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을 따르는 길
2024. 5. 26. 주일오전예배
지난 주간에 주님 모시고 삶을 꾸려갈 때 자주 불렀던 찬송이 있어서 불러보겠습니다. “주님은 주님은 누구시길래 내 맘에 사랑을 주시나 주님은 주님은 누구시길래 내 맘에 평화를 주시나 언제나 놀라운 축복을 주시는 주님의 사랑은 너무도 크셔라 오늘도 내 맘을 모두 바쳐서 주님께 기도를 드리네. (간주를 들으시고 3절은 다같이 부르시겠습니다.) 주님이 주님이 어찌하여서 나를 이렇게 부르실까 미천한 자여서 난 할 수 없어도 날 버리시진 않으실까 이제는 물러설 수가 없어요 그 사랑 내 맘에 있으니까요 주님을 따라서 산 넘고 강 건너 난 주님 섬기며 따르리”(찬송 ‘주님은 누구시길래’)
성경 한 구절 읽어드리겠습니다. 마태복음 16장 24절입니다.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아멘!
주님은 주님을 따르는 제자들뿐만 아니라 오늘 우리들에게도 이 말씀을 하시는 것 같습니다. 아무든지 주님을 따를 수 있습니다. 남녀노소 빈부귀천 차별이 없이 누구에게나 주님을 따르는 복된 길이 열려 있습니다. 그러나 성서의 인물들을 보거나 교회사의 믿음의 증인들을 살펴보면 아무나 따라가는 길은 아닙니다. 주님이 나를 따르라고 하시면서 세 가지 조건을 내거셨습니다. 이 조건을 감당할 때 주님을 따르는 제자요, 주님을 따르는 주의 백성으로 인정 받겠지요. 죄인의 대명사인 세리와 기생도 주님을 따를 수 있었습니다. 세리 마태, 세리장 삭개오, 이방 가나안의 여리고에 살던 기생 라합도 주님을 신실하게 따랐습니다. 다윗이나 요셉이나 다니엘이나 모르드개와 같이 한 나라의 왕, 한 제국의 총리들도 주님을 따를 수 있었습니다. 거라사 지방 무덤에서 거하며 자기 몸을 밤낮 상해하면서 삶이 없는 것 같던 거라사 미친 사람도 예수님을 만나고 새롭게 되어서 주님을 따를 수 있었습니다. 성전 앞에서 구걸을 하면서 지내는 그 앉은뱅이 거지도 주님의 긍휼 속에 주님을 따를 수 있었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주님을 따르는 길에서 주님께서 하신 말씀을 귀담아 들었으면 합니다. 주님을 따르기 위해서는
첫째, 자기 부인
자기를 부인하지 않으면 주님을 부인하게 돼요. 계시록 3장에 있는 말씀처럼 작은 능력을 가지고도 주님의 말씀을 지킨 빌라델비아 성도들을 주님은 칭찬하시면서 주님을 배반하는 이들도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잖아요? 그런데 이 땅에 보냄 받았을 때에는 베들레햄 말구유에서 태어나셨고 갈릴리 나사렛 목수의 집안에서 자라시고 그곳에서 목수 생활을 하셨습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아름답게 서 계신 본으로 삶을 꾸려가셨다고 생각합니다. 십자가 지시기 전에 제자들과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 우리 주님의 기도 내용을 왜 성서에 기록해 놓았을까요? 그것도 사복음서에 다 기록해 놓았을까요? 우리도 본받으라고 기록하신 줄 압니다. “아버지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되기를 원합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삶과 기도의 중심이셨습니다. 예수님이 보여주신 자기 부인의 삶, 하나님은 기뻐하셨고 사랑하는 아들이 그 길을 가는 것에 대해서 참 고마워하셨다고 생각이 듭니다.
우리가 자기를 부인하고 싶은데 참으로 주님을 시인하며 따르고 싶은데 그 길은 어떻게 실현됩니까? 로마서 7장에서 사도 바울 선생님은 고백합니다. “내 속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않는다”고요. 하나님 앞에서 죄에 대해서 무력하고 나는 무익한 죄인임을 고백하며 ‘주님, 당신 없이는 이 땅에서 죄와 사망의 종노릇 할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의 십자가로 날마다 나를 벗어버리고 내 주님을 따릅니다.’ 민수기 21장에 구리뱀을 장대에 높이 들었던 모세, 당시에 하나님을 원망하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그 길을 가지 않으려는 염소 같은 이스라엘 백성을 하나님은 불뱀으로 심판하셨지만 모세는 중보기도를 했습니다. 용서해달라고요. 그때 주님이 내신 구원의 길은 장대 끝에 구리뱀을 달고 그것을 ‘쳐다본즉 살리라’고 하셨습니다. 우리 육적 본성이 그와 같이 독사라는 것이지요. 자기를 부인하지 않으면 주인도 몰라보고 형제도 몰라보고 이웃도 몰라봅니다. 십자가로 우리 자신을 날마다 순간마다 넘겨버릴 때 우리는 주님을 알게 되고 사랑하는 형제가 보이고 내가 섬길 이웃도 보이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 후에 광야에서 사십 년간 연단을 받았습니다만 가나안에 들어가기 전에는 요단강을 건너 길갈이라는 곳에서 할례를 행했습니다. 할례는 육적 몸을 베어버리는 것인데 복음의 빛 가운데서는 주님을 깊이 생각하며 나를 벗어버리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전쟁에서 이긴 후에도 길갈로 돌아왔습니다. 전쟁에 실패해도 길갈로 돌아와서 마음을 새롭게 했습니다. 요한복음 13장에 예수님께서 마지막 밤을 제자들과 함께 보내실 때에 제자들의 발을 한 사람 한 사람 씻어주셨습니다. 베드로가 그 예수님의 일을 인정하려 하지 않자 “내가 너를 씻기지 아니하면 내가 너와 상관이 없다.” 그러자 베드로는 “주님, 그러면 제 온 몸도 씻어주십시오.” 그러나 예수님은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온 몸이 깨끗한 자는 발밖에 씻을 것이 없다.” 날마다 기쁨도 슬픔도 십자가로 나를 다 씻어버리고 새롭고 산 길로 내 주님을 따라야 할 줄로 압니다. 자기를 부인하는 자가 주님을 따르는 자입니다.
둘째, 오늘 보좌의 다스림(오늘 나의 십자가)
오늘 나의 십자가를 짊어지고 주님을 따라갑니다. 달리 말씀하면 오늘 보좌의 다스림이 살아 있는 자입니다. 주님은 나를 위해 십자가를 지셨고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주님을 위해서 각자의 십자가가 주어진 것이 사실 영광입니다. 지금도 사도행전의 연속이지 않습니까? 세상 사람들은 모르지만 그리스도인들이 주님 안에 있는 것, 주님께로부터 보냄 받는 것은 주님의 보좌와 직결된 삶을 이 땅에서 꾸리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온 우주를 운행하시고 나 한 사람을 운행하시는 주님께 찬양드립니다. 성도는 그래서 날마다 하늘 보좌의 주님께 허락을 받고 살아갑니다. 내 맘대로 삶을 꾸려가서는 안 되지요! 그런 사람들은 주님을 원망하게 됩니다. 대적하게 되고 배반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에게 열린 보좌가 있고 열린 보좌의 은혜 속에 기도하며 응답받고 하나님께 영광과 기쁨을 드리는 하나님 나라의 삶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지요! 조그마한 우리 각자의 삶에 보좌의 다스림이 살아 있을 때 우리의 삶 속에서는 주님의 영광이 드러납니다.
‘금과 은은 불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금광석이라 할지라도 뜨거운 불에 제련해서 정금, 순금이 나오게 됩니다. 은도 일곱 번 단련한 후에 더욱 값진 순수한 은을 얻을 수 있습니다. 오늘 나의 십자가, 오늘 나의 다스림이 살아 있을 때 우리는 성도의 순수성을 가질 수 있습니다. 서양 속담에 이런 말이 있대요. ‘흐르는 시냇물에서 돌들을 치워버리면 그 냇물은 노래를 잃어버린다.’ 주님 모시고 가는 이 땅 신앙 길에서도 주님이 허락하신 십자가, 시련과 연단과 고난의 길이 있다고 할지라도 그 일 때문에 찬송이 나오고 그 일로 인해서 더욱 주님을 붙들게 되고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살아 가는 것 같습니다. 고린도전서 15장 31절 말씀에는 사도 바울 선생님이 “나는 날마다 죽노라”는 고백을 하십니다. 이 말씀을 자기 부인으로 생각하는 분이 있는 것 같은데 그게 아니지요. 날마다 죽음을 앞두고 있는 현실에서 타협하지 않고 죽기를 각오하며 고난을 각오하고 주님을 따른다는 강한 의지를 보여준 것입니다.
신실한 성도들은 성전을 밝히는 등대로 주님은 말씀하시기도 하셨습니다. 출애굽기 37장 17절 말씀에 보면 “정금으로 등대를 만들되 그것을 쳐서 만들었다”고 말씀합니다. 정금을 주물로 부어서 만든 것이 아니라 정금 덩어리를 쳐서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공학적으로는 타출판금이라 합니다. 주님 앞에 주의 등대처럼 주의 돕는 자로 서기 위해서는 주의 다스림은 필수적입니다. 히브리서 12장에도 이런 말씀이 있지 않습니까?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한글 성경에는 ‘징계’로 나와 있지만 영어 성경에서는 ‘discipline 훈련’이라는 단어를 쓰고 있습니다. 징계를 훈련으로 단어를 바꾸어서 다시 읽겠습니다. “너희가 참음은 훈련을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비가 훈련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훈련은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참 아들이 아니니라”(히12:7~8) 이 땅에서 나의 십자가를 짊어지고 자신의 연약함이라던가 애물단지인 가족과 자식들이라던가 주님이 내게 허락하신 소명 때문에 십자가를 지더라도 주님께 감사하고 그 고난으로 인해서 더욱 주님을 가까이 하고 주님의 돕는 자로 훈련을 잘 받았으면 합니다.
마지막 셋째, 강한 순종
주님께서 기뻐하기 위해서는 대충하는 듯이 하는 것이 아니라 강한 순종이 요구됩니다. 계시록 14장 4절 말씀에 “어린 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가 진정한 성도라고 표현합니다. 신학교 다닐 때 자주 부르는 찬송 중 하나가 ‘아골 골짝 빈들에도 주님 보내시면 간다’고 했는데 현실은 그렇지 않은 것 같아요.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은 독자 이삭을 사랑하는지 하나님 자신을 사랑하는지 테스트하시기 위해서 독자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사흘 길을 가서 모리아산 정상에서 그 독자 이삭을 번제로 드리려고 칼로 내리치는 순간 하나님은 급히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됐다. 네가 나를 더 사랑하는 것을 인정하마” 하고서 아브라함의 믿음과 온전한 순종을 기뻐하시고 받아주셨습니다. 이삭도 청소년이어서 아브라함, 자기 아버지의 손길을 뿌리치고 도망갈 수도 있었지만 죽더라도 아버지의 길에 순종했습니다. 골고다에서 아버지께서 주신 사명을 이루기 위해서 죽기까지 순종하신 예수님, 주님께 대한 사도 바울 선생님의 철저한 순종, 제자들의 순종과 헌신, 믿음의 선진들의 순종, 오늘은 저와 여러분이 주님께 대한 순종의 길에 서 있습니다.
누가복음 5장 5절에 보면 베드로가 주님의 말씀을 듣고 이렇게 말합니다. “선생이여 우리들이 밤이 맞도록 수고를 하였으되 얻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그들이 경험적으로는 안 될 것 같지만 주님의 말씀에 순종해서 그물을 내렸을 때 그물이 찢어지도록 고기를 잡을 수 있었습니다. 고기를 많이 잡아서 기쁜 것이 아니라 자기 생각을 내려놓고 경험을 내려놓고 세상과 자기의 옷을 벗고 주님의 뜻을 순종하는 것, 그 단순한 순종이 아름다웠습니다. 순종은 우리 자신에게서 나오는 산물이 아닙니다. 주님의 인격이요, 주님께 속할 때 주님의 말씀을 따르고자 하는 순종이 흘러나옵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오늘 새롭게 주님을 따르는 길에 우리 모두는 서 있습니다. 각자가 오늘 자기 부인이 뚜렷하고 강한 마음으로 자기 십자가를 짊어지고자 할 때 주님께 대한 강한 순종이 이어질 줄 압니다. 주님을 언제든지 따라가고자 할 때 강한 순종으로 각자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짊어지고 철저히 자기를 부인하면서 힘있게 영광의 그 길 달려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권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