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훈아(본명 최홍기, 1947~ )
1947년 부산 동구 초량동에서 선원이자 무역상이셨던 아버지와
전업 주부 어머니 사이에서 2남 2녀 중 둘째로 태어났다.
어린시절 나훈아는 평범한 집안에서 자랐고 어려서부터 노래를 좋아해
고향 뒷산에서 친구들과 함께 기타를 즐겨쳤다고 한다.
사실 나훈아의 지인들은 나훈아가 악기를 다루는데 능숙하고
그 중에서도 피아노 실력이 수준급이라고 말한다.
이후 고향에서 중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생이었던 자신의 형을 따라
1965년에 서울로 상경하여 서라벌예술고등학교에 입학했다.
입학한 지 얼마되지 않아 나훈아는 처음으로〈약속했던 길〉을 취입하고
1966년에 당시 19세 나이로 오아시스 레코드를 통해《천리길》을 발표하면서
공식적으로 가요계에 데뷔하였다.
자신만의 독특한 간드러진 꺾기 창법이 매력적이었던 나훈아는 1968년 부터
정통 트로트를 고수하면서〈사랑은 눈물의 씨앗〉을 시작으로〈강촌에 살고 싶네〉
〈님 그리워〉가 대중들로 부터 히트하여 명성을 얻기 시작하였다.
1971년에는 〈가지마오〉가 크게 히트하면서 KBS 음악대상을 수상하고
1972년에는〈고향역〉,〈머나먼 고향〉을 차례로 히트하면서 본격적으로
대중가수 대열에 합류하게 되었으며 당시 팝 스타일의 트로트로 사랑받던
가수 남진과 함께 라이벌 구도를 이뤄 대한민국 가요계를 주름잡았다.
남진과 나훈아는 1970년대의 가요계를 장악하면서 서로 경쟁을 벌여 남진 아니면
나훈아가 대한민국의 최고의 가수상이라 할 수 있는 가수왕상을 수상하였다.
하지만 실제로 방송사 기록을 보면 남진이 거의 대부분 1위와 동시에
가수왕상을 수상하였으며 나훈아는 2위를 한 것으로 집계했다.
나훈아는 남진과 함께 경쟁하면서 대한민국의 가요계를 장악하였는데 이 시기에
침체된 대한민국 음악에 활력을 불어넣어 대중가요 활성화를 이끌었다.
1970년 대에는 나훈아가 주요 히트곡을 동시에 발표하면서
남진이 발표하는 노래와 한꺼번에 인기를 얻게 되자,그 어느 때보다도 치열한 경합이 펼쳐졌다.
그 해 연말 가요 시상식에서 남진은 MBC 10대가수 가요제의 최고 인기가수를
수상했고 나훈아는 TBC 방송가요 대상의 남자가수 대상을 수상하였다.
남진과 나훈아가 동시에 최대의 전성기를 누리던 시절의 라이벌 경쟁구도에서는
남진이 근소하게 우위를 보였지만 이후에 나훈아가 좀더 꾸준한 활약을 펼치며
남진과 나훈아는 한국 가요계 역사상 최고의 라이벌 관계로 발전하였다.
나훈아는 남진과 달리 대부분 차분하고 조용한 노래를 선곡하였으며
당시 무대에서 다양한 포즈와 꺾기 창법으로 트로트를 맛깔나게 불러
중년층들에게 많은 인기를 얻었다.
그의 인기를 알 수 있듯이 삼성그룹 이건희의 연회에 참석할 것을 초청받았으나
나훈아는 자신의 공연을 보기 위해 표를 사는 사람들에게만 노래를 한다며
단호히 거절하였다고 전해진다.
전성기를 한창 누비고 있었던 나훈아는 1972년에 엄청난 사건에 휘말렸다.
나훈아가 공연 중에 피습당해 몇 개월동안 입원해야 했다.
청천벽력같은 소식을 들은 나훈아의 팬들은 남진의 팬들이 나훈아를 다치게
했다는 루머를 듣고 패싸움을 벌이기도 했다는 것이다.
나훈아는 이 시기에 백마부대 명예정훈대위가 돼 한달간 파월 위문공연을 갔다가
1973년 대한민국 공군에 자원 입대해 큰 화제를 불러모았다.
1973년 배우 고은아의 사촌관계인 이숙희와 결혼했다가 제대를
몇 개월 앞두고 2년 만인 1975년에 아들,딸을 두고 이혼했다.
그것도 잠시, 영화계에서 최고의 주가를 달리던 여배우 김지미와 1976년에
결혼을 발표하며 국민이 충격에 휩싸이기도 했다.
결혼과 동시에 나훈아의 방송 출연이 점차 줄어들고 남진도 신군부의 정치적
탄압을 받으면서 자연스레 2인 체제가 사라졌다.
1976년에는 심수봉이 어느 스카이라운지에서 피아노를 치면서
자신의 노래를 부르는 모습을 보고 노래실력에 감탄한 나훈아는
심수봉에게 본명 최홍기로 쓴 자작곡 여자이니까를 줘서
녹음 시키면서 가수로서의 데뷔에 힘을 실어 주었다.
그리고 1977년 3년전인 1974년 가수 방주연이 본인의 첫사랑 작곡가 박성규가 결혼전
결혼하자며 프로포즈 선물로 준 박성규 본인이 작곡한 곡들을 주었는데 그중에
방주연이 멜로디만 있었던 어느한곡 에다가 직접 가사를 지어서 본인의 노래로
1974년에 생각해 보세요란 제목의 노래로 발표한 곡 이 있었는데 방주연은
박성규랑 결혼할 생각은 없어서 박성규에게 결혼 거부를 하자 박성규는 짜증나
방주연에게 주었던 생각해보세요의 악보를 빼았아 본인이 직접 가사를 새로 지어
3년 뒤인 1977년 애정이 꽃피던 시절이란 제목의 나훈아 가 부른 노래로 발표 하였다.
결혼과 동시에 방송에서 좀처럼 출연하지 않고 잠잠했던 나훈아는 1981년에
《대동강 편지》를 발표하면서 가요계에 복귀하였으며 MBC 10대 가수
특별가수상을 수상하고 1984년에 대형 가수 중에서는 조용필의 다음으로
공식적으로 일본에 진출하여 데이지쿠 레코드와 계약해 성공적으로 이끌어 냈다.
1986년에는 "20세기 최고의 가수", "대한민국의 가왕" 이라 불리며 폭발적인
인기를 얻은 조용필의 등장으로 나훈아의 인기가 위축되기는 했으나 아라기획을 설립하여
개인 소속사를 만들며 자신만의 특별한 창법을 고수하면서 끈기를 가지고 음악작업을 하였다.
결국 1989년에 본인이 직접 작곡하고 가사를 붙인〈무시로〉라는 노래가 많은 조용필을 능가했다.
명실상부 대한민국 가왕은 나훈아 조용필이었다
이후 나훈아는 일반 방송 프로그램에 얼굴을 드러내지 않았음에도
나훈아의 공연장은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방송에서 그를 볼 수 있는 기회는 설과 추석 등 명절의《나훈아 특집 쇼》뿐이기 때문이다.
홍보와 마케팅에 집중하는 젊은 가수들은 위험할 수도 있는 뜸한 방송 활동이라는 일종의
희소 가치는 그의 단독공연에 관객들을 몰려들게 했고 한층 그의 존재감은 전설로 상승했다.
또한 주로 서정적이면서 슬픈 로맨스틱한 본인의 자작곡들을 불렀는데
〈갈무리〉, 〈영영〉, 〈내 삶을 눈물로 채워도〉, 〈홍시〉라는 곡이 대표적이다.
다양한 스타일의 신인 가수들의 등장으로 이전 만큼보다는 활동이 뜸했으나
자신의 단독 콘서트를 개최하면서 대한민국의 대표 가수로서 그 맥을 이어나갔다.
나훈아는 호소력 짙은 목소리와 시대를 달리하는 끊임없는 히트곡 양산과 더불어
작곡과 작사 능력으로 대한민국의 싱어송라이터로 자리매김했으며 1990년대 초
“대한민국 가요계의 살아 있는 전설”로 추앙받게 되었던 것이다.
데뷔 이후 현재까지 약 2,500곡을 취입하고 정규 19개를 포함한
200개의 앨범을 발표했으며 나훈아가 직접 작사, 작곡한 노래는
약 800곡 이상 정도 추정하고 있다.
나훈아가 작곡과 작사를 했던 노래들을 살펴보면 대표적으로 본인의〈잡초〉,
〈사랑〉,
〈울긴 왜 울어〉,
〈무시로〉,
〈갈무리〉 ,
〈영영〉 ,
〈내 삶을 눈물로 채워도〉,
〈사내〉,
〈홍시〉,
〈사랑〉,
〈건배〉,〈공〉가 있으며 조미미의 〈사랑은 장난이 아니랍니다〉,
〈연락선〉 ,
심수봉의 〈여자이니까〉,
이자연의 〈당신의 의미〉(1969년에 본인이 발표한
"내당신"이란 곡을 개사를 하여 이자연에게 준곡),
인순이의 〈잠깐〉,
강진의 〈땡벌〉
(엄연히 말하자면 나훈아의 원곡을 리메이크한 곡)배종옥과 듀엣으로 부른
〈아담과 이브처럼〉등 이 있다.
그리고 나훈아 등의 외모를 비슷하게 하고 목소리도 비슷하게 한 모창 가수
일명 "이미테이션 가수"도 생겼으며, 너훈아, 나운하 등이 활동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