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중앙박물관이 기획전시실에서 가을특별전
‘가을, 추(秋)-유물 속 가을 이야기’를
2008. 10. 02.(목)부터 11. 16.(일)까지 열고 있다.
마침 오늘 대입 수능도 끝나고 하니 수험생을 둔 부모님들은
머리도 식혀줄 겸 주말 나들이를 권장해본다.
가을을 소재로 한 회화와 서간류,
한시와 시조 등을 모은 전시회다.
조선 중후기 회화사를 장식하는
내노라하는 화가들의 작품이 총출동했다고 한다.
그러나 수준높은 전시품과 세련된 전시구성에 비해
관객수는 너무도 적어 보였다.
드라마의 영향으로 간송미술관에 걸린
혜원 신윤복의 <미인도>를 보러온 관객들이 많았다고 하던데...
모처럼 옛그림에 대한 관심을 계속 이어가는 시민들의
애정어린 관람을 적극 권장한다.
전시는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가을은 일년 사계절 가운데 세 번째 절기로,
사계절이 뚜렷한 온대지방에만 나타나는 계절이다.
가을이 되면 온 산하가 단풍으로 물들고,
온 들녘이 황금빛의 오곡으로 뒤덮이게 된다.
이번 전시는 우리 조상들이 예술 속에 담아내고자 했던
이러한 가을의 정서를 문화유산을 통해 체험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하고자 기획되었다고 한다.
도입부인 "가을을 말하다"
제1부인 "가을을 그리다."
제2부인 "가을을 느끼다"
제3부인 "가을을 노래하다"
제4부인 "가을을 거두다"
등 5부로 구성되어 있다.
이번 전시는 우리 문화재의 뛰어난 조형성과 아름다움을
가을이라는 계절의 정서를 통해 엿봄으로써,
관람객이 전통 문화에 대한 인식을 새로이 하고,
전통문화를 보다 쉽게 다가갈 수 있는 대상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김홍도, 정선, 강세황 등 잘 알려진 작가의
유명 회화 작품을 대거 전시하고 있다.
또한, 옛 이야기를 통해 가을을 느끼고
사유할 수 있도록
시와 시조, 편지 등
다양한 종류의 유물도 함께 소개된다.
전시실로 가는 길이 온통 가을로 물들어 있다.
이번 가을은 예년에 비해
단풍이 곱지는 못하다고 해도
길었던 여름의 무더위로 인해
11월까지는 단풍을 즐길 수 있게 되었다.
도입부 "가을을 말하다."
가을의 자연과 절기, 가을의 상징을 소개하여
가을이 옛 선인들에게 어떤 의미였는가를 보여준다.
전시장 입구에 전시된 이인문의 <강산무진도(江山無盡圖)>.
가로 길이만 8.5m에 달하는 두루마리 그림.
15년 만에 처음으로 화폭 전체가 공개됐다고 한다.
이인문은 조선 후기 단원 김홍도와 자웅을 겨뤘던 화원 화가로
요즘 인기 있는 드라마 <바람의 화원>에서 단원의 절친한 친구로 등장하고 있다고...
<강산무진>은 중국 남종화의 화법을 바탕으로 사계절을 한 폭에 담아낸 그림.
아스라이 먼 산 아래 들과 강이 굽이치듯 펼쳐지다가
다시 기암괴석과 소나무가 어우러지고
추색이 완연한 붉은 나무들이 사이사이 묘사돼 있다.
조선에는 실재하지 않았던 풍경이다.
풍경이 풍경에만 머무르면 그림은 심심해지기 쉽다.
화가는 곳곳에 나귀를 타고 산수를 유람하는 이들부터
배를 타고 고기를 낚는 어부,
도르래를 이용해 물건을 나르는 필부 등
다양한 인간군상들의 생활풍속을 함께 묘사했다.
이인문[李寅文]〈1745(영조 21)~1821(순조 21).〉
조선 후기의 화가.
본관은 해주(海州). 자는 문욱(文郁),
호는 유춘(有春)·고송유수관도인(古松流水館道人)·자연옹(紫煙翁).
아버지는 신대(愼大)이다.
사자관(寫字官) 등에 종사하던 중인 기술직 집안에서 태어났다.
화원이 되어 주부와 연풍현감을 지냈으며,
1795년(정조 19) 〈수원능행도병 水原陵幸圖屛〉과
1802년(순조 2) 〈순조순원후가례의궤도 純祖純元后嘉禮儀軌圖〉의 제작에 참여했다.
동갑생이었던 김홍도(金弘道)를 비롯하여
강세황(姜世晃)·남공철(南公轍)·박제가(朴齊家)·신위(申緯) 등의
문인화가와 강희언(姜熙彦)·임희지(林熙之)·김영면(金永冕)·이유신(李維新)·김득신(金得臣) 등의
중인 및 화원화가들과 교유했다.
인물·영모(翎毛)·포도 등 다방면에 걸쳐 재능을 발휘하여
신위는 그를 김홍도와 쌍벽을 이룬 명수로 손꼽았으며,
남공철은 명대 원파(院派)의 대가인 당인(唐寅)의 기량에 비견된다고 평가했다.
그중 가장 뛰어난 분야는 산수화였으며,
특히 송림(松林)을 즐겨 그려 이 방면에 새로운 경지를 개척했다.
명암이 엇갈리고 몸이 뒤틀린 모습의 소나무와
단아한 필치의 수목들과 각진 바위들을 특징있게 묘사했던 그는
남종화와 북종화에 각 체의 화법을 혼합하여 특유의 산수화풍을 이룩했다.
이러한 종합적 성격의 화풍은 심사정(沈師正)·최북(崔北)·김홍도 등의 작품세계와
상통되는 것으로 당시 산수화풍의 주도적 흐름을 대변하는 것이라 하겠다.
그의 작품들은 비교적 섬세한 필치로 단단하고 각이 진 모습의 선묘적 경향과
깔끔하고 청정한 분위기를 특징으로 하며,
만년에는 강하고 대담한 발묵(潑墨) 위주의 표현적인 붓질로
격식을 초월한 그림을 즐겨 그리기도 했다.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강산무진도 江山無盡圖〉·〈누각아집도 樓閣雅集圖〉·
〈송계한담도 松溪閑談圖〉·〈대부벽준산수도 大斧劈皴山水圖〉(국립중앙박물관)와
〈단발령망금강도 斷髮嶺望金剛圖〉(개인 소장) 등이 있다.
바다가 뿜어내는 안개가 먼 잔산(殘山)들의 밑동을 휘감았고,
그 안개 속에는 내가 모르는 시간의 입자들이 태어나서 자라고 번창했다.
...중략...
화가가 이 세상의 강산을 그린 것인지,
제 어미의 태속에서 잠들 때 그 태어나지 않은 꿈속의 강산을 그린 것인지,
먹을 찍어서 그림을 그린 것인지
종이 위에 숨결을 뿜어낸 것인지 알 수 없는 거기가,
내가 혼자서 가야 할 가없는 세상과
시간의 풍경인 것처럼 보였다.
<김훈의 강산무진 본문중에서>
<강산무진>이 상상속 산수의 진수를 보여준다면,
전시장 한쪽에 마련된 ‘금강산 그림’ 코너에 전시된
겸재 정선과 단원 김홍도 등이 남긴 금강산 그림은
실재하는 산수를 직접 화가가 두 눈으로 보고
화폭에 담아낸 진경산수화의 완숙된 경지를 보여준다.
다른 화가들에 비해 시야가 넓고 붉은색을 즐겨쓴
정수영의 <해산첩>에 수록된 <금강산전경>,
단원의 스승이었던 문인화가 표암 강세황의 <풍악장유첩>도
눈여겨볼 만하다.
김두량·김덕하 부자 화가가 그린 <사계산수>와
벼타작하는 농민들과 감독관 사이에 서린 긴장감을
탁월하게 표현한 단원 김홍도의 <세상구경그림(行旅風俗圖屛)> 등
대개의 회화는 이번 전시가 끝나면
2~3년 동안 수장고로 다시 들어가 쉬 보기 어려운 그림들이다.
백호도.
사신 중 하나로, 서쪽을 지키는 신을 상징하는 동물이다.
우리나라는 고대부터 사신을 숭상하였으며,
특히 고구려 고분 안에는 동서남북의 네방향에 주로 사신을 그렸다.
이 그림은 평양에 있는 강서큰무덤의 주실서쪽 벽에 그려진 백호를 베껴 그린 것이다.
가을의 한자어인 추(秋)는 벼화(禾)와 불화(火)가 합쳐진 것으로
‘벼가 익어가다’라는 뜻으로 해석된다.
즉, "오곡백과가 무르익어 가다"라는 뜻이 된다.
한자어 추를 통해서도 가을이 수확의 계절이자
풍요와 여유를 누릴 수 있는 계절인 것을 알 수 있다.
가을은 동서남북 방위 중 서쪽에 해당된다.
따라서 서쪽의 수호신인 백호가 가을을 상징하는 동물이 된다.
가을은 금에 해당되며 오방색 중 금은 흰색이므로
가을을 상징하는 색은 흰색이 된다.
또한, 군자가 갖추어야 할 덕목인 사군자에 비유하면
가을은 국화에 해당되며, 팔괘로는 태에 해당된다.
우리 선조들은 이러한 가을의 상징을 바탕으로 가을을 그리고,
가을을 느꼈으며, 가을을 노래하였고, 풍요롭고 여유로운 가을을 즐겼던 것이다.
평안남도 남포시에 위치한 덕흥리 고분의 벽화에 그려진 견우와 직녀의 그림.
칠석(음력 7월 7일)은 이 그림처럼 까마귀와 까치가 만든 오작교에서
견우와 직녀가 1년에 한번씩 만났다는 전설에서 비롯되었다.
칠석에 우리 선조들은 곡식이 익기를 기다리며 잠시 일손을 멈추고
축제를 열기도 하였고 여름 장맛비에 흙탕이 된 우물가를 청소하는 등
무더운 여름을 슬기롭게 보내고 다가올 가을을 준비하였다.
따라서 칠석은 우리네 가을의 출발점이라 할 수 있겠다.
칠석부(七夕賦)
김인후
저녁이라 가을바람 으스스 불어오고
가을 하늘 활짝 열려 유달리 드높아라
밝은 빛이 돌고 도는 저 은하를 쳐다보고
아름다운 명절이라 칠석을 느끼네
아마도 좋은 배필 반가운 모임이라
늦게나마 그윽한 기약을 맺었구나
찬란한 구름치마 매만져 입고
꿈틀꿈틀 푸른 용 잡아타고서
은하수 나루를 바라보며 사뭇 달리리
나는 바삐 저 오작교를 건너련다
앞길이 차츰 가까워지자
미안이 날 맞아줄 일 기쁘구나
계절이라 이슬방울 하얗게 엉켜
밤은 맑고 서늘하여 잠조차 없네
신선의 옷자락 마주잡고 서성거리며
백가지에 하나나마 회포를 풀어보세
향기로운 꽃은 시들기 쉽지만
이별은 이다지도 빠르단 말인가
서글피 서로에 대해 한숨 지으니
서쪽으로 지는 저 달이 원망스러워
천계가 날개 치며 새벽을 재촉하니
오래도록 머물자하여도 머물 수 없는 신세
긴 생각 잠긴 실의에 빠진 모습
마음이 사뭇 닳아 넋을 읽었네
맑은 바람 다다라 이별을 차마 하리
쏟아지는 눈물만이 쌍갈래로 떨어지네 (이하 생략)
[하서집 河西集]
가을 세시명절의 하나인 칠석을 노래한 시로, 김인후(1510 ㅡ 1560)가 19세 되던
중종 23년(1528) 성균관 시험에서 장원할 당시 답안으로 제출한 것이다.
김인후는 이 시에서 가을 바람이 불어오는 칠석 저녁
밝은 빛이 돌고 있는 은하를 쳐다보면서 칠석날 밤 짧은 만남 후
긴 이별을 해야하는 견우와 직녀의 애틋한 사랑을 노래하고 있다.
동정호의 가을 달이 그려진 백자항아리.
제1부 "가을을 그리다."
옛 선인들이 가을을 어떻게 그림으로 표현했는가를
가을 풍경을 그린 산수화를 중심으로 전시하였다.
그리고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아름다운 명승지 중 하나인
가을 금강산(풍악산)을 그림으로 살펴볼 수 있도록 하였다.
안견의 그림으로 전하는 ‘사계절 산수四時八景圖’, 김두량·김덕하의 ‘사계절 산수四季山水圖’,
김홍도의 ‘한정의 국화 감상(閒亭品菊)’ 등이 전시되며,
풍악산 그림으로 정선의 ‘풍악도첩楓嶽圖帖’, 정수영의 ‘해산첩海山帖’ 등이 소개된다.
동정호의 가을 달.
작가 미상.
멀리 겹쳐져 있는 산봉우리 옆으로 희미한 가을날 보름달이 보인다.
채색이 되어 있지 않아 가을 단풍의 모습은 찾아볼 수는 없으나,
잎이 떨어진 앙상한 나뭇가지를 통해 가을의 스산함이 전해진다.
추강에 밤이 드니
월산대군
가을 강에 밤이 드니 물결이 차갑구나
낚시를 들이쳐 놓으니 고기는 물지 않는구나
욕심이 없는 달빛만 싣고 빈 배를 저어 오는구나
사계절 산수.
정수영 필.
사계절을 2폭씩 그린 8폭 병풍이다.
봄은 산기슭의 물오른 버드나무 가지와 꽃나무.
여름은 짙은 색으로 물기를 가득 머금은 푸른나무와 숲.
가을은 붉게 물든 단풍.
겨울은 앙상한 나뭇가지와 눈 내린 겨울 산을 그려 냈으며,
각 면마다 계절에 적합한 시를 붙여 문인화의 면모를 보이고 있다.
정수영(鄭遂榮)(1743∼1831).
조선 후기의 화가.
본관은 하동(河東)이고, 자는 군방(君芳), 호는 지우재(之又齋)이다.
정인지의 후손으로, 실학자이며 지리학자인 정상기의 증손자이다.
정수영은 명문가 출신의 선비 화가였음에도 불구하고,
과거나 벼슬에 나아가지 않고 집안의 전통을 따라 기행과 탐승(探勝)으로
시, 서, 화에 몰두하며 일생을 보냈다.
탐승하며 실경 사생에 관심을 쏟았던 그의 회화 세계는
거친 독필(禿筆)로서 구사한 자유분방한 필치와
독특한 색감으로 강한 개성의 문기와 격조 높은 화경을 지녔다.
그의 대표적인 실경 산수 작품으로는
1797년 금강산 일대를 여행하면서 명승과 고적을 사생한
《해산첩(海山帖)》과 여러 《금강산도권(金剛山圖卷)》들이 있으며
1796년에 제작한 《한강, 임진강유람사경도권(漢江, 臨津江遊覽寫景圖卷)》이 있다.
그는 실경산수 외에도 독특한 필세를 지닌 남종화풍의 산수들과
어해, 화조, 영모 등 다양한 소재의 작품을 남겼다.
그의 개성이 두드러진 작품들은 전통적인 남종화풍의 섭렵과
정선, 심사정, 이인상, 강세황 등 선배 화가들의 영향을 보여준다.
그러면서도 그는 그들의 화법으로부터 철저히 이탈하였으며
스케치풍의 수묵 사용과 거칠고 어지러운 붓 자국,
대담한 화면구성은 조선시대 화단에서 그 예를 찾아볼 수 없는
참신한 개성미를 지녔고, 한국적인 정취를 물씬 풍겨준다.
한정의 국화 감상.
오른쪽 아래 안개가 자욱이 낀 공간과 왼쪽 위 하늘이 멋진 조화를 이루며
가운데 붉게 물든 단풍이 가을의 정취를 한 껏 느끼게 해준다.
김홍도 필.
김홍도(金弘道, 1745년~ 1806 이후).
조선 후기의 화가.
본관은 김해, 자는 사능(士能), 호는 단원(檀園)이다.
안산시 단원구는 이를 따온 이름이다.
정조 시대 때 문예부흥기의 대표적인 화가로 여겨진다.
산수화, 인물화, 풍속화 등과 주로 서민들의 일상생활을 그렸으며
하지만 그림만 그린 것은 아니고, 시도 써서 아들 김양기가 출판한
《단원유묵》이라는 문집도 있다.
1745년 한양의 양반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의 외가 안동 장씨 집안은 대대로 도화서 화원(나라에서 필요한 그림을 그리는 직업화가)을
배출한 미술가 집안이었기 때문에 김홍도는 외할아버지와 외삼촌에게 그림을 배웠다.
결혼한 뒤에는 복헌 김응환의 소개로 표암 강세황과 교제하였다.
표암은 인물, 화조(꽃과 새), 사군자 모두 능숙한 김홍도를 추천하여 도화서 화원이 되게 했는데,
덕분에 김홍도는 이인문 등의 여러 화가들과 사귀면서 그림공부에 몰두할 수 있었다.
1771년(영조 47년)에 왕세손 이산의 초상화를 그렸다.
1776년에 세손이 영조를 이어 정조로 보위에 오르자, 정조에게 규장각도를 바쳤고,
1781년(정조 5년)에 정조의 초상화를 그렸다.
정조는 김홍도와 그의 스승 김응환에게 1788년 금강산의 산수화를,
1789년에는 몰래 일본 지도를 그릴 것을 명하였다.
1789년 김응환이 부산에서 병으로 죽자
김홍도는 대마도로 가서 일본의 지도를 모사해서 가지고 돌아왔는데,
그림을 그린 방법이 비슷하다고 하여
일본에서 첩보활동을 하면서 화가로 활동했다는 설이 있다.
1790년에는 정조가 할아버지 영조와의 정치적인 대립으로 죽은
사도세자를 위해서 지은 사찰인 용주사 대웅전에
운연법으로 입체감을 살린 삼세여래후불탱화를 그렸다.
1795년에는 연풍현감으로 임명되어 근무하다 사임했는데,
충청도 연풍에서 현감으로 일한 경험은 김홍도가 민중들의 삶을
자신만의 개성-당시 조선 미술계는 중국의 영향을 강하게 받고 있었다.-으로
그려내는 중요한 기회가 되었다.
1796년에는 용주사 부모은중경의 삽화,
1797년에는 정부에서 찍은 오륜행실도의 삽화를 그렸다.
이러한 활발한 작품활동을 할수 있었던 것은
소금장사로 부를 축적한 김현태(김경림)에게 그림을 그려주는 대신,
경제지원을 받았기 때문이다.
18세기 상업의 발달로 부유해진 중인계급들은
그들의 경제계에서의 위치성장에 걸맞는 예술적인 취향을
김홍도처럼 유능한 화가들과 교류함으로써 충족시키려고 하였다.
만년에는 김한태의 죽음으로 생활이 어려워졌지만,
무동(舞童,춤추는 아이), 서당, 나룻배, 씨름, 씨름등을 수록한
풍속화첩을 발표하여 민중들의 삶을 다룬 작품활동을 하였다.
1805년 질병으로 위독했다는 기록이 있으나
언제 별세했는지는 알 수 없다.
그의 아들 김양기도 아버지를 이어 화원이 되었다.
(다음 백과사전)
신윤복[申潤福]〈1758(영조 34)~?〉
조선 후기의 화가.
김홍도와 함께 풍속화의 쌍벽을 이루었다.
본관은 고령. 자는 입부(笠夫), 호는 혜원(蕙園).
아버지는 화원(畵員)이었던 한평(漢枰)이다.
그의 생애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으며,
단지 도화서(圖畵署) 화원으로 벼슬이
첨절제사(僉節制使)까지 이르렀다는 사실만 알려졌을 뿐이다.
그의 풍속화는 소재의 선택, 구성, 인물의 표현방법 등에서
김홍도의 풍속화와는 현저히 다른 경향을 보여준다.
김홍도가 소탈하고 익살맞은 서민생활의 단면을 주로 다룬 데 반해,
그는 한량(閑良)과 기녀(妓女)를 중심으로 한 남녀간의 춘의(春意)를 주로 그렸다.
김홍도와의 차이는 인물 묘사에서 더욱 뚜렷이 나타나는데,
대체로 얼굴이 갸름하고 눈꼬리가 치켜올라간 형태로 인물을 그리면서
섬세하고 유연한 선과 아름다운 채색을 적절히 사용했다.
그러나 산수(山水)를 배경으로 풍속화를 전개시키는 경우에는
산수에 보이는 석법(石法)이나 준법(?法)·수파묘(水波描) 등에서
간혹 김홍도의 영향이 보이기도 한다.
신윤복의 작품에는 남녀간의 애정을 그린 것 이외에도
무속(巫俗)이나 주막의 정경 등 서민사회의 풍모를 보여주는
순수한 풍속화도 적지 않게 포함되어 있으며,
산수화는 담묵(淡墨)과 담채(淡彩)를 주로 사용해
참신한 감각의 분위기를 표현하는 등
조선 말기 이색화풍의 대두에 선구적 역할을 했던
윤제홍(尹濟弘)의 화풍과 유사하다.
신윤복은 대부분의 작품에 짤막한 찬문(贊文)을 쓰고
자신의 관지(款識)와 도인(圖印)을 덧붙이고 있는데,
유교적 도덕관념이 강했던 시기에 속된 그림을 자기의 작품이라고
떳떳이 밝히는 행위가 가능했던 것은
당시 그림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변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그의 화풍은 후대의 화단에 많은 영향을 미쳐
작가 미상의 풍속화나 민화 등에서 그의 화풍을 따른 작품들이 많이 눈에 띈다.
대표작으로는 〈연당야유도 蓮塘野遊圖〉·〈미인도 美人圖〉·〈단오도 端午圖〉·
〈무무도 巫舞圖〉·〈산궁수진 山窮水盡〉·〈선유도 船遊圖〉·〈산수도 山水圖〉 등이 있다.
(다음 백과사전)
조선시대 천재화가의 이름을 꼽자면 당연 김홍도와 신윤복의 이름을 들수 있다.
당대 최고의 화가인 단원 김홍도와 혜원 신윤복의 작품들을 안방에서 만나볼수 있다.
SBS수목드라마 바람의 화원에서 박신양과 문근영의 연기에 찬사가 이어지고 있다.
바람의 화원의 이정명 작가는
"한국예술인들의 이야기를 풀어내보고 싶었으며
한국에서도 고흐나 인상파화가들의 관심이 높아지는 요즘
우리선조들 중에서도 예술의 혼을 불사른 분들을 찾는 중 조선후기 시대를 풍미한
단원 김홍도와 혜원 신윤복 화가를 찾을 수 있었다"고 말했다.
특히 "박신양과 문근영이 연기하는 걸 보고는
김홍도와 신윤복이 살아돌아온 게 아닌가 하고 착각할 정도였다"며
"특히, 소설을 쓸 때는 머릿속에 생각하면서도 활자가 가진 한계 때문에
김홍도와 신윤복의 미묘한 감정을 잘 드러내지 못해 아쉬웠는데
드라마 속 인물관계나 각 캐릭터에 대한 소개가
탄탄하고도 매력적으로 나와 기뻤다"고 덧붙였다.
김홍도와 신윤복은 실제 연인관계 였을까?
역사적으로 볼때 단원 김홍도(1745~?)와 혜원 신윤복(1758~?)은 교류가 없었다.
13살이 더 많은 김홍도와 어린 신윤복이 바람의 화원에서 설정한 만남은
드라마 진행 상 필요한 픽션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문근영의 배역인 혜원 신윤복은 남성으로서
여성의 섬세한 감정과 기법을 가지고 있었는데
성별을 떠나 혜원 신윤복의 기품을 여성의 코드로 맞춘 픽션이다.
실제그림의 기법을 살펴보자면 두명의 명화가사이에는
주제와 기법, 그들의 가치관을 알 수 있다.
단원 김홍도는 일반 서빈들의 생업에 관계된 일상생활을 소재로 많이 다룬 반면
혜원 신윤복은 한량과 기녀들의 풍류를 비롯한 남녀간의 로맨스를 주로 소재로 사용했다.
또한 기법에서도 차이가 나는데
단원 김홍도의 풍속화는 배경이 생략되는 대신 전체적인 화면구도기법인 반면
혜원 신윤복은 배경의 세심한 묘사가 두드러지는 차이점이 있다.
단원 김홍도는 먹선의 굵은 필치와 은은하고 투명한 농담기법으로 질박하고 강한 생명력을 표현한 서민일상의 모습을,
혜원 신윤복은 가늘고 섬세한 필치롸 화려한 색채의 효과로 양반이나 남녀의 모습을 그린 차이점이 있다.
(출처: 바람의 화원 , 김홍도와 신윤복이 돌아왔다!!)
폭포 감상.
단풍이 든 늦은 가을날의 폭포 감상 그림이다.
산 사이 계곡으로 시원하게 떨어지는 폭포수와 바위 위에 서 있는 소나무,
바위에 걸터 앉아 피리부는 소년의 모습까지 더해져 그림의 멋이 한층 더해졌다.
장시흥 필.
장시흥(張始興)은 조선 후기의 화가로
산수화에 능했다고 하나
호가 방호자(方壺子)라는 것 이외에
생몰 연대, 행적, 가계(家系) 등에 대해서는 알려져 있지 않다.
심지어 우리나라 서화가를 거의 망라한
오세창의 《근역서화징》(槿域書畵徵)에도
그의 이름이 들어 있지 않으며,
작품만이 몇 폭 전해질 뿐이다.
(다음 백과사전)
해인사.
정선 필.
합천에 있는 해인사를 그린 부채 그림으로
부채 모양으로 인해 산세가 자연스럽게 표현 되었다.
정선(鄭歚, 1676년 ~ 1759년)은 조선의 화가이다.
본관은 광산, 자는 원백(元伯), 호는 겸재(謙齋)·겸초(兼艸)·난곡(蘭谷)이다.
전국의 명승을 찾아 많은 작품을 남겼으나 후계자가 없어 화풍은 단절되었다.
인왕제색도(仁王霽色圖(1751년))와 금강전도(金剛全圖(1734년))가 대표적 작품이다.
(다음 백과사전)
겸재 정선에 대하여.
정선은 우리나라 회화사상 가장 위대한 업적을 남긴 대화가.
겸재는 우리의 산천의 아름다움을 사생하는 데 가장 알맞은
우리 고유 화법을 창안해내어 우리 산천을 소재로
그 회화미를 발현해내는데 성공한 진경산수화의 대성자이다.
곧 그는 우리 고유 산수화 양식인 진경산수화풍의 시조인 것이다.
그는 1676년 음력1월3일에 정시익과 밀양 박씨 사이에 2남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나
84세의 수를 누리고 1759년 음력 3월24일 사망하였다.
본관은 광주로 자를 원백, 호를 겸재 혹은 난곡이라 하였다.
어려서 부친을 여의고 어렵게 살았으며 20대에 연안 송씨와 결혼하여 2남 1녀를 두었다.
손자인 황은 장남 만교의 2남으로 할아버지인 정선의 화풍을 가법으로 이은 유일한 인물이다.
가을 산수.
허련 필.
서로 마주보는 구도의 대련 그림으로 위쪽에 7행의 제시를 썼다.
먹으로 그린 그림에 옅은 파란색과 노란색을 덧칠해 은은한 가을 정경을 잘 묘사하고 있다.
허련〈1809(순조 9)~1892(고종 29).〉
조선 말기의 선비 화가.
김정희 화파(金正喜 畵派)의 한 사람으로
조선 말기의 화단에 남종화풍(南宗畵風)을 토착화하는 데 기여했으며,
그의 화풍은 가전(家傳)되어 오늘날 호남화단의 주류를 이루고 있다.
본관은 양천(陽川). 자는 마힐(摩詰), 호는 소치(小癡)·노치(老癡)·석치(石癡).
허균(許筠)의 후예 가운데 진도에 정착한 허대(許垈)의 후손으로
어려서 해남의 윤선도(尹善道) 고택에서
윤두서(尹斗緖)의 작품을 방작(倣作)하면서 전통화풍을 익혔다.
1839년 대흥사 초의선사(草衣禪師)의 소개로
김정희 문하에서 본격적으로 그림수업을 받게 되었다.
김정희가 죽은 1856년 고향 진도에
운림산방(雲林山房)을 짓고 은거하면서 그림에 몰두했으며,
1867년에는 〈소치실록 小癡實錄〉을 저술했다.
그의 화풍은 아들인 미산(米山) 허형(許瀅)과 손자인 남농(南農) 허건(許楗),
방계인 의재(毅齋) 허백련(許百鍊) 등으로 계승되어
호남지방의 서화전통을 이루었다.
그의 유작으로는 〈산수도첩 山水圖帖〉·〈방예찬죽수계정도 倣倪瓚竹樹溪亭圖〉·
〈방석도산수도 倣石濤山水圖〉·〈선면산수도 扇面山水圖〉·〈누각산수도 樓閣山水圖〉·
〈김정희초상〉 등이 전한다.
(다음 백과사전)
백자 산 모양 연적.
산봉우리가 겹겹이 중첩되어 계곡을 이루고 그 사이마다 절과 탑, 사람,
동물 등이 자리하고 있으며 맨 꼭대기에는 3층의 누각이 있다.
금강산을 묘사한 이 연적은 붉은 안료를 사용하여 산봉우리마다 붉게 물든
단풍을 연상시키고 있는데 가을 풍악산을 보여주고자 한 것으로 생각된다.
금강산의 사계절 이름.
봄-금강산(金剛).
여름-봉래산(蓬萊).
가을-풍악산(楓嶽).
겨울-개골산(皆骨).
꽃과 새.
작자 미상.
민화의 소재로 많이 등장하는 공작 · 원앙 · 학 · 닭 등과
다산과 풍요, 복을 상징하는 모란 · 국화 · 석류 등을 수놓은 10폭의 자수 병풍이다.
특히 국화꽃과 붉게 익은 석류는 풍요를 상징하는 식물로
가을의 풍요롭고 여유로운 정서를 느끼게 한다.
제2부 "가을을 느끼다."
가을 향기를 전해주는 가을꽃 국화 그림과 국화가 그려진 도자기가 전시되며,
깊어가는 가을을 느끼게 해 주는 가을 풀벌레와 기러기 등이 그려진 그림이 전시된다.
조선의 22대 왕인 정조의 ‘국화菊花圖’, 꽃그림에 능했던 신명연의 ‘국화菊花圖’, 심사정의 ‘국화와 풀벌레黃菊草蟲圖’,
김득신의 ‘갈대와 기러기蘆雁圖’ 등 회화 작품과 청자 국화무늬 병, 청자 국화무늬 합 등이 전시된다.
갈대와 기러기(蘆雁圖).
강필주 필.
갈대밭에 기러기 떼가 내려앉는 모습을 그린 2폭의 가리개이다.
갈대와 기러기는 편안한 노후를 뜻한다.
노안도(蘆雁圖)란 글자 그대로 갈대와 기러기를 그린 그림인데,
이것을 일본식으로 “갈대밭에 앉은 기러기”라고 설명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갈대가 나란히 있거나 앞뒤로 있어도, 또는 물고 있어도
모두 서양화의 동물화처럼 기러기가 주인공이고 갈대가 배경이라고 볼 수 없다.
둘은 화면 내에서 동격의 가치를 갖는다.
“갈대와 기러기”하면 한학자들은 먼저,
함로(銜蘆, 기러기가 갈대를 물고 날다)라는 말을 떠올린다.
이 말은 난세에 보신책을 강구한다는 뜻으로 쓰인다.
옛날 중국 북쪽에서 기러기들이 겨울을 나기 위하여 양자강 남쪽으로 날아올 때는
북쪽에서 잘 먹지 못했기 때문에 몸이 말라서 하늘 높이 날아오지만 봄에 다시
날아갈 때는 남쪽에 있는 동안 살이 쪄서 몸이 무겁기 때문에 높이 날지 못했다.
이것을 이용하여 어부들은 그물을 치고 기러기 사냥을 하였는데,
한편 기러기들은 이 그물에 걸리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갈대를 꺽어 가로로 물고 날았다고 한다.
그래서 “갈대를 물다”라는 말이 보신책을 강구한다는 뜻이 된 것이다.
아울러 신중히 처신한다는 뜻으로 쓰여지기도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조선 중기에도 이징(李澄)이 <노안도>를 그렸지만,
대원군 집정시대에 이르러 특히 많이 나타났다.
더 자세히 추적해 보면 이 그림을 유행시킨 주인공이 강필주(渭士 姜弼周)인데,
그는 대원군 이하응의 파락호 시절부터 같이 다니던, 요즈음 말로 경호원이었다.
당시 최고 권력자의 경호원이자 그림친구인 그가 무슨 이유로 보신책을 강구한다는
뜻의 그림을 그렸겠는가?
사실은 대원군의 당호(堂號)가 노안당(老安堂)이었다.
따라서 강필주는 신분상의 주인인 대원군의 당호를 주제로하여 이런 그림을 그렸을 것이다.
이것은 우리식 독음을 이용한 것으로서 이후 매우 유행한 화목(그림의 소재 및 제목)이 되었다.
강필주(?~1930년 전후).
조선 말기의 화가.
강필주의 화단 등단 배경과 생몰연대는 알려지지 않는다.
1907년 관보에 궁내부 영선사 위원으로 적혀 있어
한일합방 전에 관직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영선사는 건물 신축 및 보수를 담당한 부서로
그가 화가의 신분으로 건축물에 그림 그리는 일에 관여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가 1911년 서화미술회 강습소에서 조석진, 안중식 등과 함께 후진을 가르친 것을 보면
이 시기에 이미 화가로서 명성을 얻었음을 알 수 있다.
현존하는 그의 그림은 드물고 보존상태가 좋지 않은
1910년대 후반 혹은 1920년대에 그려진 것으로 추정되는
<사슴>의 화제는 “백세토록 수를 누리며 복록을 받으소서”이며,
고목과 십장생 중 하나인 사슴을 그린 것이다.
누군가의 화면 세척과정에서 목빛과 담채의 본색을 잃게 했지만
상단 대범한 필치로 묘미 있게 횡단시킨 고목의 줄기 및 가지의 곡선과
둥글게 뭉쳐진 나뭇잎의 구성에서 그의 역량을 가늠할 수 있는 작례로 보인다.
아래 완만하게 경사진 풀언덕에 출현한 사슴은 세필로 섬세하게 묘사되었다.
사슴은 오른편으로 경쾌한 발걸음을 옮기다가
왼편에서 무슨 소리가 났는지 머리를 돌려 경계하는 모습인데,
세밀 묘사가 고목의 자유분방한 붓놀림과 조화를 이루지 못한다.
그가 73세에 그린 <팔준도 八駿圖>가 있어 1930년 이후에까지 생존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서화미술회 제자 김은호와 평양에서 휘호회揮毫會를 가진 적이 있다.
(다음 백과사전)
어부사시사(漁父四時詞)
윤선도
물외의 맑은 일이 어부 생애 아니던가
배 띄워라 배 띄워라
어옹을 웃지 마라 그림마다 그렸더라
쩌거덩 쩌거덩 어여차
사찰 흥취 한가지나 가을 강이 으뜸이라
강촌에 가을이 드니 고기마다 살쪄 있다
닻 들어라 닻 들어라
넓고 맑은 물에 실컷 즐겨 보자
찌거덩 찌거덩 어여차
인간세상 돌아보니 멀도록 더욱 좋다
(이하 생략)
가을꽃에 찾아든 나비.
강세황 필.
바위 곁에 핀 노란 국화와 그곳에 날아든 나비가 조화롭게 그려진 부채 그림이다.
연한 노란빛을 띠는 국화와 먹색으로 표현된 나비가 묘한 조화를 이루는데,
특히 국화 위의 나비는 생동감마저 느기게 한다.
강세황(姜世晃/1712 -1791).
조선 후기의 문인화가.
조선조 22대 정조때의 문신·서화가, 자는 광지. 호는 표암(豹庵), 본은 진주.
정조 2년(1778) 병조 참지로 문신 정시에서 장원,
한성부윤, 남양 부사·한성부 판윤 및 호조 참판·병조 참판을 거쳐 기로소에 들어갔음.
서화에 뛰어나 멀리 청나라에서도 그 이름이 알려졌음.
특히 산수화와 사군자로 유명하며, 그의 화풍은 정선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격이 있고 개성이 뚜렷하였음.
시호는 헌정. 저서로는 <표암집>, 작품은 <산수도> <난죽도> 등이 있다.
(다음 백과사전)
국립중앙박물관 입구 화단에 앉아 있던 나비.
나비가 꽃을 찾음은 인간의 그리움과 같은 것이다.
눈 풀풀 접심홍이요 술 충충 의정백을
거문고 당당 노래하니 두루미 둥둥 춤을 춘다
아해야 시문에 개 짖으니 벗이 오나 보아라
金煐
국화.
신명연 필.
"산수화훼도첩"에 담긴 꽃 그림 중 하나로,
맑고 산뜻한 느낌의 채색을 이용한 그림이다.
화조도와 화훼도에 능한 신명연은
백합, 연꽃, 모란, 양귀비, 수국 등 다양한 꽃들을 소재로 그림을 그렸는데
꽃을 크게 부각시켜 그리는 점이 특징이다.
연한 보랏빛의 국화와 아래쪽 하얀색의 큰 국화가 조화를 이루며 활짝 피어
가을의 진한 국화향을 전하는 듯 하다.
신명연1808(순조 9)~1892(고종 29).
조선 말기의 문인화가.
본관은 평산(平山). 자는 실부(實夫), 호는 애춘(靄春).
아버지는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문인서화가 신위(申緯)이며,
형은 명준(命準)이다.
무과에 합격하여 부사(府使)를 지냈다.
아버지로부터 시·서·화에 능하다는 평과 함께
집안의 의발(衣鉢)을 넘겨준다는 교시를 받기도 했다.
산수·화조·화훼·묵죽·묵매 등을 즐겨 그렸는데,
특히 꽃그림에서 청나라 추일계(鄒一桂)의 절지화법(折枝畵法)과 상통되는
치밀한 묘사와 산뜻한 채색으로 참신한 화풍을 이룩했다.
산수화에서는 전형적인 남종문인화법을,
묵죽에서는 아버지의 화풍을 따랐으나
화훼도에 비해 전반적으로 생동감이 부족하고 개성이 약한 편이다.
유작으로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산수화훼도첩〉·〈화조도〉등과
개인 소장의〈임곽희추림독서도 臨郭熙秋林讀書圖〉·
〈강남무진도 江南無盡圖〉·〈산수도〉등이 있다.
(다음 백과사전)
국화.
정조 필.
파초도와 함께 정조가 그린 대표적인 그림이다.
가을의 상징 꽃인 국화.
비탈진 바위 위에 핀 국화를 간결하게 그려내고 있다.
국화 꽃잎을 하나씩 옅은 선으로 그린 것과 달리
잎과 줄기는 짙은 먹으로 그려 먹의 농담을 통한 강약의 조화를 통해 생동감이 느껴진다.
국화꽃 위에 앉아 있는 메뚜기의 모습 역시 가을의 정감을 더해주고 있다.
정조.
드라마 "이산"으로 우리에게 알려진 임금.
요즘 인기리에 방영되는 "바람의 화원"의 어진 화사의 주인공.
이름은 산(祘). 자는 형운(亨運), 호는 홍재(弘齋).
영조의 손자이고, 아버지는 사도세자로 알려진 장헌세자(莊獻世子 : 思悼世子)이며,
어머니는 영의정 홍봉한(洪鳳漢)의 딸 혜경궁 홍씨(惠慶宮洪氏)이다.
비는 좌참찬 김시묵(金時默)의 딸 효의왕후(孝懿王后)이다.
조선 제22대 왕(재위 1776~1800).
과거제도 개선을 위해 대과(大科)는 규장각을 통해
국왕이 직접 관장하여 많은 과폐를 없앴다.
전제(田制) 개혁에도 뜻을 두어 조선 초기의 직전법에 대해 큰 관심을 보였다.
규장각 제도를 일신하여 왕정 수행의 중심기구로 삼았다.
정조는 세손 시절부터 줄곧 그를 경호하던 홍국영을 동부승지로 전격 기용했다가
다시 도승지로 승격시켰으며 날랜 병사들을 뽑아 숙위소를 창설하여
왕궁을 호위하게 하고 홍국영으로 하여금 숙위대장을 겸직하도록 했다.
그러나 정조의 신임을 한몸에 받은 홍국영은 실권을 장악하게 되자
삼사의 소계, 팔도의 장첩, 묘염, 전랑직의 인사권 등을 모두 총괄하였고
이에 따라 백관들은 물론 8도감사나 수령들까지도 그에게 머리를 숙이게 되었다.
그리고 누이동생을 정조의 후궁이 되게 함으로써 정권을 한손에 쥐게 되었다.
모든 관리들은 그의 명령에 따라 움직였으므로 이른바 '세도'라는 말이 생겨나게 되었다.
정조의 업적.
규장각을 중심으로 임진자, 정유자, 한구자, 생생자, 정리자, 춘추관자 등의 새로운 활자들이 만들어졌고
영조 때부터 지속적으로 추진되어 오던 문물제도 정비 작업이 완료되었다.
그 결과물들이 이때 편찬된 '속오례의', '증보동국문헌비고', '국조보감',
'대전통편', '문원보불', '동문휘고', '규장전운', '오륜행실' 등의 책들이었다.
한편 그의 문화 정치는 중인 이하의 평민들에게도 영향을 미쳐 위항 문학을 낳기도 했다.
인왕산의 경아전을 중심으로 형성된 중인 이하의 위항인들이
귀족 문학으로만 인식되던 한문학의 시단에 대거 참여하여
'옥계시사'라는 그들 독자의 시사를 결성하고 그들만의 공동 시집인
'풍요속선'을 발간하는 등 대단한 문화적 발전을 도모했던 것이다.
정조 시대는 이처럼 양반, 중인, 서얼, 평민층 모두가 문화에 대한 관심을 집약시킨 문예 부흥기였다.
그러한 문예 부흥을 가능하게 했던 근본적인 동력은 병자호란 이후
청을 오랑캐로 인식하던 중국에 대한 사대주의 사상이 사라지고
민족주의가 고개를 들어 독자적인 문화를 이룩해나가는 과정에서 형성된 자긍심이었다.
이러한 경향은 18세기 문화의 전반에서 뚜렷하게 나타나는데
이를테면 그림에서는 '진경산수'라는 국화풍,
글씨에서는 '동국진체'라는국서풍이 유행했다.
이는 조선 성리학의 고유화에 따른 조선 문화의 독자성의 발로이며
이러한 축적 위에서 정조의 학자적 소양에서 기인하는 문화 정책의 추진과
선진 문화인 건륭 문화의 수입이 자극이 되어 조선 후기는 문화적 황금 시대를 이룰수 있었다.
(다음 백과사전)
청자 국화무늬 합.
청자 국화무늬 병,
청자 국화무늬 기름병.
청자 국화무늬 병.
오우가(五友歌)
윤선도
나의 벗이 몇인가 헤아려 보니 수석과 송죽이라.
동산에 달이 밝게 떠오르니 그것은 더욱 반가운 일이로다.
나머지는 그냥 두어라. 이 다섯 외에 더 있으면 무엇하겠는가.
구름의 빛깔이 깨끗하다고 하지만 자주 검어지네.
바람 소리가 맑다지만, 그칠 때가 많도다.
깨끗하고도 그칠 때가 없는 것은 물뿐인가 하노라.
꽃은 무슨 까닭에 피자마자 쉬이 져 버리고,
풀은 또 어찌하여 푸른 듯하다가 이내 누른 빛을 띠는가.
아마도 변하지 않는 것은 바위뿐인가 하노라.
따뜻해지면 꽃이 피고, 추워지면 잎이 떨어지는데,
소나무야, 너는 어찌하여 눈서리를 모르고 살아가는가.
깊은 땅 속(혹은 저승)까지 뿌리가 곧게 뻗은 것을 그것으로 하여 알겠노라.
나무도 아니고 풀도 아닌 것이, 곧게 자라기는 누가 시켰으며,
또 속은 어찌하여 비어 있는가.
저렇고도사철 늘 푸르니, 나는 그것을 좋아하노라.
작은 것이 높이 떠서 온 세상을 다 바추니,
한밤중에 광명이 너보다 더한 것이 또 있겠느냐.
보고도 말을 하지 않으니 나의 벗인가 하노라.
백자 국화무늬 각병.
백자 국화 새 무늬 항아리.
국화와 풀벌레.
심사정 필.
꽃과 나무, 벌레 등의 그림에 능한 심사정은 많은 초충도와 화훼도를 그렸다.
이 그림은 국화 중에 제일이라는 노란 국화를 화사하게 표현하였는데,
그 위에 앉은 메뚜기가 정겨운 풍경을 자아내고 있다.
꽃과 벌레의 형태에 얽매이지 않고 그 특징과 동작을 생동감 있게 잘 표현하였다.
심사정. 1707(숙종 33)~1769(영조 45).
조선 후기의 문인화가.
본관은 청송. 자는 이숙(頣叔), 호는 현재(玄齋)·묵선(墨禪). 아버지는 문인화가 정주(廷胄)이다.
증조부 지원(之源)이 영의정을 지낸 이름난 가문에서 태어났으나
할아버지인 익창(益昌)이 과거부정 사건을 저지른 데 이어
왕세자(나중에 영조) 시해 음모에 연루되어 극형을 당하게 됨으로써
집안은 몰락하고 평생 동안 벼슬길에 나갈 수 없게 되었다.
1748년(영조 24) 어진모사중수도감(御眞摸寫重修都監)의 감동(監董)으로 추천되었으나
대역죄인의 자손이라는 이유 때문에 파출(罷出)되었다.
어려서부터 그림에 천부적 자질을 지녀 스스로 물상을 그리고 현상을 만들 줄 알았으며,
20세 전후하여 정선의 문하에서 본격적으로 그림을 배웠다.
소론계(少論系)의 김광수(金光遂)·이광사(李匡師)·김광국(金光國)과
남인계(南人系)의 강세황(姜世晃) 등과 교유하며 남종화풍의 조선화(朝鮮化)에 크게 기여했다.
영모·화훼·초충(草蟲)·운룡(雲龍) 등 각 분야에 능숙했으며,
특히 산수를 잘 그려 정선과 함께 겸현양재(謙玄兩齋)로 손꼽혔다.
정선과 함께 영조연간 최고의 대가로 손꼽혔던 그의 이러한 화풍은
최북(崔北)·김유성(金有聲)·이인문(李寅文)·이방운(李昉運) 등에게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대표작으로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강상야박도 江上夜泊圖〉(1747)·
〈파교심매도 奢芋荒巳踪μ(1766), 개인 소장의 〈경구팔경도 京口八景圖〉(1768) 등이 있다.
(다음 백과사전)
꽃과 풀벌레.
심사정 필.
화면을 가득 채운 노란 꽃은 가을에 피는 금계로,
가을이면 진한 향기가 널리 퍼져서 계절의 시작을 알리곤 하였다고 한다.
이른 가을날 금계 사이에 앉아 있는 매미가 맑은 소리를 내고,
그 아래에 핀 작은 들국화와 방아깨비는 그 풍취를 더해준다.
백로.
작자 미상.
제3부 "가을을 노래하다."
풍요와 여유, 그리고 외로움, 쓸쓸함 등 가을의 정취를 노래한
향가와 시, 시조 등과 함께 가을의 정서와 한가위의 기쁨 등을 담은 편지글이 소개된다.
이이 편지.
조선명현필첩.
율곡 이이가 최운우(1532∼1605)에게 보낸 편지.
지난번 정이 담긴 편지에 대해 감사의 마음을 전한 뒤,
자신은 아픈 몸으로 가을을 맞으니 고향 생각이 더욱 간절해지고
벼슬살이에 대한 생각은 날로 적어지니,
서울 생활을 오래하지 못할 것 같다는 등 가을을 맞은 생각과 자신의 일상을 전하고 있다.
이이(李珥, 1536∼1584).
조선 중기의 학자·정치가. 본관 덕수(德水). 자 숙헌(叔獻).
호 율곡(栗谷)·석담(石潭). 시호 문성(文成). 강릉 출생.
사헌부 감찰을 지낸 원수(元秀)의 아들. 어머니는 사임당 신씨.
1548년(명종 3) 진사시에 합격하고, 19세에 금강산에 들어가
불교를 공부하다가, 다음해 하산하여 성리학에 전념하였다.
22세에 성주목사 노경린(盧慶麟)의 딸과 혼인하고,
다음해 예안의 도산(陶山)으로 이황(李滉)을 방문하였다.
그해 별시에서 <천도책(天道策)>을 지어 장원하고,
이 때부터 29세에 응시한 문과 전시(殿試)에 이르기까지
아홉 차례의 과거에 모두 장원하여
‘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이라 일컬어졌다.
29세 때 임명된 호조좌랑을 시작으로 관직에 진출,
예조·이조의 좌랑 등의 육조 낭관직, 사간원정언·사헌부지평 등의 대간직,
홍문관교리·부제학 등의 옥당직, 승정원우부승지 등의 승지직 등을 역임하여
중앙관서의 청요직을 두루 거쳤다.
아울러 청주목사와 황해도관찰사를 맡아서 지방의 외직에 대한 경험까지 쌓는 동안,
자연스럽게 일선 정치에 대한 폭넓은 경험을 하였고,
이러한 정치적 식견과 왕의 두터운 신임을 바탕으로
40세 무렵 정국을 주도하는 인물로 부상하였다.
그동안 《동호문답(東湖問答)》 《만언봉사(萬言封事)》 《성학집요(聖學 輯要)》
등을 지어 국정 전반에 관한 개혁안을 왕에게 제시하였고,
성혼과 ‘이기 사단칠정 인심도심설 (理氣四端七情人心道心說)’에 대해 논쟁하기도 하였다.
1576년(선조 9) 무렵 동인과 서인의 대립 갈등이 심화되면서
그의 중재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고,
더구나 건의한 개혁안이 선조에 의해 받아들여지지 않자
벼슬을 그만두고 파주 율곡리로 낙향하였다.
이후 한동안 관직에 부임하지 않고 본가가 있는 파주의 율곡과
처가가 있는 해주의 석담(石潭)을 오가며 교육과 교화사업에 종사하였는데,
그동안 《격몽요결(擊蒙要 訣)》을 저술하고 해주에 은병정사(隱屛精舍)를 건립하여
제자교육에 힘썼으며 향약과 사창법(社倉法)을 시행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당시 산적한 현안을 그대로 좌시할 수 없어,
45세 때 대사간의 임명을 받아들여 복관하였다.
이후 호조·이조·형조·병조 판서 등 전보다 한층 비중 있는 직책을 맡으며,
평소 주장한 개혁안의 실시와 동인·서인 간의 갈등 해소에 적극적 노력을 기울였다.
이무렵 《기자실기(箕子實 記)》와 《경연일기(經筵日記)》를 완성하였으며
왕에게 ‘시무육조(時務六條)’를 지어 바치는 한편 경연에서 ‘십만양병설’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런 활발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선조가 이이의 개혁안에 대해
계속 미온적인 태도를 취함에 따라 그가 주장한 개혁안은 별다른 성과를 거둘 수 없었으며,
동인·서인 간의 대립이 더욱 격화되면서 그도 점차 중립적인 입장을 유지할 수 없게 되었다.
그 때까지 중립적인 입장를 지키려고 노력한 그가
동인측에 의해 서인으로 지목되는 결과를 가져오고,
이어서 동인이 장악한 삼사(三司)의 강력한 탄핵이 뒤따르자
48세 때 관직을 버리고 율곡으로 돌아왔으며,
다음해 서울의 대사동(大寺洞) 집에서 죽었다.
파주의 자운산 선영에 안장되고 문묘에 종향되었으며,
파주의 자운서원(紫雲書院)과
강릉의 송담서원(松潭書院) 등 전국 20여개 서원에 배향되었다.
(다음 백과사전)
이황 편지.
조선명현필첩.
퇴계 이황이 추석을 맞아 안성의 수령으로 부임한
고향 친구에게 보낸 안부 편지이다.
지금 거처하고 있는 곳은 가뭄이 심하여
백성들이 굶어 죽을 지경이며
자신 또한 몸이 병든 지 오래되었다고 전하고 있다.
그래도 호남 지방은 약간의 곡식이 수확된다는 소식과 함께
일전에 보내준 선물에 대해 감사의 마음을 전하는 등
자신과 주변의 여러 상황을 담담하게 이야기하고 있다.
이황(李滉, 1501∼1570).
조선 중기의 학자·문신. 본관 진보(眞寶). 초명 서홍(瑞鴻). 자 경호(景浩).
초자 계호(季浩). 호 퇴계(退 溪)·도옹(陶翁)·퇴도(退陶)·청량산인(淸凉山人).
시호 문순(文純). 예안(禮安) 출생.
12세 때 숙부 이우 (李%)에게서 학문을 배우다가
1523년(중종 18) 성균관(成均館)에 입학, 28년 진사가 되고
34년 식년문과 (式年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하였다.
부정자(副正子)·박사(博士)·호조좌랑(戶曹佐郞) 등을 거쳐
39년 수찬(修撰)·정언(正言) 등을 거쳐 형조좌랑으로서
승문원교리(承文院校理)를 겸직하였다.
42년 검상(檢 詳)으로 충청도 암행어사로 나갔다가
사인(舍人)으로 문학(文學)·교감(校勘) 등을 겸직,
장령(掌令)을 거쳐 이듬해 대사성(大司成)이 되었다.
45년(명종 즉위) 을사사화(乙巳士禍) 때 이기(李)에 의해 삭직되었다가
이어 사복시정(司僕寺正)이 되고 응교(應敎) 등의 벼슬을 거쳐
52년 대사성에 재임, 54년 형조·병조 의 참의에 이어
56년 부제학, 2년 후 공조참판이 되었다.
66년 공조판서에 오르고 이어 예조판서, 68년(선 조 1) 우찬성을 거쳐
양관대제학(兩館大提學)을 지내고
이듬해 고향에 은퇴, 학문과 교육에 전심하였다.
이언적(李彦迪)의 주리설(主理說)을 계승,
주자(朱子)의 주장을 따라 우주의 현상을 이(理)·기(氣) 이원 (二元)으로써 설명,
이와 기는 서로 다르면서 동시에 상호 의존관계에 있어서,
이는 기를 움직이게 하는 근본 법칙을 의미하고
기는 형질을 갖춘 형이하적(形而下的) 존재로서
이의 법칙을 따라 구상화(具象化) 되는 것이라고 하여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을 주장하면서도
이를 보다 근원적으로 보아 주자의 이기이 원론(理氣二元論)을 발전시켰다.
그는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을 사상의 핵심으로 하는데,
즉 이가 발하여 기가 이에 따르는 것은 4단(端)이며
기가 발하여 이가 기를 타[乘]는 것은 7정(情)이라고 주장하였다.
사단칠정(四端七情)을 주제로 한 기대승(奇大升)과의 8년에 걸친 논쟁은
사칠분이기여부론(四七分理氣與否 論)의 발단이 되었고
인간의 존재와 본질도 행동적인 면에서보다는 이념적인 면에서 추구하며,
인간의 순수이성(純粹理性)은 절대선(絶對善)이며
여기에 따른 것을 최고의 덕(德)으로 보았다.
그의 학풍은 뒤에 그의 문하생인 유성룡(柳成龍)·김성일(金誠一)·정구(鄭逑) 등에게
계승되어 영남학파(嶺南學派)를 이루었고,
이이(李珥)의 제자들로 이루어진 기호학파(畿湖學派)와 대립,
동서 당쟁은 이 두 학파의 대립과도 관련되었으며
그의 학설은 임진왜란 후 일본에 소개되어
그곳 유학계에 큰 영향을 끼쳤다.
스스로 도산서원(陶山書院)을 창설, 후진 양성과 학문 연구에 힘썼고
현실생활과 학문의 세계를 구분하여 끝까지 학자의 태도로 일관했다.
중종·명종·선조의 지극한 존경을 받았으며 시문은 물론 글씨에도 뛰어났다.
영의정에 추증되고 문묘 및 선조의 묘정에 배향되었으며
단양(丹陽)의 단암서원(丹巖書院), 괴산의 화암서원 (華巖書院), 예안의 도산서원 등
전국의 수십 개 서원에 배향되었다.
저서에 《퇴계전서(退溪全書):修正天 命圖說·聖學十圖·自省錄·朱書記疑·心經釋疑·
宋季之明理學通錄· 古鏡重磨方·朱子書節要·理學通錄 ·啓蒙傳疑·經書釋義·喪禮問答·
戊辰封事·退溪書節要·四七續編》이 있고
작품으로는 시조에 《도산 십이곡(陶山十二曲)》,
글씨에 《퇴계필적(退溪筆迹)》이 있다.
(다음 백과사전)
제4부 "가을을 거두다."
가을 농가의 추수하는 모습 등을 담은 경직도와
풍속화 등을 통해 풍요롭고 넉넉한 가을의 정서를
관람객들이 느낄 수 있도록 하였으며,
세시기 등 문헌을 통해 고유의 명절인 한가위 풍속을 살펴보았다.
여기에는 김홍도의 ‘벼 타작’과 ‘세상구경 그림行旅風俗圖’을 비롯하여
한가위 보름달을 닮은 백자달항아리 등이 선보인다.
벼 타작.
김홍도 필.
단원풍속화첩.
단원풍속화첩은 산수나 주변의 배경 없이
풍속 정경만 그려낸 25면의 화첩으로,
서민들의 생활 모습을 다채롭게 그려내고 있다.
벼 타작은 김홍도의 세상구경 그림에서도 보이는데,
가을 추수의 즐거움으로 가득한 농민들의 모습과 함께
이를 감독하고 있는 양반의 모습을 대비시켜
신분계층에 대한 비판과 풍자를 드러내고 있다.
세상구경 그림.
김홍도 필.
선비가 유람을 하면서 마주치는 다양한 모습들을 그린 풍속화이다.
베 짜기.
유운홍 필.
경직도에서 보이는 길쌈하고 있는 장면을 그린 것으로,
아낙네들이 모여 실을 짓고 베를 짜는 정경과
뒤편에서 빨래를 널고 있는 모습 속에서 소박한 여유가 느껴진다.
마당에 붉게 물든 나무와 지붕 위 둥근 박이
가을 농가의 풍요로움을 함께 보여주고 있다.
유운홍의 낙관이 있으나 궁중 화원이었던
작가의 작품으로 보기 어려운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
유운홍[劉運弘] <1797년(정조 21)∼1859년(철종 10)>
조선 후기의 화가.
자는 치홍(致弘)이고, 호는 시산(詩山)이다.
본관은 한양(漢陽)이며, 도화서 화원으로 첨추(僉樞)를 지냈다.
1819년(순조 19)에 이수민(李壽民), 이의양(李義養) 등과 함께
문조신정후(文祖神貞后) 가례반차도(嘉禮班次圖)를 제작하였다.
산수와 화조를 잘 그렸다.
현전하는 대부분의 작품은 산수인물도이며,
화조도와 풍속도도 전하고 있다.
그의 그림에는 김홍도(金弘道)의 영향이 감지되며,
〈기녀도〉에서는 신윤복(申潤福)의 영향도 엿볼 수 있다.
필선은 다소 형식적이고 단조로운 경향을 보이기도 한다.
현전하는 작품으로는 고려대학교 박물관 소장의 〈청산고주도 靑山孤舟圖〉와
〈월야소선도 月夜小仙圖〉, 서울대학교 박물관 소장의 〈부신독서도 負薪讀書圖〉,
그리고 홍익대학교 박물관 소장의 〈화조도 花鳥圖〉,
개인 소장의 〈등고망원도 登高望遠圖>등이 있다.
(다음 백과사전)
백자달항아리.
조선 18세기 작자 미상.
백자달항아리는 생긴 모양이 달과 같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마치 가을 한가위의 보름달을 연상케 하여 그 풍요로움과 넉넉함을 전해준다.
위와 아래를 따로 만들어 붙이기 때문에 완벽한 원형을 이루지 못하고
왼쪽과 오른쪽의 대칭도 맞지 않는 것이 보통인데,
이러한 조형상의 특징이 오히려 백자달항아리만의 독특한 멋을 만들어내고 있다.
달밤의 산수〈월야산수도(月夜山水圖)〉.
김두량 필.
북종화법을 따른 대표적인 그림이 〈월야산수도(月夜山水圖)〉이며,
김두량의 가장 대표적인 작품이다.
매우 거친 듯한 속도감이 느껴지는
이 산수도는 〈월야산수도〉라는 제목이 말해주듯 잎이 다 떨어진
스산한 가을 달밤의 계곡을 그린 것이다.
나뭇가지는 해조묘법을 써서 거칠게 묘사하였고,
빠른 붓 터치는 계곡의 급류를 통해서 더욱 실감나게 표현되어 있다.
이와는 달리 둥그런 달무리는 이러한 분위기에
안정감을 더해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김두량.〈1696(숙종 22)~1763(영조 39).〉
조선 후기의 화가.
김두량은 영조 연간에 활동한 도화서 출신의 화가로,
전통적인 북종화풍을 따르면서도 남종화풍과 서양화법을 수용하여,
화단의 새로운 경향을 미리 시사해주는 역할을 했다.
본관은 경주. 자는 도경(道卿), 호는 남리(南里)·운천(芸泉).
'남리'라는 호는 영조의 총애를 받아 직접 하사받은 것이며,
화원으로 도화서의 별제(別提)를 지냈다.
화원(畵員) 함제건(咸悌健)의 외손자이며, 사과(司果) 효강(孝綱)의 아들이다.
산수·인물·풍속에 모두 뛰어났고, 신장도(神將圖)도 잘 그렸다.
해조묘(蟹爪描)와 준법(皴法) 등에서 전형적인 북종화풍을 보여준다.
〈춘하도리원호흥도권 春夏桃李園豪興圖卷〉과 〈추동전원행렵도권 秋冬田園行獵圖卷〉은
산수 표현에 있어서 남종화풍의 영향을 받았다.
〈흑구도 黑狗圖〉·〈자웅견장도 雌雄犬將圖〉·〈목우도 牧牛圖〉 등은
당시 청나라에서 유입된 서양화풍의 수용을 보여준다.
이밖에 〈고사몽룡도 高士夢龍圖〉·〈영모도 翎毛圖〉·〈삼로도 三老圖〉 등이 있다.
(다음 백과사전)
기획특별전 ‘가을 秋 - 유물속 가을이야기’를 관람하고
그 소감을 적어 붙여 놓은 나뭇잎 모양의 편지지.
이런 세상에!
김두량의 달밤의 산수를 마지막으로 감상하고 밖으로 나오니 달이 떠 있다.
추성(가을소리)
이언적
달빛이 오늘 밤 따라 너무도 밝기에
난간에서 고요히 들으니 벌써 가을소리
가을노래 한 곡을 같이 들을 사람 없고
귀밑에 흰 머리털만 몇 가닥 더해졌네
빌딩 숲 사이로는 해가 지고 있었다.
국립중앙박물관이 황혼에 아름답게 물들고 있다.
청산도 절로 절로
김인후
靑山自然自然(청산자연자연)
綠水自然自然(녹수자연자연)
山自然水自然(산자연수자연)
山水間我赤自然(산수간아적자연)
청산도 절로절로
녹수도 절로절로
산절로 수절로
산수간에 나도절로
이중에 절로 자란 몸이
늙기도 절로절로.
옛사람들의 가을속으로 특별한 여행을 해 보았다.
유물 속에 깃든 가을에서 지금의 우리의 모습을 보았다.
국립중앙박물관 주변의 가을 또한 어찌 그리도 아름답던지...
다음에는 그 아름다움을 자세히 소개하련다.
첫댓글 나뭇잎모양의 편지를 보니 소녀시절 낙엽에 깨알같이 글을적어 편지를 적어보내던 시절이 그리워집니다..이가을....
덕분에 앉아서 전시회 다 훑었네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