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문예와 문학관 기행을 떠나기로 했다. 첫발(통권 70호, 2023년 가을호)을 서울 종로구 윤동주문학관에서 뗀다.
그 울림은 깊고 넓어서
-윤동주문학관
차용국
인왕산에서 내려와 창의문에 이르렀다. 창의문은 한양도성 4대문 사이에 둔 4소문 중의 하나인 북소문이다. 1396년(태조 5)에 지은 문루(門樓)는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고, 1741년(영조 17)에 다시 지었다. 창의(彰義)는 ‘올바른 것을 드러내게 하다’는 뜻이다. 사람들은 자하문이라고도 부르는데, 이곳 경치가 개경의 승경지(勝景地) 자하동과 비슷하다고 붙인 별칭이다. 나는 자하동에 가본 적이 없고, 휴전선을 뚫고 가서 볼 수도 없으니 양쪽 풍경의 닮음과 다름을 느낄 수 없고 말할 수 없다.
창의문 좌우로 인왕과 북악의 능선은 가파르게 치솟고, 한양도성은 그 능선 위에 하얀 선을 그었다. 칼날에 난반사하며 튕겨 나오는 성난 빛과 같은 선, 정치 이념과 욕망이 뒤섞인 경계의 선이었다. 그 선은 안과 밖, 좌우를 완강하게 구별하고 자르면서 도도했다. 중종반정의 무리가 이 선을 넘어와 연산군을 몰아내고 득세했고(1506.9.2), 북한의 김신조 일당이 박정희 대통령 목을 따겠다고 기어이 이 선을 넘어와 막아서는 경찰에게 총질했다(1968.1·21사태). 그때 희생당한 최규식 경무관과 정종수 경사의 순직비가 우측 북악산을 지키며 서 있고, 길 건너 좌측 인왕산 자락에 윤동주문학관이 있다.
윤동주문학관 일대는 옛 청운아파트 부지였다. 노후한(1968~69) 아파트는 정밀안전진단 결과 D등급(2003)을 받았고, 붕괴의 위험이 심각해지자 철거했다(2005, 11동 557가구). 그 자리(7,553평)에 소나무, 상수리나무 등 1만여 그루의 나무를 심어서 녹지를 만들어 청운공원이란 이름표를 붙였다. 공원 한편에는 윤동주 시인의 시비를 세우고 시인의 언덕을 조성했다(2009). 윤동주문학관은 시인의 언덕 절개지에 지었다(2012.6.30. 준공). 청운동과 부암동 경계를 넘나드는 창의문 옆 도로변에.
정확히 말하면, 윤동주문학관은 새로 지은 것이 아니라 기존 건물을 리모델링했다. 청운동 일대에 식수를 공급하기 위해서 만든(1974) 청운수도가압장이 아파트 철거와 기술 발달 등으로 용도 폐기되었고(2008), 종로구가 이 건물을 인수하여 윤동주문학관으로 재탄생시켰다(2012.7.25. 개관). 가압장은 느려지는 물살에 압력을 가해서 다시 힘차게 흐르도록 도와주는 시설을 말한다. 그의 시가 느슨한 우리들의 삶에 가압장이 되어주기를 소망하는 테마다. 시대적 소명을 다한 폐허의 시설물도 허물고 버리면 쓰레기가 되고, 콘텐츠와 스토리를 엮어 재구성하면 의미 충만한 창조 공간이 된다. 윤동주문학관은 그 증표다. 폐허의 땅에도 별은 뜨고, 버려진 역사에도 별은 빛난다.
사각형 성냥갑 모양의 문학관은 창문이 없고, 벽면에 흰색 페인트가 칠해져 있다. 흰색은 윤동주의 순결한 영혼과 시세계의 이미지를 상징한다. 도시에서 흰색은 쉽게 때 묻고 변색이 심해서 관리가 쉽지 않겠지만, 자주 색칠해서 늘 산뜻한 흰색을 유지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문학관으로 들어간다. 맨 먼저 출입문 흰색 철판에 쓰여있는「새로운 길」과 마주한다.
내를 건너서 숲으로
고개를 넘어서 마을로
어제도 가고 오늘도 갈
나의 길 새로운 길
민들레가 피고 까치가 날고
아가씨가 지나고 바람이 일고
나의 길은 언제나 새로운 길
오늘도… 내일도…
내를 건너서 숲으로
고개를 넘어서 마을로.
- 「새로운 길」전문
간도 명동촌에서 출생한(1917.12.30) 윤동주가 서울 연희전문대학에 입학하여(1938, 현 연세대학교) 맨 먼저 지은 시다(1938.5.10.). 활기찬 이미지와 힘찬 리듬이 젊은 패기로 일렁인다. 새로운 세상에 와서 새롭게 가야 할 새로운 세상에 대한 동경과 다짐이 동면의 땅을 뚫고 나오는 새싹처럼 생동한다. 좋은 시는 시 자체가 가진 힘으로 독자의 삶에 긍정의 영향력을 선사하여 살아가는데 힘을 보태준다.
신경림 시인은 윤동주의 생애를 잘 모르던 시절에 처음 이 시를 읽고, “…… 6·25 다음 해 봄, 마을마다 장티푸스가 돌아 뒷산에 매일처럼 새 무덤이 생기고 있을 무렵이었다. 그런데도 이 시를 읽고 나니 문득 마을과 마을 앞으로 난 길과 길가에 핀 민들레와 길가의 미루나무에서 우짖는 까치가 밝고 환하게만 느껴졌다. 전쟁과 병에 대한 두려움으로 기가 죽어 집 안에만 틀어박혀 있던 나는 이 시를 읽으면서 밖으로 나다니게 되었고 활기를 되찾았다”*라고 술회했다.
* 신경림, <시인을 찾아서> 218
윤동주 시인이 일제에 저항한 시인이라는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지만, 그의 모든 시를 오로지 저항의 프레임과 연결하여 읽을 이유는 없을 듯싶다. 독자는 자신이 처한 환경과 의식의 창에 비추어 시를 읽고 느낀다. 비록 독자의 관점이 시인의 창작 의도와 다르다고 하더라도 독자의 몫은 존중되어야 한다. 궁극적으로 시인도 독자의 1인일 뿐이고, 다양한 독자의 견해는 그만큼 보편적 서정의 가치를 공유한다는 의미다. 그의 시가 시대와 장소와 민족을 뛰어넘어 애창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윤동주문학관은 3개의 전시실을 두고 있다. 제1전시실(시인채), 제2전시실(열린 우물), 제3전시실(닫힌 우물)로 구분한 것은 인위적이라기보다 219㎡(66평)의 소규모 건물 구조에서 나오는 자연스러운 나눔으로 보인다.
제1전시실 한쪽 벽면은 윤동주의 사진과 육필원고를 전시하고 있다. 육필원고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작품 마지막에 그 시를 지은 날짜가 적혀있다. 그래서 윤동주의 생애와 시작 날짜를 비교하면서 읽을 수 있고, ‘나는 이런 환경과 처지에서 이런 시를 지었다!’라는 그의 고백을 듣는 듯하다. 반대편 한쪽 벽면에는 발간한 그의 시집『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60여 종의 표지가 전시되어 있다. 이것이 전시물 전부다. 좁은 공간에 전시할 수 있는 양은 제한적이어서 이것이 전시물 전부다.
사실 윤동주는 생전에 시집을 내지 못했다. 졸업을 앞두고 후배 정병욱과 종로구 누상동의 김송 소설가 집에 하숙하면서(1941) 시집 발간을 준비했지만, 정치적 문제를 우려한 이양하 교수의 만류와 경제적 이유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첫머리에「서시(1941.11.20)」배치하고 그동안 지은 시 중에서 선별한 19편을 담은 시집이었다. 시집 발간을 접은 그는 필사본 3부를 만들어 이양하 교수와 정병욱 후배에게 각각 1부씩 주고, 1부는 자신이 가졌다. 그의 시집은 해방 후 정음사에서 그의 시 31편을 담아 처음 발간했다(1948). 유고 시집으로.
제1전시실 한가운데에는 우물 모양의 낡은 목판(우물목판)이 차지하고 있다. “윤동주의 생가가 있던 우물을 수리하는 과정에서 나온 목재 유구이다. 이 우물 옆에 서면 동북쪽 언덕으로 윤동주가 다닌 학교와 교회 건물이 보였다”고 안내문은 설명한다. 나는 우물목판을 감싸고 있는 보호막 유리에 쓰여 있는「자화상(1939.9)」을 떠올리며 제2전시실과 제3전시실로 간다.
산모퉁이를 돌아 논가 외딴 우물을 홀로 찾아가서 가만히 들여다봅니다
우물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습니다
그리고 한 사나이가 있습니다
어쩐지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가엾어집니다
도로 가 들여다보니 사나이가 그대로 있습니다
다시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그리워집니다
우물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고 추억처럼 사나이가 있습니다
- 「자화상」전문
우물을 통해 자아의 참모습에 다가가고 싶은 사내의 이미지가 애잔하다. 윤동주에게 우물은 “떠날 수도, 다가갈 수도 없는 내면의 부끄러움과 갈등, 그리고 그리움의 공간이다.”* 그의 우물에는 암울한 시대를 살아갈 수밖에 없는 젊은 이상과 현실이 겹치고 떨어지는 특별한 세계다. 청운가압장 물탱크를 개조할 때, 천정을 걷어낸 제2전시실을 ‘열린 우물’로 이름 짓고, 사방이 꽉 막힌 감옥 같이 만든 제3전시실을 ‘닫힌 우물’로 이름 붙인 구조도 같은 맥락의 상징성을 보여준다.
* 소강석, <별빛 언덕 위에 쓴 이름> 38쪽
연희전문대학 졸업을 앞두고 윤동주는 일본 유학 문제로 고민한다. 유학 동기는 일본 경찰의 취조 과정에서 밝힌 것처럼, “조선독립을 위해서 자신이 민족문화를 연구하려면 다만 전문학교 정도의 문학 연구로는 부족하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일본으로 유학 가려면 배를 타고 대한해협 건너야 하는데, 배를 타려면 ‘도항증명서’가 필요했다. 그것을 받으려면 창씨를 해야 했고, 일본 대학 입학도 창씨를 하지 않으면 어려웠다. 결국 윤동주는 연희전문대학에 ‘히라누마 도오쥬’란 이름으로 창씨개명계를 제출했다(1942.1.29). 그가 창씨 닷세 전에 지은「참회록(1942.1.24)」을 펼치면 그때의 참담한 심정을 들을 수 있다. 암울한 시대의 수레바퀴에 밟혀버린 양심의 굴욕과 좌절의 소리를
* 종로문화재단, <윤동주문학관. 이명찬-별이 지다> 59쪽
파란 녹이 낀 구리거울 속에
내 얼굴이 남아있는 것은
어느 왕조의 유물이기에
이다지도 욕될까
나는 나의 참회의 글을 한줄에 줄이자
만 24년 1개월을 무슨 기쁨을 바라
살아왔던가
내일이나 모레나 그 어느 즐거울 날에
나는 또 한 줄의 참회록을 써야 한다
그때 그 젊은 나이에 왜 그런 부끄런 고백을 했던가
밤이면 밤마다 나의 거울을
손바닥으로 발바닥으로 닦아보자
그러면 어느 운석 밑으로 홀로 걸어가는
슬픈 사람의 뒤 모양이
거울 속에 나타나온다.
- 「참회록」전문
윤동주는 다시 참회록을 쓸 날을 소망했다. 그날은 즐거운 날이지만 자신의 부끄러운 양심을 고백해야 하는 날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는 참회록을 다시 쓸 수 없었다. 도쿄의 릿쿄(立敎)대학에서 한 학기를 마치고 도시샤(同志社)대학에 전입한(1942) 그는, 이듬해 여름방학을 맞아 귀향을 준비하던 중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1943.7). 징역 2년을 선고받은 그는 후코오카형무소에 수감되었다. 고역에 시달렸고 의문의 주사를 맞았다. 그는 옥사했으나(1945.2.16.) 사인은 불분명하다. 생체실험으로 죽었다는 의문의 꼬리표도 여전히 떨어지지 않고 있다.
나는 문학관을 나와 시인의 언덕으로 올라갔다. 소나무와 벚나무가 제법 우거진 젊은 숲은 오솔길에 그늘을 만들고, 「서시」를 새긴 큰 바위 시비는 햇살 고운 잔디밭에 서서 서울 도심을 바라본다. 사람이 시를 사랑하고 좋은 시가 시대와 장소를 넘나들며 애창되는 것은, 시 자체에 내장된 인류 보편 서정을 공감하고 공유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시의 보편 서정을 개인 정서와 시대 정서의 어울림이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윤동주의 시를 사랑하는 것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소망하는 개인 정서와 암울한 역사의 아픔을 견디며 고뇌하는 시대 정서가 어우러진 울림 때문일 것이다. 그 울림은 깊고 넓어서 인왕산 하늘에는 늘 바람이 불고 별이 뜨고 시가 흐른다.
첫댓글 항상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