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일보 > 문화 > ART(공연·전시) / 편집 2014-04-23 06:12:25 / 2014-04-23 13면기사
<충청의 예맥을 찾아서>
"흉내 낸다고 되나요? 조상 숨결 담겨야 참된 우리 술"
충남 무형문화재 한산 소곡주 담그기 보유자 우희열씨
조선시대 때 과거 길에 오른 선비가 있었는데 걸음도 쉬고 목도 축일 겸, 한산 지방의 어느 주막에 들러서 술 한 잔 달라고 했죠. 그때 마신 술이 소곡주예요. 그런데 이 선비가 소곡주의 맛과 향에 사로잡혀 일어나지 못하고 한두 잔 마시다가 과거도 못 보게 된 거죠. 일어나면 자빠지고, 일어나면 자빠지고 하니까 그때부터 소곡주를 '앉은뱅이 술'이라고 부른다고 합니다."
충청남도 무형문화재 제3호 한산 소곡주 술담그기 보유자인 우희열(76·여)씨는 한적한 시골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수줍음 많고 선한 할머니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50여 년 넘게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 온 한산 소곡주를 얘기할 때면 수줍음은 봄바람에 날아가 버리고 얼굴에는 봄 꽃보다 예쁜 웃음꽃이 피어난다. 부여가 고향인 우씨는 27살 중매로 만난 남편에게 시집을 오면서 처음 소곡주와 인연을 맺게 된다. 남편의 어머니는 별세한 무형문화재 故 김영신 보유자였다.
"시어머니인 故 김영신 보유자한테 소곡주 만드는 법을 배웠죠. 시어머니는 친정어머니로부터 13살 때부터 소곡주 만드는 법을 배웠어요. 일제 강점기 때는 술 만드는 것을 금지 했기 때문에 이리저리 숨어 다니며 몰래 만들었다고 합니다. 그렇게 만들어진 소곡주는 정성스레 제사상에 올려졌죠. 시집 와보니 어머니가 바느질을 하시며 1년에 한 번 씩 술을 만들고 계셨어요. 그러니 자연스럽게 저도 배우게 된거죠. 시어머니는 성격이 워낙 조용하시고 정갈한 분이라 크게 꾸중을 하시진 않았던 걸로 기억합니다. 하지만 새벽 가장 먼저 일어나 몸으로 보여주는 모습에 큰 가르침을 받았죠."
지금의 영광에 비해 소곡주의 과거는 처량했다고 할 수 있다. 해방이 된 후에도 주세법에 밀려 계속 밀주 취급을 받아 온 소곡주는 1979년 충청남도무형문화재 제3호로 지정되지만 그래도 한동안 밀주라는 인식은 사라지지 않았다. 이런 편견에도 故 김씨와 우씨는 소곡주 제조의 명맥을 끊지 않고 이어와 우리들에게 소중한 문화유산을 전해주고 있는 것이다. 혀끝에는 싸리하고 달콤한 맛을 주며, 목구멍에는 시원하다 못해 묘한 쾌감까지 일으켜 주는 술. 한 번 맛본 후 두번째 잔부터는 술잔에 입술을 대는 순간 갑자기 입안에 군침을 돌게 해주는 명주라고 소곡주에 대한 칭찬을 아끼지 않는 우씨는 소곡주 제조법을 묻자 얼굴에 화색이 돌기 시작했다.
"다른 술도 마찬가지지만 소곡주도 우선 가장 중요한 것이 정성입니다. 이 정성을 바탕으로 총 일곱 가지 절차를 거쳐야 해요. 첫째가 누룩만들기인데 이게 가장 어렵다고 할 수 있어요. 통밀을 물에 담궜다가 잘게 부수고 틀에 부어 성형을 한 뒤 한 달 정도 배양하면 누룩이 됩니다. 두번째는 밑술 만들기라고 하는데 맵쌀을 깨끗하게 씻어 말려 쌀가루를 만들고 시루에 넣어 떡을 찝니다. 이 떡에 누룩물을 부어 만든 곡자물을 적당히 숙성시키면 밑술이 되요. 밑술을 만들면 다음으로 덧술을 만들어요. 찹쌀을 깨끗하게 씻어 고두밥으로 만든 후에 숙성된 밑술과 혼합을 합니다. 그 다음에는 첨가물을 넣는데 덧 술에 메주콩, 엿기름 등 소곡주의 맛과 향을 내는 첨가물을 넣죠."
이렇게 첨가물을 넣은 뒤 저온에서 100일 동안 숙성을 시킨다. 우씨는 이 시간들이 가장 조마조마한 시간들이라고 말한다.
"옛날에는 땅속에 술독을 묻고 온도 상승을 억제하기 위해 버드나무 가지로 만든 막대기로 저어주었어요. 그러면서 술이 맛 나게 잘 담궈지라고 기원을 하는 거죠. 옛날에는 흰 옷을 입고 정갈한 마음으로 술을 담갔다고해서 소곡주라라 불렸다는 유래도 있어요."
소곡주가 숙성되면 용수를 박아 맑은 술을 뜬다. 그후 증류를 하면 드디어 한산 소곡주가 완성되는 것이다. 예전부터 소곡주가 시거나 제 맛을 내지 못하면 소주를 내려 먹었는데 이를 한산 사람들은 불소곡주라고 부른다. 도수가 43도로 높은 불소곡주는 많은 이들이 찾는 상품이 됐다.
소곡주를 빚어오면서 언제나 좋은 날이 있었던 것만은 아니다. 특히 1981년 불의의 사고로 남편을 잃은 우씨는 그때가 가장 힘든 시련의 시기였다고 말한다.
"남편이 방앗간을 했었는데 사고로 그렇게 떠난 후 내가 혼자 12년 정도 방앗간을 혼자 운영했어요. 쌀 80㎏짜리를 혼자 짊어지기도 하고 그랬죠. 하지만 당시 생존해 계시던 시어머니와 함께 자식들을 위해 힘든 일도 마다하지 않고 억척같이 일했죠."
현재 우씨의 큰아들인 나장연(47)씨와 며느리 최영숙(44)씨가 한산 소곡주의 명맥을 잇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우씨의 남은 소망은 그리 큰 것이 아니다. 그는 그저 지금처럼 한산 소곡주의 참 맛이 사람들에게 전해지고 우리 지역뿐만 아니라 전국 어디에서나 한산 소곡주를 맛볼 수 있기를 희망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한산 소곡주의 참 맛이 변질되는 안타까운 일은 일어나지 말아야 한다는 말도 잊지 않았다.
"지금은 한산 소곡주를 흔하게 찾을 수 있지만 그만큼 소곡주의 참 맛을 간직한 게 얼마나 되냐 하면 정확히 말 할 수 없을 것 같아요. 돈이 좀 되니까 대충 만들고 그러는데 그러면 그건 차라리 안 만드는 것만 못 한거죠. 나를 무형문화재라고 하는데 정말 다른 건 없는 거 같아요. 그저 속이지 않고 옛날 전통방식 그래도 소곡주를 만들기 위해 노력한 것 밖에 없어요. 그게 쉬워보이지만 어쩌면 가장 중요하고 어려운 일인 것 같기도 합니다." <끝> 글·사진=최신웅 기자
※ 한산 소곡주란…
백제의 1500년 전통이 깃든 한산 소곡주<사진>는 삼국사기에 서동요로 유명한 무왕이 재위 37년(635년)에 백마강 고란사 부근에서 조정 신하들과 소곡주를 마셨다는 기록이 있으며 또 백제가 멸망한 후 한을 달래기 위해 한산 건지산 주류성에서 백제유민들이 소곡주를 빚어 마셨다고 전해 내려오고 있다.
한산 소곡주는 서천산 찹쌀과 누룩을 주원료로 들국화, 메주콩, 생강, 홍고추 등 원료를 100일간 숙성해 감미로운 향과 특유의 감칠맛 때문에 한번 맛을 보면 일어나지 못한다고 해서 '앉은뱅이술'이란 이름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투명하고 맑은 연한 미색의 한산 소곡주는 도수가 18도로 달콤한 맛과 은은한 향이 혀끝을 감도는 것이 특징이다. 술맛 뿐만 아니라 청혈해독의 약리작용이 있으며 말초혈관을 확장하고 혈관운동 중추를 억제하는 혈압강하작용이 있어 고혈압 방지에 좋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시대의 흐름 속에서 간신히 명맥을 유지해오다가 한산면 호암리의 故 김영신이 선조들로부터 제조비법을 전수받아 1990년 4월 소곡주 제조면허를 취득, 본격적으로 대량생산을 했으며 1997년 6월 노환으로 별세한 이후 며느리인 우희열이 대를 잇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