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19일 오늘의 역사
2020년 아이슬란드 오크 화산 정상에서 빙하 추도식, 지구온난화의 심각성을 경고하는 행사
2019년 유럽인으로 일본군성노예 피해 첫 증언한 네덜란드계 호주인 얀 러프 오헤른(96세) 세상 떠남
2015년 통독(統獨) 기반 ‘동방정책’ 설계자 에곤 바 별세
독일 통일의 장기적 기반을 다진 ‘동방정책’의 설계자 에곤 바(Egon Bahr ·93)가 지난 19일 별세했다.
동방정책은 서독이 통일을 위한 밑거름으로 구소련 및 동유럽 국가들과 우호적 관계 맺기에 나선 정책이다. ‘작은 발걸음 정책’이라고도 불린다.
바가 구상한 동방정책을 적극 지지한 인물이 통일의 초석을 다졌다는 평가를 듣는 빌리 브란트 서독 전 총리다. 둘은 바늘과 실처럼 함께 거론되곤 한다. 브란트가 1957년 서베를린 시장으로 임명됐을 때 바가 대변인을 맡으며 인연을 맺었다. 브란트가 외교장관 때는 기획실장을, 1969년 총리에 오른 뒤엔 총리실장에 임명됐다. 이후 특임장관을 지내며 동방정책을 적극 추진했다
2014년 IS, 미국 프리랜서 기자 제임스 폴리 참수 영상 공개
2012년 최신 원자력발전소 신월성 1호기 상업운전 시작
2010년 이라크 주둔 美 마지막 전투여단 철수
2009년 8월 19일날 발사될 나로호가 오작동으로 7분 56초를 남기로 긴급 중지됨
2007년 유엔 인종차별철폐위원회 (CERD)는 한국이 단일 민족 국가라는 이미지를 극복할 것을 권고
2007년 ‘해리포터’ 작가 조앤 롤링, 추리소설 집필
2005년 태평양전쟁희생자 유골인도식(부산 영락공원)
2004년 삼성전자 차세대 반도체 64메가 P램 세계 첫 개발
삼성전자 P램. 삼성전자는 세계 최초로 64메가비트 P(Phase Change)램 기술 및 시제품 개발에 성공했다고 19일 밝혔다.
P램이란 반도체 재료인 실리콘 원판에 신물질을 추가, D램의 빠른 정보처리속도와 플래시메모리 전원이 꺼져도 정보가 날아가지 않는 특성을 가진 차세대 반도체다.
업계에선 P램이 수년 안에 460억달러(55조원·2004년) 규모 메모리반도체 시장을 석권할 것으로 예상했다. 세계 주요 반도체 업체들은 모두 P램 연구작업을 벌여 왔으며, 64메가 시제품 개발은 삼성전자가 처음이다.
이 제품은 기존 반도체 생산설비로도 제조할 수 있고, 제조공정도 메모리반도체보다 단순하기 때문에 원가경쟁력이 우수하다.
아울러 2.5V 저전압 동작과 ▲쓰기속도 120나노초(ns) 및 읽기속도 60ns ▲플래시메모리 대비 1000배 이상의 내구성 ▲85도에서 2년 이상 데이터보존 등의 특성을 갖고 있다. 삼성전자는 2006년부터 본격 양산에 돌입했다.
2003년 이라크 바그다드 주재 유엔 본부 폭탄테러, 24명 사망 100여명 부상
1999년 유고 최대 규모 반정부 시위
슬로보단 밀로셰비치 유고연방 대통령의 퇴진을 요구하는 사상 최대 규모의 반정부 시위가 1999년 8월 19일 수도 베오그라드 중심부의 연방의회 건물앞에서 열렸다.
10만명 이상의 대규모 군중이 집결한 가운데 열린 집회에서 시위대는 당기와 세르비아 공화국 국기, 피켓 등을 흔들며 변화와 밀로셰비치의 사임을 요구했다. 시위가 시작된 직후 최루탄 1개가 터져 시위대 수십명이 몸을 피하는 과정에서 1명이 부상해 구급차로 병원에 옮겨지기도 했으나 시위는 별다른 사고 없이 일단 끝났다.
이날 집회는 정부의 갑작스런 조기 총선 제안으로 야당 연합전열에 분열 양상을 초래한 가운데도 가장 강력한 반 밀로셰비치 시위가 이뤄졌다는데 의미가 있다. 또 집회에 당초 불참 의사를 통보했던 ‘세르비아 혁신운동’의 부크 드라스코비치가 돌연 참석, 조기 총선을 ‘11월까지는 실시해야 한다’는 즉석 연설을 해 시위대로부터 야유와 환호를 동시에 받았다.
드라스코비치는 다른 주요 야당 인사들이 과도정부구성을 지지하는데 비해 정부측의 조기 총선안을 지지하는 이단적 재야 인사로서 이날도 과도 정부구성을 반대하며 합법적 틀안에서의 이성적 대응을 촉구했다.
1998년 시인 원희석씨 별세
시인 원희석(42)씨가 19일 오전 9시 서울 순천향병원에서 별세했다.
원씨는 87년 등단한 뒤 시집 ‘물이 옷 벗는 소리’ ‘바늘 구멍 앞의 낙타’를 펴냈고, 90년 대한민국 문학상 신인상을 수상했다. 원씨는 경기도 파주시에서 지역신문 ‘파주저널’을 발행하면서 예총 파주지부장을 맡아왔다
1997년 북한 경수로 착공
1996년 남북 최초의 합작공장인 대우 남포공장 본격 가동
남북한 최초의 합영회사인 ㈜대우의 `민족산업총회사' 남포공장이 19일 가동에 들어갔다.
대우는 남포공장 가동을 위해 이 회사의 부총사장에 대우의 朴瑃상무를 내정하는 등 대우측 이사진 3명을 선임하고 셔츠.블라우스, 가방, 자켓 등 3개 공장의 생산 및 품질관리 지도를 위해 기술자 10명을 지난 3일 북경(北京)을 경유해 평양으로 들여보내는 등 본격가동을 위한 준비작업을 진행해왔다.
`민족산업총회사'는 대우와 조선삼천리총회사가 50대 50의 지분으로 설립한 경공업 회사로 3개 공장에서 연간 셔츠. 블라우스 3백10만장, 자켓 60만장, 가방 30만개를 생산, 전량을 제3국에 수출하게 된다.
대우측 투자규모는 모두 5백12만달러며 대우의 朴瑃상무는 지난해 3월말부터 평양에 체류하면서 북한측과 공장가동을 위한 세부사항을 협의했으며 시험가동중 생산된 제품의 미국, 유럽 지역 수출에도 간여해오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이 회사는 지난 92년1월 金宇中 대우그룹회장이 북한을 공식방문, 북한측과 남포공단에 9개 경공업 협력사업을 추진키로 합의함에 따라 태동됐다.
대우측은 金회장의 방북을 계기로 남포공단 합영사업 성사를 위해 북한측과 꾸준히 접촉해오다 92년 10월 한국정부로부터 협력사업자승인을 받아냈으며 이 때부터 투자조사단 방북, 대우측 기술자의 북한 방문 및 현지지도 등 공장설립을 위한 준비작업에 박차를 가했다.
`민족산업총회사' 설립이 점차 가시화되자 정부는 지난 95년5월 남북협력사업승인을 내줬으며 지난 5월 북한으로부터 영업개시 승인을 받아 시험가동에 들어갔었다.
1994년 노벨 화학상과 평화상 수상한 라이너스 폴링 박사 타계
노벨 화학상과 평화상 등 유일하게 2차례에 걸쳐 노벨상을 단독 수상했던 라이너스 폴링 박사가 1994년 8월 19일 캘리포니아주에 있는 자신의 목장에서 사망했다. 향년 93세였다.
폴링 박사는 단백질과 항체의 구조를 이해하는데 필요한 분자의 화학적 결합에 관한 연구로 1954년 노벨 화학상을 수상했다. 그는 또 전 세계 1만1천명의 과학자들의 서명을 받아 유엔에 핵실험 금지를 청원하는 등 반핵운동에 헌신한 공로로 1963년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
오리건주 포클랜드 출신인 폴링은 60여년 간의 연구생활을 통해 1천 편이 넘는 논문과 여러 권의 저서를 내놓았으며 분자를 묶고 있는 화학적 결합의 원리를 이용해 비타민C를 암·감기 등의 질병에 대항하는 예방물질로 개발한 공로를 세웠다
1993년 초고속정보통신망 기본계획 수립
1993년 국회, 김영삼 대통령의 금융실명제 승인
1991년 한민족과학기술자학술대회 개막(중국 연길), 남북한및 해외동포 등 관계자 300며명 참석
1991년 소련 공산당 보수파, 쿠데타 시도 고르바초프 하야 / 복귀
1985년 3월 체르넨코의 뒤를 이어 당서기장에 선출된 고르바초프(M. S. Gorbachyov)는 개혁과 개방 정책을 추진하여 소련뿐만이 아니라 동구권에도 큰 변화를 야기했다.
노벨 평화상을 수상한 1990년, 고르바초프는 소련 최초의 민선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고르바초프는 대통령 당선 이후 개혁과 개방 정책을 가속화하는 한편, 1991년 7월 마르크스-레닌주의와 계급투쟁을 폐기하는 새로운 소련공산당 강령을 입안했다.
고르바초프의 개혁 정책은 보수 강경파 군부의 반발을 불러일으켰으며, 1991년 8월 19일 쿠데타로 하야했다.
그러나 쿠데타의 실패와 함께 3일만에 대통령에 복귀한 고르바초프는 공산당을 해체, 마르크스-레닌주의와 완전 결별을 선언했다.
고르바초프는 옐친이 주도한 소비에트 연방 해체와 독립국 연합 탄생으로 1991년 12월 25일 대통령직을 사임했으며, 2001년 5월에는 독일 역사다큐멘터리 진행자로 변신하여 세계의 이목을 끌기도 했다
1990년 북한 조국통일범민족연합 결성 발표
1989년 헝가리 공산당 탈공산주의 선언
1989년 동독시민, 헝가리 경유해 오스트리아 탈출 러시
1988년 서경원 의원 밀입북(8.19~8.21)
평민당 서경원 의원이 1988년 8월 19일부터 21일까지 북한을 밀입북했다. 서 의원은 유럽여행 중 성낙영 목사를 통해 접촉한 북한인사 정모씨의 주선으로 체코를 경유 방북했다. 북한체류중 허담이 배석한 가운데 김일성 주석과 면담, 통일문제 등에 관해 회담을 가졌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 사실을 뒤늦게 안 공안당국은 서 의원을 이듬해 1989년 6월 28일 국가보안법 위반혐의로 구속했다. 공안당국은 이 사건을 전형적인 국회간첩단 사건으로 단정하고 서 의원이 활동해 온 정치권과 재야단체에 수사초점을 맞췄으며 특히 당시 김대중 총재의 사전인지 여부 등을 둘러싸고 조사과정에서 정국의 팽팽한 긴장을 초래하기도 했다.
이 사건으로 이길재 평민당 대외협력위원장, 방양균 비서관 등 9명이 국가보안법상 불고지죄 등의 혐의로 구속 또는 불구속 기소됐다. 서 의원은 1심에서 실형을 선고받고 의원직을 상실했다.
1987년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전대협) 발족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약칭 전대협)가 1987년 8월 19일 정식 발족했다. 전국 각 대학 총학생회장이 1987년 7월 5일 연세대에 모여 고(故) 이한열군 장례식 절차를 논의하던 중 전국적인 대중조직 결성의 필요에 따라 전대협을 결성키로 합의했다.
이후 3차례의 사전모임을 거쳐 이날 발족한 전대협은 주로 반독재·반미투쟁·학원민주화 등의 제반 운동에 힘써왔다. 특히 1988년의 남북학생회담 시도는 국민에게 통일문제에 대한 관심을 고조시켰고 노태우 대통령의 7·7선언 등을 이끌어내는데 기여했다.
전대협은 이후 변화하는 학생들의 다양한 요구를 수용할 수 없다며 기구를 해체, 1993년 4월 한총련을 결성했다
1982년 국방부, 북한주민 이현주 귀순을 발표
1981년 한계령 도로 확장 포장 개통
높이 1,004m. 대청봉과 그 남쪽의 점봉산을 잇는 설악산 주 능선의 안부이며, 영동지방과 영서지방의 분수령을 이룬다. 이름은 한계산에서 유래했으며 설악산을 넘어서 인제군이나 서울로 갈 때 주로 이용되던 험한 산길이었다.
조선시대에는 산적이 들끓어, 해가 지면 이 고개를 넘지 말라는 뜻으로 길 옆 바위에 금표라고 새겨두었다. 지금도 그곳에 바위가 있으며, 한계령에 오르는 길에는 금표교가 있다.
1971년 한계령 한계령도로가 닦인후 관광객이 증가하였고 1981년 인근 도로가 확장, 포장됨으로써 진부령이나 미시령을 넘던 자동차들이 이 고개를 이용하게 되었다.
1980년 국보위, 사학 운영쇄신책 발표
1980년 사우디아라비아 여객기 리야드에 불시착 폭발. 301명 사망
1979년 소련 우주선 소유즈 34호, 우주체재 175일 기록세우고 귀환
1978년 이란 렉스 극장 방화 사망 377명 부상 233명
1975년 싱가포르 항공 서울 첫 취항
1972년 태풍 베티(-8.20) 사망 실종 550명
1971년 군단 하교대 공비 출현사건
군단 하교대 부사관 후보생이 보초근무중 괴한 2명을 발견하고 사격을 가하자,공비는 도주하고 기관단총, 피묻은 붕대,배낭 등을 노획
1969년 사단법인 흥사단 설립
1913년 5월 안창호의 주도로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결성된 흥사단은 8도를 대표하는 청년들을 포함한 25인의 발기인으로 발족했다. 무실·역행·충의·용감의 4대 정신을 지도이념으로 하여 일제강점기 국내외에 지부를 설립하고 실력양성운동에 힘썼다. 흥사단은 1920년 상하이에서 흥사단원동위원부를 설치했다. 서울에서는 수양동맹회를, 평양에서는 동우구락부를 결성했는데 두 단체는 1925년 합하여 수양동우회를 결성했으나, 1937년 일제에 의해 강제 해산되었다. 1945년 12월 흥사단 국내위원부가 발족되었다. 1961년 5·16군사정변으로 단체등록이 취소되어 활동을 일시 중지했다가 1963년 7월 다시 등록하면서 고등학교·대학생을 대상으로 아카데미 운동을 전개했다. 1969년 8월 사단법인이 되었다.
1966년 ASPAC 제1차 상설위원회 개최
1964년 한국, 국제의원연맹(IPU) 가맹
국제의원연맹은 1889년 각국 의원들의 친목도모와 세계 현안문제 해결을 위해 설립된 국제적인 의회 기구다
우리 국회는 1964년 8월19일 덴마크 코펜하겐에서 열린 제94차 이사뢰때 정식가입한 이래 매년 회의에 참가 하고 있다
1983년 제70차 총회는 서울에서 개최된 바 있다
1960년 소련 개 2마리 태운 인공위성선 2호 발사
1960년 남산의 이승만 동상 철거
1960년 장면, 제2공화국 총리에 피선
장면 의원이 1960년 8월 19일 국회에서 찬성 1백17표, 반대 1백7표로 국무총리에 피선됨으로 제2공화국이 정식 출범했다. 이승만의 하야로 구성된 허정 과도내각은 내각제 개헌안 통과(6.15)와 민-참의원 선거(7.29)를 실시해 새로운 의회를 구성했다.
민-참 양원은 8월 12일 합동회의에서 민주당 구파 지도자 윤보선을 제2공화국 대통령에 선출했다. 윤대통령은 당초 김도연을 국무총리에 지명했으나 김도연이 민의원 투표에서 부결되는 바람에 장면을 총리로 지명했다.
장면 내각은 출발부터 순탄치 않았다. 분단으로까지 이어진 민주당 신구파간의 갈등은 2공화국의 주요 과제라 할 수 있는 반민주 잔재 청산과 반부패 개혁정책 추진을 지연 또는 좌절시켰다. 게다가 교사들의 전국교원노조 결성, 김일성의 남북연합 제의, 육사 8기생들의 숙군 주장 등 국내외의 도전도 만만치 않았다.
국민들의 기대는 실망으로 이어져 결국 10월 11일에는 4.19부상학생들이 의사당에 난입하는 사태로까지 발전했다. 1961년에 들어서도 상황은 개선되지 않아 학생들의 남북협상론이 급물결을 타며 사회가 혼란스러워지자 장면 총리는 반공특별법과 데모규제법을 성안하는 등 남북협상 바람을 잠재우려 안간힘을 써야했다. 결국 5월16일 박정희 소장의 5.16군부쿠데타가 발발, 2공화국은 수립 9개월여 만에 종막을 고했다.
1958년 사친회비 폐지 교육세법안 국회 통과
1954년 이탈리아 총리(1945-53) 데 가스페리 사망
1953년 이란 `親팔레비` 쿠데타
1908년 이란에서 석유가 발견된 이래, 이란 원유를 독점한 것은 영국 자본 ‘앵글로ㆍ 이라니안 석유회사(AIOC)’였다. 2차대전후 제3세계에서 민족주의가 고양되는 가운데 이란에서도 석유산업을 되찾아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았다.
이런 국민적 감정을 타고 석유산업을 국유화시키는데 앞장선 사람이 무사데크다. 그는 영국은 물론 소련과도 일정한 거리를 둔 리버럴한 성향의 노(老) 정치가였다. 1951년 3월 국유화 법안이 상ㆍ하 양원에서 만장일치로 가결되자 무사데크는 일약 국민적 영웅으로 떠올랐고 곧 총리에까지 올랐다. 당시의 이란 왕은 팔레비였다.
이 상황을 그냥 지나칠리 없었던 영국이 이란석유 불매운동과 경제봉쇄조치로 이란 경제에 타격을 가하자 어느덧 국민들 사이에서는 반(反)무사데크 목소리가 높아졌다. 팔레비는 기회를 틈타 무사데크를 파면했으나 오히려 무사데크를 지지하는 세력들의 힘에 밀려 로마로 쫓겨났다.
그러나 1953년 8월19일, 미국 CIA 지원을 받은 친(親)팔레비 자헤디 장군이 쿠데타에 성공함으로써 사태가 역전된다. 무사데크 체포와 함께 이란의 탈(脫)제국주의 몸부림도 2년 만에 끝이 났다.
1951년 피의능선 전투(〜9.5)
1947년 대동청년단 결성
1946년 미국 제42대 대통령 빌 클리턴 출생
1939년 독일 소련 통상협정, 베를린서 조인
1938년 장개석, 공산당계 단체에 해산명령
1936년 스페인 시인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38세) 프랑코 반란군에게 살해됨
1924년 프랑스 우체부 페르디낭 슈발 세상 떠남
1923년 이탈리아 경제학자 빌프레도 파레토 세상 떠남
1915년 독일 잠수한 영국 군함 공격을 미군2명 사망 미국 참전 명분 제공
1911년 프랑스-일본, 통상항해조약 조인
1911년 전국에 풍수해 사상‧실종 256명 유실‧침수가옥 24,746호
1907년 독립운동가 이남규 사망
항일투쟁상소를 통해 민족의식을 고취시킨 수당 이남규 선생이 1907년 8월 19일 사망했다. 1855년 서울 미동에서 출생한 선생은 1875년 사마시에 합격한 뒤 승문원권지부정자·형조참의·영흥부사·안동관찰사 등을 역임했다.
일제의 침략 책동시기인 1893년부터 1905년까지 명성황후 시해 및 친일정권 수립의 만행을 규탄하는 ‘청절왜소’ 등 항일 상소투쟁을 통해 국권회복운동을 전개했다. 선생은 단발령에 반발해 예산으로 귀향, 충남 홍산에서 의병을 일으킨 민종식을 숨겨주다 공주감옥에 투옥됐다.
선생은 1907년 군대 해산으로 의병활동이 확산되자 일본군에 체포돼 압송중 장남과 함께 일제에 의해 피살됐다. 국가보훈처는 선생을 1997년 ‘9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
1907년 대한자강회(大韓自彊會)에 해산령
1904년 일본군, 여순(旅順) 총공격 개시
1884(조선 고종 21) 초대 대한국악원장 오당 함화진 태어남
1883년 디자이너 가브리엘 샤넬 출생
1878년 필리핀 연방공화국의 초대 대통령 케손 출생
1839년 프랑스의 루이 다게르, 사진술 발명
‘다게레오 타입’이라고 불리는 사진술이 ‘아카데미 프랑세즈’ 학술원회의에서 공인받아, 이 날이 공식적인 ‘사진 탄생일’로 정해짐
다게르의 사진술은 감광도가 낮고 노출이 8시간이나 되는 니엡스의 헬리오그래피를 개선한 것으로 거울처럼 좌우가 뒤바뀐 사진의 화상이 직접 은판에 인화되는 방식, 노출시간 10-30분 정도
1819년 증기기관 발명가 제임스 와트 사망
1662년 프랑스 사상가 파스칼 사망
1631년 영국의 시인, 문학비평가 드라이든 출생
1492(조선 성종 23) 성리학자 김종직 세상 떠남
1270년 삼별초, 진도 도착
고려 고종 18년(1231), 몽고가 고려에 침입하자 최우의 무신정권은 몽고가 수전(水戰)에 약한 점을 이용, 수도를 강화도로 옮겨 항전의지를 불태운다.
몽고가 개경환도를 요구하며 침략과 철수를 반복하던 중 최씨정권이 무너지자 고종은 1259년 개경환도를 약속하고 태자를 원나라에 입조하게 함으로써 고려와 원나라의 무력충돌도 29년만에 종지부를 찍었다.
실권은 여전히 최씨정권을 무너뜨린 무신들에게 있었지만 1260년에 즉위한 원종이 이들마저 제거함으로써 개경환도도 순조로워 보였다.
이때 예상치 않은 복병이 등장했다. 최우의 사병(私兵)이었던 삼별초였다.
군사를 일으켜 새 왕을 옹립한 삼별초가 1000여척의 배에 몸을 싣고 강화도를 떠나 진도에 도착한 것은 1270년 8월19일이었다.
삼별초 정부는 몽고의 침략에 시달렸던 영촵호남 백성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으며 제주도까지 점령, 한때는 남해안을 지배하는 사실상의 해상왕국을 이뤄냈지만 상대는 막강한 여촵원(麗촵元)연합군이었다.
결국 1273년 2월, 제주도로 옮긴 마지막 삼별초가 1만여명의 연합군에 패함으로써 장장 3년에 걸친 항쟁도 무위로 끝나고 말았다.
14년 로마 최초의 위대한 황제 옥타비아누스 세상 떠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