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 행
배 동일
사발농사
어느 집이나 풍족하지 못하고 겨우겨우 밥 세 끼 찾아 먹는데도 어려웠다. 우리 부모님은 방학이 되면 자식들을 큰 집, 작은 집, 고모 집, 외갓집으로 보냈다. 처음에는 멋모르고 친척 집에서 갔었는데, 한번 두번 가다 보니 사발농사인 것을 알았다. 지금도 눈치가 없어서 곤란한 때가 있다. 어린 시절 혼자서 용산역에서 야간열차를 타고 밤새 달려서 새벽에 다산이라는 간이역에 동그마니 혼자 내렸다. 그리고 먼동이 터오는 길을 걸었다. 어린 마음에 그런 일들이 마음에 안 들었다. 친척 집 가는 발길이 무거웠다.
어느 해인지 떠오르지 않지만, 아마 중학교 다닐 때였던 것 같다. 그날도 야간열차를 타고 시골에 갔다. 오늘 밤에는 어떤 사람이 나와 같이 여행할까? 옆자리에 예쁜 여학생이 앉아주기를 기대하였지만, 현실은 할아버지 할머니가 자리를 차지했다. 어느 날 나보다 나이가 더 많은 누나 또래 여학생이 옆자리 앉았다. 설렘, 가슴은 두근두근했다. 야간열차는 서서히 출발하고, 나는 말을 하고 싶었는데, 누나가 먼저 이야기를 하였다. 누나는 고등학생인데 집안이 경제적으로 힘이 들어 구로 단지 전자 회사에 다닌다고 했다.
“너 같은 동생이 있는데 학비를 벌어야 해…….″
나는 속으로 대꾸했다.
‘우리 누나도 그랬는데…….’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으며, 아픔을 나누면서 여행의 재미를 느꼈다.
여행의 의미
고등학교 졸업 후 친구들하고 한 달 동안 남해 바닷가 여행할 때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여행은 완행열차를 타고 가는 것이 낭만이다. 야간열차를 타면 ‘김밥, 계란, 심심풀이 땅콩이 왔어요’ 외치던 특이한 목소리의 판매원이 그립다. 서대전역에서 땡땡 부른 가락국수 먹을 때 그래도 맛은 있었다.(언제인가 똑같은 장소에서 국수를 먹여 보았는데 맛은 예전처럼 없었다.)밤새도록 달려온 열차는 완행, 특급, 새마을호, 무궁화 열차까지 다 보내고 출발하였다. 바쁜 것도 없고 즐기면서 세월을 낚았다. 그 시절이 그립다. 그렇게 즐기면서 여수에 도착했다. 처음으로 만난 사람하고 대화를 나눌 때는 구수한 남도의 정을 느낄 수 있었다.
검은 모래로 유명한 만성리해수욕장, 오동도, 상지 해수욕장 등 흑 모래는 지금도 있을까? 한려수도 유명한 관광지는 걸어서, 혹은 버스를 타고 다닐 때 고생도 모른 체 즐겁기만 했다. 무전여행은 최소한 경비를 산출하여 배낭에 쌀, 코펠, 버너, 텐트 등 다 가지고 가다가 마음에 들면 경치 좋은 곳에서 1박 했다. 그것도 한 달 동안 남해안 곳곳을 돌아다녔다.
자연스럽게 몰골이 상거지였었다. 군대에 가기 전에 고생한다고 여행을 한 것이었다. 옛말이 젊어서는 고생은 돈 주고도 못 한다고 하면서 한려해상국립공원, 부산태종대, 자갈치시장 등 발길이 가는 대로 걸었다. 여행은 떠나고 싶을 때 떠나는 것이 여행이다. 살면서 그러한 것이 힘이 들지만, 계획 없는 여행은 짜릿한 맛을 준다.
예전에는 마음대로 여행하였지만, 이제는 장애인이 되어 준비성 없이 여행하는 것이 두렵고 힘이 든다. 젊은 날 남해, 동해안 여행을 하였는데 이번에는 서해안 일주를 하고 싶다. 원칙을 정해놓고 하루 3시간은 무조건 걸으면서 체력과 정신력을 시험을 하고 싶다. 동생 집으로 여행할 때 준비성을 보고 나 자신이 놀랐다. 열차 시간, 주변의 관광지, 평상시 먹을 약, 세면도구, 지팡이, 카메라, 필요한 옷 등 준비하니 배낭이 가득했다. 혼자 여행은 준비성이 철저해서 고생 덜 하게 된다. 병이 나서 잃은 것도 있지만 얻은 것이 더 많다. 병이 안 났으면 감사함을 몰랐을 것이다. 몸이 불편한 이제는 느림을 생활화하여야 한다. 바쁜 것도 없고 병이 나기 전에는 무엇이 그토록 바빴는지 모르겠다. 이제는 느림 철학을 배우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