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야!
해수욕장 개장을 훼방 놓던 악천후도 오늘만은 햇솜 같은 운기(雲氣)들을 수평선 위에 한줄로 길게 띄우고, 푸르딩딩하던 바다 역시 쪽빛으로 흰치아를 내보이며 모처럼 낭만을 토한 여름날이었네.
심술궂게 내리던 빗줄기 때문에 그나마 삼삼오오로 모여있던 야영 텐트도 모두 떠나고, 파도소리 높던 화진포가 평온을 찾았지만, 내겐 또 한번의 긴 반추를 할 수 있는 값진 하루였지. 오늘은 공휴일-.우정 자네가 다녀간 곳들을 다시 밟으며 친구를 생각하고 달려온 생을 곱씹어 본 하루였네.
친구야!
뜻밖에 남녂에서 화진포를 다녀가겠다고 숙박을 부탁받던 그 날, 교단에서 고 3 막바지 전국 모의고사 문제를 풀던 무렵이라 마구 얼버무렸을거야. 장 경운! 가끔씩 모교 카페에 들어와 정보를 주고받던 친구가 동해안 최북단인 화진포를 다녀간다니 얼마나 신선한 충격이 아닌가! 우선 금강산 콘도에 근무하는 제자에게 칠염을 들었네. 푸른 바다가 보이는 아늑한 방 하나 잡아놓으라고-. 그러나 반시간도 안되어 오징어 축제 때문에 모든 콘도가 주가를 발휘해, 4개 스페어로 남긴 방마저 주문이 밀려 몸둘 바를 모르지 않겠나.
친구야!
그래서 평소 누님같이 가까이 하던 남교수님 댁으로 자네를 모신 것일세.
달포 전에도 문인들이 와서 그 화포리 132 팬션에 기거하고 가서 만족해 선뜻 그곳으로 정한 것이었지.
장 경운-.춘천서 지인들과 한 잔하고 낙산을 돌아 천천히 오겠다고 장거리 전화가 온 뒤부터 마음에 작은 파문이 일기 시작하였네. 친구는 어떤 모습일까? 전화 목소리만 듣던 친구, 홍안서생으로 한 반은 아니지만 키가 크고 호리호리하던 친구가 그저 어렴풋이 떠오를 뿐이었네,
그러니까 7월 13일 오후 서너시 경이었지. 처와 지리학을 전공하는 아들과 함께 다녀간다고 유난히 온돌방으로 고집하던 친구가 지척의 해양박물관 입구라고 문자판에서 손짓을 하는게 아닌가! 금방 차를 몰고 나가 보니 입구에서 손을 흔들며 가족과 맞이해 주던 뜨거운 해후였지.
친구야!
세월에 모습이 많이 변해 단번에 몰라본 게 너무 죄스럽구나.모자를 벗으니 생을 올곧게 살아온 연륜의 표상인지 자네 말처럼 머리가 많이 벗겨져 의아했어. 그러나 눈과 코와 입 모습이 예전과 같이 잔존해 우정에 그제서야 실감이 났네.
그러나 더욱 안타까운 것은 다음 날부터 제 15차 카운셀러 연차대회가 춘천서 이틀간 열려 그날 저녁에 동료들과 넘어와야 하는 아쉬움이었지.
내리는 빗속에 우선 예약한 화포리 팬션 주인께 친구를 소개하고, 그리고 자연산만 고집하는 속살맛 나는 횟집을 안내하고 이내 곁을 떠나는 아쉬움의 교차였어. 굽어진 진부령을 넘어오면서도 두어 잔 마신 우정 어린 술맛을 음미하였네. 출장 중에서도 무엇인가 다하지 못한 의무감이 이끼낀 마음이었지만, 두번씩이나 전화를 주던 친구의 목소리에 다소 물기묻은 마음이 홀가분해지기도 했어. 역시 자네는 듣던대로 내로라하는 대그룹의 한국종합기술에 감리단 상무겸 단장으로 있다고 -. 많은 친구들과 연을 끊지 않고 소중히 지켜온 춘고인으로 평생을 올곧게 살아온 멋진 친구였음이 자랑스럽더군,
친구야!
자네는 속이 단단히 결구된 가을 배추와도 같았어. 도회지에 거해서 그런지 소탈하고 바다처럼 개방주의적인 성격에 모두 감탄했네. 김일성 별장에서 안내를 맡았던 제자도 너무 훌륭한 친구분이라고 감탄고토를 자아내더군, 친구가 찾아오면 적도에서 송두리째 퍼온 것 같은 해양박물관부터 김일성 별장등을 잘 안내하라고 단단히 부탁을 했지.
물론 자네가 60년대에 화진포 능선에 있는 공군부대에 군생활을 해 감회가 더 깊어 내리는 빗줄기는 아랑곳도 하지 않고 감회에 젖었겠지만, 그곳은 혼자 조석으로 삶을 다지던 내 산책로였네.
친구와는 다르게 조용하고 미소를 머금은 친구 처도 내면적인 것은 물론, 외적인 아름다움은 평범을 훌쩍 상회하여 좋은 인상을 받았네. 고교시절 펜싱을 해서 그런지 육순이 다가와도 풍채 좋고 , 무엇보다 자식 농사가 대풍을 이룬 것이 평생 교육을 손에 놓지 않던 내겐 그저 놀랍더군. 춘고인으로 우뚝 선 동창생의 저력을 가난한 나의 언어로 그려내지 못해 자못 안타깝게 생각하네.
친구야!
혼자 있던 내게 그날은 정말 신명이 났네. 무엇 때문일까? 남교수님한테 자신있게 친구를 안내한 것도 고교시절의 얼이 서려있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세상을 살면서 때로는 눈에 보이는 것도 귀에 들리는 것도 모두 헛것이 많네.
심지어는 모 대학교수 학위가 가짜라고 떠들썩한 요즘 세상이 아닌가!
그에 비하면 친구는 모든 것들이 짜장 소담스럽고 진취적이었네. 오늘도 낚시를 드리우고, 뭍에서 쉼없이 들끓던 생각들을 가지런히 모으며 평정을 찾았지. 낚시로 하루를 마무리 하던 일상을 자네가 찾아와 출렁이게 한 패턴은 너무 소중했네. 요즘 같은 난세에 사는 방법이란 무엇인가? 최소한의 것으로 풍요롭게 사는 지혜와 용기 중에 무엇보다 정신적인 가치를 이슬처럼 새벽이면 느끼는 것이라고 생각해.
친구야!
이제 우리는 좌우로 시선을 돌릴 겨를도 없이 그저 앞만보고 달려온 마라토너들이었지. 노년의 초입새에서 정말 무엇이 소중한 가를 알아야 할 시점이네. 정신적으로 안정된 포구에 닻을 내리고 태풍에도 좀처럼 흔들리지 말아야 될 시점이네. 맑은 영혼으로 상락아쟁(常樂我爭)하며 남에게 먼저 따듯한 손을 내 줄 정점에 서 있다고 믿어.
상경해서 무사히 당도했다고 잊지않고 전화까지 넣어주는 배려에 고맙네. 그런 소이연으로 무더운 하절에 종일 자네가 다녀간 곳을 돌아보며 혼자 중얼거리고, 정신 나간 사람처럼 피식 웃기도 한게 모처럼 오랜만의 고독에서 이탈한 정신적인 유영이라고 할까? 그래 속살맛 나는 횟집의 뉴앙스가 특이했어.
고교에 몸담고 있지만, 평생 가장 소중한 시기는 정신적으로 단단히 결구되는 때라고 믿어. 미국의 심리학자인 에릭슨은 이 때를 정체감이 확립되는 때라고 하지. 개인의 속성과 잠재력을 성취하면서 사회가 기대하는 것에 부응할 수 있는 역할을 느끼는 시기이네. 3 년간을 워카 하나로 버틴 선후배의 맥이 전설처럼 이어지는 속에서 하나의 상징처럼 마음속에 자리잡은 자부심이 배양된 그 때라고 봐. 교훈인 정도(正道)를 우리는 평생 양식삼아 영혼을 살찌우며 걸어온 춘고인은 정녕 아름답네,로펌에 으젓이 진출한 자네의 영녀도 고등학교에서 정도로 무장한 자네의 혼일세.
친구가 다녀간 동해안은 종일 자네 향이었네. 많은 것들을 일깨워 준 손잡이었지. 낚시를 드리우고 무아의 상념에 잠겨 지루할 때쯤이면, 때 맞추어 잡혀주는 햇가자미들이지만, 바다의 필부가 모처럼 친구로 인해 작은 철인이 된 기분일세.
다시한번 교육과 문학을 사랑하는 글쟁이에게 사고의 울타리를 허물어준 친구의 선물에 감사하며, 그래! 남은 생도 고교시절의 그 정도로 더욱 값지게 보내야겠지. 다시한번 찾겠다는 말이 과연 여름이 끝나기 전인지 둔재로는 명확한 답을 추스릴 수가 없어 궁금하네.
자, 그러면 수평선 위를 밝히는 어선들의 불꽃처럼 자네의 나, 그리고 모든 춘고인은 불꽃처럼 타오르는 정도란 무기 하나로 내일을 떳떳이 살아가세.안녕히-.
2007. 7. 17 화진포에서 德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