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祖), 종(宗)에 숨겨진 이면 역사 고찰
1.
조선왕조(1392-1910)는 27명의 왕을 배출했다.
각 임금들의 묘호(廟號)를 살펴보면 태조(太祖),세조(世祖),선조(宣祖),인조(仁祖),영조(英祖),정조(正祖),순조(純祖) 이렇게 7명에게는 조(祖)를 붙이고 나머지 임금들은 모두 종(宗)자를 붙이고 있다.
이는 모두 종법제(宗法制)에 기반하여 붙여지는 묘호(廟號)로 세종대왕(世宗大王)은 1438년(세종20년)에 시법(諡法)의 찬집(纂輯)을 명해 후세에 기록을 남기고 있으며, 이 종법제(宗法制)는 은(殷)나라의 갑골(甲骨)을 통해 그 기원이 밝혀지기도 했는데이후 주(周)나라로 계승되었다.
사물기원(事物紀原-송나라 高丞이 편찬)에는 "王이 功이 있으면 祖요, 德이 있으면 宗이다. 有虞(舜)氏때 처음으로 高陽이 祖가 되고, 堯가 宗이 되었다" 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조선왕조에서는 임금 재위시의 행위에 대한 공(功)과 덕(德)을 왕위 계승자와 대신들이 판단해 최종적으로 후계 왕이 낙점하는 방식으로 묘호(廟號)를 정했다고 기록은 전한다.
그러나 우리가 조선왕의 묘호(廟號)를 조선이 대륙에 있었다는 역사적 명제를 기반으로 분석해 보면 조(祖)와 종(宗)의 묘호(廟號) 중 특히 조(祖)의 묘호에는 상당한 의문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
특히나 일제(日帝)의 조선사편수회(朝鮮史編修會)에 의해 철저히 교열된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을 비롯한 모든 서지의 기록들은 현 반도에 맞게 축소, 왜곡, 교열된 것들로 왕조(王朝)의 전쟁과 강역(疆域)의 확장문제는 철저히 기록에서 배제되어 후손들이 알 수 없게 만들어 버림으로써, 조(祖)종(宗)의 공(功)과 덕(德)의 자리매김이 도저히 납득되지 않을 뿐더러 심각한 의구심마저 들게 만들어져 있다.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 1880~1936)는 그의 책 <조선상고문화사>에서 新羅 太宗大王이 백제를 도모하고자 하면서 먼저 輕兵으로 大阪(대판-오사카)으로 곧장 쳐들어가서 그 소굴을 뒤엎어 버리고 城下之盟(전쟁에 진 후 적군과 맺는 굴욕적인 강화조약)을 맺은 후에야 남방(百濟)으로 쳐들어갔다. 라 기록하고 있는데, 이는 삼국시대 당시에는 일본(倭)의 위치가 대륙 장강 아래 동남쪽에 위치해 있었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다.
또한 일본서기(日本書紀)에 나타난 야마토(大和)시대(250-710)의 일식관측지역은 남중국에서 남지나 해상에 이르는 지역을 보여줌에 따라 이 당시 일본의 강역이 대륙 동남부 장강(長江)아래로부터 현 필리핀 북부에 이르는 지역에 그들의 터전을 구축했음을 알아낼 수 있다.
단재(丹齋)의 기록을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백제와 일본과의 맹약(盟約)에 따라 일본은 백제(百濟)가 위급할 때 군사적으로 구원해야할 의무가 있었기에, 신라는 백제 공격시 일본의 구원병을 사전에 차단하기 위해 태종 무열왕(武烈王)이 날랜 경기병(輕騎兵)을 미리 일본의 오사카로 보내 항복을 받고 새로운 맹약을 통해 백제가 위급할 때 구원하지 못하도록 정지작업을 완료한 후 대륙 장강(長江)아래쪽에 위치했던 백제를 신라의 구진천(仇珍川)이 개발한 천보노(千步弩)를 앞세우고 위풍당당하게 공격해 들어간 것이었다는 사실이다.
간교한 일제는 조선이라는 정체(政體)를 무너뜨린 후 다시 조선의 역사(歷史)를 무너뜨리기 위해 조선이 수천년에 걸쳐 축적한 모든 서지(書誌)의 기록을 현 반도강역에 맞게 새롭게 편집하면서, 신라의 백제공격과 관련하여 일본이 신라에 완벽히 굴복되어 백제와의 맹약을 헌신짝처럼 버려야만 했던 치욕의 역사를 지우고, 삼국사기(三國史記)를 교열하여 전쟁이 끝나 백제(百濟)가 항복한 이후 백제부흥군의 풍왕(豐王,661-663)의 요청으로 왜장(倭將) 여원군신(廬原君臣)이 병력 1만여명을 이끌고 1,000여척을 배를 몰아 마치 백제를 구하기 위해 실제 병선(兵船)을 파견한 것처럼 거짓의 역사를 꾸며내 일본의 무너졌던 자존심을 다시 세워내고 조선의 역사를 무너뜨렸던 것임을 우리는 정확히 인식해야 할 일이다.
일본서기(日本書紀)야 그 가증스러움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자치통감(資治通鑑)에서 백강(白江)전투를 기록해 왜선 400척을 붙태웠다는 기록은 비록 삼국사기의 기록과 다르기는 하나 이는 모두 해방후 일본과 중국공산당 간 역사교류의 공조(共助)를 통해 교열해 냈음을 간파해 낼 수 있다.
단재(丹齋)선생의 기록이 없었던들 우리는 이러한 기록의 오류 내지는 교열을 정확히 밝힐 수 없었을 것이며, 따라서 이러한 진실의 기록에 대해 친일식민사학은 위대한 조선민족의 기라성(綺羅星) 사학자 신채호(申采浩, 1880~1936)선생을 폄하하고 조롱하기에 이르러 일제에 의해 시작된 조선역사 궤멸 작업에 선봉장을 자임하고 있으니 이 얼마나 치욕스럽고 선후대에 부끄러운 일이란 말인가?
위의 분석을 통해 우리는 삼국시대 당시의 일본의 강역은 대륙장강의 아래쪽 대륙 동남부를 중심으로 펼쳐져 있었음을 정확히 알 수 있게 되었는데, 이 부분을 정확히 파악해야 하는 이유는 바로 조선의 왕들중 어느 임금이 일본을 대륙에서 완전히 쫓아내 현 필리핀지역으로 몰아냈는지를 고찰해 낼 수 있기 때문이다.
2.
태조(太祖) 이성계(李成桂,1335-1408)는 고려말의 혼란을 뜸타 발흥하는 왜구를 무찌르는 과정에 이지란(李之蘭)과 함께 옛 백제땅인 남원(南原)에서 황산대첩(荒山大捷,1380.9)을 치루게 된다. 이 대첩에서 태조임금은 15-6세의 왜장(倭將) 아기발도(阿其拔都,1365~1380년-꼬마장군이란 뜻의 우리식 이름)를 화살로 쏘아 죽이게 되는데, 이를 통해 분석해 보면 여말선초(麗末鮮初) 왜국의 주 본거지 또한 이전과 같이 대륙동남부 장강아래쪽으로 볼 수 있다.
1592년 임진년(壬辰年) 왜국의 풍신수길(豐臣秀吉)은 조선침공을 결행하게 되는데, 이때 이들의 전투선인 안택선(아타케부네)은 정확히 선수(船首)부분이 예리하게 돌출되어 바다항해에 적합한 모양이었다.
즉 당시 왜군은 바다를 건너 4월달의 장강 조수(潮水)를 타고 조선의 남해였던 현 장강의 파양호(鄱陽湖)로 진입해 들어온 것이고 이들의 강역터전은 현 필리핀지역으로 분석될수 있는데 이러한 사실은 당시 일본에 있던 서양인 선교사들의 기록과 현 인도네시아의 자카르타인 바타미아에 있던 16세기의 포르투칼과 네덜란드의 동인도회사의 향료무역에 깊숙이 개입되었던 일본과의 교류내용들을 통해 파악할 수 있는 부분들이다. 자카르타(바타미아)에서 현 일본 열도까지는 무려 5,000km가 넘는 엄청나게 먼 거리이지만, 유구(琉球)열도로 비정되는 팔라완 섬까지는 2,200여km로 해안선을 따른 항해가 수월한 항로였다.
도자기 전쟁으로 평가될수 있는 임진왜란(壬辰倭亂)때 일본은 조선왕조에 의해 빼앗긴 그들의 시원강역을 찾아 정한론(征韓論)을 앞세우며 대륙의 거대한 조선을 침공한 것으로 볼 수 있는데, 그렇다면 태조(太祖)대왕으로부터 임진란(壬辰亂)을 승리로 이끌어 조(祖)의 묘호(廟號)로 추증된 선조(宣祖)까지의 기간중 어느 임금때인가 왜국에 대한 대대적인 정벌을 통해 멀리 대륙밖으로 내쫓은 전쟁의 역사가 있어야 한다. 이러한 부분은 결국 일본제국주의가 1910년 경술국치(庚戌國恥)를 통해 조선을 멸망시킨후 반도로 이천만명을 이주시켜 이후 조선역사를 무너뜨린 사실에서 그들의 조선에 대한 증오가 매우 뿌리깊었다는 사실과 역사의 과거 어느시점에서 일본은 씻지못할 치욕을 조선으로부터 받았음을 또한 유추해 낼 수 있기도 하다.
결국 묘호(廟號)에서 조(祖)로 추증된다는 사실은 전쟁을 통한 강역의 변화와 전쟁에서의 승리라는 면이 가장 중요하게 작용하였음을 조심스럽게 개진해 볼 수 있는데, 태조대왕은 개창조로 당연한 묘호(廟號)라 볼 수 있고, 선조(宣祖)는 당시 세계최강이었다는 일본군을 맞이해 탁월한 인재발탁을 통해 그리고 외교적 노력을 통해 힘든 7년간의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는 점에서, 인조(仁祖)는 일제에 의해 삼전도(三田渡)의 굴욕이라는 가짜역사로 포장되어 있지만, 서양 선교사의 기록을 통해 후금군의 강력한 공격앞에 조선임금은 결국 수십만의 병력을 동원해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기에 효종(孝宗)에 의해 조(祖)의 묘호를 추증받았음을 알 수 있다. 만약 실제로 일제(日帝)가 만든 가짜 역사의 이야기처럼 조선이 후금(後金)에 져 항복을 했다면 어찌 조(祖)의 묘호를 추증받을수 있겠는가 말이다.
세조(世祖, 1417~1468)에 대한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을 보면, 1460년(세조6)에 함경도 회령방면의 모련위(毛憐衛)야인들이 북변지방을 약탈하자 신숙주(申叔舟)가 이들을 정벌한 내용이 나오는데 이를 경진북정(庚辰北征)이라 한다.
우리가 배워온 역사에서 세조는 조카인 단종(端宗)을 폐위시키고 정권을 찬탈한 매우 나쁜 이미지의 임금으로 만들어져 있다. 이를테면 역모 내지는 반정(反正)이 되는 부분인데, 중종(中宗)의 경우도 반정을 통해 임금이 되었지만 종(宗)을 추증받았을 뿐이고, 또한 세종은 사군육진(四郡六鎭)을 개척하고 대마도(對馬島)를 정벌할 정도로 군사적 활동이 많았으나 역시 종(宗)을 추증받고 있다. 따라서 세종대왕(世宗大王)과 비교해도 세조(世祖)임금이 조(祖)를 추증받을 이유는 없다고 보아야 한다.
그런데 역사의 결과는 세조(世祖)에 대해 조(祖)를 추증했는데, 이를 통해 고찰해 보면 세조(世祖) 당시 분명 강역의 변화 내지는 거대한 군사적 활동이 있었음을 유추해 볼 수 있게 된다.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태조(太祖)임금으로부터 선조(宣祖)때 임진왜란(壬辰倭亂)에 이르기까지 200년중에서 세조는 조선개국 1392년으로부터 63년째인 1455년에 임금이 된다. 이후 1468년까지 13년동안 재위하게 되는데 등극 5년차인 1460년 조선의 북변(北邊)인 현 알타이산에서 바이칼호에 이르는 지역에서 발생한 야인들의 반란을 평정한 것이다.
3.
조선의 세조임금당시 일본은 무로마치 막부(室町幕府,1336년~1573년)의 시기였고, 조선에서 경진북정(庚辰北征)일 일어났던 1460년은 무로마치 막부 8대 아시카가 요시마사(足利義政,1449-1473)가 다스리던 시기였다.
1467년에 일본에서는 오닌(應仁)의 난이 발생하는데 이는 하극상이 난무하는 전국시대를 여는 서막으로 분석되고 있다. 무로마치 시대 가장 강력한 쇼군(將軍)이었던 요시미쓰(義滿)가 죽은 후, 슈고 다이묘(守護大名)의 힘은 쇼군의 힘을 능가하기 시작했고 결국 쇼군의 후계자를 둘러싸고 슈고 다이묘들의 대립이 얽히면서 11년간이나 지속된 내란이 바로 오닌의 난(1467-1477)이었다.
오닌의 난 결과 막부(幕府)의 권위는 완전히 땅에 떨어지고 하극상의 풍조가 만연하게 되었다. 이로인해 사회 각계각층에 하극상 현상이 두루 침투해 이후 전국(戰國)시대(1467-1573)라고 하는 1세기간의 내란시대를 맞이하게 되었다고 역사의 기록은 전하는데, 과연 이 오닌의 난과 전국시대를 가져오게 된 원인이 무엇이었고 또 그 외적인 요인은 어떤것이었는지에 대한 설명은 전혀 없고 단지 내부적 권력암투로만 묘사되어 있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역사의 교훈은 특정 나라의 내란은 반드시 외적인 요인이 매우 중요하게 작용한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다.
1950년에 일어난 한국전쟁의 경우도 세계적 이념투쟁이라는 외적인 요인이 가장 강한 영향을 미쳤고, 최근 미얀마의 군사반란도 중국이 미얀마를 통한 내륙석유수송로의 필요성에 따라 친중정권을 만들기 위한 외적인 요인이 가장 중요한 영향을 미쳤던 것이 사실이다.
오닌의 난을 통해 하극상이 만연했다는 것은 당시 집권세력의 무능과 부패에 대해 기층백성들의 불신이 극에 달했다는 것으로 그것은 바로 당시 일본경제가 나락으로 추락했다는 것을 알려주며 갑작스런 경제의 붕괴는 조선이 반도로 이주한후 경제가 급속히 붕괴되었던것과 마찬가지로 강역의 변화를 제일순위로 놓고 분석해 볼 수 있는 부분이다.
북방 유목민족의 웅혼한 기상(氣像)을 받고 태어나 나라를 이어온 조선민족이다. 끊임없이 출몰해 나라의 백성을 괴롭히는 왜구(倭寇)에 대해 가장 강력한 조치를 취해 다시는 왜구의 침입으로 백성들이 고통받지 않고 살도록 만드는 것이 위정자의 책무임은 너무도 당연한 것이고, 강력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조선왕조를 개창한 조선초기의 임금들이 정권의 안정기에 접어들면서 북방과 남방의 오랑캐를 정벌해 다시는 준동치 못하도록 했을 것임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부분이다.
세조에 대해 조(祖)의 묘호가 추증된 것은 역사에서 감추어진 강대한 정벌(征伐)의 역사가 있음이 분명하고 이는 당시 대륙 동남부에 생거(生居)하면서 조선의 남부해안(장강)을 끊임없이 괴롭히던 왜(倭)의 무리들을 멀리 내쫓아 버렸을 것으로 파악되며 그로인해 강역의 이주를 강제당한 일본은 경제의 붕괴로 인해 극심한 혼란을 겪고 새로운 통치체제의 구축을 위한 역사의 단계인 내란으로 접어들었던 것으로 분석해 본다.
4.
전쟁(戰爭)을 승리로 이끈 선조(宣祖)와 인조(仁祖) 임금 이후 1727년에 영조(英祖)가 등극하고, 1776년에 정조(正祖)대왕이 그리고 1800년에 조선 23대 임금 순조(純祖)대왕이 들어선다.
우리 역사서에 이들 조(祖)가 추증된 영조(英祖),정조(正祖),순조(純祖) 임금에 대한 정벌(征伐)의 역사는 일절 나타나지 않고 있다. 하지만 거대한 대륙의 조선을 인지하고 당시 발흥하기 시작한 서양인의 동방진출과 16세기말 우랄산을 넘어 모피를 찾아 나선 러시아의 진출을 고려한다면 끊임없는 투쟁의 역사가 일어났을 것임은 불문가지의 일이거니와 북방 유목민의 기질을 보유한 조선민족이 가만히 앉아 당하기만 했을리는 천부당만부당(千不當萬不當)한 일이다.
비록 교열된 조선왕조실록에는 나타나지 않고 있지만, 세명의 임금이 조(祖)의 묘호를 받은 것은 분명 정벌의 역사와 관련되었음을 유추할 수 있으며 이에 대한 실마리는 바로 구한말 서양인들의 기록을 통해 재고찰해 볼 수 있다.
1832년 7월25일 충남 보령에 영국 상선 로드 암허스트호가 들어왔고, 선장은 이후 조선관리인 홍주목사 이민회(李敏會)와 대면하게 된다.(純祖實錄 32권. 순조32년-1832-7월21일 乙丑4번째 기사.)
1833년 런던에서 발행된 <A VOYAGE TO THE NORTHERN PORTS OF CHINA IN THE SHIP LORD AMHERST>라는 책에는 어디에도 나와 있지 않는 중요한 정보가 기록되어 있는데, 바로 암허스트호의 선장이 조선관리(이민회로 추정됨)와 문답하는 과정에서 조선관리가 <우리 조선에 변발을 강요하고 복식변경을 요청하는 청나라에 대해 요동을 쳐들어가 초토화(ravage)시켰다>는 대화내용을 싣고 있다는 점이다.
물론 이 내용에는 요동정벌에 대한 정확한 연대가 기록되어 있지는 않지만, 이민회의 말대로 조선의 요동정벌이 일어났다면 효종(孝宗,1649-1659)이후 조(祖)로 추증된 임금을 찾으면 될 일이고 바로 영조(英祖)대왕이 유력하게 부상하게 된다.
정조대왕(正祖大王)은 홍재전서(弘齋全書)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惟我國家受天休命。全有大東。分八道而州郡星羅。環四圉而鎭堡棊錯。經緯過數千里。休養且累百年。
우리나라는 하늘의 아름다운 명을 받고 동방 전체를 소유하여, 팔도로 나누니 州와 郡이 별처럼 늘어서고, 사면을 에워싸 진(鎭)과 보(堡)가 바둑알처럼 깔렸다. 경도와 위도가 수천리를 넘고 승평을 누린 지 수백 년이 되었다
한치의 땅도 빼앗기지 않고 나라를 잘 경영해 왔다는 정조대왕의 말이다.
순조(純祖)임금때는 경제가 매우 번영했던 시절로 평가할 수 있다. 지방관리도 집안에 그림 한점을 걸어놓을 정도의 풍족한 사회였다고 후세 회화사(繪畫史)는 분석하고 있으며 조선이 대륙에 있었다는 역사적 명제와 결부시켜 보면, 청(淸)나라와 서양과의 막대한 경제교류에는 조선의 엄청난 물산이 가세했음은 당연지사(當然之事)임과 동시에 서구의 지속적인 경제교류를 얻고자 하는 군사적 압박이 이루어졌을 것으로 보이는 부분은 바로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순조실록(純祖實錄)에 막대한 양의 기사(記事)가 모두 비워지고 빼버렸다는 심증을 지울수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순조(純祖)치세기간에도 서구 오랑캐는 조선강역에 단 한걸음을 내딛을수 없을 정도로 나라는 굳건하고 올곧게 다스려졌기에 영명했던 헌종(憲宗)은 조(祖)의 묘호를 올려 그 공(功)을 만세에 빛나게 했다.
현재 비번역 서양인 기록은 도대체 그 양을 알 수 없을 정도로 방대하다. 특히나 경인문화사에 펴낸 서양인기록 모음집은 얼마전까지 중고거래로 1,200만원에 딱 한권 존재했는데 지금은 없어져 버렸다. 무려 일천권정도에 육박하는 방대한 분량이었고, 단국대학교 윤내현 교수가 출판한 기행문 모음집도 비번역서로 두 권이 있어 우리가 복원하려는 무너진 조선역사 회복에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2024.1.11. 松溪
첫댓글 역사적 사실의 이면을 밝혀주시는 글, 감사합니다.
번역하지 않은 서양인들의 기록이 방대하다는 것에 놀랐습니다.
강단사학자들이 조작된 역사만을 읇조리고 있었고, 유린당한 우리역사를 되찾을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는 것에 분개합니다.
네 그렇습니다. 저 많은 서양인기록을 번역해 세상에 내 놓아야 하는데 쉬운일은 아닌듯 합니다. 언젠가는 이루어 지리라 생각해 봅니다. 항상 건강하세요
고맙습니다
정혜님..항상 감사합니다.
1419년 이종무의 대마도 정벌이 대륙에서 왜놈들이 섬으로 틀어박힌 역사 일듯. 시점도 얼추 맞는듯..스시마섬이 아니라 대륙 아래 대만까지 정벌한것이 반도에서 축소 되버린것..
네 다각도로 고려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1420년이후 일본내부의 정치경제사정을 파악해 보면 더 정밀하게 접근할 수 있을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선조, 인조, 순조...조가 붙은 임금은 정말 뛰어난 사람인 걸로 알고 있는데 왜 이 세임금은 왜 이렇게 우둔한 임금으로 묘사되었는지를 송계님 글을 보고 이해가 됩니다.
이종무가 대마도를 정벌할 때 얼마나 철저히 정벌 했는지 그후 한 100년동안 왜구들이 조선에 얼씬도 못했다고 하더이다.
순조때 임상옥이 날라다닌 것만 보아도 경제가 상당히 활발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유구가 팔라완일 거라는 추정도 맞을 것 같습니다. 지금 오키나와는 태풍이 많이 불어서 옛날에는 거의 사람이 살지 못하는 불모지가 아니었나하는 생각이 듭니다. 대만도 마찬가지 이유로 불모지라고 보여집니다.
네 댓글 감사합니다.
인조대왕 때는 정벌의 역사는 커녕 치욕의 역사 아닐련지요?청나라서 돌아온 아들인 소현세자를 반역세력으로 몰아 세자가 병사하자마자 강빈과 세 손자들을 모두 죽인 것만 보더라도 무능한거 아닐까요?저는 인조보다 광해군이 더 훌륭한 임금이라 봐요.
사람과 사람의 일들이니 많은 우여곡절이 있겠지요. 더군다나 일제는 우리역사의 실타래를 엉망진창으로 교열했으니 후손된 우리로서는 매우 신중하게 해석하고 고찰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역사를 풀어내는 일이 어려운 일이라 생각합니다. 감사합니다..
좋은 정보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