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기념관 역사실) 1592년 임진왜란, 파죽지세로 국토를 유린한 왜군, 우리는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역사에 질문을 던지다, 박재민 배우), 조선의 왕도 대신들도 모두 떠난 도성, 그러나 평양성은 적의 공세 종말점이 되었다 (인문학을 말하다, 허진모 작가), 문물과 문물의 전쟁, 진화한 공성전, 평양성 전투는 16세기 최대의 근대 화학전이었다 (공학과 경제, 역사를 만나다, 권오상 박사), 그리고 위기의 순간 빛을 발했던 백성들, 우리는 그들을 의병이라고 불렀다(역사속 심리학을 말하다, 김태훈 교수), 4人4色 그날의 새로운 시선!
최원정/KBS 아나운서: 2021년에 인사드리는 역사저널 그날입니다. 새해가 밝았지만 여전히 많은 분들이 코로나19로 인해서 굉장히 힘든 나날을 보내고 계십니다. 이럴 때 일수록 역사를 통해서 경험을 공유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국난극복의 대표적인 역사 임진왜란과 한국전쟁을 되돌아보는 시간을 2회에 걸쳐서 가져봅니다. 특별히 오늘 함께 해주실 분들은 한국사, 세계사, 경제, 심리학 등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 라고 할 수 있는 분들을 모셨습니다. 여러분! 반갑습니다.
일동: 안녕하세요
최원정: 신년기획 끝내 이기리라! 첫번째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는 최후의 싸움, 임진왜란의 평양성 전투 이야기를 지금부터 시작해 보겠습니다.
-------------------(동영상) 기자: 1592년 4월, 임진왜란이 발발한다. 왜군은 부산에서부터 파죽지세로 북진해서 개전 20일 만에 한양을 점령하고 그 여세를 몰아 평양까지 진격한다. 그리고 6월 14일, 개전 2달만에, 마지막 보루인 평양성 마저 함락한다. 선조는 평양을 떠나 조선의 최북단 의주로 향한다. 도성은 폐허가 된다. 한반도가 왜군에 넘어갈 수 있는 절체절명의 상황, 1593년 1월, 드디어 평양성을 탈환하고자 하는 치열한 전투가 시작된다----------------------
최원정: 1593년 1월, 이제 평양성을 둘러싸고 물러설 수 없는 싸움이 시작됐는데 총 네차례나 전투가 있었어요.
방기철/선문대 역사문화콘텐츠학부 교수: 그렇죠, 1592년 6월, 평양성이 함락이 돼요. 그리고 7월에 명의 조승훈이 평양성을 한번 공격을 했었고, 8월에는 조선의 김명원이 평양성을 탈환하기 위해서 공격을 했습니다. 두차례 다 실패를 했죠. 1593년 1월 4차 평양성 전투인데 저희가 살펴볼 바로 이 전쟁입니다.
---------------(동영상) 말을 탄 장수: 공격하라! 기자: 이때 조명 연합군의 숫자는 약5만명 정도였구요. 반면에 일본군의 숫자는 15,000명 정도, 병력은 조명연합군이 더 많았어요-------------
방기철: (평양성 지도) 동쪽으로 대동강(大同江) 이예요. 이쪽은 보통강(普通江)이 흐르잖아요. 평양성은 3면이 강으로 에워싸고 있습니다. 그리고 오른쪽에 보면 가장 높은 곳이 북쪽이거든요. 가장 높은 곳은 모란봉이 위치하고 있어서 접근이 쉽지 않아요. 보시면 여기 세구역으로 나누어서 살다가 전쟁이 나면 안으로 중성이나 내성으로 들어와요. 그러면 다음에 방어는 싸움은 중성과 내성에서 하는 겁니다.
허진모/작가: 이 전투는 공성전입니다. 손자병법은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것을 가정하는데 어쩔 수 없이 싸워야 한다면 ① 伐謀(벌모) 모략을 분쇄하거나 모략으로 공격을 하거나 ② 伐交(벌교) 외교를 끊거나 아니면 외교로 공격을 하거나 ③ 伐兵(벌병) 군대를 직접 공격을 해야 되는데 맨 마지막이 공성전입니다. (基下攻城(기하공성)-최하의 수단이 성을 치는 것이다.) 이유는 피해가 가장 크기 때문이죠.
권오상/벤처캐피탈회사 대표 공학박사: 역사상 많은 공성전 중에서 가장 유명한 예를 들자면 콘스탄티노플을 둘러싼 공성전을 얘기합니다. (콘스탄티노플(현재의 터키 이스탄불)-330년~1453년 로마제국의 수도, 동서무역의 중심으로 크게 번영). 콘스탄티노플을 보면 3면이 바다로 되어 있습니다. 바다로 되어 있고 모래 사장이 있는게 아니라 깎아지른 듯한 절벽으로 되어 있어서 도저히 바다 쪽에서는 공격을 해서 육상으로 진입하기가 불가능한 구조구요. 오로지 서쪽만이 육상 땅으로 연결되어 있는데 거기에다 성벽을 삼중으로 지어놔서 천년 동안 난공불락의 위력을 자랑했었고 이걸 어떻게 공략할까 고민한 끝에 항가리 사람 중애 대포를 만드는 기술자가 있었습니다. 이 사람이 자기가 세상에서 제일 큰 대포를 만들 수 있다고 얘기를 해서 오스만 투르크에서 포를 만들게 되고요. 이 대포의 발사하는 포탄의 무게가 600킬로그램, 600킬로그램의 돌을 발사할 수 있고 하루에 최대 7발 발사가 가능했다고 해요. 말이 600킬로그램이지 그게 어마어마한 크기고요. 그걸 통해서 결국 콘스탄티노플이 1453년 함락이 되어서 동로마 제국이 멸망되게 됩니다.
최원정: 1000년만에 무너진~
방기철: 사실 (1593년) 1월 8일에 본격적인 전투가 벌어졌는데 이틀전에 1월 6일, 명군이 모란봉을 공격했다기 보다는 공격한 모션을 취해요. 그러나 후퇴를 하는데 이때 쇠방패를 떨어뜨리거든요. 일본군이 방패를 줏으러 나오니까 다시 명군이 돌아서서 공격을 하니까 일본군이 성안으로 들어갑니다. 그리고 그날밤에 일본군이 야간에 기습공격을 펼쳐요. 그때 명군이 그걸 격퇴를 합니다. 그 얘기는 본격적인 전투를 앞두고 명군과 일본군이 서로 탐색전을 펼쳤다. 그렇게 얘기할 수 있습니다.
박재민/배우: 아까 맨 위에 있는 봉우리를 모란봉이라고 하셨잖아요. 저희가 알고 있는 모란봉 클럽의 모란봉인가요? 거기에 나오는 모란봉이 실제로 모란봉인가요?
방기철: 금수산의 가장 큰 봉우리가 모란봉이예요. 모양이 모란꽃과 같다고 해서 모란봉이라고 합니다. 평양에서 가장 높은데 해발 96미터 정도되는데 여기에 올라가게되면 평양시 전체를 내려다 볼 수 있어요.
박재민: 영화 고지전이 있잖아요. 고지를 선점하면, 좋은게 뭔가요?
권오상: 일단 높은 위치에 자리를 잡게 되면은 적군이 어떤 상태에 있는지 볼 수 있죠. 병력규모라든지 무기 종류 이동상황 등 전반적인 정보를 확보할 수 있기 때문에 가능한 더 높은 곳에 자리를 잡으려고 애를 쓰고요~ 전투가 벌어지면 사실 아래 쪽에서 위쪽을 향해서 공격하는 것보다 위에서 아래를 바라보고 공격하는 게 훨씬 쉽습니다.
박재민: 싸울 때 밑을 내려다 보면서 싸워야지~
최원정: 키 큰 사람이 유리한 거잖아요.
박재민: 위로 올려다 보면서 싸울려면 목도 아프고~ 힘들거든요.
방기철: 안시성 전투 있잖아요. (안시성 전투(645년)-고구려가 안시성에서 당나라와 벌인 전투, 당은 60일에 걸쳐 안시성 보다 높은 토산을 쌓음), 안시성 전투 때 당태종이 안시성보다 높은 토성을 쌓습니다. 만약에 토성이 무너지지 않았다면 안시성 전투의 결과가 어떻게 되었을지 몰라요.
김태훈/강남대 심리학과 교수: 일반적으로 높은 곳에 올라가면 사람들이 굉장히 훨씬 더 유리하다고 생각을 합니다. 위에서 본다고 해서 아주 자세하게 볼 수 있는 건 아니죠. 그런데 사람들은 위에 올라가면 다 볼 수 있다고 착각합니다. 그리고 아래에 있는 사람들은 위에서 공격하면 감당해 내기 쉽지 않을 것이다 라는 생각을 하죠. 이게 이때부터 승패가 갈리기 시작해요.
박재민: 심리적으로 이미~
최원정: 우리 일상에서도 어느 자리에 앉느냐에 따라서 굉장히 심리적으로 위축되기도 하고 자신감이 생기기도 하잖아요.
김태훈: 그래서 제가 시험 감독할 때 잘 쓰는 전략중의 하나가 저는 학생들이 제가 있다는 걸 알고 있지만 저를 볼 수 없는 가장 뒤에 가서 시험 감독을 합니다.
최원정: 아~ 난 뒤에서 감독하는게 제일 싫어! 너무 싫어!
박재민: 부정행위를 하는 것도 아니고~
최원정: 계속 뒤통수만 댕겨~
허진모: 근데 용기를 내서 살짝 돌아보면 그런 선생님들 다 졸고 계세요.
김태훈: 네, 그럴 수도 있죠.
최원정: 그래서 이제 임진왜란의 전세가 평양성 전투로 인해서 바뀌는 거잖아요.
방기철: 1월 8일 조명연합군이 드디어 평양성을 공격하는데요. 동쪽을 비어놓습니다. 동남쪽에 함구문, 서쪽에 보통문, 서북쪽에 칠성문 3방향으로 해서 공격을 해요. 이때 공격하는 양상은 뭐냐하면 일본군의 조총의 사거리 보다 명의 화포의 사거리가 길어요. 그래서 조총 사거리 밖에서 화포를 쏴서 성문을 부습니다. 그리고 명군이 성 안으로 진입해서 일본군을 몰아내죠. 이렇게 평양성을 탈환했기 때문에 전쟁의 전세가 수세에서 공세로 전환될 수 있었습니다.
최원정: 오늘 우리가 지금 이 제목이 끝내 이기리라 잖아요. 여러분이 생각하는 평양성 전투의 신의 한 수는 무엇인지 들어보도록 하겠습니다.
권오상; 제가 생각하는 신의 한 수는 무기입니다. 평양성 전투는 기본적인 문물과 문물간의 대결이라고 볼 수가 있는데요. 명군 같은 경우에는 기본적인 서양의 대포 불랑기포로 평양성을 공격을 했었구요(명군의 무기 불랑기포-서양식 청동제 화포, 유효사거리 500~1000미터). 왜군의 경우는 보통 조총이라고 부르는 화승총을 주력무기로 삼아서 명군의 공격에 저항을 했던 것이죠. (일본군의 무기 조총-유럽에서 전래된 화승총, 유효사거리 150미터). 양쪽 다 화력을 동원해 원거리 화력전을 벌이긴 했는데 대포의 사정거리나 대포의 파괴력 자체가 조총의 화력이나 파괴력보다 훨씬 강력하기 때문에 양쪽에서 전투력의 차이가 크게 났습니다.
최원정: 지금 명나라와 일본의 무기를 보고 신의 한 수도 멋지다. 그런 거잖아요. 우리는 왜 그렇게 개발을 안한 거예요?
방기철: 원래 일본이 전쟁전이예요. 1589년 쓰시마 도주가 조총 두 자루를 선물로 보내옵니다. 선조가 병장기를 담당하는 군기시 창고에 보관을 했어요 왜냐면 이게 화이론인데 당시 중국은 문물의 중심이 중화이고요. 조선은 그 다음 소중화이거든요 (화이론(華夷論)-중화를 존중하고 오랑캐를 물리친다). 일본은 오랑캐, 동이예요. 그러니까 섬 오랑캐가 보낸 무기이니 그걸 뭐 볼게 있어 하고 그냥 무시했던 거죠. 화이론의 결과 조선은 조총을 받아들이지 못하였습니다. 그런데 요부분은 분명하게 사실은 우리가 바다에서 일방적으로 이겼잖아요. 일본은 총은 있었지만 포는 없어요. 우리가 바다에서 이길 수 있었던 것은 대포가 있었기 때문이에요. 그러니까 육지에는 명의 화포가 있었다면 바다에서는 조선의 화포가 있었습니다.
박재민: 만약에 선물로 받았던 조총 두 자루를 조금이라도 연구를 했었으면~
최원정: 이런 걸 통해서 뭘 발전시켜서 만들 수 있지 않았을까~ 우리는 개방적인 마음이 있어야 되는데 보수적이고 폐쇄적이었어요.
허진모: 여기에 큰 일화가 하나 있습니다. 은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당시에 일본은 국제 무역질서에 동참을 해서 무역으로 엄청난 재화를 모았는데 그때 일본의 주력수출품이 은입니다. 연구에 따라서는 일본의 은이 당시 전세계 생산량의 20%에서 어떤 연구에서는 30% 까지 차지 했다 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런데 일본이 갑자기 이렇게 은 생산량이 많아진게 무엇이냐? 바로 은을 분리해 내는 기술을 갖게된 거죠.
최원정: 그게 어려운 기술이에요?
허진모: 어렵다고 합니다. 당시 최첨단 기술이었습니다. 이 기술이 조선의 기술이었다는 거죠.
최원정: 그게 우리 한테서 배워간 기술이라구요?
허진모: 네, 맞습니다. 조선 왕조실록에 1503년 이죠. 연산군 때인데 김감불과 김검동 두 기술자가 연산군 앞에서 그것을 시험을 해요. 그래서 연산군이 기뻐하면서 그것을 시행을 하게 되는데 연산군이 3년후에 반정으로 폐위가 돼죠. 중종이 들어서고 난 다음에 조선은 더 이상 은 채광을 하지 않습니다. 은을 더 이상 채광을 하지 않으면서 이 기술이 묻혀요. 그러다가 한 30년쯤 후에 난데 없이 이에 일본에서 등장합니다. 그때가 일본이 은의 수출이 급증하던 때(1530년대에 개발된 이와미 은광)와 맞아 떨어지는데 일본측 사료에 보면 경수와 종단이라는 사람이 그 두 사람이 은광에 와서 이것을 시작하게 되었다 라는 기록이 있습니다. (1533년 8월 하카다 상인 가미야주테이가 종단 계수와 함께 은광에 와서 회취법을 시작했다-이와미 은광 기록 <긴단규키>).
최원정: 조선 사람이 가서 기술을 유출한 거예요?
허진모: 네, 맞습니다.
최원정: 산업 스파이네, 지금으로 말하면~
허진모: 그렇게 볼 수 있습니다.
허진모: 그것이 이제 조선인인지 명인인지는 논란의 여지가 있긴 합니다만 일반적으로 조선인으로 알려져 있는데 그것으로 인해서 일본은 수많은 재화를 쌓았고 이것이 군사력 증강을 시켰고 결과적으로 임진왜란의 원인이 되지 않았을까 라는 개연성이 충분히 있죠.
최원정: 전세계 은의 30%까지 생산을 했고 그걸로 인해서 부를 축적하고 사실 일본은 당시에 국제질서 속에서도 강대국이었겠네요?
방기출: 잘 생각하게 되어야 하는게~ 사실 일본이 그래도 중앙집권화를 가장 잘 이룬데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처음일 거예요. 히데요시는 권력을 잡으면서 자신감을 가졌을 거고 그리고 전국시대가 100년이었어요. 100년 동안 전쟁을 했으니까 그 경험을 무시 못합니다. 여기에 은이라는 재정적 요소가 합쳐졌어요. 그러니까 대륙진출이 가능할 거라는 자신감을 가졌을 것 아닙니까?
박재민: 결국 평양성 승리의 신의 한 수는 무기인 것 맞는 것 같은데 불랑기포가 주요 역할을 했다고 하면은 결국은 명이 잘한 거 아닌가요?
최원정: 신의 한 수 딱 하나 나온 거잖아요? 평양성 탈환의 신의 한 수 또 있습니다. 이번에는 작가님! 소개해 주세요
허진모: 제가 생각한 신의 한 수는 특별히 제가 설명을 위해서 한 분을 초빙을 했습니다.
------------------1593년 오늘의 날씨~~강아랑/기상캐스터: 1593년 음력 1월의 날씨입니다. 동장군의 기세가 아주 무섭습니다. 북서쪽에서 확장하는 찬 대륙 고기압의 영향으로 북서쪽에서 아주 차가운 공기가 밀려오고 있습니다. 때문에 한반도에는 아주 강력한 한파가 찾아올 것으로 예상됩니다. 전투가 펼쳐질 평양의 날씨를 한번 살펴 보도록 하겠습니다. 평양의 1월 최저 기온은 영하 16도, 최고 기온은 영하 1도로 평균기온이 영하 6도로 예상됩니다. 이 정도의 추위라면 대동강 물도 꽁꽁 얼어버릴 기세인데요. 낮에도 영하권의 추위가 이어질 것으로 예상되고 찬바람까지 강하게 불 것으로 예상되면서 (흰 스프레이 발사) 체감온도는 더욱 더 낮아질 것으로 예상됩니다. 때문에 상대적으로 남쪽에 위치한 일본, 일본군의 경우에는 이번 추위가 더욱 더 매섭게 느껴질 것으로 예상됩니다. 일본 마쓰모도 부대로 출정하시는 분들은 여기 앞에 준비된 방한모와 장갑을 꼭 착용하시기 바랍니다. 야외 전투가 길어질 것에 대비해서 꼭 보온 전략을 세워주시기 바랍니다. 승리하시길 응원하겠습니다. 지금까지 평양에서 기상캐스터 강아람이었습니다---------------
최원정: 저는 오늘 편의 신의 수는 강아랑 기상캐스터입니다.
허진모: 그리고 다 아시다시피 날씨는 진짜 신이 하신 거에요. 조선군이나 명군이 한 건 없습니다. 왜냐 이 추위의 피해를 같이 받긴 해요. 이여송이 이끄는 명나라군이 압록강을 넘었을 때가 양력으로 1월입니다. 그러니까 가장 추울 때죠. 그런데 조명연합군 보다 일본군은 훨씬 더 이 피해를 많이 받았던 것이 출신지가 대부분 남쪽 이어서 이런 추위를 경험을 해본 적이 없었던 거죠.
최원정: 규슈 같은 곳에서 많이 왔잖아요.
허진모: 일본측 사료에 의하면 이 추위로 얼마나 고통을 받았는지에 대한 기록은 꽤 많이 있습니다. 제가 조사를 해보았는데요. 종군했던 제타쿠의 일기에 의하면, 눈이 무릎까지 빠져 전진할 수가 없었고 사람과 말이 모두 얼어 죽었다 (조선일기-제타쿠 라는 기록도 있구요. <일본사> 루이스 프로이스 기록에 보면 조선인이나 명인들과 달리 짚신을 신고 있어서 많은 병사들이 엄지 발가락이 얼어서 잘라야 했다. 적군보다 추위와 굶주림에 더 큰 피해를 받았다 라는 기록이 있습니다.
최원정: 아이구~ 눈길에 짚신 신고 다닌다고 생각해 보세요. 제 발이 다 얼얼하네~
박재민: 그러니까 지금 한 마디로 평양의 그 엄동설한에 반팔티 입고 간 거 아네요. 저는 얘기하면서 저절로 으슬으슬 손이 내려가고~
최원정: 일부러 명의 입장에서는 겨울을 기다렸다가 내려온 건가요? 그러면 우리가 추위에 강하니까~?
허진모: 사실은 명나라 군사가 일부터 내려온 건 아닙니다. 밀고 당기고 하다가 이렇게 그냥 왔었는데 그 당시에 총사령관 송응창이 겨울이 가기전에 공격을 해야 한다. 지금 어차피 겨울이고 하니 봄에 공격하는 것보다 훨씬 낫다고 주장을 합니다. 그러니까 날씨를 최대한 이용을 한건 사실이죠.
최원정; 한국전쟁 때도 중공군이 내려 왔을 때가 찬 겨울이었죠. 잘 이용한 거네요.
김태훈: 생각해 보면 추위 자체도 굉장히 중요했을 거예요. 온도가 너무 낮으니까 처음 경험해 보지 못한 온도일 테니까 추위가 우리 몸에 주는 영향이 있었을 텐데~ 인간이 살고 있는 가장 추운 지역이 어디일까~ 러시아의 오미야콘입니다.
박재민: 저는 다녀 왔습니다. 저는 거기서 홈스테이 하고 왔습니다.
최원정: 아니~ 제일 추워요?
박재민: 네, 최저기온 영하 71.2도 까지
----------(동영상) 오미야콘 겨울 한낮 온도 -42.0도, 오미야콘에 진짜 도착한 박제민, 박재민: 눈이 계속 얼어붙어요. 저는 거기서 영하 50도 추위 속 웃옷을 벗고 눈 위에 딩굴면서 체험을 했습니다. 그리고 증명서를 받아 왔어요. (러시아어로 된 증명서) 오미야콘를 방문한 첫 외국인 입니다. 젖은 손수건을 갖고 나와 밖에서 10초 정도 돌리면은 이게 얼어서 굳어 버려요-----------
김태훈: 제가 이 말씀은 왜 드리느냐 하면 거기 가볼래? 가면 어떻게 해야될 것 같애 이렇게 물어보면 도대체 뭘 어떻게 해야될 지가 머리 속에 떠오르지를 않습니다. 그러니까 이게 불확실성 이거든요. 그래서 왜군들이 느꼈던 게 불확실성이 아니었을까. 저는 그런 생각을 하는데 분명히 엄지 발가락 동상 때문에 잘려나가는 그 동료들이 있었을 거예요. 그러면 조선군이나 명군은 이미 그 추위를 경험해봤기 때문에 어떻게 해야 되는지를 알죠. 그런데 왜군은 모르죠. 그래서 우왕좌왕할 수밖에 없고 이게 정말 어느 정도 우리에게 피해를 줄 건지 예측하기 힘듭니다.
최원정: 교수님, 최근에 코로나19도 사실 우리가 예측하지 못했던 어마어마한 전염병이잖아요.
김태훈: 코로나19가 무서운 이유가 감염율 때문일까요? 아니면 치사율 때문일까요? 저는 두개도 물론 중요하겠지만 훨씬 더 중요한 건 우리가 이 코로나19 바이러스가 어떤 놈인지 잘 모르니까~ 그래서 어떻게 해야될 지 감염을 막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될 지를 찾아내는데만도 오랜 시간이 걸리죠. 예를 들면 코로나 계열 바이러스는 온도와 습도에 취약하다는 얘기를 이전에 많이 했었거든요. 온도와 습도에 취약하니까 여름이면 괞찮을 거다 그런 얘기를 했어요. 그런데 전 세계적으로 7,8월에 2차 대유행이 시작되었습니다. 우리가 모르는게 너무 많은 거예요. 그래서 더 두려움을 많이 가지게 하는 거죠.
허진모: 그런 뉴스 보신적 있으십니까? 동남아에서 갑자기 이상 한파로 동상으로 죽었다 라고 했는데 그 온도를 보면 15도~ 그게 뭐냐면 겪지 못했기 때문이에요.
----------------(동영상) 2019.12.11.KBS 뉴스, 태국 방콕의 출근길 한 전철역, 항상 반팔 차림의 사람들로 붐비지만 오늘은 긴팔이 많습니다. 털모자를 쓴 사람도 있습니다. 아침 기온 17도, 낮기온 28~9도 정도의 우리나라 초가을 날씨지만 태국 사람들에겐 춥게 느껴집니다. 지난 토요일 잠을 자던 90대 여성이 저체온증으로 숨지는 등 일주일 사이 열명 가까이 추위로 숨졌습니다. 이상 저온 현상으로 사망자도 속출하고 있습니다-----------------
박재민: 얘기를 듣고 있으면은 날씨가 신의 한 수인 거 저도 인정하겠습니다. 근데 불랑기포는 명의 것이고 날씨는 우리 손으로 조절할 수 있는게 아니고 이 신의 한 수에서도 우리가 잘한 건 없는 것 아닙니까?
허진모: 그런 셈이죠. 그러나 날씨를 잘 이용을 한 것은 신의 반수 정도는 되지않을까 생각합니다.
-------------(동영상) 박재민: 여기가 저의 집입니다. 실제로 전쟁이 났을 때 과연 주방에 있는 어떠한 음식들의 종류가 비상식량으로 쓰일 수 있을지 지금부터 한번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여기 보면 냉장고 안에 계란이 있구요. 우유가 있구요. 이런 거 잘못 먹으면 큰일 나죠. 채소~ 신선하면 좋겠지만 보관이 쉽지가 않죠. 그리고 여기 쌀이 있는데 쌀 같은 경우는 그냥 들고 다녀도 문제없겠죠. 생쌀로 먹어도 되고 아그작~ 아그작~ 생쌀은 안되겠네요~ 괜히 먹었어. 이제 이건 건식 분말 숫가루가 있는데요. 며칠 전에 산건데~ 요런건 장기전에 좋지 않을까 싶어요. 일단 가볍고 물만 있으면 언제든지 먹을 수 있고 꿀 요것도 괜찮을 것 같애요. 이런 통조림들~ 통조림은 당장 신선도에 전혀 문제없이 먹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문제는 조선시대에 이런 통조림이 없었다는 거죠. (박재민씨가 카트를 밀고 나타난다) 바~바~ 그래서 실제로 현대군대에서는 어떤 군사식량들을 사용하고 있는지~ 제가 직접 들고 와 봤습니다.
최원정: 군사식량들이죠~?
박재민: 벌써 침이~ 특히 군대를 다녀오신 네 분께서는 아마 침이 샘솟을텐데~혹시 그 메뉴가 있을까?~있습니다 (뚜껑을 열고) 건빵입니다. 지금 한국 군대에서 실제로 배급이 되고 있는 군대식량들을 준비를 해 보았구요. 대용량 불갈비맛 참치비빔밥, 국제적으로 어떤 전투식량들이 쓰이고 있는지 수입제 군사식량도 준비해 보왔습니다. Emergency Food NRG-5, 독일 프랑스 해외의 전투식량, 직접 한번 보시고 생각하셨던 그런 군사식량이랑 같은지~
최원정; 다들 군복무를 하셨을 거 아녜요. 옛날보다 굉장히 군사식량이 좋아졌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추억이 아니라 굉장히 부러우실 것 같애요. 야~ 우리 때는 이런 거 없었는데 하면서
김태훈: 확실하게 파운드 케익은 없었어요.
최원정: 지금은 군사식량의 중요한 요소들은 오래 보관이 가능해야 되잖아요.
박재민: 제일 중요한 것은 균형잡힌 영양소~ 그리고 충분히 군사들이 포만감을 느낄 수 있는 정도의 양, 무엇보다 제일 중요한 것은 유통기한이 길어서 신선도가 유지가 될 수 있는~보관상태겠죠.
최원정: 씨 레이션 이라구 emergency food ration 이라고 이게 뭐예요?
허진모: 미군이 전투식량에 대해서 등급을 마련한 겁니다. A B C K가 있습니다. 그런데 보통 C-Ration이 많이 알려져 있죠. C-Ration이 뭐냐하면 등급을 나눌 때 조리단계라든가 이런 여러가지로 나눈건데 (미군의 전투식량: A-Ration: 조리가 필요한 것, B-Ration: 반조리 식품, C-Ration: 즉석에서 섭취가능) C 등급은 뭐냐하면 즉석에서 먹을 수 있는 것, 그래서 그것이 가장 많이 배포가 되었기 때문에~ 씨 레이션이라고 그냥 일반적으로 말을 하죠.
최원정: (비닐에 포장된 떡 같음) 이걸 어떻게 먹어요 이걸 그냥 먹는게 아니고 물에 타 먹는다든지 무슨 방법이 있겠죠? 그냥 비누 같아요. 다른 분들도 한번 뜯어 보세요.
방기출: (통조림을 뜯다) 이건 소시지 라고 되어 있었던 같은데~
최원정: 보통 군사식량 하면 저런 통조림으로~
박재민: 소시지 같으면 습기가 있잖아요. 습기가 있기 때문에 아무리 멸균을 한 상태로 밀봉을 한다고 해도 이런 가공 분말로 제조가 된 건식의 유통기간은 따라 잡을 수 없을 거에요.
최원정; 전투식량이 나오면 남자들은 할 얘기가 엄청 많죠.
허진모: 그렇긴 한데 저는 미슐랭별이 몇 개가 달려도 먹고 싶지 않아요.
최원정: 그런데 어떤 전투식량이 보편적인 거예요?
허진모: 우리나라 정부가 한국군에 맞는 전투식량을 개발한 것은 베트남 전쟁 파병 이후입니다. 아무리 싸울 때 싸우더라도 입맛은 입맛이잖아요. 미군 전투식량은 입맛에 안맞는 거죠. 그래서 한국에서 드디어 밥 김치 된장 이런 것들을 가미한 한국형 전투식량을 개발을 합니다. 그래서 점점 발달을 해서 요즘은 물을 부우면 금방 된다거나 아니면 발열 팩 이렇게 해서 금새 물을 뜨겁게 만들 수 있는 그런 것까지 개발이 된 걸로 알고 있고 그런데 이게 점점 발달을 해서 2025년인가 그때는 부착형 패치형 전투식량이 개발될 거다. 영양소를 공급하는 영양식 전투식량이 개발될 거라는 예정에 있다고 합니다.
최원정: 그런 애기 있잖아요. 전투에 실패한 장수는 용서할 수 있어도 보급에 실패한 장수는 용서할 수 없다~
허진모: 누가 만든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진짜 맞는 말입니다.
최원정: 보급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거잖아요.
방기출: 성을 공격할 때는 딱 두가지 밖에 없어요. 속전속결로 빨리 끝내 버리거나 아니면 지구전을 펼치는 거예요. 쫙 에워싸서 보급로를 끊어서 지구전을 펼치면 항복합니다. 예를 들면 가토 기요마사가 울산 도산성에 고립이 되었어요. 그때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가 자살을 생각해요. 배고프고 목말라서~기요마사가 일본에 돌아가서 성을 쌓을 때도 어떻게 하느냐면 먹을 수 있는 고구마 줄기로 다다미를 만들어요.
최원정: 급하면 파먹을려고~
방기출: 먹을려고~ 그리고 성 곳곳에 우물을 뚫어요. 그 정도로 보급이란게 중요한 거고, 공격만이 아닙니다. 방어도 마찬가지예요. 고구려가 수나라나 당나라에 주로 썼던 전략이 견벽청야예요 (견벽청야(堅壁淸野)-성에 들어가 지키며 적에게 먹을 것을 주지 않기 위해 들판을 비우는 전략). 적이 쳐들어오면 들판을 쫙 청소합니다. 식량을 못 구하도록~ 그렇기 때문에 들어가서 성을 굳건히 지키는 거예요. 그러면 쳐들어왔던 군사들이 보급의 한계를 느끼고 스스로 물러나요.
김태훈: 너무 너무 힘들 수 밖에 없는게 먹는 거 자체가 아니라 우리가 이런 기본적인 욕구도 충족시키지 못한다면 나는 왜 싸워야 되지 이런 생각도 하게 됩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성 안에 있는 사람들은 점점 불안해 집니다. 지금 우리가 얼마를 가지고 있는게 중요한 게 아니라 떨어지는 속도가 눈에 보이기 시작 하구요. 그러면 이걸 채우지 못할 것이라는 걱정이 많이 되는 거죠. 그래서 지금 현재 남아 있는 양, 그게 원래 더 중요한데 이런 말이 돌기 시작하겠죠. 그래서 그런 부분이 훨씬 더 힘들었을 겁니다. 실제로 폐쇄된 공간에 있을 때 사람들이 얼마나 힘들어 하는지 제가 최근 연구를 하나 찾아 보았는데 팔레스타인 가자 지구에 있는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연구를 진행했어요. 이 학생들이 뭐라고 얘기를 하냐면 (2007년 하마스 집권으로 외부와 고립된 가자 지구), 한 70% 정도가 감옥 안에 사는 것 같다. 30% 정도는 자살에 대해서 생각해 본 적 있다. 이런 응답을 하는 거죠. 이게 성 안에 갇혀있는 시간 혹은 포위 되어 있는 시간이 길면 길어질수록 점점 힘들어질 수 밖에 없습니다.
최원정; 요즘 집안에서 방콕하느라 그 심리가 이해가 돼요. 힘들어요. 보급을 잘 해야 어찌보면 전쟁에서도 전세를 이끌어 갈 수 있는 거예요.
권오상: 보급전이라고도 보통 부르는데요. 보급전으로 역사상 유명한 군인으로 나폴레옹을 들 수 있죠. 당시 유럽에 프랑스의 도시들이 감당할 수 있는 군대 규모가 한 도시에서 최대한 3만명 정도라고 해요. 그러니까 그것보다 병력이 더 많이 모이게 되면 그 도시가 그걸 감당을 할 수 없는거죠. 그래서 나폴레옹이 그런 사실을 알고 세세하게 자기가 지휘하고 있는 군단을 8개로 나누어서 각 군단의 최대병력수가 2만명 정도로 되게 하고 그것뿐만 아니라 지나가는 경로 자체도 일일이 아주 세세할 정도로 지정을 해서 두 군단이 겹치게 되는 일이 없도록 철저하게 관리를 했고 오스트리아 원정을 벌일 때 630킬로미터 거리를 20일 동안 주파를 하게 됩니다. 그래서 오스트리아군이 예상했던 것보다 너무 빨리 라인강에 와서 영토로 들어오게 되어서 결국 큰 승리를 거둔 그런 역사도 있습니다.
최원정: 그건 하루 하루의 식량보급을 아주 디테일하게 짜야되겠네요. 어디가서 공급하고 얼마를 먹고~ 보통 일이 아니예요. 아까서부터 방기출 교수님이 캔을 따서 가지고~저는 이 캔 음식을 좋아하거든요. 이 냄새 거기까지 안나요?
방기출: 이게 안주 같아요~
최원정: 사실 캔을 안주로 너무 많이 먹잖아요.
허진모: 통조림은 사실 근대 전투 식량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는데~ 주인공은 방금 말씀하신 나폴레옹이죠. 나폴레옹이 장기 보존하는 방식에 대해서 현상금을 걸고 모집을 한 것은 굉장히 유명한 사실이죠. (통조림 기원-1804년 프랑스 정부에서 음식물 보존방법 공모). 그래서 얻은 방식이 바로 병으로 된 통조림이었습니다. 그래서 니콜라 아폐르 라는 사람이 현상금을 받아 갔는데 그때 프랑스군은 병으로된 통조림, 병조림을 채택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의 보이는 금속통조림은 영국에서 만들어졌죠 (1810년 영국-양철통조림 개발). 그래서 영국군은 쇠통조림을 갖고, 프랑스군은 병통조림을 갖고 싸웠죠. 나폴레옹 전쟁의 마지막이었던 1815년 워털루 전투때 영국과 프랑스군이 붙었는데 누가 이겼습니까? (1815년 워털루 전투: 영국 쇠통조림 VS 프랑스 병통조림).
방기출: 병조림이 이겼습니까 통조림이 이겼습니까?
허진모: 그렇죠, 통조림이 이기죠. 병조림은 자취를 감추고 지금까지 남아있지 않습니다.
최원정: 워털루 전쟁을 이렇게 표현해 주셔서 잘 들었습니다. 그런데 개전 초반까지는 일본이 승승장구하잖하요. 평양성까지 60일만에 왔다는 얘기인데 보급이 잘 됐다는 반증인가요? 이때까지는 그랬죠. 일본이 조선을 침략할 때 9군으로 편성을 했어요. 보급은 어떻게 되느냐 각부대가 각자 알아서 해결을 해라. 일본에서도 각자 알아서 군량을 마련하고 군사를 마련하고 수송도 각자 알아서 하는데 문제는 뭐냐하면 조선에 와서 어떻게 하느냐 현지 조달을 원칙으로 했습니다. 손자병법에도 나와요. 군량은 적지에서 구하라. 이렇게 나오거든요. 그런데 일본에서는 이게 가능하다고 생각했어요. 왜냐면 일본의 국내전 같은 경우에는 한 지역의 다이묘를 잡거나 죽이면 그 지역은 모두가 복속을 해요. 그러니까 군량학보가 된다 말에요. 이게 일본군의 오판이었던 거죠.
-------------------(동영상) 기자: 해상과 육로를 통해 물밀듯이 침공해온 왜군, 그들은 점령지에서 약탈로 군량을 마련했고 왜군의 북상경로는 곧 보급로였다. 하지만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예측하지 못한 일이 벌어진다. 1592년 7월, 한산도 앞바다에서 이순신의 수군이 대승을 거둔 것이다. 이로써 왜군의 해상 보급로가 끊긴다. 이제 남은 것은 육상 보급로, 왜군은 한반도의 좌우와 중앙 3방향으로 보급을 받았다. 하지만 왜군의 육로는 한반도 곳곳에서 기습공격을 당하고 보급로가 차단된다. 그곳에는 조선 의병이 있었다------------------
최원정: 임진왜란에서 가장 짜릿한 순간들이 지금 나오고 있습니다. 바다에는 이순신, 육지에는 의병들, 복병을 만난거죠?
박재민: 전혀 예상을 못했을 것 같애요. 왔는데 민중이 들고 일어나가지고 군인들과 정말로 숫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목숨을 걸고 싸운다는 것은 아마 왜가 예상하지 못했던 패착이 아니었을까
권오상: 초기부터 자발적으로 의병들이 활동을 시작했구요. 제가 홍의 장군으로 알고 있는데 곽재우가 거병을 하면서 경상 전라 충청 경기 황해까지 전국토에서 자발적으로 의병들이 활동하게 되면서 언제 나타날지도 모르고 보급로 자체에 대한 공격들이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공포감이 왜군 사이에 있게 되면서 당시 그런 얘기도 있었다고 합니다. 부산에서 서울까지 3백명 미만의 병력으로는 가지 말아라. 한성에서 평양까지 갈 때는 5백명은 넘은 보급대를 편성해서 가라. 그 보다 규모가 작게 되면은 습격을 당한다. 그런 부분들이 사실은 보급의 규모에 굉장한 제약으로 작용을 했습니다.
박재민: 의병이 얼마나 무서웠으면~
최원정: 보급에 인력투입을 엄청했잖아요. 그만큼 손실인데~
박재민: 의병들 기사를 검색하다 보니까 의병을 insurgent fighters 라고 얘기를 해놨더라구요. (Korea-172,000 national army and navy, 20,000 insurgent fighters). 의병이라고 하면 자발적으로 일어나는 voluntary의 느낌이 강한데, insurgent 라고 하면 반란을 봉기했다는 의미이거든요. 의병이란 단어가 영어에 없나? 혹은 왜 반란이라고 했는가? 보통 레지탕스 라든지 그러면 그걸 맞서 싸운다는 느낌이 있는데 왜 insurgent fighter라고 했을까 하면서 의병에 관한 이 의미가 외국에는 없을 수도 있겠다 라는 생각을 제가 했거든요.
최원정: 얼핏 의병이라는 개념이 우리나라만 유일하다고 누가 그랬던 것 같은데~사실인가요?
김태훈: 제가 보기에는 의병을 영어로 번역한 사람이 우리나라 문화에 대해서 정확하게 이해를 못해서 그러지 않았을까 싶은데요. 보통은 그냥 동서양 문화를 집단주의와 개인주의로만 분리를 하거든요. 그런데 그건 초기 연구자들이 동양문화를 일본이 대표한다고 착각해서 그런 겁니다. 당장 우리 사람들이 일본사람이랑 한국사람이랑 중국사람이랑 그 시기에는 그런 지식(의병)이 없었던 것이지요. 일본은 정확하게 집단주의가 맞아요. 다이묘를 잡으면 다 복속이 되잖아요. 내가 이 집단이고 나의 자아는 집단인 거죠. 자아가 하나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관계주의 문화권에서 살고 있어요. 우리 가족도 있구요. 회사에서의 나도 있고 심지어는 동창회에서 나도 있고 아주 다양한 관계 속에서 자아 라는 걸 가지고 있습니다. 자아가 수십개예요. 그렇기 때문에 나라가 망했다고 해서 나도 거기에 따라서 항복을 해야 된다거나 때로는 할복자살을 해야 된다거나 이런 생각을 하지는 않죠. 지금 왜군이 쳐들어왔으니까 그래서 우리 가족 우리 친척 우리 형제 자매들이 죽어나갈지도 모르는 그런 상황이잖아요. 이걸 막아야 됩니다. 그것도 굉장히 중요한 의미가 되는 거죠.
방기출: 의병을 반란군이라고 번역한 것도 마찬가지인 것 같은데~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의병을 어떻게 표현하냐면 이큐~ 이게 뭐냐면 반란군이란 뜻이거든요.
박재민: 아~ 실제로~
방기출: 그래서 농민 반란군을 이큐라고 그래요. 히데요시가 의병을 이큐라고 했기 때문에 아마 서양권에서는 아마 반란군이라는 식으로 번역이 되지 않았을까. 저는 그렇게 생각을 해 봤습니다.
박재민: 이렇게 국난을 해결하는 뭉치는 힘은 DNA에 있는 거죠?
최원정: 저는 DNA 중에서도 굉장히 특이한게 예전에 미스터 션사인 드라마에서 일본의 젊은 장교가 이런 질문을 해요. 임진 때 의병의 자식들이 을미년에 또 의병이 되고 그 을미년의 의병들은 지금 뭐하고 있니 결국 독립운동을 하는 거잖아요. 그러니까 콩 심은데 콩 나듯이 뭔가 대물림 되는~ 지금 독립운동하신 분들의 자손들 피가 있듯이 뭔가 그런 우리의 특징이 있는 것 같애요.
허진모: 그래서 일제 강점기 때 조선총독부에서는 의병을 어떻게 규정하냐면 정치적 목적 없이 무작정 희생을 한다. 그 다음에 무식한 무리의 난동이다. 이렇게 규정을 합니다. 그 반면에 박은식 선생은 의병이야말로 우리 민족의 국수(國粹)다 국성(國性)이다 한민족의 특장점으로 높이 평가하고 있다. 외국에서 의병을 보는 것과 우리가 보는 의병은 차이가 있습니다.
최원정: 아까 교수님께서 얘기해 주셨던 한중일의 관계지향적인 거 이 조직에서 내가 만약에 코로나에 감염이 된다 그러면 이 조직에 너무 큰 피해를 주니까 우린 조심해야돼 이런 생각들 많이 하는 거, 우리 끼리 1호가 될 수는 없어 그러면 내가 낙인으로 찍힐뿐더러 나는 회사에 해를 끼치는 사람이 된다. 그것에 대한 조바심 이나 긴장감이 저희는 있거든요.
김태훈: 우리나라에서는 코로나 관련된 이야기 할 때 나오는 얘기 중 하나가 당신이 감염이 되면 당신의 가족이나 지인들이 위험하다 이런 얘기를 하거든요. 그런데 개인주의 문화권에서는 그렇지 않거든요. 이거 감염되면 너 위험해 이렇게 얘기하죠. 명확한 차이가 보이긴 합니다.
박재민: 정말로 그러네요.
최원정: 그러면 교수님도 뭐하나 내놓으셔야죠.
김태훈: 저는 평양성 전투 혹은 전체 임진왜란을 통틀어서 신의 한 수 중의 하나가 리더의 등장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제가 말하는 리더는 광해입니다.
최원정: 광해 얘기 나와야죠.
-----------(동영상) 드라마 <징비록>중, 백성들: 상감마마! 우리를 버리지 마시옵소서 나라가우리를 버리면 우린 누구를 믿고 살란 말입니까, 선조: 미안하구나, 당장은 형세가 급해 이곳을 떠나지만 내 돌아올 것이다. 반드시 반드시 다시 돌아올 것이다. 백성들: 언제 말입니까? 우리가 다 죽은 다음에 말입니까 못갑니다. 못가십니다. 영의정: 멈춰라 어가를 막는자 목을 벨 것이다 백성들: 전하~, (중략) 광해군: 참담하신 그 마음을 내가 압니다. 참으로 감당하기 힘든 소임을 맡게 되었습니다. 부디~ 부디~ 경들이 전력을 다해 도와 주세요. 난 이 국난만 끝낼 수 있다면 죽어도 여한이 없습니다. 해설: 의주에 몸을 피했던 선조와 달리 분조를 이끈 광해군은 왜적이 도사리고 있는 적진 속에서 종횡무진 움직이며 8도의 관군과 의병에게 격문을 보내 연합작전을 독려하였으며 노비들도 공을 세우면 벼슬을 내려 주었다. 또한 겨울 전투에 대비해 신하와 군졸들에게 옷감을 나누어 주었고 수령이 도망간 고을에 수령을 파견하는 등 인사권을 행사하기도 하였다. 드라마 <왕의 얼굴>속 광해군의 활약- 적진 한 복판에서 민심을 통합한 리더 광해군----------
최원정: 아~ 저 방패 휙~ 날리는 거는 캡틴 아메리카 에서 보던건데?
박재민: 캡틴 아메리카서 표절한 거지요. 시대적으로 저건 1500년대이니까~
방기출: 광해군이 어려보이기는 한데 저 때 광해군의 나이가 몇살인지 아세요?
최원정: 18세~
방기출: 18살에 국가 전체 국난 구하기에 나섰던 겁니다.
박재민: 그렇게 어렸어요~?
김태훈: 선조가 아니라 광해군이 분조를 이끌고 갔을 때 백성들이 바로 이걸 받아들일 수 있었을까? 당연히 광해군에 대해서 생각을 하는 백성들이 있었을 거예요. 광해군은 뭘 했냐면 직접 백성들과 함께 했었죠. 그렇게 해서 조금씩 신임을 얻어 갔던 거죠. 그리고 컨트롤 타워가 될 수 있었던 거구요. 컨트롤 타워의 역할에 대해서 잘못 생각하시는 게 컨트롤 타워가 다해야 된다고 생각을 하세요. 그런데 컨트롤 타워는 말 그대로 뭘해야 되는지를 알려주고 적재적소에 배치해 주는 역할을 해야 하거든요 그런데 광해가 그런 역활을 잘 수행해 주었죠. 그러니까 쉽게 말하면 체계가 잡혀가기 시작하는 겁니다. 예를 들어서 광해가 없다면 의병들이 한 개의 전투는 이길 수 있을지는 모르겠는데 그 다음에 뭘해야 되는지 모를 수 밖에 없거든요. 그런데 체계를 만들어 주면 이 다음엔 어떻게 어떻게 해야 되는지를 생각을 하게 되고 조직적으로 움직일 수 있는 것이죠. 그런 기반을 만들어 준게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합니다.
최원정: 전투에서 이기는게 아니라 전쟁에서 이기게 하는게 컨트롤 타워다 지금 들었던 신의 한 수 중에서 저는 리더쉽의 얘기가 제일 와 닿는 것 같애요.
박재민: 제 전투 식량은 별로였나요?
최원정: 리더쉽이 중요하죠.
김태훈: 그리고 또 제가 주목하는 점은 컨트롤 타워가 생기면서 점점 민심이 안정되어 갔을 겁니다. 분명히 선조가 몽진을 하면서 그 당시에는 정보가 제대로 전달이 되지 않은 상황이었기 때문에 온갖 흉흉한 소문이 다 떠돌기 시작 했을 겁니다. 지금 얘기로는 가짜 뉴스죠. 이 가짜 뉴스는 그 자체보다 백성들에게 주는 영향력이 문제인데 사람들을 점점 불안하게 하고 사람들은 불안하면 불안감에서 빠져 나올 방법을 찾게 됩니다. 그래서 오히려 사람들이 불안해 할 때는 정확하게 사실을 알려주는게 중요합니다. 지금 현재 이런 상황이고 그리고 이런 계획을 가지고 있다 이렇게 알려주기만 해도 훨씬 더 안정적으로 변해 갈 수 있거든요. 광해가 컨트롤 타워를 하면서 바로 그렇게 사실들을 알려주고 가짜 뉴스의 등장을 어느 정도 막았을 겁니다.
최원정: 오늘날 이런 시국에서 정보는 과연 올바르게 공유가 되고 있는지 이 정부는 국민을 위해서 최선을 다하고 있는지 이런 생각을 하게 되네요.
박재민: 평양성 전투를 보면서 2021년의 대한민국과 굉장히 닮았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의병이 많이 일어났다잖아요. 실제로 코로나19 사태를 맞이했는데 저는 가장 잘 움직였던 컨트롤 타워는 국민들이라고 생각해요. 전부 손소독을 하고 마스크를 쓰고 마스크를 쓰기 위해서 개인정보를 공개해야 되고 줄도 서야 되는데도 불구하고 다 섰고 이때 의병의 DNA가 2021년에도 우리에게도 있지 않을까 정말 컨트롤 타워는 우리 스스로의 마음 속에 있다고 느끼고 평양성이 결국 수세에서 공세로 갔듯이 코로나19도 끝나고 나면 대한민국도 기회를 맞이하는 2021년이 되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최원정; 거의 정치인의 무슨 출마를~
방기출: 저도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있는데요. 우리가 역사적인 국난을 당하잖아요. 리더 한 사람만으로 국난을 극복한 경우는 없어요. 항상 민들이 협조를 했어요. 우리가 임진왜란을 얘기하고 있으니까 명량대첩의 승리를 보면 이순신이라는 탁월한 리더가 있었지만 그 안에는 이름 모를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순신이 탄 배 밑에는 죽어라고 노를 젓는 격군이 있었어요. 어느 사람은 이순신을 만나서 해로를 알려주고 물때를 가르쳐 주었어요. 그래서 그 시간에 전쟁을 했던 거잖아요. 그때 수많은 어민들이 어선을 타고 뒤에서 위장공세를 벌였잖아요. 이렇게 리더와 민이 하나가 되었을 때 국난을 극복해 나갔습니다. 마찬가지로 분명히 전대미문의 재앙인 코로나19 라는 위기도 극복해 나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김태훈: 의병의 DNA는 결국 역사저널 그날에 있어야 되는 의미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의병의 자식들이 또 의병이 되고 그들이 또 독립군이 됐다는 얘기는 의병들이 전쟁이 끝나고 돌아가서 자기들이 겪은 얘기를 자식들에게 해주었어요. 그 자식들은 그 얘기를 후손들한테 해줍니다. 그래서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 우리가 어떻게 해야 되는지를 알게 되고 자연스럽게 행동하게 되는 겁니다.
최원정: 역사에서 국난극복의 지혜를 엿보는 신년기획 끝내 이겨내리라 다음 시간에는 한국전쟁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이만 감사했습니다. 끝. (KBS 역사저널 그날 295회에서 정리).
① 1592년 4월, 임진왜란이 발발한다. 왜군은 부산에서부터 파죽지세로 북진해서 개전 20일 만에 한양을 점령하고 그 여세를 몰아 평양까지 진격한다. 그리고 6월 14일, 개전 2달만에, 마지막 보루인 평양성 마저 함락한다. 선조는 평양을 떠나 조선의 최북단 의주로 향한다. 도성은 폐허가 된다. 한반도가 왜군에 넘어갈 수 있는 절체절명의 상황, 1593년 1월, 드디어 평양성을 탈환하고자 하는 치열한 전투가 시작된다. 평양성을 둘러싸고 물러설 수 없는 싸움이 시작됐는데 총 네차례나 전투가 있었다. 이때 조명 연합군의 숫자는 약5만명 정도, 반면에 일본군의 숫자는 15,000명 정도, 병력은 조명연합군이 더 많았다. 1592년 6월, 평양성이 함락 그리고 7월에 명의 조승훈이 평양성을 한번 공격을 했었고, 8월에는 조선의 김명원이 평양성을 탈환하기 위해서 공격을 했다. 두차례 다 실패, 1593년 1월, 4차 평양성 전투,
② 손자병법은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것을 가정하는데 어쩔 수 없이 싸워야 한다면 ① 伐謀(벌모) 모략을 분쇄하거나 모략으로 공격을 하거나 ② 伐交(벌교) 외교를 끊거나 아니면 외교로 공격을 하거나 ③ 伐兵(벌병) 군대를 직접 공격을 해야 되는데 맨 마지막이 공성전이다. 공성전은 최하의 수단이다, 이유는 피해가 가장 크기 때문, 역사상 가장 유명한 공성전, 1453년 로마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현재의 터키 이스탄불), 3면이 바다로, 깎아지른 듯한 절벽, 바다 쪽에서 공격 육상 진입 불가능, 오직 서쪽만이 육상 땅으로 연결, 거기에다 성벽을 삼중으로 천년 동안 난공불락, 오스만 투르크는 항가리 사람 대포 만드는 기술자, 세상에서 제일 큰 대포를 만들다, 발사 포탄 무게 600킬로그램, 하루 최대 7발 발사가능, 그걸 통해서 결국 콘스탄티노플 함락 1000년만에 동로마 제국 무너짐.
③ 임진왜란의 전세가 평양성 전투로 인해서 바뀌다. 1월 8일 조명연합군 평양성을 공격하는데, 동쪽을 비어놓다. 동남쪽에 함구문, 서쪽에 보통문, 서북쪽에 칠성문 3방향으로 공격, 명의 화포는 일본 조총 사거리 밖에서 화포를 쏴서 성문을 부순다. 명군이 성 안으로 진입 일본군을 몰아낸다. 평양성을 탈환으로 전쟁의 전세가 수세에서 공세로 전환, 평양성 전투의 신의 한 수는 무기다. 평양성 전투는 기본적인 문물과 문물간의 대결, 명군은 서양의 대포 불랑기포로 평양성을 공격 서양식 청동제 화포, 유효사거리 500~1000미터, 왜군은 유럽에서 전래된 화승총, 유효사거리 150미터, 양쪽 원거리 화력전, 대포의 사정거리나 대포의 파괴력이 조총의 화력이나 파괴력보다 훨씬 강력하였다. 전쟁前 일본은 1589년 쓰시마 도주가 조총 두 자루를 선조에게 선물, 선조는 일본을 오랑캐 나라로 멸시하고 조총 두자루를 창고에 보관, 연구조사를 전혀 하지 않음, 그러나 조선은 이순신이 대포를 개발하여 바다에서 일방적으로 이겼다. 일본은 총은 있었지만 포는 없었다. 조선이 바다에서 일본은 이길 수 있었던 것은 대포가 있었기 때문이다.
④ 은에 관한 일화 이야기, 당시 일본 국제무역동참으로 엄청난 재화를 모았는데 그때 일본의 주력수출품이 은이다. 전세계 은 생산량의 20%~30% 까지 차지 했다. 일본은 은을 분리해 내는 기술을 조선에서 배워갔다. 조선 왕조실록에 1503년 연산군 때 김감불과 김검동 두 기술자가 연산군 앞에서 은분리기술 시험 연산군이 기뻐하다, 3년후 연산군 반정으로 폐위, 중종이 들어서고 난 후 조선은 더 이상 은채광을 하지 않다. 이 기술이 30년 후에 일본에 등장, 이때가 일본이 은의 수출이 급증하던 때와 맞아 떨어지다. 일본측 사료에 1533년 8월 경수와 종단이 일본 이와미 은광에 와서 회취법을 시작한 기록, 이로 인해서 일본은 수많은 재화를 쌓았고 이것이 군사력 증강을 시켰고 임진왜란의 원인이 되었다.
⑤ 일본이 중앙집권화를 이룬 때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처음, 전국시대 100년간 전쟁을 했으니까 히데요시가 권력을 잡으면서 전쟁경험에 자신감을 가졌다. 또 은이라는 재정적 요소가 대륙진출이 가능했다. 평양성 4차 전투개시된 1593년 음력 1월은 아주 추웠다. 최저 기온 영하 16도, 최고 기온은 영하 1도 평균기온 영하 6도. 대동강 물이 꽁꽁 얼다. 낮에도 영하권의 추위로 찬바람까지 불어 체감온도는 더욱 낮아지다. 일본군은 추위에 매우 취약. 날씨가 신이 한 수였다. 명군이 압록강을 건넜을 때가 양력으로 1월, 가장 추울 때, 일본군은 이런 추위를 경험해본 적이 없었다. 일본군은, 눈이 무릎까지 빠져 전진할 수가 없었고 사람과 말이 모두 얼어 죽었다. 일본군은 짚신을 신고 있어서 많은 병사들이 엄지 발가락이 얼어서 잘라야 했다. 일본군은 추위와 굶주림에 더 큰 피해를 받았다.
⑥ 보급전으로 유명한 군인 나폴레옹, 나폴레옹은 한 도시가 감당할 수 있는 군인수를 최대한 3만명 정도, 병력이 더 많이 모이게 되면 도시가 감당할 수 없다. 나폴레옹은 이런 사실을 알고 자기가 지휘하고 있는 군단을 8개로 나누어서 각 군단의 최대병력수가 2만명 정도로 되게 하고 지나가는 경로 자체도 일일이 세세하게 지정을 해서 두 군단이 겹치지 않게 관리를 했다, 오스트리아 원정 때 630킬로미터 거리를 20일에 주파하여 오스트리아군 예상보다 빨리 라인강에 도달 승리를 거두었다.
⑦ 통조림은 근대 전투 식량의 시작, 주인공은 나폴레옹, 1804년 장기 보존하는 방식에 대해서 현상금을 걸고 모집, 그래서 얻은 방식이 병으로 된 통조림, 니콜라 아폐르 라는 사람이 현상금을 받아 갔는데 그때 프랑스군은 병으로된 통조림을 채택하였다. 지금의 금속통조림은 1810년 영국에서 만들었다. 1815년 워털루 전투에서 영국군은 쇠통조림을 갖고 프랑스군과 싸웠다. 결과는 영국군의 승리,
⑧ 일본은 조선을 침략할 때 9군으로 편성, 보급은 각부대가 각자 알아서 조선에서 현지조달을 원칙으로, 손자병법에도 군량은 적지에서 구하라. 일본에서는 이게 가능하였다. 하지만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예측하지 못한 일이 벌어진다. 1592년 7월, 한산도 앞바다 이순신의 수군이 대승, 왜군의 해상 보급로차단, 이제 남은 것은 육상 보급로, 왜군은 한반도의 좌우와 중앙 3방향으로 보급을 받았다. 하지만 왜군의 육로보급로는 한반도 곳곳에서 조선 의병들이 기습공격을 가하다. 초기부터 의병들이 활동시작, 부산에서 서울까지 3백명 이상 한성에서 평양까지는 5백명 이상의 보급대를 편성해라. 보급에 막대한 전투력의 손실,
⑨ 의병을 영어사전에 insurgent fighters 라고 표현, 조선의 의병은 자발적으로 일어나는 voluntary의 의미인데, 왜 insurgent 반란을 했다는 의미로 표현했을까. 오히려 resistance 라고 했으면 비슷한 표현인데, 이건 한국문화를 정확하게 모르는 외국인이 번역한 것이다. 일본은 집단주의, 다이묘를 잡으면 다 복속이 된다. 나의 자아는 집단인 거다. 자아가 하나 밖에 없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관계주의 문화권에서 살고 있다. 아주 다양한 관계 속에서 자아를 가지고 있다. 자아가 수십개다. 그렇기 때문에 왜군이 쳐들어왔으니까 우리 가족, 친척, 형제 자매들이 죽어나갈지도 모르는 상황, 이걸 막아야 된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의병을 이큐라고 표현, 반란군이란 뜻이다. 서양권에서는 농민 의병을 반란군이라는 식으로 번역이 되지 않았을까.
⑩ 일제 강점기 때 조선총독부에서는 의병을 정치적 목적 없이 무작정 희생을 하는 무식한 무리라고 규정을 했다. 반면에 박은식 선생은 의병이야말로 우리 민족의 국수(國粹)고 국성(國性)이다 라고 평가하고 있다. 외국에서 의병을 보는 것과 우리가 보는 의병은 차이가 있다. 평양성 전투 혹은 전체 임진왜란을 통틀어서 또 다른 신의 한 수는 광해의 리더다. 의주로 몸을 피했던 선조와 달리 분조를 이끈 광해군은 왜적이 도사리고 있는 적진 속에서 종횡무진 움직이며 8도의 관군과 의병에게 격문을 보내 연합작전을 독려하였다. 노비들도 공을 세우면 벼슬을 주었다. 겨울 전투에 대비해 신하와 군졸들에게 옷감을 나누어 주었고 수령이 도망간 고을에 수령을 파견하였다.
⑪ 광해군이 분조를 맡았을 때가 18세, 18살에 국난 구하기에 나섰다. 선조가 아니라 광해군이 분조를 이끌고 갔을 때 백성들이 바로 광해를 받아들일 수 있었을까 라는 생각을 당연히 하게 되는데, 그때 광해군은 직접 백성들과 함께 동고동락 했었기 때문에 백성들로 부터 조금씩 신임을 얻어 갔다. 광해는 그렇게 컨트롤 타워가 될 수 있었다. 컨트롤 타워의 역할은 말 그대로 뭘 해야 되는지를 알려주고 적재적소에 병력을 배치해 주는 역할을 해야 되었는데 광해는 그런 역활을 잘 수행해 주었다. 체계가 잡혀가기 시작하였다. 분조와 전국의 의병들이 조직적으로 움직일 수 있었다. 광해는 전투에서 이기는게 아니라 전쟁에서 이기게 하였다. 리더가 신의 한 수다.
⑫ 우리는 코로나19라는 역사적인 국난을 당하고 있다. 리더 한 사람만으로 국난을 극복한 경우는 없다. 항상 민들이 협조를 했다. 임진왜란의 명량대첩의 승리를 보면 이순신이라는 탁월한 리더가 있었지만 그 안에는 이름 모를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이순신이 탄 배 밑에는 죽어라고 노를 젓는 격군이 있었다. 어느 사람은 이순신을 만나서 해로를 알려주고 물때를 가르쳐 주었다. 그래서 그 시간에 전쟁을 했다. 그때 수많은 어민들이 어선을 타고 뒤에서 위장공세를 벌였다. 이렇게 리더와 민이 하나가 되어 국난을 극복해 나갔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전대미문의 재앙인 코로나19 라는 위기도 극복해 나갈 수 있다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