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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민(金秀敏, 1867년~1909년)-인력거꾼으로 위장해
적진에 뛰어든 신출귀몰한 농민의병장
"지금 국세가 하루 다르고 매월 변화하여 동포를 구하기 묘연하고 기약이 없어 인민에게 화가 미치고 있으니 지금 이후로 양 의병부대가 연합하여 서울을 공격 할 것"
의병장 김수민이 연기우에게 보낸 편지 중
1907년 군대해산과 의병봉기
김수민(金秀敏, 일명 金守民 · 金守敏 · 金俊洙)은 경기도 장단군 북면 솔랑리의 양반출신으로 농업에 종사하고 있던 농민이었다. 선생은 어려서부터 무예(武藝)에 능하고 용력이 뛰어났으며 이는 의병장으로 능력을 발휘하는데 큰 영향을 미쳤다. 또한 선생은 뛰어난 사격술을 가지고 있었으며, 전술에도 능하여 의병부대를 교묘하게 이합집산 하여 각지에 출몰하면서 기습적으로 일본군을 공격하였으며 화약과 탄약을 직접 제조하여 의병부대 전투력을 상승시켰다. 이러한 능력 덕분에 많은 농민들이 선생을 믿고 의병에 참여하였다.
동학농민군 백산봉기 기록화(1894)
선생은 의병 활동 이전에 이미 반일투쟁에 참여하고 있었다. 그는 1894년 전국적으로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났을 때 농민군에서 활동하여 정부로부터 동학당으로 지목받았다. 그는 일본에 의한 경복궁 점령 이후 제2차 동학농민운동에서 적극적으로 농민군에 가담하여 국왕을 위협하고 국권을 침탈하고 있던 일본을 상대로 싸웠으며, 이런 반일투쟁의 경험이 의병으로 이어졌던 것이었다.
선생은 광무황제의 강제퇴위와 대한제국군대의 해산을 계기로 의병을 일으켰다. 광무황제의 강제퇴위와 군대해산은 헤이그특사사건에서부터 시작되었다.
1907년 6월 광무황제는 을사늑약의 부당성을 알리고자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리고 있던 제2차 만국평화회의에 이상설, 이준, 이위종을 특사로 파견하였다. 이 회의는 러시아 황제 니콜라스 2세의 주창으로 40여 개국의 대표 225명이 참석하였다. 주로 중재재판, 육해전법규 등을 논의하지만 사실상 열강간의 식민지 쟁탈전에 따른 분규를 해결하기 위한 국제법 회의였다.
헤이그에 파견된 특사들은 정식 초청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도움을 주기로 했던 러시아의 태도변화와 일제의 집요한 방해로 회의장에 참석도 하지 못하는 수모를 겪었다. 그러나 이러한 사정이 각국 신문기자에게 알려지면서 영국인 윌리엄 스태드가 회장인 국제협회의 후원을 얻어 만국평화회의의 회보인 「만국평화회의보」에 장문의 글을 게재하였다.1) 하지만 각국 대표들은 끝내 외면하였고, 이에 분함을 참지 못한 이준 선생은 헤이그에서 순국하였다.
일제는 헤이그특사사건을 빌미로 광무황제를 강제 퇴위시키고 정미7조약을 통해 차관정치를 실시하여 대한제국에 대한 통제를 더욱 강화하였다. 또한 일본의 간섭으로 계속적으로 축소되어 전국적으로 1만 명이 되지 않았던 대한제국 군대를 새롭게 개혁한다는 미명아래 해산시켰다. 그리하여 서울의 시위대 지방의 진위대는 1907년 8월 1일 시위대를 시작으로 순차적으로 해산되었다. 이러한 조치는 대한제국을 보호국의 차원을 넘어 식민지로 만들겠다는 것이었다.
이에 시위보병 제1연대 제1대대장 박승환 참령의 자결을 시작으로 시위대의 봉기가 일어났으며, 지방에서는 진위대가 해산을 거부하고 농민들과 함께 의병봉기를 하였다.2) 이러한 시기에 김수민은 경기 장단지역을 중심으로 의병운동을 전개하였던 것이다.
김수민은 1907년 9월 2일 거주하고 있던 장단군 북면(北面) 솔랑리(率浪里)에서 국권을 회복하고자 인근의 산포수와 농민들을 중심으로 의병을 모집하였다. 이에 연천의 유생이면서 농업에 종사하던 전복규(全福奎)를 좌익장으로 하는 300여 명의 의병부대를 출범시켰다. 이어 개성군 대흥산(大興山) 창고에 보관 중이던 정부 소유의 대포 30문과 소포 150문을 빼앗아 무장하였으며, 이후 병력을 장단군 덕음동(德蔭洞)으로 이동시켜 그곳을 거점으로 군량을 비축하였다. 또 보부상들을 모집하여 정보대를 편성하였다. 보부상들의 특성을 이용하여 주변의 일본군 뿐만 아니라 다른 지역의 일본군의 동향에 대해서도 밀탐하여 보고하도록 하였다.
이와 함께 의병들의 보호와 전투력 향상을 위해 의병들의 복장을 송백(松柏)의 위장색으로 염색하도록 하였다. 군용품의 충당에 있어서도 부호의 양곡과 의복을 징발하여 충당하였으며, 절대로 어려운 농민들로부터 징발하는 경우는 없었다. 부대이동에 있어서도 농민들에게 민폐를 끼치는 것을 엄금함으로써 농민들을 보호하고자 하였다.
13도창의군의 참여와 서울진공작전
의병부대의 조직과 무장력을 강화한 김수민은 경기 장단 · 마전 등지를 중심으로 의병운동을 전개하였다. 1907년 10월 27일 김수민은 700명의 의병부대원을 이끌고 장단군 고랑포(高浪浦)를 습격하여 일제의 최일선 침략기구인 헌병분파소 등을 불태웠다. 이후 마전군 강동면으로 이동하였다. 이처럼 일본군과 교전하면서도 계속해서 의병모집활동을 전개하여 1907년 11월에는 의병부대원이 900명으로 늘어났다.
11월에 들어서는 장단 · 마전을 넘어 풍덕 · 개성 등지로 활동영역이 확대되었다. 이 시기 당시 추진되고 있던 13도창의군과 서울진공작전에 참여하고자 연합의병에 가담하여 활동하기 시작하였다. 11월 10일 김수민 의병부대는 풍덕군으로 진출하여 영비포(領非浦)분파소를 공격하여 불태웠다. 이어 개성군으로 이동하여 예성강(禮成江)의 창릉포(昌陵浦)를 공격하였다.
창릉포에서는 여각 주인 윤상정(尹相廷)에게 군자금 명목으로 곡식 수출 대금 300냥을 11월 15일까지 의병부대에 바치도록 하였으며, 이 일대에 방곡령을 선포하였다. 또한 석포(席浦) 철도 가교를 불태우고 개성을 네 방면에서 포위 공격할 것이라고 군사적 위세를 과시하였다.
김수민 의병부대가 헌병분파소 등을 파괴하자 이에 대응하고자 일본군 개성수비대 장교 수하 36명을 장단군 석주원(石柱院)에 급파하였다. 11월 15일 이곳에서 김수민 의병부대가 문안동에 숙영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즉각 공격에 나섰다. 그러나 개성수비대의 공격을 눈치 챈 김수민은 부대를 연지동 동방 고지로 이동시키고 그곳에서 대포를 이용하여 일본군을 격퇴시켰다.
김수민 의병부대에 크게 패한 일본군은 11월 17일 일본군 다가미(田上) 대위가 이끄는 개성수비대 36명을 김수민 의병부대의 근거지가 있는 삭령 서남 40리의 솔랑리로 급파하였다. 솔랑리에 주둔하고 있던 김수민 의병부대는 다가미 부대의 기습공격을 받고 치열한 전투를 전개하였지만 60여 명의 사상자를 내고 구식 대포 8문을 빼앗기는 피해를 입었다.
일본군의 기습공격으로 김수민 의병부대의 전열이 일시 흐트러지자 재정비할 시간을 주지 않고 섬멸시키겠다는 의도로 일본군은 탄압병력을 증원하였다. 이에 따라 23일 대전에서 개성수비대로 증파된 보병 제47연대 제7중대의 1소대를 장단 방면으로, 21소대를 양합리(兩合里) 방면으로 배치하였다. 이어 27일 일본군은 본격적인 김수민 의병부대 근거지 섬멸작전에 들어갔다. 먼저 부대를 둘로 나눠서 일대는 동막(東幕) 동방에서 솔랑리의 후면으로, 일대는 연지동(蓮池洞) 동방 고지로 이동하였다.
그러나 일본군의 동향을 파악한 김수민 의병부대는 고지에 포를 장치하고 진격해 들어오는 일본군을 공격하였다. 일본군의 공격을 교묘히 받아친 김수민은 28일 장단군 고부성(高斧城) 부근에서 일본군헌병대와 교전 후 근거지를 장단군 열은동(悅隱洞) 부근으로 이동하였다. 그곳에서 의병부대를 재정비하고 농민들을 규합하였다.
열은동에서 의병부대를 재정비하는 사이에 김수민은 척후장인 김오룡(金五龍)과 한유삼(韓有三) 부대를 마전으로 이동시켰다. 마전에 도착한 이들은 11월 30일 의병부대의 근거지를 지도로 작성하는 임무를 띠고 의병을 정찰하고자 마전시장에서 밀행하고 있던 마전주재소 총순 한복진(韓福鎭)을 처단하였다.
한편, 김수민 의병부대는 일본군과의 치열한 교전을 이어가면서도 허위와 연합의병을 구성하였다. 당시 허위는 관동창의대장 이인영과 긴밀한 연락을 주고받으면서 전국적인 연합의병체인 13도창의군 창설에 핵심적인 역할을 하였다. 13도창의군은 이인영을 총대장으로 하여 허위, 민긍호, 이강년 등 주요 의병장들이 참여하였으며, 서울진공작전을 추진하였다.
서울진공작전은 서울을 점령한다는 군사적 목적으로 추진되었지만 그 내면에는 유리한 정치적 위치에서 국권회복 문제에 대해 통감부와 ‘담판’한다는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담판이 실패할지라도 송병준, 이완용, 박제순, 권중현, 이지용 등 친일반민족행위자를 처단하고 의병이 신용하는 인물로서 정부를 구성하고 모든 외국인을 몰아내어 우리나라의 독립을 보전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이러한 목적 아래 서울진공작전의 작전계획은 먼저 군사장에 임명된 허위가 선봉대를 이끌고 서울 동대문 밖 30리에 도착하면 뒤이어 총대장 이인영이 후속 본대와 각도 창의대장이 진군하여 약속한 기일에 약속한 지점에 도착하여 일시에 서울을 공격하는 것이었다. 약속한 집결지로 양주를 선택하였다. 이에 따라 각도의 의병들은 양주로 출발하였으며, 김수민도 900여 명의 의병부대원을 이끌고 허위의 지휘를 받으며 양주로 향하였다.
그러나 서울진공작전은 시작부터 차질을 빚었다. 1908년 1월 군사장 허위가 선봉대 300명을 이끌고 서울 동대문 밖 약 30리 지점에 도착했을 때 후속 부대들이 일본군과의 교전으로 아직 도착하지 않은 상황에서 허위의 선봉대도 일본군의 공격을 받아 후퇴하게 되었다. 김수민 의병부대도 허위의 후군으로 양주로 향하였지만 아직 장단, 마전일대를 벗어나지는 못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일본군 다가미 대위가 이끄는 일본군 26명과 한국인 장교 이하 15명이 개성에서 장단, 마전방면으로 출진하였다.
다가미 부대는 1월 21일 오전 김수민 부대가 주둔하고 있던 구화장 서북쪽 열은동 및 그 서북방 고지를 기습공격하였다. 일본군의 기습에 구식 대포까지 동원하여 치열한 전투를 전개하였지만 기습공격을 당해내지 못하였다.
이 전투에서 김수민 부대는 전 시위보병 제1연대 제1대대 부향관(附餉官)이었던 현덕호(玄德鎬) 이하 28명이 전사하는 큰 피해를 입고 결국 송탄(松灘)을 거쳐 22일 구석리 부근으로 퇴각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서울로 진군하던 이인영이 1908년 1월 28일 문경에 있던 부친의 사망 소식을 접하자 부친의 장례를 치르기 위해 문경으로 돌아갔다. 총대장의 갑작스런 귀향과 참여 부대들의 진군 차질로 서울진공작전은 실패로 돌아갔다.
경기동북부 연합의병 활동과 유격전
1908년 2월 서울진공작전이 무산된 뒤 김수민은 의병부대를 이끌고 장단군 구화장 방면으로 되돌아왔다. 그는 이곳을 근거지로 하면서 양주, 포천 등지의 의병들과 연합하였다. 경기 동북부 지역 의병들과 연합의병을 형성하여 개성, 연천, 마전 등지로 이동하면서 의병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는 서울진공작전 실패이후 전국적인 연합의병의 형성보다는 창의지역을 근거지로 소규모 연합의병을 구성하여 유격전을 기본 전술로 일본군을 상대하겠다는 것이었다.
1908년 2월 초순 경기동북부 지역 연합의병의 모습은 바로 나타났다. 김수민은 여러 의병장과 함께 700여 명의 의병을 이끌고 장단 고랑포 등지를 공격하였다. 이어 2월 13일에는 100여 명의 의병을 이끌고 개성 북방 대흥산(大興山)에서 일본군과 교전하였다. 또 14일에는 2명의 의병대장과 연계하여 부하 90여 명을 이끌고 연천군 읍내를 공격하여 우편취급소와 헌병분파소를 파괴하였다.
이러한 의병전술에 일본군도 밀정, 척후활동의 강화 등을 통해 의병부대의 동향을 파악하여 기습공격을 가하고 있었다. 2월 20일 김수민 의병부대 200명은 개성 북방에서 일본군 금천수비대 척후대(斥候隊)의 기습 공격을 받아 19명이 전사하고 20여 명이 부상을 당하였다. 또 23일에는 의병 100여 명이 장단군 동도면(東道面) 사세리(砂世里, 沙也里)를 공격하였지만 이를 탐지한 일본군 및 경찰관 연합토벌대의 습격을 받아 몇 시간에 걸쳐 치열한 전투를 전개하였지만 19명의 사상자를 내고 장단군 구화장 방면으로 퇴각하였다. 이처럼 일본군은 밀정, 척후활동 등을 통해 의병부대의 동향을 파악하고 기습공격을 가함으로써 의병활동을 위축시키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일본군의 탄압에도 김수민 의병부대는 경기 동북부 지역에서 주도적인 의병항쟁을 전개하였다. 특히, 정찰활동을 강화하여 일본군 정찰대를 기습 공격하고 분산하여 이동함으로써 일본군의 의병에 대한 정찰활동을 약화시키고자 하였다. 3월 24일 김수민은 부하 150명을 이끌고 고랑포(高浪浦)에서 마전군(麻田郡)으로 진출하여 군내면(郡內面) 냉정리(冷井里)에 매복해 있다가 정찰 나온 일본군수비대 마스마(增田) 상등병 외 4명을 공격하였다. 이어 일본군수비대의 탄압을 피해 부대를 나눠 장단군 구화장(九化場)과 고왕산(高旺山) 방면으로 분산하여 이동시켰다.
이는 김수민이 일본군 정찰대의 활동에 대한 대응을 잘 보여주는 것이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김수민의 척후장(斥候將) 김오룡(金五龍)이 체포되었다. 그는 개성군 홍문동(弘門洞)에 잠복하여 개성수비대와 경찰대의 행동을 정찰하였으며, 의병에 대한 밀첩활동을 하던 마전주재소 총순 한복진(韓復鎭)을 처단하는 등 중요한 활동을 한 인물이었다.
김수민의 연합의병 및 유격전은 예하부대 사이에서 이뤄지고 있었다. 박종한(朴宗漢) 의병부대의 중군장 한창렬(韓昌烈)은 김수민 의병부대의 좌익장(左翼將)인 전복규(田福奎, 全福奎), 유충열(柳忠烈, 柳春烈) 등과 합진하여 3~4월까지 파주, 교하, 고양, 장단 등지에서 활동하였다.
4월 들어서는 김수민은 주요활동 무대를 마전군에서 다시 장단군으로 이동하였다. 김수민은 20~30명 정도의 인원으로 유격대를 편성한 후 4월 16일 구화장(九化場) 헌병분견소를 공격하여 병기와 탄약을 빼앗는 전과를 올렸다. 여기서 노획한 병기, 탄약으로 의병부대를 재정비하고 장단 풍덕(豊德) 일대로 세력을 확장하였다. 당시 김수민이 유격전에 얼마나 능숙했는지를 일본군의 작전보고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이 토벌을 위해 장단 · 구화장 · 양합리(兩合里) · 개성 · 풍덕의 각 수비대와 헌병 등이 협력하여 실시하고, 때로는 소집단을 궤란시켜 약간의 손해를 입혔으나 아직 적염(賊焰)[의병세력]을 종식시키지 못했다.”
이러한 김수민의 활동에 대해 일본군도 김수민은 장단군 출생으로 덕망이 군 내외에서 으뜸이라고 하였다. 또 부하 100여 명을 이끌고 경기, 강원, 황해의 3도에 출몰하여 일본군 수비대와 경찰대를 공격하여 큰 타격을 입혔으며, 군사전술에도 능하여 이산, 집합을 적절히 잘하였다. 그래서 일본군에 의해 궁지에 몰린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으나 능히 빠져나가 지금도 부하를 곳곳에 배치하여 본인은 작은 규모의 의병부대장으로 활동하므로 체포하기가 힘들다고 평가하고 있었다.
김수민 의병부대에 의해 큰 피해를 입은 일본군은 김수민 의병부대를 탄압하기 위해 편성된 토벌대는 헌병 100여 명과, 삭령수비대, 적성수비대, 5개 토벌대, 5개 척후대로 구성된 대규모 부대였다. 이렇게 편성된 일본군토벌대는 5월 2일부터 약 20일 동안 개성 부근 일대에 대한 대대적인 의병탄압작전에 나섰으며, 지역을 확대하여 삭령, 마전, 토산, 철원, 영평 등 황해도 일부를 포함한 임진강 유역과 경기 동북부 지역까지 장기간에 걸친 그물망 같은 의병탄압작전을 단행하였다. 이로 인해 김수민 의병부대는 큰 타격을 입어 6월에서 10월까지 장단군에는 부분적으로 10∼20명, 많게는 50명 안팎의 의병들이 무리를 지어 활동하였으나 앞 시기에 견주어 매우 침체되었다.
11월에 들어서 김수민은 장단군 대남면(大南面)에서 김인성(金仁成, 金寅成)을 부장(副將)으로, 신광삼(申光三)을 대장(隊長)으로 삼고 재개하였다. 그는 김복규(金福奎), 박종한(朴宗漢), 연기우(延基羽) 등과 함께 장단, 마전, 연천 등지에서 각 촌에 방곡령을 내려 미곡의 유출을 금지하여 이곳의 상업활동이 일시 두절될 상태에 이르렀다. 김수민의 재기에 일본군도 척후활동을 강화하였다. 그 과정에서 11월 6일 김수민이 의병부대원 30명을 동원하여 장단군 천곡리(舛谷里)에서 겨 6석을 징발하여 동민에게 보관해 둔 것을 11월 18일 양합리 일본군 헌병분견소 토벌대가 탈취하였다.
김수민은 12월 들어 그 세력범위를 확대하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김수민은 12월 9일 오전 8시 부하 40명을 장단군 대위면(大位面) 나부리(羅浮里)에서 강남면(江南面) 우근리(于勤里)를 거쳐 소남면(小南面)과 강남면 독정리(獨正里) 방면으로 이동하도록 하였다. 이러한 조치를 취한 후 본인은 같은 날 오전 6시 부하 90여 명을 이끌고 황해도 금천군(金川郡) 서면(西面) 압수동(鴨水洞)으로 이동하여 그곳 헌병보조원 8명과 2시간 동안 치열한 교전을 전개하였다. 이어 오전 11시경 부하 80여 명을 이끌고 장단군 소남면 방화동(訪花洞)으로 이동하다가, 오후 3시경 지금리(知琴里)를 공격하였다.
이후 부대를 나누어 대부분은 대남면과 삭령 등지로 이동하였고, 나머지 13명은 강남면 독정리로 이동하였다. 강남면 독정리로 이동한 부대는 10일 독정리를 공격하고 다음 날 구곡동(舊谷洞)을 거쳐 다시 소남면으로 이동하였다. 이처럼 김수민은 자신의 부대를 소부대로 분산시켜 활동하면서도 일정하게 다시 모일 곳을 약속하고 이동하였음을 알 수 있다.
해가 바뀌어서도 김수민 의병부대는 소규모로 활동하였지만 그 세력범위를 확장하고 있었다. 1909년 1월 25일 김수민은 부하 20여 명을 이끌고 토산군 유촌면(柳村面) 육수동(六修洞)을 공격한 후 안협군 방면으로 이동하였다. 안협군에서는 서면(西面) 문암리(文岩里) 마탄동(馬灘洞)에서 안협주재소 사정(使丁)을 공격하여 안협군 내의 일본군수비대 및 헌병대가 있는지 없는지 등의 정보를 입수하였다. 또 군자금을 징발한 후 흔적을 남기지 않고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였다.
김수민은 2월 26일 부하 25명을 이끌고 장단군으로 돌아왔다. 그는 송남면(松南面) 면장에게 ‘창의도독부사령장겸군량관(倡義都督府司令將兼軍糧官)’의 명의로 격문을 전하였다. 그 내용은
“… 위로는 종사를 보존하고 아래로는 창생을 구할 계책으로 의병을 일으킨 후 년(年)을 경(經)하고 세(勢)를 열(閱)하니 나라가 기울고 백성은 피폐해 지는 것을 모르는 바 아니지만 … 대진(大陣)의 군용(軍用)이 시급하니, 각리(各里)의 부민(富民)(1, 2等등의 戶호)에게 군수금 200원(圓)을 분배하여 오는 3월 1일까지 진중(陣中)(倡義都督部창의지독부-인용자)에 납(納)하라”
는 것이었다. 김수민은 자신의 근거지에서 군자금을 모집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 명의가 ‘창의도독부사령장겸군량관’으로 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의병부대를 재편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군자금 모집과 함께 군자금을 거부한 자에게는 혹독한 처벌을 가하기도 하였다. 3월 9일 김수민은 부하 6명으로 하여금 군자금 모집에 불응한 안협군 군내면(郡內面) 대동(岱洞)의 재산가 정창순(鄭昌淳)을 삭령군 북면 갈곡동(葛谷洞) 방면으로 붙잡아 들인 후 의병의 근거지인 철원군 보개산중에 감금하였다.
이후 김수민의 활동에 대해서는 김수민이 3월 10일에서 14일 사이 부하 100~800여 명을 이끌고 풍덕군 황매동(黃梅洞)을 출발하여 강화도서 해적 권모(權某)와 합진하여 강화, 풍덕, 통진, 김포 사이를 배를 타고 내왕하다가 야음(夜陰)을 틈타 상륙하여 군자금을 징발하였다거나, 이은찬, 김교성, 윤인순, 정용대 등 창의원수부 소속 의병부대와 불화로 몸을 숨기고 있다는 등 확인되지 않는 일본군의 첩보들이 난무하였다.
새로운 항일투쟁의 시도와 순국
1909년 3월 군자금 모집에 ‘창의도독부사령장겸군량관’ 명의로 격문을 보낸 시점에 의병부대의 재편과 의병운동의 새로운 시도가 나타나고 있었다. 특히, 서울에 잠입하여 총기 및 군수품을 구입하는 경우가 있었다. 김수민이 처음으로 서울에 잠입한 것은 3월 20일 경이었다. 3월 20일 밤 서울 북문을 통해 잠입한 김수민은 경부(京部) 이화령(梨花寧) 앞에 거주하면서 총기와 군수품을 구입하였다. 그런데 이런 김수민의 서울 잠입에 대해 일본군도 첩보를 통해 파악하고 있었다. 당시 일본군 헌병사령부는 김수민이 서울의 서소문 밖 석교 등지에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였지만 그를 체포하는데 실패하였다.
이후에도 김수민의 서울 잠입은 계속되었다. 4월 15일 김수민의 예하 의병장 정완식(鄭完植)이 부하 12명을 이끌고 황해도 금천군 대남면(大南面) 기곡(基谷)에서 하정동(下頂洞)으로 통하는 산중에서 평산헌병토벌대와 치열한 교전을 하는 가운데 김수민은 단발총 60정을 비롯한 다수의 군수품을 구입한 뒤 서울을 빠져나왔다. 총기와 군수품을 서울에서 구입한 김수민이 급하게 만난 사람이 당시 적성에 있던 연기우 의병장이었다. 김수민은 연기우와 ‘형제의 결의’를 맺고 그에게 구입해온 단발총 40정을 주었다. 이는 김수민과 연기우가 새롭게 연합의병을 추진하는 것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연기우와 연합의병을 추진 한 김수민은 근거지도 적성군으로 옮겼으며, 부하들에게 적성군의 부호들을 상대로 돈과 곡식을 징발하도록 하였다. 이처럼 총기구입과 군자금 모집에 적극적이었던 것은 연합의병을 통해 새로운 작전을 시도하고자 하였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그가 연기우에게 보낸 편지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現今 國勢가 日異月變야 同胞의 救活이 渺然無期야 人民의 禍色이 迫頭 즉 從今以後로 兩陣이 聯合야 京城에 侵入야 早速圖之 이만 不如다”
그 내용을 보면 지금 국세가 하루 다르고 매월 변화여 동포를 구하기 묘연하고 기약이 없어 인민에게 화가 미치고 있으니 지금 이후로는 양 의병부대가 연합하여 서울을 공격할 것을 제안하고 있었다. 즉, 김수민은 연합의병을 형성하여 서울진공작전을 추진하고자 한 것이었다. 이 무렵 서울에서는 연기우가 부하 수백 명을 영솔하고 불시에 서울로 쳐들어온다는 소문이 파다하다는 보도가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김수민이 연기우와 연합하여 서울진공작전을 계획한 것은 당시 의병부대의 상황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하겠다. 1909년에 들어서면서 의병은 일본군의 대대적인 탄압으로 그 위세가 크게 꺾이었다. 경기의병도 마찬가지였는데, 1909년 3월 창의원수부 우군장 윤인순이 전사하고 중군장 이은찬이 체포되는 등 많은 의병장들이 전사하거나 피체되고 있었다. 이처럼 경기의병의 형세가 크게 약화되고 일본군의 탄압이 강화되는 가운데 마지막으로 대규모 서울진공작전을 시행함으로써 반전을 꾀하였던 것으로 보여진다.
그리하여 김수민은 서울의 정세를 살피고자 의병부대를 동생이자 선봉장이었던 김백수(金白洙)에게 맡기고 다시 서울로 잠입하였다. 인력거꾼으로 위장하고 서울에 잠입한 김수민은 북부(北部) 제동(齊洞)에 거주하면서 적정(敵情)을 살피었다. 그 과정에서 경성구세군(京城救世軍)에 가입하였다고도 한다.
그러나 김수민의 서울 잠입은 일제에 의해 포착되었다. 일본군은 이전에 서울에 잠입했던 김수민을 체포하려다 실패한 경험이 있어서 서울 곳곳에 밀정 등 비밀 정탐객을 심어놓고 감시의 눈을 번뜩이고 있었다. 더욱이 경시청과 헌병대사령부가 경쟁하듯이 정탐객을 변장시켜 김수민 체포에 혈안이 되어 있었다.
서울의 상황이 생각보다 여의치 않자 김수민은 서울 잠입 약 1개월 후 고양군(高陽郡) 하도면(下道面) 화전리(花田里)로 피신하였다. 하지만 1909년 8월 12일 오후 1시 경성필동헌병대에 발각되어 부하 2명과 함께 체포되었다. 뿐만 아니라 김수민과 그의 부하를 지원했던 지역주민 200여 명의 명부인 도록책자(都錄冊子)까지 압수당하고 말았다.
체포된 후 헌병대사령부에서 취조를 받으며 모진 고문 속에서도 ‘나를 죽일지 살릴지 빨리 결정할 것이고, 나에 대하여 장황하게 질문하여도 답할 것이 없다’고 하며 끝까지 동료 의병을 보호하며 일본군의 고문을 이겨내고 있었다. 그러나 일제는 소위 내란죄라고 하여 교수형에 처하고 마침내 12월 7일 교수형을 당함으로써 2년여에 걸친 구국 의병전쟁을 마감하였다.
의병장 김수민활동의 의의
의병장 김수민은 농민이었지만 용력이 뛰어났을 뿐만 아니라 사격술에도 능하여 백발백중의 명사수였다. 또한 화약과 탄약을 제조할 줄 알아서 의병부대의 자체 무장에도 큰 역할을 하였다. 이런 능력이 있었기에 그의 휘하에 많은 농민들이 모여들었으며, 많을 때에는 2천 명에 이르렀던 것이다.
김수민은 의병전술 면에서도 매우 능하였다. 주로 전력이 약한 부대가 강한 부대를 상대로 활용했던 비정규전이었던 유격전을 잘 활용하였다. 그는 본인뿐만 아니라 예하 의병장들을 소규모 부대로 나누어 교묘히 이합집산을 하여 각지에 출몰하면서 일본군을 기습적으로 공격하여 궁지에 몰아넣었다. 그리하여 그를 신출귀몰하다고 하였으며, 그 세력 범위도 임진강의 좌우 연안에서 강화도까지 뻗치고 있었던 것이다.
김수민은 전술, 무장, 정보력 등을 바탕으로 유격전을 펼치며 일제가 각지에 설치한 최일선의 침략기구인 일본군 헌병분견소, 우편취급소 등을 직접 공격하여 큰 피해를 입혔다. 여기에 일제의 침략시설이 되었던 철도, 전선 등을 파괴하고 절단하면서 일제의 침략에 저항하고 있었다.
김수민은 1907년 의병전쟁 시기 경기의병의 한 축으로 경기 동북부 의병운동을 주도적으로 이끈 의병장 중 한명이었다. 관력이 있기는 하였지만 농민으로써 의병전쟁에 농민들을 주도적으로 이끌 수 있었으며, 전술, 무기제조 등 군사적 측면에서 뛰어난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일본군의 탄압으로 의병세력이 어려움에 빠지자 13도창의군에서 실패한 서울진공작전을 재추진하면서 서울에 잠입하여 무기를 구입하고 적정을 살피는 등 의병운동의 재기를 이끌고자 하였으나 일제에 체포되어 교수형을 당함으로 2년여 의병투쟁을 마감하였다. 대한민국정부에서는 1962년 김수민에게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김수민 [金秀敏] - 인력거꾼으로 위장해 적진에 뛰어든 신출귀몰한 농민의병장, 건국훈장 독립장 1962 (독립운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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