이자 동방 총대주교, 네스토리우스 교회의 보호자.
개인 특성 : 위대한 신학자, 흉터, 독신주의자, 근면, 독실, 인내, 독단, 잔혹, 겁쟁이, 우울증 / 중보병 지휘관
-가족 관계-
세실리 폰 스폰하임 : 아이반의 어머니. 아르타바즈드에게 이혼(결혼 무효화)당한 뒤 알렉산드레타의 정원에서 여생을 보냄. 나름 잘 지냈는지 정원사로 책도 남김. 아이반은 안티옥에 들를 때면 꼭 어머니의 정원을 들러 어머니를 보고 갔다고 한다. 1276년 자연사했다.
아이반은 그녀를 안티옥의 교회에 묻어주었다.
푸니그 브 사오네 : 아내. 친절하고 상냥한 왕비로 백성들에게 인기가 좋았고 아이반과 사이도 좋았지만 끝내 자식은 없었다. 아이반의 독신 성향의 영향이 클 것으로 예상.
헤르니카스 예르반드 : 형. 아이반이 태어나기도 전에 유아기 사망.
케란 예르반드 : 여동생. 어머니가 같음. 비잔티움 대립 황제였던 스테파노스 네마냐의 손자인 스테파노스에게 시집감. 딸 둘을 낳았으나 피해망상과 이질에 고통 받다 불과 23세에 사망.
아베디스 예르반드 : 첫째 남동생. 이복동생(어머니는 아베디스를 낳고 죽은 조지아 공주 두다 바그라티오니), 용감한 장군이지만 남색 성향으로 비난을 자주 받음. 아르메니아 5대 왕이 됨.
레오 예르반드 : 둘째 남동생. 이복동생(어머니는 아르타바즈드에게 버림받고 지하감옥에서 죽은 독일 하급 귀족 출신의 크림힐트 폰 왈덱)
베드로스 예르반드 : 셋째 남동생. 막내. 이복동생(어머니는 아르메니아 태후이자 조지아 공주 굴리코 바그라티오니). 아직 15살의 청소년.
다비트 헤툼 : 카린 공작. 아이반 제위기 동안 재상으로 일함. 출정 직전 영지에서 반란이 일어나 진압하러 영지로 돌아감.
카프리엘 예르반드 : 에데사 공작. 에데사의 예르반드 가문 수장. 성실한 관리자.
티모테오스 : 제6대 동방 총대주교. 아이반의 스승이자 정치적 동반자. 네스토리우스 교회의 확장과 번영을 위해 부지런히 노력하며 왕국과의 관계도 우호적으로 유지함. 티모테오스 대에 이르러 교회의 자유가 크게 늘어나 독자적인 행동을 벌이기 시작함.
사브리소 3세 : 제7대 동방 총대주교. 쫓겨나다시피 안티옥으로 온 왕자 레오 예르반드와 같이 지내고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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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가 아이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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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천재동생의 역습이 조금 기대됩니다
아르메니아판 왕자의 난이 일어날 것인가...
천재동생이 새어머니랑 손잡고(읍읍도 하고 읍읍) 형을 암살하는데!
저는 순진무구한 크린이라 읍읍이 뭔지 전혀 모르겠다는 거시에요.
@회색실패작 천재동생이 새어머니랑 로맨스(?)...
@노스아스터 흠흠. 그런 불건전한 말씀을!
저라면 당연히 천재 셋째에게 왕위를 넘겨주겠는데 말이죠. 천재는 흔치 않잖아요. 위에서도 부정적 묘사가 많은데 비해서, 안 좋은 트레잇은 독단적 이거 하나 뿐이네요.
맞습니다. 천재는 크킹 최고의 트레잇입니다. 인간 쓰레기여도 천재 트레잇이 있으면 많은 것이 용납됩니다.
천.재.조.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