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서울로 올라와서 대학도 다니다가 말고 인쇄소 문선공으로 계속 있을수가 없어
마포꼭대기에서 살때 어머니는 돌아가시고 아버지에게 원망을 하였습니다"아버지는
평생 무엇을 해 놓았느냐고....." 평생 처음으로 아버지앞에서 원망을 하였습니다.
아버지는 선비이십니다 나주향교의 제관이나 하시고 문중일이나 보시는 한량이십니다.
농촌에서 일이나 해 먹는 농부가 아니었던 것이었습니다.그러니 어머니는 얼마나 고생을
하셨겠습니까?
지금생각을 하니 아버지는 선비이신것입니다. 1902년생으로 고스란히 일제의 식민지시대를
살다가신 한 많은 불우한 시대의 분이십니다 돈을 벌려면 친일이나 지주의 밑에서 일을 하여
주어야 하는데 그럴수 있는 분이 아니십니다.한학을 많이 하셔서 어느곳에서나 인정하여 주시는
인격과 말과 행동의 모범이십니다 .그러니 가정에는 소홀하신 것입니다. 돈이나 가정의 일이나
그게 나는 아버지를 그렇게 좋게 보지를 않했던 것입니다. 나는 가장이면 가정을 지키고 아내
와 자녀들을 보살펴야 한다고 생각을 하였던 것입니다.
내가 나주의 중학교를 졸업을하고 전남의 명문 광주고등학교를 원서를 다 써 놓고도 광주로 학교
를 보내줄수가 없어 시골의 나주 고등학교를 다닐수 없는때에도 아버지를 원망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 어려운 형편에 시골의 농촌학교라도 보내 주었어도 항상 고맙게 생각을 하였습니다.
지금생각하니 내가 지금까지 책장이라도 넘기고 있는것도 다 아버지의 선비정신이 있어 공부를
할수있는 머리를 주신 것입니다.나는 부모님에게 한 없이 감사하게 생각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행복감을 느끼고 살아감니다.
아버지나 어머니나 나에게 원 없이 정성을 다하여 공부를 할수 있도록 뒷받침을 하여주신 분입니다
일제강점기의 어려운 시절에 일본놈들에게 강탈당하고 울럭을 하고 인권을 유린당하고 세상을 살아
갈수있는 길이 얼마나 있었겠습니까? 내가 서울로 가서 대학을 다니겠다고 하니 있는 벼 여러가마를 팔
아 입학금을 대 주셨고 중학교때 몸이 아퍼서 1년간 휴학을 할때 서당을 다녀서 나에게 한문을 배울수
있는 기회를 주셨으며 ,내가 서당에서 한문을 배워 붓으로 한문을 써 놓으면 "야 잘썼다" 라는 말씀을
수 없이 들었습니다 그 교육의 힘이 내가 국문학과에서 고전문학을 할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하여 주셨습니다
아버지는 학자이셨습니다 돈하고 일하고는 거리가 먼 분입니다.나는 그 피를 고스란히 받은 것입니다 .
부모님이 물려준 재산은 없으나 내가 공부를 할 수있는 머리와 건강 그리고 정신의 추진력을 주신
것입니다 그게 내가 살아 갈 수 있는 능력을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 능력을 항상 책장을 넘기는 일이 나의
길이고 공직과 교사의 길을 걸었고 ,퇴직후에도 게속에서 책장을 넘기는 길을 가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도 내가 지식을 써 먹으면 얼마나 써 먹겠습니까? 그러나 새벽에 일어나 찬물로 세수를 하고 맑
은 정신으로 문학공부에 여념이 없습니다.
지금 중국의 역사와 지리 사상가들의 사상 중국의 발전사를 공부를 하고 있는데, 세상에 내가 이렇게
좁은 시야속에서 살았구나 하며 학문의 부족함을 느끼며 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중국의 한자문화권에
지배를 받아 왔고 항상 그 산하에 있었던 중국은 대국이며 툭하면 중국의 협조를 얻어 국내의 통일이나
하고 항상 중국의 원조를 요청하였던 나라가 조선이었으며 국내의 동학난을 수습하지 못하여 일본과
청나라를 불러 들려서 동학군을 진압을 할려다 청.일전쟁으로 비화하여 일본의 승리로 일제의 36년간의
기나긴 식민지 산하로 들어간 것입니다.
지금도 두동강으로 난 국토의 분열 강대국사이에서 허덕이는 국민입니다.그래도 이렇게 어려운 상황에서
도 국민들이 말 없이 노력을 하여 경제성장과 국가발전을 가져와서 살아가고 있는 민족입니다 아직도 우리는
정신을 똑바로 차려서 이 나라의 미래를 내다보고 열심히 살아가야 할 처지라고 생각하면서 글을 마침니다
◈ 차마두 작가님이 저를 삶방의 스타로 부추겨 주셨는데 사실은 부그럽고요 과분합니다 차마두 작가님이야 말로
수 많은 독서량과 그 상상력 만화가로써의 능력을 유감없이 발휘를 하시어 삶방에 활력을 주고 계시는 역량
있는 분으로 찬사를 보냄니다
첫댓글 학자이셨던
훌륭한 부친을
두셨습니다.
부럽습니다.
행복한 하루가 되세요.
좋은 글 잘 보았습니다.
건강하세요.
이제 나이가 들어가니 이러한 추억담이나 이야기해 봅니다
고맙습니다
동구리님~
어쩜 저의 아버지와 비슷 하네요
저희 아버지도 일평생 한량으로 사셨거든요
그렇지만 전 지금도 아버지를 존경 한답니다
자식 사랑은 대단 하셨거든요
저희 아버지는 1915년생이신데 2002년에 87세로 돌아 가셨답니다
담배 하루에 3갑씩 피우고도 장수 하셨지요
선비나 학자들은 머리가 있으니 머리를 쓰기위하여 노동일은 않하는것 같아요
시인님도 서예를 하시는걸 보거나 시를스는것 보아도 아버지의 기질을 본받은 거지요
감사합니다
이글을 보며 지금은 하늘에 계신 시아버님 생각이 납니다
아무것도 안하시고 사셨던 시아버님때매 시어머니 고생은 말로 글로 표현할수가 없었죠
어머니 뇌종양으로 투병생활 하고 계실때도 아무런 책임감 없이 뒷바라지 할생각은 아예 없으시고
며느리인 제몫이었답니다
어머니 돌아가시고 8년을 더 사셨는데 오직 당신 자신만을 위해서 사셨죠
그시대의 남자들이 그런분들 꽤 있었던거 같아요
옛날에는 남존여비사상으로 아내는 그냥 부차적인 존재로 생각을 하지요
자기중심적인 사고가 농후하지요 감사합니다
과거의 선비님들 그래요 가정을 위해 땀흘려
일을 하지 않으시면서 학문이나 파고 들고 그
저 한량의 세월을 보내니 얼마나 안사람들이
고생을 했을까요 그런가운데 자식들은 고생
을 많이도 하고 그런 세월이 우리나라에 있었
나 봅니다.
그래도 대학을 졸업하고 인천교대를 나와 교편
도 잡으시고 나중에 영등포 구청의 공무원이 되
셨으니 성공인이라고 보겠습니다.
참 고생 많으셨습니다.
과거의 중심사상이 남존여비의 자아 중심적인 생각이 많지요
여자는 애나 기르고 남자가 하라고 하면 하고 여성의 하대중심의
\생각이지요 조선의 사회가 남성중심사회에서 오는걸 같습니다
고맙습니다
옛날로 돌아가보면
저의집도 아버지보다
어머니 역할이 크셨던 것 같아요.
우리 아버진 넉넉했던 살림
친구 보증서줘 재산거의 난리고
홧병에 자리에 누우시고
그때가 제가 고 2
어머니 직업전선에 .
고생많이 하셨지요.
선배님 아버님은 선비셨군요
좋은 유전자 덕분에
선배님도 학구파였구나 싶어요
부모님들께 우린 감사하며
살아야 합니다.
김사합니다.
아이구 청담골님내의 속 사정도 복잡하군요
어머니께서 고생을 많이 하셨을것 같습니다
이제 철이 드니 아버지한테 가슴아프게 하였던 미안함이 앞섬니다
일제 강점기에 무엇을 어떻게 하겠습니까?
못사는게 당연하지요 감사합니다
저도 처음은 그랬지요, 나이가 들어 아니 지금도 그게 불효임을 알았다오.
이제 나이가 드니 미안한 생각이 앞이 섬니다 하두 먹고살기가 어려워서
한일이지요 감사합니다
나이 들어가니 그저 부끄러운 일 뿐이네요.
그래도 부끄럽다는 말조차 잃어버리면 안되겠지요.
그러게 말입니다 가난에 하두 시달려서 해보았던 철부지의
자식의 이야기이지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