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8년 나해 5월1일 [(백) 부활 제5주간 화요일]
제1독서
<하느님께서 자기들과 함께 해 주신 모든 일을 교회에 보고하였다.>
○ 사도행전의 말씀입니다. 14,19-28
복음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4,27-31ㄱ
◈ [수원] 노동자 성 요셉: 믿지 않는 고향 사람들 /
조욱현 토마스 신부|오늘의 강론 묵상
2018년 나해 5월1일 화. 노동자의 성 요셉: 믿지 않는 고향 사람들
목수로 일한 요셉 성인은 ‘노동자의 수호자’로 공경을 받고 있다.
1955년 교황 비오 12세께서는 해마다 5월1일을 ‘노동자의 성 요셉’의
기념일로 지내도록 선포하였다. 우리나라에서는 원죄 없이 잉태되신
동정 마리아와 함께 한국 교회의 공동 수호자로 모시고 있다.
복음: 마태 13,54-58: 저 시림은 목수의 아들이 아닌가?
예수님께서는 고향에 가시어 회당에서 가르치셨다. 그러나 이
회당에는 악의에 찬 믿지 않는 군중이 모여 있었다. 사랑이 아니라
미움으로 가득 찬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예수님께서 가르치셨을 때
그들은 놀랐다고 한다. 그것은 그분의 가르침을 듣고 찬양하는 마음이
생겨서가 아니라, 시샘 때문이었다. 그들의 교만은 주님께서 완전하게
가르치시는 것을 깨달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저 사람이 어디서 저런 지혜와 기적의 힘을 얻었을까?”
(54절)라고 한다. 그들은 지혜를 주시고 놀라운 일을 가능케 하시는
하느님을 모르는 사람들이다. 솔로몬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는 아직
어릴 때, 자기에게 맡겨진 사람들을 오만이 아니라 덕으로, 교만이
아니라, 지혜로, 머리가 아니라 가슴으로 다스리기 위하여 왕위를
받아들였다. 그는 하느님에게서 지혜를 받기를 바랐고, 진심으로
그것을 청하여 그것을 받았다. 주님의 가르침과 기적을 보면 그것이
하느님께로부터 왔다는 것을 알아야 하는데 나자렛 사람들은 그것을
알아보지 못하고 있다.
“저 사람은 목수의 아들이 아닌가? 그의 어머니는 마리아라고 하지
않나?”(55절) 주님께서는 고향 사람들에게 모욕을 당하신다. 그분의
가르침에서 나타난 지혜와 기적에 대해 감탄을 하면서도, 그들의
불신은 진실을 보는 눈을 가렸기 때문이다. 그들은 하느님께서 인간
안에서 그런 일을 하신다는 사실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의 가족들을 들먹이며 그분에게 이런 능력이 생겨나게 할 어떤
실마리도 찾아볼 수 없었던 것이다. 그들은 시샘으로 눈이
어두워졌다.
“저 사람은 배우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성경을 잘 알까?”(요한 7,15)
그들은 이렇게 말하며 몹시 놀라고 어리둥절해하면서도 그분을 믿지
않고 못마땅해 하기만 했다. 그들은 그분 말씀의 권능에 놀라고
감탄해야 했지만 오히려 그분의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가족들을
안다는 이유로 그분을 무시하고 만다. 우리는 이웃을 보고 그에 대한
선입견으로 그를 무시하거나 못마땅하게 여기며 상대하고 있지나
않은지 반성하며 이웃을 바라보아야 할 것이다.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57절) 이 말씀은 비유적으로 말씀하신 것이다. 유대아라고
하는 것은 넓은 의미로 예언자들의 고향이다. 이스라엘 전체가
그들의 혈연관계로 고향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모든 예언자들은
이스라엘로부터 박해를 당했다. “예언자들 가운데 여러분의 조상들이
박해하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사도 7,52)라는 말씀대로
이다. 그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며 정의를 부르짖으며 하느님의
뜻을 전달하는 예언자들을 박해하였고 죽이기까지 했던 것이다. 항상
예언자들은 이렇게 박해를 받는다.
“그들이 믿지 않으므로 그곳에서는 기적을 많이 일으키지 않으셨다.”
(58절) 믿음이 없어 자격을 지니지 못한 이들에게는 권능이 힘을 쓰지
않으신다. 그분에 대한 놀라움이 커져 갔는데 왜 기적을 행하지
않으셨을까? 예수님께서는 기적이 보여주는 광경이 아니라 기적의
소용을 중요하게 생각하셨기 때문이다. 기적이 소용이 없을 때는
행하지 않으셨다. 단지 몇 번의 기적을 일으키신 것은 그들이
“의사야, 네 병이나 고쳐라.”(루카 4,23)하고 말하지 못하게 하고,
그들이 ‘저자가 기적을 일으켰더라면, 우리도 믿었을 텐데’하고
말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우리는 다른 사람을 나의 선입견을 가지고 판단하지 말아야 한다.
남을 판단하는 것은 바로 나를 판단하는 것이다. 고향 사람들이
예수님을 직업과 가족관계를 가지고만 생각했기 때문에 그분을
받아들이지 못했던 것처럼 우리도 그럴 수 있다. 그러나 내가 가지고
있는 지식은 전혀 틀리는 경우가 많다. 고향 사람들의 잘못을 우리가
반복하지 않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있는 그대로 그분을 바라보며
사랑하는 삶이 되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주님의 도우심을 청하자.
- 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 -
◈ [서울] 부활 제5주간 화요일
2018년 나해 5월1일 부활 제5주간 화요일
부부들의 대화와 기도를 도와주는 모임인 ‘엠이’ 봉사를 하고
있습니다. 봉사를 하기 위해서는 팀 부부들과 준비모임을 하게
됩니다. 모임의 장소는 부부들의 가정에서 이루어집니다. 가정방문을
하면서 교우들의 집을 구경할 기회가 있습니다. 지난번 모임을 가졌던
가정은 참 아늑하고, 신앙인의 가정이라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여러분들의 가정은 어떠신지요? 제가 본 그 가정을 소개하고
싶습니다.
먼저 현관에는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과 예수님의 그림이 있었습니다.
마치 그 가정은 언제나 예수님을 초대하고,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것
같았습니다. 방으로 들어오면서 성수가 있었고, 가정을 위한 기도가
액자로 걸려 있었습니다. 방에는 진열장이 있었는데 그 안에는 예쁜
성물들이 가득했습니다. 어머니는 고등학생인 큰 딸을 위해 안수
기도를 청하였고, 저는 기쁜 마음으로 따님의 건강과 지혜를 위해서
기도해 주었습니다. 이사를 가서 성당도 옮겼을 때 엄마가 친구들이
없어서 걱정을 하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딸의 대답이 엄마의 걱정을
덜어 주었다고 합니다. “엄마는 친구 만나려고 성당가요?” 아름다운
가정이죠?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는 다릅니다.” 세상이 주는 평화는 어떤
것일까요? 먹는 것, 입는 것, 자는 것이 해결되는 것일 것입니다.
물론 그런 평화도 중요합니다. 아직도 많은 사람들은 제대로 먹지
못해서 굶주리고 있으며, 따뜻하게 몸을 감싸줄 옷이 없어서 추위에
떨고 있으며, 많은 난민들이 정든 고향을 떠나서 지내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평화는 어떤 것일까요? 지금 굶주리는 이들에게
먹을 것을 주는 마음을 갖는 것입니다. 지금 헐벗은 이들에게 입을
것을 주는 마음을 갖는 것입니다. 집이 없어 떨고 있는 사람들에게
편히 쉴 곳을 마련해 주는 마음을 갖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그런 평화를 위해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평화가
이루어 질 때 하느님의 나라는 지금 여기에서 시작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평화’를 이야기 하십니다. 세상이 주는 평화와는 다른
평화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오랜 경험으로 익숙해진 편안함을 이야기
하지 않으셨습니다. 나의 자리가 보장되고, 수고의 열매를 받아먹는
안전을 이야기 하지 않으셨습니다.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비워내고,
하느님의 것을 채우는 평화를 이야기 하셨습니다. 편안하고 익숙해진
자리를 기꺼이 내어주고 또 다시 낯선 곳으로 떠나는 것을 감수하는
평화를 이야기 하셨습니다.
제1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주님께서 주시는 평화를 알았습니다.
끊임없이 자신의 것들을 비워내는 평화를 알았습니다. 친숙하고
편안한 것들을 다른 이들에게 양보하고 새로운 곳을 향해 나가는
그런 평화를 알았습니다. 세상의 평화는 익숙하고, 편안하고,
안정적인 것이며 풍요로운 것입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평화는
무엇일까요? 자기를 비우고, 겸손하며, 기꺼이 삶의 거름이 되는 것을
감수하는 평화입니다.
봉사자 가정의 식탁에서 보았던 ‘사랑의 물리학’이라는 글입니다.
“질량의 크기는 부피와 비례하지 않는다.
제비꽃같이 조그마한 그 계집애가
꽃잎같이 하늘거리는 그 계집애가
지구보다 더 큰 질량으로 나를 끌어당긴다.
순간, 나는
뉴턴의 사과처럼
사정없이 그녀에게로 굴러 떨어졌다
쿵 소리를 내며
쿵쿵 소리를 내며
심장이 하늘에서 땅 끝까지
아찔한 진자 운동을 계속 하였다.
첫 사랑이었다.”
5월의 첫날입니다. 성모님의 도우심을 청하며, 오늘 하루 주님의
사랑에 푹 빠지면 어떨는지요?
- 서울 대교구 성소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수도회] 지고지순한 불멸의 사랑
2018년 나해 5월1일 부활 제5주간 화요일
지고지순한 불멸의 사랑
근로자의 날인 동시에 노동자 성 요셉 축일입니다. 짧게나마 산업의
역군으로 일하던 시절이 주마등처럼 떠오릅니다. 땀흘려 일하고 난
후의 뿌듯한 성취감이 참 좋았습니다. 동고동락하던 직장 동료들과의
끈끈한 정도 잊지 못합니다. 부족한 내 두 손으로 더 나은 세상을
위해 뭔가 작게나마 기여했다는 데서 오는 기쁨도 컸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지나치게 빡빡했던 근무 시간, 강도 높은 근무 조건으로
힘겨워하던 기억도 생생합니다. 상습 피로, 수면부족으로 졸린 눈을
비비며 힘겹게 출근하던 기억들도 떠오릅니다. 마치 큰 시스템 속의
부속품이 된 느낌도 잊지 못합니다. 좀 더 충실하고 모범적인 직원으로
살지 못한 송구함도 큽니다.
이땅의 많은 근로자들이 직장에서 보내는 시간을 통해 하느님을
만나고, 자기를 실현할 수 있는 기쁨의 시간이 되길 기도합니다.
그렇게 되기 위해 어느 한쪽의 일방적인 노력만으로는 불가능합니다.
노사(勞使) 양측의 부단한 대화와 경청, 상호 이해와 배려를 위한
무한한 노력이 필요합니다.
오늘날 많은 근로자들, 아버지들이 그러하듯 요셉 성인도 하루하루
성실하고 근면한 노동으로 성가정의 생계를 책임지셨습니다.
무엇보다도 그는 자신이 맡은 일에 충실했습니다. 자신에게 매일
주어지는 일들을 진지하고도 과묵하게 해나갔습니다.
특히 요셉 성인은 하루 종일 일을 하면서도 기도의 끈을 놓지
않았습니다. 묵묵히 목재를 손질하면서도 자신의 인생 여정,
신앙여정 속에 담겨있는 하느님의 뜻을 지속적으로 찾아나갔습니다.
결국 그는 일하면서 기도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일을 기도화했습니다.
요셉 성인은 마리아와 더불어 하느님의 인류구원사업에 대단한
기여를 하신 분들입니다. 그러나 복음사가들은 한결같이 요셉 성인에
대해서 입을 다물고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복음서 안에서 요셉
성인은 거의 '투명인간' 취급을 당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대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그만큼 요셉 성인은
과묵하고 진중한 사람이었습니다. 선천적으로 충직하고 단순한
사람이었습니다. 아무 말 없이 자기 길을 충실히 걸어가던
의인이었습니다.
생각만 해도 든든한 동반자 요셉 성인이 있었기에 마리아도 짙은
안개 속 신앙여정을 충실히 걸어갈 수 있었습니다. 아기 예수님의
잉태 이후 마리아가 넘어야 할 산은 끝도 없이 펼쳐졌습니다.
당혹해하는 부모에게 뭐라 제대로 설명할 수도 없었습니다.
불러오는 배를 부여잡고 따가운 이웃들의 시선과도 맞서야 했습니다.
만삭의 몸을 이끌고 나자렛을 떠나 베들레헴으로 길을 떠나야
했습니다. 그뿐입니까? 마굿간 탄생, 이집트로의 피신, 소년
예수님의 돌출 발언, 예수님의 출가, 그리고 들려오는 좋지 않은
소식들, 결국 십자가 죽음...
정녕 마리아의 한평생은 길고도 험난한 고행 길이었습니다. 때로
고독하고, 때로 시련의 가시밭길이었습니다. 때로 가야할 길이 너무나
아득해 그만 주저앉고도 싶었을 것입니다.
다행히 마리아 곁에는 요셉 성인께서 언제나 든든한 보루요 언덕처럼
서 있었습니다. 다행히 마리아 옆에는 '나보다 더 나를' 아끼고
사랑해주던 요셉 성인이 언제나 '경계태세'를 늦추지 않고 있었습니다.
마리아와의 기이하고 특별한 '동거생활'을 해나가던 요셉 성인의
그녀를 향한 감정은 참으로 복잡 미묘했을 것입니다. 때로 사랑하는
약혼녀를 하느님께 '강탈당한'것에 대한 야속한 마음이 들었을
것입니다. 때로 무거운 십자가를 홀로 지고 가는 마리아에게서 깊은
연민의 정을 느꼈을 것입니다. 때로 '지금 대체 내가 뭐하고 있는
건가?' 하는 자괴감에도 빠져들었을 것입니다. 때로 마리아를 향한
강한 부성애와 보호본능을 느끼기도 했을 것입니다.
따지고 보니 이 세상 그 누구보다도 마리아를 마음 깊이 사랑했고
흠모했던 분이 요셉 성인이셨습니다. 그런데 그 사랑은 누구나 다
하는 통속적인 사랑이 결코 아니었습니다. 유효기간이 그리 길지
않은 인간적인 사랑도 아니었습니다. 그 사랑은 지고지순한 영적인
사랑, 헌신적인 신적 사랑, 아가페적인 불멸의 사랑이었습니다.
-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 [수도회] 저 사람은 목수의 아들이아닌가? (마태 13, 55)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강론 묵상
2018년 나해 5월1일 화. 노동자 성 요셉.
저 사람은 목수의 아들이아닌가? (마태 13, 55)
생명에 감사하는 성모성월의 첫날입니다.
오늘은 우리의 노동을 위로하는 근로자의 날입니다.
노동자 성 요셉의 삶을 통해 삶을 긍정하는
뜨거운 겸손을 정직한 사랑을 만나게 됩니다.
정직한 노동은 가장 아름다운 사랑임을 믿습니다.
노동은 분명 하느님의 것입니다.
먹고 사는 일이 숭고한 생명의 삶으로 변하게하십니다.
사람과 노동은 결코 분리될 수 없습니다.
서로의 노동에 진심으로 감사하는 시간이길 기도드립니다.
생명의 질서는 노동으로 드러나며
노동은 서로의 생명을 더욱 풍요롭게 만듭니다.
소중한 이 오늘이 정직하게 살아가는
많은 근로자들의 생명의 축제이길 기도드립니다.
가장 순수한 봉헌이 노동임을 믿습니다.
성 요셉이시여 가난한 노동자들을 위하여 빌어주소서.
거룩한 노동이 되게 하여 주소서!
-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 -
◈ [기타] 말씀이 힘있게 : 오늘의 능력말씀
2018년 나해 5월1일 부활 제5주간 화요일
말씀이 힘있게
오늘은 “말씀이 힘있게”라는 내용으로 은혜의 시간이 되겠습니다.
사도행전 19장 20절 말씀에 “이와 같이 주의 말씀이 힘이 있어
흥왕하여 세력을 얻으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한 소년이 수줍게 체리를 한참을 쳐다보고 있었는데 과일 가게
아저씨는 수줍어하는 소년에게 “얘야, 먹고 싶으면 하나 집어
먹어보렴.”하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소년은 그저 쳐다만 보고 있었습니다. 마음씨 좋은 아저씨는
그냥 수줍은 표정으로 서 있는 소년에게 자신의 큰 손으로 체리 한
움큼을 집어 준 것입니다. 소년은 그제서야 자기 두 손 가득히 얻은
체리를 보면서 활짝 웃으며 집으로 갔습니다.
여러분! 어떻습니까? 소년의 작은 손과 같은 내 작은 생각의
그릇에는 하나님의 축복을 담을 수가 없지요. 그런데도 자기 생각의
기준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담으려고 말씀을 힘 있게 받으려고
하지만 흥왕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순종함으로 하나님의 큰 그릇에 축복의 말씀을 담으면
상상을 초월하는 아브라함과 같은 큰 복을 받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 작은 생각의 그릇은 깨쳐버리고 오직 크고 넓은 순종의
그릇에 하나님의 말씀을 담아 말씀이 날마다 힘 있게 삶 가운데 크게
퍼져가는 성도가 되십시오.
할렐루야!
- 인천 부평 사랑밭 교회 권태일 목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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