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야의 묵상] 새롭고 낯선 땅으로 떠나는 아브라함
익숙한 고향으로 돌아오는 오디세우스
창세기에는 고향을 떠나라는 하느님의 명령을 따르는 아브라함의 이야기가 있다. / 셔터스톡
"네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창세기 12:1)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라고 명합니다
고향, 친척, 아버지의 집은 지금 안주하고 있는 인습(因襲)의 삶터입니다. 그 인습의 자리를 떠나라고 말씀하신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가야할 목적지를 알려주지 않습니다.
새로운 출발의 시작은 목적지를 미리 아는 것이 아닙니다. 인습적인 과거, 안락한 현재를 버리는 일이 먼저입니다. 안전한 현재를 버리고 불안한 미래를 향해 발을 내딛는 것은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한다는 뜻이자, 미래에 닥칠 결과를 스스로 받아들인다는 책임의식의 결단이기도 합니다.
'갈 곳이 어디인지'를 알지 못한 채 고향을 떠난 아브라함은 '방랑하는 아람 사람의 조상'이 되었습니다(히브리서 11:8, 신명기 26:5). 유대인들의 디아스포라(Diaspora)가 시작되는 첫 발걸음입니다. 이것이 헤브라이즘의 출발입니다.
그리스 로마의 헬레니즘은 그와 정반대입니다. 트로이전쟁의 영웅 오디세우스는 숱한 위험을 무릅쓰고 20년 만에 고향 이타카로 돌아옵니다. 아브라함은 고향을 떠났고, 오디세우스는 고향으로 돌아옵니다.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이 대비되는 대목입니다.
'타자(他者)의 철학자'로 불리는 에마뉴엘 레비나스(Emmamuel Levinas)는 자신의 집으로 돌아오기 위해 온갖 위험을 무릅쓰는 오디세우스와 새롭고 낯선 곳으로 나아가기 위해 집을 떠나는 아브라함을 비교했습니다.
오디세우스는 낯선 땅의 낯선 타인들과 싸우면서 기어이 고향으로 돌아오고, 아브라함은 고향을 떠나 낯선 땅에서 낯선 타인들을 찾아가 만납니다. 헬레니즘이 '개인과 주체의 사상'으로 축소되는 반면, 헤브라이즘은 '공동체 정신'으로 확장됩니다.
서구철학에서 '타자와의 만남'은 자아(自我)의 인식 안으로 환원되고, 자기도취적.자기중심적 사고에 갇히게 됩니다. 하나님은 이 폐쇄적 인식, 자기중심적 삶을 깨어버리라고 요구합니다.
사도바울은 한곳에 정착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유럽과 아시아를 여러 번 왕래하며, 낯선 땅에서 낯선 타인들을 만나 복음을 전했습니다. 예수님은 한곳에 머물러 계시지 않았습니다.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지만, 예수님에게는 머리 둘 곳조차 없었습니다(누가복음9:58).
제사장은 성전 안에, 랍비들은 회당 안에 머물면서 신자들이 찾아오기를 기다렸지만, 예수님은 성전과 회당 밖으로, 광야와 산으로, 강과 호숫가로 떠돌며 스스로 많은 사람을 찾아가 만났습니다.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고, 와서 나를 따르라."(마가복음 10:21)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낯선 곳을 떠나 고향으로 돌아가는 오디세우스가 될 것인가, 고향을 떠나 낯선 곳으로 향하는 아브라함이 될 것인가? 이것이 우리들 신앙인 앞에 놓인 선택의 두 길입니다.
글 | 이우근 ・변호사
출처 : 마음건강 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