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타고라스 정리와 노장철학과 독재자의 삶
‘직각 삼각형의 빗변의 제곱은 다른 두 변의 제곱의 합과 같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피타고라스 정리의 내용입니다. 이 정리는 BC 500년경, 그리스인 피타고라스가 발견하였다고 알려져 있으나 사실은 그보다 훨씬 이전에 알려져 있었다고 독일의 유명한 역사학자 칸도르는 말하고 있지요.
고대 이집트의 고문서 ‘파피루스’ 에서는 이집트 사람들은 BC 2,300년경 3 : 4 : 5 의 길이를 이용하여 직각을 만들었다 하고, 인도에서도 BC 400∼500 년경 15, 36, 39를 세 변으로 하는 직각삼각형을 만들었다고 전합니다. 중국에서도 피타고라스 정리보다 500년 앞서서 중국 고대 수학책인 주비산경(周髀算經)에 구고현의 정리란 말이 나오는데 이게 바로 피타고라스 정리와 동일하단 말까지 전하고 있지요. 이 말들을 다 신뢰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
32 + 42 = 52 , 152 + 362 = 392
그러나 피타고라스에 이르러 이 정리는 삼각 함수라는 수학 공식의 기초가 되었지요. 각의크기를 삼각비로 나타내는 함수를 삼각 함수라 하지 않습니까. 고등학교 때 죽도록 학습했던 사인(sine), 코사인(cosine), 탄젠트(tangent), 코탄젠트(cotangent), 시컨트(secant), 코시컨트(cosecant)의 여섯 가지 함수 생각나지요. 이 피타고라스 정리 때문에 기하학이 발달하게 되고 땅을 측량하게 하는 실용적 기술의 밑천이 되었으므로 논증기하학의 기초가 탄생된 셈입니다. 기하학이 발달하면 다른 학문도 따라 발달하게 되지요. 소위 이 우주는 세계는 수학공식과 같은 세계관 즉 기계론적 세계관이 등장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이거지요. 이 논리는 우주의 모든 현상을 물질운동의 조합으로 환원하여 설명하는 밑천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이걸 확실하고 정확하게 논리 전개를 하려 한 사람은 뉴턴이었습니다. 그는 코페르니쿠스, 케플러, 베이컨, 갈릴레오, 데카르트 등의 업적을 집대성하여 앞으로 전개될 과학사상의 확실한 기초를 닦았던 사람 아닙니까.
뉴턴 역학에서 물리적 현상이란 중력으로 비롯되는 밀질 입자의 운동이고 이 입자는 다른 물체에 힘을 영향하는 고정법칙이 존재한다고 보았지요. 그의 기계론적 세계관은 우주가 마치 맞물린 톱니바퀴처럼 인과적 결정적인 운동으로 연결된다고 본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이론도 19세기를 대표하는 물리학자 맥스웰의 전기 역학 그리고 다윈의 진화론에 의해 위협을 받다가 20C초에 이르러서는 상대성 이론과 양자 이론의 등장으로 뉴턴 식 기계론적 세계관은 수정되어야 했던겁니다.
서양에서는 이 우주를 세계를 계측 가능한 것 또는 예측 가능한 것으로 간주하고 그것을 위해 도전해온 셈이라 할 수 있습니다. 동양에서도 이런 자연과학의 인식이 영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서양에서처럼 우주를 세계를 객관적으로 계측화 하려는 노력은 부족했지요. 그러나 우주를 세계를 자로 재는 노력은 부족했지만 인생을 자로 잴 그 잣대를 만드는 일만큼은 서양을 앞질렀다 이런 말이 가능할 것 같습니다. 이것이 바로 老莊哲學이지요. 이제부터 이 노장철학에 대해 조금만 설명을 하겠습니다.
老子의 도덕경(道德經)은 2,500년 전, 중국 춘추전국 시대 노자가 쓴 책입니다. 도덕경은 자연 현상을 가지고 인간 세상의 이치와 본질을 설명한 자연철학입니다. 인간도 자연의 한 부분이므로 자연 현상을 보고 배워야 하고 자연이 그렇듯이 인위적 행동을 절제해야만 행복한 삶, 평화로운 삶을 살 수 있음을 설명한 책이지요. 노자의 뒤를 이어 莊子가 등장하였습니다. 장자는 노자의 철학을 더 심화하였습니다. 장자는 인간 스스로를 속박하는 목표, 전통, 주위환경 등으로부터 벗어나 도와의 조화 속에서 거리낌 없이 산다면 死生을 초월한 절대 무한의 경지에 소요(逍遙)하게 된다고 했지요. 도를 깨친 사람은 불확실성이나 불합리, 惡이나 죽음 등 그리고 그 반대의 상황에 대해서도 번민하거나 번거로움을 느끼지 않는다고 하였지요. 이 두 사람의 사상을 일러 老莊哲學이라 하지 않습니까.
서양의 물리학을 기반으로 하는 세계관은 인간을 배제해 놓고서 자연의 이치를 발견한 것이었다면 동양의 노장철학은 자연의 해석에서 인간 삶의 이치를 발견한 셈이지요. 노장철학을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인간의 주관성에서 탈피하여 자연의 객관성에서 진리를 발견하려 한 점, 그래서 인간의 주관성이 차지하는 가치개념을 자연에 내재한 사실성에서 찾고 이것을 인간질서에 대입하려 하였는 것 아닙니까. 노장철학은 세계가 서로의 관계성으로 엮여 있다면서 有와 無의 개념으로 설명하고 있지요. 無는 구체적이지 못하고 顯現되어 있는 것이 아니지만 有를 가능하도록 해주는 역할담당자라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無는 아무것도 없는 것이 아니고 쉽게 보고 느끼게 하는 質이 없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휘어진 대나무는 다시 제자리에 위치하려 합니다. 패인 구덩이는 언젠가는 다시 본디대로 메어지고 맙니다. 솟은 흙더미는 언젠가는 깎이어 평지로 환원하지요. 인위적으로 강을 막아 뚝을 쌓았다 해도 언젠가는 강은 뚝을 허물고 애초대로 흐를 것입니다. 이러한 이치는 누가 시켜서 만들어낸 것도 아니고 누구의 바람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도 아닙니다. 이런 성질 자체를 노장철학은 道라 한 겁니다. 도는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道가 無의 상태로 있는 듯하지만)도가 행한 현상은 우리가 확인할 수 있습니다.(道가 有임을 확인하게 하지요.)
孔子와 그 뒤를 이은 孟子는 인간행위의 가치부분을 道라했다면 노자, 장자는 자연이 저지르는 이 현상을 道라 하였으니 서로 다른 도의 개념을 가지고 있지요. 孔孟哲學은 인간사회를 사농공상으로의 계층관계, 君과 臣, 父와 子, 夫와 婦, 長과 幼의 상하관계로서의 위계, 朋과 友와의 수평적 유대를 통해서 정치 혹은 사회 혹은 가정에서의 안정을 추구하려 하였습니다. 다르게 말하면 정치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지배 철학을 강조한 셈이지요. 그러나 노장철학은 다만 삶에서의 근본을 자연현상에서 배워야 한다는 삶의 이치를 제공하려 한 것입니다.
노장철학이 말하는 道는 처음부터 자연적으로 존재하는 것이어서 없어지지도 지워지지도 변하지도 않고, 이것을 누가 막을 수도 수정할 수도 없는 절대한 가치로 존재합니다. 인간이 만들어 낸 孔孟哲學의 道는 인간 세상에 국한하는 도이지만(그래서 현실에 따라 새 해석이 가능하지만) 노장철학의 道는 우주와 만물을 다스리는 영원불멸의 이치라는 것 아닙니까. 모든 생명은 태어나면 죽고 도에 어긋나는 행위는 일찍 망하게 됩니다. 사회가 혼란스러운 것은 탐욕 때문이고 만족할 줄 모르는 데서 위태로움이 발생합니다. 멈추고 그칠 줄 알면 위태로움에서 벗어나지요.
동양인의 자연관은 자연 가운데에 신적인 요소와 인간적인 요소가 포함되어 있고 신·인간·자연의 삼자가 하나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서양의 자연관은 인간이나 신을 자연 속에서 살아갈 수 있는 통일체로 파악하였다는 점에서 동양의 자연관과 어느 정도 닮아있지만 이건 그리스 철학에서나 볼 수 있는 자연 순환의 원리(유기체적 세계관이라 해야 하나요.)에 지나지 않고 중세시대에 오면 이러한 통일체는 사라지고 신과 인간과 자연을 계층적으로 이해하려 하였습니다. 신은 자연과 인간을 창조한 존재이므로 전지전능의 초월적 위치에 있고, 인간은 신으로부터 자연을 지배하고 이용하라는 권리를 부여받은 존재로 자연 앞에 군림하는 자세였다 이거지요. 베이컨이 “아는 것이 힘이다”라고 한 말은 자연의 원리는 과학이고 이것의 적극화를 힘이라 간주한 것이지요. 그러나 우리는 집을 짓더라도 자연을 어찌 배경하느냐 자연과 어찌 조화하느냐를 생각하였습니다. 말하자면 인간과 자연이 조화되는 걸 최상의 삶터로 생각하였습니다. 굳이 노장철학이 아니라 해도 자연과 더불어 살면서 자연 그대로의 자족에 행복이 있다는 생각을 일찍부터 해온 셈입니다.
십년을 경영하여 초려 삼간 지어내니
나 한간 달 한간에 청풍 한간 맡겨 두고
강산은 들일 데가 없으니 둘러 두고 보리라
송 순
이런 시조 생각나지요. 강산을 병풍치고 사는 삶, 청풍이 친구 되어 넘나들고 달마저 안방으로 안내되는 손님 같은 존재 뭐 이런 삶터를 생각한 선조들 멋지지 않습니까. 주거공간이 이러하다는 것 말고 삶 그 자체가 자연과 구별되지 않는다는 아래 시조는 어떻습니까.
청산도 절로절로 녹수도 절로절로 산(山) 절로 수(水) 절로 산수간에 나도 절로 이중에 절로 자란 몸이 늙기도 절로 하리라
청산은 봄이 되면 절로 푸르고 가을이 되면 절로 낙엽으로 물들지요. 녹수는 절로 흘러 바다에 이르고 산수 간에 나 역시 이 같은 자연을 닮아 절로 늙어가는 것이니 산이며 강이며 나라는 존재가 서로 달리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 되어 있다 이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자연과 함께하는 삶이 아니라 자연 되어 사는 삶의 이야기가 그럴듯하지요. 이런 이치 배울 만하지 않습니까.
인간 역사 속에는 자연을 거스른 인물들이 많지요. 그 중에서도 통치자로서 개인의 영화를 위해 폭력을 휘둘러 많은 사람들을 희생시킨 인물들이 많습니다. 우리는 이를 폭군이라 합니다. 폭군 1위는 누굴까요. 아마 히틀러 아닐까요. 2차 대전을 일으켜 세계인들을 전쟁의 피해자로 만들고, 유태인 600만 명을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독가스로 학살하고, 집도 없이 떠도는 집시들을 또 얼마나 죽였습니까. 루이 14세는 베르사이유 궁전을 무리하게 지어 세금을 강제 징수하더니 영토 확장을 위해 크고 작은 전쟁을 일으켜 국민을 희생시킨 인물입니다. 수나라 양제는 고구려 정벌로 군사 113만을 죽였고, 자신의 아버지 문제까지 죽인 인물입니다. 스탈린은 어떤가요. 엄청난 사람들을 숙청시키고 시베리아에서 생체실험을 감행한 인물 아닙니까. 차우세스쿠 루마니아 독재자는 자신의 폭정에 저항하는 사람들을 무차별 죽였고, 후세인은 많은 시아파 주민을 학살하고 쿠르드 족 18만을 학살한 장본인입니다. 우리나라 역사에서도 백제 의자왕, 태봉 궁예, 고려 광종, 고려 충혜왕, 조선 연산군 등은 자기만족을 위해 일사불란했던 왕이면서 무고한 백성들을 많이도 죽였지요.
북한 김정일은 先軍政治 한다고 식량을 군대에 우선 배급하고, 핵과 미사일 개발에 경제력을 쏟아 부어 300만 명 국민을 굶어 죽게 한 독재자, 그 아들 김정은은 고모부 장성택을 기관총으로 난사했고 다른 인물들은 화염방사기로 사형을 시키는 무시무시한 인물인 것 다 아는 이야기입니다.
위에 열거한 인물들은 폭정으로(자연스럽지 못한 방법으로) 나라를 다스렸기 때문에 (도를 어겼기 때문에) 오래가지 못했지요. 생각해 보십시오. 열흘 넘게 바람이 붑디까. 한 달 넘게 비가 오던가요. 사람 한 평생으로 볼 때 권력이란 하루 한 시간 햇빛에도 견줌 되지 못하는 것이거늘 무엇 때문에 구차히 사람들을 못살게 구는건가. 그게 무슨 영화라고 그런 짓거리를 한단 말인가. 그 결과 그는 행복했는가. 억지 인생을 산 이들은 제 명대로 잘 살다 가지 못하고 자살하거나 개죽음을 당하거나(차우세스쿠는 160발 총탄 세례를 받았다나요.) 지독한 병에 걸려 죽거나 하였습니다. 아직 나이가 있어 죽음이 보류된 인물도 있긴 있지만서두.
이런 폭군들은 물의 이치를 모릅니다. 물은 위에서 아래로 흐르고 뚝을 만나면 잠시 쉬었다 이내 뚝을 무너뜨리고 가던 길을 계속 가는 게 물의 흐름이란 말은 이미 말했습니다. 도를 거스르는 일은 잠시는 허여 되겠지만 곧 자연의 이치에 매몰되고 만다는 걸 왜 모르는지. 억지가 없는 자연스러움에 기대어 삶을 사는 사람은 오래 건강히 잘 살다 가는 법입니다. 그런데 위에 예든 폭군들은 그런 이치를 거역하였으니 또는 무시하고 있으니 불쌍한 존재들 아닙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우매한 인간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