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1633
5월9일 [부활 제6주간 수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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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1)성령께 우리 삶의 주도권을 통째로 내어드립시다!>
우리가 걷고 있는 지상 순례 여정길에 때로 든든한 아버지처럼, 때로 따뜻하고 포근한 어머니처럼 동반해주고 계시는 성령의 존재, 성령의 현존을 자주 의식하며 살아가시는지요?
성령께서는 예수님께서 인간과 함께 머무셨던 33년간의 지상생활 내내 그분을 동반하셨으며, 협조하셨으며, 인도하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성령께서는 우리의 지상생활 내내 우리를 동반하시고, 협조하시고, 인도하실 것입니다.
이 세상 그 어디든 계시지 않는 곳이 없으신 하느님 아버지, 부활하셔서 영원히 우리 가운데 살아계시는 예수님을 어디서 만나뵐 수 있을까요? 바로 성령 체험을 통해서입니다. 성령께서 우리 안에 힘차게 활동하실 때, 우리는 놀라운 기적을 체험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성령께서는 우리가 일상적으로 겪는 절망과 비참, 무기력과 우울감을 일시에 걷어가십니다. 성령께 우리 삶의 주도권을 통째로 내어드릴 때, 우리는 고통 속에서도 미소지을 수 있습니다. 십자가를 기쁘게 질 수 있습니다. 불가능할 것만 같았던 용서가 가능해집니다.
죽어가면서도 행복해할 수 있습니다. 다른 무엇에 앞서 성령께서는 우리네 삶을 기쁨 가득한 축제의 장으로 변화시키십니다. 넘치는 생명력과 활기로 기쁨 충만한 공동체로 바꾸어주십니다. 이 모든 기적들이 바로 성령의 은총으로 인해 가능합니다.
동료들과 함께 성무일도를 바칠 때, 깜짝 놀랄 때가 있습니다. 이 기도의 특징은 매년 전례주기에 따라, 4주간 흐름에 따라 일정한 패턴이 계속 반복됩니다.
어떤때 셀수도 없이 반복해온 시편이며 찬가가 식상하게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늘 같은 방식, 같은 내용이기에 때로 ‘대체 언제까지 똑같은 기도를 반복해야 하는가?’ 하는 회의감도 듭니다.
그러나 어떤 때, 시편의 단어 하나, 찬가의 문장 한줄이 살아 움직일 때가 있습니다. 단어들이 제 안으로 들어와 제 삶을 온통 흔들어놓을 때, 삶을 완전히 휘저어놓을 때가 있습니다. 바로 성령 안에 살아갈 때, 성령의 현존을 강하게 의식하며 지낼 때 그렇습니다.
하는 듯 마는 듯, 건성건성 습관적으로 기도하는 모습에서 탈피해, 성령께 온전히 의탁하며 기도할 때, 내가 아니라 성령께서 내 안에서 사시며 내 삶을 주도하실 때, 성령과 함께 기도하는 것이 됩니다.
그런 기도를 통해 우리는 매일 되풀이 되는 아침 저녁 기도를 통해 하느님을 체험할 수 있고, 천국을 체험할 수 있게 됩니다. 우리의 성화(聖化)는 특별한 기적이나 놀라운 사건을 통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매일 정성스레 봉헌하는 성찬례를 통해 우리는 성화됩니다. 매일 되풀이되는 아침 저녁 기도를 통해 우리는 성덕에로 나아갑니다. 매일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과의 관계 안에서, 매일 우리가 행하는 작은 일들을 충실히 수행함을 통해 성덕의 언덕으로 올라갑니다. 오늘도 아침기도 중에 즈카르야 노래를 부르며 깜짝 놀랐습니다. 온 몸과 마음으로 정성껏 경건하게 기도했습니다.
눈으로 집중해서 읽고, 입으로 크게 외치고, 마음에 깊이 새기는 각오로 기도를 바쳤더니, 식상했던 단어와 문장들이 통째로 살아났습니다. 제게 살이 되고 피가 되고 에너지가 되었습니다. 찬가 한 소절이 제게 기쁨이요 감사로 변화되었습니다. 오늘 하루 다시금 역동적으로 활기차게 살아가겠다고 결심하게 도와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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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진리 중의 진리, 불변의 진리, 궁극의 진리, 예수 그리스도!>
가끔씩 우리는 거짓 보도, 허위 사실, 헛소문을 접합니다. 때로 유명인사들의 거취에 대한 허위사실들이 sns를 타고 순식간에 유포되어 입장 곤란하게 만들기도 하지요.
저도 언젠가 한 신자로부터 어떤 신부님께서 돌아가셨다는 이야기를 듣고 깜짝 놀랐습니다. 너무 놀란 나머지 ‘그럴리가 없는 데’하며, 즉시 전화를 걸어 직접 확인까지 해본 적이 있습니다. 껄껄 웃으시며 '이미 부활해서 삼시세 끼 밥 잘 드시고 계신다.'는 말씀을 듣고 겨우 마음을 진정시켰습니다.
이렇게 우리를 당혹스럽게 만들고, 큰 혼란으로 몰고가는 거짓, 허위, 헛소문들이 날개를 달고 이리저리 떠돌아다니고 있습니다.
때로 이런 그릇된 정보가 부당한 공권력을 등에 업고, 진실인양 공공연하게 유포되기도 합니다. 분명 거짓인데 그럴싸하게 포장되고 편집되어 일반화된 것을, 비판력을 상실한 관용 매체를 타고 진실인양 보도되기도 했습니다.
가장 구체적인 사례가 518 광주민주화운동과 관련된 보도들이었습니다. 신군부와 관변 언론들은 이를‘광주소요사태’, ‘광주사태’, ‘폭동’ 등으로 왜곡 보도했습니다. 국민들이 믿고 구독하던 국내 유수 일간지들조차 선량한 시민들을 폭도로 내몰았습니다.
무고한 시민 학살의 당사자는 아직도 그 잘난 회고록에서 ‘본인은 죄가 없다.’ ‘게엄군 헬기 사격은 거짓이다.’라며 선량한 국민들과 광주시민들을 우롱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이 우리 앞에 매일 펼쳐지는 세상만사, 다양한 사건사고 들 앞에서 무엇이 진실이며, 무엇이 거짓인지 파악할수 있는 정확한 식별력과 정보력입니다.
신앙생활 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알고보면 분명 거짓이요 악인데, 사탄의 우두머리인데, 그럴싸하게 스스로를 포장해서 진리처럼, 예언자처럼 행세합니다. 아직도 두꺼운 가면을 쓰고 다니며 선량한 사람들을 악의 구렁텅이로 몰아넣고 있는 그릇된 지도자들과 사이비 교주들이 바로 그들입니다.
근원적, 태생적으로 나약한 우리 인간들입니다. 거짓과 헛소문 앞에 이리저리 휩쓸려다니는 우리들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늘 필요한 존재가 한분 계십니다. 바로 성령이십니다.
“그분 곧 진리의 영께서 오시면 너희를 모든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요한 복음 16장 13절)
다시 말해서 성령께서는 우리를 진리의 길로 이끌어주실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령께서 우리를 이끌어 주실 진리, 진리 중의 진리, 궁극의 진리, 불변의 진리는 또 무엇입니까?
그 진리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분 자체이시며, 그분께서 공생활 기간 동안 우리에게 보여주신 생애 전체이며, 그분께서 선포하신 복음 말씀이 곧 진리입니다.
이 땅의 모든 청소년들과 젊은이들이 그릇된 오류에 빠지지 않길 기도합니다. 그들이 불변의 진리이자 영원한 진리인 정통 가톨릭 신앙에 맛을 들여, 사이비들이 미끼처럼 건네는 감언이설에 넘어가지 않도록 신앙의 깊이를 더해갔으면 좋겠습니다.
주님께서 또 다시 우리 모두에게 축복의 선물로 주신 은혜로운 이 아침, 다 함께 다시 한 번 진리이신 예수님을 향한 멀고도 먼 신앙의 길, 구도의 길, 생명의 길을 힘차게 출발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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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진리의 영께서 너희를 모든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
<(1)음식과 음료>
결혼 20년 만에 30평짜리 아파트로 이사하게 된 부부가 있었습니다. 워낙 여러 번 이삿짐을 싸 본 경험이 있어서 그 부부는 이번에도 이삿짐센터를 부르지 않고 자신들이 손수 짐을 싸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 노인이 갑자기 “내가 도와줄게요. 걱정 말아요. 공짜에요, 공짜.”라고 하시며 대꾸할 기회도 주지 않고 능숙한 솜씨로 짐 나르는 것을 도와주었습니다. 부부는 밑져야 본전이라는 생각으로 그 노인이 자신들을 도와주도록 하였습니다.
짐을 싸는 도중에 노인이 본색을 드러냈습니다.
“어유, 짐이 많네. ... 뭐 ... 버릴 건 없나요?”
리모컨도 없는 구형 텔레비전, 낡은 선풍기, 그런데도 부부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글쎄요, 워낙 정이 든 물건들이라 버리기가 아까워서요.”
노인의 얼굴이 갑자기 굳어졌지만, 노인은 끝까지 이삿짐 싸는 것을 도와주었습니다. 그리고는 정말도 한 푼도 안 받지 않고 웃으며 인사한 뒤 돌아가셨습니다.
그로부터 보름 뒤 이 부부에게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복지시설에서 초대장이 날아왔습니다.
“두 분의 도움으로 저희 복지시설이 온전하게 터를 옮겼습니다. 부디 오셔서...”
그런 곳을 후원한 곳은 없었지만, 또한 앞으로는 좋은 일도 해야겠다는 마음으로 그 초대에 응하기로 하였습니다.
부부를 맞이해 준 사람은 보름 전 공짜로 이삿짐을 날라준 그 노인이었습니다. 노인은 부부를 맨 앞자리로 안내한 뒤 다른 사람들에게 소개시켜 주었습니다.
“여러분, 이분들이 우리 집을 유지하게 해준 진짜 후원자십니다. 그 동안 저는 이삿짐을 무료로 운반해 주며 버리는 옷장, 선풍기, 전기밥솥 따위를 모아서 복지관 살림을 꾸려 왔습니다. 그런데 이 부부만이 아무것도 버리지 않고 이사를 했습니다.”
객석에서 한 여자가 질문했습니다.
“아무것도 버리지 않았다면 아무 도움도 주지 않았다는 뜻 아닌가요?”
노인은 미소를 지으며 이렇게 설명해 주었습니다.
“사실 그동안 이 복지시설을 운영하기가 무척 힘들었습니다. 그래서 이참에 작은 집으로 옮기고 몇몇의 장애인 가족들을 다른 곳으로 보낼 생각이었습니다. 헌데 이 부부의 이삿짐을 옮길 때, 그리고 돌아오면서 저도 오랜 시간 정이 든 가족들을 버려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입니다.”
노인의 이 설명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고, 부부는 그날로 복지관의 진짜 후원자가 되었습니다.
[TV동화 행복한 세상 1, 진정한 후원자]
제가 성경을 공부할 때, 어떤 분이 이렇게 충고해 주었습니다.
“성경 잘못 공부하면, 신앙을 잃는다.”
성경을 공부하면 신앙이 증가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요? 그러나 실제로 성경을 공부해가면서 신앙이 줄어들 수도 있겠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성경이 하느님의 말씀이 아닌 그저 공부를 위한 공부가 될 때 그렇게 말씀은 나에게 아무 영향도 주지 못하고 메말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마른 음식만 먹고 사람이 살 수 있을까요? 음식을 먹으면 당연히 음료도 마셔야합니다. 그래야 음료가 음식을 소화시키는데 도움을 줍니다.
그러나 가끔은 음료를 마실 시간은 안 주면서 음식만 먹고 좋은 결과가 나기를 기다리는 경우도 있습니다.
예를 들면 소공동체 때 하는 복음나누기 7단계가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복음말씀에서 자신에게 와 닿는 구절을 찾아내고 3분 정도 묵상한 다음 삶과 연결시켜 나누기를 하는 것입니다.
저는 이 나눔이 진정 가슴을 뜨겁게 하는 나눔이 되려면 적어도 성체 앞에서 1시간은 깊이 묵상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적어도 말입니다. 그리고 성경에 대한 어느 정도 선지식도 필요합니다.
따라서 가능하면 일주일 전 것을 미리 읽고 일주일 동안 묵상하며 산 다음에 나누기를 하기를 권합니다. 어떻게 3분 안에 그 말씀이 내 안에 녹아들어 내 삶을 비추어줄 등불이 될 수 있겠습니까?
위의 이야기에서 노인의 말을 들었을 때 많은 이들은 ‘아무것도 버리지 않았다면 아무 도움도 주지 않았다는 뜻 아닌가요?’ 라고 물었습니다. 그러나 노인은 그들과는 달랐습니다.
부부가 물건을 버리지 않는 모습에서 화를 내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 담겨있는 뜻을 해석하고 자신의 것으로 삼을 준비가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말씀은 그 자체로 음식입니다. 그러나 그 음식이 소화되기 위해서는 물도 필요하고 시간도 필요합니다. 물은 성령님입니다.
성령의 빛이 없이는 어떤 말씀도 나의 것이 될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 성령의 빛으로 소화되고 나의 살과 피가 될 시간도 충분히 주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음식을 먹을 때도 물과 소화가 될 충분한 시간을 주어야 하는데, 어떻게 말씀을 소화시켜 나의 것으로 만드는 데는 3분밖에 시간을 주지 않는 것일까요? 그렇게 되면 깊은 나눔이 아닌 반복되는 일상의 이야기만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게 감동이 없고 변화와 기쁨이 없기 때문에 소공동체 모임에서 말씀나누기를 통한 그리스도를 만나는 체험이 줄어들 수밖에 없고 그런 나눔이 너무 부담스럽기 때문에 잘 안 나가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가르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할 말이 아직도 많지만 너희가 지금은 그것을 감당하지 못한다. 그러나 그분 곧 진리의 영께서 오시면 너희를 모든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직접 말씀하신다고 다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 음식이 소화될 수 있도록 성령께서 함께 오셔야만 말씀이 참으로 소화되어 나의 것이 되는 것입니다.
매일 성경 말씀을 묵상하는 저도 3분 묵상해서는 잡념에서만 헤매다 아무 것도 느끼지 못하고 말 것입니다.
우리도 다만 성경 한 구절이라도 나의 것으로 삼고 내 살과 피가 되기를 원한다면 성령께서 내 안에 임하실 수 있도록 먼저 내 자신을 정화하고,
또 그분이 내 안에서 활동하실 시간과 그 말씀이 나의 것으로 소화될 시간을 충분히 드려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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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남녀탐구생활과 신앙의 권태기>
오래 전 TvN의 ‘롤러코스트 2 - 남녀탐구생활’에선 권태기를 느꼈을 때 남자가 보이는 7가지 행동을 재연하였습니다. 만약 우리도 전에는 신앙에 열심히 하였다가 지금은 어떤지 이것과 비교하여 자가 테스트를 한 번 해 보심이 어떨까요?
첫째, 외모에 신경 쓰지 않는다. 예전에는 잘 보이려고 어울리지도 않게 무스를 바르고 키높이 깔창을 넣는 등 무한 신경을 쓰던 남친이 눈곱 낀 얼굴에 무릎이 튀어나온 추리닝을 입고 나온다면 권태기의 징조다. 혹시 우리는 성당에 나올 때 가장 좋은 옷을 골라 입고 나옵니까? 아니면 영적으로 죄가 있어 영혼이 더러워져 있음에도 고해성사도 없이 그냥 성체를 영하거나 앉아 있다가 그냥 돌아가지는 않습니까?
둘째, 스킨십이 줄어든다. 길에서 손을 잡으면 사람들이 본다고 빼고 팔짱을 끼면 땀난다고 피하거나 또 그렇게나 집착하던 뽀뽀마저 무관심해졌다면 이 역시 의심할 필요가 있다. 전에는 평일미사도 나와 성체를 영하다가 지금은 주일만 간신히 지키고 있지는 않습니까? 전에는 십자가를 보며 “예수님, 사랑해요!”라는 말을 자주 했지만 혹시 근래에 그런 대화를 해 본 적이 없지는 않습니까?
셋째, 싸워도 먼저 사과하지 않는다. 예전에는 내가 실수를 했을 때도 “오빠가 미안하다. 내가 너한테 소홀해서 일어난 일이다”라며 무조건 사과를 하던 남친이 이제는 자기가 술 먹고 전화를 꺼놓고도 “의심 하냐?, 간섭 하냐?”라고 적반하장으로 군다면 여자가 귀찮다졌다는 증거다. 전에는 모든 일에 있어서 감사했고 죄가 있으면 바로 고해를 했지만, 지금은 개인 사정이 약간만 어려워지거나 안 좋은 일이 생기면 그런 하느님은 믿지 않겠다는 식으로 하느님께 화가 나 있었던 적은 없습니까? 아니면 죄를 짓고도 ‘판공 때 보면 되지’ 하며 하느님과의 화해를 미루지는 않습니까?
넷째, 데이트 비용을 아낀다. 매일 꽃다발에 고급 레스토랑으로 데려가고 갖고 싶은 선물도 척척 사주며 지갑을 아낌없이 열던 남친이 이제 무엇이든 ‘제일 싼’ 것으로 통일한다면 권태기가 찾아왔다. 십일조는커녕 교무금 책정도 안 하고 있고, 봉헌도 아까워하며 최소한만 하려고 한다면 권태기가 확실합니다.
다섯째, 3분 이상 통하지 않는다. 하루에도 수십 번 전화하고 충전기를 꽂은 채 밤새 통화하던 남친이 용건 없다고 전화 안하고 여자가 먼저 전화해도 할 말 없다는 듯 한숨만 내쉰다면 여자에게 지루함을 느끼고 있다. 전엔 안 그랬지만, 지금은 성당에 미사 시작한 이후에 들어오고 신부님 퇴장하자마자 나가려고 맨 뒷자리에 앉는다면 100% 권태기입니다. 성당에서 미사 하는 시간 외에 그 분과의 대화시간을 갖지 않고 있어도 마찬가지입니다.
여섯째, 친구들 모임에 데려가지 않는다. 예전에는 친구들 만나는 자리에 꾸역꾸역 데리고 가고 내 친구들도 못 만나서 환장하던 남친이 이제는 “남자들만의 모임이다. 넌 모르는 친구다”라고 핑계를 댄다면 지금 여자가 불안해하는 그것이 맞다. 믿지 않는 사람들과 만났을 때 하느님이나 신앙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면 하느님과의 관계에 문제가 있는 것이 맞습니다.
마지막, 주말에 약속이 생긴다. 남친의 주말계획에 내가 빠져있다면 피할 수도 숨길 수도 없는 권태기가 확실하다. 주일미사까지 나오지 못할 정도로 바빠진다면 자신이 신앙의 권태기라는 것을 더 이상 의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물론 이것은 그 이전에 열심히 했던 신자들의 이야기입니다. 그렇지도 못했다면 단 한 번도 뜨거웠던 적은 없었던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성령님을 보내주시면 그 분께서 당신의 이야기를 듣고 우리에게 다 알려줄 것이라고 하십니다. 성령님은 우리 마음에 사랑의 불을 일으키십니다. 어쩌면 우리는 그 뜨거움을 스스로 거부하며 살아가고 있지는 않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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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진리로 인도하시는 성령>
복음: 요한 16,12-15 : 진리의 성령이 진리를 깨닫게 하여 주실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할 말이 아직도 많지만 너희가 지금은 그것을 감당하지 못한다.”(12절) 사도들은 주 그리스도께서 그들에게 가르쳐 주시려 한 것들을 그때는 깨달을 수 없었지만, 성령께서 그들에게 내리심으로써 삼위일체에 대한 이해와 믿음을 밝혀 주셔서 깨닫게 되었다. 말씀이신 주님께서는 제자들이 지금은 감당하지 못하지만 나중에는 감당할 수 있게 되고 분명히 밝혀지게 된다고 말씀하신다. 이것은 바로 성령의 역사이시다. 성령 안에서 제자들은 모든 말씀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분 곧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너희를 모든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13ㄱ절) 성령께서는 우리에게 참다운 진리가 무엇인지, 참다운 삶이 무엇인지, 참다운 삶을 살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조금씩 깨우쳐 주실 것이라는 것이다. 성령 안에서, 즉 사랑 안에서 더 충만한 지식으로 나아가게 된다. 이렇게 우리는 성령께서 우리에게 부어주시는 사랑 안에서 살 때, 성령께서 우리에게 모든 진리를 가르쳐 주실 것이다. 우리가 배운 것들을 마음으로 깨닫는 능력을 얻게 될 것이다. 즉 우리 모두가 하느님의 가르침을 받게 될 것이다.
“그분께서는 스스로 이야기하지 않으시고”(13ㄴ절)이 말씀은 성령께서는 스스로 오시지 않고 아버지와 아들에게서 오시는 분이시다. 성령께서 계시다는 것과 그분이 말씀하시는 것들은 아버지와 아들에게서 나오는 것이다. 아들은 성령을 통하여 영감도 주고 말도 한다.성령께서는 진리의 영이시기 때문이다. 성령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아들의 말씀이며, 아드님이 주시는 것은 아버지의 것이다. 아들도 성령께서도 스스로 말하지 않으신다.
“들으시는 것만 이야기 하시며,”(13ㄷ절) 성령은 아버지에게서 아들을 통하여 나오시는 분이며, 하느님 아버지와 본질이 같으신 분이시다. 그러므로 성령께서 지니신 지식은 아버지의 지식이다. 그러므로 성령께서는 아버지에게서 들으시며, 그것이 똑같은 지식이다. 그러기에 그분의 가르침은 아들의 가르침이며, 성령께서는 아들이 가르친 것을 말씀하실 것이다. 그 말씀들은 아들의 말이고 그분의 가르침을 확인해 주는 말씀이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뜻은 하나이기 때문이다.
“또 앞으로 올 일들을 너희에게 알려 주실 것이다.”(13ㄹ절) 많은 하느님의 자녀들이 성령의 은사를 받아, 성령의 은총으로 충만하여 하느님의 일을 하는 사람들은 땅에 살지만, 하늘나라의 삶을 이 땅에 미리 앞당겨 살고 있다. 성령께서는 우리에게 당신의 숨을 불어넣어 주시는 은사를 통하여 하늘나라의 기쁨에 대한 더 깊은 깨달음에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 즉 하늘에서 약속된 것에 대한 소망을 우리 안에 불붙이시고 ‘앞으로 올 일들을’ 알게 해 주신다. 우리가 성령 안에서, 즉 하느님 안에 살 때, 성령께서는 “앞으로 올 일들을 너희에게 알려 주실 것이다.”라고 하셨다.
“그분께서 나를 영광스럽게 하실 것이다. 나에게서 받아 너희에게 알려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14절) 성령께서는 우리 마음을 충만케 하시어 아들이 아버지와 동등한 분임을 알아보게 하심으로써 아들을 분명하게 드러내도록 하실 것이다. 성령의 은사로 충만해지면 담대하게 그리스도를 선포하고 온 세상에 그리스도의 이름을 전하게 될 것이다. 성령의 역사와 가르침은 주님의 영광을 드높이는 것이다. 성령께서는 당신에게서 받아 우리에게 알려 주실 것이라고 하셨다. 이 말씀은 성령께서 당신에게서 나오신다는 뜻이다. 주님께서는 당신이 아버지에게서 받았듯이 성령께서 당신에게서 받아 우리에게 알려 주실 것이다.
“아버지께서 가지고 계신 것은 모두 나의 것이다.”(15절) 아버지께서 가지고 계신 것은 모두 아들의 것이기 때문에 성령께서는 이것들을 아들에게서 받지만, 또한 아버지에게서 바든 것이기도 하다. 성령 안에서 아버지와 아들은 일치하신다. 이 일치 안에서는 변화가 없다. 누구에게서 받느냐는 중요하지 않다. 아버지께서 주시는 것은 아들이 주시는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자녀인 우리에게 아버지이시지만, 당신은 아들로서 아버지에게서 나오신 분임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성령께서는 우리를 평범한 인간적 삶에서 벗어나 우리로 하여금 하느님의 생명에로 건너가게 하시고 그분의 생명에 우리를 참여시켜 주시는 것이다.성령의 인도하심에 우리를 맡겨드리고 따를 수 있는 지혜와 용기를 청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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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묵상
오늘 제1독서를 보면 바오로 사도는 아테네의 아레오파고스에서 연설합니다. 당시 아테네는 교육 도시로서 명성이 매우 높았으며, 시민들은 새로운 학문에 대한 갈망과 함께 종교심도 깊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사실 우상 숭배에 물들어 있었기에 온갖 것에 이름을 붙여 신격화하여 제단을 만들어 섬겼던 것입니다. 더욱이 아테네 시민들은 아직 자신들이 모르는 신이 분명 있으리라고 생각한 나머지 ‘알지 못하는 신’까지 섬긴 것입니다.
오늘 주목할 점은 바오로 사도의 태도입니다. 자존심이 강한 아테네 사람들을 대하는 바오로 사도의 지혜와 포용력이 돋보이기 때문입니다. 아테네 시민들이 세운 ‘알지 못하는 신’을 위한 제단을 언급하면서, 바로 그 알지 못하는 신이 ‘하느님’이심을 자연스럽게 말한 것이지요. 이 방법은 참으로 중요하다 하겠습니다.
그들의 무지와 우상 숭배를 무조건 탓하기보다, 그들 안에 심어진 복음의 씨앗을 발견하여, 그 싹을 키워 주는 이런 방법도 바람직한 선교의 길이 아니겠습니까? 우리도 복음을 전하면서, 상대방이 자연스럽게 주님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그의 환경과 입장을 고려해야 하겠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성령에 관하여 말씀하십니다. “그분 곧 진리의 영께서 오시면 너희를 모든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 성령께서는 참되고 변하지 않는 진리가 무엇인지 깨닫게 해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의 입과 손이 되어 말씀을 널리 전하도록 성령께서 오시기를 간절히 청해야 하겠습니다.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사무처장/서울대교구 김준철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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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밤송이 김기현 요한 신부님]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퀴리 부인이 남편 피에르 퀴리와 함께 라듐 생산 법을 발견했을 때 그녀는 특허를 낼 것인지 하는 문제로 고민했습니다.
당시 천연 라듐 1그램 값이 무려 15만 달러였습니다. 그녀가 발견한 라듐 생산 법에 대한 특허를 낸다면 그녀는 떼돈을 벌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특허를 내지 않고 모든 사람이 라듐을 공유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그래서 논문을 만방에 공개했습니다. 그녀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믿는 그리스도인입니다. 이 라듐의 원래 소유자는 하느님이신데, 우리가 먼저 발견했을 뿐입니다. 하느님의 뜻은 이를 가지고 모든 인류를 위해 사용하는 것이고, 또 이를 통해 하느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재물을 포기하고 하느님의 영광과 인간 사랑을 택한 퀴리 부인을 가리켜 아인슈타인은 대략 다음과 같이 칭송했습니다.
“저명 인사 가운데 명성 때문에 부패하지 않은 유일한 인물이 있다면 피에르 퀴리와 마리 퀴리다.”】
퀴리 부인과 그 남편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그들의 모습이 성령님이 하시는 활동을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성령님에 대해 이런 이야기를 하십니다.
그분께서 나를 영광스럽게 하실 것이다. 나에게서 받아 너희에게 알려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말씀을 보면, 성령님은 예수님에게서 받은 것을 자기 것인 양 자랑하고 과시하는 분이 아님을 느낄 수 있습니다.
성령님은 예수님에게서 받은 그대로 전달하는 분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령님 자신이 드러나기 보다는 예수님이 영광을 받으실 수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한 모습은 예수님에게도 있었습니다. 예수님도 자신의 말과 행동으로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고 영광을 받으시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말과 행동은 모두 하느님에게서 듣고 본 것이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예수님도 성령님의 활동과 마찬가지로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것을 하느님께 돌려드리고 하느님께서 영광을 받으실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결국 모든 영광은 하느님께 돌아가야 한다는 결론이 나오네요. 우리가 살아가면서 내 것이라고 여기는 것들의 실제 주인은 모두 하느님이시겠죠. 이러한 생각을 가지고 있다면 헌금을 내는 것이나 하느님께 받은 은사로 봉사하는 것이 더 쉬워지리라 생각합니다.
헌금을 할 때 내 돈의 일부를 떼어서 하느님께 드린다는 생각이 아니라,하느님께 모두 돌려들려야 할 것 중의 일부를 돌려드린다는 생각에 감사할 수 있겠죠.
또 내가 받은 은사와 능력들, 그리고 시간들이 모두 하느님이 주신 것인데, 그것들로 봉사한다고 해서 하느님께 정말 대단한 일을 하고 있다는 교만함이 어느 정도 줄어들 수 있겠죠.
오늘 하루, 하느님께 받은 것을 하느님께 돌려드리고 하느님께서 영광을 받으시도록 내가 가진 욕심 한 가지를 내려 놓을 수 있으셨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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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성령께서 하시는 일>
“내가 너희에게 할 말이 아직도 많지만 너희가 지금은 그것을 감당하지 못한다. 그러나 그분 곧 진리의 영께서 오시면 너희를 모든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 그분께서는 스스로 이야기하지 않으시고 들으시는 것만 이야기하시며, 또 앞으로 올 일들을 너희에게 알려 주실 것이다."(요한 16,12-13)
이 말씀에서, “내가 너희에게 할 말이 아직도 많지만”이라는 말씀은, “제자들을 위해서 좀 더 자세하게 설명을 해주고 싶지만”이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할 말’은 새로운 가르침이 아니라, 그 동안 하신 말씀들과 가르침들에 대한 보충 설명으로 해석됩니다.) 우리 교회는 예수님께서 ‘공적 계시’를 모두 마무리하셨다고 믿고 있고, 예수님의 계명들과 가르침들은 모두 복음서에 기록되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 승천 후에 더 이상 새로운 계시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해서, 더 이상 새로운 복음서를 기록할 필요도 없고, 우리가 가지고 있는 복음서 외에 다른 복음서는 존재하지도 않고, 지금의 복음서에 기록되지 않은 다른 가르침들이나 계명들이 더 있는 것은 아니라고 믿는다는 것입니다.
이 말에 대해서, 요한복음 20장 30절과 21장 25절을 근거로 해서, “복음서가 모든 것을 완벽하게 기록한 것은 아니다.”라고 반박할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요한복음 20장 30절과 21장 25절은 이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책에 기록되지 않은 다른 많은 표징도 제자들 앞에서 일으키셨다."(요한 20,30)
“예수님께서 하신 일은 이 밖에도 많이 있다. 그래서 그것들을 낱낱이 기록하면, 온 세상이라도 그렇게 기록된 책들을 다 담아 내지 못하리라고 나는 생각한다."(요한 21,25)
물론 우리 교회는 성경 외에도 방대한 양의 ‘성전’(전승)이 있음을 인정합니다. 그 전승들이 우리의 신앙생활을 더욱 풍요롭게 하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계시’는 복음서로 완결되었다는 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너희가 지금은 그것을 감당하지 못한다.”라는 말씀은, 제자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도 못하고, 받아들이는 것도 힘들어 한다는 뜻입니다. 제자들이 힘들어 한 ‘말씀들’은, 예수님께서 당신의 수난을 예고하신 말씀들, 그리고 제자들이 겪게 될 박해를 예고하시는 말씀들입니다.
“......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셨다. ‘너희는 이 말을 귀담아들어라.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질 것이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였다. 그 뜻이 감추어져 있어서 이해하지 못하였던 것이다. 그들은 그 말씀에 관하여 묻는 것도 두려워하였다."(루카 9,43-45)
제자들은 부활 전까지는 예수님 수난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나타나셔서 설명해 주시자 비로소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마음을 여시어 성경을 깨닫게 해 주셨다."(루카 24,45) 제자들은 이해만 한 것이 아니라, 성령을 받은 뒤에는 적극적으로 선포하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서 ‘진리’는 구원과 생명에 관한 예수님의 가르침들을 뜻하는데, 넓은 뜻으로는 그 가르침들을 우리에게 주신 예수님을 뜻하기도 합니다. ‘진리의 영’은 성령입니다. “너희를 모든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라는 말씀은, 성령께서 예수님의 가르침들과 말씀들을 온전히 알아들을 수 있도록 제자들을 도와주실 것이라는 뜻인데, 성령께서는 단순히 알아듣고 이해하는 것만을 도와주시는 것이 아니라, 그 가르침들과 말씀들을 세상 사람들에게 선포하는 일까지 도와주십니다. 예수님 수난 후에 사람들이 무서워서 숨어있기만 했던 사도들이(요한 20,19), 오순절에 밖으로 나가서 사람들에게 복음을 선포할 수 있었던 것은(사도 2장), 사도들에게 내려오신 성령께서 새로운 힘과 용기를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성령을 받으면 자동적으로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사도들이 자유의지 없이 성령의 로봇이 된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힘을 내려고 노력하는 사람이 성령의 힘을 받게 되고, 용기를 내려고 노력하는 사람이 성령으로부터 용기를 받게 됩니다. 예수님의 가르침들과 말씀들을 알아들으려고 노력하고, 또 실천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이 성령의 도움을 받아서 더 잘 알아듣게 되고, 더 잘 실천하게 됩니다. 아무것도 안 하고 가만히 있으면 아무것도 받지 못합니다.)
“그분께서는 스스로 이야기하지 않으시고 들으시는 것만 이야기하시며”라는 말씀은, 성령께서 예수님의 가르침과 다른 가르침을 주시는 것은 아니고, 또 예수님께서 주신 적 없는 새로운 가르침을 주시는 것도 아니라는 뜻입니다. 성령께서는 우리를 예수님의 가르침 속으로 더 깊이 인도해 주십니다. “앞으로 올 일들을 너희에게 알려 주실 것이다.” 라는 말씀은, ‘예언의 은사’를 주실 것이라는 뜻인데, 이 말씀을 하신 시점을 기준으로 해서 생각하고 해석하면, 예수님의 수난, 죽음, 부활에 관해서 성령께서 가르쳐 주신다는 뜻이 되고, 이 말씀을 읽고 있는 우리 입장에서 생각하고 해석하면, 종말, 재림, 심판 등에 관해서 가르쳐 주신다는 뜻이 됩니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무엇을 향해서 나아가야 하는지 등을 가르쳐 주신다는 뜻일 수도 있습니다.)
“그분께서 나를 영광스럽게 하실 것이다. 나에게서 받아 너희에게 알려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아버지께서 가지고 계신 것은 모두 나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성령께서 나에게서 받아 너희에게 알려 주실 것이라고 내가 말하였다."(요한 16,14-15)
이 말씀에는 ‘삼위일체의 신비’가 암시되어 있습니다. 아버지의 것은 예수님의 것이고, 성령의 것입니다. 우리 안에서 일하시는 성령의 활동은 예수님의 활동이기도 하고, 아버지 하느님의 활동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승천하셔서 더 이상 우리 눈에 보이지 않게 되셨더라도 성령을 통해서 언제나 항상 우리 가운데에 살아 계신다고 믿을 수 있습니다. “그분께서 나를 영광스럽게 하실 것이다.”라는 말씀은, 성령께서 사람들을 인도해 주시고 도와주심으로써 사람들이 예수님을 더 잘, 더 깊이 믿게 되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성령의 활동은 예수님을 영광스럽게 하시는 일이 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영광은 예수님을 믿는 신앙인들의 영광이기도 합니다. 신앙생활은 그 영광에 동참하기 위해서 노력하는 생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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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도정호 바오로 신부님]
“내가 너희에게 할 말은 많지만 너희가 지금은 그것을 감당하지 못한다.”
이 말씀을 들었을 때 어떤 느낌이 드셨습니까? 너희에게 할 말이 참 많다. 이 말씀은 어디를 떠나시려는 인상이 드는 말씀입니다.
지금 우리가 부활기간의 마지막 시기를 보내고 있지만 사실 이번 주간 내내 우리에게 들려지는 복음은 예수님께서 수난과 죽음을 앞두고 제자들과 마지막 시간을 함께 가지면서 이야기를 나누신 부분입니다.
오늘 복음 앞부분에는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고, 어떤 일이 있어도 당신을 떠나지 말라는 당부를 하는 부분이 나옵니다. 그렇게 본다면 ‘내가 너희에게 할 말은 많지만,’ 이라는 말씀 속에 어떤 심정이 담겨져 있는지 짐작이 가실 겁니다.
오늘 저는 복음을 묵상하면서 마지막이 다가왔다고 생각하며 제자들과 시간을 갖고 계신 예수님의 마음과 아직 예수님의 마음을 다 헤아리고 있지 못하는 제자들 사이에 어떤 간격이 느껴집니다.
그리고 아직 제자들은 예수님의 수난의 의미와 고통의 의미를 알아듣고 있는 상태가 아닙니다. 스승 예수께서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확신도 부족한 상태입니다. 예수님께서 돌아가시고 난 다음에 그분이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투신하고 증언하기에도 용기가 부족한 상태이고, 이렇게 제자들의 상황을 주님께서 알고 계시기에 너희가 당신의 말씀을 감당하지 못할 거라는 말씀을 하신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오늘 복음이 예수님의 수난과 부활의 의미를 전적으로 알아듣지 못하고 있는 우리들로서는 오늘 복음에 나오는 제자들의 내면상태나 영성이 조금은 위로가 된다고 생각되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제대로 알아듣기 전의 제자들의 모습이 오늘 복음 안에서 나타나고 있고, 그 모습이 오늘날의 우리의 신앙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제자들도 처음에는 그랬었다는 점, 그런 면에서 주님께서도 우리에게 이런 말씀을 하실 것 같습니다.
“너희에게 할 말이 참 많지만, 너희가 지금은 그것을 감당하지 못한다.”
나의 신앙의 현주소가 어디쯤에 와 있는지? 신앙인으로서의 내 삶이 어떤 모습인지 우리 자신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오늘 주님의 말씀은 참 위로가 됩니다.
항상 부족하고 성숙해야 하고, 덕을 쌓아야 할 우리라는 것을 아시기 때문에, 또 하루하루 순간순간을 살아가면서 하느님의 사랑과 생명의 흔적이 남아 있는 이 세상에서 알아가고 배워야 할 것도 많은 우리들이기에 억지로 알아듣도록 서두르지도 않겠다는 우리 주님이시기 때문에 많은 위로가 된다는 겁니다.
모자라고 부족한 우리의 신앙의 높이에 당신을 낮추어 주시는 하느님의 배려에 감사를 드립니다. 기다리고 기다리면서 곁에 있어 주시겠다고 하시는 우리주님, 억지로 주입시키려고도 하지 않으시는 우리 주님을 오늘 우리는 만났습니다.
성령의 이끄심에 우리 스스로 맡길 수 있을 때까지 우리의 선택과 결심을 기다려주시겠다고 주님께서 말씀을 건네고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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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바오로수도회 故 유광수 야고보 신부님]
<'진리 안으로'>
납골당을 다녀왔다. 납골당은 죽은 이들이 거처하고 있는 곳, 즉 이 세상에서의 삶을 마치고 한 뼘밖에 되지 않는 작은 공간 속에 갇혀있는 죽은 자들의 집이다. 그 작은 공간 속에 갇히기 위해 그토록 살아있는 동안 발버둥쳤는지 참으로 인생 허무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그곳에 가보니까 "고인에게 쓰는 편지"라는 것이 있었다. 무슨 글을 썼는지 일일이 읽어보았다. 한결같이 " 보고 싶다. 미안하다. 살아있을 때 잘 해주었을 걸, 천국에서 행복하게 잘 살기를 바란다."라는 내용이었다.
그 중에 어느 남자가 자기 부인에게 보내는 다음과 같은 글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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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고픈 당신께,
여보, 당신은 지금 어떻게 지내고 있소? 난 당신이 에덴동산으로 갔을 줄 믿고 살고 있오. 그것만이 지금 나에게 유일한 위로이니까.
주님 곁에 있는 당신이 너무 보고 싶어 매일 매일 꿈속에서나마 당신을 볼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하지만 여전히 그리운 당신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구료. 벌써 나를 잊지나 않았는지....
여보 모든 것이 정리되고 남한테 줄 빚을 다 갚으면 나를 데리러 와 줘. 정말 당신 곁으로 가고 싶소. 날마다 당신을 위해 기도할께 어서 빨리 우리가 빚진 것을 빨리 갚게 해달라고 기도해줘. 여보, 기다려. 빚 다 갚을 때까지 시간이 좀 걸릴는지 모르지만 우리 하늘 나라에서 다시 만날 때까지 기다리고 있구료. 안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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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은 이런 비극을 원하지 않으신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느님, 우리를 창조하신 하느님,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만큼 끔찍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느님은 우리들의 눈에서 눈물을 닦아 주기 위해 이 세상에 구세주로 오셨다. 그리고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당신의 생명을 바치셨다.
그리고 우리의 구원 사업을 완성시키셨다. 하느님 아버지께서 당신의 사랑하는 외아들 예수님을 이 세상에 보내신 목적은 단 하나, 즉 우리 모두를 살리는 일이다. 그것이외에는 다른 목적이 없다.
그럼 우리는 어디에서 이런 하느님을 만날 수 있는가? 오늘 하느님은 어떤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시고 어떤 방법으로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는가? 어떻게 하면 우리는 구원의 은혜를 받을 수 있는가?
"진리의 영께서 오시면 너희를 모든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 진리의 영이신 하느님은 우리 모두를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시고자 하신다. 우리를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기 위해 하느님이신 진리의 영께서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는 것이다.
무엇을 통해서 우리를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시는가? "그분께서는 스스로 이야기하지 않으시고 들으시는 것만 이야기하시며, 또 앞으로 올 일들을 너희에게 알려 주실 것이다."라고 하셨다.
즉 진리의 영이신 하느님께서는 예수님께서 이미 말씀하셨던 것을 우리들이 알아듣도록 이끌어 주신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진리의 영이신 하느님을 만나고 싶으면 진리이신 말씀으로 가야한다.
우리가 성령의 도우심으로 말씀을 깨닫게 되면 우리 안에 변화가 일어날 것이다. 그 동안 우리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그리고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깨닫게 될 것이다.
우리가 복음을 읽고 묵상하면서 작은 깨달음이라도 있었다면 그것은 분명히 진리의 영께서 우리 안에서 역사하신 것이며 우리를 진리에로 이끄시는 하느님의 인도하심이다.
매일 복음을 묵상한다는 것은 우리를 진리에로 이끌어 주시는 하느님을 만난다는 것이며 그 하느님을 통해서 우리의 삶이 진리를 위해 몸바치는 사람이 되어가는 것이다.
복음을 읽고 묵상하면서 어떤 기적이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가? 우선 자신의 잘못을 보게 된다. 무엇을 잘못하고 있는지, 왜 내가 이런 어려움을 겪고 있는지 그 원인을 발견하게 된다.
내가 어떤 상태에 있는지 나의 모습을 보게 된다. 그리고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야 하는지 그 해답을 스스로 찾게 된다. 해답을 찾게되니까 근심걱정이 사라지고 용기가 나고 희망을 갖게 된다.
그것은 곧 그 동안 나를 얽어 메었던 모든 죄로부터의 해방이다. 마치 밭에 묻힌 보물을 발견한 사람처럼 마음속에서부터 커다란 기쁨이 용솟움치고 삶의 의미를 되찾게 된다. 그리고 모든 것이 새롭게 보이고, 들리고, 느껴지게 된다. 그야말로 새 하늘 새 땅이 매일 매일 펼쳐지는 삶이다.
그래서 하느님께 감사드리게 되고 "숨쉬는 모든 것들아 주님을 찬미하여라."(시편 150)고 했던 찬미가 자연스럽게 우러나올 것이다.
우리는 하느님을 만나고 싶어하고 하느님의 은총을 받고 싶어한다. 그러나 어디에서 하느님을 만나야하고 어떤 방법을 통해서 하느님의 은총을 받을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아는 것 같으면서도 잘 알지 못하는 것 같다.
분명히 진리의 영이신 하느님은 오늘도 우리에게 말씀을 통하여 오시고 말씀을 통하여 진리를 깨닫도록 우리를 이끌어 주시며 우리 자신이 진리를 깨닫게 됨으로써 새 하늘 새 땅을 볼 수 있도록 역사 하신다.
이 진리를 깨닫는 사람은 정말로 행복한 사람이다. 들을 귀가 있는 사람이다.
나는 매주 자매들과 함께 "다가오시는 예수"를 읽고 묵상한 것을 나누는 묵상나눔을 하면서 그네들 안에서 역사하시는 예수님을 눈으로 보고 체험한다.
자매들이 복음의 빛으로 자신들의 안을 들어다 보면서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그리고 예수님이 어떤 방법으로 자기들 안에서 역사하시는지를 깨닫게 되니까 사람들이 변화되는 기적이 일어난다. 어둠 속에 빛이 들어가니까 얼굴이 환해지고 해방되는 것을 체험한다.
참으로 오늘도 우리를 진리에로 이끌어 주시는 진리의 영이신 하느님의 역사는 말씀을 통하여 일어나고 있다.
"아버지 이 사람들이 진리를 위하여 몸 바치는 사람들이 되게 해 주십시오."(요한 17,17)라고 기도하셨다. 그렇다 복음 묵상을 한다는 것은 몸을 바치는 일이다. 목숨을 내놓고 하는 일이다. 적당히 하는 일이 아니다. 시간이 있으면 하는 일이 아니다. 목숨을 바치는 일이다.
목숨을 바쳐 복음을 묵상해 보라. 그러면 다가오시는 예수님을 만나게 될 것이다. 모든 진리 안으로 으끌어 주시는 진리의 영을 체험할 수 할 수 있을 것이다. 진리의 영이 우리를 진리 안으로 이끌어 가시는 진리의 영을 만나는 은혜로운 하루가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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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박상대 마르코 신부님]
<진리이신 성령의 임무>
1차 고별사에 이어 2차 고별사가 행해지는 가운데 고별의 밤은 깊어만 간다. 예수님은 아직도 하실 말씀이 많으시다. 그렇게 길지 않은 3년간의 공생활, 예수께서는 제자들과 동고동락(同苦同樂)하시면서 그들에게 많은 가르침을 주셨고 놀라운 업적을 보이셨다.
이 모든 가르침과 행적을 요약하는 고별의 밤이 지금까지 그 어느 밤보다 길어지면서 제자들의 집중력도 점점 떨어져 간다.
이미 제자 1명은 자리를 떠나 가야할 길로 갔고, 나머지 11명은 이 밤이 스승과 마지막 밤이 될 줄을 짐작이나 했겠는가? 제자들의 집중력은 떨어졌지만 그 중에 누군가는 고별의 유언들을 머릿속에 담았다. 그것을 성령의 감도로 후일 이렇게 기록하였던 것이다.
예수께서는 당신의 말씀과 업적에 대한 제자들의 이해와 학습능력을 감안하여(12절) 또 다시 '진리이신 성령'을 계시하신다. 이미 이 밤의 고별사에서 두 번씩이나 '진리이신 성령'에 대하여 언급되었다.(14,17; 15,26)
어제 복음에서도 예수께서는 '협조자'이신 성령계시를 통하여 성령의 실제적 차원을 암시하셨다.
오늘은 예수께서 '진리'이신 성령계시를 통하여 제자들을 가르치신다. 이는 성령 하느님에 대한 학습적 차원을 의미한다. 그렇다고 '진리의 성령'께서 자기 고유의 무엇을 제자들에게 교수(敎授)하시는 것은 아니다.
'진리의 성령'은 제자들을 '진리'에로 이끌어 깨닫게 해 주는 역할을 담당하신다. 여기서 진리는 무엇인가? 진리는 바로 길이요, 생명이신 예수님 당신이시다.(14,6)
그러므로 '진리의 성령'은 제자들을 당신께로 이끌어 주실 자신의 성령이라고 말할 수 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말씀인즉, 바로 하느님의 진리이시다. 그러나 제자들은 아직까지 진리를 온전히 파악하는데 여러모로 부족하다.
온전한 진리 파악이란 예수님의 인격 안에 나타난 하느님의 계시를 온전히 깨닫는 것이다. '진리의 성령'은 계시된 내용에 대한 올바른 해석자이시며, 이는 과거, 현재, 미래를 포함한 시간과 역사의 전부를 주관하신다.(13절)
진리의 성령은 제자들에 대한 학습을 통하여 예수님을 영광스럽게 하실 것이다.(14절) 제자들이 진리의 성령을 통하여 열심히 학습한다고 해서 예수님을 영광스럽게 하는 데 일조(一助)하는 것은 아니다.
예수님을 영광스럽게 하는 일은 원칙적으로 아버지의 영역에 속한다. 그러나 성령께서 계시된 진리(성자)를 위해 지속적으로 활동하심으로써 아버지께서 아들을 영광스럽게 하는 일에 기여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성령의 활동이 지니는 의미와 가치이다.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세상에 대한 자기계시를 위해 아들에게 모든 것을 맡겨주셨으므로(요한 3,35), "아버지께서 가지고 계신 것은 모두 다 아들의 것"(15절)이며, "아들의 것은 다 아버지의 것"이다."(요한 17,10)
이로써 우리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 하느님의 관계와 삼위일체 하느님의 내적 생명의 구조를 조금이나마 깨닫게 된다. 물론 우리의 깨달음은 세례와 견진성사를 통하여 우리를 자신을 성전(聖殿)으로 삼으신 '진리의 성령' 덕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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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성령께서 함께 하시기에>
요한 16,12-15 (성령께서 하시는 일)
“내가 너희에게 할 말이 아직도 많지만 너희가 지금은 그것을 감당하지 못한다. 그러나 그분 곧 진리의 영께서 오시면 너희를 모든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 그분께서는 스스로 이야기하지 않으시고 들으시는 것만 이야기하시며, 또 앞으로 올 일들을 너희에게 알려 주실 것이다. 그분께서 나를 영광스럽게 하실 것이다. 나에게서 받아 너희에게 알려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아버지께서 가지고 계신 것은 모두 나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성령께서 나에게서 받아 너희에게 알려 주실 것이라고 내가 말하였다.”
<성령께서 함께 하시기에>
사랑하는 이와의 헤어짐은
그 자체로 슬픔입니다.
사랑하는 이가 떠나가면서
할 말을 다하지 못함은
또 하나의 슬픔입니다.
떠나는 이가 할 말을 다하지 못함이
남은 이에 대한 사랑 때문이라면
남은 이의 슬픔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던 제자들을
떠나시려고 합니다.
하고 싶은 말을 삼키면서
제자들을 떠나시려고 합니다.
남아야 하는 제자들의 슬픔과
떠나야 하는 예수님의 슬픔이
너무나도 서럽게 다가옵니다.
예수님께서 떠나시면서
사랑하시던 제자들에게
성령을 약속하십니다.
당신 떠난 후 빈자리를
든든하게 메워주실
성령을 약속하십니다.
떠나신 당신을 생생하게 드러내실
성령을 약속하십니다.
당신의 진리를 밝혀주실
성령을 약속하십니다.
성령께서는
떠나셔야만 하시는 예수님을
아픈 마음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는
남아야만 하는 이들에게
기쁨과 희망의 선물입니다.
예수님과 떨어져 가슴 졸이는 이들에게
예수님을 뵙고자 갈망하는 이들에게
예수님의 진리를 추구하는 이들에게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 나라를 살려는 이들에게
성령께서는 가장 든든한 동반자입니다.
성령께서 함께 하시기에
언제나 예수님과 함께 할 수 있습니다.
성령께서 함께 하시기에
예수님과 하나이신
아버지를 만날 수 있습니다.
성령께서 함께 하시기에
지치지 않는 열정으로
주님의 길을 걸을 수 있습니다.
언제 어디서나 함께 하시는
성령의 강렬한 이끄심에 힘입어
세상의 그 무엇으로도 가릴 수 없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을
우리는 오늘도 힘차게 따라 나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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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고흥 도화성당 조창현 클레멘스 신부님]
+ 조 두레박 신부의 영적일기
<다시 회복시켜주시기를...>
가끔 본당 어르신 분들은 죽으실 때도 안됐는데도, 죽을 것처럼 삽니다.
“아이고,(나는 가네)...죽겠네(죽으러 가네).."
그러니 무슨 힘이 생기고 기쁠 일이 있겠습니까? 이렇게 말씀하셔야지요.
“아이고(나는 가네)...살겠네(살러 가네).."
그러면 힘도 생기고 기쁨도 충만해집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생기 있고 기쁘게 살도록 하기 위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할 말이 아직도 많지만 너희가 지금은 그것을 감당하지 못한다. 그러나 그분 진리의 영께서 오시면 너희를 모든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는 것입니다.
저는 “진리의 영이 알려 주시는 그 진리가 무엇일까?”라는 말씀으로 기도하고 또 기도를 했습니다. 그러다가 본당 형제님들과 식사를 하다가 한 형제님이 그런 말씀을 하십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아하, 그러기에 아마도 주 예수님께서 마음속으로 품으셨고, 그리고 우리에게 알려주시고자 했던 그 진리는 바로 이 말씀이었습니다.
“나는 십자가로 너를 사랑한다.”
그것도 당신의 삶으로, 당신의 몸과 피를 흘리심으로 보여주셨음을...
15절에 보면...
“아버지께서 가지고 계신 것은 모두 나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성령께서 나에게서 받아 너희에게 알려주실 것이라고 말하였다.”
그러기에 진리의 영께서 우리에게 알려주신 예수님의 말씀과 삶은 “십자가의 영광으로 우리를 영원한 생명으로 구원하여 살리시는 하느님의 사랑” 이었습니다.
사랑하는 고운님들!
요한복음 4장 14절에 보면... 에수님께서 사마리아여인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사람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내가 주는 물은 그 사람 안에서 물이 솟는 샘이 되어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할 것이다.”
그래서 요셉 성인과 성모님께서 성전에서 잃어버린 아들 주 예수님을 왜, 그렇게 애타게 찾으셨는지를 자명하게 알 수 있음을 묵상해 봅니다.
루카복음 2장 48절에 보면...
“얘야, 우리에게 왜 이렇게 하였느냐? 네 아버지와 내가 너를 애타가 찾았단다.”
여기서 “애타게 찾았다.”라는 말은 ‘번뇌하다.’ ‘애통하다.’라는 의미입니다. 그만큼 괴로워서 엉엉 울면서 주 예수님을 찾았다는 것입니다. 주 예수님을 잃고 보니 그들에게 주 예수님이 얼마나 소중했는지를 실감하게 되었고, 깊은 슬픔에 빠지면서도 찾을 때까지 헤매고 다녔습니다.
이 말씀이 느껴지십니까? 깨달아지십니까? 우리가 말씀을 느끼고 깨달아질 때 필사적으로 간청해야 할 때입니다. 간절하게 울부짖어야 합니다. 눈물을 흘리며 ‘성령의 도우심으로 살아갈 수 있다.’ 고 생각되어 질 때까지 기도해야 합니다.
시편 119편 103-105절에 보면...
“당신 말씀이 제 혀에 얼마나 감미롭습니까? 그 말씀 제 입네 끌보다도 답니다. 당신의 규정으로 제가 현명하게 되어 거짓된 모든 길을 제가 미워합니다. 당신 말씀은 제 발에 등불, 저의 길에 빛입니다.”
영적일기를 마무리 하면서...
주 예수님이시여, 저와 고운님들에게 성령의 은총을 쏟다 부으시고, 또한 메마른 우리 가슴에 생명의 말씀을 주시어 뜨거워짐으로 다시 회복시켜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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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성소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어른들에게 ‘밀가루 신자’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힘들고 어려운 시절에 교회는 구호품을 나누어 주었습니다. 사람들은 구호품을 받기 위해서 교회를 찾았고 세례를 받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신자가 된 분들을 밀가루 신자라고 불렀다고 합니다.밀가루 신자는 아니지만 교회는 사회복지 시설을 많이 운영하고 있습니다. 정부에서도 사회복지 시설의 운영을 교회에 위탁하기도 합니다. 교회가 운영하는 사회복지 시설에서 교리를 받고 세례를 받는 분들이 있습니다.
며칠 전 한 자매님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성당을 다니고 싶어서 교리를 물어보면 친절하게 알려주는 분들이 없었다고 합니다. 그 자매님은 복음화 학교가 있다는 것을 알았고 전화를 해서 수강 신청을 하였습니다. 복음화 학교를 다니면서 자매님은 복음을 전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았다고 합니다. 매일 기도하면서 하느님께 지혜를 청하면서 이웃들에게 복음을 전했다고 합니다. 작년에는 10명을 신앙으로 인도했고, 냉담하는 분들이 다시금 신앙생활을 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었다고 합니다. 소극적이었던 자매님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용기와 힘을 준 것은 복음화 학교의 가르침이었다고 합니다.
명동 거리에 늘 어김없이 함께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예수천국, 불신지옥’이라는 현수막을 들고 노래를 부르는 사람들입니다. 끊임없이 예수를 믿으라고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때로 그분들의 용기가 부럽기도 하지만 그 방법은 조금 아닌 것 같습니다. 핸드폰은 삼성, 엘지, 애플에서 만든 것들이 있습니다. 자신들이 만든 핸드폰의 장점을 이야기하면 족하지,다른 회사의 핸드폰이 나쁘다고 말하는 것은 소비자들에게 좋은 느낌을 줄 수 없습니다. 하물며 다른 회사의 핸드폰을 선택하면 지옥에 간다고 말하면 그것은 공갈과 협박의 수준입니다.
시골의 공소에서 미사를 드렸습니다. 저와 함께 간 신자분들과 공소의 신자들이 함께 했습니다. 미사를 드리려고 하는데 전주교구의 신부님과 수녀님들께서도 오셨습니다. 우리는 모두 서로 알지 못하지만 같은 신앙을 가졌기 때문에 아무런 거리낌 없이 함께 미사를 드릴 수 있었습니다. 같은 신앙을 가졌기 때문에 금세 가족처럼 친하게 지낼 수 있었습니다. 세상은 참 넓고도 좁은 것이, 전주교구의 신부님과 수녀님들은 또 제가 아는 분들과도 친분이 있으셨습니다. 세상은 다섯 사람만 통하면 모든 사람을 알 수 있을 거라는 이야기를 실감했습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아테네 시민 여러분, 내가 보기에 여러분은 모든 면에서 대단한 종교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내가 돌아다니며 여러분의 예배소들을 살펴보다가,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새겨진 제단도 보았습니다. 여러분이 알지도 못하고 숭배하는 그 대상을 내가 여러분에게 선포하려고 합니다.” 하느님을 알지 못하지만 하느님께서는 이미 우리들 모두에게 하느님의 사랑을 심어 주셨다고 이야기 합니다. 바오로 사도의 이야기를 듣고 몇몇 사람들은 하느님의 뜻을 따르겠다고 말을 하였습니다.
우리가 조금만 관심을 가지고 이웃을 만나면, 우리는 하느님을 찾으려고 하는 사람들을 찾을 수 있습니다. 따뜻한 말 한마디와 환한 미소는 절망에 빠져있는 이들에게는 커다란 위로와 힘이 될 수 있습니다. 엘리베이터에서 닫힘 버튼을 누르지 않고 기다리면 급한 일이 있는 사람이 함께 타고 갈 수도 있습니다. 먼저 가겠다고 신호를 보내는 사람에게 차선을 양보하면 그 사람은 지금 세상을 떠날지 모르는 가족의 마지막 순간을 볼 수도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위로해 주시고, 우리에게 힘을 주시고, 용기를 주시는 분이 함께 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진리의 성령, 위로의 성령, 굳셈의 성령, 지식의 성령, 지혜의 성령’을 보내 주실 것이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성령의 따뜻함과 온유함이 우리들의 삶을 통해서 전해 질 수 있도록 우리가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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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진리의 영>
-성령이 답이다-
오늘 사도행전에서 바오로 사도는 아테네에서의 선교후 아테네를 떠나 코린토로 갔다고 언급합니다. 바로 아테네에서의 선교의 실패를 반영합니다. 아테네인들은 바오로의 죽은 이들의 부활에 관하여 듣고서, 어떤 이들은 비웃고 어떤 이들은 “그점에 관해서는 다음에 다시 듣겠소,”하고 말합니다. 하여 바오로는 그들이 모인 곳에서 나왔고 바오로의 마음은 한없이 썰렁했을 것입니다. 바로 이런 반응이 코린토 1서에서 잘 드러납니다.
“유다인들은 표징을 요구하고, 그리스인들은 지혜를 찾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를 선포합니다. 그리스도는 유다인들에게는 걸림돌이 되고 다른 민족에게는 어리석음입니다.”(1코린1,22-23).
바로 지혜를 추구하는 그리스인들에게 십자가에 달리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어리석음이었음에 틀림없습니다. 바오로의 아테네에서는 그대로 인간의 종교심에 호소한 내용들로 가톨릭 교리서에서의 내용과 일치합니다. 가톨릭 교리서 제1장의 주제는 ‘하느님을 알 수 있는 인간’입니다. 이어지는 27항에서 29항까지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하느님을 향한 갈망은 인간의 마음속 깊이 새겨져 있다. 인간은 하느님을 향하여, 하느님에게서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하느님께서는 늘 인간을 당신께로 이끌고 계시며, 인간이 끊임없이 추구하는 진리와 행복은 오직 하느님 안에서 찾을 수 있다.’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인간은 자신들의 역사 안에서, 그들의 신앙과 종교적 행위들을 통해 다양한 방식으로 하느님을 찾는 길을 표현해 왔다. 비록 모호한 점들을 내포할 수 있기는 하지만, 매우 보편적인 것들이므로 인간을 종교적인 존재라고 일컬을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은 하느님과 이토록 친밀한 생명의 결합을 종종 망각하고, 이를 인정하지 않으며, 심지어 명백하게 거부하기까지 한다. 이러한 태도들은 매우 다양한 근원에서 비롯될 수 있다.’
바로 사도행전의 아테네 사람들은 물론 하느님을 찾는 모든 사람들에 대한 내용들입니다. 하느님을 찾는 종교인인 사람들이지만 얼마나 하느님을 찾기가 힘든 ‘죄인들인 인간들’인지 짐작이 갑니다. 하여 바오로 사도는 아테네 설교중 ‘회개’를 강조한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무지의 시대에는 그냥 보아 넘겨 주셨지만, 이제는 어디에 있든 모두 회개해야 한다고 사람들에게 명령하십니다. 그분께서 당신이 정하신 한 사람을 통하여 세상을 의롭게 심판하실 날을 지정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분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살리시어 그것을 모든 사람에게 증명해 주셨습니다.”
바로 이 대목에서 지혜롭다는 아테네 시민들이 걸려 넘어진 것입니다. 막연한 하느님이 답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죽으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 예수님이 답입니다. 코린토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이런 심정을 다시 고백합니다.
“그렇지만 유다인이든 그리스인이든 부르심을 받은 이들에게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힘이시며 하느님의 지혜이십니다. 하느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지혜롭고, 하느님의 약함이 사람보다 강하기 때문입니다.”
“나는 여러분 가운데에 있으면서 예수 그리스도 곧 십자가에 못 박히신 분 외에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기로 하였습니다.”
바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부활하신 파스카의 예수님이 우리의 모두임을 말해 줍니다. 파스카의 예수님이 답입니다. 이런 파스카의 예수님이야말로 우리의 길이요 진리요 생명입니다. 바로 진리의 영, 성령이 우리를 모든 진리의 원천인 파스카의 예수님께로 인도하십니다. 보호자 성령은 예수님에게 받아 모두 우리에게 알려 주십니다. 복음 마지막 예수님의 말씀도 고맙습니다.
“아버지께서 가지고 계신 것은 모두 나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성령께서 나에게서 받아 너희에게 알려 주실 것이라고 내가 말하였다.”
성령이 답입니다. 성령께서는 교회의 살아있는 기억이시며 우리의 ‘사랑스런 멘토loving mentor’이시며 우리 모두 파스카의 예수님께로 인도하십니다. 파스카의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우리에게 성령을 선사하시어 성령과 함께 성령의 사람으로 살게 하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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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청주성모병원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진리는 흔들어도 진리>
민주주의 원칙 중 하나가 다수결의 원칙입니다. 그러나 다수결의 원칙이 진리는 아닙니다. 따라서 진리가 다수에 의해서 바뀔 수는 없습니다. 다수에 의해서 이랬다저랬다 할 것 같으면 그것은 이미 진리가 아닙니다. 진리는 누가 아무리 흔들어도 진리일 뿐입니다. 성 막시밀리안 콜베는 말합니다. “이 세상의 누구도 진리를 뜯어 고칠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 우리가 해야 하는 것은 진리를 추구하고 발견하며 진리에 봉사하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진리의 영께서 오시면 너희를 모든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당신을 믿는 유다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내 말을 마음에 새기고 산다면 너희는 참으로 나의 제자이다. 그러면 너희는 진리를 알게 될 것이며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요한 8,31-32) 결국 진리의 길을 따르면서 우리의 마음이 하느님께 충실하게 고정되고, 우리가 그분께 기쁘고 은혜로운 일들을 찾으며 그분의 마음에 드는 것을 찾아 행한다면 그 안에서 예수님을 만나게 될 것이요, 자유를 누리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굳건히 서서 진리로 허리를 동이고 정의로 가슴을 무장하고 발에는 평화의 복음을 갖추어 신고 손에는 언제나 믿음의 방패를 잡고 있어야 합니다. 그 방패로 여러분은 악마가 쏘는 불화살을 막아 꺼 버릴 수 있을 것입니다.”(에페6 14-16) 진리의 영을 받은 제자들은 사람들을 예수님께로 안내하고 예수님을 영광스럽게 하였습니다. 오늘 우리도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어 진리의 성령을 보내주셨고 진리 안으로 부르신다는 것을 믿고 사람들을 예수님께로 안내하고 예수님을 영광스럽게 해야 하겠습니다.
진리를 거짓과 바꾸고 창조주 대신에 피조물을 섬기고 예배하도록 이끄는 세상의 많은 어두운 세력들을 물리치기 위해서 진리 안에 더욱 굳건해야 합니다.“숨기려고 하면 왜곡할 수밖에 없고 모든 것을 자신의 논리로 합리화하기 때문에 다른 이들을 무시하거나 없애려고까지 하게 됩니다.”그러나 진리의 영을 따라 살아가려는 이들은 이웃과 세상에 열려있습니다.
한 때‘다빈치 코드’소설이 영화 되어 상영되고, 많은 이야기 거리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소설은 소설일 뿐입니다. 허구는 허구요, 픽션은 픽션일 뿐입니다. 근래에는‘신천지’라는 이단이 많은 이들을 유혹하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많은 이들이 진리에는 귀를 기울이지 않고 꾸며낸 이야기와 굴곡 된 성경해석에 마음을 팔 것입니다. 그러나 진리는 아무리 흔들고 뜯어 고치려 해도 진리인 것입니다. 거짓논리를 통해 진실처럼 보이게 할지라도 진실처럼 보이는 것이지 거짓은 거짓입니다. 그러므로 시간과 정성을 진리를 찾는 것에 두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진리를 알게 되기를 바라십니다. 왜냐하면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은 구원을 얻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진리는 하느님에게서 나오는 모든 영적인 지혜, 계시 및 지식입니다. 그리고 최고의 진리는 아버지의 말씀입니다. 요한복음에“아버지의 말씀이 진리입니다.”(요한17,17)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말씀이 사람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그분이 말씀하십니다. “나는 진리다.”(요한 14,6) 이제 진리의 영께서 예수님의 가르침을 제대로 깨달을 수 있도록 이끌어 주실 것입니다. 마음을 열어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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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사랑을 연구하는 심리학자 조안 다빌라는 이성과 건강한 관계를 맺기 위해서는 세 가지 조건이 충족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 조건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내가 나를 알고 나를 좋아한다.
둘째, 내가 상대방을 알고 상대방을 좋아한다.
셋째, 상대방도 나를 알고 나를 좋아한다.
당연한 말이지만 참으로 실천하기 힘든 말이 아닐까 싶습니다. 먼저 자신을 좋아해야 합니다. 스스로에 대한 자존감이 없어지면 그 어떤 것도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좋아할 수도 없습니다. 싫은 내 모습을 상대방도 좋아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지요. 또한 상대방을 좋아하기 위해서는 상대방을 알아야 합니다.
상대방을 전혀 알지 못하면서 좋아하는 감정을 갖기 힘듭니다. 좋아하는 친구를 떠올려 보십시오. 그 친구에 대해서 많은 것을 알게 되면서 좋아하는 감정도 갖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단계를 거치고 나면 자연스럽게 상대방도 나를 알고 나를 좋아하게 됩니다.
이러한 대인관계는 주님과 우리의 관계 안에서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자신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 주님을 좋아할 수 있을까요? 주님을 전혀 모르는 사람이 주님을 좋아하면서 굳은 믿음을 가질 수 있을까요?
따라서 내 자신을 먼저 좋아할 수 있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내 자신이 가지고 있지 못한 것에 관심을 갖는 것이 아니라, 내가 가지고 있는 것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내가 할 수 없는 일들에 대해 패배감을 갖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할 수 있는 것에 대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을 때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쁘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들에게 성령을 보내주십니다. 이 성령은 진리의 영으로 우리를 모든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십니다. 불평과 불만 속에서 어렵고 힘들게 살아가는 삶이 아닌, 감사와 기쁨 안에서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런데 부정적인 마음으로 자기 자신을 부정하고, 주님을 알려고 노력하지 않으면서 주님도 싫어했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주님의 사랑으로 이 세상 안에서 살고 있는 내 자신을 좋아할 수 있는 긍정적인 마음을 키워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미사, 기도, 성경이나 영적독서 등을 통해 주님을 알려는 노력을 아끼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분명히 주님께서 나를 얼마나 사랑하고 계신지를 깨닫게 될 것입니다.
사랑을 통해 우리는 보다 더 앞으로 성장할 수 있습니다. 지금보다 더 나은 내가 되기 위해서는 사랑을 간직하고 사랑을 실천하고 또한 사랑을 받아들일 때 가능한 것입니다. 이 사랑의 힘을 바로 성령을 통해서 얻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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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익은 얼굴}
어느 엄격한 교수님께서 학기 마지막 수업에서 자신에게 서명을 받은 학생만 학점을 주겠다는 말씀을 하십니다. 직접 한 명씩 얼굴을 보면서 수업에 충실했는지를 확인하겠다는 것이었지요.
수업에 한 번도 출석한 적이 없는 학생을 본 교수님께서는 “자네는 내가 강의시간에 한 번도 본 적이 없는데?”라고 말씀하시면서 서명을 해주지 않았습니다.
서명을 받지 못한 이 학생은 머뭇거리다가 다시 줄의 맨 뒤에 섰습니다. 그리고 다시 차례가 되었을 때 교수님께서는 “음, 낯익은 얼굴이군. 좋아.”라고 말씀하신 뒤에 서명을 해주셨습니다.
만약에 이 학생이 서명을 받지 못했다고 그냥 돌아갔으면 학점을 받을 수 없었겠지요. 그러나 다시 줄을 섰기에 교수님의 착각(?)을 일으켜서 학점을 받을 수가 있었습니다.
너무 쉽게 포기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물건이 가장 많이 팔릴 때는 같은 손님에게 4번 권할 때라고 합니다. 그만큼 안 된다고 물러나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안 된다고 물러나면 그대로 끝이 나고 말지만, 다시 한 번 힘을 쓰게 되면 가능성과 기회는 여전히 남아 있는 것이 됩니다. 포기하지 마십시오. 다시 한 번 용기와 힘을 내서 앞으로 나아가는 우리와 주님께서도 함께 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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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파주분원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예수님의 생애 중에 성령의 개입은 크게 보면, 세 시기에 걸쳐 일어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첫째 시기>는 강생 때인데, “그 몸에 잉태된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마태 1,20)라고 표현됩니다.
<둘째 시기>는 세례 때인데, “성령께서 비둘기처럼 당신께 내려오는 것을 보았다”(마르, 1,10). “그 뒤에 바로 성령께서는 곧 예수님을 광야로 내보내셨습니다.”(마르 10,12)고 표현되어 있습니다.
<셋째 시기>는 부활과 승천하실 때인데, “그들에게 숨을 불어넣으시며, 성령을 받아라.”(요한 20,22). “내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분을 내가 너희에게 보내겠다.”(루카 24,49)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 고별사 중에서도 마지막 말씀입니다. 곧 마지막 말씀 중에서도 마지막 말씀입니다. 그만큼 귀중하고 소중한 말씀인 것입니다. 이 다음 부터는 이제까지의 말씀을 다시 요약하시는 부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 가운데 활동하실 성령의 활동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진리의 영께서 오시면 너희를 모든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 그분께서는 스스로 이야기하지 않으시고 들으시는 것만 이야기하신다.”(요한 16,13)
이는 성령께서 우리를 진리로 이끄시는 안내자라는 말씀입니다. 곧 성령의 이끄심이 없이는 진리를 깨달을 수도, 진리를 행할 수도 없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그분께서는 스스로 이야기하지 않으시고 들으시는 것만 이야기하신다.” 라고 하심은 성령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와의 일치 속에 깊이 결속되어 있음을 말해줍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그의 편지에서, 우리 역시 성령의 일치 안에 있어야 함을 일깨워줍니다.
“여러분은 거룩하신 분에게서 기름부음을 받았습니다(1요한 2,20).
~그분께서 기름 부으심으로 여러분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십니다.
~여러분은 그 가르침대로 그분 안에 머무르십시오.”(1요한 2,27)
그러기에, 우리가 <성경>을 읽고 들을 때는 우선적으로 성령께 의탁하고 성령의 이끄심에 따르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귀고 아빠스는 ‘렉시오 디비나’에 대해서 말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먼저, 성령을 청하라. 그러면 빛을 받을 것이다.
그러니 성령의 도유, 곧 성령으로 기름 부어진 독서가 되어야 함은 당연한 일입니다. 이러한 ‘성령으로 도유된 독서’(lectio untionis)에 대해서, 성 보나벤뚜라는 이렇게 말합니다.
“도유 없는 독서는 쓸데없다. ~성령의 도유야말로 구원을 촉진시키는 모든 것을 가르친다.”
이는 성령께서 진리의 해석자이시고 동반자이심을 말해줍니다. 말씀의 뜻이 진리의 영으로 하여 밝혀지기 때문입니다. 곧 성령의 도움으로 말씀을 깨달아, 말씀이신 분과 친교를 이루게 됩니다.
오늘 우리는 그리스정교회 이냐시오 대주교(1920-2012)가 웁살라에서 열린 WCC 세계교회협의회 총회(1968)에서 한 말을 기억해 봅니다.
“성령이 계시지 않으면 하느님은 멀리만 계시며 그리스도는 과거에만 머무십니다.
성령이 계시지 않으면 복음은 죽은 문자이며 교회란 한낱 조직에 지나지 않습니다.
성령이 계시지 않으면 권위란 한낱 지배하는 것일 뿐이며, 선교란 한낱 선전광고일 뿐이며, 전례란 한낱 과거의 회상일 뿐입니다.
성령이 계시지 않다면 그리스도인의 행위는 노예들의 윤리에 지나지 않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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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보둥지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진리의 영이 오실것이다.
그분은 스스로 이야기하지 않으시며
들으시는 것만 이야기하실 것이다!
소통하는 프로그램을 진행할때
귓속말로 소리를 전달하며 들은 이야기를
계속 전달하도록 합니다.
어떤 소리를 들으셨나요? 물으면, 엉뚱한
소리들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ㆍ
이때 모두들 웃지요.
놀이에서는 웃고 넘길 수 있지만
현실에서 겪으면 문제가 될 말입니다.
소리의 전달은 외이를 통해서 달팽이관을
거치고 뇌에 전달되어 인식하기까지
1초도 걸리지 않습니다. 그런데 ~
그 사이에 각자의 인식 정도에 따라
들은 소리를 변화시켜 받아들여 자기의 소리로
만들어버리는 게 인간의 약함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들은 것이라고 전달할 때
많은 갈등의 요소가 생깁니다.
왜 그럴까요?
나!라는 인간은 약한존재요
자기 이로운 쪽으로 말하려 하고,
듣고 싶은 것만 듣게 됩니다.
'배가 아파요'라고 했는데
'배 수술하셨다면서요'로 바뀌는 말!
입이 열려 어떤 말도 나올수 있기에
다스려야 합니다. 말의 책임 ♡
진리의 성령이여 오소서!
입을 다스리고 귀를 정화해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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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김홍언 요한보스코 신부님]
※김홍언신부님의 영성의샘물※
<행복으로 가는 최단거리-2>
두 사람이 한 조가 되어 자기 몸의 피곤한 부위가 있으면, 상대방의 같은 부위를 마사지해 주도록 했습니다. 상대방의 피곤하고 아픈 부위가 아니라, 자신의 피곤하고 아픈 부위와 같은 곳을 상대방에게 마사지 해 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놀랍게도 자신의 피곤한 부분이 풀리는 것을 느끼게 된다고 합니다. 여러분도 한 번 시험해 보세요. 이것이 도대체 무슨 영문일까요? 공명共鳴입니다.
-「3초 만에 행복해지는 명언 테라피」에서
♣우리들은 공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3초 테라피 : 행복해지고 싶다면, 자신보다는 눈앞에 있는 사람을 행복하게 해 주는 것이 의외로 가까운 길일지도 모릅니다. 공명하고 있으니까요. Your Happy, My Happy. -상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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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그리스도의 향기가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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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진리의 영께서 오시면 너희를 모든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요한 16, 13)
닫힌 문을 열고
진리 안으로
이끌어가시는
성령께서 계십니다.
예수님의
마지막 유언처럼
성령께서는 진리로
뜨겁게 존재하십니다.
우리의 삶이란
진리의 영이신
성령과 함께
살아가는 성령의
삶입니다.
거부할 수 없는
소중한 진리는 언제나
함께하는 기쁨입니다.
모든 진리가
되시는 분은 우리의
하느님이십니다.
진리의 영께서는
모든 진리로 우리를
이끌어가십니다.
모든 진리가
우리들 안에
이루어지게 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보다
더 뛰어난 진리는
없습니다.
진리의 영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가르쳐 주시고
알려 주십니다.
믿음을 지켜나갈 수
있도록 도와주십니다.
그럴듯한 가짜
진리에 속지 않도록
도와주십니다.
진리의 영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영광스럽게 하십니다.
거룩한 진리로
나아가는 진리의
새 날 되시길
기도드립니다.
진리의 영 안에서
우리 자신을 더는
속이지 않길
기도드립니다.
흙으로 빚어진
우리가 소중한 것은
성령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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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정리/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눠드립니다■
[이름, 본명, 지역(본당), 연락처]를
문자로 보내주세요.
010-3284-9295 | 카톡ID jijive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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