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창 현성산
경남일보 기사 승인일 : 2015.08.06.
최창민기자
신선의 손놀림이 세운 듯 바위가 춤추는 황홀경
함양 용추계곡으로 들어가면 산이 하늘금을 그리며 병풍처럼 에워싸고 있다. 왼쪽 9시 방향 황석산에서 시계방향으로 거망산 금원산 기백산이다. 현성산은 금원산 뒤에 있다.
5개의 산 중 황석산 다음으로 조형성이 뛰어나다. 산의 많은 부분이 백색을 띤 미끈한 화강암반으로 돼 있고 초록 잎이 성성한 붉은 소나무가 조화를 이룬다. 설악산 울산바위에 비견되고 도내 산 모산재와 감암산을 연상케도 한다.
숙련된 최상급의 정원사가 깔끔하게 정리한 느낌이 드는 한국적인 산이다. ‘성스럽고 높다’는 뜻의 거무시, 거무성으로 불린다.
현성산 날머리 지재미골에는 국내 최대크기의 거대한 바위가 있어 인간세상을 압도한다. 그 뒤에 가섭암지 마애삼존불상은 바위 속에 은밀하게 숨어 있는 보물. 오래된 불상이지만 인적이 뜸한 바위틈에 있어 방금 새겨 넣은 것처럼 선명하다.
현성산(玄城山)은 거창군 위천면 상천리에 있는 높이 965m산이다. 금원산에 딸린 산으로 볼 수도 있지만 이 산만이 갖고 있는 특징이 있어 독립된 산으로 보는 것이 맞을 듯하다.
▲등산로는 금원산 자연휴양림입구 주차장(미폭)→바위 전망대→현성산→서문가바위→지재미골→가섭암지 마애삼존불→문바위→자연휴양림입구 주차장. 6.4km에 휴식 포함 약 5시간이 소요됐다.
▲9시 30분, 들머리는 금원산 자연휴양림 매표소 200m못 미친 도로변 오른쪽 의성김씨 거창유씨 쌍분이다.
주차할 공간이 별로 없는 것이 흠. 왼쪽에는 미폭이 보인다. 옛날 폭포 위에 있던 암자에서 쌀을 씻는 바람에 폭포수가 부옇게 물들었다 해서 미폭포(米瀑布)로 불린다.
십 수년전 여름 어느 날, 산에 가는 것을 포기하고 한나절 동안 탁족에 곡주 기울이며 미폭 상부에 노닌 적이 있다. 우거진 숲 암반 위에 작은 웅덩이가 있고 알카리 청수가 옥구슬처럼 흘러가는 별천지였다.
육산을 떠나 오름길을 재촉하면 드넓은 화강암 슬랩(평평하고 매끄러운 넓은 바위)이 가로막는다. 위험한 구간이어서 최근 거창군에서 암반 위에 데크를 설치해 안전을 확보해 놓았다. 집채 만한 바위가 얹힌 것도 있고 박힌 것도 있다.
군은 올해 사업비 1억4000만원을 들여, 미폭에서 정상까지 1.7km 구간에 암릉, 경사지 등 안전사고가 우려되는 위험 구간에 데크계단 데크로드 목재난간 등 안전시설물을 설치했다.
10시 18분, 수 십개의 가파른 나무계단을 얼마나 올랐을까. 지나온 풍경과 거창 위천면 상천리 들녘의 아름다운 풍경을 감상할 수 있는 전망대에 선다. 전망대 바로 옆 바위틈에 100년이 넘은 것으로 보이는 붉은 소나무가 자라고 있다.
카메라로 구도를 잡아 찍으니 절제미와 여백의 미가 살아나는 한폭의 동양화다. 이런 류의 풍경은 오름길 내내 펼쳐진다. 등산로는 갈라진 바위틈으로 이어지다가도 천길 아래 낭떠러지로 돌아간다.
등산로뿐 아니라 산의 풍경이 모산재와 감암산 못지않다. 낮아도 인근의 거망 기백 금원산을 능가하는 아름다움이다.
11시 33분, 현성산 정상. 장마철 구름과 안개에 가렸던 산야가 일시에 나타났다가 사라기를 반복한다.
정상 벗어나면 곧바로 갈림길. 마애삼존불·문바위로 내려가는 길과 진행해야 할 서문가바위로 가는 길로 나뉜다.
서문가바위까지 600m, 오르내림이 있어도 능선을 타는 재미가 쏠쏠해 그리 힘들지 않다.
이 바위봉에 얽힌 전설이 많다. 지재미골에서 보면 형상이 연꽃잎을 닮아 연화봉이라고도 부른다. 임진왜란 때 한 여인이 서씨와 문씨성을 가진 남자와 피난을 왔다가 아이를 낳았다. 여인은 누구의 아이인지 몰라 두 남자의 성을 모두 따 ‘서문’이라 불렀고 이후 서문가바위가 됐다는 전설이다. 거창군지 향지에는 옛날 원나라에서 공민왕비 노국대장공주를 따라온 이정공 서문기가 감음현 식봉(食封)자격을 얻어 살았는데 그의 자손들이 이 일대에서 공부를 하게 돼 아버지 서문기의 이름을 따 그렇게 불렀다한다.
연화봉을 떠나면 왼쪽으로 내려가는 갈림길이 2∼3개가 차례대로 나온다. 모두 지재미골로 가는 길이다. 마지막 갈림길에서 오른쪽은 월봉산으로 간다. 지재미골 하산이 아니라면 5km를 더 걸어 금원산으로 갈수 있다. 금원산은 기백산으로 이어진다.
1시 40분, 취재팀은 지재미골로 내려섰다. 인근에 있었던 지장암에서 유래된 지재미골은 금원산과 현성산을 가르는 분기점.
졸졸 거리던 실개천의 물소리가 고도를 점점 낯추면서 차츰 커져서 개울이 되고 계곡이 된다. 평원에 닿으면 밭농사를 짓고 사는 민가가 한 채 있다. 밭이 있지만 숲이 들어차 사람이 사는 것 같지가 않다. 예부터 지상낙원 피안의 세계 엘도라도를 꿈꾸는 사람들이 교대로 드나든다.
2시 10분, 등산로옆 20m지점, 큰 바위틈 돌계단을 힘겹게 오르면 그 끝 자연동굴 안쪽 반반한 바위 면에 불상이 새겨져 있다. 보물 530호 가섭암지 마애삼존불상이다. 본존불을 중심으로 아미타여래와 관음지장보살을 양쪽에 거느린 모양새다. 언뜻 ‘백제의 미소’로 불리는 충남 서산 용현리 마애여래삼존상과 비슷하다는 생각이다.
각진 어깨 밋밋한 가슴을 가진 본존불, 부자연스럽게 가슴에 모은 팔 등은 고려시대 불상의 특징이다. 비와 바람 햇빛을 피할 수 있는 은밀한 곳에 숨튼 탓에 훼손이 적어 방금 전 새긴 것처럼 정교하고 세밀하다. 조형성은 뛰어나지 못하다. ‘천경원년 10월’이라는 암각으로 미뤄 고려 예종 6년 1111년에 제작한 것을 알 수 있다.
가섭암은 1770년경 폐사됐고 지금은 몇 개의 석재만이 남아 있다. 당시 출토된 것으로 보이는 삼층석탑은 거창 위천초등학교에 옮겨져 있다.
2시 30분, 문바위. 단일암으로는 국내 최대바위로 알려져 있다. 가섭암(절)입구에 있다하여 가섭암(바위)이라고도 하고 고려 말 충신인 달암 이원달 선생이 망국의 한을 달랬던 곳이라 하여 순절암 혹은 두문암이라고도 부른다. ‘달암 이선생 순절동’이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
금원산 자연휴양림 큰길을 가로질러 하산할 수 있다. 이 휴양림은 전국 유일의 고산수목원으로 피서철 최고의 인기를 누리고 있는 곳이다.
경남도 소유로 1993년 1300명 수용규모로 개장했다. 2012년 생태수목원과 자연휴양림을 통합해 거창군이 위탁관리 한다.
큰길 큰 계곡, 선녀담과 세선녀바위에는 아름다운 경관에 어울리는 사연도 있다. 천상의 세 선녀가 금원계곡에 목욕을 하러 내려왔다가 맑은 물 아름다운 경치에 도취해 귀천할 시간을 놓치고 말았다. 할 수 없이 선녀담 바위 속으로 숨은 것이 화근이 돼 영원히 바위로 굳어버렸다. 요즘 세상엔 여인이 소에서 목욕재계하고 소원을 빌면 아기를 낳는다고 한다.
휴양림관리소 매표소를 빠져 나와 미폭의 물소리가 크게 들릴 즈음, 5시간에 걸친 현성산 원점회귀 산행이 끝난다.
거창군 [현성산&모리산&성령산&수승대계곡] 산행정보
ㅇ 주요지점 통과시간
* 미폭 등산로 입구(10:19) - 현성산(11:24) 1시간 5분 소요
* 현성산(11:24) - 서문가바위(11:56) 32분 소요 누계 1시간 37분
* 서문가바위(11:56) - 필봉(12:30) 34분 소요 누계 2시간 11분
* 필봉(12:30) - 말목고개(13:57) 1시간 27분 소요 누계 3시간 38분
* 말목고개(13:57) - 성령산(14:27) 30분 소요 누계 4시간 8분
* 성령산(14:27) - 주차장(15:04) 37분 소요 누계 4시간 45분
ㅇ 등산로 상태
* 미폭 - 서문가바위 : 계속 암릉구간으로 속도내기가 쉽지 않다.
* 서문가 바위 - 금원산 갈림길 : 암릉구간
* 금원산 갈림길 - 필봉 : 육산형태
→ 필봉 거의 다 가다보면 철조망 펜스가 나온다. 그 펜스를 따라서 계속 올라가면 된다.
* 필봉 - 말목고개 : 급경사 내리막길로 낙엽이 많이 있어서 미끄럽다 (안전사고 주의 요망)
일부 암릉구간이 있고 밧줄 잡고 하산하는 구간도 있다
* 말목고개 - 성령산 - 출렁다리 입구 : 완만한 육산형태로 빨리 갈 수 있다.
* 출렁다리 입구 - 수승대 주차장 : 도로옆 인도길로 걸어가기 때문에 편한 길이다.
ㅇ 들머리, 날머리 시설
- 들머리 : 도로상에 있어서 아무것도 없다
- 수승대 주차장 : 주차장내 공용화장실 있고 식당도 있다.
수승대
심산유곡의 산수를 즐기다
문화재 지정 : 명승 제53호
소재지 : 경남 거창군
원학동은 영남 제일의 동천으로 알려진 ‘안의삼동’ 중의 하나다. 안의(安義)는 오늘날 함양군과 거창군의 일부 지역에 해당한다. 덕유산에서 지리산으로 향하는 소백산맥 줄기의 동쪽에 자리한 조선시대 행정구역으로 산세가 웅장하고 계곡이 깊은 매우 험준한 지세를 형성하고 있다.
원학동은 위천을 따라 월성계곡의 아래 지역에 위치한 동천이다. 조선시대에 동은 오늘날과 같은 행정지명이 아니라 동천을 의미하는 글자로 맑은 계류가 흐르고 산수가 아름다우며 경치가 좋은 계곡을 뜻하는 용어로 쓰였다. 이러한 원학동천의 중심에 바로 수승대가 자리하고 있다. 수승대의 계곡은 덕유산에서 발원한 갈천이 위천으로 모여 구연(龜淵)을 이루면서 흐르는 물길이 조형해놓은 비경이다.
수승대는 암반 위를 흐르는 계류의 가운데 위치한 거북바위(龜淵岩)가 중심이다. 계곡의 건너편에는 요수정, 계곡의 진입부에는 구연서원(龜淵書院), 서원의 문루격인 관수루(觀水樓)는 요수정의 반대쪽에 마주하고 있다. 요수와 관수는 모두 계곡의 아름다움을 바라보고 즐기는 풍류의 멋을 음유하는 말이다. 요수정과 관수루에서는 거북바위가 위치한 수승대의 아름다운 풍광이 한눈에 들어온다.
거북바위는 수승대에서 가장 중요한 경관 요소다. 구연대, 또는 암구대(岩龜臺)라고 하는데, 높이는 약 10m, 넓이는 50m2에 이른다. 구연대라는 명칭은 마치 바위가 계류에 떠 있는 거북의 모습과 유사하다고 해서 붙여진 것이다. 비록 키는 작지만 오랜 세월의 풍상을 겪은 노송들이 곳곳에 자라고 있는 거북바위에는 수승대의 문화적 의미를 알 수 있는 많은 글들이 새겨져 있다. 퇴계 이황이 이곳을 수승대라고 이름 지을 것을 권한 〈퇴계명명지대(退溪命名之臺)〉라는 시와 이에 대한 갈천 임훈(林薰)의 화답시 〈갈천장구지대(葛川杖廐之臺)〉, 더불어 옛 풍류가들의 시들로 가득 차 있다.
계곡의 건너편에는 벼슬보다는 학문에 뜻을 둔 학자로 향리에 은거하며 소요자족했던 요수 신권(愼權, 1501~1573)이 제자들에게 강학을 하던 요수정(樂水亭)이 서 있다. 이 정자는 구연대와 그 앞으로 흐르는 물, 뒤편의 울창한 소나무 숲이 어우러져 수승대의 경관을 동천으로 승화시키고 있다. 요수는 아름다운 원학동 계곡에 살던 신권의 성정을 짐작하게 하는 정자의 명칭이다. 요수는 《논어》의 〈옹야(雍也)편〉에 나온 “지혜로운 사람은 물을 좋아하고 어진 사람은 산을 좋아한다(知者樂水 仁者樂山)”는 글로 옛 선비들이 심산유곡의 산수를 즐기며 늘 마음에 두었던 문구다. 요수정은 1542년 구연재와 남쪽의 척수대 사이에 처음 건립되었으나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고 중건한 뒤 다시 수해를 입어 1805년 현 위치로 이건했다.
수승대의 동쪽에는 구연서원이 자리하고 있다. 요수 선생이 1540년(중종 35)에 서당을 세워 제자들을 가르친 곳으로 1694년(숙종 20) 구연서원으로 명명되었는데 요수 신권, 석곡 성팽년, 황고 신수 등이 배향되어 있다. 구연서원의 문루인 관수루는 1740년(영조 16)에 세워졌다. 관수(觀水)는 《맹자》의 〈진심장(盡心章)〉에 등장하는 문구다. “물이 흐르다 구덩이를 만나면 이를 다 채운 다음에야 비로소 앞으로 흘러간다(流水之爲物也 不盈科不行)”며 물의 속성을 강조한 글이다. 군자의 학문은 웅덩이를 채우는 물과 같아서 한 웅덩이를 가득 채운 후 비로소 그다음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는 학문의 방법을 담고 있다. 또한 아름다운 동천의 계곡에서 지혜를 가진 사람이 어떻게 물을 관조할 것인가에 대한 철학적 의미를 제시하고 있는 심오한 명칭이라 할 수 있다.
수승대 앞 너럭바위에는 연반석(硯磐石)과 세필짐(洗筆㴨)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연반석이란 거북이가 입을 벌린 모양의 장주암(藏酒岩)에 앉은 스승 앞에서 제자들이 벼루를 갈던 바위란 뜻이고, 세필짐은 수업을 마친 제자들이 졸졸 흐르는 물에 붓을 씻던 자리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장주암 위에는 오목한 부분이 있는데 이를 장주갑(藏酒岬)이라고 한다. 이곳에는 막걸리 한 말이 들어가는데 일정한 때에 시험을 보아 합격한 제자들만이 장주갑에 부어놓은 막걸리를 마실 수 있었다고 한다.
수승대는 옛날에 수송대(愁送臺)라 불렸다. 수승대가 위치한 이 지역은 원래 신라와 백제의 국경으로 백제 말, 신라가 백제 사신들을 환송할 때 그들을 슬프게 돌려보냈다고 해서 수송대라고 했다. 그러다가 퇴계 이황이 이곳의 경치가 너무 아름다워 ‘수송’이라는 이름을 ‘수승’으로 바꾸어 명명한 후로 오늘날까지 수승대로 불리고 있다. 퇴계는 이름을 바꾸면서 수승대에 대한 〈명명시(命名詩)〉를 남긴다.
수송을 수승이라 새롭게 이름하노니
搜勝名新換
봄을 만난 경치 더욱 아름답구나
逢春景益佳
먼 산의 꽃들은 방긋거리고
遠林花欲動
응달진 골짜기에 잔설이 보이누나
陰壑雪猶埋
나의 눈 수승대로 자꾸만 쏠려
未寓搜尋眼
수승을 그리는 마음 더욱 간절하다
惟增想像懷
언젠가 한 동이 술을 가지고
他年一樽酒
수승의 절경을 만끽하리라
巨筆寫雲崖
글 : 김학범
서울시립대학교 원예학과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환경대학원에서 조경학석사, 고려대학교 대학원에서 농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대표 저서로는 《보고 생각하고 느끼는 우리 명승기행: 역사문화 명승 편》
거창군 [현성산&모리산&성령산&수승대] 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