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19일 토요일
오늘 아침 목5동성당에 가서 이영춘 본당 신부님 강론을 들었다. 그가 교회사를 공부하면서 발견한 것이, 조선대목구 초창기에는 조선교회 공동 수호자인 성모 마리아와 성 요셉을 적극 공경했는데, 노기남 주교 시대부터 요셉 성인에 대해서는 소홀한 점이 있었고, 그래서 더 깊이 연구한 결과 이것이 잘못됐다는 것을 알게 됐다는 것.
그래서 논문을 쓰고 바로잡아 나갔는데, 주교회의가 인정을 해주고 받아들여서 지금은 공동 수호자로 공경하고 있다는 것.
1831년 북경교구와 분리, 독립하면서 조선교구는 원죄없이 잉태되신 동정 마리아와 함께 요셉 성인을 공동 주보로 공경하게 된 것인데, 이영춘 신부의 "한국천주교회의 창설과 조선대목구 설정"에 따르면,
1. 조선 입국에 성공한 제2대 교구장 앵베르 주교는 1838년 12월 1일 자로 포교성성장관(주: 훗날 그레고리오 16세 교황)에게 서한을 보내어 지금까지 조선 선교지가 베이징 교구에 예속돼 있었던 관계로 주보인 성요셉을 아직까지 조선대목구 주보로 모시고 있으나, 이제 성모무염시잉모태(원죄없으신 성모 마리아)를 조선 대목구의 새로운 주보로 결정해주도록 요청했다.
2. 교황 그레고리오 16세는 이러한 앵베르 주교의 요청에 대해 1841년 8월 22일자로 교서를 발표해서 성모무염시잉모태를 조선대목구의 주보로정해주엇을뿐 아니라, 지금까지 조선교회를 지탱해준 성요셉 축일을 함께 주보로 지낼 것을 조건으로 덧붙였다.
3. 이렇게 조선대목구의 고유한 주보 설정이 이루어짐으로써 조선교회는 이제 베이징 보호권 교구로부터 관할권뿐 아니라 신심에 있어서도 완전한 독립을 이룰 수 있게 되었다.
<구일회>
어제 정진석 추기경 사제수품50주년 금경축에 동창사제 대표로 축사를 한 최창무 대주교가 서울에 머무르시는 것을 계기로 구일회 모임을 연희동 중국인촌 성원아파트 102동 18층 오태순 원로사목자 거처에서 열었다.
구일회는 조선교구 설정 150주년 행사를 준비한 멤버들이 행사를 마치고 나서 그 이듬해 9월에 조직한 모임으로, 교황 그레고리오 16세가 조선교구 설정을 결재한 날짜, 즉 1831년 9월 9일을 기념해서 '9일회'라고 이름붙인 것.
나는 이날 국수잔치 이후 오세훈 서울시장에게 진정할 것이 있다고 하는 정하상 무료급식소 운영자 정옥기씨를 사공정숙 서울평협 부회장에게 로얄호텔 식사장소인 21층까지 올라가서 소개햇다. <그물> 4월호에 나갈 평신도그리스도인 원고를 겨우 넘기고 신촌까지 가서 아내를 만나 오태순 신부님 댁에 올라가자 미사가 막 끝났다. 우리는 오전에 미사를 했기 때문에 바로 음식잔치에 함께 하게 됐다. 최대주교님과 오신부님, 구중서 선생, 최재선 선생, 김어상 교수 내외, 노길명 교수 내외, 조광 교수, 신헬레나 자매님, 이윤자 자매님, 그리고 우리 내외가 참석했다. 김감독은 부인이 엉덩이가 깨어지는 사고로 불참했고, 김현씨 내외도 어떤 사정으로 나오지 못한 모양.
주교회의 의장 주교의 오늘 축사에 대해서 이런저런 이야기가 나왔고, 4대강 문제에 따른 교회의 대응에 관해서도 이야기가 많았다. 평협이 대응한 것 잘했다는 이야기도 여러 차례 나왔다.
나는 소주 한잔 받아놓고 끝까지 버티려고 노력했고, 나중에 스카치 위스키가 나왔고, 양주 한병을 다 비우는 동안 나는 한모금도 받지 않았다.
그런데 돌아오는 길에, 목2동 체육관 앞에서 택시를 내려 산으로 올라가다가 가슴이 아파서 주저앉았고, 아내가 119를 부르는 소동까지 빚었다. 결국 의자에 앉아서 안정을 취하면서 회복이 되어 119를 취소했지만, 집에 들어가서 발과 손을 따고 야단을 쳤다. 건강에 조심해야지.
과식 탓인지, 음식은 독이라는 사실을 실감했다. 살아 있다는 것이 이토록 감사한 일인지, 아내는 하느님께 감사드린다.
오늘 아침 동네 의원에 내려갔더니 감기약은 먹지 말고 위장약을 지어준다면서 처방전을 쓴다. 월요일에 성바오로병원엥 가야 할 것인지.
<고 장대익 신부 책자>
숙제를 해야 한다. 이미 얼마의 돈을 받아 쓰기도 했지만, 의무는 이행해야 한다. <평협40년 백서>도 마무리해야 한다. 내 손을 거쳐야 책이 되어 나오는데, 내가 OK를 놓지 못하고 있으니 큰일이다. 생각 같아서는 다 놓아버리고 싶지만, 그래서는 안 된다. 어젯저녁 같이 쓰러져 다시 일어나지 못한다면 어쩔 수없는 일이니, 그런 일이 닥치기 전에 할일을 다 해두어야겠다.
성직이란 무엇인가?
어제 최창무 대주교님에 따르면, 성직자 되는 것이 자기 마음대로 된 것이 아닌 것과 마찬가지로 그만 두는 것도 하느님의 손길에 맡겨야 한다고 했다. 은퇴라는 것이 그렇다는 것이니, 하느님의 섭리에, 그분 손길에 맡겨드리는 일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3월 20일 사순제2주일
황사비가 내린 다음 맑게 개인 봄하늘을 본다.
아침 여섯시 본당 미사에 갔다가 아내를 상도동에 태워주고 오는 길에 우유와 우유에 타먹는 과자 한 상자를 사왔다. 미사 때 손을 짚고있는 나에게 이래라, 저래라 충고인지, 간섭인지, 잔소리인지, 아무튼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는 듯해서 잠시 화를 내고 돌아서 생각하니, 이건 아니다, 싶었다.
무조건 참는 것은 아니로되, 참견하는 사람의 입장도 생각핻주어야겠다는 생각이 설핏 들었던 것. 그저께 내가 산길에서 쓰러졌을 때 얼마나 당황해하며 119를 부르고 그랬던가! 그리고 그 다음 날 아침 살아 있다는 것에 대한 감사가 하늘에 닿았던 것을 생각하면 내가 단 한시도 소홀히 대할 수 없는 배우자가 아닌가.
마음을 고쳐 먹고 다시 시작하기로 했다. 평화롭게 미사를 봉헌할 수가 있었다.
혼자서 아침을 들고 서재에 올랐는데, 몸이 너무 피곤해서 다시 내려가 쉰다는 것이 시간을 조금 끌게 됐다. 토마스가 대전에서 올라왔다. 함께 점심을 들고 나자 정윤이도 일어나서 요기를 하고. 생활패턴이 각양각색이어서 어절 수 없다.
야샤 하이페츠의 연주로 지고이네르바이젠을 들으면서 추억에 잠기기도 한다.
서재의 여러 서류들을 보면서 다 없어지고 말 것을 왜 그리도 마음쓰면서 모아왔던가, 하는 자책도 든다. 시간은 없고 할일은 많다는 생각. 어떻게 요긴하게 신간을 활용할 것인가가 문제다. 제한된 시간에 하고싶은 일 다 한다는 것은 무리다. 어떻게 할 것인가.
방송작가협회의 원로 회원 단체인 문예포럼을 맡으라고 해서 회장이 됐는데, 협회 감사라는 것이 걸림돌이 되는 모양이다. 말하는 사람들도 일리는 있는 것이고, 맡기는 사람들도 뜻은 있을 텐데, 어떻게 조화를 이루면서 잘 해결해나갈 것인가. 길이 없는 것은 아닐 터이다.
마침 베드로한테서 전화가 왔다. 홍국장이 김병진 신부가 일하는 강원도에서 사무장으로 일할 수 있는 길이 열릴 모양이다. 하느님 뜻 안에서 잘 풀려나갔으면 싶다. 이제는 신용도 회복되고 했으니, 저축하며 살아갓으면 좋겠다. 요안나가 새출발 어쩌고 써놓은 것이 이 이야기인 모양이다.
그런데 야고보에게 전화를 걸어봤더니 일단 이력서를 써내보는 거라고.
정윤이는 운동하고 회사로 간다며 나가고, 토마스도 나갈 채비를 한다. 정윤이 차가 골목길을 내려가는 동안 언제나처럼 그쪽을 내려다보며 주모경과 화살기도를 바친다. 하느님께로 향한 가득한 신뢰를 가지고. 식구들을 위한 참된 기도 속에 모두들 그분 뜻 안에서 그분의 뜻을 하는 하루가 되기를 빌고 믿고 바란다.
22 Marzo 2011. Martedi
내일 안과에 가는 날 함께 순환기 진료를 받을까 했으나 진료시간이 맞지 않는다. 월요일로 예약하고, 밀린 일을 살펴본다.
작가협회 이사회가 있고, 수원보좌주교 서품식이 겹친다. 새가정 피정도 그날 들어간다. 협회에는 문예포럼 문제도 있어서 내 의견을 적어서 미리 보내줘야 할 것 같다.
교회사 원고 정리.
평협백서 검토.
목요일 서평 회장단 회의 준비.
4월 첫 수요일 강의 준비.
4월 14일 전국 사무국 직원 연수에서 할 강의 준비.
고 장대익 신부 책 문제.
학자금 융자 갚기.
시 몇 편.
28 Marzo 2011/ Lunedi
어제 주일 오후, 연례피정이 끝나고 고 안드레아, 체담 부부가 태워줘서 9호선 신반포역에서 지하철로 바꿔 타고 오는 길에 루피나가 지난 밤 꿈에서 사도 요한 아버님을 뵈었다고 생생한 이미지를 이야기한다.. 위에는 희 와이셔츠, 아래에는 검정바지를 입으신 아버님이 아주 환한 얼굴로 맞이해주시더라는 것. 하도 반가워서 손을덥썩 잡았다던가, 아무튼 인사를 드리고 그러는데 잠이 깼고, 꿈이더라는 것.
돌아가신 지 20년 하고도 넉달이 훨씬 더 지난 이제, 아버님의 밝은 얼굴을 뵙는다는 건 확실히 우리에게 기쁨이 아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