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이동식 인문탐험가] 대낮 햇살이 하도 뜨거워서 하는 수 없이
가게에 들어가 부채를 찾으니 중국산 부채가 있다. 3천5백원이니까
그리 비싸다고는 할 수 없는 이 부채는 중국 비단을 앞 뒤로 붙이고
거기에 그림과 글씨를 인쇄해놓은 것인데, 거기에 한시(漢詩)가 하나 실려있다.
시의 제목은 拈花微笑图(염화미소도)이고 시를 지은 사람은 唐寅(당인)으로 되어 있다
. "꽃을 들고 미소를 짓고 있는 그림"이라는 뜻일 터인데 무슨 시인가 읽어보았다.
昨夜海棠初着雨, 數朵輕盈嬌欲語。
어젯밤 비가 내린 뒤 해당화 몇 송이가 피어올랐는데
佳人曉起出蘭房, 折來對鏡比红妝。
아침 일찍 미인이 꺾어와 거울에 대고 서로 비교하며
問郎花好奴顔好, 郎道不如花窈窕。
신랑에게 누가 더 이쁘냐 물으니 꽃이 더 이쁘단다
佳人見語發嬌嗔, 不信死花勝活人。
이 말에 화가 난 미인, 죽은 꽃이 사람보다 어찌 이쁜가
將花揉碎擲郎前, 請郎今夜伴花眠。
꽃을 신랑 발 앞에 던져 밟으며 오늘밤 꽃이랑 자라고 하네
뭐 대충 이런 뜻이다.
그런대로 재미있는 시라고 생각하는데, 아무래도 어디서 비슷한 것을 본 것 같다.
그것도 우리나라 시인이 쓴 듯하다. 머리를 짜내어 보니
고려시대 위대한 시인이었던 이규보의 시에 비슷한 것이 있었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그 시의 제목은 ‘折花行(절화행)’, 절화는 꽃을 꺾는다는 뜻이고
행은 옛말 악부시의 한 형식이라하니 '꽃을 꺾다: 노래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牡丹含露眞珠顆 모란꽃 이슬 머금어 진주 같은데
美人折得窓前過 신부가 모란을 꺾어 창가를 지나다
含笑問檀郞 빙긋이 웃으면서 신랑에게 묻기를
花强妾貌强 "꽃이 예쁜가요 제가 예쁜가요?"
檀郞故相戱 신랑이 일부러 장난치느라
强道花枝好 "꽃이 당신보다 더 예쁘구려"
美人妬花勝 신부는 꽃이 예쁘다는 데 뾰로통해서
踏破花枝道 꽃가지를 밟아 짓뭉개고 말하기를
花若勝於妾 "꽃이 저보다 예쁘시거든
今宵花同宿 오늘밤은 꽃하고 주무시구려"
......절화행(折花行), 이규보
▲ '절화행(折花行)'을 소재로 한 드라마 <옥탑방 왕세자>, SBS 갈무리 화면
어떤가? 너무도 똑 같지 않은가?
위의 시를 쓴 중국인은
명나라 사람인 唐寅(당인, 1470 ~ 1523,
字伯虎, 号六如居士、桃花庵主、逃禅仙吏)이어서,
이 시는 아무리 빨리 잡아도 1490년에서 1500년 사이 쯤 될 것인데,
우리의 이규보(李奎報)는 1168년에서 1241년 사이에 사셨으니
이규보가 300년 전 사람이다.
그러니 중국시인이 이규보의 시를 표절한 것이라고
하는 것이 맞지 않겠는가?
그렇지 않고는 이처럼 처음부터 끝까지 표현법이나 이미지가 같을 수가 없다.
그런데 중국 사람의 이 시를 소개하는데 중국의 참고서나 서적들은
이 시 이전의 작품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다.
다만 당인이란 사람이 시와 문장, 글씨 등에 능해서,
祝允明(축윤명)、文徵明(문징명)、徐祯卿(서정경) 등과 함께
강남의 4대재사(江南四才子)라는 별칭과,
沈周(심주)、文徵明(문징명)、仇英(구영) 등과 함께
오문의 4대가(吴门四家)라는 칭송을 받았다고만 되어 있다.
이 시가 싸구려 부채에까지 올라갈 정도라면
이 시는 대단히 사람들의 입에 회자되는 시일 것이다.
그런데도 이 시의 원전이라 할 이규보의 시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는 것은 아무리 좋게 봐주려 해도 좋은 일이 아니다.
혹 이규보 전에 중국 시인이 이런 주제나 소재로
시를 쓴 것이 있다면 모르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당연히 출처를 밝히고
그 원전을 차용했음을 밝혀주는 것이 정도라고 생각한다.
중국의 시인이라고 한국 시인의 작품을 참조하지 않았다고 볼 이유는 하나도 없다.
최근 중국이 우리의 발명품들을 몰래 베끼거나 지적재산권을 훔쳐가는
경우가 많다고 하는데, 500여 년 전에도 벌써 그랬던가?
우리 시인의 잃어버린 저작권을 찾아와야 할 것 같다.
이하자료=동아일보[이준식의 한시 한 수]〈185〉-사랑싸움
입력 2022-11-04
어젯밤 비에 젖어 처음 핀 해당화,
여린 꽃송이 고운 자태 말이라도 걸어올 듯.
신부가 이른 아침 신방을 나가더니,
꽃 꺾어와 거울 앞에서 제 얼굴과 견준다.
꽃이 이뻐요 제가 이뻐요 낭군에게 묻는데,
꽃만큼 예쁘진 않다는 낭군의 대답.
신부가 이 말 듣고 짐짓 토라진 척,
설마 죽은 꽃이 산 사람보다 나을 리가요?
꽃송이를 비벼서 신랑 앞에 내던지며 낭군님,
오늘밤은 꽃이랑 주무셔요.
昨夜海棠初着雨, 數朶輕盈嬌欲語.타
佳人曉起出蘭房, 折來對鏡比紅粧.
問郞花好奴顔好, 郞道不如花窈窕.
佳人見語發嬌嗔, 不信死花勝活人.
將花揉碎擲郞前, 請郞今夜伴花眠.
―‘염화미소도에 부치는 시’
(제염화미소도·題拈花微笑圖)’ 당인(唐寅·1470∼1523)
이른 아침 신부가 해당화를 꺾어 든다.
간밤의 비 세례로 촉촉이 젖은 모습이 말이라도 걸어올 듯 싱싱하다.
이 정도쯤이야 하는 자신감에 신부는 문득 신랑의 다짐이 듣고 싶어진다.
꽃과 저, 누가 더 이뻐요. 어김없는 ‘답정너’라는 달뜬 마음에 신부는 자신만만하다.
이 사랑싸움이 마냥 즐거운 신랑의 엉큼한 대답.
그대가 예쁘단들 꽃만큼이야 하겠소?
이 한마디에 신부가 날린 반격. ‘낭군님, 오늘밤은 꽃이랑 주무셔요.’
신부의 반격이 ‘짐짓 토라진 척’한 것임은 세상이 다 아는 비밀.
이 시는 ‘염화미소도’란 그림에 부친 제화시(題畵詩)다.
시인이 꽃을 들고 미소 짓는 그림 속 여인에게서
흥미로운 스토리를 하나 상상해본 걸까. 아니다.
수백 년 앞서 고려의 문호 이규보(李奎報·1168∼1241)가 읊은
‘꽃 꺾으며 부르는 노래(절화행·折花行)’가 이 시와 판박이라서다.
모란꽃인 것만 다르다.
시인이 이규보의 기발한 발상에 탄복한 결과라 추정할 수밖에.
이준식 성균관대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