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가 알려주는 가이드라인에 의하면, 연인들 사이에 어디까지 애정표현을 나눌 수 있을까? 하는 것이 이번 속풀이의 질문 요지라 하겠습니다. 가톨릭교회가 허용하는 그 선에 대해서는 신자분들 대부분이 아실 것입니다.
아직 잘 모르시는 분들을 위해서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연인 사이의 애정관계에 있어서 넘지 말아야 할 선은 결혼 전에 성관계를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많이 실망하셨나요? 손잡는 데서 시작해서 단계를 밟아 키워온 감정이 사랑으로 확인되면 함께 잘 수도 있는 게 오늘날 세상인데, 가톨릭교회가 이것 밖에 안 되나... 하는 분들도 계실 듯 합니다.
그렇게 아쉬움이 느껴진다고 해도 그건 세상의 흐름이고 교회는 근본적으로 그런 흐름을 거스릅니다. 그러므로 왜 그 선이 설정되었는지 그 이유에 대해 들어보실 필요가 있습니다.
사실 교회가 남녀의 애정관계에 대해 감 놔라 배 놔라 하는 것은 사생활 침해일 수도 있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간섭’한다는 느낌까지 줘가면서 어떤 지침을 내놓는 까닭은, 애정관계가 생명을 다루는 일과 밀접하게 연결되기 때문입니다.
즉, 육체적 결합까지 간다면 아기를 가질 수 있고, 이 생명에 대해 사랑을 주고받은 당사자들이 우선적으로 ‘기쁘게’ 책임을 져야 합니다. 그러나 현실은 꼭 그렇지만은 않지요.
성관계에 있어서, 교회가 그것을 허용하는 상태는 혼인이 이루어져 유지되고 있을 때를 말합니다. “사음(邪淫)은 혼인하지 않은 남녀의 육체 결합이다.
이는 인간의 품위에, 그리고 본래 부부의 선익과 자녀 출산과 교육을 목적으로 하는 성의 품위에도 크게 어긋난다.”(가톨릭교회교리서(이하, 교리서, 2353항)
여기에서 우리는 혼인의 목적도 엿볼 수 있습니다. 혼인을 통해서만 품위에 맞는 부부관계, 자녀 출산, 그리고 자녀를 길러낼 수 있으며 그것이 혼인의 목적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사랑하는 이들(혹은 서로 사랑한다고 생각하는 이들)에게도 정결을 요구합니다. 정결은 육적이고 영적인 존재인 인간의 내적 일치를 의미합니다(교리서 2337항 참조).
쉽게 말해서 육체적 정신적으로 균형 잡힌 사람의 특징입니다. 이 균형은 절제라는 덕을 통해 인간의 정욕과 욕구들이 이성 안에 머물도록 해 줍니다(교리서 2341항 참조). 우리가 비이성적으로 내 욕구를 드러내고 해소하지 않도록 해 주는 것이지요.
이처럼 육과 영 사이에 균형 잡힌 존재, 즉 정결한 존재가 되기 위해서는 절제라는 덕이 필요합니다. 아... 어렵다! 라고만 말할 수 없습니다.
실제로 수도생활을 하는 수도자들이나, 독신의 삶을 살면서 교회에 봉사하는 사람들이나, 결혼 성소를 통해 가정을 꾸려나가는 이들이나 자신의 삶에 충실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정결이기 때문입니다.
정결은 하느님께 충실한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이웃과의 관계에 충실함을 뜻하는 것이 됩니다. 그리스도인은 이웃의 얼굴에서 하느님을 찾아내는 이들이기 때문입니다.
수도자들은 수도생활이 구현하는 삶에 충실하고자 합니다. 공동체에서 함께 살아가는 형제자매에게 헌신하고 세상 안의 이웃들, 특히 가난하고 병든 이들에게 충실하고자 합니다.
독신의 삶을 사는 이들은 오로지 하느님께 충실히 자신을 내어드리고자 합니다. 이들 역시 자신이 하는 일을 통해 이웃과 사회의 공동선을 위해 봉사합니다.
결혼생활을 살아가는 이들은 가장 가까운 이웃인 배우자와 자녀들에게 충실합니다. 그것은 가정을 거룩하게 다듬어 나가는 작업입니다.
이처럼 어떤 성소에서든지, 정결은 서약에 충실함인 동시에 이웃에게 봉사하는 삶을 의미합니다. 지금 내가 충실해야 할 이웃이 누구인지 늘 묻도록 해 줍니다.
사랑이 뜨겁게 타오르고 있다고 느끼는 연애 초기의 연인들에게는 고리타분해 보이는 교회의 가이드라인이 그리 흥미롭게 들리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결국 연인들이 바라는 데까지 갈 수 있습니다. (하지만 미성년자들은 부디 절제의 덕을 더 연습하시길!)
교회의 말은 교회의 말이고, 연인들은 적어도, 강압에서가 아니라 자유로운 서로의 합의 하에 그들이 바라는 욕구를 채울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이후의 결과에 대해 꼭 책임을 지는 성숙한 모습을 보여주시길 바랍니다.
최악의 경우가 보통 낙태와 연결됩니다. 연인들 사이의 즐거움은 맛보고, 그 열매처럼 주어질 수 있는 생명에 대해서는 책임지지 않는 것은 “살인하지 말라”는 십계명 중 다섯 번째 계명을 위배하는 것이 됩니다. “낙태를 주선하여 그 효과를 얻는 자는 자동 처벌의 파문 제재를 받는다.”(교회법 1398조) 이처럼 매우 중대한 죄가 되기 때문입니다.
같은 수도회에서 살고자 열심히 성소모임에 나오던 청년이 있었습니다. 함께 그 모임에 나오던 친구들 중에는, 그가 병역을 마치면 수도회에 입회할 것이라는 데 대해 의심하는 이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이 청년이 짧은 사연을 보내왔습니다.
자신이 급하게 결혼을 하게 되었다는 것이었습니다. 혹시 집안에서 강력히 말리고, 부모님이 정혼을 시키시는 게 아닌가... 순간 그런 상상을 했지만, 사연인즉, 훈련소에 면회를 왔던 여자 친구 덕에 외출을 나갔다가 잠자리를 함께 했고, 그 결과 여자 친구가 임신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계획에 없던 결혼이지만 책임을 지고 싶다는 내용이었습니다.
하느님의 뜻이 이 친구를 수도자의 삶으로 부르셨다면 어찌되었든 여자 친구가 임신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니... 결혼 성소가 그에게는 너무나 뚜렷하게 드러난 것이었다고 해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 친구에게 진심으로 박수를 보냈고, 행복한 결혼이 되기를 기도했습니다. 그럼 그렇지요. 그 친구에게는 자신의 행동에 책임지려는 믿음직함이 있었습니다. 그걸 느껴왔기에 우리 모두, 그가 훌륭한 수도자가 될 것이라 생각했던 것입니다.
지금 그 친구는 두 아이의 아빠로서 충실히 자신의 가정과 삶을 꾸려나가고 있습니다. 어쩌면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은 우리가 우리 각자의 삶을 충실히 책임지는 일일 것입니다. 그런 이에게는 구원이 멀지 않습니다.
연인들이여, 열심히 사랑하시길 빕니다. 서로에게 충실하시고, 이 사랑이 둘의 인격과 또 다른 생명과도 연결되어 있다는 걸 마음에 새기면서 건강하게 사랑하시길 빕니다.
박종인 신부 (요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