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에 무임승차 하지 말자
♤ 잠시 쉬어가기 ⑥
설화수의 집 (서울시 종로구 북촌로 47, 가회동 74)
30년대의 한옥과 60년대의 양옥, 두 건물을 가로막고 있던 축대를 해체하고 양옥 지하로 새로운 공간을 만들어 열린 중정을 통해 한옥과 양옥을 연결해 과거로부터 진화해온 가치 있는 시간들을 공간 곳곳에 펼쳐냄으로써 설화수의 집에서 전통과 현대를 넘나드는 아름다움을 향한 여정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한옥의 입구를 들어서면 꼭 궁궐에 입장한 듯, 고즈넉한 공간에서 경험이 가능하고,
내부의 한옥 길을 걷다보면 야외로 열린 중정이 나타나는데, 풍경처럼 서있는 나무 한 그루가 궁궐 정원의 중심부에 들어온 듯한 느낌을 선사한다
샘플 받은 사람은 얼마나 좋을까 ㅎㅎ
손병희 집터 (서울시 종로구 북촌로 39, 가회동 170-4)
1919년 2월 28일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민족대표들 이 모여 의견을 나눈 곳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23인 은 3·1운동 거사 전날인 1919년 2월 28일 서로 지면을 익히고 다음날 독립선언식 절차를 최종 점검하기 위해 이곳에 모였다
이 자리에 참석한 민족대표들은 독립선언식 장소인 탑골공원에 학생들이 집합하기로 되어 있다는 소식을 듣고, 만일의 사태를 우려해 급히 선언식 장소를 인사동 명월관 지점 태화관으로 변경하였다
그로 인해 거사 당일 일정에 다소의 혼선이 빚어지 기도 하였다
♤ 탑골공원서 태화관(별유천지)으로 변경한 이유
1) 탑골공원에서 낭독하면 그곳에 모인 군중들이 흥분하여 폭력시위를 할 것이며,
2) 그렇게 되면 일제의 가혹한 탄압이 시작 될 것이며,
3) 다른 나라에서도 우리를 좋게 생각하지 않을것이다
4) 결론적으로 일제와 정면으로 충돌하는 것보다 타협하는게 좋을것 같다
(여러분은 어찌 생각하십니까 ???)
♤ 별유천지
태화관의 별관으로 3.1독립선언을 한 장소이다
민족대표 33인 중 종교별로는 천도교 15인, 기독교 16인, 불교 2인이며, 이 중 길선주, 유여대, 김병조, 정춘수 등 4인은 약속장소에 나타나지 않았다
♤ 손병희는 우리나라 동학의 3대 교주로 동학을 천도교로 일으켜 세우며 많은 헌금이 들어와 교세가 확장되어 부유하게 된것은 틀림없는듯 하며, 극열 친일파가 아닌 분으로는 아마도 유일하게 대저택에서 사신 분이아닌가 생각된다
백인제 가옥 (서울시 종로구 북촌로7길 16, 가회동 93-1)
백병원과 인제대학교의 설립자인 백인제가 살던 집으로 1913년 한상룡(이완용 외조카)이 세운 집으로 압록강 흑송으로 지었다고 전한다
(실재 흑송을 사들여 썼는지, 아니면 당시 헐리고 있던 경복궁의 목재를 썼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한상룡은 1906년 가회동으로 이주하여 몇 년에 걸쳐 주변의 작은 가옥 12채를 사들여 집터를 마련하고 1913년 6월 경성부 가회정(町) 93번지 (현 종로구 가회동 백인제 가옥)에 새 가옥을 준공 했다
준공 4개월 후 일본 천황의 간나메사이(神嘗祭, 신상제 - 햇곡식을 신에게 바치는 제사)에 맞추어 총독부 고위 관료를 집으로 초청해 연회를 배풀었다
(이 때문에 문화재 전문가 황평우는 이 집의 이름을 한상룡 가옥이라고 불러야 한다고 주장한다)
한상룡은 이 집에 1928년까지 거주하였고 1935년 조선일보 기자로 활동하다 조선중앙일보 부사장을 역임한 최선익이 사들였다
여운형을 사장으로 추대하여 민족 언론사에 중요한 자취를 남긴 인물이다
1944년 외과 의사이자 흥사단 활동가였던 백인제 가 이 집을 인수하였다
백인제는 1950년 9월 한국전쟁 중에 납북되었고 (한국전쟁 당시 피난을 가지 못하였고, 납북된 후의 행적은 미상이다), 이후 백인제의 부인 최경진과 자식들이 계속하여 거주하였다
1988년 집의 소유권은 아들 백낙조에게 아전되었 으며 2009년 서울시가 매입 개보수하여 서울시 민속문화재 제32호로 지정해 2015년부터 일반인 에게 개방하고 있다
♤ 내부관람은 예약을 하고 해설사와 동행하여야 한다
♤ 한상룡
일제시대의 금융인으로 현재는 신한은행으로 통합된 조흥은행의 전신인 한성은행 두취(頭取, 은행장)를 역임한 한상룡은 이완용과 이윤용이 그의 외삼촌이며 조선귀족 한창수와도 친척 관계인, 유력한 친일파 집안 출신으로 한관수(韓觀洙)의 아들로 1880년 10월 16일 서울 재동에서 태어났다
1908년 동양척식주식회사가 설립될 때에는 설립위원으로 참가하기도 했는데, 이런 과정을 통해 조선에서 손꼽히는 거부가 된 한상룡은 친일 유력자 모임인 대정실업친목회 초대 평의장을 지내며 깊숙이 관여하기도 했으며, 일본인을 찬양 기념하는 각종 사업에서 두드러진 행적을 보였다
일본 제국으로부터 많은 훈장과 표창을 받았고, 중추원 참의(1928년), 중추원 고문(1941년), 칙선 일본 귀족원 의원(1945년)에 임명되었다
(부인인 이용경도 애국금차회에 참여하는 등 일제에 협력해 훈장을 받았다)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 포함되었다
♤ 백인제
1898년 1월 28일 평북 정주군 부호마을에서 아버지 백희행(白禧行)과 어머니 청주 한씨 사이의 4남 3녀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1916년 경성의학전문학교 예비과정에 입학하여 수석을 놓치지 않았으나, 1919년 3.1운동에 참여한 죄로 10개월 옥살이를 하고 퇴학당하고 만다
출옥 후 조선총독부와 경성의전의 유화 조치에 힘입어 복학하여 결국 전학년 수석으로 졸업했다
1924년부터 1928년까지 조선총독부 의원에 의사로 근무하였다
1928년 경성의전 외과학 교실의 주임 교수가 되었으나 1941년에 경성의전을 사직하고 '백인제 외과의원'을 정식 개업하여 1946년까지 5년간 큰 재산을 모아 1946년 12월 17일에 한국 최초의 민립 공익법인 재단법인 백병원을 창설했다
한국전쟁 중인 1950년 7월 19일 사복을 착용한 공산당 정보원 2명에게 체포되어 동생인 백붕제와 함께 납북된 후의 행적은 미상이다
♤ 최경진은 일본 나라고등사범대학을 졸업하고 배화여고 선생을 할때 백인제와 결혼했는데, 남편이 납북 된 후 백병원을 실제 일군 사람이다
(최경진 여사은 103세까지 장수했다)
♤ 82년 역사의 서울백병원이 31일 모든 진료를 종료하고 문을 닫지만, 폐원을 반대하는 교직원들의 반발이 여전해 교직원과 재단 간 갈등이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
첫댓글 북촌로 돌아보기 잘보았습니다. 감사합니다^^*
얼마전에 명동 성당에 다녀왔는데, 건너편의 백병원을 보니 허허로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창문이 열려져 있고 어지럽게 집기가 흩어진 모습. 명동하면 랜드마크 되는 곳이 명동 성당, 코스모스 백화점, 미도파 백화점, 백병원 그리고 중앙극장이던 시절…. 그때가 아득하네요., 백병원도 이제 아듀라니 세월이 무심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