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고전서(四庫全書)에 대한 변증설(고전간행회본 권 4) |
다시 각성(各省)에 조칙하여 유서(遺書)들을 수집하게 하고 진도(進到)한 것은 부본(副本)을 기록하여 갖추 편집하고는 각각 그 대의(大意)를 채취(採取)하여서 《제요(提要)》를 만들었는데 이씨(二氏, 도교와 불교)의 서적은 대부분 배제하고 수록하지 않았다. 이를 이름하여 사고전서(四庫全書)라 하고, 거기에서 더욱 정요(精要)한 것을 뽑아 사고전서회요(四庫全書薈要)를 만들었는데, 책은 새로 지은 문연(文淵)ㆍ문진(文津)ㆍ문원(文源) 등 3각(閣)에 저장하였다. 신(臣)은 그때 조교(助敎)로 있으면서 이미 외람되이 교감을 맡았었는데, 사부(四部)로 책을 장정(裝幀)하여 사시(四時)의 색(色)에 안배(按排)하였다. 제신(諸臣)들의 교감의 소루(疏漏)함에 대해서는 때로 성상의 분부에 힘입어 용서되었다.” 하였다.
나머지 2분은 선사(繕寫)하여, 하나는 대내(大內)에 저장하고 하나는 원명원(圓明園)에 저장하였다. 무릇 편록(編錄)한 지 13년 만에 일을 끝마쳤다. 사고(四庫)에 공존(共存)한 책이 3천 4백 60종으로 모두 7만 5천 8백 54권인데 《간명목록(簡明目錄)》을 편집하여 열람하기에 편리하도록 하였고 저본(底本)은 이어 한림원 안에 저장하였는데 이야말로 고금에 미증유(未曾有)의 대관(大觀)이다.” 하였다.
3대 부서란 곧 《책부원귀(冊府元龜)》ㆍ《태평어람(太平御覽)》ㆍ《문원영화(文苑英華)》이며《태평어람》 외에도 《태평광기(太平廣記)》5백 권을 수찬하였는데, 성조(成祖)가 정난(靖難) 이후에 영락대전을 수찬한 것도 이런 뜻에서였다. 내가 상고하건대, 송 태종이 여러 선비에게 명하여, 고사(故事) 1천 권을 편집하였으니 이것이 《태평총류(太平總類)》이고, 문장(文章) 1천 권은 《문원영화》이고, 소설(小說) 5백 권은 《태평광기》이고, 의방(醫方) 1천 권은 《신약보구(神藥普救)》인데 이를 총괄하여 《태평어람》이라고 사명(賜名)하였다. 《책부원귀》 1천 권은 곧 진종(眞宗)이 편집한 것이다.” 하였으니, 문유(文裕)의 상고한 바가 확실한지 모르겠다. 정난(靖難)의 거사(擧事)에 이르러서는 불평한 기운이 국내(國內)에 가득 찼을 것이니, 문묵(文墨)을 빌어서 사무친 불평을 소화시켰음은 실로 당일(當日)의 본의에 관계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