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독 일 ◎
중부 유럽에 속해있는 독일은 면적은 35만 7,022㎢이고, 인구는 약 9,000만 명이며, 수도는 베를린이다. 인구밀도는 ㎢당 228명이다. 인구의 대부분은 게르만족이고, 유태인·슬라브인·위그노인 등의 소수민족이 있다. 언어는 고지독일어(高地獨逸語)와 저지독일어(低地獨逸語) 중 일반적으로 고지독일어를 표준어로 삼고 있으며, 16세기에 루터의 성경번역에 의해 신고지독일어(新高地獨逸語)가 확립되어 방언의 차이가 많이 줄었다.
종교는 개신교와 가톨릭교가 주류를 이루고 있는데, 개신교는 주로 북부와 동부에 분포하여 전체 인구의 약 51%가 믿고 있으며, 가톨릭교는 주로 남부와 서부에 분포하여 전체 인구의 약 48%가 믿고 있다. 기후는 서유럽의 해양성 기후와 동유럽의 대륙성 기후의 중간형이다.
1. 면적(㎢) : 357,022
2. 수도 : 베를린
3. 종족구성 : 게르만족(91.5%), 터키인(2.4%)
4. 공용어 : 독일어
5. 종교 : 개신교(34%), 가톨릭교(34%), 이슬람교(3.7%)
6. 건국일 : 1949년 5월 23일 (90.10.3 동서독 통일)
7. 정체 : 연방공화제
8. 통화 : 유로화(Euro)
독일의 역사는 게르만민족의 대이동 이후 프랑크족에 의해 여러 부족이 통합되어 프랑크왕국이 건립되는 시기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부족통합의 제반 과정을 완결한 칼 대제가 사망한 뒤 동·서프랑크로 분열되었으나, 오토 1세에 이르면 신성로마제국이 탄생하여 이후 13세기 전반까지 ‘황제시대’가 계속된다. 그러나 제후의 세력이 커지면서 대공위시대(大公位時代)를 거쳐 다시금 15세기부터는 합스부르크가(家)에 의해 제위가 세습되었다.
1517년 루터의 종교개혁으로 독일사회는 심대한 충격을 받아, 기사전쟁(騎士戰爭)·농민전쟁·종교전쟁 등을 거치면서 1555년에는 아우크스부르크종교화의(Augsburg 宗敎和議)에 의해 신·구교가 분리되게 된다. 1648년 베스트팔렌조약으로 종교적 평화는 달성되었으나, 연방체제가 성립됨으로써 독일은 정치적·경제적으로 분산화·무력화되는 결과를 낳았다.
18세기 말에서 19세기에 걸친 프랑스혁명과 나폴레옹의 유럽지배는 분열된 독일에 커다란 영향을 미쳐 통일운동의 기운이 무르익었다. 나폴레옹 몰락 후 빈회의를 거쳐 독일의 민족운동은 독일연방으로 성과를 보았으나, 완전한 통일은 비스마르크의 ‘철혈정책’으로 대표되는 프로이센 주도의 통일까지 기다려야 했다.
그 뒤 독일은 바이마르공화국과 나치스의 제3제국을 경험하였고, 제2차세계대전에서 패함으로써 미국·영국·프랑스·소련의 4개 연합국의 점령상태에 들어가게 된다. 그렇지만 냉전이라는 동서대립의 세계정세 속에서, 1949년에 이르자 미국·영국·프랑스 관리지역에는 서독이, 소련 관리지역에는 동독이 성립되어 독일은 동서로 분단되었다. 자유민주주의 국가인 서독은 1949년 5월 23일 통일까지의 잠정헌법으로서 기본법을 제정, 공포하고, 그 해 9월 21일에 국가를 수립하였다. 정부형태는 내각책임제이며, 의회는 양원제를 취하였다. 사회주의 국가인 동독은 1949년 10월 7일, 인민회의를 열고 독일민주공화국의 성립을 선언하였다. 의회는 단원제이며 인민회의가 형식상의 국가 최고 권력기관이었다.
1969년 대통령제를 폐지하고 설치된 국가평의회는 의회해산·총선거실시·법령공포 등의 권한을 행사하였다. 내각에 해당하는 각료평의회는 통일전선을 구성하는 5개 정당의 연립정권의 형태를 취하였지만, 실질적으로는 사회주의통일당(SED)의 단독정권이었다. 1955년 서독이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에 가맹하자, 동독도 같은 해 바르샤바조약기구(WTO)에 가맹하여 ‘두 개의 독일’을 굳히는 길로 나아갔다. 이어 1961년 9월에는 동·서독의 긴장관계를 상징하는 베를린 장벽이 동독에 의해 구축되었으나, 1969년 서독에 브란트 정권(Brandt,W. 政權)이 등장하여 이른바 ‘동방정책(Ostpolitik)’의 기치 아래 ‘1민족 2국가’라는 현실정책을 추구하면서 화해의 길로 들어섰다.
1970년 동·서독은 관계정상화를 위한 기본조약에 조인하여 현 국경선을 상호 승인할 것을 약속하였으며, 1974년 6월에는 동·서독이 함께 국제연합에 가입하였다. 1980년대 후반부터 시작된 동서냉전체제의 해빙과 구 소련의 페레스트로이카 정책에 힘입어 독일민족은 재빨리 통일을 성취하였다. 1990년 3월 18일 구 동독 인민의회의 결정으로 동독지역이 1990년 10월 3일에 흡수통합되어 독일연방공화국으로 통합되었다. 이로써 독일은 16개 주로 구성된 연방국가가 되었다. 독일연방공화국은 1949년 5월 23일에 제정된 기본법(Grundgesetz)에 기초하여 입법·행정·사법의 삼권분립으로 법치주의에 의한 자유주위적 사회민주주의 정치체제를 운영하고 있다. 연방대통령을 둔 내각책임제인데, 대통령은 연방대통령선출 특별위원회에서 5년 임기로 선출한다. 이 위원회는 연방위원과 주(州)의 국민대표 동수로 구성된다. 연방수상은 연방의회에서 선출되며, 자신의 책임 아래 각 부처 장관을 제청하고 정책을 수행하여 나간다. 사법부는 연방제의 특성에 맞도록 각 주의 법원제도를 갖추어, 5개 연방차원의 법원, 즉 연방대법원·연방행정법원·연방재정법원·연방사회법원·연방노동법원 등이 있다. 연방헌법재판소(Bundes Verfassungsgericht)는 모든 헌법기관에서 독립적인 최고의 법원으로 헌법의 수호자 역할을 하고 있다. 통일 이후 독일은 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정치적·경제적 힘을 발휘하고 있는 주도적 국가이다.
◈ 함부르크[Hamburg]
함부르크는 엘베강(江) 하구 110km 상류의 양안에 걸쳐 있는 베를린 다음가는 제2의 도시로서 항구와 함께 국제공항도 있으며, 유럽 교통의 요지이다. 811년 카를 대제가 교통이 매우 편리하고, 알스터강(江)이 엘베강으로 합류하는 지점에 ‘하마부르크성(城)’을 쌓은 것이 시의 기원이다.
1189년 프리드리히 바르바로사가 상공업에 특권을 주었다. 1241년에 뤼베크와 방위조약을 체결하여 독일 한자동맹(Hanseatic League)의 기초를 굳히고, 그 후 300년 이상에 걸쳐 한자동맹에 속해 있으면서 특히 노르웨이·네덜란드·영국·에스파냐·포르투갈과 관계를 맺어 왔다. 함부르크 증권거래소는 독일에서 가장 오래된 것이고, 함부르크 은행의 기원도 30년전쟁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8세기 중엽 신대륙과의 무역이 번영의 기초가 되었다. 1815년 자유국가가 되었고, 1937년 읍·면을 합병하여 대(大)함부르크가 탄생하였다.
경제의 근간은 해운·상업·공업이며, 특히 독일 최대의 정유산업이 입지한다. 40㎢의 항만 중 15㎢는 자유항이며, 조석항이기 때문에 외항선은 만조를 이용해서 출입한다. 상업은 여러 방면에 걸쳐 이루어지며, 상업 종사 인구율은 17%로서 독일의 도시 중에서는 그 비율이 가장 높다. 조선, 정유, 차체(車體)·타이어 제조 등이 중심공업이며, 그 밖에 기계·전기통신기·가구·섬유·담배·화장품 공업이 영위된다. 1919년에 창립된 종합대학과 음악대학 및 수로연구소(水路硏究所)·독일 기상대·천문대·열대연구소·철도관리국·우정국·상공회의소·직인회의소(職人會議所)·연방형사국·조선시험소·북독일방송국 등 많은 중추기관이 집중되어 있다. 관광 문화적 요소로는 함부르크의 상징인 132m의 첨탑(尖塔)이 있는 장크트 미하엘리스 교회, 르네상스풍(風)의 시청사, 독일연극관, 미술공예박물관, 레페르반의 번화가 등이 있다.
◈ 함부르크 도미니코 수도원 [Dominikaner Kloster St. Johannis]
도원의 설립에 대한 이야기는 샤우엔부르크와 홀슈타인의 아돌프 4세 백작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아돌프 백작은 1227년 마리아 막달레나 영명 축일인 7월 22일 Bornhöved 전투에 참가하여 덴마크인들과 싸우기 전에 자신이 승전할 경우 수도원을 짓고 거기서 살겠다는 멩세를 했다. 이 맹세의 실천으로서 그는 1231년, 오늘날에는 함부르크의 아돌프 광장이 된 마리아 막달레나 수도원을 설립했고, 1236년에는 오늘날 시청광장이 된 도미니크회 성 요한 수도원을, 1242년에는 킬 지방에 또 하나의 프란치스코회 수도원을 설립하고 여생을 그곳에서 보냈다. 아돌프의 부인인 하일비히 폰 데어 리페 백작부인은 그녀의 남편처럼 1246년 2월 24일 헤어베어데스후데에 시토교 수도회를 설립했다.
헤어베어데스후데는 후에St. Pauli와 알토나 사이의 경계를 잇게 되는 페퍼묄렌벡 근처 엘베 강 상류 언덕 위의 한 작은 마을이었다. 하일비히 백작부인은 기부를 통해 농장과 물레방아, 그리고 토지와 집들을 소유할 수 있었고, 농장과 물레방아에서 나오는 소득은 작은 수도원들의 생활 기초가 되었다. 1247년 헤어베어데스후데 수도원은 교황 인노첸시우스 4세에의해 정식 수도원으로 인정받았다. 1293년 수녀들은 샤우엔부르크의 하인리히 1세 백작으로부터 알스터 근처 오더펠데와 하이미시후데 일대의 땅을 “숲, 습지, 초원, 호수와 모든 자유와 함께, 모든 구속으로부터 자유롭게 하기 위해” 사들인 후 1295년 수도원을 이전하였다. 수도원 이전의 이유 중 하나는 함부르크 도시 상황과도 연결되는데, 도시 외곽의 제방이 방어 태세에 들어갔고, 13세기 말 물레방아에 물을 대던 개울이 말라버려 수도원의 생계가 더이상 보장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 후 1530 년 종교개혁으로 수녀들이 함부르크 시내로 거처를 옮기면서 “ Evangelische Conventualinnenstift 함부르크시의 미혼의 귀족과 시민들의 딸” 이라는 수도회를 건립하고, 1914 년 또 다시 이사하게 되는데 이 거리는 이미 1870년 수도회 설립자의 이름을 따서Heilwigstra sse 불리던 거리이다.
◈ 성 페트리 대성당 [Hauptkirche St. Petri]
함부르크의 성 야곱 성당(Hauptkirche St.Jacobi)와 바로 이웃하고 있으며, 성 야곱 성당과 비슷한 132m 높이의 첨탑은 어디서나 잘 보인다. 544개의 계단을 오르면 첨탑의 정상으로 오를 수 있다. 함부르크 도시가 처음 생겨난 장소인 하마부르크(Hamm aburg) 지역이 바로 성 페트리 성당이 처음 위치한 곳일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11세기부터 성당이 역사에 언급되고 있으며, 1418년 고딕 양식으로 완공되었다가 1842년 대화재로 인해 훼손되었고, 지금의 첨탑은 1878년 구리로 만들어졌다. 전쟁 후 파손되었다가 비교적 최근은 1995년 복구가 완료되었다. 서쪽 현관문에 있는 사자 머리 문양의 청동 손잡이, 내부 북쪽의 벽화가 유명하다.
◈ 피쉬 마르크트 [Fischmarkt]
항구도시 함부르크는 어시장도 유명하다. 직역하면 "어시장"이 되는 피쉬마르크트(Fischmarkt)가 바로 그 장소. 알토나 지구에 있어 알토나 피쉬마르크트(Altonaer Fischmarkt)라고도 부른다. 어시장의 역사는 매우 길다. 1600년대부터 시장이 열린 기록이 남아있고, 특히 1700년대에 알토나 지역의 한 교회 앞에서 어부들이 생선을 팔았던 것을 직접적인 시장의 기원으로 본다. 19세기에는 강변에 시장 건물까지 만들어 본격적인 상거래가 이루어졌으며 그 전통이 지금까지 계승되고 있다.
◈시청사[Rathaus]
1879년 완공된 네오 르네상스 양식의 건물로 647개의 방이 있고 궁전을 연상케 하는 시청사(Rathaus)의 외관은 부유한 무역항 함부르크의 풍요에 걸맞는 위엄을 보인다. 한자동맹 당시 시 정부나 시 의회의 소재지였으며, 유럽에서 가장 오래 된 증권 거래소도 위치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