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들의 나라(하) ㅡ17 실마리 2
성유 국장으로부터 기자 회견의 경과와 내용을 보고 받은 총리는 그 자리에 박인덕 공보부 장관을 불렀다. "내일 아침 신문에 또 대문짝 만하게 기자 회견 내용이 날 텐데 대책이 무엇이오?" "합동 수사 본부는 왜 그런 쓸데없는 일을 저질러 가뜩이나 어려운 판국을 더 어렵게 만듭니까?" 박인덕 장관은 낮술을 마셨는지 약간 상기된 얼굴로 불평부터 했다. "대책이야 공보부에서 세우지만 집행은 공보부가 할 수 없습니다." 총리가 그게 무슨 소리냐는 투로 박인덕을 쳐다보았다. "대책이란 것이 신문이나 방송에 못나가게 하는 것 아닙니까? 그렇다면 공보부가 그걸 막을 만한 힘이 어디 있습니까? 내각 정보국이나, 군부, 검찰이나, 경찰 같은 쇠고랑 가진 사람들이 할 일이지요." 박인덕은 부인 팽희자가 희생된 이후로 사람이 달라져 있었다. 자포자기 상태라고나 할까. "군부에서 어떻게 하란 말이요?" 정일만 장관이 볼멘 목소리로 말했다. "이러고 있을 것이 아니라 공보부와 내각 정보국에서 빨리 손을 쓰시오. 우리가 늘 해오던 방법으로 하지요." 총리가 결론을 내렸다. "백장군인가 하는 녀석이 이틀 동안 여유를 준다고 한 것은 어떻게 하지요?" 성유 국장이 일어서면서 말했다. "내일 아침 국무회의를 다시 열도록 하지요. 그때 수사 본부에서 브리핑하도록 준비해 두시오." 총리가 정일만과 성유 얼굴을 번갈아 보면서 말했다. 내각 정보국과 공보부 등이 온갖 수단 방법을 다 동원해 신문과 방송을 주물렀지만 스미스 목사의 회견 기사를 막지는 못했다. 신문에 따라 약간의 차이는 있었으나 그 기사는 사회면에 중요 기사로 취급되었다. '운동권 여학생에 또 성고문' 대체로 이런 내용의 제목과 함께 임채숙의 사진이 실려 있었다. 외신에서도 인권 문제와 연관시켜 가볍지 않은 기사로 취급했다. 특히 미국계 통신이나 미국 신문들은 스미스 목사를 별도로 만나 인터뷰한 내용을 싣고 있었다. 국무회의에 참석한 장관들은 모두 씁쓰름한 표정이었다. 언제 이런 불안한 상태가 끝나고 마누라들이 돌아올지, 한치 앞도 내다 볼 수 없는 상황에 질려 있었다. "여러분은 아침 신문을 보아서 엉뚱한 일이 또 생긴 것을 아셨을 것입니다." 총리가 입을 열었다. "도대체 수사한다는 자들은 어떻게 생겨 먹은 놈들입니까? 그래 그렇게 할 일이 없어서 여학생 잡아다가 팬티 벗기고 그 곳이나 쑤신단 말입니까? 한심한 것들..." 박상천 해군 장관이 주먹으로 책상을 치면서 말했다. 해군 장관도 부인인 차영순이 강화도 가는 국도에서 시체로 발견된 이후 가끔 폭발하는 감정을 억제하지 못할 때가 많았다. "그 녀석들 나라 팔아먹을 놈들 아닙니까? 제 여편네 데려다가 좀 쑤셔 보지 그래. 그런 놈들은 즉각 잡아넣고 총리 각하는 대국민 사과를 해야 합니다." 해군 장관이 계속해서 떠들자 옆에 앉은 팽인식 공군 장관이 그의 옆구리를 쿡쿡 찌르며 말렸다. "매스컴에서 터무니없이 과장 보도를 한 것입니다. 그 것은 사실과 전혀 다릅니다. 문제의 임채숙이란 여학생은..." 성유 국장이 차분한 목소리로 설명을 계속했다. "임채숙이란 여학생은 관악대학 역사학과 2학년 학생으로 중류 집안에서 자란 아이입니다. 그런데 운동권 학생들의 꼬임에 빠져 데모에 앞장서 왔습니다. 맹목적인 반정부 투쟁의 하수인이 되었지요. 그러다가 민독추에 이용당하기 시작했지요. 그들이 무슨 짓을 하는지도 모르고 시키는 대로 해 왔습니다. 마침내 백성규의 하수인이 되어 위험한 심부름을 하게 되었지요. 백성규의 아지트에 심부름 갔다가 우리 수사 요원에게 붙잡혀 왔습니다. 연행되어 조사를 받던 중 백성규가 동원한 폭력배들에게 도로 붙들려 갔습니다." 성유 국장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박인덕 장관이 떠들었다. "딸 같은 여학생을 붙잡아다가 발가벗겨 놓고 그 따위 짓이나 하느라고 깡패 들어오는 것도 몰랐지. 정보국이라는 데도 깡패 집단과 다를 게 뭐 있어요? 흥, 도대체 얼마나 허술한 경비를 했기에 그런 일이 일어난단 말이오?" "정보국이 깡패 집단이라뇨? 그 말은 취소하십시오!" 성유 국장이 맞고함을 질렀다. "요즘 같은 세상에 그런 추악한 고문을 했다는 것이 사실입니까?" 이후범 원자력부 장관이 한마디 거들었다. 그는 국무 위원 중 유일한 독신이기 때문에 인질이 된 가족이 없는 상태이다. 다른 장관들과는 입장이 달라 국무회의서는 거의 발언을 하지 않았다. "우리 요원들은 절대로 가혹한 고문 같은 것을 하지 않습니다. 다만 수사하는 요원들도 사람이기 때문에 때로 거친 말을 쓴다든지 뺨을 때릴 정도의 행동은 합니다. 잘못된 일이지요. 그러나 그들이 어제 기자들 앞에서 주장 한 것 같은 야만적인 고문은 절대로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거짓말이란 세계적입니다. 터무니없는 말을 해서 국민들을 현혹시키는 데는 천재적인 자들입니다." 성유 국장이 열심히 변명을 했지만 그 말을 그대로 믿는 국무위원은 아무도 없는 것 같았다. "도대체 법이 엄연히 존재하고 정부의 서슬이 시퍼런 이 나라 수도 서울에서 수사를 받던 용의자를 깡패들이 유유히 데리고 사라지는가 하면, 서울 한복판의 특급 호텔에서 버젓이 기자회견까지 열었는데, 아무 손도 못쓰고 당하기만 했다는 이 기막힌 일을 누가 책임져야 합니까?" 박상천 해군장관의 말이었다. "여학생을 발가벗기고 성고문을 일삼은 수사 요원은 즉각 구속해야 합니다. 그뿐 아니라 그 상급 책임자들도 법적 도의적 책임을 물어야 합니다. 총리께서는 그것이 사실이건 아니건 대국민 사과를 해야 합니다. 어제의 사건은 미국 선교사가 개입된 일인만큼 세계 각국의 시선이 곱지 않을 것입니다. 유엔 산하 기구나 엠네스티 같은 데서 가만있지 않을 것입니다. 호재가 생긴 셈이지요. 이 사건은 한 말단 수사관원이 탈선하여 여학생 벗겨 놓고 성고문 같은 가혹 행위 조금했다는 문제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정권의 부도덕성, 나아가서는 국가의 부도덕성과 연결 될 뿐 아니라 세계 각국의 빈축을 사게 되고 마침내는 국가를 고립시키게 됩니다. 국제 사회에서 경제적 정치적 불이익을 당하게 됩니다." 돌아가는 이야기를 듣고만 있던 정채명 내무장관이 준엄한 얼굴로 한마디했다. 김교중 총리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정장관은 일을 너무 크게 해석하는 것 아닙니까? 설사 그런 일이 사실이라고 치더라도 지구상에 진짜 고문 안하는 나라가 어디 있습니까?" 고일수 법무장관이 일그러진 총리의 얼굴과 근엄해 보이는 정채명의 얼굴을 번갈아 보면서 말했다. "우리 국무위원들 사모님들은 지금 그 보다 더한 고문을 당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가장 도덕적이라는 소위 민독추가 하는 짓이 무엇입니까?" 성유 국장이 흥분한 목소리로 정채명을 반박했다. 정채명은 눈을 지긋이 감은 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앉아만 있었다. "내무 장관도 국가를 걱정해서 하시는 말일 것입니다. 정장관도 기자회견 내용이 사실이라고 믿지는 않을 것입니다." 김교중 총리가 분위기를 누그러뜨릴 생각으로 말했다. 그러나 결과는 그렇지가 못했다. "총리께서는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십니까? 내가 야당하고 있을 무렵에 겪은 일인데 우리 나라 수사, 정보 요원이라는 자들은 그런 짓을 하고도 충분히 남는다는 것을 내가 압니다. 남자인 나한테 하든 짓을 보면 어제 그 여학생의 말이 거짓이 아니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우리 정부는 반성해야 합니다." 정채명 장관의 발언을 반박하는 사람은 없었다. 모두가 멀거니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가 야당 투사였다는 것을 상기하고 있었다. 국무회의가 결론없이 끝나고 헤어졌다. 장관들이 비상 대기실이나 집으로 흩어졌다. 정채명 장관도 자기의 아파트로 돌아갔다. 그러나 그는 내각 정보국과 육군 정보 부대로부터 감시당하고 있다는 것을 감쪽같이 모르고 있었다. 자신의 동향 보고를 대통령에게 하고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 알고 있었지만 그가 침실에서 하는 이야기까지 도청 당하고 있다는 것을 그는 모르고 있었다. 정부에 들어와 내무장관이라는 요직에까지 있는 사람을 그렇게 하리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정채명은 개포동 자기 아파트의 위층에 있는 방수진을 찾아갔다. 언제나처럼 엘리베이터 앞에서 운전사와 수행 비서를 돌려보내고 306호 자기 집에 가는 척 하고는 506호 숨겨둔 여인의 집으로 간 것이다. 초인종을 눌렀으나 열어주지 않았다. 아무도 없었다. 그는 다시 3층으로 내려와 자기 아파트로 들어갔다. 가정부 아주머니가 그를 맞아 주었다. 그는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잠깐 쉬다가 방수진에게 전화를 걸었다. "지금 어디에 계세요?" 언제 들어왔는지 귀가 간지러울 정도로 애교 넘치는 방수진의 목소리였다. "내 지금 곧 올라가지." "목욕물 받아 둘게요." "응." 정채명이 전화를 끊고 위층으로 걸어 올라갔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자 방수진은 앞가슴과 허벅지가 다 드러난 야한 잠옷으로 갈아입고 그를 맞았다. "당신보고 싶어 죽을 뻔했어." 그녀는 더 못 참겠다는 듯 정채명의 목을 끌어안고 키스를 퍼부었다. "아까 어디 갔다왔어?" 정채명이 그녀의 히프를 두 손으로 싸안으며 말했다. "서방질하러 갔지." "뭐야? 요 못된 것이..." 정채명이 그녀의 히프를 찰싹 찰싹 치면서 웃어 보였다. "욕실 물 찼을 거예요." 그녀는 정채명의 목을 끌어안은 채 뒷걸음질로 욕실에 그를 끌고 갔다. 정채명이 욕실에서 간단히 샤워를 마치고 나오자 방수진은 완전한 나신이 되어 캔버스 앞에 서 있었다. 그녀가 실내에서 그림을 그릴 때는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그녀의 설명은 순수한 마음이 되자면 외모부터 가식이 없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정채명은 그녀의 그런 괴벽이 밉지 않았다. 정채명은 붓을 쥐고 서서 작업을 하고 있는 그녀를 뒤에서 가만히 껴안았다. 부드러운 등과 히프가 정채명의 모든 관능을 금세 일으켜 세웠다. 맥박이 빨라지고 피부에 열기가 돌기 시작했다. 방수진은 손놀림을 중지하고 잠시 그가 하는 대로 몸을 맡기고 있었다. 뒤에서 담쟁이덩굴처럼 방수진을 감은 두 팔 끝의 손이 그녀의 유방을 가볍게 움켜쥐었다. 목덜미에 뜨거운 입김을 쏟았다. 방수진은 고개를 뒤로 젖혔다. 뜨거운 정채명의 입술이 그녀의 입술을 덮었다. "음..." 그녀의 입에서 가느다란 신음이 남자의 입속으로 흘러 들어갔다. 젖가슴을 움켜쥐고 있던 그의 두 손이 차츰 밑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남자의 손이 숲을 노크하자 성문이 힘없이 스르르 열렸다. 두 사람은 포옹한 채로 침대 위로 갔다. "아까 어디를 쏘다니다 왔다고 했지?" 정채명이 방수진을 쓰러뜨린 뒤 상체를 겹치고 나직이 말했다. "바람난 암코양이가 어딘들 안 다니겠어요?" 그녀가 정채명의 가슴을 안았다. "그래 멋진 숫고양이 더러 찾았어?" "임자 있다고 상대를 안 하던 걸." 그녀가 갑자기 큰 소리로 말하며 두 다리로 남자의 하체를 휘감았다. "오늘 요 고양이 혼좀 내줘야 쓰겠어." 정채명도 그녀를 으스러지게 껴안았다. 참으로 오랜만의 만남이었다. 대장간 무쇠처럼 달아 오른 두 사람은 물에라도 빠진들 허우적거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정채명의 수영은 점점 룰을 잃어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격식을 갖춘 접영, 평영, 자유형, 배영을 하던 그의 수영은 마침내 룰을 잊어버리고 허우적거리기 시작했다. 물 속에 가라앉지 않으려고 발버둥을 치기 시작했다. 그러나 허우적거리면 허우적거릴수록 정채명의 몸은 점점 물 속으로 빠지기 시작했다. 그는 마침내 숨이 차서 더 참을 수가 없었다. 금세 숨이 끊어질 것 같은 거친 숨소리가 수영장에 가득 찼다. 짓눌린 방수진도 허우적거리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녀도 물 속 깊이 빠져 더 이상 가쁜 숨을 참지 못하는 것 같았다. 질식 상태에 이른 정채명은 마침내 비명을 지르며 익사하고 말았다. 호흡이 끊어진 그는 더 허우적거리지도 못하고 축 늘어져버렸다. 온 몸이 땀으로 범벅이 되었다. 방수진도 사지에 힘이 빠진 듯 땀투성이가 되어 널브러지고 말았다. "수진아!" 한참 동안 호흡을 안정시키고 있던 정채명이 가만히 방수진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예?" 그녀가 꼼짝도 하지 않고 낮게 대답했다. "만약에 내가 떠난다면 어떻게 하겠어?" "뭐요? 아래층 사모님이 뭐라고 하셨나요?" 여자란 역시 민감한 데가 따로 있다는 생각을 했다. 얼마나 남자의 아내를 의식하고 있었으면 그런 말이 금방 나올까. "그런 게 아니고 내가 만약 죽기라도 한다든지, 먼 나라에 가서 다시는 돌아 올 수 없다든지 한다면..." "당신 정말..." 정채명의 이야기가 심상치 않다고 생각했는지 방수진이 벌떡 일어나 앉아 그를 들여다보며 놀란 표정을 지었다. "당신 요즘 무슨 일이 있는 거지요? 3층 사모님이 왜 요즘 안 보이는 거죠? 외국에 먼저 나가서 기다리고 있나요? 그래서 당신이 곧 뒤따라가서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작정이에요?" 정채명은 상체를 일으키고 앉아 있는 그녀의 유방이 나이와는 달리 아직 탄력이 충만하다는 엉뚱한 생각을 했다. "귀여운 내 암코양이를 버리면 벌받지" 정채명이 그녀를 와락 껴안았다. 그러나 그들의 이런 대화가 낱낱이 도청되고 있다는 것을 그들은 알지 못했다. 정채명이 가는 곳은 아무리 은밀한 곳이라도 모두 기록되고 녹화되었다. 그리고 여러 정보기관의 비밀 기록실에 자료가 보존되었다. 이런 일은 비단 정채명 장관뿐 아니라 다른 유명 인사도 거의 예외가 아니었다. 정채명은 일국의 가장 중심 되는 각료인데 누가 이런 지시를 하는 것일까? 그것은 정보 기관의 '조직'이 하는 일이었다. 미국 같은 나라도 정치인이나 저명인사의 신변을 시시콜콜하게 캐서 대통령에게 보고한다고 한다. 대통령은 저명 인사의 정치적 발언에서부터 섹스 생활에 이르기까지 기록된 보고서를 보면서 히죽거리는 경우가 허다하다고 한다. 정채명은 오랜 야당 생활을 갑자기 청산하고 정부에 들어 왔기 때문에 더욱 정보 전문가들의 관찰 대상이 되었다. 그 중에도 그에게 가장 흥미를 가진 사람은 전 내각 정보국장인 정일만이었다. 군 정보 기관도 예외는 아니었다. 정채명이 국무회의나 비대위에서 정부의 부도덕성에 대해 강경 발언을 계속한 다음날이었다. 스캔들 기사를 많이 써 장안에서 가장 인기가 있다는 주간 잡지의 한 기자가 여류 화가 방수진의 화랑에 왔다. 그녀는 수 년 전부터 강남에 있는 화랑 하나를 인수해 직접 경영하고 있었다. "방 선생님 요즘 좋은 소식 들리던데요?" 여기자는 생글생글 웃으면서 말을 걸었다. 방수진은 아차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주간지의 기자가 이런 식으로 나오면 틀림없이 엉뚱한 스캔들로 잡지를 장식한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로맨스 그레이라고나 할까? 아니 방 선생님의 경우는 그레이는 아니지요." 여기자는 더욱 생글거렸다. 비웃는 것 같기도 했다. "괜히 헛소문 내면 가만있지 않을 거예요." 방수진도 얼굴에 웃음을 띠고 농담처럼 받아 넘겼다. 그러나 그녀의 입술이 가늘게 떨렸다. 정채명의 얼굴이 얼른 머릿속에 떠올랐다. 자기가 망신당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정채명이 치명상을 입을 수도 있다는 것이 더 걱정스러웠다. "로맨스란 원래 아름다운 일이니까 뭐 그렇게 꼭 감출 일은 아니지 않을까요?" "도대체 상대가 누구라는 겁니까?" "그걸 물어보러 왔는데...그 분 이름만 대면 우리 나라 사람은 다 아시는 분이라고..." "그 사람과 무슨 일이 있었다는 거예요?" 그렇게 말하면서도 방수진은 자기가 이 맹랑한 기자에게 말려드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경우에는 무조건 화부터 내고 한마디도 상대해 주지 않는 것이 상책이라고 선배들이 말하는 것을 많이 들었다. "최근에 상대하신 분은 정계의 거물이라는 소문인데..." "아니 그럼 내가..." 방수진은 더욱 난감했다. 그렇다면 한 사람도 아닌 여러 남자를 상대로 일을 벌이고 있다는 말이 아닌가? 도대체 누가 이런 터무니없는 악질적인 제보를 했단 말인가? "지금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예요? 내가 그렇게 타락한 여자로 보인단 말이에요?" "로맨스란 타락한 사람이 만드는 것이 아니지요. 멋있는 사람, 용기 있는 사람들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지요." "난 용기도 없고 멋도 없는 여잡니다. 더구나 로맨스 같은 것은 더더욱 없는 여자니까 딴 데 가서 알아보시죠. 정말 로맨스 같은 소리하고 다니네." "연인의 신분을 보호하고자 하는 심정은 ..." "이거 왜 이래요!" 방수진은 이쯤에서 고함을 질러야 한다고 생각했다. "만약에 나에 대해 단 한 줄이라도 어쩌구 저쩌구 하는 얘기를 그 저질 잡지에 싣기만 해봐요. 가만있지 않을 거예요. 당장 명예 훼손으로 고소라도 하고 말거니까." 방수진이 악을 썼다. "뭐라구요? 저질 잡지라구요? 우리 주간지를 분명 그렇게 말했어요. 명예 훼손으로 어떻게 한다구요? 하하하... 그 말은 우리 사장이 해야 할 말이군요. 이봐요 방수진! 정신 똑똑히 차리고 들어. 당신의 지저분한 남자 스캔들은 확실한 제보를 해 준 데가 있어요. 늙은이와의 침대 위 정사 장면까지 증거로 가지고 있단 말입니다. 그냥 기사를 써 버릴 수도 있어요. 하지만 당신의 변명이라도 들어보자고 온 것인데... 저질 잡지가 어떻다구요?" 방수진은 앞이 캄캄했다. 그럼 이자들이 자기와 정채명의 못 볼 장면들을 다 촬영이라도 했단 말인가? 그는 정채명이 야당 투사 시절에 당한 일들을 생각했다. "만약 그 따위 허무맹랑한 기사를 썼다가는 온전하지 못할 줄 알아요. 그건 전부 모략이에요." 악을 쓰던 방수진의 목소리에서 힘이 빠졌다. 여기자는 더 이상 캐묻지 않고 돌아갔다. 그녀가 나가자마자 방수진은 정채명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러 곳에 다이얼을 돌린 끝에 겨우 연결이 되었다. "아니 수진이가 웬 일이야?" 정채명은 별로 반가운 기색이 아니었다. "큰일 났어요." 방수진의 목소리가 떨렸다. 전화하는 그녀의 눈에서는 금세 눈물이 주르르 쏟아졌다. "무슨 소리요?" "주간 잡지사 여기자가 찾아 왔다 갔어요." "뭐야?" 정채명의 목소리도 차분하지 만은 않았다. "글쎄 그 못된 여기자가 로맨스 그레이를 취재하러 왔다면서 내가 침대 위에서 어떤 늙은이와... 미안해요." "하하하... 그거 재미있는 이야기군. 그래 방수진 여사도 그런 재미를 볼 때가 다 있어요? 나도 그런 재미나 좀 보았으면 좋겠는데... 늙은 할망구가 눈이 등잔만 해가지고 지키고 앉았으니 연애도 한번 못해보고..." "예?" 정채명의 엉뚱한 소리에 방수진은 어안이 벙벙했다. "나 방수진이에요." 그녀는 정채명이 혹시 자기를 딴 사람으로 착각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알아요. 강남 화랑의 방수진 화백. 여류 중의 여류를 내가 아무리 무식한 정치꾼이라도 왜 모르겠습니까? 그래 그런 여기자 퇴치법은 상대를 않는 것입니다. 방 여사가 진짜 로맨스가 있는지 없는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대꾸를 않는 것이 최고지요. 가만 있자 나도 갑자기 늙은 여편네 생각이 나는군. 7시쯤 집에 들어가 볼까? 자 방 여사 그럼 이만..." 정채명이 전화를 끊어버렸다. '세상에 이런 일도 있을까? 정채명이 저렇게 엉뚱하게 변하다니...' 방수진은 충격으로 한동안 아무 말도 못하고 가만히 있었다. 그러나 한참만에 그녀는 그 이유를 알았다. "도청 때문이야." 그들의 전화를 어느 정보 기관에선가 도청하고 있다는 것을 정채명이 알기 때문에 능청을 떤 것이 아닌가. 그의 말 중에 7시께 집에 들어가 볼까 하는 구절을 다시 생각해 보았다. 그렇다면 7시에 아파트에서 만나자는 뜻이 아닌가? 여기까지 생각이 미친 방수진은 자기의 경솔했던 전화질이 후회스러웠다. 그녀는 일찍 화랑 문을 닫고 아파트로 갔다. 3층에서는 여전히 아무 기척이 없었다. 그녀는 편한 옷으로 갈아입으려고 옷을 벗다가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 아랫배가 약간 도툼 하기는 했으나 아직 곡선이 끊어지지 않고 잘 보존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욕실로 들어가 샤워를 했다. 촉촉하게 젖은 피부에 향수를 살짝 뿌렸다. 그리고 침대 위에 누워 거울을 보았다. 화려한 잠옷이 석양빛을 받아 더 화려하게 보였다. 그러나 그녀의 뇌리에 남아있는 불안은 좀체 사라지지 않았다. 얼마를 지났을까. 정채명이 돌아 왔다. 그는 방수진을 가볍게 안고 뺨에 입을 맞춘 뒤 조용히 소파에 앉았다. "미안해요. 함부로 전화를 해서..." 방수진이 그의 가슴에 손을 넣으며 말했다. 정채명은 그때까지 아무 말도 않고 있다가 방수진을 방바닥에 밀어 눕히고는 거칠게 그녀의 잠옷을 헤쳤다. 인질이 되어 있는 국무위원 부인 중에는 벌써 두 명이 희생되었다. 첫 번째는 국도에서 교통 사고로 희생되고 두 번째는 한강에 투신 자살한 것처럼 보였다. 그렇게 보면 모두 사고이지 살해한 것으로는 일단 보이지 않게 되었다. 그렇다면 그들이 말하는 세 번째 희생자는 어떤 형태로 나타날 것인가? 더구나 이번에는 두 사람을 한꺼번에 희생시키겠다고 예고하고 있지 않는가? 국무회의에서는 그들의 요구대로 우선 대국민 사과 성명을 내고 임채숙의 고문 사실을 인정한 뒤 그 관계자를 문책하자는 쪽으로 기울어지고 있었다. "그 정도 일 가지고 정권을 내놓아야 한다는 법은 없으니까 우선 시간을 벌어야 하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총리 이름으로 사과 성명을 내고..." 늘 상황을 냉정하게 판단하는 정일만 국방 장관의 말이었다. "말도 안되는 소리하지 마시오. 강도들한테 사과를 한단 말이오!" 박인덕 장관이 소리를 쳤다. "흥. 내 여편네는 이미 죽었는데 자기들 마누라는 살리고 싶다 이 말씀들이군. 잘해봐요. 잘해봐!" 박상천 해군 장관이 주정하듯이 중얼거렸다. "이 문제는 내가 대통령에게 보고해서 처리하도록 하겠습니다. 여러분은 나에게 맡겨 주십시오." 분위기가 이상하게 돌아가자 총리가 결론을 내렸다. 김교중 총리가 대통령을 독대하고 난 뒤에 내려온 결정은 뜻밖이었다. 지금까지 이 정권이 취하고 있던 강경 일변도의 정책에서 크게 선회를 한 느낌이었다. "대국민 사과 성명을 내고 성고문 관계자를 엄중 문책하라는 지시입니다." 비대위에서 국무위원들에게 말하는 김교중 총리의 얼굴도 굳어 있었다. 그날 오후 2시 대통령이 대국민 사과 성명을 냈다. 반정부 단체 가담 혐의로 연행된 여학생 용의자를 경찰 수사관들이 가혹 행위를 한 사건은 대단히 잘못된 일이다. 일부 수사관의 자질 부족으로 일어난 이러한 사건은 앞으로 재발하지 않도록 철저한 대책을 세우겠다. 따라서 이번 사건의 책임을 물어 치안본부장을 해임하고 가혹행위 현장에 있었던 두 사람. 전광대와 추병태는 즉각 사법처리 하겠다. 이것이 대통령 담화문의 요지였다. "뭐가 어쩌구 어째요? 왜 그 일이 치안본부에서만 책임을 져야 합니까? 더구나 전광대는 경찰관이 아니라 군인 신분이란 말입니다. 군바리들이 저지른 일을 왜 우리 경찰이 책임져야 합니까? 더구나 그들은 합동 수사본부 제4부 소속입니다. 제4부의 책임자는 신동훈 대령 아닙니까? 군부의 똥바가지를 왜 우리가 뒤집어쓴단 말입니까?" 서종서 차관이 정채명 장관을 향해 입에 거품을 물고 불평을 했다. "나도 총리에게 항의를 했소. 그리고 대통령을 만나려고 했지만 실패했습니다." "그래 총리는 무엇이라고 변명합니까?" "이 비상 시국에 군부를 건드려 놓으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니 군부를 자극하지 않는 것이 좋다는 것입니다." 내무부와 치안 본부에서 가슴을 치며 분통을 터뜨리는 동안 직접 불똥이 떨어진 것은 추경감과 전광대였다. 전광대는 정작 당사자니까 그럴 수도 있지만 말리려고 하던 추경감은 가해자가 되어버렸으니 억울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그렇다고 가만 앉아 당할 수만은 없었다. 대통령의 성명이 발표되고 있는 동안 추경감은 신동훈 제4부장에게 불려 갔다. "추경감 당분간 몸을 좀 피해 있는 것이 좋겠소. 물론 누가 악착 같이 잡으러 다니지는 않겠지만... 짜고 하는 일이라도 숨바꼭질을 좀 해야 하게 생겼으니... 연락은 나한테 전화로만 하십시오. 누가 소재 추적을 하지는 않을 테니 전화는 안심하고 해도 됩니다." "예? 지금 무슨 말씀을 하는 것입니까?" 추경감은 처음에는 정말 영문을 몰랐다. "임채숙 고문 건이 좀 복잡하게 되었소. 나중에 대통령 담화문을 좀 보고... 자 이건 당분간 쓸 돈이오." 추경감은 신대령이 주는 현찰 한 뭉텅이를 들고 나왔다. 몇 시간이 지난 뒤에야 추경감은 자기가 수배되어 있다는 것을 알았다. 더구나 여학생에게 성고문을 가한 못된 고문 경찰로 낙인 찍혀 구속 대상이 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추경감은 기가 막혀 말이 나오지 않았다. 경찰관 생활 25년에 못된 짓이라고는 단 한 번도 한 일이 없는 추경감이다. 더구나 이번 일만 해도 얼마나 억울한 일인가? 그러나 현실적으로 범죄자의 낙인이 찍혔으니 어떻게 한단 말인가? 추경감은 신 대령의 말대로 도망갈 생각이 전혀 없었다. 사법처리를 한다면 당당히 법정에 서서 결백을 밝히겠다는 생각이었다. 추경감은 합동 수사 본부 사무실에 태연히 앉아 있었다. 그러나 일이 그렇게 추경감 마음대로 되지는 않았다. 신 대령이 추경감이 있는 사무실로 들어왔다. "추경감. 아니 여기서 무얼 우물쭈물 하고 있는 거요? 빨리 여기서 나가요. 어디 남해안 같은 데 가서 바람이나 한 달쯤 쐬고 와요." 신대령이 몹시 당황한 얼굴로 말했다. "그렇게 하지는 않겠습니다." 추경감이 돈 뭉텅이를 도로 신 대령 앞에 내밀었다. 그러자 신 대령이 얼굴이 크게 찌푸려졌다. "전광대는 벌써 미국으로 출국했단 말입니다. 여기서 어물어물 하다가 구속이라도 된다면 모든 죄를 혼자서 뒤집어 써야 하는 거야. 여자를 발가벗겨 놓고 아랫도리에 온갖 못된 짓을 다 하는데 그 자리에 경찰관이 함께 있었다면 공범이 아니라고 할 사람이 어디 있겠어. 괜히 덮어쓰지 말고 빨리 내 말대로 해요." 신 대령의 말은 다분히 협박이었다. "그러니까 나는 더욱 도망가서는 안됩니다." 추경감이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쓸데없는 고집 부리지 말아요. 이건 당신 혼자 결정할 일이 아니야." 추경감은 영락없이 도망 다니는 신세가 되었다. 그는 우선 신대령이 마련해준 부산 오륙도 호텔에 내려가 하루 동안 숨어 있었다. 어느새 만들었는지 무역회사 중역 신분증에 엄청나게 많은 현찰까지 가지고 있었다. 추경감은 엉겁결에 그들이 시키는 대로 하기는 했으나 도저히 이렇게 되어서는 안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괴로운 하루를 보냈다. 바닷가에 잠시 나가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까를 생각했다. 집에서 텔레비전과 신문 뉴스를 보고 놀랄 아내와 나미를 생각하니 더욱 괴로웠다. 그날 밤 추경감은 정말 텔레비전에서 처음으로 자기 얼굴과 함께 자신에 관한 뉴스를 듣고 괴로웠다. 9시 뉴스 맨 마지막에 정부는 성고문 사건 관련자로 전광대와 추병태를 전국에 지명 수배 했다는 뉴스를 간단히 했다. 화면에 나온 자기의 사진은 20여년 전 경찰관 초년 시절의 흑백 사진이라 추경감인지 아닌지 자세히 보지 않으면 모를 것 같기는 했다. 추경감은 호텔 로비에 내려와 집에 공중 전화를 걸었다. "당신이오? 당신 어떻게 된 거예요? 당신이 정말 그..." 아내가 놀라 눈물 섞인 말로 물었다. "그게 아니야. 나를 믿어요. 일이 잘못되어 그러니까 너무 걱정 말아요. 곧 해결될 테니까 걱정 말고 있어요. 난 지금 부산에 있는데... 나미는 별일 없어요?" "예. 나미는 아무 것도 몰라요. 당신 정말 괜찮은 거죠?" "염려 말라니까. 그럼 다시 연락할게." 전화를 끊고 난 추경감은 한참 동안 멍하니 서 있었다. 민독추라는 단체가 왜 기를 쓰고 이 정권을 무너뜨리려고 하는가를 다시 한번 생각하게 했다. 거의 잠을 이루지 못하고 하룻밤을 지낸 추경감은 서울로 올라가야 한다는 결심을 했다. 그는 민독추의 본거지를 알아내고 임채숙이라는 여학생도 찾아내야 자기의 결백이 드러날 것이라고 여겼다. 그는 우선 서울로 올라가 백성규 대령을 찾아내 국무위원 부인들이 연금되어 있는 곳을 알아내면 모두가 풀릴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이 전과는 전혀 다른 조건 아래 놓여 있었다. 지금은 신분을 위장한 채 형식적으로는 쫓겨다니면서 수사를 해야하는 턱없이 불리한 입장에 있는 것이다. 추경감은 기차로 서울에 올라간 뒤 우선 조준철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들은 어린이 대공원 주차장에서 만났다. "아저씨 어떻게 된 거예요? 정말 여학생 고문을 한 것은 아니지요?" 조준철이 초췌해진 추경감의 얼굴을 보고 걱정스럽게 말했다. "조준철 씨는 그 말을 믿지는 않았겠지?" "뭔가 잘못 된 줄 알았습니다. 권력을 쥔 자들은 온갖 파렴치한 짓을 다 하니까요." "나 부탁이 좀 있는데..." 추경감이 담배를 꺼내 물었다. "나 당분간 준철 씨 자취방에 좀 가서 있어야 되겠는데..." 추경감이 불 켜이지 않는 고물 지포라이터를 철거덕거리며 말했다. "그렇게 해요. 어차피 둘이서 풀어야 할 일도 있고 하니까 차라리 잘 되었지요." 조준철이 풀어야 할 일이란 것은 조은하 피살 사건의 범인을 찾는 일을 말한다는 것을 추경감은 잘 알고 있었다. 간단한 짐을 챙겨들고 추경감은 조준철의 집에 기거하면서 우선 사모님들이 연금되어 있는 것을 찾는데 전력을 기울였다. 그는 조준철과 옛날의 심복이었던 시경 강력계 강형사의 은밀한 도움을 받기로 했다. 그는 임채숙이 돈을 싸가지고 있던 종이 중에 '노량 기업'이란 글씨가 있었던 것을 기억했다. 그는 가지고 다니던 수사 자료 속에서 그 종이를 찾아냈다. 그리고 노량 기업에 대해 수소문하기 시작했다. 노량기업이란 이름을 가진 회사는 전국에 약 마흔개 정도가 있었다. 유사한 이름까지 하면 훨씬 많았다. 추경감은 우선 서울에 있는 노량 기업만을 챙겨 보았다. 노량기업 주식회사라는 법인체 기업은 단 하나뿐이었다. 추경감은 우선 그곳을 찾아 가보았다. 이름과는 달리 그 회사는 서울의 북쪽 끝인 창동에 있었다. 부엌 칼 같은 주방 기구를 만들어 수출하는 회사였다. 원래는 노량진에서 조그만 대장간을 하던 회사인데 규모가 커져 그 곳으로 이사를 갔다고 했다. 아무리 연고를 맞춰 보아도 알 수가 없었다. 민독추 일당과는 연관이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처음 지목했던 회사 조사에 실패한 추경감은 다른 방법을 쓰기로 했다. 이 현금을 싼 종이는 그 회사와 직접 관계가 없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었다. 물건을 거래하는 회사 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추경감은 그 문제의 종이를 강형사에게 주어 국립과학 수사연구소에 의뢰해 거기에 묻은 모든 성분을 조사해 달라고 했다. 추경감의 생각은 그에게 큰 도움을 주었다. 그 종이에서는 섬유성분이 있는 물질이 다량 검출되었다는 통보였다. "그렇다면 이 종이는 옷감이나 실타래 같은 것을 포장하는데 사용한 것이 틀림없어요." 조준철의 의견이었다. "맞아. 섬유 원료나 봉제품 같은 것을 포장하는데 쓴 종이인지도 몰라. 그렇다면..." 추경감은 '노량 기업'중에 섬유와 관계 있는 회사를 찾아보았다. 노량진에 있는 '노량 물산'의 계열회사에 원단을 취급하는 회사가 있다는 것을 가까스로 알아냈다. 그는 노량 물산으로 찾아갔다. "나는 무역회사에서 일하는 사람인데 원단에 대해 좀 상의 할 일이 있는데요..." 그는 신대령이 만들어 준 가짜 명함을 적절히 써먹었다. "우리 계열사 중에 원단을 만드는 회사가 있긴 있습니다만 워낙 규모가 작아서..." 무역 담당 이사라는 젊은 사람이 별로 달갑지 않게 대답했다. "그럼 그 회사가 어디 있는지 제가 직접 찾아가서 담당자를 한번 만나겠습니다." 그렇게 해서 추경감은 다시 부평 공단에 있는 노량기업을 찾아갔다. 마침 퇴근 준비를 하던 공장장이라는 사람을 만났다. "아, 그룹 박이사한테서 연락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워낙 규모가 적어놔서..." 늙수그레한 공장장은 꽤 친절했다. "수출을 해본 경험은 전혀 없나요? 그럼 내수만 하셨다는 말씀이군요." "내수도 별로 신통치 않아서..." "서울 시내에도 거래하는 곳이 더러 있지요?" 추경감은 점점 핵심적인 것에 질문을 접근시켰다. "예. 주로 구로동 봉제 공장에 물품을 대고 있습니다. 근데 요즘은 망해버린 공장이 많아 그도 시원치 않습니다." "망해요?" "최근 들어 우리 나라 봉제품이 중공이나 동남아 등에 밀려 거의 수출 길이 막혀버렸답니다." "노량에서 거래하다 망한 집은 몇이나 됩니까?" 공장장은 별 것을 다 묻는다는 듯이 추경감을 빤히 쳐다보고 있다가 대답했다. "구로동에만도 세 곳이나 있습니다. 미성, 대진, 남서울이 그렇죠." "미성, 대진, 남서울이라... 그럼 그 공장들은 지금 모두 무엇을 합니까?' "그야 알 수 없죠. 딴 회사로 넘어 갔거나 문 걸어 잠그고 비워 두었거나..." 추경감은 눈이 번쩍 뜨였다. 그렇다. 만약 마당에 잡초가 무성하게 자라도록 비워 두었다면 그 곳이 많은 사람들을 데려다가 몰래 숨겨 놓기는 안성맞춤이 아닌가. "근데 손님도 그 빈 공장을 하나 빌리거나 사실 생각인가요?" 공장장이 추경감을 보고 내심을 다 안다는 듯이 말했다. "아, 아닙니다. 그럼 다음에 또 들리지요. 여러 가지로 고마웠습니다." 추경감은 급히 인사를 하고는 그 공장을 나왔다. 이제 구로동에 가서 그 세 공장을 뒤져보면 분명 무슨 단서가 있으리라는 확신이 생겼다. 어쩌면 그 셋 중 한 공장에 20명의 국무위원 사모님들이 수용되어 있을지 모른다. 추경감은 혼자 구로동 단지로 가 볼까 하다가 조준철의 자취집으로 발길을 돌렸다. 구로동 공장은 매일이다시피 노동자들이 시위를 벌였기 때문에 정보 형사들이 깔려 있었다. 수배되어 있는 자신이 섣불리 그 곳에 다니다가 붙들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튿날 추경감은 조준철과 함께 긴장한 얼굴로 구로동 공단에 들어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