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면 문득 작년에 넣어둔
옷장 속의 긴 코트를 꺼내 입고
바람처럼 괜히
길 모퉁이로 나서지,
하얀 장미꽃 그림자 같이
초췌한 양광陽光 속을 걸어가다 보면
호주머니 속에 작게 접힌
작년의 종이쪽지가 손에 잡히지,
나프탈린 냄새로 절여진
불쌍한 내 사랑,
하얀 방부제 속에 파묻혀
일 년이나 일년동안이나
창백하게 봉인된 금지된 내 사랑,
가을 햇빛 아래
이 종이쪽지를 건네준 사람이
누구였던가 난 잊어버렸지만
이 종이쪽지를 쓴 사람의 손길이
얼마나 덧없이 향기로왔던지를
난 기억할 수 없지만
가을 햇빛 아래
가을 햇빛 아래
차마 그 종이쪽지를 꺼내
그리운 전화번호를 읽어볼 수 없다 하여도
국립박물관 4층 불교회화실
진열장 속에 보관되 있던
은으로 쓴 화엄경을 난 기억할 수 있네,
어두운 청색 감지 위에
은으로 쓴 화엄경,
너무도 풍부한 슬픔 위에
화려하게 자수된
불멸의 은빛 극락조,
그렇게 영원한 것은
어둠 속에 차디차게 빛나며
작년의 긴 코트 호주머니 속에
반짝반짝 금석문처럼 남아
하얀 장미꽃 그림자 같이
초췌한 가을햇빛 속을 걸어가다 보면
그대여-그대는 어디로 갔을까
그대여-그대는 어떻게 갔을까
알고 싶지만 알 수가 없고
보고 싶지만 다시 볼 수가 없어
여름 사랑이면 힘껏
껴안을 수가 있지만
여름사랑이면 뜨겁게 부딪칠 수가 있지만
가을사랑이여 가을사랑이여
나뭇잎 그림자 아래 종적조차 없으니
그대여-어디로 가야 그대를
그대여- 어디로 가야 그대를,
어찌해도 그대에게 가는 길을
알 수가 없어
우표 한 장의 그리움으로
막막히 집을 나서
천지사방 바람처럼 허공을 헤매일지라도
난 호주머니 속의 그 종이쪽지를
결코 꺼내어 읽지 않으니
가을이면
내 얼굴은
점점 더 비석을 닮아가고
가을이면 내 사랑은
점점 더
우표 한 장의 그리움을 닮아
정처없이 정처없이
바람의 가출을 일삼고 있음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