웃음으로 새우는 설
함석헌
씨알 여러분 깨끗하십니까? 깨끗하여야 평안하십니다. 평안을 가지셔야 즐거울 수 있고 즐거워야 선(善)을 행해서 악(惡)을 이길 수 있습니다.
해가 거의 다 가고 송년의 말씀 드리려고 이 붓을 잡았는데, 속된 사람들 풍속대로 말한다면 세모에 드릴 것이 아무것도 없군요. 사실은 씨알은 그런 것 없는 법입니다. 옛날 도홍경(陶弘景)은 만권서(萬卷書)를 독파하고도 벼슬 주어도 아니 가고 산속에 살며 산중에 무엇이 있느냐 임금이 물으니 시로 대답하기를 “산중하소유 영상다백운 지가자이열 불감지증군(山中何所有 嶺上多白雲 只可自恰悅 不堪持贈君)이라, 혼자 즐길 뿐이지 임금께 드릴 수는 없습니다” 했습니다. 줄 수 없지요. 하지만 이야말로 주지 않으면서 흰구름을 가득 안겨준 시 아닙니까? 나도 그러렵니다. 일전 송광사에 갔더니 좋은 선물 있어서 주는 사람도 없이 잘 받아가지고 왔습니다. 그래 이제 여러분께 드림 없이 드리렵니다. 벽에 붙었던 한 편 시입니다. 한산(寒山) 습득(拾得) 두 명승이 바보인 척 허허 웃으며 지낸 덕을 기리는 말이었습니다.
가가가(呵呵呵)
하, 하, 하
아약환안소번뇌(我若歡顏少煩惱)
내가 만일 웃는 낯에 성내는 일 없다면야
세간번뇌변환안(世間煩惱變歡顔)
세상 성난 낯들 변해 웃는 얼굴 아니될까
위인번뇌종무제(爲人煩惱終無濟)
사람마다 성만 내고 끝내 건질 길 없기로
대도환생환희간(大道還生歡喜間)
크신 어른 허허 웃고 세상 속에 오셨더라
국능환희군신합(國能歡喜君臣合)
온 나라가 잘 웃는담 임금신하 합이 되고
환희정중부자련(歡喜庭中父子聯)
온 집 안이 잘 웃는담 아비 자식 하나로다
수족다환형수무(手足多歡荆樹茂)
형제끼리 서로 웃어 가지가지 번성하지
부처능희금슬현(夫妻能喜琴瑟賢)
부부끼리 마주 웃어 정말어진 금슬이지
주객하재감무희(主客何在堪無喜)
주인 손님 어디라고 아니 웃고 될 일일까
상하정환분유엄(上下情歡分愈嚴)
아래위도 웃는 정에 점찮음이 더욱하다
가가가(呵呵呵)
하, 하, 하
형수무(荆樹茂)는 옛날 전진(田眞)의 삼형제가 가산을 꼭 같이 나누다가 나중에 뜰 가운데 자형수(柴荆樹) 한 그루가 남자 그것을 삼분하기로 결의했더니 그 나무가 곧 마르기 시작하는 것을 보고 진(眞)이 놀라 두 아우를 불러 우리가 나무만도 못하다고 뉘우치고 서로 합해 살기로 했더니 나무가 다시 살아나고 집안이 번창했다는 이야기에서 온 것)
우리도 “하, 하, 하” 진짜로 바보 웃음을 웃으며 땀물, 눈물, 핏물의 이 한해를 시원시원히 보냅시다. “잘 있거라, 잘가거라 부지일소(付之一笑)할 것이지 무슨 이별을 그리 뼈가 빠지도록 하느냐” 하는 방자놈이 이도령보다 위입니다. 자 이도령은 겨우 어사하나 얻어 했지만 방자는 영원의 초인입니다.
웃자는 것은 역사를 희극화 하자는 것 아닙니다. 약간의 쓴웃음을 하자는 것도 아닙니다. 커지기 위해 하는 말입니다. 한산(寒山) 습득(拾得)의 그림을 보셔요. 그 배통이 얼마나 큰가? 무엇 먹고 큰 배통입니까? 절간 돌 중놈들의 먹다 남은 누룽지 먹고 큰 것 아닙니다. 찬란한 당(唐)대라는 그 허울 뒤에 숨은 갖은 한숨 눈물 원한을 다 삼키고 그것을 속에서 삭여 없애노라니 그렇게 부른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컸습니다. 죽은 놈보다도, 죽인 놈보다도 죽이고 영웅, 충신 열사로 탈바꿈을 한 놈들 보다도, 그것을 한번 밝혀보자 칼을 갈고, 이를 갈고, 먹을 가는 놈들보다도 컸습니다. 그러기에 그 웃음은 목구멍에서 나와 쥐구멍에서 사라지는 그런 따위가 아니라 세대에서 세대로 울려 퍼지는 우주 배꼽에서 나오는 웃음이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오고 오는 시대에 깨진 영혼을 어루만져 고치는 힘이 거기 있습니다. 고층건물 사이에 서서 한번 그런 웃음을 하, 하, 하 하고 웃어보십시오. 대낮에 억만 귀신이 터져 나와 눈물 콧물이 범벅이 되도록 웃고 그 이튿날 빛이 열 갑절 되는 태양이 솟아올라올 것입니다. 이런 것이 정말 역사구원(歷史救援)입니다. 서양놈들은 다른 재주는 다 많은데 웃을 줄을 모릅니다. 기독교조차도 아마 이 웃음 없는 것이 그 단점 아닐까요? 물론 장점이 단점이요 단점이 장점인 법입니다. 그러니 이 웃음도 그렇다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서구문명에 좀 한산(寒山) 습득(拾得) 같은 혼들이 났더라면 인류 역사가 이렇게 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남의 일은 그만두고 우리 꼴이나 봅시다. 고구려의 온달은 너무도 유명한 바보, 신라에도 그래도 처용이 있었다고, 백제에도 검도령이 있었다는데, 그들이 다 웃을 줄 아는 큰 배통들이었는데, 어떻게 돼서 오늘날같이 이렇게 작아지고 옅어지고 꼬부라졌습니까? 이만했으면 상당히 고였는데, (무엇이?) 무릎이 잠길 정도인데, 들리는 것은 문턱 깎는 쥐 소리같이 이 벽에서 저 벽으로 울리는 빠드득빠드득 하는 소리 밖에 없으니 웬일입니까? 그래 역사의 문턱, 영육의 문턱, 선악의 문턱을 이빨로 갉아 없앨 작정입니까? 이젠 정말 우리라도 아니 웃을 수가 없습니다.
하, 하, 하.
자, 그럼 1975년아 잘 가거라!
이제 미움도 원망도 없습니다. 치하도 책망도 없습니다. 이제 시비가 문제 아닙니다. 이지러진 옥돌을 쓸고 만져도 소용이 없습니다. 이미 난 상처를 이용해서 온전한 것으로는 할 수 없는 속의 의미를 드러내는, 더 걸작품으로 살려내는 영감이 필요합니다. 그러기 위해 이 수난의 여왕을 들여다봐야 합니다. 이제 너도 없고 나도 없습니다. 보는 눈이 있을 뿐입니다. 안팎에 눈이 돋은 날개입니다.
보십시오 여왕이 섰습니다. 바다 위에 섰는데 한 다리를 바다 이쪽에 디뎠고 또 한 다리를 바다저쪽에 디뎠습니다. 바다에서 폭풍이 불어오므로 그 반신은 감추여 알 수 없고 이쪽 반신만이 보입니다. 온몸에 두루 상처를 입고 그 옷에 가지가지의 흉악하고 더러운 얼룩이 갔습니다. 두 흉악한 물건이 있어 그 오른 다리를 붙들었고 또 다른 두 흉악한 물건이 있어 그 왼다리를 붙들었는데 여왕이 그 바다를 건너려고 몸부림을 하나 웬일인지 그 이쪽 반신이 저쪽 반신과 원수가 된 듯 서로 어긋나고 물고 뜯고 있습니다. 자세히 보니 그 골격도 성한 대로 있고 그 살갗도 많이 터졌지만 죽을 상처는 없는데 그 신경이 심한 경련을 일으켜 마친 듯이 서로 싸웁니다. 그럴 때마다 그 둘씩둘씩의 네 흉악한 물건들이 그 발톱을 박으면 거기서 무슨 독즙이 전신으로 퍼지는 듯했습니다. 그 폭풍이 휘몰아갈 때에 언뜻 보니 그녀가 치마를 입었는데 좌우가 다 열 폭으로 돼 있습니다. 그 열 폭이 다 서로 떨어져 바람에 너풀거릴 때마다 그가 몸을 감추려 심히 고민하는데 그 위에 진 그 얼룩이 모여 열 귀의 기록이 돼 있습니다. 그 오른쪽 첫 폭에 크게 쓰이기를 세계경제불황이라 했습니다. 그 둘째 폭에 쓰이기를 제3세력의 강대라 했습니다. 그 셋째 폭을 보니 월남패망이라 했고 그 넷째 폭을 보니 스페인 ‘포르투갈의 혼란이라 했고 마지막 폭을 보니 또 큰 글자로 유엔의 약화라 했습니다. 그담 왼쪽을 보니 그 첫폭에 역시 큰 글자로 자유인권의 제한이라 했고, 둘째 폭에 안보 쇼크라 했고 셋째 폭에 기독교 수난이라 했고 넷째 폭에 부정부패 적발이라 했고 마지막 폭에 역시 큰 글자로 관료주의증대라 했습니다.
그래 눈으로 그것을 보다 못해 “하, 하, 하” 하고 웃었습니다. 나도 그 까닭을 모릅니다. 그저 그렇게 나갔습니다. 무슨 한없이 많은 속삭임이 공중에 가득 차서 그 울림으로 저절로 그렇게 된 듯합니다. 누군지 뵈지도 않는데 그렇게 일러주었습니다.
그런데 그 소리인지 또 다른 소리인지 긴 듯도 아닌 듯도 한데 이번엔, 아주 큰소리로, 소리 아닌 소리로,
“여왕의 새 옷이 준비됐느냐” 했습니다. 그러자 또 눈이 또 저절로 대답하기를
“됐습니다” 했습니다.
“무슨 옷이냐?”
“흰 옷입니다.”
“옳다.”
그런데 그 큰 웃음이 내게서 나갔을 때 네 흉악한 물건들은 흠칫했고. 여왕은 문득 빙긋이 웃고 한숨을 내쉬었습니다.
씨알 여러분 이것은 영시로부터 오전 네시까지에 앉아서 꾼 꿈입니다. 그러면 이제 우리 할 일은 우리 수난의 여왕의 낡은 옷을 벗겨 고이 장 속에 넣고 새로 흰 옷을 준비하는 일입니다.
옛날 이야기 들으셨습니까? 원통하게 죽은 촉왕(蜀王)의 피가 변해 두견새가 됐다고. 그래서 성성제혈량화기(聲聲帝血染花枝)라 진달래꽃이 됐다고. 우리나라에 진달래가 많은 것은 원통한 혼이 많아 그런지도 모릅니다. 이 수난의 여왕의 더러운 옷 역사의 장 속에 고이 간직해 두면 5백 년 후에 찬란한 새 세계여왕의 옷으로 변해 나올 것입니다.
1975년아 잘 가거라.
1976년아 이 밤을 뜬눈으로 새워 네 흰 옷을 지으마,
하, 하, 하
대도환생환희간(大道還生歡喜間) 이라!
바보 온달아,
온달 사람 너뿐이다.
온달도 온달
온달도 온달
바보야, 네가 여왕을 입어라!
씨알의 소리 1975. 12 49호
저작집; 9- 37
전집; 8- 25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