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지속의 섬' 그 섬에 가고싶다
"물위에 떠있는 섬"이라는 뜻의 수도리
김우출(k82115) 기자
경북 영주시 문수면 수도리(水돌이) 무섬마을. 안동 하회나 예천 의성포를 빼닮은 물돌이동이다. 그러나 관광지가 돼버려 번잡해진 하회나 기와집 한 채 제대로 볼 수 없는 의성포와는 사뭇 다르다. 무섬마을은 아직도 사람의 발길조차 드문 깡촌이지만 마을 안에는 기품있는 고가가 흩어져 있다. 영주시내에서 자동차로 30분 정도 거리에 있는 무섬은 "육지속의 섬"이다.
마을 뒤쪽 일부가 육지로 연결돼 있을 뿐 마을 주변이 안동 하회마을이나 경북 예천 의성포 마을처럼 온통 강물로 격리되어 있다. 안동 하회마을이나 예천 의성포(회룡포)마을은 이미 많은 관광객들로 인해 번잡하다. 관광명소로 부상하면 상업화되는 것처럼. 이에 반해 무섬은 별로 알려지지 않은 곳이다. 관광객들의 발길이 아직 닿지 않아 한옥마을로서의 적막함과 조용함을 간직하고 있다. 무섬마을은 현지에서 수도리 마을로 불린다.
"물위에 떠있는 섬"이라는 뜻의 수도리가 무섬으로 바뀐 연유는 아는 이가 없다. 물섬으로 불리다가 무섬으로 됐을 것으로 추측할 뿐이다. 마을을 휘감고 도는 강은 내천이다. 낙동강 상류 물줄기다. 강변에는 넓은 백사장이 펼쳐져 있고 깊은 곳이라야 허벅지에 찰 정도로 수심이 얕다. 시간을 정지시키듯 맑은 강물이 도도히 흐른다. 무섬으로 연결되는 유일한 통로인 수도교를 지나는 순간 한 노인이 소달구지를 끌고 강을 건넌다.
마을입구에서 만난 박건우(63) 씨는 농토가 외지에 있어 가는 중이라고 설명한다. 마을 주민들은 강건너 영주쪽 땅을 외지라고 부른다. 박 씨는 "여름에 모래로 뚝을 만들고 발을 쳐 물고기를 많이 잡는다"며 "이런 개매기 하는 곳은 여기밖에 없다"며 은근히 자랑한다. 무섬마을에는 현재 50여 가구가 살고 있다. 젊은이들은 대부분 외지로 나가고 노인네들만이 옛집을 지키고 있다. 마당 구석과 몇 평 안되는 밭뙈기에 심은 고추 토란 호박 감나무 등을 돌보는 게 이들의 소일거리다.
고색창연한 옛 기와집과 전통 가옥이 많지만 지은지 얼마 안되는 양옥도 2~3채 있어 영 눈에 거슬린다. 하지만 울타리마다 호박넝쿨이 출렁이고 마당과 툇마루에는 고추 대추 호박 토란을 말리는 전경이 고향에 온 듯한 느낌을 줄 정도로 정겹다.
반남 박 씨 11대조인 박수 선생이 이곳에 거처하던 고택이 남아있는 것으로 볼 때 17세기경부터 사람들이 이 곳에서 살았던 것 같다.
수도리(水島里). 무섬이란 지명은 ‘물섬’을 뜻한다. 영주에서 흘러온 영주천과 예천을 비껴 흐르는 내성천이 마을 앞에서 만나 350도 정도 마을을 휘돌아가는 지형이 영락없이 ‘뭍 속의 섬’이다. 앞산에 올라가 무섬을 내려다보면 첩첩 산줄기가 날개를 펴서 마을을 감싸고 있는 것 같다. 풍수가가 아니어도 마을의 생김새가 범상치 않다는 것을 한눈에 알 수 있다.
“강 건너 앞산은 소백산 줄기이고 마을 뒷산은 태백산 줄기라. 풍수학상으로는 매화가지에 꽃이 핀다는 매화낙지라고도 하고, 물 위에 연꽃이 피었다는 연화복수라고도 하제” 반남 박씨 입향조의 11대손 박윤우(73) 씨는 “옛날부터 영주에서는 알아주는 반촌이었다”며 고가의 중수기에 나오는 내용을 설명해준다. 마을이 생긴 것은 1666년. 마을에서 가장 오래된 만죽재의 기와에 연대기가 새겨져 있다.
안동에 터를 잡고 살던 반남 박씨들이 난세때 영주로 옮겨왔고, 입향조인 박수가 무섬에 터를 잡았다. 반남 박씨에 이어 250여 년 전 박씨 문중과 혼인한 예안 김 씨도 뿌리를 내렸다. 모두 50가구 중 100년 이상된 고옥만 16동. 도 민속자료, 문화재자료 등으로 지정된 것이 9동이나 된다.
다리를 건너면 최근 수리를 마쳐 잘 단장된 예안 김 씨 집안의 해우당을 비롯해 반남 박 씨 입향조가 세운 만죽재, 고종때 병조참판을 지냈던 박재연의 고택 등이 늘어서 있다. 특히 박재연의 고가 대청마루에는 당시 교분을 나눴던 실학자 박규수의 글씨 ‘오헌(吾軒)’과 그 뜻을 담은 현판기가 붙어 있다.
서울식의 ‘ㅁ’자형 주택
‘아는 듯 모르는 듯, 유하지도 아니하고, 강하지도 아니하고…’ 양반은 물론 농투성이 일꾼들과도 무람없이 술잔을 함께 나눴다는 그의 실학정신과 선비정신이 현판기에 담겨져 있다. 고가 대부분이 서남향. 북동쪽(간좌)에서 서남쪽(곤향)으로 흐르는 산맥의 정기를 고스란히 이어받도록 ‘간좌곤향(艮座坤向)’으로 지어졌다고 한다.
박윤우 옹은 나침반을 꺼내 향배(向背)를 짚어가며 그 의미에 대해서도 설명해준다. 경북지방의 집 구조와는 달리 서울식의 ‘ㅁ’자형 주택이라는 것도 독특하다. 고택을 둘러보다 요즘은 거의 자취를 감춘 띠자리를 짜고 있는 80대 촌로도 만났다. 띠자리는 제사때 쓰는 제석. 강변이나 밭둑에서 자라는 띠는 발에 생채기를 낼 정도로 강하고 번식력이 뛰어나 자손의 번성을 뜻한다고 한다. 허리가 굽었어도 흐트러짐 하나 없이 앉아 돌멩이에 줄을 매달고 씨줄 날줄 챙겨가며 한줄한줄 엮어내는 모습이 여간 정성스럽지 않다.
“옛날에는 30리 밖까지 무섬땅이었는데 토지개혁때 모두 뺏겨버렸어. 요즘은 마을에 늙은이밖에 없어. 환갑 안지낸 사람이 겨우 셋이여…” 빈 집만 16동. 그나마 마을을 지키고 있는 촌로들이 떠나면 후손들이 다시 돌아올 것 같지 않아 걱정이라고 했다. 새로 지은 사각형의 시멘트 집도 있지만 고샅길을 돌 때마다 세월의 더께가 고스란히 묻어있는 고가를 만날 수 있다. 마을 앞 강변에는 요즘 보기 드물 정도로 너른 모래사장이 펼쳐져 있다. 겨울이라 물이 줄어들었지만 여름에는 물놀이에 충분할 만큼 수량이 많다.
다리가 놓인 것이 83년. 그전까지 겨울이면 섶다리를 3개씩 놓고 오갔고 봄이면 다시 거둬들였다. 마을앞 논다리(앞다리), 술도가집으로 이어지는 도가다리, 내성천과 영주천이 합쳐지는 지점의 합수다리다. 물이 줄면 고삐를 세게 잡고 누렁소 몰며 달구지를 끌고갔지만 물이 불면 꼼짝없이 갇혀 있어야 했단다. 담배 한 갑을 사려면 평은면 소재지까지 시오리길을 걸어나가야 했다. 지금 다리는 홍수로 쓸려내려가버린 뒤 92년 다시 놓은 것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강물을 그대로 마실 수 있을 정도로 맑았다. 마을에 샘이 없었던 것도 강물이 맑았기 때문이다. 반찬이 떨어지면 물고기를 잡아 밑밭찬을 만들곤 했다. 하지만 영주시가 커지면서 오수가 유입되고 물도 많이 흐려졌다. 호젓하다 못해 고요한 겨울을 나고 있는 강마을 무섬. 겨울이면 아직도 노인들이 띠자리를 만들고 장작을 패는 마을. 시간이 멈춘 듯 아스라한 옛날을 만날 수 있다.
문수면 수도리는 한 마디로 아름다운 자연과 옛고가가 그대로 보존된 전통마을이다. 수도리는 이름 그대로 내성천이 마을의 3면을 감싸안고 흐르고 있으며 그 가운데 섬처럼 떠있는 마을이다. 안동 하회마을을 연상시키는 이 마을은 휘감아 도는 강을 따라 은백색 백사장이 펼쳐지며 맞은편에는 소나무, 사철나무 등이 숲을 이룬 나지막한 산들이 강을 감싸안고 이어진다.
이처럼 유유히 흐르는 강과 정겨운 자연, 고풍스러운 옛집이 즐비한 수도리는 고향을 찾는 편안한 마음으로 다녀오기에 좋은 곳이다.
[자료인용:한국경제]
가는 길 : 영동고속도로∼원주∼중앙고속도로∼영주IC∼영주직업전문학교지나 육교 앞 우회전∼평은으로 가다보면 적서농공단지 가는 길이 나온다∼문수초등학교(폐교된 후에 '영주전통예술교육관'으로 활용하고 있다)
조암교에서 1.3㎞ 정도 가면 문수로 가는 갈림길 이정표가 있다. 면사무소와 영주농협을 지나 경북학생야영장 3거리까지 2.9㎞. 좌회전해 강변을 따라간다. 4H클럽 표지석이 있는 승평교 앞까지 2.7㎞. 다리를 건너자마자 좌회전하면 포장을 하기 위해 다져놓은 비포장길이 나타난다. 마을 앞 다리까지 1.7㎞. 다리를 건너면 무섬마을이다.
청량리∼영주행 열차를 타고 간 뒤 현지에서 버스를 타고 들어가도 된다. 열차는 하루 9차례. 영주 성누가병원 아래에 있는 버스정류장에서 무섬마을 가는 버스가 하루 4차례 있다.
인근관광 : 흑석사, 장수관광농원, 장말손 유물, 가흥리마애삼존석불, 희방사, 초암사, 소수서원, 선비촌(청소년수련원이 있어 예약하면 숙식이 가능함), 부석사(최근 부석북부초등학교가 폐교된 후에 영주문화연구회의 조재현(016-558-0866)씨가 맡아서 부석공연문화학교로 활용할 예정임. 미리 연락하면 시설을 이용할 수 있고 야영도 가능함)
2002-04-16 1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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