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가을, 100%의 남자를 만나는 것_이종혁, 마이클리, 김동완
쌀쌀하지만 청명한 바람이 불어온다. 만추, 완연한 가을이다. 옷깃을 세우고 낙엽을 밝으며 길을 걷는 남자의 뒷모습이 이 계절의 이미지라면 여기 세 남자는 최고의 모델일 것이다. 깊어가는 가을, 뮤지컬 <벽을 뚫는 남자>의 듀티율이 되어 벽 대신 관객들의 마음을 뚫고 감성을 사로잡을 이종혁, 마이클 리, 김동완을 만났다. 각기 다른 개성과 성격의 세 남자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각기 다른 매력으로 100%의 남자가 되어준 그들에게 공히 정호승 시인의 ‘벽’을 읽어주고 싶었다. 곱씹어 읽을수록 사랑하는 연인에게 향하다 벽에 갇힌, 그래서 행복한 남자 듀티율이 떠오르니 말이다. 시 읽기 좋은 계절을 핑계 삼아 ‘벽’의 마지막 연으로 서문을 대신한다.
나는 이제 벽을 무너뜨리지 않는다. 벽을 타고 오르는 꽃이 될 뿐이다. 내리칠수록 벽이 되던 주먹을 펴 따스하게 벽을 쓰다듬을 뿐이다. 벽이 빵이 될 때까지 쓰다듬다가 물 한잔에 빵 한 조각을 먹을 뿐이다. 그 빵을 들고 거리에 나가 배고픈 이들에게 하나씩 나눠줄 뿐이다
editor_김아형 photographer_김윤희 cooperation__ series; 장소협찬_시리즈 코너
이종혁
매주 주말이 지나면 그의 이름으로 뜨는 기사가 한둘이 아니다. 둘째아들과 함께 출연 중인 예능프로그램 <아빠 어디가?>의 인기는 이종혁을 국민 아빠로 만들었고, 그의 작은 행보도 이슈가 되고 있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편안한 복장으로 털털한 웃음을 지으며 꾸밈없이 이야기를 한다. “편한 게 좋죠. 억지로 하던 시절은 지났지”라고 말하는 그의 행보가 TV드라마가 아닌 뮤지컬이라니 물음표가 생긴다. 쏟아지는 러브콜 속에서 그는 작년에 했던 <벽을 뚫는 남자>를 택했다. “누군가는 의외의 선택이라고 하지만 내 마음이 끌리는 걸 하는 거죠. 지난 공연이 너무 좋았거든요. 서로의 대사까지 외워서 부를 정도로 팀워크가 좋았죠. 이미 수차례 이야기했지만 <벽을 뚫는 남자>는 순도 100%의 행복함을 주는 작품이에요. 인생에 대한 찬가죠. 화려한 뮤지컬은 아니지만 소박하고 따뜻한 매력이 이 작품을 다시 하게 만들었어요.” 작품 속 듀티율은 이종혁과 외모부터 180도 다른 인물이다. 자그마한 체구에 소극적이고 고지식한 평범한 공무원이다. 브라운관에서는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캐릭터이기에 재미를 느꼈다는 그는 듀티율이 되기 위해 몸을 낮추어 연기했고 듀티율의 감정에 충실하게 살았다. 그때의 기억이 행복했기에 TV드라마도 예능도 아닌 이 뮤지컬을 다시 꺼내놓을 수 있었던 것. “배우는 선택 당하고 또 선택 받는 직업이잖아요. 매일 직장을 나가는 게 아니라 늘 일이 있는 것도 아니고요. 그런 점에서 마음에 여유가 없으면 배우란 직업은 계속하기 어렵죠, 돈 때문에 겹치기 출연을 하는 배우들도 많은데 일확천금을 바라지 않은 이상, 돈은 먹고 살 만큼만 벌면 되는 거라고 생각해요. 돈을 벌려고 일하지 않았기에 여기까지 온 거 같아요. 돈을 벌 생각이었으면 이런 선택을 안했겠죠. 목표랄 건 없어요. 그저 ‘이종혁 연기 잘 한다’ 소리를 듣고 싶을 뿐.” 역시나 이번에도 그는 꾸밈없이 덤덤하고 솔직하게 속내를 털어놓았다. 가식까진 아니더라도 멋 부려 이야기하거나 그럴듯하게 포장한 답을 건넬 수도 있지만 그는 시큰둥한 표정으로 정공법을 택해 말한다. 그런 이종혁도 아들 이야기가 나오면 절로 입 꼬리가 올라간다. <아빠, 어디가?>를 한번이라도 본 사람이라면 그가 아이를 대하는 모습에 놀란 적이 있을 것이다. 혼을 낼 법한 상황에서도 인내로 다독이고 쿨하게 대응하는 친구 같은 아빠. 듀티율과 이종혁이 180도 다른 인물이라고 했던 말은 취소다. 그는 없던 가면을 만들어 쓴 게 아니라 원래 지니고 있던 가면을 찾아 듀티율을 연기하는 것이다. “공연은 편집이 없기 때문에 잘 하는 모습 뿐 아니라 실수도 가감 없이 보여주게 되는데 그게 또 공연의 묘미가 아닐까요. 재공연이지만 부담은 같아요. 그렇다고 저번 공연보다 뛰어나게 뭘 더 잘 해야겠단 욕심은 없어요. 다만 담배를 끊은 지 며칠 됐는데 금연에 성공하면 좀 더 청아하고 맑은 목소리를 낼 수 있지 않을까요.” 소박하고 평범하지만 인생은 아름답다는 작품 속 마지막 넘버의 가사처럼 몽마르트의 소시민들은 듀티율을 만나 자신들의 인생을 사랑하게 된다. 그래서 물었다. 이종혁이 생각하는 아름다운 인생은 뭘까.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살 수 있는 것. 사랑도 뜨겁게 해보고 부모님 공경도 충실히 하고, 온 세계를 누비며 많이 보고 느끼고, 그래서 죽는 순간, 아 정말 후회 없이 다해봤다 할 수 있다면 아름다운 인생이 아닐까요. 제가 하고 싶은 일이요? 이종혁 색깔의 작품을 만들고 싶어요. 제가 연출한 작품이라면 어디에든 이종혁의 색깔이 묻어날 테니까요. 뭐 해보고 안 되면 이 길이 아니구나 쿨하게 인정하면 되는 거니까 언젠간 내 작품을 만들어 보고 싶어요.”
마이클 리
삶이 선택의 연속이라면 그의 선택은 늘 가슴을 따랐다. <노트르담 드 파리>의 그랭구와르도 의외였지만 <벽을 뚫는 남자>의 듀티율은 예상 밖의 전개였다.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의 ‘마저스’로 전에 없던 사랑을 받았던 마이클 리의 원래 일정은 미국으로 돌아가 <레미제라블>의 앙졸라로 합류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비염 수술을 하느라 예정보다 오래 한국에 머무르게 되었고, 그때 <노트르담 드 파리> 측에서 러브콜을 보내왔다. 그는 ‘엄친아’ 의대생에서 뮤지컬 배우로 방향을 틀었던 때처럼 가슴을 따라 모험을 감행했다. “저에게 아주 큰 도전이자 운명이란 생각이 들었어요. 그랭구와르는 매력적이지만 굉장히 어려운 역이거든요. 인물들의 내면과 사건을 모두 꿰고 있는 해설자인 동시에 또 등장인물이잖아요. 극 안팎을 오가며 관객들과 소통하는 게 쉽지 않았어요. <벽을 뚫는 남자> 역시 새로운 도전입니다. 벽을 뚫는 능력, 그건 일종의 은유라고 생각해요. 평범했던 사람이 자신의 특별함을 발견할 때 새로운 세상이 열리죠. 그로 인해 주변과 세상이 변화한다는 건 정말 거대한 드라마에요. 어제 연습 때는 눈물이 나더라고요. 어떻게 진실 되게 그 듀티율을 그려낼 것인가 그게 고민이에요.” 브로드웨이에서 아시아계 배우로 할 수 있는 역은 한정되어 있지만, 그는 그런 편견을 깨고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의 유다와 예수를 번갈아 연기했다. 눈부신 활약을 했음에도 피부색과 눈 모양에서 비롯되는 배역의 한계는 실력으로 극복할 수 없는 것이었으니, 그가 한국행을 택한 가장 큰 이유는 배역의 폭이 넓다는 것이었다. 한국 활동에 무게를 싣게 된 이상 그의 당면과제는 언어. 그동안은 대사 연기가 없는 송스루 뮤지컬 위주로 작품을 했지만 연기를 못하는 배우도 아니고, 마이클 리 자신도 관객들도 더 다양한 작품으로 만나고 싶은 바람이 있다. “한국에서 공연하는 이상 언어 문제는 제가 풀어야 할 숙제이기에 열심히 배우고 있어요. 가사의 뜻과 인물의 감정 알기 위해 몇 배로 노력하죠. 미국에서는 하루면 될 게 여기선 일주일이 걸리거든요. 그래서 더 열심히 할 수밖에 없고 그게 나를 더 좋은 배우로 만드는 것 같아요. 새로운 인물을 만날 때면 그가 겪고 있는 상황에 100퍼센트 몰입해 인물의 감정이나 그가 움직이는 동기 등을 찾고 이해하는 과정을 거치죠. 듀티율의 경우, 3-40년을 자신만의 세계에 완전히 고립되었던 남자잖아요. 그 기분을 이해하는 게 먼저였고 그러자 그에게 일어난 변화와 그가 이사벨에게 느끼는 사랑이 얼마나 강력한 감정인지를 이해할 수 있었어요. 사랑은 모든 걸 가능하게 하고 또 희생하게 하니까요. 그래서 듀티율이 벽에 갇히는 순간은 슬픈 장면이 아니라 가장 아름다운 장면이라고 생각해요.” 그는 운명을 믿는다. 의대를 다니던 시절 뮤지컬을 만나지 않았다면 그의 인생은 지루했을 거라고 했다. 반대로 뮤지컬을 전공했다면 이것이 주는 기쁨이 얼마나 큰지 느낄 틈이 없었을 것이라며, 모든 일은 일어나는 데 다 이유가 있다며 웃었다. 그런 관점에서 그의 연기는 인생을 더 사랑하게 했고 다른 사람을 더 생각하게 했고 그의 이야기를 나누고 그만의 캐릭터를 만들게 했다. “무대에서 연기를 하는 게 아니라 그저 무대에 있는 것. 무대에서 살고 숨 쉬고 노래하는 게 제 목표에요. 무대 위에서 마이클 리가 아니라 그랭구와르가, 듀티율이 서있길 바래요. 어려운 일이란 걸 알기에 나는 그 인물이 되기 위해 듣고 보며 매일 더 열심히 노력하죠. 그게 언젠가 좋은 배우 마이클 리를 만들어줄 거라 믿습니다.”
김동완
두해 전, 굴지의 아이돌그룹 신화의 멤버인 김동완이 상당한 내공을 요하는 <헤드윅>을 첫 뮤지컬로 택했을 때 무슨 배짱인가 싶었다. 하지만 그는 그만의 방식대로 헤드윅을 소화했고 그동안 몰랐던 김동완을 무대 위에서 쏟아냈다. <헤드윅>을 다시하면 더 잘할 수 있을 것 같다며 크게 웃는 그는 요즘 <벽을 뚫는 남자>에 푹 빠져있다. “<헤드윅>이 쉽지 않은 작품인 건 분명한데 저에겐 유리한 점도 많았어요. 모노드라마니까 상대배우와의 호흡에 신경 쓸 필요가 없었고 나만의 쇼를 만드는데 집중하면 됐거든요. 아쉬웠던 건 (팬들은 섭섭해 하겠지만) <헤드윅>이 아닌 김동완을 보러온 팬들이 많았다는 것. 게다가 객석과 주고받는 부분이 많아서 헤드윅이 아닌 김동완이 들키는 순간이 많았는데, <벽을 뚫는 남자>는 역할 안에 제가 잘 숨을 수 있을 것 같아요. 이번에는 잘 분리시킬 수 있을 것 같아요.” 할리우드의 히어로 물은 대부분 평범했던 남자가 어느 날 갑자기 비범한 능력을 갖게 되고 그 능력을 발휘해 사람들을 돕고 사랑도 쟁취하는 이야기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벽을 뚫는 남자>의 듀티율도 다를 게 없다. 다만 가장 행복한 순간, 감정이 최고조에 달했을 때 그 능력도 삶도 끝나버리는 것이 다를 뿐. “연예계 생활을 오래 하다 보니 그런 순간이 많아요. 콘서트나 방송이 끝난 후에 감정이 북받칠 때가 있어요. 그런데 조명은 꺼져있고 사방엔 정적이 흐르죠. 그래서 듀티율에게 묘한 공감대가 생기더라고요. 앞서 이 작품을 했던 창정이 형이 연습하다 펑펑 울었다는 얘길 한 적이 있는데 그땐 ‘뭘 그렇게까지’ 했던 게 연습을 하다 보니 이해가 되데요. 듀티율에 제 인생이 겹쳐 놓게 되더군요.” <헤드윅> 때는 처음이라는 부담이 컸다면, 이번에는 티켓 오픈 10분 만에 자신의 출연분이 매진되었단 소식에 책임감이 막중해져 부담이라고. 첫 공연부터 완벽한 무대 보여주기 위해 연습만이 살 길이라며 웃던 그는 이 작품의 클래식한 편곡에 잘 맞는 창법을 찾는 게 가장 고민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사랑을 위해 벽을 뚫는 사람도 있는데 난 무얼 하고 있나’란 거리의 화가 넘버가 가장 좋다며 흥얼거렸다. “듀티율이 갖게 되는 능력과 순식간에 빠진 사랑 그리고 짧은 행복 등을 보면서 어렸을 때 본 영화 한 편이 생각났어요. 불치병을 앓는 로버트 드니로가 신약의 개발로 두 달이란 짧은 시간을 정상인으로 살게 되는 <사랑의 기적>이란 영화에요. 그 영화가 떠올라 감정선을 잡는데 도움이 됐죠. 한때는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하고 싶었던 적이 있었어요. 배우들이 슬픈 연기를 하다보면 같이 슬프고 우울해진다고 하는데 전 슬픈 연기를 하면 되레 슬픈 마음이 해소가 되고 행복해져요.(웃음) 울고 나면 개운한 것처럼 내 안에 슬픔을 극을 통해 해소하고 싶었던 거 같아요.” 최근 파울로 코엘료의 트위터를 모아놓은 <마법의 순간>이라는 책을 읽다 ‘어느 날 아침 눈을 떴을 때 당신은 꿈꾸던 것들을 실천할 수 있는 시간이 그리 많지 않음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바로 지금 시작하세요’란 문장을 읽고 또 읽었다는 김동완. 머리에서 가슴으로 가는 길이 가장 멀다고 했던가. 새로운 도전을 앞두고 고민이 많았던 그에게 그 짧은 글은 그 어떤 말보다 용기를 주는 문장이었다. “지금이 한창 야구 시즌인데 타자들의 역전 홈런을 보면서 사람들이 스포츠를 좋아하는 건 진짜기 때문이란 생각을 했어요. 예측할 수 없는 드라마잖아요. 연기가 리얼한 인생은 아니지만 적어도 무대 연기만큼은 관객에게 진짜를 느낄 수 있게 해주거든요. 다시 뮤지컬을 하게 된 건 편집이나 효과에 숨을 수 없는 리얼이 주는 매력 때문이에요. 그래서 요즘은 부쩍 연극에 대한 생각이 간절해요. 아무래도 뮤지컬은 노래에 기대는 부분이 크잖아요. 무대에서 연기만으로 정면승부를 해보고 싶어요.”
[출처] 늦가을, 100%의 남자를 만나는 것_이종혁, 마이클리, 김동완 (예술공원(예술과 공연을 원하다)공연관람/연극순위/어린이공연) |작성자 씬마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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