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돈을 ‘숫자화’시켜 은행을 통해 거래하지 않는다. 장부에 적지도 않는다. 돈은 오직 지폐 혹은 돈다발로만 화면에 등장한다. 말하자면 돈의 ‘가치’는 부피가 알려주기라도 하는 듯한 장면 구성이다. 말로는 ‘억’ 단위의 거래를 하면서도, 돈을 꼭 현찰로 찾아서 봉투에 넣고 가방에 넣은 채로 (심지어!) 대중교통을 이용해 들고 다닌다. 두툼한 돈 봉투를 쥐고 상대방을 찾아가 그 앞에서 보여주고 흔들고 기어이 건네준다. 돈거래 내역은 다 구두로, 친분 속에서 하는 것들이다.
요즘 지상파 드라마 시청률 1위라는 KBS 주말극 ‘가족끼리 왜 이래’ 얘기다. 홀로 20여 년을 자식만 바라보고 산 차순봉(유동근 분)이 ‘이기적’인 자식 삼남매를 헌신적으로 키웠다는 스토리다. 홀로 된 고모(양희경 분)가 같이 들어와 살면서 삼남매를 20여 년째 자식처럼 돌보았다. 대신 고모의 딸과 사위까지 함께 사는 확대가족이다. ‘순봉씨네 두부 가게’에서 평생 두부만 만들어 팔아온 차순봉의 자식들은 나름 직업이 화려하다. 아버지의 헌신은 자식들이 취업할 때까지는 값어치를 한 듯 보인다. 딸은 중견 GK그룹 비서실장(사장 아들과 연애 감정 중), 의사인 큰아들은 땅 부잣집 데릴사위, 막내아들은 철은 없지만 실력 있는 요리사로 자리 잡았다.
물론 자식들의 속사정은, 돈 때문에 허덕인다. 큰딸 강심(김현주 분)은 오피스텔을 사느라 은행에 2억을 빚졌고 자나 깨나 빚 갚을 궁리다. 그걸 GK그룹 2인자 문태주(김상경 분)가 한 번에 갚아주자, 강심은 다시 대출을 받아 태주에게 돈을 갖다 준다. 강심은 2억이라는 현금을 조그만 핸드백에 넣고 나가 (소매치기가 무섭지도 않았는지)전무님이 세 들어 사는 강심 명의의 ‘은행 집’ 식탁에 올려놓는다. 돈이 오간 어떠한 기록이나 차용증, 확인서도 없이. 두 사람의 기억이 전부인 ‘믿음의 거래’라도 되는 듯이. 둘이 아마 결혼이라도 할 것 같다는 주말극 특유의 사건 전개를 배경으로.
빳빳한 지폐가 줄곧 등장하는 이 드라마를 보고 있으면 기분이 묘하다. 옷장 서랍에서 5만 원짜리 지폐 100장 묶음이 발견되는 집은 좀 뜻밖이다. 그런데 ‘드라마’로 별 이의제기 없이 받아들이며 본다. 요즘 실생활로는 말이 안 되지만, 그냥 본다. 어쩌면 돈은 저게 가장 자연스러운 ‘있을 곳’인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아직도 머릿속으로는 이런 돈뭉치를 ‘상상’하고 ‘사고’하는데, 금융의 현실 시스템만은 우리를 버리고 사이버 숫자놀음에 빠져있는지도 모른다.
숫자가 숫자를 벌어들이는, 자본수익률이 돈의 가장 으뜸 법칙이 된 세상에서 이 드라마가 그리는 ‘돈거래’는 귀여울 지경이다. 작은 부자들이 많이 존재하고 돈 봉투에 사람의 체온이나마 묻어 전달되는 세상이 아닌가! 비현실적인 설정임을 제작진이라고 모를까. 요즘 누가 누구를 믿는다고 저런 식의 돈거래를 하겠는가.
현실이 아니어도 좋으니, 그런 다복한 집을 보고 싶은 것이겠다. 문을 열고 들어가면 따뜻이 맞아주는 이가 있는 그런 집 말이다. 적어도 공영방송 주말 저녁 드라마라면 시청률이 아닌 시청자의 마음을 위로하기 위한 기획을 해야 하지 않겠는가. 시청료를 내는 시청자를 정말로 존중한다면 말이다.
‘불효 소송’이 대체 뭐야?
그런데 요즘 이 드라마는 본격적인 ‘줄거리’에 돌입했다. ‘착한 아버지’ 순봉씨가 ‘불효 소송’을 시작한 것이다. 두부를 만들어 팔며 생활해온 가게 딸린 집의 ‘부동산’ 가격이 갑자기 폭등한 직후다. 은행 빚에 일자리에 돈이 궁한 자식들은 아버지 생전에 ‘명의 이전’을 통해 재산을 받을 꿍꿍이다.
자식들은 “우리 아버지가 알고 보니 부자”였다며 각자 5억씩의 현찰을 받아 벼락부자가 될 꿈에 부푼다. 엄마처럼 키워준 고모네 식구들을 내치고, 아버지는 원룸으로 보내고, 건물 올릴 생각에만 골몰한다. 아버지는 다 괘씸하다. 새삼스럽게 자기 인생이 억울해 분노가 활화산처럼 폭발한다. 자식들의 일터로 ‘불효 소송’ 소장은 배달되고, 아버지 덕 좀 보려던 자식들은 기함하다 못해 “인연을 끊자”며 강력하게 대든다. 집안은 그야말로 풍비박산 나기 직전이다. 아버지는 두부 가게 단골인 변호사 변우탁(송재희 분)에게 말한다. “그놈들한테 들어간 비용, 노력, 시간.... 내 인생을 돌려받고 싶어요. 시간을 내놓으라고 할 순 없으니 돈이라도 내놓으라는 겁니다.”
▲ '가족끼리 왜이래'의 한장면, 법원 조정실에서 아버지와 삼남매(사진 출처= 유튜브 동영상 갈무리)
한없이 자상하고 따뜻하던 아버지가 절연(絶緣) 혹은 전쟁을 고작 담배 끊듯이 시도한다는 초유의 이야기가 ‘뉴스’도 아닌 ‘드라마’의 주요 줄거리다. 소송이야말로 다 잃어도 ‘돈’만은 지키겠다는 선언인데, ‘가족 드라마’의 핵심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제 ‘가족끼리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이런 ‘재벌가의 재산상속 싸움’에 어울릴 듯한 스토리가 서민 가정의 이야기로 둔갑했다. 재산이 엄청나게 있고, 자식에게 ‘미리’ 넘겨준 부잣집에서나 나올 특이한 뉴스인 줄 알았는데, 가난한 가장이 그걸 선언하고 흥에 겨워 덩실덩실 춤을 춘다. ‘아빠의 청춘’을 신나게 부르면서.
순하게 살아온 아버지는 왜 자식들과 대화가 아닌 소송부터 하는가? ‘15억 현찰’의 제안을 한 것은 땅 부자의 데릴사위처럼 들어간 의사 아들 차강재(윤박 분)의 장모(견미리 분)이고, 그녀는 “엄마가 말했지? 돈 앞에 장사 없다니까.”라며 만인을 깔보는 냉혈한이다. 아버지는 사부인에게 항의하지 않고 왜 자식들에게 돈부터 청구할까? 그것도 낳아주고 키워준 비용을 내놓으라는, 반인륜적 단서를 달고 말이다.
드라마가 마치 ‘회계장부’처럼 (말이 되든 아니든)돈을 둘러싼 스토리를 포장하는 과정을 지켜보자니 숨이 막힌다. 주말 저녁 가족이 마주앉은 밥상 같은 따뜻함은커녕 법적 용어만 난무한다. 어디서부터 뭐가 잘못되고 엉켜버린 것인지는 모르겠다. 다만 우리가 보고자 하는 주말 저녁의 이야기가 이건 아닌 것 같다. 그런데 오붓한 드라마를 원한다고 항의했다가는, 소송이라도 당할 것 같은 냉기 흐르는 TV 속 세상이다. 철컥철컥 관계와 정과 인연을 잘라내는 소리가 들려오는 듯하다. 살이 떨린다.
김원 (로사) 문학과 연극을 공부했고 여러 매체에 문화 칼럼을 썼거나 쓰고 있다. 어쩌다 문화평론가가 되어 극예술에 대한 글을 쓰며 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