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문>
성급한 진단과 시대 영합을 경계하며
권대근
대신대학원대학교 교수, 문학비평가
I.
고동주 선생님의 발제 <한국수필의 오늘>, 잘 들었습니다. 고 선생님께서는 한국수필의 오늘에 대한 논의의 초점을 “21세기 한국수필은 1)혼돈의 시대를맞고 있다”는 데 놓고,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부작용으로 질적인 문제를 들고 있습니다. 여기에 더하여 수필계는 새로운 시대 여건과 2)소통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고 진단하고, 발전방향으로 3)등단제도개선책과 4)단수필의 도입등 새 시대에 적응할 수 있는 전략을 모색하고 있습니다. 저는 고 선생님의 이런 입장을 한편으로 이해하면서, 달리 생각해 볼 수 있는 서너 가지 사항에 대해 문제 제기를 함과 아울러 우리 수필계가 직면한 현실과 관련하여 발제자의 의견을 구하는 방식으로 토론을 전개하고자 합니다.
II.
첫째, 발제자인 고 선생님께서 논의의 초점으로 제시한 “21세기 한국수필은 혼돈의 시대를 맞고 있다”고 한 데 대해 저는 동의를 할 수가 없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우리 수필계의 오늘을 진단하면서 언뜻 보아 전성시대인 것 같으나 내용을 들여다보면 어두운 그늘이 너무 많다고 하고 있고, 선생님은 오늘같이 신인 수필가가 대량으로 등단하고, 이와 같은 현상이 이대로 계속 고속행진을 하게 되면 질적인 심각한 문제가 야기될 것으로 전망하고 있습니다. <iv>에서 아직도 글을 함부로 써 내는 작가가 너무 많은 것이 문제라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저는 위와 같은 선생님의 진단에 이의를 제기합니다.
1) 지금이야말로 혼란기가 아니라 수필의 시대, 아니 전성기라 생각합니다. 수필가가 많이 등단하고, 수필이 대량으로 발표되고, 수필집이 많이 출판되고, 수필문학인이 문학가의 서열을 차지하는 것이 반드시 질적 저하를 뜻하는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그리고 아직도 일부에서는 수필에 대한 이론이 부족하다고 하고 있는데, 수필에 대한 설명과 이론이 오늘날처럼 많은 때는 일찍이 없었습니다. 문학인으로서의 자세는 우리 태동기의 작가를 못 따르지만 작품의 수준은 2000년대를 기점으로 확실히 달라진 것은 사실입니다. 물론 발제자께서 지적하신 대로 일부는 수준에 미치지 못하는 글을 수필이라고 발표하고 있습니다만, 제가 비교분석해 본 바로는 2000년대 이후 등단 작가들이 많이 쏟아져 나오지만 여성작가를 중심으로 상당히 많은 수필가들이 좋은 작품을 써내고 있습니다. 제가 볼 때, 많은 수필가들이 양적 성장에 대한 주위의 따가운 시선을 의식한 듯 아무거나 발표하기 위해 작품을 함부로 문예지에 헌납하는 경향이 요즘에는 많이 줄어들었다는 걸 실감하고 있습니다. 선생님은 좋은 수필을 쓰겠다는 열의를 가지고 본격수필문학을 지향하려는 수필계 내부 움직임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오늘날은 수필문학의 전성기이기도 하면서 또한 모색기라는 표현이 더 정확하다고 봅니다.
2) 등단 문제는 개인이나 수필계가 나서서 해결할 문제가 아니라고 봅니다.등단도 시각의 문제입니다. 긍정적으로 보면, 글을 쓰는 사람이 많으면 많을수록 바람직한 일이라 봅니다. 수필가가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것이 아니겠습니까? 자가 출판이 활성화된 지금과 같은 디지털 시대에 등단은 통과의례에 불과합니다. 등단을 시키고 안 시키고 하는 것은 문예지의 고유 권한이고, 그리고 그 등단이라는 것이 사계 권위자의 추천과 심사로 이루어지고 있지 않습니까? 문제가 있는 작가는 비평이 활발한 만큼 따가운 비평으로 걸러낼 수 있습니다. 작가는 어떻게 하면 더 좋은 작품을 쓸 것인가 노력하고, 비평가는 어떻게 하면 작가로 하여금 좋은 작품을 쓰게 할 것인가에 관심을 기울인다면, 수필의 미래는 밝다고 봅니다. 영광스러운 등단을 하고 싶은 분은 신춘문예로 나오면 되는 것입니다. 요즘 여성들이 수필 많이 배우러 오고 있지 않습니까? 여성으로 태어나 주부로 헌신하며 살아온 것도 서러운데, 수필가로 등단하려는 것도 법으로 막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봅니다.
3) 우리가 독자의 기호에 따라가는 소통보다 독자를 따라 오게 하는 노력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수필의 미래를 걱정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수필도 시대적 흐름을 따라 가야하고 그렇지 않으면 위기를 맞을 것으로 내다보고 있는 것도 현실입니다. 그래서 고 선생님께서는 시대와 대중의 구미에 맞게 수필도 새로운 시대정신에 맞게 진화시켜야 하기 때문에 수필의 소통을 문제 삼고 있습니다. 필자는 이런 입장에 반대합니다. 수필은 문학이고 예술이기 때문입니다. 수필의 상위 개념인 예술은 한마디로 미를 추구하는 것이고, 미의 본질은 복합적 통일성이라는 난해함이 하나의 값어치를 이루고 있습니다. 엄밀히 말하면 고급예술은 대중성과의 단절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수필은 독자와의 관계에서 독해의 소통성을 추구할 것이 아니라 전달차단성을 추구해야 고급문학의 터를 잡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독자의 기호에 따라가는 것보다 독자를 따라오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봅니다. 문제는 방향 설정입니다. 시대적 변화에 따라 수필에 대한 인식도 변화하겠지만, 그 방향성의 목표는 수필독자의 저변확대를 위한 대중화가 아니라 고급문학으로서의 장르의식을 바르게 수립하는 데 목표를 두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4) 퀵서비스로 감동을 줄 수 없습니다. 단수필의 조장은 위험합니다. 위대한 작가는 결코 대중의 기호에 영합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성에 더한층 걸맞게 품위 있는 다른 요구를 생각나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위대한 예술가의 역할은 설탕을 친 달콤한 물로 대중의 갈증을 풀어 주는 것이 아니라 품위 있는 다른 요구를 생각나게 해야 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예술가는 그 예술 작품을 즐기는 대중을 만들어내어야 합니다. 수필은 예술입니다. 그것이 예술이 되기 위해서는 감각적인 미와 감정적으로 인간을 감동시킬 수 있는 맛이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맛있는 수필이 되게 창작해야 합니다. 향기를 주는 글맛도 있어야 합니다. 사람의 냄새도 풍겨야 합니다. 신선한 상상력으로 복잡한 인생을 송두리째 엿볼 수 있는, 미학적으로 의미 있게 형상된 손맛도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보이지 않는다'의 눈으로 현실을 관통하는 인식의 눈맛도 주어야 합니다. 고급수필로서의 수필의 맛은 전체적으로 무엇보다 천박하지 않은 데서 찾아야 한다. 퀵서비스로 읽는 사람에게 감동을 줄 수 없습니다. 정서를 표면에 놓고 그 안에 삶에 대한 깊은 성찰을 감추고 있는 글을 독자는 기다리고 있습니다. 1,000자 정도, 25문장의 글로는 이런 많은 과제와 미적, 수필적, 문학적, 예술적 속성을 결코 담아 낼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다이제스트로 소설을 읽는 무미건조한 맛만 느끼게 할 뿐입니다.
III.
이제 수필계는 많이 달라졌습니다. 이런 발전과 성장과 변화의 흐름을 직시하지 못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봅니다. 수필 대량생산 문제, 수필가의 질 문제, 등단 양산 문제는 어디 세미나 가도 단골 메뉴입니다. 언제까지 이런 아이템이 문제점으로 나타날지 저는 걱정입니다. 요약하면,저는 네 가지 관점, 1) 지금은 혼돈의 시대가 아니다, 2) 대중의 기호에 따라 소통에 빠져서는 안 된다, 3) 등단 제도는 수필문단의 문제가 아니다, 4) 단수필화의 경향에 우려한다는 입장입니다. 이에 대한 선생님의 구체적인 답변을 듣고 싶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