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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제26대 성왕(聖王: 523~554재위)의 이름은 명농(明?)이다. 일본 역사에서는 성왕의 왕명을 거의 모든 기사에서 백제의 성명왕(聖明王)으로 ‘명’(明)자를 첨가시켜 표현하고 있다. 일부 일본 역사 기사에서는 성왕의 성(聖)자를 빼고 그냥 백제의 명왕(明王)으로도 쓰기도 한다. 우리나라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년 편찬)』의 『백제본기(百濟本紀)』에서는 성왕(聖王)으로만 쓰고 있다.
성왕이 겸임했던 일본왕의 왕호는 킨메이천황(欽明天皇)으로서, 그 왕명에도 밝을 명자가 들어 있다. 흠(欽)자의 뜻은 ‘공경하다’다. 불교로 빛을 밝혀 공경할 임금이라는 뜻이 아닌가 한다. 일본 역사서 『일본서기(日本書紀: 720년 편찬)』에서 킨메이천황은 제29대왕이며, 재위 연간을 539년부터 571년까지로 서술하고 있다. 그러나 실제 등극 년은 그 보다 8년 앞선 531년이라는 것이 일본 불교 고문서인 『상궁성덕법왕제설(上宮聖德法王帝說; 10C경 편찬)』의 기사이다.
『상궁성덕법왕제설』은 일본 왕실 고문서이며, 일본 왕가의 성덕태자(聖德太子: 574~622)에 관한 가장 오래된 문헌으로서, 서기 7세기 이후의 고대 사료를 편집하여 10세기경에 집대성한 일본 고대 왕실사의 귀중한 사료로서 높이 평가되어 온다. 권위 있는 일본 사학자들은 이 문헌에 의하여 킨메이천황의 즉위년을 531년으로 삼는 것이 정설이다. 앞에서 지적한대로 『일본서기』에서는 킨메이 천황의 등극년을 8년간 뒤로 내려서 539년으로 쓰고 있다.
『일본서기』의 기사에서는 “백제 성명왕(聖明王)은 552년에 일본에다 불교를 전하여 주었다”고 기술하고 있다. 그러나 앞에 예시한 『캉코우사연기(元興寺緣起: 747년 편찬)』와 『상궁성덕법왕제설』에서는 한결같이 “백제 성명왕이 538년에 일본에다 불교를 전하여 주었다”라고 쓰고 있다. 일본 역사학계에서도 성왕의 백제 불교 일본 전파는 538년을 정설로 삼고 있다.
우선 이와 같은 『일본서기』의 기사는 뒷날 조작된 역사 왜곡의 한 전형이다. 왜냐하면 그 당시 일본에는 ‘천황’이라는 왕호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 뿐 아니고 서기 5백년 당시 일본의 국호는 ‘왜(倭)’이었으며, 더더구나 황제가 다스리는 나라인 제국(帝國)이라는 국호는 미개했던 섬나라 왜국에는 가당치 않은 표기이다. 도쿄외국어대학 동양사학과 교수 오카다 히데히로(岡田英弘)씨의 다음과 같은 지적을 보더라도 역사 날조가 들어난다. “‘천황’ 왕호는 서기668년의 텐찌(天智)천황의 왕호가 『선수왕후묘지명』의 구리쇄판의 발굴로서 나타난 것이 가장 오래된 확실한 사료이다. 일본(日本)이라는 국호가 실제로 사용된 것도 서기 670년 이후부터이며 그 이전까지는 왜(倭)이었다”(岡田英弘『倭國』1977)
그 당시 불교문화의 선진국이며 또한 신라와 고구려를 침공하는 등 막강한 군사력을 자랑했던 백제 성왕이 보잘 것조차 없던 섬 땅 왜왕에게 불교를 전파하면서 ‘금동불상을 올려 바쳤다’느니, 왜왕의 신하라는 ‘신명’으로 성왕을 비하하여 기술한 의도는 무엇인가. 이 역사 기사의 날조의 이면에는 ‘백제 성왕의 왜왕 겸임 사실’을 역으로 은폐하기 위한 흑막이 개재하였음을 쉽게 알 수 있다. 그 뿐 아니고 백제 불교 전파가 서기538년인 것을 은폐시킨 또 하나의 연대 조작은 킨메이천황의 등극년도를 1년 뒤로 밀어 ‘서기539년으로 조작한 사항’도 지적된다.
더구나 흥미로운 것은 성왕이 왜국에다 불교를 전파시켰다는 그 전년인 서기538년 3월의 『일본서기』 기사는 아이러니컬하게도 다음처럼 백제의 막강한 군사력이 기술되어 있기도 하다. “이 해에 백제 성명왕은 몸소 자국과 신라 및 임나 두 나라 군사들을 거느리고 고구려를 쳐서 한성(漢城)을 회복했다. 또한 군사를 전진시켜 평양을 쳤다. 모두 6개 군(郡)의 땅을 회복했다.”
서기794년부터 서기1867년까지 장장 1천73년 동안 이어진 일본의 오랜 역사의 왕도가 지금의 교토(京都) 땅이다. 이 일본 고대의 왕도 교토에 가면 그 곳에는 일본 왕실에서 대대로 백제 성왕을 신주(神主)로 모시고 해마다 4월2일에 제사 모셔 온 대규모의 일본 왕실 사당이 있다. 이 사당의 명칭은 ‘히라노사’(平野神社)이다.
히라노 신사에 모시고 있는 성왕의 신주 이름은 금목대신(今木大神; 이마키대신), 금목신(今木神), 히라노신(平野神), 히라노대신(平野大神) 그리고 명신(明神)으로 고대 역사 문헌에 표기하고 있다. ‘명신’은 일본 역사서에서 성왕을 명왕(明王)으로도 부른데서 사후의 신주로서 역시 명신이라고 함께 썼다. 이렇듯 여러 가지 신주의 이름으로 백제 성왕은 일본 왕실에서 지극하게 숭배되어 왔다. 어째서 일본 왕실에서는 왕실 사당 히라노신사에다 백제 성왕의 신주를 제신(祭神)으로 극진하게 모셔놓고 오늘날까지도 제사를 지내 오고 있는 것인가.
이 왕실 사당에는 모두 다섯 분의 백제왕과 왕족의 신주를 모시고 있다. 말하자면 히라노 신사는 백제왕들의 종묘(宗廟) 격이다. 이 왕실 사당의 제1신전에 모신 신주는 백제 성왕이다. 성왕의 위패가 처음으로 봉안된 것은 서기 794년이다. 성왕의 위패를 봉안한 사람은 이곳 교토 땅으로 천도한 제50대 칸무천황(桓武天皇: 781~806재위)이었다. 칸무천황의 생모 화신립황태후(和新笠<高野新笠>皇太后)는 백제 제25대 무령왕(武寧王: 501~523재위)의 직계 후손이라는 점이다. 그 내용은 일본 고대 왕실 편찬 정통 역사서 『속일본기(續日本紀, 서기797년 편찬, 총40권)』에 밝혀져 있다.
칸무천황의 천도 당시부터 이 새로운 왕도의 명칭은 헤이안경(平安京)으로 부르기 시작했다. 칸무천황은 천도 직후 왕궁 북쪽 땅에다 왕실 사당인 히라노 신사를 건설하고 백제 성왕을 모시도록 칙명을 내렸다. 그 때부터 이 히라노 신사는 헤이안경에서 거룩한 왕실 사당으로 존엄하게 군림하게 되었다는 것이 서기927년에 편찬된 일본 왕실 법도(法度)인 왕실 고문서 『연희식(延喜式, 서기927년 왕실 편찬 총50권)』에 기록되어 있다. 과연 무엇 때문에 일본 왕 칸무천황이 백제 성왕의 사당을 왕도에 건설하고 또한 해마다 성왕에 대한 왕실 제사를 모시게 된 것일까.
이 히라노 신사에는 제1신전(神殿)부터 제4신전까지 4동의 신전 건물이 줄지어 서있다. 그러나 이 4개의 신전이 누구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드리는 사당인지에 관해 일반 일본인에게는 바르게 알려지고 있지 않다. 왜냐하면 이 사당의 내력을 일본정부나 교토관광 안내책자에 그 역사적 사항들을 밝히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일본의 일부 양식 있는 역사학자들에 의하여 사당 히라노 신사의 제1신주가 백제 성왕이며 그 밖의 신주들도 백제왕과 왕족들임이 고증되었다.
히라노 신사의 주신이 백제 성왕이라는 사실을 처음으로 밝힌 것은 일본 무사정권인 에도막부(江戶幕府: 1603~1867) 후기의 국학자 한 노부토모(伴信友)였다. 그가 쓴 『번신고(蕃神考』를 보면 히라노 신사의 제1제신인 금목신(今木神)은 백제신(百濟神)인 백제 성명왕(百濟 聖明王)이다”라고 규명했다. 또한 히라노 신사에서 모시는 모든 신주들이 백제 왕족들임을 일본 역사상 최초로 규명하였다. 한 노부토모 씨의 뒤를 이어, 교토제국대학 사학과 나이토우 코우난(內藤湖南: 1866~1934) 교수는 그의 저서 『近畿地方に於ける神社』에서 다음처럼 고증했다.
“금목신(今木神)은 외국에서 건너온 신(神) 구도신(久度神)은 성명왕(聖明王)의 선조인 구태왕(仇台王)이고, 고개신(古開神)은 고(古)와 개(開)로 고(古)는 비류왕(沸流王)이고 개(開)는 초고왕(肖古王)이다.”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첫머리에서 ‘금목신’은 “외국에서 건너 온 신”이라고 백제 성왕의 신주를 완곡하게 표현하고 있는 점이다. 말하자면 그 당시 삼엄한 일본 군국주의 정권의 관립 제국대학의 교수로서 히라노 신사의 백제 성왕의 신주인 금목신을 직접 사실대로 지적하기를 주저했던 것 같다. 그래서 ‘외국에서 건너 온 신’이라는 표현으로 둘러댔다.
이상과 같이 두 사람의 일본 저명 사학자에 의해서 차례로 왕도 교토의 왕실 사당 히라노 신사의 주신은 ‘백제 성왕’이라는 것이 고증되었을 뿐 아니고, 제2신전의 신주는 백제 개국왕인 온조왕이며, 제3신전에도 역시 백제 왕족 비류왕과 초고왕이 신주로서 함께 한 신전에 합사 봉안되어 왔다는 것을 상세하게 입증했다.
19세기의 저명 사학자들 뿐 아니고 현대의 일본 사학자들도 히라노 신사의 제1신주인 금목신이 백제 성왕이라고 속속 밝혀 왔다. 저명한 고대사학자 나카가와 토모요시(中川友義) 씨도 그의 연구론 『渡來した神』)에서 히라노 신사의 성왕을 비롯한 백제왕 제신(祭神)들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썼다. “칸무천황이 헤이안경으로 천도하면서, 히라노 신사를 지어 신주를 옮겨다 모신 이 사당 제1신전의 금목신은 백제의 성명왕이며, 제2신전의 구도신은 성명왕의 선조이다. 제3신전의 고개신(古開神)의 고(古)는 비류왕이며 개(開)는 초고왕으로서, 모두 조선의 왕이다. 제4신전에 모시고 있는 신주는 히매신(比賣神)이다.”
히라노 신사 제4신전의 신주인 히매신은 일본 제50대왕 칸무천황의 생모인 백제 왕족 화신립 황태후이다. 백제 성왕의 신주를 위해 히라노 신사를 세웠던 칸무 천황이 자신의 생모 화신립 황태후의 사후에는 이 사당에다 제4신전을 건립하고 어머니를 ‘히매신’(공주신)으로 신주를 봉안하고 제사를 지냈다. 무령왕의 직계 후손인 화신립 황태후에게 있어서 역시 무령왕의 왕자였던 성왕도 그의 직계 조상임은 두 말할 나위 없다.
2000년 이후 히라노 신사에 관해 가장 상세하게 연구하고 있는 사람은 京都産大 이노우에 미쓰오 교수다. 그는 저서 『渡來人の神--高野新笠と平野神社』에서 히라노 신사에 모시고 있는 신주들은 백제에서 건너 온 백제 도래인의 신(神)이다. ‘지금 오신 신(神)’이라는 뜻에서 금목신(今木神)으로 부르면서 제사를 모셔왔다고 밝히면서, 다음과 같이 다시 소상하게 논술했다.
“헤이안경을 창건한 칸무천황은 도래인의 핏줄을 타고 났다. 칸무천황이 도래인들을 왕실 조정에다 조신으로 많이 등용시킨 것은 자기 자신이 도래인의 핏줄을 타고 났기 때문이며, 또한 자기 어머니 쪽의 조부가 도래계 집안 출신이었다. 즉 어머니는 타카노노 니이가사(高野新笠; 본래 和新笠이며 改姓했다)이며, 이 가문은 백제 무령왕의 왕자인 순타태자(純陀太子)의 후손으로 이어져 왔다는 것이 『신찬성씨록(新撰姓氏錄』에 기록되어 있듯이 명백한 도래계이다.
칸무천황의 도래계 씨족들에 대한 중시의 방침이 헤이안경(平安京: 794~1185)으로 나타난 것은, ‘금목신’으로 호칭하는 신주를 모시는 히라노 신사의 창건에 있었다. ‘금목(今木)은 ’방금 왔다‘(万葉名; 이두식의 漢字 표기법), 즉 ‘새로이 일본으로 건너 왔다’는 의미로서 생긴 말이다. 그 무렵에 한국으로부터 건너 온 도래인들이 집단적으로 거주했던 나라(奈良) 땅의 아스카(飛鳥) 지방의 땅이름도 ‘이마키군(今來郡)’으로 불렀듯이, ‘금목(今木)’은 도래인을 가리키는 용어이다. 그들 도래인들 특히 ‘이마키’라고 호칭되던 백제 계열의 도래인들이 제사를 모시던 분이 금목신(今木神)이다”라고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이상과 같이 일본 학자들의 고증에 따르면 한결같이 지금의 교토 땅 히라노 신사에서 옛날부터 현재까지 장장 1천2백여년 동안이나 꾸준하게 일본 왕실에서 제사 모셔오는 신주들은 모두 백제왕들이다. 두 말할 나위 없이 이 곳의 으뜸인 주신(主神)은 금목신으로 호칭하여 온 ‘백제 성왕’이다. 따라서 히라노 신사 터전은 서기 794년에 칸무천황에 의하여 이루어진 일본 땅에 있는 한국 민족사의 영원한 성지라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칸무천황의 직계 후손들 중에서 가장 유명한 인물은 칸무천황의 헤이안 시대(794~1192) 말기의 무장이며, 조정의 최고위 신하인 태정대신(太政大臣)이었던 타이라노 키요모리(平淸盛: 1118~1181)였다. 그는 일본 역사상 무장으로서도 천황가의 명성을 천하에 떨쳤으며, 칸무천황 직계 왕족 성씨인 ‘平氏(헤이씨)’이다. 그러기에 히라노 신사의 히라(平) 자는 칸무천황 직계 후손인 히라씨(平氏)가 그의 조상신인 백제 성왕 신주 ‘히라노대신(平野大神, 히라씨 가문의 대신)’의 제사를 모시는 헤이씨 가문(平野)의 사당(祠堂)이라는 뜻의 명칭이다. 일본 고대 왕실에서는 왕실 가문을 표기할 때 ‘들 야(野)자’를 써오고 있다.
앞에서 일본 학자들이 한결같이 진솔하게 증언했듯이 히라노 신사의 ‘주신(主神)’은 백제 성왕이고, 그 밖의 여러 신(神)들은 백제 온조왕(溫祚王)을 비롯하여 비류왕(流王), 초고왕(肖古王) 및 일본 칸무천황의 생모 화신립 황태후(和<高野>新笠皇太后)라는 것이 일본 사학자들의 정설이다. 더구나 근년에 이르기까지 일본 역대 황태자와 친왕과 대신 등이 히라노 신사에 와서 제사를 지냈다고 하는 것은 무엇을 입증하는 것인가. 그것은 두말할 나위 없이 이곳의 신주인 백제 성왕을 비롯한 백제왕들이며 화신립 황태후가 역대 일본 왕실의 혈통을 이어준 백제인 조상들이라는 것을 실질적으로 밝혀주고 있는 것이다.
히라노신(平野神)은 백제 성왕의 신주라는 것이 일본의 권위 학자들의 공통된 연구 결과이다. 그런데 1648년에 쓴 『대초자』 전본의 해설문에서는 “히라노신(平野神)은 킨메이천황의 신주”라고 밝혔다. 이 두 가지 견해는 사실상(史實上) 일치하고 있다. 즉 ‘백제 성왕은 일본 킨메이천황과 동일 인물’이라는 왜국왕의 겸임 사실이다. 한 마디로 말하면, ‘히라노명신인 백제 성왕은 일본의 킨메이천황이다’라는 확증이다. 이와 같이 ‘백제 성왕은 일본 킨메이 천황을 겸임했다’는 것을 17세기 『대초자』 전본이 거듭 입증하고 있다.
여기서 일본 왕실 문헌 이외의 칠지도(七支刀)와 인물화상경(人物畵像鏡)의 금석문에 의한 고고학적인 고찰도 간략하게 곁들인다. 백제 제20대 비유왕과 세자(뒷날의 개로왕)가 왜를 다스리던 백제 왕족 후왕(侯王)인 오우진천황(應神天皇: 5C경)에게 서기429년에 보내준 백제 왕실 칠지도가 있다. 왜의 제15대왕으로 기사화되어 있는 오우진천황은 ‘백제 비유왕이 하사한 칠지도를 받은 백제의 후왕이다’라는 것이 현존하는 칠지도에 새겨져 있는 음각 글씨로서 입증된다.
도쿄대학 사학과 이노우에 미쓰사다(井上光貞) 교수는 그 당시 백제 사신으로부터 칠지도를 전해 받은 왜왕 오우진천황은 백제 왕족이며, “천황씨(天皇氏, 천황가문) 자체가 조선으로부터 건너 온 일본 이주자였기 때문에 조선에서 건너 온 많은 사람들을 칸무천황이 조정에 등용시켰던 것”이라고 말했고, 와세다대학 사학과 미즈노 유우(水野 祐) 교수도 “오우진천황과 그의 아들 닌토쿠(仁德)천황은 백제국 왕가의 정복왕조”라고 밝혔다.
근자에는 고대시학자 이시와타리 신이치로우(石渡信一郞)씨는 그의 저서 『백제에서 건너 온 오우진천황』에서 “오우진릉(應神陵)의 피장자는 5세기 후반에 건너 온 백제의 곤지왕자이다. 그는 5세기말에 백제계 왕조를 수립했다”고 단정했다. 일본을 최초로 지배하기 시작한 것은 백제인 오우진천황 시대부터라는 것은 오늘의 통설이다. 이 사실을 고증하는 일본 오우진천황의 전신 초상화도 큐슈의 우사하찌만궁(宇佐八幡宮, 오우진천황 신주를 최초로 봉안한 사당) 신전에 하찌만신(八幡神)으로서 봉사(奉祀) 되어 있다. 하찌만신 고대 초상화를 보면 오우진천황은 도포를 입고, 놀랍게도 머리에는 한국의 옛날 겨울철 방한모인 가죽을 댄 기다란 남바위 모자를 쓰고 있다.
일단 여기서, 제29대 킨메이천황(欽明天皇)부터 아래쪽으로 차례대로 어떤 인물들인지 살펴보기로 한다. 킨메이천황(539~571 재위)은 서기 539년에 즉위한 것으로 『일본서기』가 엮고 있다. 그러나 일본사학 교수 아오키 카즈오(靑木和夫)씨 등 52명이 함께 편집·집필한 『일본사연표』에 의하면 킨메이천황의 즉위년은 서기 531년이다. 이 해부터 성왕은 킨메이 천황을 겸임하기 시작했다. 즉 『일본서기』 기사 보다 8년 윗대에 이미 킨메이 천황은 즉위한 것으로 『일본사 연표』에 표기되어 있다. 그 뿐 아니라 서기538년에 백제 성왕이 왜국에다 불상과 경론(經論)을 보내와 왜국에 불교가 정식으로 전해졌다고도 밝히고 있다. 즉 『일본서기』는 킨메이천황의 즉위년을 자그마치 8년이나 뒤로 밀어 내렸으며, 더구나 백제 불교의 일본 포교도 장장 14년이나 뒤쪽으로 끌어 내린 역사왜곡을 하고 있다. 이와 같은 것은 백제 성왕의 왜왕 겸임을 은폐하기 위한 철저한 역사 날조이다.
킨메이천황의 제2왕자는 비타쓰천황(572~585 재위)이다. 『일본서기』에서는 비타쓰천황이 백제 대정(大井)땅에다 궁을 세웠다고 기술하고 있다. 그러나 『부상략기』에서는 왕궁명이 ‘백제대정궁(百濟大井宮)’으로 명기되어 있다. 우리가 특히 주목해야할 사항은 일본 왕실에서 편찬한 왕실 족보격인 『신찬성씨록』 이라는 왜왕실의 씨족분류본에서 보면 제30대 천황인 “비타츠천황은 백제 왕족이다”라고 못 박고 있다. 즉 대원진인(大原眞人>이라는 백제인 일본 왕족의 출신 성분이 기술된 『신찬성씨록』의 항목을 보면 다음과 같은 기사가 뚜렷하다. “大原眞人, 出自諡敏達孫百濟王也(대원진인의 출신은 비타츠라는 시호를 가진 백제 왕족의 손자이노라).”
대원진인이 백제 왕족이라고 한다면 대원진인의 할아버지인 비타쓰천황은 두 말할 나위 없는 백제왕족이다. 따라서 비타쓰천황의 아버지인 성왕 즉 킨메이천황도 엄연한 백제왕족이다. 『신찬성씨록』에서의 백제왕이란 왕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고, 왕족을 가리킨다. 그것은 일본 역사 기록에서 정설임을 지적해 둔다. 또한 ‘대원진인’의 진인(眞人)이란 그 당시 일본 왕족(황족)으로서 여덟 가지의 성들 중에서 제1위의 최고위 왕족의 성씨를 가리킨다. 말하자면 대원진인은 일본 왕실에서 으뜸가는 최고 가문의 왕족이었던 것이다.
비타쓰천황이 통치하던 나라(奈良) 땅의 지명이 백제였다는 사실은 『일본서기』등 모든 역사서에 밝혀져 있다. 거듭 밝히자면 제30대 비타쓰천황이 나라 땅에서 백제대정궁(百濟大井宮)을 지었고, 그의 친손자인 제 33대 죠메이(舒明)천황도 나라 땅의 백제강(百濟川) 옆에다 백제궁(百濟宮)을 짓고, 백제대사(百濟大寺)를 세웠으며, 백제궁에서 살다가 서거했을 때 ‘백제대빈’(백제왕실 3년상)으로 장사를 지냈다.
그런데 우리가 주목해야할 것은 칸무천황의 율령체제 동요의 방지책으로 『신찬성씨록』이 칸무천황의 칙령에 의해서 편찬하게 된 배경과 깊은 관계가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칸무천황이 칙명으로 지시한 “한일동족관계 서적의 분서 사건(焚書事件)”이다. 즉 백제 왕족인 코우닌(光仁)천황과 백제왕족 화신립 황태후를 부모로 하여 태어난 칸무천황 시대에 “일본은 삼한(三韓: 마한, 진한, 변한)과 동종(同種)이었다는 책이 있어, 그 책을 칸무천황 어대(御代)에 불태워버렸다”라고 하는 것을 키타바타케 치카후사(北帛親房: 1293~1354)가 밝혔다.
이것만을 보더라도 백제 왕족 칸무천황 이래로 일본 왕실이 ‘백제 혈통’이라는 데서 일찍이 야요이시대(BC·3~AD·3) 이전부터 일본 열도에서 먼저 살아 온 일본 선주민(先住民)들의 백제인 왜왕실에 대한 반항이 각지에서 적지 아니 발생했던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당시 가장 강력한 반정권 저항 집단은 일본 열도의 동북지방으로 계속하여 남하하고 있었던 화태(樺太; 사할린 섬)와 북해도 쪽의 아이누족 대집단이었다. 이들은 동북지방 등의 남방계열(인도네시아 등 동남아 지역에서 해류를 타고 떠올라온 종족들) 선주민들과 손잡고 오사카며 나라지역 중심의 백제계열의 야마토정권(和政權)을 몹시 괴롭혀 왔던 것이다.
특히 그들 동북지방의 대규모 아이누족 에조 집단의 저항을 강력하게 격퇴시킨 역대의 명장들은 모두가 백제 왕족들이었다. 특히 칸무천황 시대에 왕도 나라 땅에 대공세를 펼쳐 왔던 에조 대집단을 완전하게 파멸 시켜 정복한 것이 백제인 정이대장군 타무라 마로였기 때문에 그는 항상 칸무천황의 총애를 받으며 왕실 최고의 장관 대접을 받았던 것이다. 그 후 칸무천황의 아들 시대에 이르러서도 타무라 마로의 막강한 군사력에 힘입어 마침내 왕실에서는 대망의 『신찬성씨록』을 완성하는 등 율령 제도의 강화에 힘쓸 수 있었다.
『신찬성씨록』에는 왜왕가의 혈통이 백제 왕족들로부터 비롯된 것을 결정적으로 입증한 것이 제30대 비타쓰천황의 백제 왕족 출신 기사이기도 하다. 죠메이(舒明)천황은 비타쓰천황의 손자이다. 비타쓰천황이 일본 역사상 최초로 나라 땅에다 백제대정궁을 지었던 백제 터전의 현재의 행정 지명조차도 백제(奈良縣 北葛城郡 廣陵町 百濟)이다. 바로 그 고장에서 그의 친손자인 죠메이천황도 조부인 비타쓰천황의 뒤를 이어 백제궁을 건설했다는 것이 『일본서기』에 밝혀져 있다.
그런데 아자리 코우엔(阿者梨皇圓)이 쓴 일본 불교왕조실록 『부상략기』에 의하면 죠메이천황이 승하한 다음 해인 서기 642년 2월에 백제사신이 내조하여 선제의 상을 조문했다는 기사가 나온다. 『일본서기』에는 이와 같은 기사가 보이지 않는다. 즉 그 당시 백제왕국 의자왕(義慈王: 641~660재위)의 조문 사절 사신이 왜왕실에 찾아 가서 “선제(先帝)의 상(喪)을 조문했다”고 하는 것은, 왜의 백제계 왕인 죠메이천황은 백제왕국의 의자왕보다 왕실 가계상으로 그 서열이 윗대라는 뜻이다.
백제 의자왕은 죠메이천황의 왕자인 텐찌천황(天智天皇: 661~667 재위)과 사촌 형제간이다. 즉 서거한 죠메이 천황과 의자왕은 숙질간이다. 따라서 백제왕실에서 건너간 의자왕의 조문사(弔問使)는 의자왕의 ‘선제의 상’ 을 조문했던 것이다. 즉 죠메이천황은 의자왕의 부왕인 백제 무왕(武王: 600~641)과 사촌형제간이다. 일본 고대사학자 우에다 마사아키 박사의 “일본 왕실은 의자왕의 계열”이라고 지적한 것과도 부합되는 사실이다.
죠메이천황의 태자였던 텐찌천황은 660년, 백제가 망하던 시대인 663년 8월에 일본 큐슈 땅으로부터 모국 백제를 살리기 위해 그 당시 왜왕실에서 살고 있었던 백제의 풍장왕자(豊璋王子)와 함께 5천여명의 왜군 병사들을 백제 땅의 백촌강(白村江)으로 보냈으나 전멸 당했다. 당시 모두 27,000명의 일본군이 백제로 원정했다가 패전하고, 그들은 9월에 백제 유민들과 함께 일본 땅으로 돌아왔다. 665년, 텐찌천황은 일본으로 건너 온 백제유민 400여명을 오우미(近江)땅에 살도록 모두에게 토지와 주택까지 마련해주었는가 하면, 667년 3월에는 텐찌천황 스스로도 백제 유민들에게 새 터전을 마련해준 오우미 땅으로 왕궁을 천도했다. 텐찌천황의 백제 유민들에 대한 이와 같은 끔찍한 특별 우대 정책은 그의 오랜 모국에 대한 철두철미한 애정과 일본에서의 백제계열 왜왕실의 든든한 유지 정책이었음을 살피게도 한다.
코우닌천황은 시키황자의 제6왕자이다. 백제 무령왕의 직계 후손으로서 왜왕실에서 “백제조신(百濟朝臣)”이라는 관명으로 벼슬하던 화을계(和乙繼)의 딸 화신립(和新笠)과 코우닌천황(光仁天皇)의 사이에서 태어난 첫째 왕자가 다름 아닌 칸무천황이며, 둘째왕자는 사와라친왕(早良親王)이다. 칸무천황은 서기781년에 즉위하자 백제 성왕의 신주를 극진하게 모시기 시작했다. 이렇듯 백제 성왕의 신주를 일본왕실의 사당에 모시고 제사지내왔다는 것은 백제 성왕이 왜에서 살다가 승하했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다. 더욱이 성왕의 사후 신명(神名)을 일본 왕실에서 최고의 대신(大神)이라고 하는 경칭(敬稱)까지 올려 존칭하면서 타무라 후궁에서 왕실 제사를 모셔 왔다는 것은 과연 무엇을 시사하는 것일까. 일본 역사에서 대신으로 존칭한 신은 신화에 등장하는 개국신이라는 소위 천조대신(天照大神) 등이 대표적인 호칭이며, 그 이후 실존 인물의 신주로서는 백제 성왕의 금목대신이 유일하다.
이제 여기서, “백제 성왕은 일본에 건너 와서 킨메이 천황이 되었다”고 주장하는 일본의 고대사학자 코바야시 야스코(小林惠子: 1936~)씨의 연구내용을 소개한다. “성왕18(서기540)년에 고구려의 우산성을 공격하다 패한 백제 성왕은 곧장 왜국으로 망명했다. 그 때부터 그는 왜국의 카나사시노미야(金刺宮) 왕궁에다 새로운 거처를 정하고 왜국왕이 되었다. 『일본서기』에는 센키천황은 케이타이천황의 제2왕자로 센카천황4(서기539)년 2월에 죽었다고 되어 있다. 성왕은 일본에 건너 왔다하여도 본국의 백제왕 자리를 포기한 것이 아니며, 이른바 백제국왕과 왜국왕을 겸임하고 있었던 것이다”(小林惠子 『二つの顔の大王』 文藝春秋社 1991).
그러나 성왕이 왜국 땅에 건너가서 현지의 왜왕 왕위를 겸임(兼任)하기 시작한 시기는 앞에 제시한대로 서기 540년이 아닌 서기 531년이다. 즉 서기 531년 2월7일에 성왕의 숙부인 케이타이천황이 향년 82세를 일기로 슬하에 왕자가 없이 서거했기 때문에 서둘러 그의 왕위를 계승하기 위해 왜국 땅으로 건너갔다. 성왕은 먼저 숙부 케이타이천황의 장례를 마친 다음 왕위를 계승했다. 케이타이천황은 백제 제24대 동성왕(東城王: 479~501재위)의 제2왕자였다. 동성왕은 왜왕실에서 살고 있다가 백제 제23대 삼근왕(三斤王: 477~479)이 서거하자, 그동안 살고 있던 일본 땅에서 백제로 귀국하여 백제 왕위에 올랐다는 것이 『일본서기』에 기사가 보인다.
이와 같이 그 당시 왜왕실에는 백제 왕족들이 여럿이 함께 살고 있었던 것은 『일본서기』에도 소상한 기사들이 보인다. 무슨 까닭에 왜왕실에 백제 왕자들이 건너가서 살고 있었던가. 약소국이던 왜국에 강대국 백제 왕자들이 결코 볼모로 잡혀간 것은 아니다. 동성왕에 대하여 『일본서기』 기사에서는 “동성왕자는 유우랴쿠천황(雄略天皇) 당시의 왜왕실에서 곤지왕자(昆支王子)의 제5왕자 말다왕(末多王)으로 호칭했다. 동성왕자는 백제 제22대 문주왕(文周王: 475 ~477재위)의 친동생으로서, 왜국 왕실을 장악하고 있었던 친아버지인 곤지왕자, 즉 오우진천황 밑에서 살고 있었다. 아버지 오우진천황이 승하한 뒤에도 줄곧 왜왕실에서 살다가 뒷날인 유우랴쿠천황 시대에 5백명의 왜병의 호위를 받으며 백제로 귀국하여 동성왕으로서 왕위에 올랐다.
이시와타리 신이치로우 씨도 “곤지왕자가 바로 오우진천황이다. 지금의 오우진왕릉의 피장자는 곤지왕자이다”고 단정하고 있다. 여기 한 가지 첨가하여 둘 것은 지금의 일본 오사카의 곤지왕자의 사당인 아스카베(飛鳥部) 신사는 본래 곤지왕(昆支王) 신사였던 명칭을 함부로 일제 치하에 없애고 지금처럼 개칭했다는 것을 밝혀 둔다. 바로 이 아스카베 신사 근처에 오우진왕릉이 자리하고 있다는 것도 굳이 지적해 둔다.
이와 같은 사실에서도 지난날 왜왕실에서 승하한 백제 왕족 곤지왕자(오우진천황)의 위용을 후대에서 우리가 능히 추찰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그런데 한 가지 지적해 두어야할 중대한 사항은 “곤지왕자는 백제 개로왕의 동생이다”라는 『일본서기』의 허위 기사이다. 이것은 매우 악의적인 일본의 역사왜곡이다. 왜냐하면 “곤지왕자는 개로왕(蓋鹵王)의 왕자이다”(『백제본기(百濟本記)』라는 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곤지왕자가 오우진왕으로 왜나라에 최초로 군림한 역사를 왜곡하기 위해 뒷날 『일본서기』의 기사를 악의적으로 왜곡한 것은 확연하다.
왜나라 왕실에서 살고 있다가 백제로 건너와 왕위에 오른 제24대 백제동성왕을 『일본서기』에서는 ‘히코우시노오오키미(彦主人王,ひこうしのおおきみ)’로도 불렀으며, 일본 고대 왕실 성덕태자 문헌인 『상궁기일문(上宮記逸文)』에서는 ‘우시노오오키미(斯王,うしのおおきみ)’로 쓰고 있다. 즉 이 명칭들은 한결같이 ‘큰 소왕’ 즉 ‘우대왕(牛大王)’이다. ‘우시(斯,うし、牛, 소)’라는 한자(漢字) 표기의 이두식 만엽가나(万葉名)로 된 한자 어 표현이다. 더욱 주목되는 것은 『삼국사기』에서도 동성왕의 이름은 ‘모대(牟大)’이다. 즉 ‘소 울 모’(牟) 자와 큰 대(大) 즉 “크게 우는 소”로 쓰고 있다. 이와 같이 한일 양국 고대 사료 어느 것에서나 한결같이 백제 동성왕을 “소”(牛)와 연관지어 “큰 소왕”의 왕호로서 호칭하여 온 것이 주목되기도 한다.
성왕은 서기 538년에는 백제 불교를 직접 왜국에서 스스로 포교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이미 그보다 앞서서 성왕은 서기 531년에 왜국에 건너갔고, 왜국왕의 왕위를 겸임하고 있은 지 7년째 되던 해에 스스로 백제 불교를 전파했다. 그러나 먼저 살핀 대로 『일본서기』는“서기 552년 10월에 신하인 백제 성명왕이 달솔(達率) 노리사치계(怒唎斯致契)를 왜에 파견하여 불상과 경론 등을 올려 바쳤다”고 내세우고 있다. 일본의 권위 사학자들의 정설은 ‘백제 성명왕은 서기 538년에 왜에 불교를 포교했다. 서기 552년에 포교했다는 것은 잘못이다’라고 단정한다. 그들은 일본 고대 불교 문헌들(『上宮聖德法王帝說』,『元興寺緣起』)로서 고증했다.
여기서 지적해 두고 싶은 중요한 사항이 있다. 그것은 『일본서기』에서는 킨메이천황을 서기 539년에 즉위한 것으로 쓰고 있는 점이다. 즉 이것은 불교가 성왕에 의해서 킨메이 천황 당시인 서기 538년에 일본에 포교된 사실 뿐 아니라 성왕의 왜국왕 겸임 사실을 아울러 의도적으로 은폐하기 위한 역사 왜곡이다. 왜냐하면 백제 성왕이 킨메이천황을 겸임하기 시작한 것은 이미 서기 531년이기 때문이다(앞 『上宮聖德法王帝說』등).
또 하나의 참고 사항을 적어두자면 바로 이해인 서기 532년에 금관가야국 김구해왕(金仇亥王)이 신라에 투항했다. 김구해는 김유신의 증조부이다. 『일본서기』에 따르자면 그동안 백제는 왜국과 더불어 가야를 차지하려는데 힘을 기우려 왔다. 그런데 가야연맹이 완전히 신라에 병합된 것은 서기562년이며, 그 당시 왜국은 성왕(킨메이천황 겸임) 치하였다. 『일본서기』에 준하면 성왕(킨메이천황으로서)이 승하한 것은 서기 571년 4월이다. 그해 4월15일에 성왕(킨메이천황)은 병상에서 제2왕자인 태자(제30대 비타쓰천황)를 급히 불러 유언했다. “과인은 중병이다. 후사는 네게 맡긴다. 너는 신라를 쳐서 임나(任那)를 차지하여라.”(『일본서기』)
『백제본기』에 의하면 성왕은 몸소 서기 554년 7월에 신라의 구천(狗川)땅을 습격했으나 실패하여 부상을 입어 전사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 때문에 성왕의 제1왕자 여창(餘昌)이 백제 제27대 위덕왕(威德王: 554~598)으로 등극한 것으로 쓰여 있다. 그러나 성왕은 그 당시 전사한 것이 아니며, 그는 본격적으로 왜국을 전담하여 통치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전사를 위장하고, 여창왕자에게 후사를 일단 떠맡기고, 이미 그가 겸임 통치하고 있던 왜국의 나라 백제인땅의 카나사시노미야(金刺宮/금자궁)으로 완전히 떠나간 것이었다.
성왕은 그 이후 줄곧 금자궁에서 킨메이천황으로만 살았다. 킨메이천황(성왕)을 계승한 제30대 비타쓰천황은 『일본서기』 기사에, “비타쓰천황은 킨메이천황의 제2자이다”라고 되어 있다. 물론 제1왕자에 관한 기사는 일본 고대사서에 전혀 보이지 않는다. ‘비타쓰천황은 백제 왕족’이라는 기사는 『신찬성씨록』에서 살핀바 있다. 성왕(킨메이천황)의 제1자인 제27대 위덕왕을 입증하여 주는 것은 일본 나라 땅 법륭사(法隆寺)의 고문서인 『성예초(聖譽抄)』에 명기되어 있다. 또한 『일본서기』에서는 “킨메이천황15(서기554)년 12월에 백제 성명왕(聖明王)이 전사”했으며, 이듬해인 “킨메이천황16년 봄 2월에 백제왕자 여창(餘昌)이 자기 동생인 혜왕자(惠王子)를 왜왕실로 파견했다”고 되어 있다.
이것으로서 왜국으로 완전히 건너간 성왕(킨메이천황)은 그 이듬 해(서기555년)에 제3왕자인 혜왕자를 왜국의 금자궁으로 불러드렸다. 그 사실은 다음과 같은 『일본서기』의 기사가 중대한 사실을 입증해 주고 있다. 즉, “서기 556년 1월에 혜왕자가 백제로 귀국하게 되자 , 조정의 아베신(阿倍臣) 등 조신들이 거느리는 용사 1천명이 혜왕자를 호위하여 백제로 돌아가게 해주었다”고 한다. 무엇 때문에 일개 백제왕자의 귀국 길에 호위하는 용사 1백명도 아닌 1천명이나 되는 엄청난 수효의 호위군을 충당시킨 것일까. 그 당시 성왕은 킨메이천황으로서 왜국에서 당당하게 군림하고 있었다는 것은 이 한 가지 기사만으로도 실증할 수 있지 않을까. 다름 아니고, 이 혜왕자는 뒷날 친형인 위덕왕을 계승한 백제 제 28대 혜왕(惠王: 598~599 재위)이다.
여기서 또 다른 한 가지 중요한 공통점에 관한 것도 지적하여 두고 싶다. 그것은 이미 살펴왔듯이 일본 역사서에서는 성왕의 왕명(王名)에다 ‘명(明)’ 자를 한 글자 더 첨가시켜 ‘성명왕(聖明王)’으로 쓰고 있는 것과 왜의 킨메이천황의 왕명에도 역시 ‘명(明)’ 자가 한 글자 들어있다는 것은 결코 우연의 일치로 간주할 수 없다고 본다. 또한 앞에서 언급했듯이 일본에서의 ‘천황호(天皇號)’ 칭호는 서기670년 이후의 일이었다. 다만 한일간의 왕호의 혼동을 피하고자 부득이 일본 사서에 준하여 ‘천황호’를 따라 쓰고 있음을 밝혀둔다.
백제 성왕의 신주인 금목대신(금목신)을 끔찍이 여겨 스스로가 왕도를 천도한 교토 땅 헤이안경 왕도에다 새로이 왕실 사당 히라노 신사를 건설한 제50대 칸무천황은 아버지 제49대 코우닌천황과 백제 왕족 여성 화신립(和新笠?~789)과의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생전의 어머니를 끔찍이 위하던 효자였다. 『속일본기』에서는 화신립 황태후에 관해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황태후의 성은 화씨(和氏)이고 휘(諱)는 신립(新笠)이며 증정일위(贈正一位; 작고한 분에게 준 일본 왕실에서의 최고위의 벼슬의 서열)인 화을계(和乙繼)의 따님이다. 어머니는 증정일위의 대지조신 진매(大枝朝臣 眞妹)이다. 황태후의 조상은 백제의 무령왕(武寧王: 재위 501~523)의 아들인 순타태자(純陀太子)로부터 이어 나왔다. 황태후는 덕망이 뛰어나며 용모와 자세가 훌륭하고 아름다워서 젊은 시절부터 평판이 드높았다.”
이 기사에서처럼 백제왕족 화신립 황태후는 서기 8세기 당시에 일본왕실의 조신이었던 백제왕족 화을계(和乙繼)의 딸이다. 화신립 소녀는 제 아비가 백제인 왜왕실의 조신이었기 때문에 왕실의 제6왕자였던 시라카베 왕자(白壁王子; 709~781, 뒷날의 제49대 코우닌천황)와 결혼했다. 이 둘 사이에 태어난 장남이 야마베(山部)왕자이며 뒷날의 칸무천황이다. 화을계 조신은 나당연합군의 침공으로 서기660년 백제가 망한 뒤에 왜나라로 망명해 온 백제왕족의 후손이다. 백제 멸망 당시인 서기 663년 3월에 일본의 제38대 텐찌천황은 백제를 구하기 위해 2만7천명의 일본군을 백제로 파병하였거니와 그와 같은 정황을 살필 때 텐찌 천황의 백제인 핏줄 의식이 누구보다 투철했던 것을 실감시킨다. 시라카베왕자는 텐찌천황의 친손자이다.
코우닌천황의 황후 화신립의 성씨는 코우닌천황에 의해서 뒷날 백제식 복성을 써서 고야신립(高野新笠, 타카노노 니이가사)으로 바뀌게 된다. 일본 왕족과 귀족들은 그 당시 대개 복성을 썼는데, 이것은 본국 백제에서 상류 계층이 흔히 복성을 썼기 때문이다. 화신립 황후의 아버지 화을계는 왜왕실에서 야마토노 아소미(和朝臣) 또는 쿠다라노 아소미(百濟朝臣)라고 우대받던 조정의 신하였거니와 그의 ‘야마토’(和) 성씨는 백제 무령왕의 왕성(王姓)이다. 따지고 본다면 ‘일본’을 상징하는 ‘야마토’(和)는 그 옛날의 백제 왕실을 웅변으로 입증하는 표현이다.
야마베왕자(山部王子, 뒷날의 칸무천황)가 태어난 것은 서기 737년. 그러기에 코우닌천황이 등극했던 당시에 야마베왕자도 이미 그 나이 33세의 청년이었다. 이 당시 어머니 화씨부인은 50세 전후였다. 그녀는 뒷날 아들 칸무천황(야마베왕자)이 등극한 뒤 8년만인 서기 789년에 세상을 떠났다. 금슬이 좋았던 코우닌천황과 화씨부인 사이에는 단명했던 둘째 왕자 사와라왕자(早良親王: ?~785)와 노토공주(能登內親王) 등 모두 3명의 자식이 태어났다.
일본 왕실 족보격 문서인 왕족과 귀족 가문 계보 『신찬성씨록』은 다름 아니고 칸무천황이 왕실에서 왕족과 귀족의 가문을 정리하여 쓰도록 칙명 하였기 때문에, 칸무천황 생존 당시에 왕자와 왕실 조신들이 문헌을 조사하여 쓰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기록이 완성되기 이전에 칸무천황이 승하하여 세상을 뜨자, 그의 제5왕자인 만다친왕(万多親王: 788~830)이 조신들과 계속 집필하여 끝내 완성시켰다. 칸무천황은 고대 일본의 한국인 씨족사격인 『신찬성씨록』의 편찬에 몸소 착수하며 그 완성을 칙명으로 지시했다.
앞에서 지적했듯이 ‘제30대 비타쓰천황은 백제 왕족이다’라는 기사가 나와 있다는 것은 ‘일본왕이 백제인이다’라고 입증하는 유일한 고대 문헌상의 고증이다. 비타쓰천황의 아버지가 킨메이천황 즉 백제 성왕이다. 일본을 지배한 고대 백제인 왕족들의 혈맥은 오늘에도 고스란히 일본 왕실에 이어져 오고 있다.(홍윤기 한국외대 일본문화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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