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에 쌓은 성 '산성'은 일본이나 중국에는 흔하지 않다고 했다. 조선에만 유독 276개나 존재했던 요새라고 전문가들은 정리해 놨다.
이렇게 산성을 중시한 정책은 고려가 '청야(淸野)작전'을 채택하면서 굳어졌다고 했다. 사람들을 모두 산성으로 올려보내고 마을과 들을 비워 적에
대응하겠다는 전략이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팔공산권에서는 산성이 별로 중시되지 않았던 듯 했다. 임진왜란에서 공산성이 큰 역할을
했는데도 별다른 복구 노력조차 없었던 것이 그 증좌. 기록상으로는 1596년 1월 체찰사 이원익이 칠곡 막부에서 산성 수축을 논의, 공산성
재건을 시도했다고 했다. 하지만 말로만 그쳤는지, 그 일년 후 터진 정유재란 때는 9월 들면서 결국 공산성이 왜군에게 함락돼 분탕질 당하고
말았다. 공산성 복구를 위한 추가적인 조치는 그 뒤에도 없었다.
팔공산권 산성의 문제가 본격적으로 재론되기 시작한 것은 1638년이
돼서였다. 병자호란까지 겪고야 인식이 바뀌었던 모양. 그러다 이듬해 관찰사로 부임한 이명웅의 판단에 의해 공산성 복원이 포기되고 가산성을 대신
수축키로 결정됐다. 그는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으로 왕을 호종하고 세자가 중국 심양으로 볼모 잡혀 갈 때 수행했던 관리. 그의 부임 당년 9월에
시작된 축성 공사는 이듬해인 1640년 4월에 1차 마무리됐다. 그때 만들어진 것은 가산성 중 '내성'(內城). 지금의 동문 서편 권역이
그것이다. 완공된 성벽 길이는 4km였고, 동문·서문·북문을 뒀으며, 보국사·가흥사·정천사·통천사 등 4개의 사찰을 세웠다고
했다.
그와 동시에, 일대를 관장하며 성주목에 소속돼 있던 팔거현은 '칠곡도호부'로 승격 독립돼 청사를 산성 안에 설치했다.
도호부는 대구 읍내동 일대와 왜관읍 동명면 지천면 가산면 등지를 직할했고, 군위·의흥·신녕·하양 등 4개 현의 군사력을 통제했다. 칠곡도호부사가
650여명, 그가 겸임하는 가산수성장이 7천여명의 군사를 거느리도록 편제됐다. 칠곡은 가산성 덕분에 승격돼 덩달아 자체 향교도 보유하게 됐었다고
했다.
내성 축조 과정에 인심을 잃어 이명웅 관찰사가 전보 조치되고 공사가 중단되는 등의 곡절을 겪기도 했으나,
1700년(숙종26)에는 남쪽으로 잇대어 '외성'이 확장 축성되기까지 했다. 지금의 동문 동편 구간이 그것. 성벽은 3km였으며, 문으로는
진남문, 창고로는 '남창'이 설치됐다고 했다. 이듬해에는 문루를 지킬 스님부대가 머물 '천주사'도 세워졌다.
내성 외성 외에도
1741년(영조17)엔 '중성'이 축조됐다. 기존 내성 공간에 칸막이를 하나 치는 방식. 중문을 세우고 그 양편으로 성벽을 연결한 것이었다.
내성을 축소하기 위한 조치였다고 했다.
칠곡도호부 청사는 이 가산성에 180년간 존치됐다. 1819년(순조19)에야 현재의 대구
읍내동으로 옮겨간 것. 그리고 도호부 이름 역시 1895년에는 '칠곡군'으로 변경됐다.
가산성은 전체적으로는 비스듬히 누운 호리병
모양을 하고 있다. 밑은 불룩하고 주둥이 부분은 아주 좁은 형태. 평평한 땅을 골라 성내로 넣고, 경사 심한 경계선을 골라 거기에 성벽을 쌓으려
했던 결과일 터. 대체로 산의 주능선을 따라 축조하되, 외성(치키봉에서 가산 정상까지) 구간에서는 남사면의 땅을 성내로 넣고, 내성(정상부
서편) 구간에서는 북사면 땅을 성내로 넣는 방식으로 만들어졌다고 보면 될 듯 하다. 그 때문에 주능선은 산성의 북쪽 성벽 자리가 되다가 남쪽
성벽이 되다가 변덕을 부린다. 치키봉에서 정상까지는 북쪽 경계선, 그 이후는 남쪽 경계선이 되는 것. 주능선의 남북 이동과 궤를 같이 하는
양상이다.
성벽이 호리병 형태로 이어진다고 할 때, 그 밑변이 되는 것은 '서산능선'이다. 치키봉에서 치이봉을 거쳐 남사면으로
내려서는 산줄기 위로 축조된 성벽은 지금도 생생히 남아 있다. 본래는 남문까지 이어져 있다가 길을 낼 때 일부 훼손됐던가 싶었다. 공원 관리소
입구 주차장 동편으로 보이는 산줄기가 '서산능선'의 가지줄기. 거기로 올라 동편으로 조금 걸으면 금방 성벽이 나타난다.
그런데도
1대 5000 지도는 성벽이 마치 범터골 골안으로 쌓였던 듯 그려져 있다. 엉터리였다. 범터골은 공원관리소 맞은 편 화장실 뒤로 올라가는 골.
'치이봉'(700m)에서 성내 공간으로 뻗어 내리는 가지 산줄기가 서산능선과의 사이에 형성하는 골이다. 그 골의 물은 성내 공간 물과 합류치
않고 남문 밑을 별개 물줄기로 통과한다.
호리병의 동편 빗변은 치키봉에서 출발한 주능선 위로 축조돼 있다. 정상부에 도달하기 전
만나는 827m봉이 본래 내성의 동쪽 끝 성벽의 출발점. 그 성벽은 동문을 거치고 골을 지나 서편 빗변의 '남포루'와 만나도록 돼 있다.
그런데도 1대 5000 지형도는 그 성벽을 또 엉터리로 그려놨다. 믿어서는 안될 일.
드디어 도달하는 정상부에서, 동편 빗변 성벽은
주능선과 헤어진다. 주능선이 남쪽으로 옮겨가 버리기 때문. 그래서 성벽은 정상에서 북으로 난 가지 산줄기를 타고 이어져 간다. 그러다가 그
산줄기가 급락할 즈음 서편으로 굽어 돌아 북문을 거치고 결국엔 852m봉에 도달하는 것이다.
이 구간 성벽의 노정을 두고도 좀 더
깊은 성찰이 필요할 듯 했다. 성벽은 정상부의 서북사면을 감아 돌며 '영창골'에 있는 연못의 훨씬 아랫부분을 통과해 북문으로 연결돼 간 것이
확실해 보였다. 지금도 거기로 성벽 흔적이 뚜렷이 남아 있기 때문. 그런데도 지도는 성벽이 연못의 둑을 거쳐 중문으로 연결돼 가는 것으로 표기해
놨고, 현지 주민들도 그렇게 알고 있었다. 취재팀의 답사 결과, 중문에서 연못 둑으로 나 있는 성벽은 큰 외곽 안에 쌓은 내곽인 듯
했다.
어쨌건 그런 노정을 거쳐 도달하는 호리병의 꼭지점은 852m봉이다. 호리병형 산성의 서편 빗변 성벽은 그걸 출발해 동남진
한다. 금방 서문을 지나고 가산바위를 지나며, 중성 연결점을 만난다. 그리고 나서 성벽 흐름은, '877m구릉'에서부터 남원천골의
성내공간-마을공간 가름 산줄기를 타고 남동으로 내리 뻗기 시작한다. 북쪽으로 옮겨 가산 정상봉을 향해 가는 주능선과 또 헤어지는
것.
'877m구릉' 지점에서 성벽 위를 걸어 한참 내려가면 성벽이 갑자기 둥그렇게 넓어지면서 절벽으로 마감되는 지점에 도달한다.
그곳이 본래의 내성이 종점. 내성은 거기서 동북으로 직각으로 굽은 뒤 동문을 거쳐 정상봉 인접 827m봉으로 연결된다. 그 이하 구간 성벽은
외성 소속이라는 말. 그리고 옛 기록으로 미뤄 볼 때, 그 굽는 지점의 넓은 터에 당초 포루가 설치돼 '남포루'로 불렸음에 틀림없어
보였다.
하지만 지금 주민들이 남포루라 부르는 것은 더 밑에 있는 자연 돌봉우리였다. 본래의 남포루 터에서 더 내려 걷다가 건물
터를 하나 지난 뒤 만나게 되는 그것. 이 산줄기에서 유일하다시피 솟은 돌봉우리로, 그 밑은 수십 길 낭떠러지. 그래서 남사면이 훤할 뿐
아니라, 북쪽의 팔공산 줄기 전망도 매우 좋다. 가산 정상부 생김새가 잘 살펴지는 것은 물론 치키봉까지 흐르는 주능선, 나아가 부계봉을 거쳐
도달하는 팔공산 정상부 모습까지 한눈에 잡힌다. 산밑에서도 두드러져 보여 '남포루'란 남의 이름을 얻게 됐으리라.
성벽은 그곳을
거친 후에도 계속 하강하다, '진남문'이라는 이름의 남문을 향해 마지막으로 한번 더 동쪽으로 굽는다.
성벽의 흐름을 살폈으니 이제는
성내공간을 살필 차례. 남문 북편의 주차장을 출발해 올라가자면, 먼저 공원관리소 동편 화장실 옆으로 골이 하나 올라가니 그것이 범터골이다. 그걸
지나 널찍이 나 있는 길을 따라 오르면, 얼마 안 가 임도는 동편으로 돌아 가 버린다. 곧바로 오르는 길을 걸으면 금방 골이 2개로 나뉜다.
왼쪽 것은 큰굼골, 오른쪽 것은 '청진암골'이라 했다. 두 골을 가르는 능선은 '속등'.
오른쪽 골에 '청진암골'이라는 이름이 붙은
것은, 옛날 골 끝에 청진암이라는 절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 절이 중요한 지표가 됐던지, 주능선 넘어 있는 북사면의 응추리 양지마을에서
마주 솟아오르는 골의 이름도 '청진암골'이었다. 하지만 어떤 이는 절 이름이 '청진암'이 아니라 '청련암'이라고 했다. 더욱이 1대 5000
지형도는 이 골에 '장처메기골'이라는 이름을 붙여 놓기도 했다. 그러나 장처메기골은 옛 남창마을 터 바로 위에 있다고 남원리 어르신들은 말했다.
청진암 터는 골의 상류 지점에서 확인됐으며, 아직도 축대가 선명하고 샘도 갖춘 듯 했다. 청진암골 뒤의 주능선은 치키봉∼선돌재 사이였다.
청진암골은 크기만 했지 물이 흐르지 않는다. 물 대신 돌덩이들만 무성하다. 물은 그 밑으로 흐른다고 했다. 큰비가 와도 마찬가지.
흐르는 소리만 요란할 뿐 물은 보이지 않는다고 했다. 이런 것을 남사면 남창마을과 북사면 북창마을 공히 '들겅'이라 불렀다. 북한에서는
'돌강'이라 부른다고 '전영권의 대구 지리'가 소개했다. 돌이 강을 이룬 형상이라는 뜻이라고. 자세히 보니 가산권 곳곳에 흔한 지형이었다.
전 교수는, 빙하기보다는 온도가 조금 높은 '주(周)빙하기후' 때 들겅 혹은 돌강이 만들어졌다고 설명했다. 꽁꽁 얼어있는 땅 밑과
달리 물렁물렁 녹게 된 지표면이 일년에 몇cm씩 아래로 이동해 가던 중 모래나 흙은 씻겨 없어지고 무거운 큰돌만 남아 강이 흐르듯 하는 형상을
하게 됐다는 이야기. 가산의 들겅은 말로만 듣던 복류천이었다. 남창마을 사람들은 그 복류수를 뽑아 식수로 한다고 했다.
청진암골
입구 들겅 오른편으로 옛날 '남창마을'이 있었다고 했다. 1954년 산사태로 폐허가 된 마을. 그쯤에서 정북으로 청진암골을 따라 오르면 파고라
쉼터가 나타난다. 그 인근이 옛 '천주사' 터. 외성을 쌓을 때 성을 지킬 스님들의 막사로 설계됐다고 했다. 6.25 피해는 잘 모면했으나 그
후 저절로 망실됐고, 한때는 그 건물에서 누군가가 술장사를 하기도 했다고 마을 어르신들이 기억했다. 천주사 터 뒷능선을 줄곧 따라 오르면 주능선
상의 선돌재 가까이에 도달된다.
동편으로 굽어 오르는 청진암골과 달리, 큰굼골은 가산 정상의 서편에 이르도록 곧고 길게 솟아오른다.
골 일대 지형 중 가장 뚜렷한 것은 동문. 그 남쪽을 지나 조금 더 오르면 감사·별장 등을 기리는 비석 4개가 모여있는 비석거리가 나타난다.
별장은 칠곡도호부가 읍내동으로 옮긴 후 남아 산성을 지키던 종9품의 책임자. 그 비석거리에서 남쪽으로 비스듬히 산줄기를 오르면 금방 남포루터에
도달된다. 대신 비석거리를 지나 골을 더 오르면 머잖아, 가산 정상에서 서남쪽으로 옮겨가는 주능선에 도달된다. 여기까지가 가산성 성내공간 중
남사면 구간이다.
그 즈음의 주능선이 이루는 희미한 고개를 넘으면 곧바로 연못 2개가 나타난다. 그것이 '영창골 못'이고,
'영창골'의 최상류 구간이다. 일대에는 일부러 조림한 일본잎갈나무가 군락을 이루고 있다. 그 일원은 "200호가 넘는 사람들이 살았다"는 가산
고원 마을들의 중심지였던 듯 했다. 1960년대에 그곳에서 농촌봉사 활동을 했던 어떤 이는 "당시까지도 8호가 살고 있었고 감자 농사가 주류인
듯 감자를 삭혀 만든 떡을 얻어먹은 기억이 있다"고 했다. 또 그때만 해도 산짐승이 많았는지 통나무집을 만들어 염소를 그 속에서 키우더라고
했다.
이어 통과하게 되는 것은 중문이며, 그 너머에는 '탑골'이 펼쳐진다. 탑골 최상류에는 '장군정'이라 불리는 샘터가 하나
있다. 내성 축조 때 함께 만들어진 군사 목적의 '보국사'라는 절이 있던 곳. 보국사는 6.25때 아군 폭격을 받아 소실됐다고 했다. 북한군이
그 절을 근거지 삼아 활동했기 때문이라는 얘기. 장군정에서 출발하는 탑골 계곡을 따라 내려가면 산성 북문을 거쳐 가산2리 산당마을로 가게 된다.
영창골 못에서 탑골 장군정에 이르는 이 구간은 수만평 규모의 평지이고, 거기로 난 임도 역시 도시의 대로를 연상케 할 정도이다. 장군정 남쪽에
유명한 가산바위(860m)가 있고 더 가면 가산권 마지막 봉우리인 852m봉이 솟아 있다.
글 박종봉 논설위원 사진 정재호
편집위원
가산성의 '동문' 모습. 당초엔
이 성문 서쪽 구간만 성안으로 편입되면서 이 문이 '동문'으로 칭해졌다. 그러다 그 동쪽 구간으로도 성의 영역이 확장됨으로써 '동문'은 가산성
안과 밖을 연결하는 통로가 아니라 성 안의 중간문으로 변했던 듯
하다.
군사요충지 가산
☞ 가산권
산줄기.(※그림을 클릭하면 원본사이즈로 보실 수 있습니다.)
임진왜란은 조선 사회에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 가솔을 이끌고
의병을 일으켰던 많은 선비들은 충의지사로 높이 존경받고 공훈을 인정받아 상당수가 정식 관료로 진출했다. 그를 따라 종군했던 노비들은 일반
양민으로 신분이 상승 조치됐다. 각 지방들 역시 입지에 부침을 겪었다. 대구와 칠곡은 임진왜란 영향으로 '격'이 상승한 대표적
지방이었다.
이중환은 '택리지'(1714)에서 "대구는 경상도의 복판에 위치해 전 지역과 고른 거리를 유지함으로써 형세가
훌륭하다"고 썼다. 하지만 그것은 나중의 평가일 뿐, 임진왜란 전만 해도 대구는 별로 중시되던 지방이 아니었다. 신천 서편의 대구 시가지는 신라
경덕왕 때 대구현(大丘縣, 1850년 이후 大邱로 바꿔 표기)으로 구획되면서, 지금의 달성공원에 군청을 뒀던 '수창군'에 배속되기 시작했다. 그
후 편제가 바뀌어 오다 북방정책 중심의 고려가 등장하면서 더 소외돼 지금의 성주에 청사를 뒀던 '경산부'에 배속되기까지 했다. 1419년에
와서야 "인구가 1천300호 됐다" 해서 '대구군'으로 승격됐으며, 1466년에 '대구도호부'로 승격됐다.
그런 가운데 400여년
전까지도 경상도의 중심은 경주와 상주였다. 조선 건국 후 경상감영은 경주에 있다가 세종 때에 상주로 옮겨졌다. 임란 발발 당시 경주는 부,
상주·성주는 목, 안동은 대도호부였으나, 대구는 청송·선산·영해와 동격의 도호부에 불과하던 듯 했다. 대구의 위상이 이런데 칠곡이 더 나을 리는
만무. 지금의 대구 읍내동에 치소(현청 격)를 뒀던 '팔거현'은 그냥 작은 고을에 불과했다. 팔리현 팔거리현 등으로 이름이 바뀌어가며 대구현과
묶여 같은 군에 배속돼 왔을 뿐이었다.
하지만 1592년 임진왜란이 터지자 대구와 칠곡에 대한 국가의 인식이 달라졌다. 경상도로만
상륙한 왜군의 여러 부대 대부분이 이 권역을 통해 서울로 진격한 것이 계기. 교통상 군사상 요충지임을 그때사 알아본 셈이다. 그 결과 경상감영은
다음해에 읍내동(팔거현)으로 옮겨왔으며 1596년에는 대구 달성으로 옮겨 다녔다. 물론 그 당시까지도 감영이란 곳이 감사 상주소는 아니었으나,
일대의 중요성만은 인정받은 결과로 봐야 할 터였다.
그 인식이 더 깊어져 1601년엔 감영이 대구에 완전 정착했다. 더불어 감사도
정착 근무토록 제도가 바뀜으로써 선화당 등 감영 건물이 지금의 감영공원 자리에 신축되기 시작했다. 감영은 그 후 1736년에는 둘레길이
2.65km 높이 3.5m 가량의 의젓한 읍성까지 갖췄다. 남아 있었더라면 대구의 모습을 고색 창연케 할 뻔한 문화유산. 그러나
박중양(1874∼1955)이라는 경기도 양주 출신의 친일파 대구군수(경북관찰사 서리 겸)에 의해 1906년 철거돼 버렸다. 상권 장악을 노린
일본인 장사꾼들의 요구에 따랐다는 얘기. 1658년 처음 개설돼 대안동에서 열리던 대구약령시가 성벽 자리로 1908년
옮겨왔다.
칠곡 부상의 출발점은 가산성(架山城) 축성이었다. 가산은 1593년 왜군의 남해안 퇴각 이후 명나라 군사 등 5천여명이
주둔하면서 이미 그 요충성을 인정받은 곳. 그곳에 1640년에 내성이 완성됐고, 1700년에는 확장 공사가 마무리돼 외성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
후 이중환의 '택리지'는 "가산성은 만 길이나 되는 산 위에 있으며 남북으로 통하는 큰길을 가로질러서 큰 요충지라 할 수 있다"고
썼다.
그러한 가산성을 제대로 살피는데는 가산권의 지형 숙지가 전제조건일 터. 산성이 쌓여진 구간을 중심으로 볼 때 가산권의
주능선은, 동쪽 치키봉(757m)을 시점으로 해 치키봉∼할배할매바위∼827m봉∼정상(902m)∼877m구릉∼가산바위(860m)∼852m봉에
이르는 구간이다. 출발점인 치키봉에서 서진하는 주능선은, 690m 높이의 '선돌재'에 이를 때까지는 내리막 흐름을 보인다. 선돌재는 북사면
주민들이 옛날 동명장으로 다니던 주 통로. 지금도 남사면의 천주사 터 인근으로 내려가는 길이 등산로로 유지되고 있다. 하지만 선돌재에서
북사면으로 이어지는 산길은 얼마 안 내려가 분간 불가능한 상태로 묵어 있었다.
선돌재를 거친 후 높아지기 시작하는 주능선은 먼저
제법 긴 710∼720m대 능선을 펼친다. 그 구간에 먼저 나타나는 것은 헬기장, 그리고는 얼마 후 선돌 2개가 마주보는 '할배할매 바위'에
도달된다. 그 중간에 발코니형 절벽 전망대가 하나 자리 잡았으니, 거기서는 남사면이 훤하게 보인다.
할배할매 바위를 지나면 주능선은
산덩어리를 단위로 해 순차적으로 높아져 간다. 맨처음 급상승해 올라서는 것은 750m대 산덩어리. 거기서는 북사면의 가산리와 응추리를 가르는
가지 산줄기가 출발해 내려간다. 두 번째 산덩어리는 780m대 구간. 거기서는 남사면의 '성내(城內)공간'을 둘로 갈라붙이는 '속등'이라는
산줄기가 내려간다. 주능선의 세 번째 도약점은 790m대 능선. 그걸 지나서 드디어 827m봉으로 비약한다. 거기가 본래 내성의 동편 마감 성벽
출발점. 그 성벽 위를 타고 내려서면 잠시만에 동문에 도달된다.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www.imaeil.com%2Fpalmount%2Fimage%2F20051114_02.jpg) 가산 권역의 상징처럼 돼
있는 '가산바위'. 높이 860m 가량의 돌봉우리이다. 가산권 남사면 중 두무실 쪽 공간을 훤히 바라 볼 수 있는 좋은 전망대이자 등산객들이 꼭
쉬어 가는 명소이다.
827m봉을 넘어서면 주능선은 잠깐 810m 높이의 목으로 움츠렸다가, 마지막 도약을 시도해
정상봉으로 올라선다. 제법 가파른 오름세. 하지만 드디어 도달한 정상봉의 서편은 평원 같다. 자세히 살피지 않으면 산줄기 흐름조차 감 잡기 힘든
지형. 주능선은 그 고원을 한참 가로질러 서남쪽의 '877m구릉'으로 옮겨간다. 이 구릉은 높이에서 주변과 큰 차가 없어 대수롭잖게 보기 십상.
하지만 남사면 지형 이해에는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877m구릉'을 거친 뒤엔 한참 동안 오르내림이 거의 없는 구간이다. 높이는 850m 정도.
그러다 주능선은 잠깐 '가산바위'로 높아진다. 이름이 너무 좁은 가산바위는 높이가 860m 이상인 또 하나의 우뚝한 돌봉우리. 그 아랫마을
'두무실'은 가산바위에 앉아야 잘 살펴지고, 가산바위의 우뚝함 역시 두무실에 가야 가장 잘 느껴진다.
그런 가산바위 이후 구간은
50여m 높이를 줄곧 내려서는 내리막이다. 최하점은 810m대. 그 어드메에 모습이 제대로 남은 성문이 하나 있다. '가산성 서문'. 그걸
지나서야 마지막 852m봉으로 올라선다. 852m봉에서 북쪽으로는 팔공기맥의 '위천지맥'이 출발한다. 그리고 서쪽으로는 '황학지맥'으로 연결돼
가는 산줄기가 이어진다. 가산권의 주능선은 852m봉까지.
치키봉에서 852m봉에 이르는 이 구간의 북사면에서는 모든 물들이
'사창천'으로 모이니, 골 전체를 '사창천골'이라 불러둬도 좋을 듯 싶다. 그 최상류 구간에 칠곡 가산면의 응추리(양지-음지 2개 마을),
가산1리(북창 마을), 가산2리(산당-한듬 마을)가 분포하고, 그 마을들을 거쳐 온 물들이 모이는 지점에 용수리가 분포했다. 이들 네 마을은
함께 '곡(谷)4리'라 불리고 있었다. 골을 가로막을 듯 접근하는 양편 산줄기에 의해 더 하류의 군위 효령면 땅과 구획되기 때문인 듯. 그 탓에
물이 숨듯 겨우 흐르는 구간은 '복곡'(伏谷)이라 불렸다.
반면 남사면에는, 물이 팔거천으로 합류해 가는 두무실(학명리)과,
남원천으로 모이는 남원천골(칠곡 동명면 남원리)이 있다. 남원천골은 다시 가산성 안의 '성내(城內)공간'과 '마을들 공간'으로 양분되며, 마을들
공간에는 '새마을'(신촌) '헌방마을'(이상 남원1리) '새남창마을' '원당마을'(이상 남원2리) 등이 있다. 그 공간에서 흘러내린 물은
'남원천'이 돼 '동무골'을 통해 동명저수지로 흘러든다. 남원리 2개 마을과 인접 기성1리-기성2리-득명리 등을 합쳐 그곳 사람들은 '곡5리'라
부르고 있었다. 북사면의 '곡4리'와 대칭되는 호칭법인 셈.
남원천골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877m구릉' 지점을 특히 주목해야 할
듯 했다. 치키봉에서 출발한 골 뒷담 격 주능선의 종점이 이 '877m구릉'이고, 골 서편 담장격 산줄기의 시점(始點)이 이 '877m구릉'이기
때문.
서편 담장격 산줄기는 '877m구릉' 출발 후 머잖아 378m까지 낮아진다. 그곳으로 동편 남원천골과 서편 두무실을 잇는
재가 났으니, 이름이 '여릿재'라 했다. 잿길은 올 들어서야 완전 개통돼 구안국도와 팔공산 남사면을 잇는 또 하나의 간선 역할을 맡기
시작했다.
여릿재를 지난 뒤 산줄기는 먼저 550m봉으로 솟는다. 이 봉우리에서는 구안국도 쪽으로 497m봉 421m봉으로 이어지는
가지산줄기가 뻗어나가 두무실 남쪽에 병풍을 펼치듯 한다. 그래서 그 봉우리들은 한데 묶여 '삼봉산'이라 불리고 있었다.
550m봉을
거친 후 서편 담장격 산줄기가 도달하는 곳은 이 산줄기의 최고봉인 571m봉이다. 1대 5000 지도가 거기에다 '지마산'이라는 이름을 붙여
놨으나 엉터리로 드러났다. 진짜 지마산은 다른 곳에 있었다. 남원천골 속에 또 하나 끼어 든 짧은 산줄기 끝의 298m짜리 봉우리가 그것. 그걸
새마을(신촌)에서는 '땅말등'이라 불러 왔다고 했다. 한자로 표기하면 '지마등'(地馬嶝)이 되는 셈. 그런 반면 571m봉은 남원천골 사람들에
의해 각 마을에 가까운 골 이름으로만 지칭되고 있었다. '어분골 산' '집터골 산' '지피덜겅 산' 등이 그것. 571m봉까지 거친 뒤 산줄기는
'양지마을'에서 끝난다.
남원천골의 서편 담장격 산줄기는 이렇게 생겼고, 뒷담격 산줄기는 주능선이라 했었다. 동편 담장격 산줄기도
이미 살핀 적 있다. 인접 기성-득명리 공간과의 사이에 분수령을 만드느라 치키봉에서 내려가던 '서산능선'이 그것. 그렇게 해서 외곽이
형성되지만, 남원천골 자체도 종국에는 '성내공간'과 '마을들 공간'으로 크게 둘로 다시 나뉜다. '남포루'를 거치고 진남문을 지나 새남창
마을까지 내려 뻗는 그 가름 산줄기가 출발하는 곳도 '877m구릉'. '877m구릉'에서는 두 개의 중요한 산줄기가 출발하는
것이다.
글 박종봉 논설위원 사진 정재호 편집위원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www.imaeil.com%2Fpalmount%2Fimage%2F20051114_03.jpg) '가산바위' 동서로 이어져
있는 가산성 성벽을 헬기에서 바라 본 모습. 팔공산 주능선은 이 가산바위를 거쳐 흐른다. 가산 북사면의 가산리 마을 공간이 함께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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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www.imaeil.com%2Fpalmount%2Fimage%2Ftitle_51.gif)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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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산 정상봉 북사면의
절경. '첨성대 덤'에서 바라 본 것이다. 가까이로 드러난 것은 '용바위' 절벽이고, 그 뒤로 다소 작긴 하나 용바위와 매우 닮은 또 하나의
돌출 봉우리 꼭대기가 나타나 있다. 멀리 솟은 것은 해발 840m 돌봉우리이며, 같은 산줄기의 아래쪽에 있으면서 함께 '삼칭이'를 형성하는 다른
봉우리도 보인다. 가장 왼편으로 보이는 절벽 덤은 '펜스 전망대'. 이 일대에서는 지난 10월 초순에 벌써 가을 단풍이 피크를 이뤘었다.
가산권의 치키봉에서 출발한 주능선은 가산 정상부를 거친 후 평원을 가로질러 남쪽으로 옮겨 달리기 시작한다고
했었다.
하지만 정상봉에 도달하기 직전, 주능선에서는 가지 산줄기 하나가 북사면으로 내려간다. '북창' 마을이 올라앉은 그것.
그리고 정상봉을 지난 직후에도 같은 방향으로 가지 산줄기가 하나 출발하니, 그 끝머리에는 '윗산당' 마을이 자리했다. 앞의 것은 '북창 능선',
뒤의 것은 '산당 능선'이라 명명해 둬보자.
그 두 개의 가지 산줄기 사이에 가산권 최고의 절경이 펼쳐져 있다. 요체는 깎아지른
절벽들과 돌봉우리들. 그 절경지는 간혹 '용바위' 혹은 '삼칭이"라는 말로 지칭되는 듯 했다. 하지만 북사면의 곡4리 마을들을 두루 돌며 듣고
정리해 낸 결과는 그것과 달랐다. 삼칭이는 그 중 한 산덩어리에 국한된 이름이었다. '용바위' 역시 특정 절벽 줄기 하나만을 가리킬 뿐 아니라
전래명칭도 아닌 듯 했다. 인근에서는 '유선대'라는 것이 있다는 안내판도 보였으나, 현지인들은 그런 명칭을 들은 적 없다고 했다. 그게 어느
것을 가리키는지 설명해 줄 외지인도 만날 수 없었고, 안내판을 붙였던 공원관리사무소 역시 모른다고 했다.
가산 절경지는 3개의 절벽
덤과 3개의 절벽 돌봉우리로 구성된다고 보면 될 듯 하다. 동쪽에서부터 봐 그 첫 절벽은 '북창능선'의 초입에 솟아 있다. 수십m 높이의 그
절벽은 북창 마을에서 볼 때 첨성대를 연상시킨다. 등산객들은 그 존재조차 모르고 지나치기 일쑤이지만, 가산 절경지의 모습을 가장 가까이에서 잘
관찰할 수 있는 곳이 이 '첨성대 덤' 위이다. 치키봉에서 출발해 정상봉을 향해 가파르게 오르던 주능선 위의 성벽이 ㄱ자로 굽는 지점이 그
진입점.
두 번째 절벽 덤은 정상봉 바로 북사면에 돌출해 있다. 대부분의 등산객들이 가장 먼저 접근해 주위를 완상하는 곳. 이
시리즈 47회분 지형도에서 대강이나마 일대 절벽들과 봉우리들을 구분해 지목해 뒀으니 참조하면 확인하기 쉬울 듯 하다.
주능선은 이어
북사면으로 '산당능선'을 내려보내는 바, 그 능선은 출발 직후 짧은 가지줄기를 하나 치면서 그 위에다 수십 길 높이의 절벽 돌출봉우리를 올려
세운다. 산줄기는 없는 듯 미미하고 돌봉우리만 우뚝한 그것. 용의 모습을 연상시킨다 해서 '용바위'라 불리는 이것이 첫 번째 돌봉우리이다.
그 부분을 지나 산당능선은 절벽 전망대를 하나 더 선물한다. 세 번째 절벽 덤. 스테인레스 펜스를 쳐 안전성까지 높여 놓은
곳이니, '펜스 전망대'라는 표지판을 달아 놔 보자. 이것과 용바위 사이에 옛날 이름났던 약수탕이 있었다는 얘기가 들렸다. 얼마 전까지 절벽에서
내려가는 사다리도 있었다는 얘기. ’펜스 전망대’에서는 앞에서 살폈던 첫 번째 돌출봉이 동쪽으로 올려다 보인다.
'펜스 전망대'에서
서편으로는 두 번째 돌출봉도 모습을 드러낸다. 높이는 상대적으로 낮으나 형상은 용바위에 흡사한 것. 산당능선이 펜스 전망대를 지나 두 번째
내려보내는 얕은 산줄기에 솟은 장관이다. 산당능선은 그런 뒤 스스로 하산하면서 풍광을 보탠다. 820m 높이의 목으로 추락했다가 단번에 솟구쳐
올리는 840m대 돌봉우리가 그 주인공. 이것이 세 번째 돌봉우리이다.
840m대 돌봉우리를 거친 뒤 산당능선은 점차 낮아지면서
710m봉과 669m봉도 잇따라 올려 세운다. 이들 3개의 봉우리를 합쳐 현지인들은 '삼칭이'라 불렀다. 삼층 구조를 하고 있다고 판단한 모양.
'삼칭이'는 나아가 그 아래 골까지를 포괄하는 산 덩어리 명칭으로도 통하고 있었다. 세 봉우리 중 마을에서 가까운 669m봉은 특별히
'두리봉'이라 불리기도 했다.
'삼칭이' 서편 골은 '영창골'이라 했다. 가산 정상에서 중문 쪽으로 가다가 만나는 2개의 연못이
있는 일대가 그 최상류. 그래서 연못들은 '영창골 못'이라 불리고, 지금도 들판 물대기에 쓰여 작년에 둑을 보수하기도 했다고 했다. 영창골의 더
서편에도 골이 하나 있으니, 그것의 이름은 '탑골'이라고 했다. 가산성 북문 옆을 거쳐 옛날 보국사가 있었다는 '장군정'이라는 샘까지 솟아오르는
골이다. 그렇게 보면 가산 정상부 북사면의 골은 서쪽으로부터 탑골, 영창골, 삼칭이 순으로 분포하는 셈이다. 그리고 그 동편으로는 '선바위굼'
'가마굼' '바란골' '섬안' 등의 순으로 작은 골의 이름들이 붙여져 있었다.
가산 절경지는 그 자체의 풍광도 대단하지만, 주위를
둘러보는 전망대로서도 어느 곳 못잖게 뛰어났다. 거기서는 북사면이 일망무제이고 동쪽으로도 팔공산 정상부에 이르는 가산 줄기 능선이 선명하다. 더
뒤로 보이는 것이 영천 화산 아닐까 싶을 만큼 시정거리가 굉장했다. 답사 때는 드물잖게, 북사면 동네에서는 들려오는 소 닭 우는 소리가 빚어내는
평화로운 분위기를 경험할 수도 있었다.
가산 절경지를 원거리에서 전체적으로 관찰하기 가장 좋은 곳은 북창 마을 길 가이다. 때문에
절경지의 화사한 단풍도 북창 마을에 가야 한 눈에 볼 수 있다. 적시는 10월 중순쯤. 지난 추석 전 북창 마을에서 만났던 한 어르신은, 높은
연세에도 불구하고 청년 시인 같은 감수성으로 가산 절경지 일원의 빼어난 가을 풍광을 찬탄했었다. 팔공산에서 이곳말고 또 가을철에 보기 좋은
주능선 구간은 말할 것 없이 '바위병풍'일 터이다.
그렇게 단풍이 아름다운 팔공산이지만, 거기서는 지금 중요한 식생 천이현상이
진행되고 있다는 얘기가 들렸다. 숲이 변하고 있다는 것. 소나무가 줄고 활엽수가 느는 것이 요지라고 했다. 문맥이 복잡해지는 것을 피하기 위해
옛날 이야기로부터 시작해 살펴 보자.
팔공산 생태계 조사보고서(1994, 대구시)에 따르면, 본래 팔공산을 뒤덮고 있던 나무는
소나무가 아니라 낙엽활엽수류였다. 신갈나무가 중심되고 참나무류 서어나무 까치박달 당단풍나무 등이 포괄된 형상. 참나무가 많다 보니, 헌종 임금의
아버지 능(수릉, 양주 소재) 유지에 필요한 참나무숯 생산용 보호림으로 지정될 정도이기까지 했다. 수태못 상류 '국도림골'에 그걸 증언하는
'수릉봉산계' 표석이 있고, 동화사 상가지구 공원관리사무소 앞 화단에도 비슷한 '수릉향탄금계' 표석이 서 있다.
그러나 그런 고유
임상은 땔감 벌채 등으로 1960년대 즈음엔 거의 상실됐다. 그 후 팔공산을 덮은 것은 2차림인 소나무. 다른 나무가 없어야 잘 자라는 게
소나무이기 때문이었다. 현재는 950m 이상 높이에서는 낙엽활엽수림, 표고 750m 이하에서는 소나무가 단순 우점하고 그 중간은 양자가 섞인
혼효림의 모습을 하고 있다고 했다.
하지만 어느새 소나무의 독점력도 약화돼, 팔공산은 점차 본래의 자연림으로 회복돼 가는 단계에
접어들었다고 전문가들은 판단했다. 이유는 단 하나. 사람이 벌채만 하지 않는다면 참나무류의 생존력이 본래부터 소나무를 월등히 압도해 저절로
낙엽활엽수림이 지배력을 갖게되기 때문이라고 했다. 한국산림생태연구소장 조현제 박사는 그래서, 장기적으로는 소나무가 점차 죽고 그 자리에 참나무가
나타나며, 마지막으로 서어나무가 등장하리라고 내다봤다. 식물생태상 그런 순환고리가 성립한다는 것.
소나무가 취약한 이유에 대해 조
박사는 △지하의 양분 및 지상의 햇빛 수렴 경쟁에서 활엽수에 절대 불리하고 △땅바닥에 낙엽이 쌓일 경우 씨앗이 싹트지 못해 번식이 저절로
중단되며 △큰 나무의 그늘에서는 자라지 못하는 '양수'여서 생존력이 떨어진다고 설명했다. 반면 참나무는 △낙엽이 두텁게 쌓여도 열매가 무거워
쉽게 싹을 틔우고 △큰 나무 그늘에서도 잘 생장하는 '음수'여서 △어떤 환경에서도 경쟁력 있을 뿐 아니라 수명 역시 200년이나 된다고 했다.
이렇게 강한 생명력을 가진 참나무류는 동물들이 그 열매를 소나무 숲으로 옮겨 놓기도 해 소나무 숲을 파고 들 능력까지 갖추게 된다고도 했다.
특히 '어치'라는 새는 먹이를 보관하는 습성을 가진 반면 보관소는 쉽게 잊어버려 참나무류의 전파에 큰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수세에 몰린
가운데 최근엔 재선충까지 덮치고 있으니, 소나무의 멸망은 더 촉진될 수밖에 없으리라는 것이 여러 산림 전문가들의 전망이었다. 재선충은 현재
팔공산 외곽 4km까지 접근해 왔으며, 일년에 2, 3km 이동한다고 할 때 앞으로 1, 2년 정도면 팔공산을 덮칠 것이라는
얘기였다.
글 박종봉 논설위원 사진 정재호 편집위원
☞ 동화사 서문 위
575m봉에서 올려다 본 팔공산 동부능선의 10월 말 가을 풍경. 왼편 봉우리가 '동봉'이고 중간의 쌍봉이 1042m-1036m봉, 그 오른쪽이
바위병풍이다. 그 아랫부분의 가지 산줄기들이 단풍을 그냥 지니고 있는 반면 주능선은 그때 벌써 겨울 풍경을 드러내 묘한 대조를 이뤘다. 주능선
북사면 고지대에서는 나아가 11월에 들어서자 서릿발이 성성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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