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22일 오늘의 역사<말씀> : CCCC 국민소통운동본부
오늘의 말씀
① 잠언 22장 전문
○ 종합적인 교훈들
1.
많은 재물보다 명예를 택할 것이요 은이나 금보다 은총을 더욱 택할 것이니라
2.
빈부가 섞여 살거니와 무릇 그들을 지으신 이는 여호와시니라
3.
슬기로운 자는 재앙을 보면 숨어 피하여도 어리석은 자들은 나아가다가 해를 받느니라 사26:20
4.
겸손과 여호와를 경외함의 보응은 재물과 영광과 생명이니라
5.
패역한 자의 길에는 가시와 올무가 있거니와 영혼을 지키는 자는 이를 멀리 하느니라
6.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
7.
부자는 가난한 자를 주관하고 빚진 자는 채주의 종이 되느니라 잠18:23
8.
악을 뿌리는 자는 재앙을 거두리니 그 분노의 기세가 쇠하리라 시125:3
9.
선한 눈을 가진 자는 복을 받으리니 이는 양식을 가난한 자에게 줌이니라
10.
거만한 자를 쫓아내면 다툼이 쉬고 싸움과 수욕이 그치느니라
11.
마음의 정결을 사모하는 자의 입술에는 덕이 있으므로 임금이 그의 친구가 되느니라
12.
여호와께서는 지식 있는 자를 그 눈으로 지키시나 궤사한 자의 말은 패하게 하시느니라
13.
게으른 자는 말하기를 사자가 밖에 있은즉 내가 나가면 거리에서 찢기겠다 하느니라
14.
음녀의 입은 깊은 함정이라 여호와의 노를 당한 자는 거기 빠지리라
15.
아이의 마음에는 미련한 것이 얽혔으나 징계하는 채찍이 이를 멀리 쫓아내리라
16.
이를 얻으려고 가난한 자를 학대하는 자와 부자에게 주는 자는 가난하여질 뿐이니라
○ 들어야 될 지혜있는 자의 말
17.
너는 귀를 기울여 지혜 있는 자의 말씀을 들으며 내 지식에 마음을 둘찌어다
18.
이것을 네 속에 보존하며 네 입술에 있게 함이 아름다우니라 잠2:10
19.
내가 너로 여호와를 의뢰하게 하려 하여 이것을 오늘 특별히 네게 알게 하였노니
20.
내가 모략과 지식의 아름다운 것을 기록하여 잠8:6
21.
너로 진리의 확실한 말씀을 깨닫게 하며 또 너를 보내는 자에게 진리의 말씀으로 회답하게 하려 함이 아니냐
22.
약한 자를 약하다고 탈취하지 말며 곤고한 자를 성문에서 압제하지 말라
23.
대저 여호와께서 신원하여 주시고 또 그를 노략하는 자의 생명을 빼앗으시리라
24.
노를 품는 자와 사귀지 말며 울분한 자와 동행하지 말찌니
25.
그 행위를 본받아서 네 영혼을 올무에 빠칠까 두려움이니라
26.
너는 사람으로 더불어 손을 잡지 말며 남의 빚에 보증이 되지 말라
27.
만일 갚을 것이 없으면 네 누운 침상도 빼앗길 것이라 네가 어찌 그리하겠느냐
28.
네 선조의 세운 옛 지계석을 옮기지 말찌니라
29.
네가 자기 사업에 근실한 사람을 보았느냐 이러한 사람은 왕 앞에 설 것이요 천한 자 앞에 서지 아니하리라
② 시편 22장 전문
1.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하여 돕지 아니하옵시며 내 신음하는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 마27:46, 막15:34, 시10:1
2.
내 하나님이여 내가 낮에도 부르짖고 밤에도 잠잠치 아니하오나 응답지 아니하시나이다
3.
이스라엘의 찬송 중에 거하시는 주여 주는 거룩하시니이다
4.
우리 열조가 주께 의뢰하였고 의뢰하였으므로 저희를 건지셨나이다
5.
저희가 주께 부르짖어 구원을 얻고 주께 의뢰하여 수치를 당치 아니하였나이다
6.
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훼방거리요 백성의 조롱거리니이다
7.
나를 보는 자는 다 비웃으며 입술을 비쭉이고 머리를 흔들며 말하되 막15:29
8.
저가 여호와께 의탁하니 구원하실걸, 저를 기뻐하시니 건지실걸 하나이다
9.
오직 주께서 나를 모태에서 나오게 하시고 내 모친의 젖을 먹을 때에 의지하게 하셨나이다
10.
내가 날 때부터 주께 맡긴바 되었고 모태에서 나올 때부터 주는 내 하나님이 되셨사오니
11.
나를 멀리하지 마옵소서 환난이 가깝고 도울 자 없나이다
12.
많은 황소가 나를 에워싸며 바산의 힘센 소들이 나를 둘렀으며
13.
내게 그 입을 벌림이 찢고 부르짖는 사자 같으니이다 시35:21, 시10:9
14.
나는 물 같이 쏟아졌으며 내 모든 뼈는 어그러졌으며 내 마음은 촛밀 같아서 내 속에서 녹았으며 욥30:16, 욥23:16, 사13:7
15.
내 힘이 말라 질그릇 조각 같고 내 혀가 잇틀에 붙었나이다 주께서 또 나를 사망의 진토에 두셨나이다 시38:10
16.
개들이 나를 에워쌌으며 악한 무리가 나를 둘러 내 수족을 찔렀나이다
17.
내가 내 모든 뼈를 셀 수 있나이다 저희가 나를 주목하여 보고 슥12:10, 계1:7, 시109:25
18.
내 겉옷을 나누며 속옷을 제비 뽑나이다
19.
여호와여 멀리하지 마옵소서 나의 힘이시여 속히 나를 도우소서 시22:1
20.
내 영혼을 칼에서 건지시며 내 유일한 것을 개의 세력에서 구하소서
21.
나를 사자 입에서 구하소서 주께서 내게 응락하시고 들소 뿔에서 구원하셨나이다 딤후4:17
22.
내가 주의 이름을 형제에게 선포하고 회중에서 주를 찬송하리이다 시40:9
23.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너희여 그를 찬송할찌어다 야곱의 모든 자손이여 그에게 영광을 돌릴찌어다 너희 이스라엘 모든 자손이여 그를 경외할찌어다
24.
그는 곤고한 자의 곤고를 멸시하거나 싫어하지 아니하시며 그 얼굴을 저에게서 숨기지 아니하시고 부르짖을 때에 들으셨도다 시102:17, 사63:9
25.
대회 중에 나의 찬송은 주께로서 온 것이니 주를 경외하는 자 앞에서 나의 서원을 갚으리이다 시35:18, 시40:9
26.
겸손한 자는 먹고 배부를 것이며 여호와를 찾는 자는 그를 찬송할 것이라 너희 마음은 영원히 살찌어다
27.
땅의 모든 끝이 여호와를 기억하고 돌아오며 열방의 모든 족속이 주의 앞에 경배하리니
28.
나라는 여호와의 것이요 여호와는 열방의 주재심이로다
29.
세상의 모든 풍비한 자가 먹고 경배할 것이요 진토에 내려가는 자 곧 자기 영혼을 살리지 못할 자도 다 그 앞에 절하리로다 빌2:10
30.
후손이 그를 봉사할 것이요 대대에 주를 전할 것이며
31.
와서 그 공의를 장차 날 백성에게 전함이여 주께서 이를 행하셨다 할 것이로다 시78:6
오늘의 역사
① 일제(日帝)가 조작한「105인 사건」(1912) : 안중근의사의 4촌동생 안명근은 압록강 철교 준공식에 참석하려는 데라우치 총독을 평북 선천(宣川)역에서 암살하려다 사전에 피체 투옥, 1910.12.27 무기 징역을 선고받았다.
일본 경찰은 이를 계기로 우리 애국지사를 모두 체포할 것을 계획하고 신민회(新民會)가 암살을 음모했다는 구실을 날조하여 유동열, 윤치호, 양기탁, 이승훈, 이동휘 등 700여명을 검거하였다.
체포된 회원들은 고문끝에 123명이 기소되었고, 1912.7.22 이날 판결에서 안명근, 김구, 이승훈 등 105명이 유죄판결을 받았으며, 신민회 자체는 존속불능의 타격을 받아 자연 해체하게 되었다.
② 행주대교(幸州大橋) : 경기도 고양군 지도면 행주외리와 강서구 개화동의 상사동을 잇는 폭10m, 연장1,400m의 2차선 다리.
1975.7.5 착공.
1978.7.22 완공.
③ 최초의 신소설 <혈의 누> 연재 시작(1906) : 7월 22일 한국 최초의 신소설 작품인 이인직의 <혈의 누> 상편이 <만세보>에 연재되기 시작했다.
하편은 논란의 여지는 있지만 1913년 2월 5일부터 <매일신보>에 연재한 <모란봉>으로 알려져 있다.
<혈의 누>는 1894년 청일전쟁을 기점으로 자주의식의 각성, 신학문의 유입에 따른 자유결혼, 재가허용 등의 신결혼관이 드러나 있는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저자인 이인직은 이밖에도 <귀의 성> 등의 작품을 더 남겼으며, 연극운동에도 관심이 많아 1908년 원각사를 세워 한국 최초의 신극이라 할 수 있는 <은세계>를 공연하기도 했다.
④ I M F : 2차대전중이던 1944.7.1-22 44개연합국대표들이 미 뉴햄프셔 주(州) 브레턴우즈에 모여 대전후의 국제통화안정과 국제투자촉진을 위해 세계은행(IBRD)과 국제통화기금(IMF)을 만든지 꼭 50년(1994 현재).
세계 각국에서는 이 두 기구에 대한 평가가 활발히 이뤄 지고 있다.
⑤ 조선통신사 황윤길, 김성일 일본 도착(1590) : 1590년 3월 황희의 5세손인 황윤길을 정사, 부제학 김성일을 부사, 허성(許筬)을 서장관으로 하여 통신사 일행을 일본에 파견하였다.
황윤길을 정사,김성일을 부사, 허성을 서장관으로 하는 통신사일행이 교토에 도착한것은 1590년 7월 22일이었다.
히데요시는 당시 오다와라 성의 호조씨를 공격하고 있었기때문에 통신사는 11월에야 주라쿠데이에서 히데요시를 면회하고 조선국왕의 국서를 전달했다.
그 주요내용은 무로마치시대에 아사카가 쇼군을 일본국왕으로 해온 관례에 따라서 히데요시를 ''''일본국왕 전하''''라고 하고 그의 천하통일을 축하하는 동시에"하루 빨리 신뢰와 친목을 구축하여 선린을 돈독히 하기를 바란다"는 것이었다.
즉 빠른시일안에 교린관계를 회복하기를 희망했던것이다.
1590년 11월 황윤길 일행은 도요토미로를 만나 답서를 받아으며, 이듬해인 1591년 1월에 귀국하였다.
1591년 3월 귀환 보고에서 황윤길은 일본이 조선을 침략할 생각이 있다고 보고하였으나, 그러나 김성일은 일본이 침략할 것을 짐작하면서도 그 반대로 보고하였다.
통신사로 갔다온 황윤길과 김성일의 일본 정세에 대한 견해 차이로 조정은 한동안 동인과 서인 사이에 논박을 벌여야 했다.
서인인 통신정사 황윤길은 일본이 많은 병선을 준비하고 있어 반드시 침략을 할 것이라고 주장한 데 반해 동인인 김성일은 침입할 조짐이 없었을 뿐 아니라 도요토미는 두려워할 만한 인물이 못된다고 하였다.
이 때 서장관 허성 은 동인이었으나 황윤길과 의견을 같이 하였고, 김성일을 수행하였던 황진 역시 마찬가지였다.
결국 김성일의 의견을 따른 선조와 조정은 임진왜란이라는 국가의 비극을 초래하게 되었고 7년간 조선은 왜구의 침략으로 국토가 유린되어야 했다.
⑥ 종합경제재건 5개년 계획 발표(1961) : 중화학공업 입국과 근대화로 상징되는 6,70년대 한국경제 - 박정희의 친필 ''산업흥국'' - 5.16 군사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 정권은 취약한 정통성을 하루 빨리 세우고 민심을 수습하기 위해서는 경제 재건이 최고의 가치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 결과로 1961년 7월22일 경제기획원의 신설과 함께 ''''종합경제 재건 5개년 계획''''을 발표했다.
그러나 이 계획은 이미 1954년 이승만 정권에서부터 ''''경제부흥5개년계획'''' 이란 이름으로 수립했던 것이었다.
하지만 당시에는 미국의 원조 획득과 배분의 목적이 강했다.
그러다 민주당 장면 정권기에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세운다. 하지만 박정희의 5.16쿠데타로 좌절되고 만다.
⑦ 개발독재의 산실, 경제기획원 신설(1961) : 국무총리 소속하의 중앙행정기관.
1961년 7월 22일에 발족. 국가의 경제 ․ 사회발전을 위한 종합계획의 수립 및 운영과 투자계획의 조정, 예산의 편성과 그 집행의 관리, 각 중앙행정기관 기획의 조정과 집행의 심사분석, 물가안정시책 및 경쟁촉진과 공정거래의 운영 및 대외경제정책의 조정에 관한 사무를 관장하는 기관이었다. 경제개발 계획시기에는 중요한 역할을 했고 심지어 견인차였다는 칭송도 받았으나 관료주의로 무장한 경제체질은 우리 경제의 자율성을 빼앗고 결국 경제위기의 주범이었다는 평가도 있다.
⑧ 북한 왕재산 경음악단 결성(1983) : 1983년 오늘 북한 최초의 경음악단인 '왕재산 경음악단'이 결성됐다.
보천보경음악단과 함께 북한의 대표적인 전자 경음악단이다.
왕재산은 평강군에 있는 산 이름으로, 왕재봉이라고도 하는데 김일성 혁명전적지다.
김순희, 김효숙, 염청 등의 가수가 소속돼 있다.
'당신은 모르실거야', '목포의 눈물', '눈물 젖은 두만강' 등의 남한 가요도 들려 주며 북한 주민들에게 최고의 인기를 누리고 있다.
1991년 중국 상하이 국제음악축전에 참가한 이후 각종 해외공연에도 참여하고 있다.
⑨ 일본 역사교과서 왜곡 규탄 시위(1982) : 1982년 오늘 서울 파고다 공원 !
일본 역사교과서의 왜곡을 규탄하는 시위가 열렸다.
우리 국민들은 이 시위에서 일본 문부성이 검정을 마친 1983년도 신학기용 일본 고등학교 역사교과서의 왜곡된 내용을 시정하라고 촉구했다.
문제의 교과서는 우리 나라와 중국에 대한 일제의 침략을 '진출'이라고 묘사하는 등 침략행위를 미화하고 은폐하는 내용을 실었다.
일본 교과서 왜곡파동은 한 달 뒤인 8월 27일 일본 정부가 '정부의 책임 하에 시정하겠다'는 의사를 밝힘으로써 일단락된다.
⑩ 안기부 '깐수(정수일), 고정간첩' 발표(1996) : 1996년 오늘 !
국가안전기획부는 모 대학 사학과 교수 무하마드 깐수가 북한의 남파 간첩인 정수일 씨로 밝혀졌다고 발표한다.
안기부는 이날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설명회를 열고 정 씨가 1984년 필리핀으로 위장해 입국한 뒤 각종 정보를 80여 차례 북한에 보고했다고 밝혔다.
안기부는 정 씨가 갖고 있던 단파라디오와 지령문, 해독용 암호표 등을 증거물로 공개했다.
정 씨는 간첩활동을 벌인 죄로 같은 해부터 4년 동안 복역한 뒤 2000년 8.15특별사면으로 석방된다.
법무부는 2003년 5월 그에게 한국 국적을 부여한다.
⑪ 박인수 사건(朴仁秀事件) 언도 공판(1955): 1950년대 중반 박인수가 여성을 농락한 사건.
6․25전쟁이 끝날 무렵에 이르러 한국인의 정신적 풍토에는 전쟁이 가져다준 상처와 더불어 심한 혼란이 초래되었으며, 제2차 세계대전 후 서구에서 풍미되다가 늦게 수입되었던 퇴폐와 향락의 소용돌이 등이 사회전반에 방종한 전후 풍조를 조성했다.
세인을 경악케 한 박인수 사건은 이같은 세태를 더욱 실감케 하는 것이었다.
박인수는 애인의 배반에 대한 복수심에서, 당시 한창 유행하고 있던 댄스를 미끼로 약 1년 동안 무려 70여 명의 여인을 농락했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 상대가 대부분 적어도 고등교육을 받았거나 대학 재학중인, 지성을 갖추었고 당시 사회에서 선도적인 지위에 있다고 자부하던 여성들이었다는 점이다.
결국 그는 1955년 5월 31일 검거되어 7월 22일 언도공판에서 공무원 자격 사칭행위에 대해서만 벌금형을 받았고, 혼인빙자간음죄에 대해서는 무죄선고를 받았다.
그러나 재범방지를 위해 관찰보호에 붙여졌다.
법정에서 그는 자신이 상대한 70여 명의 여인 가운데 순결한 처녀는 단 한 사람밖에 되지 않았다고 털어놓음으로써 당시의 사회를 전율케 했다.
이 사건으로 "자기 스스로 보호하지 않는 순결은 법이 보호할 필요가 없다"는 말이 유행하게 되었으며 '자유부인', '사모님' 등의 유행어가 속출했다.
서울지법은 박인수 사건(유부녀 댄스 사건)에 무죄 언도(1955)로 법은 순결한 정조만을 보호한다고 판시한 것이다.
⑫ '신화적 갱스터' 딜린저 사살(1934) : 존 딜린저는 얼굴을 성형수술하고 지문도 황산으로 지웠다.
존 딜린저는 11번의 은행강도와 2번의 탈옥으로 미 전역에 이름을 떨친 신화적인 갱스터였다.
21세 때 벌인 강도미수로 10년간을 교도소에서 보내야했지만 그에게는 고급기술을 습득할 수 있는 배움의 기간이었다.
1933년 5월에 가석방된 딜린저는 중서부 일대 은행들을 털며 대담한 총잡이로 악명을 떨친다.
곧 체포됐지만 바로 탈옥해 강도행각을 이어갔다.
치밀한 계산과 날랜 몸놀림으로 어느덧 대중의 인기까지 얻고 있었다.
또 체포됐으나 이번에는 기발한 탈옥으로 매스컴의 집중조명을 받았다.
나무를 깎아 검게 칠한 가짜 권총으로 12명의 간수를 위협해 교도소를 탈출한 것이다.
탈옥 후에도 몇차례나 은행을 털며 FBI와도 여러번 맞딱뜨렸지만 그때마다 그는 미꾸라지였다.
FBI를 조롱하는 편지까지 보내자 화가난 FBI는 사살하기로 결정한다.
1934년 7월22일 밤, 시카고의 한 극장을 나서는 딜린저를 향해 127명이나 되는 FBI 요원들의 총구가 동시에 불을 뿜었다.
포주였던 애인이 밀고한 것이다.
⑬ 드레퓌스 공식 복권(1906) : 7월 22일 반역 혐의로 체포된 프랑스의 장교 드레퓌스가 공식적으로 복권되었다.
'라페르'(l'Affaire:사건)라고도 불리는 드레퓌스 사건은 프랑스 제3공화정의 역사와 현대사에 중요한 이정표가 되었다.
사건의 발단은 1894년 드레퓌스가 독일 대사관원 장교에게 군사기밀을 팔아넘긴 죄로 고발당해 12월 22일 프랑스령 기아나 앞바다의 '악마의 섬'이라는 악명 높은 범죄자 수용소에서 종신형을 살도록 선고받으면서부터이다.
반유대주의파가 이끌던 여론과 프랑스의 언론들이 이 선고를 환영했으나 몇 가지 의혹이 싹트기 시작했다.
1898년 1월 13일 소설가 에밀 졸라가 <나는 고발한다 J'accuse>라는 제목으로 공개 서한을 발표하면서 이 사건은 국민의 주목을 끌기 시작했다.
결국 드레퓌스 사건을 재심하라는 탄원서에 아나톨 프랑스, 마르셀 프루스트를 비롯한 3,000여 명의 프랑스인이 서명하면서 문제는 더욱 불거졌다.
그러던 중 관련 문서를 조작한 앙리 소령이 문서를 위조했음을 고백하면서 사건은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다. 이에 따라 재심에 들어갔고 1906년 6월 상고법원이 그의 결백을 밝혀냈다.
⇨7월 12일.
⑭ 유대인 게릴라, 영국총독부 폭탄테러(1946) : 1946년 오늘 !
유대인 게릴라들이 예루살렘에 있는 킹 데이비드(King David)호텔을 폭파한다.
이 호텔에는 팔레스타인을 위임통치하던 영국 총독부와 헌병 사령부 등이 있었다.
이 폭탄테러로 영국인 28명과 아랍인 41명, 유대인 17명 등 모두 91명이 사망하고 45명이 부상했다.
유대인의 팔레스타인 이주를 막은 영국 총독부에 대한 보복성 테러였다.
유대계 테러단체인 이르군 쯔바이 레우미(Irgun Tsvai-Leumi)의 소행으로 밝혀진다.
이 테러를 지도한 사람은 훗날 이스라엘의 총리가 된 메나헴 베긴(Menachem Begin)이었다.
⑮ 안네 프랑크 전(展)(2005) : 전쟁으로 폐허가 된 보스니아의 어린이들이 유니세프에 보낸 편지들을 읽은 기억이 난다.
물도 없고 전기도 없으며 대가족이 한 달 5㎏의 밀가루로 풀칠하고 사는, 학교에서는 굶주려 시들시들 조는 아이들에게 안네 프랑크가 어떻게 희망을 부둥켜안고 살았는지를, 배고파 죽는 것이 아니라 희망이 고프면 죽는다고 두 차례 세 차례 되풀어 선생님이 말씀하셨다는 대목이 있다.
그 책자의 해설에는 학교 반(班)에 따라 죽는 아이가 많고 적고가 현저하여 조사해보았더니 안네 프랑크의 이야기를 들려준 반과 그러하지 않은 반 차이임이 드러났다고도 했다.
안네의 일기를 읽어보면 그 저류에 일관된 맥이 절망 속에 꺼질 듯 말 듯 명멸하는 희망의 불빛임을 알 수 있다.
언니 마르코트와 함께 수용됐던 베르겐 수용소에서도 무척 활달한 수용소생활을 해서 절망 속에 웃음을 유발한 귀염둥이였다고 한 방에 수용됐던 말리온은 회상했다.
발진티푸스로 죽어가는데 안네는 그 전염원인 이(?)를 피해 알몸에 담요만 감고 다니면서 혼잣말을 뇌까렸다.
내 피는 다 빨아먹어도 내 희망만은 빨아 먹지 못할걸….
그 작디 작은 소녀의 희망을 인류의 그 거대한 역사는 구제하지 못했다고 통탄한 것은 버트런드 러셀이다.
정말 이상한 일이다.
이루어질 티끌만한 가망도 없는 바보스럽기만 한 희망들이 저버려지지 않은 것이 이상하기만 하다는 일기 속의 대목도 안네의 일기가 보스니아의 어린아이들에게 희망을 준 것 말고도 되풀이될 인류악에 던져질 작지만 주옥 같은 진주다.
그는 신미생(辛未生)으로 살았으면 76세다.
그가 숨어살았던 방에서 그녀의 아버지 회사에 다니던 여직원이 오렌지색 표지의 일기장을 발견, 안네의 아버지에게 전했고 아버지는 일기 속에서 안네가 화장실에 들어가 국부를 들여다보았다는 대목 등 성(性)에 관한 관심 부분과 부모에 대한 반발, 여성의 지위에 대한 주장 등은 아버지로서 도덕적 손질을 해서 출간했었다.
이 일기를 비롯 안네 프랑크에 대한 각종 자료들을 모은 전시회가 오늘부터 한국에서 열려 그 정신적 궤적을 더듬어 보았다.
(이규태, kyoutaelee@chosun.com.2005.7.22)
⑯ 석유 배급제 : 1942년 7월22일, 미국인들이 휘발유 배급 쿠폰을 받았다.
시행 지역은 석유가 나지 않는 동부 17개주. 미국 역사상 처음으로 국가가 주도한 휘발유 배급제가 시행된 순간이다.
전시 비상수단이었지만 미국인들은 쉽게 수긍하지 않았다.
‘세계 최대 산유국에서 배급제라니!’
휘발유를 구하러 나온 일부 시민들은 유조차를 뒤집는 소동까지 일으켰다.
플로리다주처럼 주정부가 예외를 요청하는 지역도 있었다.
미국 정부는 종합적인 대국민 설득 작업에 나섰다.
휘발유는 당장 부족하지 않지만 일본의 말레이반도 점령으로 천연고무 반입이 끊겨 국민들이 마음껏 차량을 운행하면 타이어가 많이 소모되고 군용차량에 쓰이는 타이어를 제작할 고무가 부족해진다는 논리도 내세웠다.
정부 관리나 군수업자ㆍ의사 등 차량운행이 꼭 필요한 사람들은 ‘X등급’으로 분류돼 무제한으로 휘발유를 구입했으나 대부분의 국민들은 ‘불요불급한 등급’인 ‘A등급’에 포함돼 일주일에 4갤런(약 15.3리터)씩의 휘발유를 받았다.
엄격한 배급제가 시행된 대도시에서 일부 암시장이 형성되기도 했으나 정부의 시책은 대성공을 거뒀다.
종합적인 대책을 함께 시행한 덕이다.
배급제와 함께 주유소 영업시간 제한, 적정 실내온도 유지 캠페인, 석유 냉난방 시설 가동 중단, 대중교통수단 이용 장려 등 요즘 세계 각국이 시행하는 유류 절약운동이 대부분 이때 나왔다.
‘카풀(car pool)’이라는 단어도 처음으로 등장했다.
민수용 자동차 생산까지 전면 금지시키는 강력한 시책으로 미국은 30배나 늘어난 군사용 석유 소비(외국 원조 포함)를 감당해내며 2차대전을 승리로 이끌 수 있었다.
오늘날 지구촌도 석유 위기를 맞고 있다.
역사가 말해주는 대응방법은 단 하나다.
정부와 국민의 협력과 고통분담.
(서경.2008.인터넷한국일보)
⑰ 기타 오늘의 역사
0259 디오니시우스 서품.로마의 주교.희랍 태생으로 발레리누스의 박해당시 키스투스가 죽은 AD 서품되었다.
1209 알바지오바 십자군, 베지에를 공략
1246 교황 인노켄티우스 4세의 위임을 받은 수도사 요한네스 데 플라노 카르피니, 몽골 도착
1254 몽고 차라대의 제1차 고려침입
1597(조선 선조 30) 이순신, 3도수군통제사 됨
1905 지석영의 신정군문(新訂國文) 정리 공포
1907 박영효, 이도재, 남정철 등 무장봉기를 계획하다 체포
1911 안악(安岳)사건 공판 열림(안명근.김구 등 105인 유죄판결)
1933 윌리 포스트, 7일18시간45분간의 단독비행으로 세계일주
1939 경춘선 개통
1940 소련, 발트3국 병합(라트비아 에스토니아 리투아니아)
1943 총독부, 학도전시동원체제 확립요강 시달
1944 미군, 태평양의 괌도에 상륙(: 2차 세계대전 때
1946 볼리비아에 쿠데타, 비라로엘 대통령 교수형 처함
1946 북한, 북조선민주주의 민족통일전선 결성
1946 미국 브레튼우즈서 연합국경제회의 개막
1948 뉴펀들랜드, 주민투표로 캐나다와의 합병 결정
1950 비상향토방위령 선포
1950 전남에 계엄령
1950 언론출판에 특별조치령 공포
1959 대법원, 양산지구 선거무효 확정, 지영진 의원 자격 상실
1967 금성사, FM라디오의 생산보급 본격화
1968 체코주둔 소련군 철수 완료
1971 새 공해방지법 발효
1972 유럽자유무역권 형성
1972 소련 무인탐색선 비너스8호 금성착륙
1975 마이크로소프트사, 세계 첫 마이크로컴퓨터 공급 계약
1976 키신저 미국 국무장관, 한반도문제 해결에 4자회담-교차승인- 유엔동시가입 등 제의
1977 유엔 안보리, 베트남의 유엔가입 승인
1980 정부투자기관 산하 127개 기관 임직원 1,819명 숙정 발표
1982 정부, 일본 역사교과서 왜곡 기술과 관련 시정을 일본정부에 강력 요구
1982 한전, 원전 9-10호기 터빈발전기 등 6억달러 공공차관 도 입계약 프랑스와 체결
1983 폴란드 군사정부 계엄령해제, 정치범 석방
1983 이스라엘-중국, 군원(軍援)협정
1986 북한의 주 스위스 대사 김형우, IOC 위원장에 북한측안 제출
1987 고르바초프, 미국의 중단거리 핵무기 생산중단제안에 합의
1988 노동부, 직업병판정심의위원회 발족
1989 육군본부 신도안 새 청사 현판식(충남 논산군 두마면)
1991 제프리 다머의 광적인 살인극 '밀워키 호러' 발각
1991 삼성전자, 국내 최초로 4메가 FDD 개발
1991 밀워키 경찰, 최소한 17명살해 용의자 제프리 다머 체포
1995 워싱턴에서 열린 한-미 정상회담에서 대북공동전략협의체 구성합의
1999 그린벨트 제도개선책(7개 중소도시권역 전면해제, 7개 대도 시권역 부분 해제) 발표
2000 G8 (서방선진 7개국 + 러시아) IT헌장 채택
2003 한국 샴쌍둥이 자매 민사랑, 민지혜(생후4개월) 분리수술 성공
오늘의 인물
① 이해랑(李海浪 ; 1916.7.22 - 1989.4.8) : 연극인, 배우․연출가.
본명 해량(海良).
서울 출생.
1940년 일본대학 예술과를 졸업하고, 41년 유치진(柳致眞)을 대표로 하는 극단 현대극장의 창립에 가담하였다.
광복 후 극단 <전선(全線)> <극예술원> 등을 창립하여 본격적으로 활동하였고, 54년 예술원 회원, 57년 중앙국립극장장, 58년 국제연극협회(ITI) 한국본부 상임위원 등을 거쳐 60년 동국대학교 교수, 62년 한국연극연구원(드라마센터) 극장장, 67년 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예총) 회장 등을 지냈다.
그는 연기․연출․연극관리 등의 분야에서 활동, 한국연극의 발전에 공헌하였고, 《오셀로》 《다이얼 M을 돌려라》 《밤으로의 긴 여로》 등 많은 작품에 출연 또는 연출하였다.
특히 1966-75년까지 <이동극장운동>을 펼쳐 2800회 공연에 450만 명의 관객이 <연극>을 관람하였다.
1954년 서울시민문화상, 63년 예술원상, 68년 3․1 연극상, 국민훈장 모란장 등을 받았다.
그토록 애를 태우면서 공연을 치르고 나면 연극은 명멸하던 스포트라이트의 불빛과 같이 자취를 남기지 않고 사라지고, 견딜 수 없는 정적만이 썰물처럼 가슴을 파고 스며든다.
관객과 더불어 짧은 순간 속에서 인생의 영원한 꿈을 그리다가 사라지는 허무하기 그지없는 연극을 부둥켜안고….
한국 연극을 고급예술로 끌어올려 세계 연극의 대열에 올려놓은 것으로 평가받는 연극인 이해랑(李海浪)은 생전에 이런 글을 남겼다. 그는 가난한 시절 스스로 연극이란 험난한 길을 택해 고독하게 그 여정을 걸어간 인물이었다.
유민영 단국대 대중문화예술대학원장은 1999년에 펴낸 이해랑 평전에서 그는 한평생 직업으로서가 아니라 사랑과 운명으로 연극을 했다고 회고했다.
이해랑은 군사정권의 강요에 못 이겨 여당 국회의원(8, 9대)을 두 번이나 했지만 주위에 정치 얘기는 꺼내지도 않을 정도로 정치에 무관심했다.
대신 그는 술자리에서 후배들과 격의 없이 어울리며 연극하는 이상의 행복이 어디 있느냐는 말을 자주했다.
저녁이면 밥도 마다하고 맥주와 몇 가지 마른안주로 자정까지 지인들과 어울려 즐겁게 술을 마셨다.
특히 연극인들은 취중에 그가 자연스럽게 던지는 연기 연출론에 매료됐다.
그는 많은 독서와 무대체험을 통해 터득한 연극론을 쉽게 풀어주었던 것이다.
그는 1916년 7월 22일 조선왕조 왕가의 방계 후손으로 태어났다. 그의 고조부가 철종의 4촌이고 조부는 왕실의 의전장이었다.
그러나 명문가의 종손으로 태어났음에도 네 살 때 모친을 여의는 바람에 불우한 청소년시절을 보내야 했다.
그는 일본 유학시절 김동원 등과 함께 연기자로 활약했으며 졸업 이듬해인 1941년 귀국해 현대극장 창립동인 배우로 활약했다.
그 후 밤으로의 긴 여로(1962년), 오델로(1964년) 등에서 배우로서의 원숙미를 보여준 뒤 연출로 방향을 바꿨다.
배우 출신인 그는 누구보다 배우를 잘 이해한 연출가로 평가받는다.
그는 속된 배우는 연극현장의 인생을 표현하고, 진실한 배우는 연극 속에 또 하나의 커튼으로 가려져 있는 인생을 표현한다는 독창적 배우관을 피력하기도 했다.
오늘날 이런 배우를 어디서 만날 수 있을까.
(윤정국 문화전문기자 jkyoon@donga.com)
⇨4월 8일.
② 한영신(韓永信 ; 1887.7.22 - 1969) : 장로교 권사,
여성독립운동가,
교육가.
1948-49년 제16대 전국연합회 회장으로 재선되어 여전도회 사업을 지휘했다.
③ 박 순(朴淳 ; 1523 ~ 1589.7.22) : 조선 중기의 문신․학자.
본관 충주,
자 화숙(和叔),
호 사암(思菴),
시호 문충(文忠),
서경덕(徐敬德)의 문인이다.
1553년(명종 8) 친시문과(親試文科)에 장원, 전적(典籍)․수찬(修撰)․사인(舍人) 등을 지냈다.
1555년 사가독서(賜暇讀書)하고, 그 뒤 한산군수(韓山郡守)․우의정․좌의정을 역임하였다.
1572년(선조 5) 영의정에 올라 14년간 재직하였다.
극심한 동서당쟁(東西黨爭) 속에서 이이(李珥)․성혼(成渾)을 편들다가 서인으로 지목되어 탄핵을 받고 영평(永平) 백운산(白雲山)에 은거하였다.
시(詩)․문(文)․서(書)에 모두 뛰어났으며, 시는 당시풍(唐詩風)을 따랐고, 글씨는 송설체(松雪體)를 잘 썼다.
개성 화곡서원(花谷書院), 광주(光州) 월봉서원(月峰書院) 등에 배향되었다.
문집 《사암문집》이 있다.
④ 이 만(李曼 ; 1605 ~ 1664.7.22) :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 전주.
자 지만(志曼). 양녕대군(讓寧大君)의 후손으로 1628년(인조 6) 생원시를 거쳐 같은 해에 별시문과에 장원하고 예조좌랑 ․정언 ․지평 등을 거쳐 진출하였다.
병자호란 때는 수찬으로 있으면서 적극적으로 척화론을 폈다. 1639년 이후 효종대를 거쳐 현종대에 이르도록 삼사와 이조, 각 도의 관찰사, 호조 ․공조 등의 관직을 두루 거치고 1663년(현종 4)에 한성부우윤에 이르렀다.
그 직전에는 진하겸사은부사(進賀兼謝恩副使)로 청나라에도 다녀왔다.
1631년 왕위에 위협이 될 수 있는 인성군(仁城君) 처벌을 놓고 서인 ․남인이 분란을 벌였을 때 국왕의 방침에 반대하여, 처벌하자고 주장하고 인성군을 두둔하는 정온(鄭蘊)을 공격한 것은 서인의 입장에 선 것이었다.
실무에 밝았으나, 전라도 관찰사로서 금지된 곳에 농장을 설치하여 치부했다거나 중국에 사신으로 갔을 때 상인의 불법 거래를 막지 못했다는 등의 이유로 탄핵을 받아 벼슬에서 물러난 일도 여러 차례였다.
특히 1650년(효종 1) 조선이 일본을 빙자하여 군비를 확충한다고 청나라가 의심하고 협박하여 조정이 위기에 빠졌을 때 경상도관찰사로 있으면서 일본의 상황을 보고한 일을 책임지고 해명하지 않아 그 유죄 여부가 조정의 논란이 되어 영변에 유배된 적도 있다.
그런데도 오랫동안 벼슬을 유지한 것은 송시열(宋時烈) 등이 그를 두둔했기 때문이다.
⑤ 이우식(李祐植 ; 1891.7.22 ~ 1966.7.5) : 한국의 경제인․독립운동가.
호 남저(南樗).
경상남도 의령(宜寧) 출생이다.
1918년 일본에 건너가 도쿄[東京]의 세이소쿠영어학교[正則英語學校]를 거쳐 도요대학교 철학과에 입학하였다.
이듬해 3․1운동이 일어나자 구여순(具汝淳)․최정학(崔正學) 등과 의령 장날을 기하여 만세시위를 주도한 다음, 상하이[上海]로 피신하였다가 1920년 귀국, 안희제(安熙濟)․김효석(金孝錫) 등과 백산무역상사(白山貿易商社)를 설립, 무역업을 경영하면서 많은 독립자금을 모아 비밀리에 대한민국임시정부로 보냈다.
1926년 서울에서 시대일보(時代日報), 1927년 중외일보(中外日報)를 설립, 사장으로 일하면서 민족의식고취에 노력하였다.
1929년 조선어학회(朝鮮語學會)에 가입, 거액의 돈을 기부하여 사전편찬사업 및 학회기관지 《한글》 발간을 도왔다.
1930년 경남은행(慶南銀行) 은행장, 원동무역주식회사(元東貿易株式會社) 사장을 지내다가, 1942년 조선어학회사건으로 체포되어 함흥(咸興)형무소에서 1년 남짓 복역하였다.
8․15광복 후 조선어학회의 재정이사(財政理事)로 있다가 고향에 돌아가 영우회(嶺友會)를 조직, 향토문화의 개발에 힘썼다.
1963년 한글공로상을 수상하였고,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⑥ 금수현(1919.7.22 - 1992.8.31) : ⇨8월 31일.
작곡가.
경상남도 김해 출생.
1937년 부산 제2상업학교(현 부산상고)를 졸업하고, 1940년 일본 동경음악학교(현 동경음악대학)을 졸업하였다.
일본 쇼치쿠가극단-松竹歌劇團에서 근무하였으며, 귀국하여 1942년 동래고등여학교 교사, 소설가 김말봉여사의 따님 전혜금과 결혼
1945년 경남여자중학교 교감, <노래하자회>결성, 1946년 김말봉가사 <그네> 작곡.
1947년 경상남도 도립극장장 재임시 처녀작 <심봉사의 슬픔>을 초연.
1948년 부산사법학교 교감.
가곡 <그네>는 민족적인 선율에 의한 작품으로 대중성을 띠고 널리 알려져 있다.
그는 음악을 지방에 보급하는 운동가로서 특히 부산과 통영 등지의 음악문화발전에 공헌하였다.
1957년 문교부 편수관으로 음악용어를 한글로 바꾸는 데 기여하였으며, 1968년 영필하모니를 창단하여 젊은이들을 위한 교향악운동을 전개하였다.
1970년부터 음악전문지 <월간 음악>을 발간하여 음악언론의 일각을 담당하였다.
1976년 6월 가곡 <파도>가 국립극장에서 연주.
작품으로는 <꽃으로 그린 그림> <정자나무> <눈오는 소리> <완화삼> <구름> <새벽의바다> <장보고> 등이 있다.
저서로는 <가곡집 I․II>, <표준음악사전> <음악․멋․말> 등이 있으며 많은 음악수필을 남겼다.
그의 성은 원래 김-金씨인데 광복 이후 금씨로 바꾸었으며, 자녀들의 한글이름짓기의 선구적 역할을 담당하여 금난새, 금노상, 금누리 같은 이름을 남겼다.
그로 인해 제10회 외솔상을 받았다.
(출처:엠파스/김성배저 문학을 찾아서 시비를 찾아서)
⑦ 멘델(Gregor (Johann) Mendel ; 1822.7.22 - 1884.1.6) : 오스트리아의 식물학자.
유전학의 시조.
멘델은 식물이 어떻게 자신의 형질을 나타내게 되는지를 연구한 학자이다.
1843년 모라비아의 브륀(지금의 체크 브르노)에 있는 아우구스티누스 수도원의 수도사가 되었고, 수행을 하는 동안 과학에 큰 관심을 가졌다.
1851~53년 빈대학교에서 물리학과 식물학을 공부했다. 1854년에 브륀으로 돌아왔고, 1856년에 완두콩의 교배 실험을 시작했다. 1865년에는 '식물의 교잡'에 대한 실험을 정리해서 발표했다.
그러나 1868년 대수도원장으로 선출된 이후 수도원을 관리하는 책임자로서의 직무 때문에 실험을 지속할 수가 없었다.
훗날 1900년 유럽의 식물학자 카를 에리히 코렌스, 에리히 체르마크 폰 세이세네크, 휴고 드 브리스 등이 각각 멘델과 비슷한 결과를 얻어내고, 34년 전에 발표된 실험 결과와 개괄적인 원리를 문헌에서 찾아냄으로써 멘델은 죽은 뒤 명성을 얻게 되었다.
⑧ 피아치(Giusepp Piazzi ; 1746.7.16 ~ 1826.7.22) : ⇨7월 22일.
이탈리아의 천문학자.
바르테리나의 폰테 출생.
토리노대학교․로마대학교에서 공부하였으며, 1770년 마르타대학교 수학 교수를 거쳐, 1780년 팔레르모대학교 천문학 교수가 되었다. 1791년 팔레르모천문대를 건설하여 초대 대장이 되었고 1792년부터는 항성목록(恒星目錄) 작성에 착수하였으며, 1801년 최초의 소행성(小行星) 케레스를 발견하여 유명해졌다.
1803년과 1814년에 각각 수천 개의 항성목록을 완성하고, 별들이 태양에 대하여 상대운동을 한다는 것을 밝혀 프랑스 과학원상을 받았다.
1817년 이후에는 나폴리천문대 대장으로 있었다.
⑨ 윌리엄 아치볼드 스푸너(Spooner ; 1844.7.22 - 1930) : 런던서 사망.
스푸너는 옥스퍼드대학 뉴칼리지에서 고대사.철학.신학을 가르치며 학장까지 지낸 성공회 성직자다.
한 번은 빅토리아여왕도 끼인 만찬에서 그가 우리 별난 학장님을 위해(for our queer old dean) 건배를 외쳤다.
사실 그는 우리 경애하는 여왕님을 위해(for our dear old queen) 건배를 하려 했으나, dear queen(경애하는 여왕)의 첫 소리 /d/와 /k/를 맞바꿔 queer dean(별난 학장)을 만들어버린 것이다.
스푸너는 이런 두음전환(頭音轉換)을 통한 말실수를 일상으로 저질렀다.
그는 불을 밝히자(light a fire)고 말하려다 거짓말쟁이와 싸우자(fight a liar)고 말했고, 여러 톤의 흙(tons of soil)을 노역(勞役)의 자식들(sons of toil)로 바꿨다.
역사학 강좌를 빼먹은(missed history lecture) 학생에게는 괴기 강좌를 야유(hissed mystery lecture)했다고 야단치기도 했다.
스푸너가 벌레를 두 마리를 맛보다니!(Youve tasted two worms!) 하고 한탄할 때, 학생들은 이 말을 두 학기를 낭비하다니!(Youve wasted two terms!)로 번역해 들어야 했다.
그 뒤 언어학자들은 이런 두음전환을 스푸너리즘(spoonerism)이라고 부르게 됐다.
스푸너리즘은 한국어에도 있을 수 있다.
식당에서 삶은 닭을 주문하려다 닮은 삵을 주문할 수도 있고, 소리를 작게 하라고 말한다는 것이 조리를 삭게 하라가 돼버릴 수도 있다.
서러운 돈 좀 씻으라는 말은 더러운 손 좀 씻으라는 말일 터이다.
미운 놈의 숨을 꺾는 것과 꿈을 섞는 것, 어느 쪽이 더 현명할까?(고종석,2004)
⑩ 헤르츠(Gustav Ludwig Hertz, ; 1887.7.22 ~ 1975.10.30) :
독일의 물리학자.
함부르크주 출생.
H.R.헤르츠의 조카이다.
괴팅겐대학교를 거쳐 뮌헨대학교․베를린대학교에서 공부하였다. 1913년 베를린대학 연구조수가 되어 J.프랑크와 공동으로 전자(電子)의 충돌실험을 수행하여 보어의 원자모형의 기초 가정(假定)인 정상상태의 존재를 보여주었다.
이것은 많은 기체에 대한 이온화퍼텐셜의 측정을 시도한 후에 전자에너지 손실과 원자스펙트럼항(項)과의 관련을 살핀 것으로, 원자구조론, 따라서 양자론(量子論)의 진보에 큰 영향을 주었다.
이 업적으로 프랑크와 함께 1925년 노벨물리학상을 수상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에 종군하여 부상하였으며, 1917년 베를린에 돌아왔다가 네덜란드의 필립스전등회사에 근무, 1925년 귀국하여 할레대학 교수, 1927년 베를린의 샬로텐부르크공과대학 교수, 1935년부터 지멘스회사 연구소장으로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 종전시에 소련군에 연행되어 소련에 가서 1954년까지 연구에 종사하였고, 1954~1961년 라이프치히의 칼마르크스대학 교수로 있었다.
⇨10월30일.
⑪ 샌드버그(Carl Sandburg ; 1878.1.6 ~ 1967.7.22) : 미국의 시인.
스웨덴계 이민의 아들로 일리노이주(州) 출생.
집이 가난하여 어려서부터 갖가지 노동에 종사하다가 아메리카-에스파냐 전쟁에 종군하였다.
제대 후에는 고향에 있는 롬버드대학에서 고학으로 공부하였으며, 그 뒤 신문기자가 되어 정치운동에도 관여하는 한편, 시작(詩作)에도 손을 대었다.
1914년에 잡지 《포에트리 Poetry》에 《시카고 Chicago》라는 작품을 발표하여 일약 시인으로서의 명성을 얻었다.
그의 시는 시카고라는 근대도시를 대담 솔직하게 취급, 부두 노동자나 트럭 운전사들이 쓰는 속어나 비어(卑語)까지도 시에 도입, 전통적인 시어(詩語)에 집착하는 사람들에게 충격을 주었다.
1916년에 《시카고》를 포함하여 중서부 지방의 자연을 노래한 작품을 모아 《시카고 시집 Chicago Poems》을 출판, 뒤이어 《옥수수 껍질을 벗기는 사람 Cornhuskers》(1918, 퓰리처상 수상) 《연기와 강철 Smoke and Steel》(1920) 《전(全)시집 Complete Poems》(1950, 퓰리처상 수상) 등을 간행하였다.
그는 또 링컨 연구자로도 유명하여 대작 《링컨, 대초원 시대 Abraham Lincoln:the Prairie Years》(2권, 1926) 《링컨, 남북전쟁 시대 Abraham Lincoln:the War Years》(4권, 1939, 퓰리처상 수상)를 썼고, 이 밖에 각지의 민요와 전설을 모은 《아메리카 민요집 The American Songbag》(1927), 자서전 《언제나 젊은 이방인들 Always the Young Strangers》(1953) 등을 남겼다.
⇨1월 6일.
⑫ 가리발디 출생(1807) : ⇨6월 2일.
⑬ 알렉산더 콜더(Alexander Stirling Calder ; 1898.7.22 ~ 1976.11.11) : ⇨11월 11일.
[요약] 미국의 조각가로 움직이는 미술인 '키네틱 아트(Kinetic Art)'의 선구자이다.
"몬드리안의 작품을 움직이게 하고 싶다"는 생각으로 '움직이는 조각(mobile)'을 제작함으로써 조각을 대좌(臺座)와 양감에서 해방시켰다.
국적 미국
활동분야 예술-조각
출생지 미국 펜실베이니아주 론턴
주요수상 1952년 베네치아 비엔날레 조각대상 수상
[본문] 어머니는 화가였고, 아버지는 조각가였다.
1915~1919년 스티븐스 공과대학에서 기계공학을 전공하였으며, 1919~1921년에는 자동차 기술자, 도안사, 능률기사, 보험회사 조사원, 기계 판매원, 지도 제작자, 기계 디자인의 식자공으로 뉴욕 ·코네티컷 ·미주리 ·오하이오 ·버지니아 주의 여러 곳을 돌아다녔다.
1923년 뉴욕의 미술학교 아트스튜던츠 리그에서 회화를 공부하였으며, 1926~1936년에는 주로 파리에 머물면서 P.몬드리안, J.미로, J.아르프, M.뒤샹과 사귀면서 그들의 영향을 받았다.
특히 1927년에 스튜디오에서 철사 ·나무조각 ·종이 ·가죽 등 여러 재료로 만든 서커스 단원과 동물들로 매주 4일 서커스 공연을 연출하였는데, 소문을 듣고 찾아온 사람들은 마루바닥에 앉아 장난감 동물들과 곡예사들의 묘기에 폭소를 터뜨리며 박수를 보냈다고 한다. 그 가운데에는 레제 ·르 코르뷔지에 ·몬드리안 등이 있었다.
특히 몬드리안에 압도된 그는 “몬드리안의 작품을 움직이게 하고 싶다”고 생각하였고, 그 구체적 표현이 ‘움직이는 조각(mobile)’이었다. 그의 모빌은 조각을 대좌(臺座)에서 해방시켰고, 양감에서도 해방시켰다.
1935년 이후의 모빌은 모터보다는 기류(氣流)에 의해 움직이는 쪽으로 이동하였다.
그것은 가는 철사에 연결된 철판으로 된 형태들이 기류를 따라 또는 상호 균형의 원리를 따라 계속해서 움직이는 조각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미국이 낳은 훌륭한 조각가의 한 사람으로 인정을 받았고, 1952년에는 베네치아 비엔날레 국제전람회에서 조각대상을 받았다.
1960년대 이후 대형조각 붐이 일어나면서 그의 작품들은 비행장 ·미술관 ·광장 등에 세워졌다.
그의 업적은 움직이는 미술인 ‘키네틱 아트(Kinetic Art)’의 선구자였다는 데 있으며, 그 이후 J.탱글리, J.리키 등의 조각가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두산백과사전)
⑭ 존 딜린저(John Herbert Dillinger ; 1903.6.23 미국 인디애나 인디애나폴리스 ~ 1934.7.22 시카고) : ⇨6월 23일.
미국에서 가장 유명한 은행강도.
1933년 6월부터 1934년 7월까지 짧은 기간에 강도와 탈옥으로 언론매체의 주요 뉴스거리가 되었다.
딜린저는 인디애나폴리스에서 태어났으나 가까운 무어스빌에 있는 한 농장에서 청년기를 보냈다.
1923년 해군에 입대해서 해군함정 '유타호'에서 근무했으나 몇 달도 채 안 되어 탈영했다.
1924년 9월 무어스빌의 한 식품점을 털려다 체포되어 1924~33년 인디애나 주립교도소에 갇혀 있었다.
복역하는 동안 포악한 전문강도들로부터 은행강도 기술을 배웠으며, 1933년 5월 22일 가석방되자마자 배운 기술을 활용하여(다른 4명의 공모자와 함께) 4개월만에 인디애나와 오하이오에 있는 5개 은행을 털어서 대담하고 무모한 멋쟁이 총잡이로 악명을 떨치게 되었다.
오하이오에서 복역중이던 1933년 9월, 역시 인디애나 주립교도소를 탈옥한 5명의 죄수가 도와주어 탈옥에 성공했다.
이 죄수들은 그가 옛날에 탈옥자금과 계획을 함께 세웠던 동료들이었다.
그뒤 동료 갱들과 함께 인디애나와 위스콘신에 있는 은행들을 턴 다음 남쪽 플로리다와 애리조나 투산으로 달아났으나 지방경찰에 발견되어 체포되었다.
인디애나로 넘겨져 인디애나 크라운포인트 교도소에 수감되었으나, 1934년 3월 3일 가장 유명한 사건으로 알려진 탈옥을 감행했다.
면도날로 나무를 깎고 구두약으로 검게 칠해 만든 가짜 권총으로 12명의 간수를 위협해서 교도소를 탈출했던 것이다.
그는 "마지막 한탕 하러 간다네"라는 노래를 부르며 교도소를 빠져나갔다고 한다.
또다시 새로운 동료들과 몇 차례 은행을 털었으며, 미네소타와 위스콘신에서 미국연방수사국(FBI)의 계략과 총격을 아슬아슬하게 벗어난 것도 여러 번이었다.
그러나 FBI, 인디애나 경찰, 그리고 친구인 포주 애나 세이지가 함께 꾸민 계략에 빠져 드디어 최후를 맞게 되었다.
유명한 '붉은 옷을 입은 숙녀'인 세이지가 딜린저를 시카고의 바이오그래프 극장으로 유인했고, 딜린저는 극장에 나타나자마자 총에 맞아 죽었다.
그러나 어떤 연구가들은 바이오그래프 극장 밖에서 총에 맞아 죽은 것은 딜린저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며, 동료들이 FBI를 멋지게 속여넘기는 동안 딜린저는 유유히 사라져버렸다고 주장해왔다.
⑮ 조반니노 과레스키( ; 1908 - 1968.7.22) : 이탈리아의 풍자작가
1951년 말 이탈리아 중북부 포 강 유역에는 1주일 내내 장대비가 내렸다.
마을 사람들 사이에서 심상찮은 분위기가 감돌았다.
“짐을 쌀 시간도 없어. 우리 마을 둑이 무너지기 전에 강 건너 마을의 둑을 무너뜨려야 해.”
이때 신부인 돈 카밀로가 나섰다.
“무너지지 않을 거요.
장담하겠소.
나는 지금 강둑으로 가서 버티고 서 있을 작정이오.
모두 침착하게 피신하시오.”
돈 카밀로는 둑 위로 거침없이 걸어갔고 마을 사람들은 어쩔 줄 몰라 했다.
“돈 카밀로, 나도 당신과 함께 가겠소.”
사사건건 돈 카밀로와 대립하고, 수시로 주먹다짐을 벌이는 읍장이자 이 마을 공산당 우두머리 페포네였다.
두 사람은 나란히 강둑 바위 위에 앉았다.
마을 사람들이 모두 피할 때까지 강둑은 무너지지 않았다.
소설가이자 저널리스트, 만화가였던 조반니노 과레스키가 쓴 ‘돈 카밀로와 페포네’ 중 한 에피소드를 줄여 재구성한 것이다.
1908년 포 강 주변 마을에서 태어난 과레스키는 대학에 진학했지만 집안 사정으로 학업을 중단하고 지역신문 기자가 됐다.
이후 풍자잡지인 베르톨도의 편집장을 맡아 무솔리니 정부를 비판하던 그는 1943년 군대에 끌려갔고 그해 이탈리아가 패전한 뒤 폴란드의 포로수용소에서 3년을 보냈다.
돌아온 그는 풍자잡지 칸디도를 창간해 글을 썼다.
1946년 12월 23일 밤 그는 칸디도와 다른 잡지에 게재할 글 2건을 마감해야 했다.
먼저 쓴 글을 다른 잡지에 실어버린 그는 30분 만에 후다닥 이야기를 지어내 칸디도에 실었다.
신부님 시리즈 첫 편이었다.
이후 수백 편의 신부님 시리즈를 통해 제2차 세계대전 후 이탈리아 사회의 극심한 이념 대립을 유머러스하게 그려낸 그는 1968년 7월 22일 심장마비로 숨졌다.
소설 속 돈 카밀로는 사소한 일에 흥분해 주먹을 휘두르고, 어수룩한 페포네를 골탕 먹이며 좋아하는 ‘인간적’인 우파 신부지만 따뜻한 마음과 깊은 신앙심을 지녔다.
자동차 수리공이자 공산주의자인 페포네는 겉으로는 과격해도 이웃에 대한 깊은 사랑을 숨기고 있었다.
이 소설은 매회 두 사람의 첨예한 갈등에서 시작하지만 둘이 협력해 마을과 이웃을 지키고, 서로를 용서하며 끝난다.
두 사람의 노력으로 원수로 지내던 좌우파 집안 자녀의 결혼 같은 작은 기적이 이 마을에서는 끊임없이 일어난다.
장맛비 속에서 시위대가 전경버스를 부수고, 경찰은 물대포를 쏘는 게 지금 우리의 현실.
한국 사회에는 언제쯤 돈 카밀로와 페포네의 마을처럼 이념을 넘은 신뢰와 사랑이 싹틀까.
(박중현 기자 sanjuck@donga.com.2008)
⑯ 기타 오늘의 인물
1663 위리스턴 사망.왕당파와 의회파 사이에서 벌어진 영국 시민전 쟁 때에 주도적인 군주제 반대자였던 스코틀랜드 장로교도.
1676 클레멘스 10세 사망.그는 1670년 교황 즉위시 클레멘서 10세 란 칭호를 선택함.
1680 카메론 출생.스코틀랜드으 맹약자 지도자며 에어셔의 에머스 모스 또는 에어드스모스에서 살해당함.
1784 별의 위치를 측정한 독일의 천문학자 베셀 출생
1810 노트맨 출생.유명한 건축가.교회건축에 있어서 그는 현시대의 가장 대표적인 인물중 한사람.
1822 화가 에드워드 호프 출생
1833 패터슨 출생.그는 깊은 신앙과 교양있는 지성과 교양있는 지 성과 온화한 성품을 지닌 인물이며 맡겨진 사역을 감당해낼 수 있는 재능을 가짐.
1880 스미드 출생.역사가.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에 대한 학문적인 저술들로 유명함.
1883 홍순호 출생.감리교 목사.미감리회 선교사 버딕에게 세례를 받고 선교사와 함께 전도에 참여함.
1883 정일선 출생.장로교 목사.순교자.모친이 병환중 위독하자 단 지를 하여 피를 먹여 소생케 하는 등 효성이 지극함.
1890 로즈 케네디여사 출생
1893 정신과의사 칼 메닝거 출생
1898 모빌 조각을 창시한 미국의 조각가 콜더 출생
1898 조각가 알렉산더 캘더 출생
1907 홍태순 사망.기독교인 민족운동가,순국열사,경기도 양주사람. 일제의 강요에 의해 고종이 폐위되자 분개하여 대한문 앞에서 자살.
1908 노첼라 사망.추기경.로마신학교에서 교육을 받았고.교황좌 대 서기로 임명되었고.추기경회의의 서기로 일하다 콘스탄티노플 의 명의 총대주교로 임명됨.
1923 로버트 돌 미상원 원내총무 출생
1939 영국배우 테렌스 스탬프 출생
1947 록뮤지션 돈 헨리 출생
1979 매독 검사법을 개발한 미국의 면역학자 칸 사망
오늘의 샘터
① 그레고르 멘델의 말 : "1859년 나는 첫 세대 잡종에서 크고 맛좋은 씨를 가진 매우 번식력 있는 후손을 얻었다. 이듬해부터 그 자손은 바람직한 형질들을 유지했고, 또한 한결같았다. 이 변종은 우리 수도원 채소밭에서 재배되었으며, 1865년까지 많은 식물들이 해마다 길러졌다. "
② 작품 해설 <혈의 누> : 이 작품은 청일 전쟁을 배경으로 하면서 10년 동안이란 시간의 경과 속에서 한국․일본․미국을 무대로, 여주인공 '옥련'의 기구한 운명에 얽힌 개화기의 시대상을 그리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시대 현실의 반영을 통해서 자주 독립․신교육․신결혼관 등의 주제 의식을 보이고 있다.
청일전쟁으로 혼란스러운 평양에서 일곱 살 난 옥련은 부모를 잃고 헤매다가 부상을 당한다.
그뒤 일본인 군의관 이노우에에게 구출되고 일본에 있는 그의 부인에게 보내져 학교도 다닌다.
그러나 이노우에가 전사하자 개가를 꿈꾸는 부인은 옥련을 구박한다.
집을 나와 방황하던 옥련은 나라를 부강하게 하기 위해 유학가려던 구완서라는 청년을 만나 함께 미국으로 간다.
한편 모란봉 근처에서 남편과 딸을 잃고 헤매다가 실의에 빠진 옥련 어머니는 대동강에서 투신자살을 기도했으나 구출되고, 아버지는 구국을 위해 외국으로 유학간다.
옥련은 미국에서 고등소학교를 우등으로 졸업한 자신의 기사를 본 아버지와 만난 뒤 구완서와 약혼한다.
평양의 어머니는 죽은 줄 만 알았던 딸로부터 편지를 받고 기뻐한다.
이 소설은 낙관적 개화주의에 빠져있다는 비판을 받기도 하나, 문명사회에 대한 동경과 자유결혼을 주제로 하여 새 시대의 모델을 제시하려 한 작자의 의도가 엿보인다.
더구나 다른 한편, 대중들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구어체 문장을 사용했다는 점에서는 높이 평가되고 있다.
또 상투적인 한문구를 배제한 것도 이 소설의 성과이다.
이처럼 쉬운 문장은 훗날 우리나라에서 현대소설을 태동시키는 초석이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