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나다HINADA씨는 이곳 일본 고등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치고 있는데 오늘의 일정을 거의 책임졌다. 오늘도 니시오카씨는 우리와 함께 했다. 오사카의 행사가 이른 시간에 시작되기 때문에 히로시마 역 근처로 숙소를 옮기기 위해 짐부터 보내놓고 우리는 히로시마 원폭피해의 실상과 기억을 보러 출발했다.
히로시마. 리틀 보이. 검은 비. 종이학... 리틀 보이(핵폭탄)가 떨어진 후 10년이 되던 해, 사사키 사다코는 초등학교 6학년이었다. 어느날 학교 운동장에서 달리기를 하다가 쓰러진 그 아이는 백혈병. 아이의 몸속에 퍼진 핵폭탄의 방사선. 사다코는 살고 싶었고 병원 침상에 누워 매일매일 종이학을 접었다. 소원을 들어준다는 천 마리의 학. 그러나 1955년 10월 25일 사다코는 친구들이 접어준 356마리의 학과 함께 하늘나라로 날아갔다. 제2차 세계대전이 일본의 패전, 다시말해 미국의 승리가 확실해질 무렵인 1945년 8월 6일 오전 8시 15분 히로시마시(市)는 날씨가 맑았다고 한다. 하지만 이른 아침부터 사람들은 순식간에 더워졌다. 아니 뜨거워졌다. 그런데 하늘에서 비가 내렸다. 온 몸이 타들어가고 목이 말랐던 사람들은 그 비를 마시려고 목을 길게 빼고 하늘로 입을 벌렸다. black rain. 검은 비. 검은 비. 그녀는 목이 말랐다. 입을 벌리고 학처럼 길게 목을 뺐다. 그러나 검은 비. BLACK RAIN이 입 속으로 몸 속으로. 그녀는 타들어갔다. 녹아버렸다. 15,000미터의 히로시마 하늘에 버섯처럼 솟아오른 구름에서 크고 무거운 물방울이 검은 비가 되어 떨어진 것이다.미군의 공습에 미리 대피한 15만여 명을 제외한 25여만 명의 히로시마 사람들을 태우고 녹이고 비틀어버린 열기와 냉기들...그날 그 자리에서 14만여 명이 죽고 서서히 죽어간 사람들까지 26만여 명. 사흘이 지난 8월 9일에는 나가사키NAGASAKI에도 핵폭탄이 떨어져 7만여명이 그렇게 죽었다. 리튼 보이LITTLE BOY가 삼켜버린 목숨들. 인간성. 나는 한번도 이런 적이 없는데 이 투쟁기를 쓰는 지금 '무모하다'는 표현이 왜 이토록 유머러스하게 들릴까? 여전히 우리의 기억은 그 전쟁들에 죽어간 사람들의 숫자에만 남아있을 뿐이다. 전쟁도 무모하고 우리의 기억도 무모하다. 오키나와와 히로시마 평화기념공원 헤이와코우엔에 남겨진 전쟁의 비참함과 여전히 준비 중인 인간의 무모함을 떠올리며 나는 내가 사람인 것이 잠시 싫어졌다. 그래서 울었다. 검은 눈물. 히로시마에서 나는 아ㆍ직ㆍ도 검은 눈물을 흘렸다. 1945년 8월 6일 그 날의 모습 그대로, 여전히 진행중인 인간의 어리석음 앞에 속살을 드러내고 섰는 원폭돔을 지나고 또 히로시마의 강연장 히토마치 플라자로 가는 길에 핵폭탄이 떨어진 곳을 지났다. 골목안 건물 벽에 붙은 작은 표지판으로만 남아있다. 실존의 부조리가 다시금 밀려왔다.
강연을 마치고 초전면이 고향이라는 재일교포 2세를 만났다. 누구보다 임순분부녀회장님이 반가우셨으리라. 오키나와에서도 의성이 고향이라는 김수섭이라는 분도 만나셨는데. 일본이 이토록 가까운 나라였던가! 풍성한 저녁식사를 마치고 중심가 HONDORI에 다녀왔다. 강현욱교무님이 함께여서 길 잃을 염려가 없으니 걸음이 가벼웠다. 민성이의 쇼핑을 위해 임순분부녀회장님과 교무님을 먼저 보내고 우리는 그토록 타고 싶었던 히로시마의 전철을 타고 돌아왔다. 내일은 오사카OSAKA. 마지막 일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