삭개오로 본 구원점검
(눅 19:1-10) “1. 예수께서 여리고로 들어가 지나가시더라 2. 삭개오라 이름하는 자가 있으니 세리장이요 또한 부자라 3. 그가 예수께서 어떠한 사람인가 하여 보고자 하되 키가 작고 사람이 많아 할 수 없어 4. 앞으로 달려가서 보기 위하여 돌무화과나무에 올라가니 이는 예수께서 그리로 지나가시게 됨이러라 5. 예수께서 그 곳에 이르사 쳐다 보시고 이르시되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하시니 6. 급히 내려와 즐거워하며 영접하거늘 7. 뭇 사람이 보고 수군거려 이르되 저가 죄인의 집에 유하러 들어갔도다 하더라 8.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 9.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10.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이 시간 “삭개오로 본 구원점검”이라는 제목으로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본문 2절을 보면 한 이름이 나타납니다. “삭개오라 이름하는 자가 있으니” 성경 기자는 삭개오를 소개하면서 그의 이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 이름에 무언가 귀한 메시지가 담겨 있다는 암시입니다. 이름의 뜻이 무엇일까요? 삭개오의 뜻은 '순결하다, 의롭다'입니다. 죄인 삭개오의 이름 치고는 어울리지 않는 이름입니다.
그러나 죄인 삭개오가 예수를 영접하고 변화되었습니다. 그가 한 말을 보면 8절에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 변해도 이렇게 변할 수가 있습니까? 모든 걸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고 예수를 따른 성 프란시스가 연상됩니다.
주님께서도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하신 것을 보면 삭개오의 말이 과장이나 헛말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바로 성경이 말씀하는 구원입니다. 죄에서의 구원입니다. 죄에서 벗어났습니다. 의로운 사람이 되었습니다. 변화되었습니다. 거룩함에 이르렀습니다. ‘의롭다. 순결하다’는 그 이름대로 되었습니다.
여기서 던지고 싶은 질문은 대체 삭개오는 예수를 어떻게 믿었기에 이렇게 거룩함에 이를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조직신학에서 구원의 단계를 대체로 소명 중생 회심 신앙 칭의 성화 영화 이렇게 말합니다. 그런데 예수 믿고 바로 거룩함에 이르렀습니다.
어떻게 믿었기에 이렇게 됩니까? 꼭 초대교회 성도들과 같아요. 예수 믿고 그날부터 변화되었습니다. 백부장 고넬료와도 같아요. 고넬료가 복음을 듣자 말자 성령충만 받았습니다. 지금 사람들과 비교가 많이 되는데 누가 잘못된 것입니까? 삭개오가 정상입니다. 예수 영접하면 그렇게 되어야 합니다.
고전1:30-31에 “너희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셨으니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했습니다. 고전5:17에도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했습니다.
일곱 귀신 들렸던 죄인 막달라 마리아처럼 귀신이 들어가면 귀신의 특성이 나타나듯, 예수님을 영접하면 예수의 특성이 나타나는 것이 정상인데 그렇지 않다면 그것이 도리어 비정상입니다. 그래서 고후13:5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이 시간에는 삭개오를 통하여 우리 구원을 다시 한 번 점검하면서 거룩함에 이르는 온전한 믿음을 소유하길 원합니다.
기초부터 우리 신앙을 점검해 볼까요?
1. 구원은 착해도 안 됩니다.
2절에 “삭개오라 이름하는 자가 있으니” 이름은 좋습니다. '순결하다, 의롭다' 그러나 실재는 그 이름과 반대의 생활을 하게 됩니다. 로마의 앞잡이가 되어 자기 백성들에게 세금이라는 명목으로 재물을 착취하는 당시의 세리, 그것도 세리 대장이 되었습니다. 그가 세리장이요 부자였다는 것은 그가 얼마나 큰 죄인이었는가를 보여줍니다.
이처럼 우리 인간의 의로는 하나님을 만날 수 없고 구원 받을 수 없고 선하게 살 수도 없습니다. 선해도 안 됩니다. 순결해도 안 됩니다. 의로워도 안 됩니다. 돈으로도 안 됩니다. 공로로도 안 됩니다. 도리어 스스로 의로우려고 할 때 더 악한 결과가 나타납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됩니다. 그래서 벧전1:18-19에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이 물려 준 헛된 행실에서 대속함을 받은 것은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으로 된 것이 아니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이니라” 했습니다. 이 기초를 잘 닦으시기 바랍니다. 여기까지는 쉽죠? 오직 예수입니다. 이제 두 번째로 넘어갑시다.
2. 구원은 힘써도 안 됩니다.
3절에 “키가 작고” "키"라는 말은 ‘헬리키아’, ‘나이’로도 번역되는 말입니다. 어린 아이와 같다는 의미입니다. 그 키가 1미터였는지 1미터 20이었는지 알 수 없지만 피그미족처럼 어린이 아이 같았습니다. 그러므로 ‘헬리키아’라는 낱말 속에는 무시 받기 적당했다는 의미가 들어있습니다. 그 말에 삭개오의 아픔이 들어 있습니다.
단신의 설움이 얼마나 큰지, 학교에서부터 아이들에게 무시 받기 시작하여 사회에 진출하기까지 결혼도 못할 수가 있어요. 세상을 살아가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키가 작으면 처음부터 포기하든지 아니면 반대로 누구보다 모진 마음을 가지고 치열하게 극복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역사 속에 단신이었던 사람들이 위대한 일을 많이 했습니다.
이처럼 삭개오는 누구보다 모질게 살았습니다. 치열한 삶이었습니다. 그토록 비난 받는 로마의 앞잡이가 된 것을 보면 그의 마음의 상처가 얼마나 컸으며 기어코 성공으로 갚아 주겠다는 이를 악물고 살아온 인생이었습니다. 미친 듯이 살아왔습니다. 인간의 노력, 사람의 방법을 다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이처럼 사람의 방법과 힘으로도 하나님 앞에서는 위대해질 수도 의로울 수도 구원 얻을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갈2:16에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했습니다.
3. 구원은 다른 무엇으로도 안 됩니다.
다시 2절 “세리장이요 또한 부자라” 당시 여리고는 가이샤라 가버나움과 더불어 유대의 3대 상업중심지로서 온갖 무역과 향료의 집산지로 유대인만이 아니라 이방인들의 상거래로도 붐비는 곳으로 징수해야 할 세금이 많았습니다. 로마가 왜 삭개오를 그런 곳의 세리장이 되게 한 걸 아시겠죠? 그런 독한 넘을 그 자리에 앉혀놔야 세금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삭개오는 권력을 만나보았고 돈도 만나보았습니다. 그러나 행복하지 않았습니다. 안전하지도 않았습니다. 도적이 생명을 노리고, 동포들이 원한을 품고 적이 되었습니다. 어떤 보복을 당할지 모르는 삶이었습니다. 이처럼 구원은 돈으로도 힘으로도 권력으로도 안 됩니다. 노력할수록 더욱 쓰러지고 악해질 뿐입니다.
4. 구원은 예수를 나의 생명의 주로 믿어야 됩니다.
예수 만난 삭개오는 변화되었습니다. 8절에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 여러분, 예수 영접하자 말자 이렇게 변할 수 있을까요?
이제 다시 제가 서론에서 질문했던 그 질문으로 돌아갑니다. 아무리 예수를 믿는다지만 어떻게 이렇게 갑자기 순수하고 의로운 사람이 될 수 있겠습니까? 구원은 점진적이라고 배워습니다. 그런데 변화되었습니다.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삭개오가 한 일은 예수님을 영접한 일밖에는 없습니다. 어떻게 예수를 영접했기에 이렇게 됩니까?
말씀하다보니 제가 방금 여러분에게 실수로 힌트를 드렸습니다. 어떻게 예수를 영접했기에 이렇게 됩니까? 요1:12-13에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 영접에 그 비밀이 있습니다.
6절에 “급히 내려와 즐거워하며 영접하거늘” 즐거움과 기쁨으로 영접했습니다. 이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더 설명해 봅시다. 위신이고 체면이고 다 희생하고 예수를 보기 위해 돌무화과 나무에 올라갔습니다. 그리고 얼마나 바쁜 사람입니까? 사무자동화도 없고 세금징수에 얼마나 바빴겠습니까?
지금도 국세청 바쁩니다. 관세청도 눈코 뜰 새 없이 바쁩니다. 이처럼 한창 세리들을 이끌고 세금 거두는데 바쁠 사람이 예수 보기 위해 나왔습니다. 시간을 드렸습니다. 사람들의 욕설이나 돌팔매가 예상되지만 그걸 각오하고 나왔습니다. 누군가 복수의 칼을 들이댈지 모르지만 목숨 걸고 나왔습니다.
삭개오의 믿음을 알려면 이런 배경까지 알아야 합니다. 호기심 때문에 나온 것 아닙니다. 사람이 변해도 너무 변했습니다. 변하면 죽는다고 하지 않습니까? 제 생각인데 삭개오가 진리를 그렇게 갈망한 걸 보면 기대했던 메시야를 못 만난다든지, 뭔가 인생에 변혁이 없으면 생을 마감하려고 한 것 같아요.
그만큼 갈망했습니다. 모든 걸 걸었습니다. 오직 희망은 메시야였습니다. 예수가 전부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원하신다면 무엇이든지 할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체면도 명예도 돈도 직업도 위험도 시간도 기쁨도 즐거움도 목숨까지도 다 바쳐 예수를 만나기를 갈망했습니다.
믿음 점검해 보세요. 예수를 그렇게 믿어야 합니다. 예수가 나의 전부여야 합니다. 세상과 예수, 게으름과 예수, 적당히와 예수, 상황윤리와 예수, 그렇게 반반이 아니라 예수가 전부여야 합니다.
“주 예수 보다더 귀한 분은 없네. 이 세상 부귀와 바꿀 수 없네. 영죽을 내대신 돌아가신 그 놀라운 사랑 잊지 못해. 세상 즐거움 다 버리고 세상자랑 다 버렸네. 주 예수 보다 더 귀한 분은 없네. 예수 밖에는 없네”
이제 답이 나왔습니다. 예수를 믿되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인격을 다하고 정성을 다하고 시간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섬기라. 다른 말로 바꾸면 예수님을 사랑하라. 예수를 믿을 뿐 아니라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야 예수님이 기뻐하시고 온전히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그래서 계3:19-20에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하셨습니다.
얼마나 사랑이 중요하면 바울이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자는 저주를 받으라고 두 번이나 말했을까요? 삭개오처럼 예수 때문에 날마다 즐겁고 행복하시기 바랍니다. 사람의 제일 된 목적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를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 생각하면 행복해서 견딜 수 없어야 합니다.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삭개오가 예수 만나기 쉬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키가 작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올라가고 또 올라갔습니다. 우리 믿음도 자라야합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으로 자라라. 예수만큼 사랑도 자라야 합니다. 요14:23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그에게 가서 거처를 그와 함께 하리라” 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를 어떻게 믿습니까? 하나님을 어떻게 섬기십니까? 정통보수신앙 가졌다고 다 된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예수 주로 믿되 삭개오처럼 예수님이 나의 기쁨이 되고 즐거움이 되고 노래가 되고 생명이 되고 전부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를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 삭개오처럼 예수님을 믿고 사랑함으로 영접하여 구원 받고 변화 받고 사랑 받고 귀히 쓰임 받는 귀한 아브라함의 자손들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
출처: 한국강해설교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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