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하늘 공활하니 누가 시키지 않았는데도 낭산을 찾아갑니다.
경주 남산의 동쪽에 높이 104미터의 야트막한 야산과 그 주변이
옛 신라인들에게는 신유림(神遊林)으로 숭앙받았던 낭산지역입니다.
서기로 413년, 음력으로 8월에 낭산에 구름이 뭉게뭉게 피었는데,
구름모습이 천상의 누각같이 보이고 사방에서는 아름다운 향기가 퍼져
오랫동안 사라지지 않음에, 실성왕은
‘하늘에서 신령이 내려와 노니는 것임에 틀림없다.’고 생각하여
이곳을 성역(聖域)으로 설정하고 더하여 자연보호구역으로 정하여
나무 한 그루도 다치지 않도록 하였습니다.
그래서인지 지금도 경주사람들은 죽어 무덤에 갈 때
낭산의 흙 한 줌을 가져가기를 원한다고 합니다.
이런 신성지역을 입장료도 없이 내 마음대로 출입할 수 있으니
즐겁습니다. 그렇기도 하지만 이곳은 신라문화의
많은 유적과 역사가 서려있어 자주 찾아갑니다.
더구나 제가 사모하는 여성이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지금은 욕계육천(欲界六天)의 하늘에 계신 그녀 말입니다.
자그마한 동네 뒷산 규모의 낭산이지만,
가보면 우리가 잘 아는 역사 인물들의 자취를
골골에 샅샅이 찾아볼 수 있습니다.
지금의 경주시가지는 조선시대 이후에 조성된 뉴타운지역이고,
옛 신라의 중심지였던 이곳에는
진평왕릉, 선덕여왕릉, 통일의 영주 문무왕의 화장터로 알려진 능지탑,
문무왕의 아들이자 감은사를 세웠던 신문왕 등의 왕의 무덤이 있고,
부처님의 힘으로 당나라 대군을 물리치고자 염원하였던 사천왕사터,
또 당나라의 감시를 피하고자 급히 세웠던 13층 목조쌍탑이 있던 망덕사터,
의상대사께서 출가하신 황복사터, 보문호수와 보문관광단지의 이름이
있게 한 당간지주 어여쁜 보문사터, 삼소관음(三所觀音)의 이야기가
전해지는 중생사... 많은 절터가 있고,
‘방아타령’의 백결선생이 살았고, 최치원선생의 옛집이 있고,
왜국에 스스로 볼모로 간 박제상의 흔적이,
명랑법사, 양지스님, 제망매가(祭亡妹歌)를 지은 피리 잘 부는
월명스님도 계셨던 곳입니다.
이런 유서 깊은 곳을 하루에 다 볼 수 있으니 자주 찾고
다시 그리워 발길이 향하는 곳입니다.
오늘은 발굴작업이 한창인 사천왕사터를 둘러보고서
선덕여왕릉으로 올라갑니다.
선덕여왕은 어릴 적부터 영민하여 ‘미리 안 세 가지 일[지기삼사.知幾三事]’가
삼국유사에 전합니다. ‘모란꽃 이야기’와 ‘영묘사 옥문지 이야기’ 그리고
이곳 낭산의 무덤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어느 날 여왕은 뜬금없이 신하들에게 부탁합니다.
“내가 어느 해 어느 달 어느 날에 죽을 것이니,
나를 도리천(忉利天)에 장사지내라.”
병도 없이 멀쩡한 왕이 그런 분부를 내리자 신하들은 어리둥절합니다.
도리천이란 불교 우주관에서 말하는 사천왕들이 중턱을 지키고 있는
수미산 위의 하늘나라에 있는 실재하지 않는 곳입니다.
“그곳이 어디입니까?”
“낭산의 남쪽이다.”
긴가민가했지만 왕명으로 당부하였고, 과연 예언한 날에 돌아가시자
낭산 꼭대기에 무덤을 만들어 장사지냈다고 합니다.
그리고는 32년이 지난 뒤에 왕릉 아래에 사천왕사가 지어졌으니
결국 여왕의 예언이 신묘하게 딱 맞아떨어졌다는 이야기입니다.
선덕여왕릉은 둘레가 73미터 정도인 원형봉토분입니다.
봉분 아래에는 다듬지 않은 자연석으로 보호석을
2단으로 쌓았는데, 부친인 진평왕릉에는 이 보호석이 없고,
후대에는 다듬은 돌로 보호석을 마련하고 십이지신상을
조각하게 되는데, 여왕의 무덤에는 십이지신상이 있을 위치에
큼직한 돌을 박아놓았습니다. 그러니까 묘제변천에 있어서
중간쯤의 형태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능을 둘러싼 소나무들은 해바라기처럼 무덤 쪽으로 향하고 있고,
이제 짧은 해는 바야흐로 남산 뒤로 넘어가려는데
안에 누워계신 여왕께서는 말이 없으시지만
찾은 범부에게는 여러 생각이 많습니다.
우리 역사상 여성으로서는 최초로 왕위에 올랐고
재위(632~647) 16년 동안, 뒷날 태종 무열왕이 된
김춘추와 명장 김유신 같은 영웅호걸들을 거느리고
삼국통일의 기초를 닦았으며, 분황사와 첨성대, 황룡사 구층목탑을
건립하였던 여걸 선덕여왕.
한국은행에서 고액권 발행을 앞두고 여성인물 한 분을
선정하지 못해 고심한다는데, 저보고 결정하라면 서슴없이
이 분을 추천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