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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현대문학에 나타난 삶의 유형
권대근
문학평론가, 대신대학원대학교 교수
I. 문학과 삶의 관계
문학은 인생을 표현하기 위한 존재하는 것이다. 시는 삶의 서정을 운율적으로 표현한 것이며, 그날의 지향하는 인간의 절규요, 소망이다. 그러기에 시에는 다양한 삶의 빛깔이 담겨 있다. 사랑에 대한 애틋함과 종교적 기원이 있는가 하면, 사무치는 별리의 정한과 속세를 떠난 자연친화적 삶이 물결치기도 한다. 지역의 풍경과 인심을 노래하는 시가 있는가 하면, 우국지심을 나타내는 시도 있다. 현실에서 못다푼 한을 절규하는 시도 있다.
한 권의 장편소설을 여덟 줄의 시로 쓸 수 있다는 도스토예프스키의 말대로 시인은 우주의 섭리나 세상의 모든 것- 산수나 자연 그리고 정서나 사고의 세계까지 응축된 시형 속에 수용할 수 있는 장르다. 시인은 언어와 그 구조 속에 우주와 삼라만상을 응축해서 형태화할 수 있는 장인이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시인은 우주와 인생을 시 속에 응축할 수 있는 사람이며,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는 제2의 창조자가 된다.
카러시(E. Cassirer)는 사람에게는 다른 동물에게서는 볼 수 없는 상징체계가 있어 이것이 인간문화의 진원지요, 사람다움의 본질적 체계라 했다. 사람은 물질적 우주에 사는 것이 아니라 언어, 신화, 예술, 종교 등으로 그물을 짠 상징적 우주에 산다. 따라서 사람은 상상적 정서의 한 가운데서 산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의 상징체계는 수용체계와 운동체계가 따로 떨어진 별개의 것이 아니다. 사람은 물질적 세계에 사는 동시에 비물질적 세계에 산다. 현실과 비현실, 이성과 감성 등 현실의 양극적 모순을 통합하려 하고 통합할 수 있는 능력, 그 세계에서 살 수 있는 유일한 생물, 사람만의 능력, 그것이야말로 상징적 능력이요, 상징체계의 작용인 것이다.
언어가 있어서 사람이 사람 되는 것은 아니다. 본능적으로 상징의 능력이 있으므로 사람만의 사람다움이 있고, 사회가 형성되며 언어가 발달되었다. 그 힘으로 사람은 언어로만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고, 그림을 그린다. 언어를 매체로 한 춤과 노래와 그림- 그것이 시다. 상징적 구조체로서의 시는 사람의 조상으로서의 인간의 출현과 그 발생 시기를 같이 한다. 상징의 본능이 사람의 본능이요 그것이 곧 시적 본능이기 때문이다. 그곳에는 내적 심리와 본능적 감정, 사상과 경험, 현실적 상황과 미래적 기원, 개체와 공동체간의 공통감, 관습적 믿음과 창의적 비판의식이 함께 어우러진다. 이는 곧 시가 삶의 표현 양식이었다는 것을 말해준다고 하겠다.
시의 역사는 현실 사회의 역사, 즉 인간의 삶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그러나 문학은 인생을 어떻게 살 것인가를 가르쳐 주지는 않는다. 만일 문학이 인생의 삶을 수신교과서처럼 가르치는 것이라면, 문학은 그토록 사회와의 관계에 고뇌하고 토니오 그레가와 같은 작중 인물이나 톨스토이와 같은 인물은 생겨나지 않았을 것이다. 문학이 문학을 위해서만 있 는 것은 분명 아니다. 그러므로 문학만이 자율적인 구조를 지니면서 발전한다는 문학주의나 예술지상주의 사고는 분명히 문학과 현실과의 관계를 경시한 관점에서 나온 것이다. 예술을 위한 예술을 부르짖은 사람도 있었고, 자연주의 문학사조도 있었다. 그러나 문학의 흐름 속에서는 나름대로의 의미도 있었고 필연성도 있었지만, 이런 주의는 한 시기의 목소리로서 아득한 역사의 흐름 속에 사라지고 말았다. 다만 좋은 작품만이 시간의 흐름이라는 시련에 견디어 살아남을 수가 있었다.
문학의 최종 관심은 인생이고, 독자의 관심도 인생에 있다. 인생의 국면 국면을 어떻게 살고, 사랑하고, 슬퍼하면서 나아갈 것인가? 또는 어떻게 나아가면 좋을 것인가? 이 물음에서 한 걸은 나아가면, 인생은 왜 존재하는가? 우리는 왜 살고 있는가? 하는 인생의 의미와 이유에 대한 물음이 되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 인생의 어두움은 왜? 무엇 때문에 사는가? 가 분명하지 않기 때문에 생기는 어두움이다. 갑자기 우리의 발 뿌리에 커다란 연못이 깊이 파여서, 아무도 이 연못 속에서 왜 사는가고 묻는 우리에게 대답해 주는 자는 없다. 이 어둠이 필자는 '단절'이란 말로 대체된다고 본다. 현대시의 현대성으로 인식되는 이 단절이 어떻게 해서 시 속에서 용해되어 나타나는가의 분석을 통해서 우리는 좀더 생기 있게 이 시대의 시적 상황을 이해할 수 있으리라 생각된다. 이 어둠의 원인에 대해 곁의 누군가의 대답이 아니라, 정작 자신이 혼자 대답을 찾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 인생이다. 우리가 문학을 찾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문학 작품을 읽으면 인생이 저절로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문학은 삶의 문제를 푸는 열쇠가 아니다. 그러나 토스만의 말처럼, 문학은 사람들에게 얼마간의 밝음을 선사하는 것이다.
본고는 시는 인생의 표현이다라는 것을 전제로 현대시에 나타난 삶의 유형을 발견해 내어 단절의 시학으로 풀어내는 데 목적이 있다. 시에 나타난 삶의 모습을 유형화한다는 것은 곧 시의 내용을 점검하는 작업임과 동시에 인간의 흔적과 현대시의 양상을 밝히는 일이 될 것으로 믿는다.
II. 삶의 체계와 그 의미성
문학이란 인간의 삶을 다루는 예술 장르다. 그렇다면 문학의 한 장르인 시 역시 삶의 다양한 모습을 지니고 있음이 분명하다고 하겠다. 모든 창조, 모든 가치의 원천이 자아에 있다고 본다면, 시는 시인 자신의 인생 체험이나 내면세계의 표현이라고 해서 큰 잘못은 없다고 본다. 그러나 이러한 정의는 비단 시에 국한되지는 않을 것이다. 시가 무엇인지를 단적으로 말한 여러 견해가 있지만, 쉽게 말해서 시는 운율로서 인생을 표현하는 창작 문학의 한 장르로 보면 될 것이다. 시가 어떻게 인생을 형상화하고 있는가를 밝히는 작업은 '시가 무엇인가'하는 근본적 물음에 대한 어느 정도의 해답을 제공해 줄 수 있을 거라는 가정에서 보면, 그 의미가 크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필자는 이 글에서 삶의 체계를 자연, 사회, 욕구, 노동, 체험, 심리, 도덕, 종교, 사상, 죽음 등으로 구분하여 분석하고, 현대시에 나타난 삶의 유형을 고찰하고자 한다.
1. 삶의 체계(1) - 인간과 자연
자연은 삶의 터전이다. 이것은 근대 이전의 사회에서는 말할 필요도 없는 것이지만, 근대 문명사회에서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자연을 벗어난 인간의 삶은 생각할 수 없는 만큼 인간의 삶을 다룬 동서고금의 시 속에서 자연은 중요하게 다루어진다. 근대 이전의 한국 시문학에서도 자연은 중요하게 취급되었으며, 근대 이후의 한국시문학에도 자연은 중요하게 취급되었다. 모든 삶은 그 생성과 존재 근거를 자연에 두고 있으며 자연으로 돌아간다. '시는 자연의 모방이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처럼 시는 물론 다른 문학 장르도 자연을 바탕으로 발전해 온 것이 역사적 현실이다. 특히 고대문학으로 올라갈수록 자연과의 접촉은 활발해서 자연친화사상을 낳게 되고 현실도피적인 사고가 시의 내용을 이루어 왔다. 다시 말하면 자연사상이 시를 낳는 외적 조건이었다. 인간 삶의 장은 자연과 사회와 국가로써 구성되고 있고 이들이 삶이 공간적 조건이 되며 불가분리의 총체적 통일성을 지닌다. 거시적으로 보면 사회와 국가도 자연, 곧 대자연의 일부분이다. 왜냐하면 사회와 국가는 인간에 의해 만들어 졌고 인간은 바로 자연으로부터 나왔기 때문이다. 삶의 장은 이처럼 자연과 국가로써 구성되어 있으므로 이를 사회생태학적 체계라고 일컫는다.
자연은 하나의 자기 완결적 체계, 즉 하나의 전체이다. 그것은 총체적 통일성을 지닌다. 그것은 하나의 거대한 단일체계인데 그 안에 수많은 하위체계들을 포함하여 이들 사이에는 상호의존 관계의 복합구조가 형성되어 있다. 인간사회와 국가도 이들 하위체계에 속한다. 자연에 대한 종래의 전통적 관점은 인간 사회와 자연세계를 서로 분리된, 각각 독립된 존재로서 파악해 왔다. 이는 특히 서양에서 그런 경향이 심하다. 하나의 통일된 체계로서 자연세계는 원래 막힘이나 닫힘이 없는, 하나의 열려 있고 일관된 흐름의 체계이다. 자연은 곧 하나의 거대한 생명체이다. 그 안에서 미시적으로 관찰되는 무생물도 살아있는 대자연의 일부분을 이루고 있으므로, 즉 생명의 흐름체계의 한 구성요소이므로 준생명체로 간주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모든 생명 또는 삶은 자연의 흐름 속에 있으며 죽음이란 자연의 흐름체계의 어느 곳이 막히거나 닫혀있는 상태를 뜻한다.
2. 삶의 체계(2) - 인간과 사회
삶은 삶의 주체가 욕구 충족을 끊임없이 추구하는 과정이다. 삶의 주체로서는 개인, 집단, 조직 등이 있다. 욕구의 충족을 위해 이들 삶의 주체들이 다양한 상호 작용의 관계들을 맺게 된다. 이러한 상호 작용은 이미 주체들 사이의 상호 의존성을 전제로 한다. 이 관계들은 사회적 관계들이며 이들 관계들의 복잡한 그물망을 '사회' 또는 '사회구조'라고 한다. '국가'는 사회 자체의 법적 구성체로서 조직된 것이다. 다시 말하면 국가는 사회 전체를 구성 단위로 하는 하나의 초거대 조직이다. 이처럼 사회와 국가가 형성되는 되에는 인간의 상호성과 합리성이 작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상호성이 사회와 국가 형성의 구조적 원리라면 합리성은 그 과정적 원리라고 구별할 수 있다. 상호성과 합리성은 따라서 삶의 구성적 조건이 된다. 사회의 형성 과정에서는 인간의 합리성이 지배적 성격을 지니므로 그것이 명확히 표출되지 않는 반면 국가의 형성 과정에서는 합리성이 현재적으로 드러난다. 일반적인 사회 조직들과 마찬가지로 국가라는 조직의 구성에 있어서도 국가의 목표와 목표달성을 위한 수단의 선택에 관해 복잡한 논의가 전개되기 마련이다. 이 사회적 논의 과정에서 사회 구성원들 사이에 이해 관심의 같고 다름에 따라 합의, 협력, 갈등, 반목, 투쟁 등의 현상이 나타나는데 이는 모두 합리성을 중심으로 하는 의견들의 다툼이라고 볼 수 있다.
사회와 국가의 권력지향적 상호관계와 자연에 대한 관계의 변천 과정을 인류 역사의 거시적 조감을 통해 이념형에 따라 다섯 단계로 재구성해 보기로 한다. 첫째 단계는 자연 상태인데 오로지 적나라한 폭력 지배와 약육강식의 항상적 전쟁상태로서 가상적 역사시발의 영점단계라고 상정할 수 있고 따라서 아직 사회나 국가가 출현하지 않은 시기로 오직 대자연이라는 하나의 일관된 흐름체계 안에 모든 삶의 주체가 순응하며 포용 또는 종속된 상태였다고 추정된다. 둘째 단계는 사회에 대한 국가의 우위 단계로서 국가가 사회 위에 군림하여 담지자가 사회를 거의 자의식으로 지배하는 폭력 국가의 형태를 띠며 사회구조는 신분 사회의 성격을 지니고 사회적 분화 정도가 낮다. 경제적으로는 수렵채집사회, 유목사회 등을 거쳐 농경사회가 정착되어 인간은 자연에 완전히 의존되고 밀착된 삶을 영위했다. 인간은 자연 안에 자연의 일부로서 존재하므로 전혀 대립적 관계에 있지 않고 자연이 곧 생명의 고향 또는 원천으로 인식되었다. 한국사에서는 고대에서 1910년 경에 이르는 시기가 이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다.
셋째 단계는 국가와 사회 사이의 권력 투쟁과 갈등 심화의 단계인데 시민사회의 성장에 따라 정치적 분쟁과 혁명이 자주 일어나는 권력 국가와 정치적 조직 사회의 틀이 잡혀가는 시기이다. 경제적으로는 자본주의 초기와 공업혁명에 의한 공업 사회의 태동기로 특징화된다. 자연은 정복과 수탈의 대상으로서 인간에 대한 대립적 객체로서 인식되었다. 인간과 자연의 소외관계가 구조화되기 시작했다. 이 시기는 1910년 경부터 1980년대까지의 시기에 해당한다. 넷째 단계는 국가에 대한 사회의 우위 단계로서 사회구조가 고도로 분화되고 복합적 수직사회를 이루게 되고 정치적으로 민주주의의 제도적 확립과 전치권력의 전문화에 의한 권력 국가의 조직적 성숙을 보게 된다. 경제적으로는 공업 중심의 수정자본주의 또는 혼합경제체제 아래 자연환경의 오염과 파괴 효과가 가시적으로 나타나고 문명의 위기의식 속에 자연과 사회와 국가와 인간 삶의 의미에 대한 성찰이 범지구적으로 확산된다. 이 시기는 1980년대부터 현재까지 해당한다.
마지막으로 다섯째 단계는 사회와 국가의 평등 단계인데 사회 자체의 합리적 조직으로서의 국가의 위상에 대한 인식이 보편화되고 양자간 힘의 균형상태가 유지되어 양자의 합일 지향성이 부각된다. 정치의 과학화가 점진적으로 실현되고 과학과 문화 중심의 다원 사회가 정착되지만 공업화에 대한 문제 의식의 확산에도 불구하고 공업 문명과 자연 환경 사이의 갈등 관계가 지속되면서 자연의 주권 회복을 추구하는 경향을 보인다. 이 시기는 미래에의 과도기로서 한국에서는 21세기의 미래에 해당할 것으로 예견된다. 이와같이 인류 역사는 자연과 사회와 국가 사이의 상호작용과정으로서 이어져 내려오고 잇는데 거기에 특히 국가의 역할, 곧 국가들 사이의 상호작용이 크게 부각된다. 그런데 국가는 하나의 조직이므로 다른 사회조직과 마찬가지로 '사회-기술체계'로서의 특성을 지닌다. 기술체계로서의 국가가 조직적으로 발전시켜 온 것이 공업화라는 근대화 전략이었다.
3. 삶의 체계(3) - 인간과 욕구
삶의 발생적 조건은 욕구의 존재에 있다. 인간이 살아 있다는 증거는 그 또는 그녀가 욕구를 감지하는 데 있다. 그런데 인간의 욕구는 다양하며 무한하다. 욕구의 원천에 따라 자연적 욕구와 사회적 욕구가 있다. 욕구의 주체에 따라 개인적 욕구와 사회집단적 또는 사회조직적 욕구가 구별된다. 욕구의 충족 대상에 따라 육체적 또는 물질적 욕구와 정신적 또는 심리적 욕구로 나뉜다. 그리고 욕구의 충족기제에 따라 구체적 또는 개별적 욕구와 추상적 또는 포괄적 욕구가 잇다. 후자는 '전략적 욕구'로서 어떤 대상을 알고자 하는 욕구(인지적, 과학적 욕구)와 그것을 변경시키고자 하는 욕구(규범적, 정치적 욕구)오 양분된다. 다른 모든 욕구의 충적은 궁극적으로는 이 두 가지 전략적 욕구의 충족(문제해결)을 통하여 가능케 된다.
이런 시각에서는 지금까지의 인류 역사는 이들 전략적 욕구의 충족을 지향해온 발전 과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두 가지 전략적 욕구의 충족기제의 합리화는 과학과 정치와 이들 두 가지 행위체계의 결합방식의 체계적 제도화로서 나타났다. 그것은 두 가지 욕구에 상응하는 합리성, 곧 '인지적 합리성'과 '규범적 합리성'의 변증법적 전개과정과 이의 제도화로써 특징지워진다. 인지적 합리성에는 앎 자체가 목적인 앎의 추구와 관련된 '순수인지적 합리성'과 어떤 제3의 목적 달성을 위한 수단의 강구와 관련된 '수단적 합리성'이 있고, 규범적 합리성에는 조직 안에서의 권력지향적 행위 차원에서 좁은 의미의'정치적 합리성'과 사회적 행위의 선악을 판별하는 도덕적 문제와 관련된 '윤리적 합리성'과 아름다움과 추함의 판단 문제와 관련된 '심미적 합리성'의 종류들이 있다.
인간의 삶의 욕구 충족에 대한 추구라는 기본적 성격은 또한 그것의 해방지향성을 뜻한다. 그러나 욕구충족이 우선 형식적 또는 직접적으로 해당 삶의 주체에게 해방감을 느끼게 해준다고 해서 그것이 실질적 또는 궁극적 해방이라고 볼 수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삶의 공간적 통일성, 곧 삶의 장으로서의 자연과 사회와 국가의 총체적 연관성 안에서 평가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또한 그 또는 그녀가 감지하는 모든 욕구를 충족시킨다고 해서 해당 삶의 주체가 반드시 해방된 삶을 누린다고 볼 수 없다. 인간은 현실적으로 감지하는 모든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지 않다. 무엇보다도 인간은 시간, 공간, 그리고 자연의 제약을 벗어날 수 없다. 결국 인간은 선택적으로 욕구를 충족할 수밖에 없다. 합리적 선택을 위해서는 지식과 지혜가 필요하다. 지식은 과학의 차원에서 인지적 합리성을 통해서, 지혜는 넓은 의미의 정치 차원(도덕과 예술 세계를 포함)에서 규범적 합리성을 통해서 얻을 수 있다. 물론 인간의 지식과 지혜는 완전무결한 것은 아니다. 현실적으로 정보와 시간의 부족이나 목표 설정에 대한 의견불일치 등에서 연유되는 '제한적 합리성'의 제약 조건 아래서 욕구 충족의 문제해결이 시도될 수밖에 없다는 주장의 타당성을 인정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항상 그러한 제약을 극복하려고 부단히 노력할 수밖에 없고 그런 노력을 지속하여 더 나은 합리성을 성취할 수 있을 것이다.
4. 삶의 체계(4) - 인간과 노동
욕구 충족을 위해서 인간은 노동하지 않으면 안 된다. 삶의 해방지향성은 이 노동의 필연성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함을 뜻하기도 한다. 인간은 자신의 노동을 통하여 자연과 사회를 변경시키면서 자기 자신을 또한 변경시켜왔다. 이 과정에서 노동 수단의 발전이 이루어졌다. 원초적 노동 수단은 인간의 몸이었다. 특히 손과 발과 머리가 아주 주요 역할을 수행했다. 다음 단계에서 인간은 도구와 기계를 발명하고 자연에서 새로운 에너지원을 발견했다. 도구와 기계는 인간의 손과 발의 연장이라는 성격을 띠고 새로운 에너지원은 인간의 힘을 대체하는 기능을 수행했다.
이것은 노동의 효과성과 효율성을 높이는 합리성의 발전 과정, 곧 합리화과정이며 농경사회로부터 1780년대 서구의 공업혁명을 계기로 하여 출현한 공업사회로의 이행과정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그것은 공업노동의 조직화, 곧 기업조직과 공장의 건설로써 구체화되었고 그 핵심은 지속적인 기술혁신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공업노동 조직의 등장과 함께 이와 관련된 다른 조직들이 다양하게 생겨나게 되었고 사회 구조는 더욱 복잡하게 형성되었다. 사회- 기술체계로서의 기업조직은 사회체계의 합리화를 추구하게 되는데 그 안에는 적어도 세 가지의 기본 기능, 곧 정치, 경제, 문화의 기능을 수행하는 하위체계(정치체계, 경제체계, 문화체계)가 인간 사회의 구성적 조건인 상호성과 합리성에 근거하여 거의 자연발생적으로 형성된다. 이는 다른 분야의 조직에 있어서도 공통된 현상이다. 결국에는 사회의 모든 조직들을 포괄하여 통제하며 조종하는 전체 사회적 조직인 국가가 등장한다. 따라서 국가의 출현은 사회 자체의 조직화 현상으로서 노동과 삶의 합리화 과정의 산물이라고 볼 수 있다.
5. 삶의 체계(5) - 인간과 체험
시는 인생의 표현이요, 사회의 거울이라고 하지만 주관에서 여과된 재현일 뿐 사실대로 옮겨 놓은 것은 아니다. 문학에 있어서 체험은 창작을 위한 토양과 같은 것이다. 이것은 작가의 체험이나 주관이 없으면 생생한 묘사로 창작된 문학 작품이 있을 수 없다. 이러한 논리에 근거하여 창작에 임하는 작가들은 자기가 표현하고자 하는 것, 또는 묘사하고자 하는 사실에 대하여 몇 번이고 찾아가거나 익혀 작품에 재현시키는 노력을 하게 된다. 괴테가 "시와 진실"에서 풍토와 계절을 묘사하기 위하여 몇 번이고 여행하여 보고 경험한 감정을 익혀 가지고 썼다는 것은 문학이 체험과 긴밀한 관계가 있다는 것을 말한다.
근대 과학의 발달과 실증주의 철학에서 온 사실 존중의 풍토, 경험주의의 발달 등은 체험을 통한 인식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으로 오늘의 시대 정신이 되었다. 이러한 영향아래 문학은 체험을 중요시하게 되었다. 특히 리얼리즘 문학은 체험을 중요시하고 오늘의 현상을 문학과 체험의 시대라 말한다. 시인의 체험은 실제적 체험과 상상적 체험으로 나눈다. 전자는 예술가가 아니라도 누구든지 할 수 있는 것이지만 후자는 예술가라야만 하게 되기 때문에 창작으로 이어진다. 문학이란 가치 있는 체험의 기록이라고 말한 최재서는 문학에 있어서 체험적 요소를 강조했다. 문학에 있어서 체험은 작가가 작품을 창작하는 동기를 마련하는 중요한 조건이 된다. 작가의 체험이 문학은 아니나 이를 구체화시켜 예술적인 언어 구조를 갖추었을 때, 이것은 훌륭한 작품으로 문학이 되어 탄생한다.
6. 삶의 체계(6) - 인간과 심리
시가 인간을 표현한다는 말을 구분하며, 내면적인 표현과 외부적인 표현으로 갈라 놓을 수 잇다. 시는 자연과 사회와의 긴밀한 관계를 맺는 것 이상으로 인간의 내면 세계, 다시 말하면 심리 현상과 깊은 관계를 맺게 된다. 더욱이 작품 속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은 작품 속에서 완전한 인생을 살아야 하기 때문에 언어와 행동이 나타난다. 시 속에서 화자가 말을 하거나 행동하는 데는 당위성이 부여되어야 하고 그때그때 소상한 심리적 변동이 표출되어야 한다. 이렇게 됨으로써 독자들은 화자의 진실성을 시에서 발견하게 된다. 인물의 행동이나 언어에 심리적으로 타당한 변인이 없다면 거짓이 되고 무리한 표현이 될 것은 당연하다. 백철은 그의 <문학개론>에서 '문학이 모방행동이라고 말한 것과 같이, 동시에 문학은 인간 심리에 대한 표현이라고 볼 수 있다'고 전제하고 '행동을 주로 묘사한 작품도 어떤 의미의 행동이 묘사되어야 한다. 그러나 과거나 현대의 작품을 모두 살펴 구별을 한다해도 행동 묘사에 중점을 둔 것과 심리추구에 중점을 둔 작품으로 구분될 수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인간에게서 행동과 심리는 분리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보족적 관계에 놓여 인간관계를 형성한다고 보아야 한다. 20세기로 접어들면서 심리와 의식의 세계를 탐구하는 많은 작가들이 출현하여, 이미지즘과 다다이즘, 슐레알리즘 등 새로운 문예사조를 일으켰고, 그들은 모두 심리적 의식을 추구한 작품 경향을 띠었고, '의식의 흐름'과 '내적 독백'을 위시하여 '자동기술법', '자유연상'. '의식의 동시전개' 등 과거의 외부 묘사 문학과는 전혀 다른 용어들이 등장했다. 문학에서 정신분석이라든지, 심리학적 현상은 문학의 본질을 따져보면 비본질적 조건이지만, 현대문학에서 중요시되고 있음을 부정할 수 없다.
문학이 인간의 심리적 내면을 그리는 것은 분명하지만 심리학은 문학작품을 연구하는 보조 학문일 뿐 문학을 포용하지는 못한다. 그 까닭은 문학과 사회가 깊은 관계에 있다고 해서 문학을 사회현상으로만 풀이할 수 없는 것과 같다. 시인은 인간의 내면 세계, 즉 심리현상을 진지하게 표현하되 어디까지나 예술적이어야 하고 독자도 심리적인 작품을 읽고 연구하되 이것을 심리적 사례로 볼 것이 아니라 문학 작품으로 수용해야 하기 때문이다.
7. 삶의 체계(7) - 인간과 도덕
시의 주제는 오랫동안 선과 악의 갈등으로 생각되어 왔다. 이러한 견해는 문학이 도덕율을 지키고 독자에게 교훈을 주는 것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시대가 있었다. 근대문학 이전에는 문학의 도덕성이 높이 평가되어 문학은 곧 도덕과의 관계에서 떠날 수 없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단테, 밀턴, 세익스피어, 괴테 등이 모두 선악의 갈등을 작품화했고, 동양의 고전 문학은 권선징악적인 해피앤딩 소설이었다. 특히 우리 나라의 고대소설이나 시조는 도덕적 훈계를 앞세운 작품이 많았다. 선과 악의 갈등, 도덕율에 대한 옹호, 심지어는 구질서에 대한 대립, 새로운 모럴의 탐구 등은 모두 도덕성과 관련시킨다면 현대 문학에 이르러서도 임 ns제는 중요한 논의의 대상이 된다. 이러하기 때문에 작가가 작품에서 추구하는 도덕성은 작가 자신이 선별적으로 선택하여 그 속에 예술성을 부여한 새로운 모럴의 창조작업이어야 한다.
모든 작가들이 기성 도덕이나 규범을 옹호한다는 입장에서 직선적으로 작품을 쓰게 되면 그 작품은 실패하고 마는 예를 발견하게 된다. 그 까닭은 작가가 도덕적 요구를 강하게 의식하고 있기 때문에 새로운 청량제가 될만한 독창성을 발견치 못하는 까닭이다. 이러한 경우 작가는 사회적인 규범이나 도덕관이 작가 자신의 신념으로 되어 있어야만 한다. 작가가 취급하여야 할 것은 새로운 모럴을 창조하고 구시대의 도덕성을 비판하여야 하는 일이다.
8. 삶의 체계(8) - 인간과 종교
고대문학과 중세문학에서는 종교가 차지하는 비중은 참으로 컸다. 근대문학으로 넘어오면서 이 문제는 많이 달라졌지만 그래도 지금까지 종교적인 문제는 여전히 중대한 문제로 남아 있다. 종교는 문학에서 사상성과 관계되어 그 위치를 확보하고 있다. 형이상학적 가치 탐구, 신의 문제, 존재론의 추구, 선과 악의 대결, 양심과 정직의 문제 등은 종교적 영역에 드는 것으로 문학의 중요한 내용이 된다. 이러한 종교적 문제가 서구문학에서는 그들의 전통이라고 생각되어져 왔다. 동양에서는 유불선의 종교적 경향이 작품에 많이 반영되었고, 특히 향가, 구운몽 등은 불교적 색채가 강한 작품이며, 근대에 와서 한용운 등의 시나 서정주, 박두진 등의 작품에서도 종교적인 경향을 읽을 수 있다.
문학이 종교적 문제를 다루는 데는 다음 몇 가지 경우가 잇다. 교리나 교훈을 직설적으로 다루는 경우와 반종교적 위치에서 다루는 경우, 그리고 간접적으로 다루는 경우가 잇지만, 본격 문학에서는 종교가 작품 속에 용해되어 형상화하도록 하는 것이 타당하다. 도스토엡스키나 릴케의 문학이 종교적이면서도 순수문학으로 성공한 것은 이 때문이다. 그들은 교리의 옹호나 종교적 교훈을 내세우지 않고 인생의 진실을 그려 독자를 감동시켰다. 그러나 종교문학일 때는 종교적 교리나 교훈을 직접 다룰 수도 있다.
9. 삶의 체계(9) - 인간과 사상
시에는 어떠한 형태이건 관념과 사상이 들어 있게 마련이다. 이러한 현상은 문학이 도덕과 종교와의 접촉을 가지며 그것들이 작품의 외적 조건을 형성하는 데서 이루어진다. 적게는 아주 작은 사물의 의미에서부터 크게는 작가의 인생관이나 사회적 이데올로기까지도 문학은 포용하며 이것들은 작가의 철학이나 사상에 의해서 재단되고 표현된다.
다만 사상이나 관념, 생활 철학 따위가 작품 속에 어떻게 형상화되느냐 하는 문제는 천차만별이지만 이러한 작업은 어떤 작품에서도 이루어진다. 어떤 작품에는 철학사상이나 형이상학의 탐구로 나타나며 또 어떤 작품에서는 정신적 편력이나 구제의식으로 나타난다. 작가의 인생관, 생활의 예지, 우주관 등으로 작품 속에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물론 작품에 반영된 이러한 요소들은 특수한 입장과 작품 속에서의 자리 때문에 차이는 있게 된다. 흔히 보는 계몽주의 문학이나 이데올로기 문학은 지나치게 드러내어 노골적으로 이데올로기를 주시하기 때문에 본격문학으로서 실패하는 예를 많이 본다. 주장하는 관념과 사상이 문학 속에 용해되고 구상화되어야 진가를 나타내게 된다.
10. 삶의 체계(10) - 인간과 죽음
문학이란 인간의 삶을 다루는 예술이다. 그렇다면 문학에서 인간이 중요하게 생각하고 잇는 죽음의 문제가 결코 소홀히 다루어질 수 없음은 당연하다 하겠다. 죽음이란 인간에게 있어 중요한 사건으로 자신이 경험할 수 없을뿐더러 정확히 인식할 수도 없다. 이런 불가지성이 인간에게 불안이나 공포를 안겨 준다. 또한 이런 특성으로 인해 오히려 죽음은 인간에게 끊임없는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대상이기도 하다.
현대에 있어 죽음이 문제된 것은 키에르케고르가 말하는 단독자로서의 실존이 죽음을 지각한 때부터다. 이에 대해 야스퍼스는 죽음은 인간이 극복할 수 없는 한계상황으로 설정하고 잇고, 사르트르는 죽음을 모든 배신하는 부조리로 간주하고 있다. 결국 죽음이란 것은 인간 존재가 필연적으로 거쳐야 할 과정이지만 그것을 담담하게 맞이하기는 쉽지 않다. 우리 인간들은 다만 타인의 죽음을 통해 죽음을 간접 경험함으로써 자신의 삶을 보다 윤택하게 하는 자극제로서 죽음을 이용할 수 있을 뿐이다. 이런 면에서 삶은 죽음을 준비하기 위한 과정에 불과한 것인지도 모른다. 현대문학에 나타난 죽음의 문제는 삶의 연장선상에서 이해된다.
인간은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태어나 또 그렇게 죽는다. 이런 삶의 반복적 과정 속에서 인간 존재는 자신의 죽음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다. 만일 인간의 삶을 유한하게 만드는 장치인 죽음이 없었다면 인간은 시간을 헛되이 낭비했을 것이다. 그리고 지금과는 다른 세상이 전개되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인간 세계에서 죽음은 반드시 존재한다. 그것이 자연의 법칙이다. 하나의 생명이 태어나면 반드시 죽는다. 이 법칙은 인간을 고뇌하게 한다. 이런 면에서 인간은 혹시라도 그것을 회피하거나 극복할 방법은 없을까라는 생각을 가지면서 온갖 노력을 하다 끝내 죽는 유한한 생명체인 것이다.
III. 삶의 유형과 현대시의 양상
현실에 있어서 우리들의 삶의 주위를 살펴보면, 세 가지의 세계가 형성된다. 1) 자연계로서 우리들의 오관으로 인식된다. 2) 인간의 사회환경으로 인간이 편의상 만들어 놓은 것이다. 3) 정신계로서 현재의식과 잠재의식이 혼재한 의식의 세계를 의미한다. 이러한 삶의 체계에 반응하는 인간의 대응 양식에 따른 삶의 유형은 일반적으로 세 가지로 분류할 수 있겠다. 감각적 즐거움의 삶과 속세적인 일에 연루된 삶 즉 정치적 활동의 삶, 그리고 관조적 삶 즉 이론적 성찰의 삶이다. 인간은 자연과 사회 환경 그리고 정신이라는 삼각의 동그란 고리체계의 중심에 위치하고 있다고 해석된다. 그러나 인간에 대한 영향을 생각하면 가장 큰 것이 '자연'이고 다음이 '사회'다. '정신계'의 사회보다 크리라고 보이나 그 상세한 것은 알지 못한다.
사람은 자연의 한 산물이고 자연의 은혜에 의하여 오로지 생을 영위해 가고 있는 것이다. 확실히 살아가기 위하여 불가결한 공기, 물 ,태양, 에너지는 무료로 얻고 있다. 살아가기 위해서는 자연의 환경에 따르지 않으면 안 되게 되어있다. 극단적인 경우, 자연의 위반은 죽음을 의미한다. 그만치 자연환경의 영향은 중요하다. '사회'는 인간이 편리상 만들어 놓은 것인데 인류의 역사에서 말하면 자연가운데서 후천적으로 만든 것으로서 '자연'에 인간 정신의 움직임이 가하여 곧 관습이 되고, 제도가 되고, 훌륭한 문화 같은 것이 만들어 졌다. 제3의 정신세계는 역사적으로 보더라도 가장 후세에 서서히 경험을 거치면서 만들어진 것이다. 잠재의식은 선조 이래 거듭 쌓아온 다수의 의식으로 남겨져 왔던 것을 아직 잘 알지 못하는 상징으로 남아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 행위의 궁극적 목적은 행복"이라고 말했다. 인간으로서 태어나서 인간의 이상이요, 누구나 찾는 행복을 얻지 못한다면 후회스런 인생을 남기는 것이 된다. 그래서 사람들은 살고 있는 현재를 중요하게 생각한다. 현실에 살고 잇는 사람들은 앞에 든 삶의 체계 속에서 본말, 대소, 경중을 항상 마음 속으로 고려하여 지금의 온갖 지식을 만들어 참으로 마음 밑바닥에서 우러나는 양심에 따라 스스로 정진 노력하는 데 모자람이 없어야 하고 자기 반성을 하면서 힘껏 살아갈 필요가 있을 것이다.
긴 인생을 바보처럼 살아가는 것도 필요하지만 어제보다는 오늘, 오늘보다는 내일의 향상을 목표로 삼아 노력하는 것이 후회 없는 인생을 보내는 방법일 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수고를 하고 나서는 안락을 바란다. 현대적 삶의 어두움은 바로 여기서 출발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기 자신의 내면에서 치솟는 이 끊임없는 안락을 원하는 이기심과의 싸움에서 지기 때문에 현대병이라 불리는 인간 소외와 단절의식이 우리들의 삶을 지배하는 것이다.
자연환경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은 자연의 법칙에 따르지 않으면 살아갈 수도 진화 발전할 수도 없다. 자연의 법칙에는 몇 가지가 있으나 그 가운데서도 피할 수 없는 것이 "진화의 법칙"이다. 이 지구상에 생명이 탄생하고 난 이래 자연의 법칙 특히 진화의 법칙에 위반하지 않고 현재까지 왔기 때문에 우리 인간은 지금도 살고 있고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대자연 속의 만물은 진화하고 있거나 퇴화하고 있는 것인데 현상이 그대로 머물고 있는 것은 없다. 사람의 경우는 자연환경에 더하여 사회환경이란 것이 있어서 진화의 원인과 결과가 불분명하다. 그러니 동식물에 있어서는 자연환경에 잘 적응하는가 그렇지 않은가가 기준이 된다. 식물에는 "씨앗"이 잘 자랄 적당한 땅에 떨어지면 그것으로 즐겁게 자랄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살기에는 매우 어렵다. 동물에게는 이동할 수가 있으므로 자신이 살만한 적당한 환경을 선택한다는, 식물보다는 더 자유를 갖고 있다. 그러나 사람은 사회를 만들었으므로 많은 이익을 얻고 있다. 이 지구를 지배하게 도니 것도 사회를 만든 덕택이다. 그런 사회에 적응되느냐 않느냐가 진화와 퇴화의 갈림길이 될 것이다.
인간은 자연과 사회의 두 가지 환경에 적응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므르 그만치 고생이 많을 수밖에 없다. 중요한 것은 도덕을 실행할 것인가 이기심 그대로 생활할 것인가의 선택권을 본인의 자유 의사에 맡겨 놓고 있는 것이다. 인간의 자유의지는 지식이 많고 능력이 불어나면 욕심이 불어나 이것도 하고 싶고 저것도 하고 싶다는 욕망이 확대된다. 이러한 욕망의 확대가 사회적 갈등을 일으킴으로써 나타나는 것이 어두움의 그림자다.
1. 유희의 삶
칸트는 인간을 세 부류, 즉 물 흐르듯 술에 물 탄 듯 물에 술 탄 듯 그렇고 그렇게 살아가는 자, 삶을 고민하고 회의하고 투쟁적으로 이끌어 가는 자, 그리고 삶을 즐기는 유희의 인간으로 나누었다. 인간은 유희적 존재다. 놀이 정신을 통해 일상의 삶의 행복을 추구한다. 놀이란 현실 속의 인간이 일정한 시간 현실적 이해관계를 떠나 그 행위 자체에 기꺼이 몰두하고 나름의 자율적 규율 속에서 삶을 즐기는 행위이다. 따라서 모든 예술 행위가 그렇거니와 순수한 의미에서의 수필은 본질적으로 놀이 정신에서 출발한다는 주장이 있을 수 있다고 하겠다. 월드컵 때 온 국민을 붉은 악마로 만든 것도 알고 보면 우리 민족 특유의 놀이 정신이라는 것이다.
정선모는 수필의 정체를 알고 본격수필을 쓰는 한국의 몇 안 되는 작가가 아닌가 여겨진다. 그녀의 글은 전체적으로 곧은 가락 같은 소리를 내는 듯하다. 동심처럼 순수하기 그지없는 심전을 곱게 가꾼 듯한 작품이 주류를 이룬다. "어린 아이 같지 않으면 천국에 갈 수 없다"고 갈파한 예수의 말씀처럼 순수가 배어있는 글을 쓰는 작가가 아닌가 여겨진다. <거리의 악사>는 지난 시대의 역사적 아픔을 반추하기도 하는데, 만약 작가가 현상을 올바로 인식하는 능력이 없었다면 이러한 글은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이분의 작품을 읽으면 그녀에게는 역사의식, 사회의식 등 사물을 깊고 넓게 볼 수 있는 고성능 렌즈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녀의 작품 중 일부는 본래적 놀이 정신을 그리워하고 실천하고 옹호하는 작품세계를 보여준다. 놀이는 어려운 시대를 사는 한 현대인을 상징하는 것이요, 생활의 위안처가 되고 있다는 측면에서 하나의 구원 수단으로서 기능 한다고 하겠다. <아이롱 할머니>는 사랑이 주제로 겉으로 드러나 보이지만, 낯설게 하기를 통해 다른 각도에서 보면 유희적인 인간의 특성을 꼬집고 있다고도 볼 수가 있다. 이 작품은 형식적으로는 수필이면서 서사구조로 보면 소설이다. 긴장의 법칙이 있어 소설을 읽는 맛을 주고, 인간적인 정이 흐르고 있어 수필의 향기를 낸다고 하겠다. "몸이 불편하신 어머니를 모셔다 드리느라 경로당 출입이 잦아졌다."는 서두 문장 한 부분을 살펴보아도 작가가 인생에 대하여 얼마나 깊이 생각하고 있는지, 그리고 충실한 삶을 통한 예지를 피력하고 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자신의 이야기가 자꾸만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자 할머니의 경로당 출입이 뜸해졌다. 어쩌다 밭에서 할아버지라도 만나면 발길을 돌려 얼른 집으로 들어가는 모습도 눈에 띄었다. 등이 굽어 빨리 걷지도 못하면서 허둥대며 걸어가려니 애꿎은 팔 동작만 커지는 할머니, 그런 할머니를 부르지도 못하고 우두커니 서서 바라보던 할아버지의 눈길은 할머니가 문을 닫을 때까지 거두어지지 않았다. 그런 두 분의 모습을 보고 온 날은 알 수 없는 조바심에 목이 탔다.
- 정선모의 <아이롱 할머니> 중에서 -
유희적인 인간이 즐기는 것에 하나가 험담과 조롱의 경쟁이라고 할 수 있는 놀이다. 물질 만능으로 인해 인간의 본성적인 순수를 잃어버린 현대인들은 다른 사람의 과실을 말함으로써 자신의 과실을 덮거나 씻어내려 한다. 아니면 그 속에서 자신을 위로한다. 세상의 절반이 다른 절반을 비웃는 세상이 현대 사회다. 모든 일을 자기 기준으로 보려고 하고, 자기 생각대로만 결정하려는 사람들의 모습이 수필가의 눈에 포착된 것이 바로 <아이롱 할머니>다. 사람들은 흔히 한 쪽 면에서, 특히 자신을 기준으로 해서 대상을 바라보는 경향이 있다. 위 인용된 수필은 자신을 기준으로 남을 평가하는 우리들의 모습을 잘 보여준다. 내가 하면 로맨스고, 남이 하면 스캔달이다. 이 수필은 이런 현대인의 속물 근성을 사랑이라는 겉주제를 통해 보여주고 있다. 이런 남을 배려하지 않는 자기 중심적인 생각이 소외와 단절이라는 현대적 특성을 낳는 게 아닌가 생각되게 한다.
사랑이 남발되는 시대에는 진실한 사랑의 모형을 찾는다는 일이 쉬운 일이 아니다. 눈에 드러나는 사랑만이 사랑은 아니다. 순수하지 않는 사랑은 한낱 향락적 행위에 지나지 않는다. 작가는 경로당을 드나들면서 전해들은 이루어지지 못한 슬픈 사랑 이야기를 드라마틱하게 서사구조로 전개하는 데 성공함으로써 유희적 인간의 전형을 창조하고 있다. 이 작품은 현진건의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에 등장하는 옥이 어머니처럼 표현에 서툰 한 할머니와 할아버지의 지순한 사랑 이야기를 관찰자 시점으로 바라보고 쓴 글이다. 사랑의 마음에 이끌려 할머니의 텃밭을 몰래 가꾸어 주는 한 할아버지의 순애보가 주변 사람들 입방아에 오르자, 할머니는 밭에 나가지 못하게 되고,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지만 그런 일이 있고 난 후 갑자기 할머니가 죽게 되고, 이후 황폐화된 텃밭을 할아버지가 백일홍과 분꽃을 심어 가꾼다는 스토리 전개가 잔잔한 감동을 안겨준다.
할머니는 왜 목숨을 잃었는가. 작가는 그 죽음의 원인을 밝히지 않음으로써 다의적인 해석과 추측을 가능하게 하고 있다. 이 작품을 통해서 판단해 볼 때, 현대인은 '혼자서만 깨끗한 체 더럽다고 욕해 온' 험담과 비방의 공범자들이다. 현대인 특히 유희적 인간에 있어, 친구의 성공은 어떤 의미로는 유쾌할 수가 없을지도 모른다. 그것은 나의 성공이 아닌 너의 성공이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의 로맨스는 크게 부풀려진다. "밭가에 할아버지가 백일홍을 심었단다" "분꽃도 몇 포기 구해다 심었다지, 아마?" 처음엔 이런 이야기가 확대 재생산되어 할머니의 귀에 들어가게 되고, 전혀 예상도 못한 일들이 그럴 듯하게 시나리오로 작성되어 경로당에 유포된다. 주위 사람들이 모르는 체 눈감아 주었다면 할머니는 더 오래 살 수 있지는 않았을까? 작가는 이 수필을 통해 사생활에 대한 우리 사회의 지나친 관심기울이기와 엿보기가 우리들의 일상으로 파고들고 있음을 따갑게 시사하고 있다.
때로는 그분이 안타깝게 여겨질 때도 있었다. 행인들의 취향과 적당히 타협하면 훨씬 수월하게 바구니를 채울 수 있을 터였다. 하지만 몇 시간이고 서서 연주한 대가가 고작 쌀 한 봉지 값이 못된다 하더라도, 자신의 음악이 노점상들이 파는 싸구려 물건 취급당하는 걸 못 견뎌한 그분의 고집이 그 시절 유난히 돋보였다. 굳이 음악을 듣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모습을 확인하러 일부러 길을 돌아 그 지하도를 건너는 지도 몰랐다.
- 정선모의 <거리의 악사> 중에서 -
신념에 어긋나는 것을 강요하는 데 대한 굽힘 없는 저항은 고상한 태도다. 작가가 이 작품의 주제로 내세우고 있는 것은 신념의 가치다. 이는 쉽게 변절하고 원칙 없이 타협하는 가벼운 사람들에게 신조를 지키는 데 필요한 교훈이 될 수 있다. 거리의 악사는 단 한 번도 대중가요를 연주한 적이 없다. 어쩌다 지나던 취객들이 호기롭게 지폐를 흔들며 대중가요를 청해도 못 들은 척한다. 앞에 놓여진 바구니에 찬바람이 넘나들어도, 사람이 오든 가든 개의치 않고 눈을 지그시 감은 채 연주에만 몰두하는 거리의 악사, 작가는 누가 듣던 말건 끝끝내 자신의 음악만을 연주하던 옛날 거리의 악사가 가슴에 통증이 일도록 그립다는 얘기 속에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감춰두었다. 지하도에서 음악을 팔며 구걸하는 자에게 과연 자존심이 중요할까?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생활 유지에 필요한 최소한의 물질적 소득을 얻으려는 노력을 포기하는 사람을 제재로 사용하여 현대 독자에게 신념과 지조를 지키는 사람이 되라고 설득한다. 많은 독자들은 작가의 설득에 공감하게 된다. 끊임없이 남과 타협하며 현실에 적응해야 하는 보통 사람들은 때때로 자신의 소중한 신념과 자존심을 버려야 하는 아픔과 비굴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극단적으로 비참한 상황에서도 신념을 버리지 않고 자존심을 대신 지켜 주는 것처럼 여겨질 수 있다. 이 작품이 독자에게 공감을 주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삶은 누구에게나 소중할 수밖에 없고, 그 소중한 가치는 인간 본연의 모습을 지켜나갈 때 가능하다. 문학은 하나의 삶밖에 없는 사람들에게 또 하나의 삶의 기회를 제공해주는 수단이라는 것을 말해주는 좋은 수필이다.
놀이란 현실 속의 인간이 일정한 시간 현실적 이해관계를 떠나 그 행위 자체에 기꺼이 몰두하고 나름의 자율적 규율 속에서 서로 겨루기, 내기, 속이기, 험담하기 등을 즐기는 행위이다. 따라서 모든 예술 행위가 그렇거니와 순수한 의미에서의 시는 본질적으로 놀이 정신에서 출발한다는 주장이 있을 수 있다고 하겠다. 호이징아는 모든 시는 원래 놀이에서 탄생되며, 신의 예배로서의 신성의 놀이, 구애라는 의식적 놀이, 자만, 험담, 조롱의 경쟁이라는 투쟁적 놀이, 재치와 기지를 비교하는 재빠른 놀이, 이 모두가 탄생기의 시와 밀접한 상관성이 있다고 하고, 문화의 진전과 사회의 복잡화에 따라 시의 놀이성이라는 것이 얼마나 보존되고 있는가 하는 회의적인 질문을 던진다. 호이징아는 참된 놀이를 하기 위해서는 어린 아이들처럼 놀아야 하며 놀이의 특성은 비밀스런 분위기에 감싸이는 것이며 그것은 일상 생활의 법칙이나 습관이 일시적으로 소멸하는 세계라 하였다. 김수영의 시에서는 이런 원래적 놀이에의 애착이 직접적으로 드러난다. 그는 시작을 통해서 본래적 놀이 정신을 그리워하고 실천하고 옹호한다. 이러한 놀이는 어려운 시대를 사는 한 놀이인의 상징의 원천이요, 생활의 위안처가 되고 있다는 측면에서 시가 하나의 구원 수단으로서 기능한다.
나는 아직도 앉는 법을 모른다. / 어쩌다 셋이서 술을 마신다 둘은 한 발을 무릎 위에 얹고 / 도사리지 않는다 나는 어느새 남쪽식으로 / 도사리고 앉았다 그럴 때는 이 둘은 반드시 / 이북 친구들이기 때문에 나는 나의 앉음새를 고친다. / 8.15 후에 김병욱이란 시인은 두 발을 뒤로 꼬고 언제나 일본 여자처럼 앉아서 변론을 일삼았지만 / 그는 일본 대학에 다니면서 4년 동안을 제철회사에서 노동을 한 강자다.
김수영의 <거대한 뿌리> 중 일부
김수영의 시는 대체로 긴 편이다. 위의 시에서도 놀이에의 애착이 잘 나타나 있다. 묘사를 통한 서정의 구축에 힘쓴다기보다는 체험적인 일상의 몸짓의 관조를 통해 나타내고자 하는 상징을 서사적으로 언술한다.
팽이가 돈다. / 어린 아이이고 어른이고 살아가는 것이 신기로워 / 물끄러미 보고 잇기를 좋아하는 나의 너무 큰 눈 앞에서 / 아이가 팽이를 돌린다. / 살림을 사는 아이들도 아름다웁듯이 / 노는 아이도 아름다워 보인다고 생각하면서 / 손님으로 온 나는 이집 주인과의 이야기도 잊어버리고 / 또한번 팽이를 돌려주었으면 하고 원하는 것이다. / 도회 안에서 쫓겨 다니는 듯이 사는 / 나의 일이며 / 어느 소설보다도 신기로운 나의 생활이며 / 모두 다 내던지고 / 점잖이 앉은 나의 나이와 나이가 준 나의 무게를 생각하면서 / 정말 속임없는 눈으로 / 지금 팽이가 도는 것을 본다.
김수영, <달나라의 장난> 일부
김수영의 시 <달나라의 장난>은 그 제목부터가 그렇거니와 본래적 놀이에의 향수가 잘 그려져 있다. 그는 위의 시와 같이 비교적 긴 시형 속에 한 순간이나 체험이나 순간적으로 환기되는 자극적인 정서를 복원하기 위해 은폐되어 있는 자신의 전체험을 동원하여 개진해간다. 그는 팽이를 돌리며 노는 아이에게서 오랫동안 그리워하기만 해왔던 순수한 여유의 시간을 만난다. 그것은 소설보다 복잡하고 각박한 인생을 신기롭게 보게 하며 여유 있는 별세계로 인도한다.
유희적인 인간이 즐기는 것에 하나가 험담과 조롱의 경쟁이라고 할 수 있는 투쟁적 놀이다. 물질 만능으로 인해 인간의 본성적인 순수를 잃어버린 현대인들은 다른 사람의 과실을 말함으로써 자신의 과실을 덮거나 씻어내려 한다. 아니면 그 속에서 자신을 위로한다. 세상의 절반이 다른 절반을 비웃는 세상이다. 모든 일을 자기 기준으로 보려고 하고, 자기 생각대로만 결정하려는 사람들의 모습이 시인의 눈에 포착된다.
내가 바삐 걷고 있을 때 / 내 앞을 천천히 걸어가는 사람들을 보면 / '저들은 왜 저렇게 한가할까' / 짜증이 나다가도, / 내가 천천히 걷고 있을 때 / 내 옆을 스치며 바삐 걸어가는 사람들을 보면 / '저들은 뭐가 저렇게 바쁠까' / 웃음이 나온다.
이상호의 <아집에 대하여> 중 일부
사람들은 흔히 한 쪽 면에서, 특히 자신을 기준으로 해서 대상을 바라보는 경향이 있다. 위 시는 자신을 기준으로 남을 평가하는 우리들의 모습을 잘 보여준다. 내가 바쁠 때는 남들이 한가한 것이 이상하고, 내가 한가할 때는 남들이 바쁜 것이 이상해 보인다. 이런 자기 중심적인 생각이 소외와 단절이라는 현대적 특성을 낳는 게 아닌가 생각된다.
우리는 비방과 험담을 혐오하면서 동시에 즐긴다. 지지하는 정당이 없다는 것이 지식인의 자랑으로 통하는 나라에 우리는 살고 있다. 정치인이야말로 유희적 인간이다. 그들은 비방과 험담을 즐긴다.
준 것은 적고 / 받은 것은 많았다. / 세상이여 // 감사하는 마음보다 / 원망하는 마음만 컸다. / 세상이여 // 모든 잘못은 / 네 탓이라 핑계됐다 / 세상이여 // 혼자서만 깨끗한 체 / 더럽다 욕해 온 / 빚진 세상이여
허영자의 <빚진 세상> 전문
현대인은 '혼자서만 깨끗한 체 더럽다고 욕해 온' 험담과 비방의 공범자들이다. 현대인 특히 유희적 인간에 있어, 친구의 성공은 어떤 의미로는 유쾌할 수가 없을지도 모른다. 그것은 나의 성공이 아닌 너의 성공이기 때문이다. 사회가 민주화되고 지방 자치가 뿌리를 내리면서 선거가 많아진 세상이다. 초등학교 어린이 회장도 직접 학생들의 손으로 뽑고, 교육감도 선거로 뽑는다. 어떤 선거이든 간에 선거에 나서는 사람은 비방의 대상이 된다. 사돈의 팔촌까지, 웃대의 조상까지 물고 늘어지며 험담과 유언비어로서 상대방을 헐뜯는다. 젊은 시절의 작은 실수가 크게 부풀려진다. 전혀 예상도 못한 일들이 그럴 듯하게 시나리오로 작성되어 유포된다. 정치판에서 난무하던 사라져야 할 비방 문화가 우리들의 일상으로 파고들었다.
살아 갈수록 기가 차다. / 깔아뭉개기 좋아하는 세상 / 속 시원히 짓밟혀 주겠다 / 지독한 뻘밭 떠밀어 넣고도 / 한사코 짓밟고 싶다면 / 더러운 발굽으로 자근자근 밟으시지 / 한낱 초라한 비명 / 거부의 몸부림도 보내지 않으리 / 제풀에 꺽이고말 저 광기의 눈초리 / 짓밟히고 싶다. 까무러치도록 / 그러나 짓밟히지 않겠다 / 혀를 깨물어 죽는 한이 있어도 / 따뜻한 선택 저버리지 않겠다 / 펄펄한 기 무너뜨리는 길 / 무참히 짓밟히기 / 통쾌하면 오냐오냐 밟으시지 / 고개를 낮추어야 할 사람 몰려오고 있다.
김희영의 <짓밟히기-질경이> 전문
깔아 뭉개기 좋아하는 세상과 사람을 향한 해학과 풍자가 넘치고 있는 김희영의 <짓밟히기>는 혀를 깨물어 죽는 한이 있어도 따뜻한 선택을 저버리지 않겠다는 결연한 의지가 돋보인다.
2. 활동의 삶
현대는 표현의 시대다. 산다는 것은 자기를 표현하는 것이다. 만물은 저마다 저다운 언어와 자기 나름의 방식으로 자기를 표현한다. 태양은 밝은 빛과 뜨거운 열로써 자기를 표현한다. 꽃은 아름다운 빛깔과 모양과 향기로 자기를 표현한다. 무릇 사물이 존재한다는 것은 자기를 표현하는 것이요, 개성을 발휘하는 나다운 특색을 나타내는 것이다. 수필 쓰기는 인간의 표현 욕구에 따르는 행위다. 이런 측면에서 인간은 자기 연출로 자기 메시지를 담아 남을 설득하고 대화하고 사랑하며 행복하게 나누는 공동의 생활을 해야 하는 사회적 동물이다. 누구든지 이 세상에 태어나서는 '나' 아닌 다른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살게 마련이다.
사람들의 생활은 세속적인 삶에 머물러 있다. 세속적인 삶의 가치를 추구하기 위하여, 직업을 구해 일을 하고, 좋은 사람을 만나 가정을 꾸려 살고 싶어한다. 사회적인 명예와 부를 갖기 위해 사회적 활동에 나선다. 욕망의 주체로서 술을 마시고 노래를 부른다. 인생이란 잡지의 표지처럼 통속적이라는 것은 인간의 삶 또한 세속적으로 흐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말해 준다. 허학수는 교장 출신의 수필가로서 이번 한국수필문학상 심사평에서 "기교보다는 열정과 순수가 빚은 표현과 위선과 가식을 배제한 진솔성이 매우 돋보이는 특징을 지닌다"는 평가를 받은 바 있다. 이 분 수필의 특성은 무엇보다도 활력이 넘치는 문체로 내면의식을 진솔하게 표출하는 데에 있다고 하겠다. 특히 <황진이, 그런 여자라면>은 시적이면서도 풍류적 멋스러움이 해학적으로 스며있는 작품이다.
당대의 장부라고 호언장담하던 영웅호걸도 진랑의 슬하에서는 사족에 쥐가 났다고 한다. 하도 유명하니 어느 때 나서 어느 날 죽었는지 누가 감히 단언하는 이도 없다. 요즈음 아무리 둘러봐도 황진이 같은 여자는 없을 것 같다. 만약 그런 여자가 있다면 지금이라도 당장 달려가고 싶다. 그리고는 내가 하고 싶은 모든 것을 사양하지 않으리라. 누가 무슨 말로 어떻게 빈정거리더라도 거기에 이목을 할애하거나 개의치 않겠다.
- 허학수의 <황진이, 그런 여자라면> -
누군가 남자의 행복은 미인의 옆에 있는 것이라 했다. 그것은 남자에게 축복의 조건이기도 하다. 허학수는 진정으로 용기 있는 자다. 평자에게 용기란 가치 있다고 생각되는 일을 하기 위해 덜 가치 있는 것을 과감히 버리는 개념으로 이해되기 때문이다. 정사 장면의 은밀한 에로티시즘은 "남자란 매한가지, 생을 희롱하는 잉여의 정열이 웃음과 교태로 어우러진 어느 날, 천마산 청량봉의 선방에는 향내 짙은 체취에 또 다른 하나의 남자가 되어버린 파계승의 꼬리표가 지족선사의 가슴만 억누르고 있었다."라는 멋스런 문체에 녹아 고상하고도 고결한 풍류로까지 승화된다. '나'의 참모습은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나타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좋은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는 것이 보람된 길이라고 했다. 그런데 하학수는 가파르고 험난한 인생 행로에 이웃하는 따뜻한 눈길과 손길이 없더라도 절세 미인의 곁에서 살 수만 있다면 어떤 희생과 고통도 감수할 수 있다는 신념에 찬, "만약 그런 여자가 있다면 지금이라도 당장 달려가고 싶다. 그리고는 내가 하고 싶은 모든 것을 사양하지 않으라."라는 파격적인 선언을 한다. 대장부다운 기개가 넘친다. 이런 역행성이 주는 맛은 수필의 향기요, 이 글을 읽는 가장 큰 매력이다.
오늘은 '교육대토론회' 날이다. 연수의 종말을 바라보면서 나는 토론자의 마이크를 힘껏 잡았다. 현실과 거리가 먼 개혁의 잣대로 요령을 부리는 무지한 집단들이 차라리 측은하고 저주스러울 뿐이라고 열을 올렸던 것이다. 이 세상 어느 누가 신성하고 전문적인 교육의 척도를 시장원리로 경제논리에 비교하는 잡배들을 보았는가. 그것도 모자라 나이가 많다고 무조건 쫓아내는 불효불륜의 무리들이 무슨 체면으로 교육을 개혁하느냐고 반문하고 또 반문하였다.
- 허학수의 <점수 먹고 사는 사람들> 중에서 -
사회의 모순에 대항하고, 현실의 부조리에 언어로 참여하는 것도 정치적 인간이 하는 일이다. 작가는 현실 정치의 도피자로서 언어로 말할 수밖에 없다. 작가란 말과 글로써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는 지식인이다. 허학수는 '점수라는 단어를 통해 현실의 모순을 냉소적으로 풍자하고 있다. 언어의 표현이 억압되는 시대는 풍자가 성행한다. 인간이 다른 동물과 다른 이유로 흔히 드는 것이 언어를 쓴다는 것이다. 언론의 자유는 인간에게 주어주는 기본권이다. 수필가는 '보이지 않는다'의 눈으로 비뚤어진 현실을 분노의 힘으로 정조준하고 있다. 현실의 모순과 억압을 인식하지 못하는 사회는 죽은 사회다. 정의롭지 못한 무리들이 현실의 정치를 어지럽히고 있는데, 교육의 수장이 현실 정치 세력과 야합하는데 수필가가 입을 다물어서는 안 된다. 그런 사회는 암흑의 사회다.
이 수필은 내용으로 봐서 김대중 정권의 전반기 이해찬 장관의 몰아부치기식 교육개혁이 단행될 때 쓰여졌다. '교육'의 '교'자도 모르는 사람이 장관이나 행정직에 앉아 있으니, 교육 현장이 붕괴되었다는 진술에 공감한다. 이 작품은 불의 앞에 당당히 자신의 태도를 나타낸 시민의식을 담고 있는 작품이다. 작가는 서두를 '인생이란 시험이요, 점수요, 경쟁이다.'라는 말로 연다. 이를 통해 시대적 상황의 분위기가 꽁꽁 얼어붙었다는 것을 암시한다. '점수'의 반복 구조는 당시 사회가 경쟁논리의 지배 하에 있었음을 말한다. '시험에 불안하고 점수에 매달린다'는 것은 인위적인 세대교체론에 떠밀려 나가는, 현세적 삶에 전전긍긍하는, 현실적으로 억압된 사회에서 죽어지내는 나이 든 기성세대의 불안심리와 불만을 나타내는 말이다.
교육이란 무엇인가? 작가는 교육의 본질을 수필이라는 형식을 통해 말해 왔다. 이 작품은 교장 연수 시험에 시달리는 자신의 내면 풍경을 진솔하게 드러냄으로써 끝없이 흘러가는 인생 유전에 대한 연민을 토로한 수필이다. '인생을 하나의 출생에서부터 죽음에 이르기까지 점수에 의해 살고 죽는 궤도적인 삶'의 길로 보고 그 힘들고 고된 길을 숙명적으로 가야하는 교육자들의 슬픈 운명을 그리고 있다. 이처럼 괴롭고 힘든 것이 인생이고 또한 교육자의 길이지만 내가 입술을 댔던 낡은 사발에 누군가 또다시 입술을 대는 것처럼 인생은 영원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다고 어찌 부조리한 현실을 보고만 있을 것인가. 이 글에는 한 교육자의 교육에 대한 사랑과 함께 서민적인 삶의 애잔함이 녹아 있다.
인간은 사회적, 정치적 동물이다. 누구든지 이 세상에 태어나서는 '나' 아닌 다른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살게 마련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의 생활은 세속적인 삶에 머물러 있다. 세속적인 삶의 가치를 추구하기 위하여, 직업을 구해 일을 하고, 좋은 사람을 만나 가정을 꾸려 살고 싶어한다. 사회적인 명예와 부를 갖기 위해 정치적 활동에 나선다. 욕망의 주체로서 술을 마시고 노래를 부른다. 인생이란 잡지의 표시처럼 통속적이라는 것은 인간의 삶 또한 세속적으로 흐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말해 준다.
한 잔의 술을 마시고 /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와 / 목마를 타고 떠난 숙녀의 옷자락을 이야기한다. / 목마는 주인을 버리고 그저 방울 소리만 울리며 / 가을 속으로 떠났다. 술병에서 별이 떨어진다 / 상심한 별은 내 가슴에서 떨어진다.
박인환의 <목마와 숙녀> 일부
박인환은 전후의 허무주의와 도시적 서정에 바탕을 둔 페이소서를 담은 시들을 썼다. 전위적 기법을 실험하면서 문명비판적인 주제를 즐겨 다룬 시인이다. 목마가 주인을 버리고 가을 속으로 떠났듯이 미래에 대한 희망으로 예견됐던 우리의 삶도 전쟁이라는 부조리한 현실을 맞아 파괴되어 버렸다는 시인의 비극적 현실인식이 목마와 숙녀로 표출되고 있다. 버지니아 울프가 결국은 자살로 자신의 삶을 끝내버린 것과 같이 인생에서 절대 가치는 없다는 허무적이고 염세적인 시인의 사상이 이 시의 '세월은 가고 오는 것', '인생은 외롭지도 않고 그저 잡지의 표지처럼 통속하거늘', 페시미즘의 미래' 등의 구절에 잘 드러나 있다.
'나'의 참모습은 '너'와의 관계 속에서 나타난다. '나'는 '너'를 위하여, '너'는 '나'를 위하여 존재할 때, 긴장과 갈등이 아닌 따뜻한 인정과 포근한 사랑이 있는 조화로운 공동체를 이루어 나갈 수 있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좋은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는 것이 보람된 길이라고 했다. 가파르고 험난한 인생행로에 이웃하는 따뜻한 눈길과 손이 있음은 축복인 동시에 행복의 조건이기도 하다.
그러나 현대는 넘쳐나는 물질의 범람으로 위기를 맞고 있으며, 헤퍼진 정신의 범람으로 어지러워졌다. 일회용의 범람과 새것 선호는 우리 정신의 황폐화가 얼마나 심한가를 암시한다. 옷이 떨어지고 낡아서 버리는 것이 아니라 유행이 지나서 버리고, 그릇이 깨어져서 버리는 것이 아니라 유행에 뒤진다고 새것으로 바꾸는 세상이다. 의자가 부서져서 버리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것이 아니라서 버린다. 어지간한 것이 아니면 고물장수 아저씨도 헌 가구나 책상을 가져가지도 않고 오히려 운반 비용을 청구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좋은 세상이 된 것만은 사실이고, 또 편해진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시인은 예기치 않은 순간에 볼 수 없었던 것을 보게 되고 들을 수 없었던 소리를 듣게 된다. 명예도 지위도 한갓 모였다 흩어지는 구름에 다름 아님을 알게 된다. 모든 미천한 조건은 버려야 됨을 알게 된다. 미천한 조건들, 다시 말해 세속적인 가치에 매달려 송두리째 전부를 바쳐온 날들이 축복의 삶을 가져다주지 못했음을 깨닫는다. 김상용의 <남으로 창을 내겠소>는 끈질기고 숨막히는 현실과 자연을 대비함으로써 시인은 우리를 살게 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깨닫게 하고 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높은 벽을 쌓고 물질에만 집착하는 세속적인 삶을 사는 사람들에게 시인은 청빈한 정신을 일깨워 준다.
남으로 창을 내겠소. / 밭이 한참갈이 / 괭이로 파고 / 호미로 김을 매지요 // 구름이 꼬인다 갈 리 있소 / 새 노래는 공으로 들을라오 / 강냉이가 익걸랑 / 함께 와 자셔도 좋소. // 왜 사냐건 / 웃지요.
김상용의 <남으로 창을 내겠소> 전문
햇빛 잘 드는 따뜻한 곳, 남으로 향한 창은 시인이 그리는 사랑의 세계다. 흙을 사랑하면서 흙 속에서 욕심없이 살려고 하는 시인은 누가 자신에게 왜 사느냐고 묻는다면, 대답 대신 그저 웃어버리려 한다. 대답 대신 웃어버리는 시인의 웃음은 그냥 웃음만은 아니다. 그것은 어쩌면 세상에 대한 냉소이며 거부이며 용서일 수도 있다. 혼탁한 세상, 소용돌이치는 시대의 물결을 바라보는 시인은 말을 잃는다. 웃음으로 잃어버린 말을 대신할 수 있는 사람이 아름답다.
사회의 모순에 대항하고, 현실의 부조리에 언어로 참여하는 것도 정치적 인간이 하는 일이다. 시인은 현실 정치의 도피자로서 언어로 말할 수밖에 없다. 시인은 말과 글로써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는 지식인이다. 김수영은 <눈>이란 시를 통해 현실의 모순을 냉소적으로 풍자하고 있다. 언어의 표현이 억압되는 시대는 풍자가 성행한다. 인간이 다른 동물과 다른 이유로 흔히 드는 것이 언어를 쓴다는 것이다. 언론의 자유는 인간에게 주어주는 기본권이다. 신체적 억압 못지 않게 언론의 탄압은 인간의 영혼을 괴롭힌다. 현실의 모순과 억압을 인식하지 못하는 사회는 죽은 사회다. 정의롭지 못한 무리들이 현실의 정치를 어지럽히고 있는데, 시인이 침묵하거나 현실 정치 세력과 야합하는데 시인이 입을 다물어서는 안 된다. 그런 사회는 죽은 시인의 사회다.
눈은 살아있다 / 떨어진 눈은 살아있다 / 마당 위에 떨어진 눈은 살아 있다 // 기침을 하자 / 젊은 시인이여 기침을 하자 / 눈 위에 대고 기침을 하자 / 눈더러 보라고 마음 놓고 마음 놓고 / 기침을 하자
김수영의 <눈> 일부
이 시는 1956년에 발표된 것으로 이승만 정권의 후반기에 쓰여졌다. 세계의 힘 앞에 당당히 자신의 태도를 나타낸 시민의식을 담고 있다. '눈이 살아 있다'라는 말이 반복되고 잇는데, 이 말이 반복되면서 일상적 현실에서 '눈은 죽었다'는 의미를 독자에게 강하게 보여 준다. 이 때 '눈'은 '살아 있다'라는 말과 의미연결이 되면 눈(目)의 의미가 되어 죽지 않고 살아서 무엇인가를 바로 보고 있다는 의미로 읽힌다. 그러나 '떨어진 눈', '마당 위에 떨어진 눈'과 연결하면 이 말은 눈(雪)의 의미로서 이 때의 눈은 때묻지 않은 순수하고 순결의 의미를 가진다. 시인은 '기침을 하자'는 말을 통해 시대적 상황의 분위기가 꽁꽁 얼어붙었다는 것을 암시한다. '기침을 하자'의 반복 구조는 당시의 사회가 기침을 할 수 없는 사회임을 말한다. '젊은 시인'은 현세적 삶에 전전긍긍하는, 현실적으로 억압된 사회에서 죽어지내며 기침마저 못하는 나이 든 기성세대에 대비되는 말이다.
삶이란 인생이란 무엇인가? 시인은 시를 통해 인생의 길을 시라는 형식을 통해 말해 왔다. 김용호의 <주막에서>는 주막을 시적 소재로 하여 끝없이 흘러가는 인생 유전에 대한 연민을 토로한 시다. 인생을 하나의 나그네 길로 보고 그 힘들고 고된 길을 숙명적으로 가야하는 인간들의 슬픈 운명을 그리고 있다.
어디든 멀찌감치 통한다는 / 길 옆 / 주막 // 그 / 수없이 입술이 닿은 / 이 빠진 낡은 사발에 / 나도 입술을 댄다 // 흡사 / 정처럼 옮아오는 / 막걸리 맛 // 여기 / 대대로 슬픈 노정이 집산하고 / 알맞은 자리, 저만치 / 위의 있는 송덕비 위로 / 맵고도 쓴 시간이 흘러가고 // 세월이여 // 소금보다도 짜다는 / 인생을 안주하여 / 주막을 나서면 // 노을 비낀 길은 / 가엾이 길고 가늘더라만 // 내 입술이 닿은 그런 사발에 / 누가 또한 닿으랴 / 이런 무렵에
김용호의 <주막에서> 전문
이 시는 성경에 나오는 산상수훈처럼 인생을 소금에 비유하고 있다. 물론 이때의 비유는 세상의 소금이 되라는 투의 교훈이 아니라 소금처럼 짜고 매운, 세상사의 온갖 영욕을 겪는 인생이라는 의미다. 송덕비는 권력과 명예, 혹은 부의 상징이다. 그러나 그러한 세속적인 가치도 흐르는 세월 앞에서는 한낱 무용지물일 뿐이다. 더군다나 시인의 눈에는 그런 것들이 더더욱 하잘 것 없을 뿐이다. 전체적인 문맥으로 봐서 부귀영화를 한낱 무용지물로 만들어 버리는 세월의 위대성에 대한 감탄의 흔적도 없지 않다. 이처럼 괴롭고 신산스러운 것이 인생이고 또한 삶의 길이지만 내가 입술을 댔던 낡은 사발에 누군가 또다시 입술을 대는 것처럼 인생은 영원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서민적인 삶의 애잔함이 녹아 있다.
3. 성찰의 삶
아리스토텔레스는 가장 행복한 삶은 관조적 삶이라 했다. 수필가에게 있어 삶은 수필 창작과 결코 분리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이 말은 수필 창작의 대상이 생활이라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수필가는 생활을 대상으로 하여 그 현상의 이면을 들여다보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 생활로부터 벗어나 삶의 민활성을 되찾는다. 이는 수필창작을 통해서 진정한 삶에 대한 감각을 얻는다는 의미다. 따라서 좋은 수필은 삶과 문학이 상호 삼투되어 서로가 유리되지 않도록 실천하는 과정에서 얻어지는 것이다. 일상과 문학의 통합이 바람직하게 실천되기 위해서는 일상 경험의 성찰이 문학적 방식으로 표현되어야 한다.
수필 창작은 세상을 읽는 데서부터 출발한다. 수필은 개념으로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감각으로 꾸며지기 때문이다. 수필은 대체로 세상 읽기의 소산이다. 따라서 수필은 삶의 한 모습인 것이다. 수필가는 사회 현상이나 자연 현상, 그리고 개인적 체험 즉 삶의 체계 속에 내재한 여러 기억들을 읽어낸다. 수필가는 이러한 삶의 성찰을 통하여 일상적 삶 속으로 매몰되기 쉬운 본성적 감성을 찾아낸다. 우희정은 무너진 시대 안에서의 주체적 자아와 정서를 모국어로써 견결히 유지하려 한 작가다. 그의 수필에서 집요할 정도로 유지되고 있는 주체적 자아 복원의 수필정신은 그것이 상실의 시대를 배경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작품 <자라지 않는 아이들>은 행복 상실의 정서와 이러한 생활을 숙명으로 받아들이는 화자 '나'의 내면에 대한 깊은 성찰이 전면적으로 드러난 작품이다.
딸과 아들이 다 장성하였건만 꿈 속에서는 아직도 자라지 않은 어린아이라는데 내 고민이 있다. 처음 내가 그 꿈을 꾸기 시작한 것은 정말 아이들이 어렸을 때였다. 그 이후 줄기차게 같은 꿈을 꾸지만 꿈 속의 내 아이들은 성장을 멈춘 채 나를 안타깝게 한다.
- 우희정의 <자라지 않는 아이들> 중에서 -
이 글은 '쉽게 잠들지 못하고 그나마 살풋 잠이 들면 금세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꿈 속에 가장 빈번하게 나타나는 장면은 업고 걸린 두 아이와 허둥대는 나의 모습이다'라는 서두의 전개예고를 통해, '왜 꿈 속의 아이는 그 일곱 살에서 더 이상 나이를 먹지 않는 것일까'라는 의문을 풀어 가는 과정을 수필화하고 있다. '나'는 고통스런 과거에서 빠져나왔다고 생각했는데, 자신의 자화상 같은 그림을 보고 던지는 딸아이의 말을 듣고 작가는 자신의 무의식 속에 고통스런 과거가 내재해 있다는 것을 인식한다. 꿈이란 무의식 속에 잠재된 의식의 반영이란 인식 속에 작가는 삶에 대한 의지를 확고히 다진다. 한때 '늦게 돌아오는 '나'를 대신해 밥을 짓던 일곱 살짜리 딸아이가 석유곤로 앞에서 성냥불을 켜지 못해 울고 있던' 암울한 상황에서 아이를 모성의 원리로 돌볼 수 없었던 부모로서의 무기력함과 이를 반성하는 작가의 내면 목소리가 잘 드러난 작품이다. '인간이 고통스런 현실의 상황을 떠나 있어도 무의식은 아직도 그곳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그것의 긴장이 풀릴 때마다 꿈이란 방
식을 빌어 솟구쳐 오르는 것 같다'는 작가의 진술은 충분한 공감대를 형성한다.
그런데 작가는 자라지 않는 아이들의 꿈을 앞으로도 계속 긴 세월 동안 계속 꾸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더 이상 내 무의식 속에 새롭게 각인 될 고통은 없을 테니까"라는 희망적인 예측으로 결말을 장식한 작가는 꿈 속 "자라지 않는 아이들"을 현실 속의 "자라지 않는 고통"으로 환치하면서 깨어있는 의식을 갖고 희망에 찬 삶을 꿈꾼다. 일곱 살짜리 아이에 얽힌 일화와 그림을 접하게 된 사연, 고통스런 삶의 흔적을 들추는 용기, 그리고 희망적인 삶의 태도가 촉촉한 인간애의 향기로 묻어난다. 비록 작품의 표면에는 드러나지 않았지만, 행간에서 한국 여인의 질긴 모성애를 느낄 수 있었기에 독자들은 가슴 찡한 감동을 맛보는 즐거움을 누리는 것이다. 원고지는 몇 장에 지나지 않는데, 두 아이와 엄마 사이에 흐르는 사랑의 감정과 세상을 힘차게 살아가려는 작가의 힘찬 발걸음소리가 지축을 울리듯 크게 들리는 것은 이 수필이 갖는 감동의 힘이다. 한 편의 가슴 찡한 영화를 보고 난 것 같은 여운이 내내 지워지지 않는 것은 진한 모성애 탓일 것이다. 이 수필은 좌절을 안겨주는 꿈을 삶
의 극복 의지로 이겨내는 한 여인의 모습을 그려내는 데 성공함으로써 삶의 시련과 좌절 속에서 괴로워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새로운 의욕과 희망을 불어넣어 주고 있으므로 구원의 수필로서 그 역할에 값하고 있다고 하겠다.
어이없고 황당해 의식을 겨우 회복한 동생에게 무슨 이유로 술을 마시고 오토바이를 탔느냐고 다그쳤다. 대답인 즉 축구 때문이란다. 현진건의 소설 <술 권하는 사회>에서 주인공이 허구 헌날 누가 당신에게 그렇게 술을 마시게 하느냐고 이유를 묻는 아내에게 이 사회가 술을 권한다고 변명을 늘어놓는 것은 보았지만 축구가 술을 마시게 했다니?
- 우희정의 <술 권하는 축구> 중에서 -
우희정의 <술 권하는 축구>는 삶에 대한 깊은 통찰을 통한 삶의 진정성, 경건성을 추구하고 있는 작품이다. 사람이란 물질적 현실의 토대 위에 살고 또 이를 더욱 풍요롭게 하고자 하는 본성을 지녔다. 그러나 현실에 만족하지 않고 그 현실을 반성, 비판하여 새로운 현실을 창조하고자 하는 꿈, 현재와 과거와 미래를 동시에 그리는 본능적 습관, 이들은 본질적으로 상징의 본능에 의한 것이다. 사회 현상에 대한 작가의 반응은 대체로 본성에 호소한다. 수필 창작 자체가 본성을 향한 것이라는 점에서 이러한 태도는 당연한 것이다. 모든 작가는 근본적으로 사회 비판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수필 창작의 출발은 인식하는 데 있다. 문제는 사회현상을 말하는 목소리다. 직접적으로 사회 현상을 날카롭게 지적하기보다는 문제를 상상력으로 통해서 독자가 추론할 수 있도록 하나의 상징적 체계를 이용하여 시적으로 형상화하는 것이 중요하다. '술 권하는 축구'는 우리 사회의 모순을 상징하는 말이다. 축구와 음주라는 제재로 수필을 엮어가지만, 이 작품을 통해서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우회적인 사회 비판이다. 따라서 이 글의 주제의식은 결말의, '경제, 정치, 아무리 둘러보아도 별로 통쾌한 일이 없는 요즘, 월드컵 축구가 시작되면 답답한 속내가 다스려질까?'라는 진술에 담겨 있다.
수필은 삶에 대한 관심을 나타낸 것이다. 삶에 대한 관심은 곧 작가 정신이다. 작가는 다른 사람보다 우선 높은 정신 세계를 구축해야 한다. 높은 정신세계는 수양이란 말과 체험을 내포하고 있는데, 여기서 수양이란 욕망을 절제하는 것이다. "혈중알콜 0.17로 동생의 면허증은 그 즉시 취소되었고 그에 따른 불이익으로 동생과 나는 몹시 큰 고통을 겪었다. 음주 운전만 아니었더라면 겪지 않아도 될 일이었다."는 진술은 삶의 건강성에 대한 작가의 작은 바람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이성적 삶의 실천이다. 이성은 다른 무엇보다도 인간을 인간 되게 하며 이러한 생활이 가장 행복한 생활이기 때문이다. 욕망을 절제하는 데서 얻는 갖가지 고통을 통하여 인간의 모든 품위는 닦여지고 길러진다. 그러한 고통에 길들여진 사람만이 남의 아픔을, 슬픔을, 분노를 확실히 알 수 있다. 본질적인 체험은 생존의 원천을 천착하는 것이다. 우희정은 문제를 극복하는 지혜를 제시하되, 그것이 단도직입적으로 강조되거나 강요되어지지 않고 대신 위 작품의 결미처럼 독자로 하여금 나름대로 의미를 생각해 볼 수 있도록 충분한 공간을 남겨두는데, 이 점이 매력이며, 독자들로부터 거부감이 들지 않도록 비결이 되고 있다.
시 창작은 세상을 읽기에서 출발한다. 그것이 개념으로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감각으로 꾸며지기 때문이다. 시인의 시 창작은 대체로 세상읽기의 소산이다. 따라서 시는 삶의 한 모습인 것이다. 시인은 사회 현상이나 자연현상, 그리고 개인적 체험 즉 삶의 체계 속에 내재한 여러 기억들을 읽어낸다. 시인은 이러한 삶의 성찰을 통하여 일상적 삶 속으로 매몰되기 쉬운 본성적 감성을 찾아낸다.
이렇게 하여 여러 날이 지나는 동안에 / 내 어지러운 마음에는 슬픔이며, 한탄이며, 가라앉은 것을 것은 차츰 앙금이 되어 가라 앉고, / 외로운 생각만이 드는 때쯤해서는, / 더러 나줏손에 쌀랑쌀랑 싸락눈이 와서 문창을 치기도 하는 때도 있었는데, / 나는 이런 저녁에는 화로을 더욱 다가 끼며, 무릎을 꿇어 보며, / 어니 먼 산 뒷 옆에 바우 섶에 따로 외로이 서서, 어두어 오는데 하이야니 눈을 맞을 , 그 마른 잎새에는, / 쌀랑쌀랑 소리도 나며 눈을 맞을, / 그 드물다는 굳고 정한 감매나무라는 나무를 생각하는 것이었다.
백 석의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 일부
백석은 무너진 시대 안에서의 주체적 자아와 정서를 모국어로써 견결히 유지하려 한 시인이다. 그의 시에서 집요할 정도로 유지되고 있는 주체적 자아복원의 시정신은 그것이 상실의 시대를 배경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이 시는 고향 상실의 정서와 이러한 생활을 숙명으로 받아들이는 시적 화자 '나'의 내면에 대한 깊은 성찰이 전면에 드러난 작품이다. 아내와 부모형제와 떨어져 헤매다가 어느 목수집에 세를 들어 사는 '나'는 내 슬픔과 어리석음에 눌리어 죽을 수밖에 없다는 절망감에 빠져 있다가 저녁 무렵 쌀랑쌀랑 내리는 싸락눈을 보면서, 그 눈 속에서도 의연히 견디는 갈매나무를 생각하며 자신을 다시 한번 추스린다는 내용이다. 일제 식민지의 암울한 상황에서 행동으로 실천할 수 없었던 지식인들의 무기력함과 이를 반성하는 시인들의 내면 목소리가 잘 드러난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사람이란 물질적 현실의 토대 위에 살고 또 이를 더욱 풍요롭게 하고자 하는 본성을 지닌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현실에 만족하지 않고 그 현실을 반성, 비판하여 새로운 현실을 창조하고자 하는 꿈, 현재와 과거와 미래를 동시에 그리는 본능적 습관, 이들은 본질적으로 상징의 본능에 의한 것이다. 사회 현상에 대한 시인의 반응은 대체로 본성에 호소한다. 시 창작 자체가 본성을 향한 것이라는 점에서 이러한 태도는 당연한 것이다. 모든 시인은 근본적으로 사회 비판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시 창작의 출발이 인식하는 데 있고, 인식이란 자연과 사회환경 그리고 인간의 본질 문제에 있어 비판적 성찰을 의미한다. 문제는 사회현상을 말하는 목소리다. 직접적으로 사회 현상을 날카롭게 지적하기보다는 문제를 상상력으로 통해서 독자가 추론할 수 있도록 하나의 상징적 체계를 이용하여 시적으로 형상화하는 것이 중요하다.
시 창작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눈이다. 소재나 제재를 찾아가는 눈은 매우 중요하다. 눈은 사물을 보는 감각 기관이다. 그런데 같은 눈이라해도 사람의 생각에 따라 그 눈은 얼마든지 달리 작용한다. 서산에 걸린 달이 독도 주민에게는 태극 문양으로 보일 것이고, 달동네 사람들에게는 돈으로, 선거 결과를 기다리는 후보자들에게는 원형 도표로 보일 것이다. 이는 우리 눈은 우리에게 편리한 대로 보는 습성이 있다는 것을 말해 준다. 여기서 우리는 사물을 바라보는 우리의 안목이 얼마나 폐쇄적이며 습관적인가를 각성해야 한다. 시인과 일반인과의 차이는 바로 여기에 있다. 시인의 눈은 인식을 위한 눈이다. 보이지 않는 데서 어떤 진실을 관찰, 확인 포착하려는 의지는 시인에게 필수적인 것이다. 시인의 눈은 현실세계에 상응하는 시인의 자세다. 그러나 현실을 바로 보고 투시할 수 있는 시인의 눈은 의식이 깨어 있을 때, 바르게 작용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시는 삶에 대한 관심을 나타낸 것이다. 삶에 대한 관심은 곧 작가 정신이다. 시인은 다른 사람보다 우선 높은 정신 세계를 구축해야 한다. 높은 정신세계는 수양이란 말과 체험을 내포하고 있는데, 여기서 수양이란 욕망을 절제하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이성적 삶의 실천이다. 이성은 다른 무엇보다도 인간을 인간되게 하며 이러한 생활이 가장 행복한 생활이기 때문이다. 욕망을 절제하는 데서 얻는 갖가지 고통을 통하여 인간의 모든 품위는 닦여지고 길러진다. 그러한 고통에 길들여진 사람만이 남의 아픔을, 슬픔을, 분노를 확실히 알 수 있다. 다음은 체험이다. 시인에게 있어 본질적인 체험은 생존의 원천을 천작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삶의 근본 문제와 직결되는 체험이다. 여기에는 장식과 낭만과 멋이 거부된다. 중국의 시법, 시유오기에 보면 "격약 불노"라는 말이 있다. 시가 품격을 가지지 못하면 오래가지 못함을 이르는 말이다. 문제의 본질을 바라보는 시인의 눈은 날카롭데, 그 정서는 예술이라는 프리즘에 여과되어 잔잔하면서 차분한 목소리로 독자에게 들려져야 한다는 것이다. 삶에 대한 균형 잡힌 태도가 필요한 것이다.
홍정숙 시인의 <농촌 93.5>란 시는 세상일기에서 출발한다. 시인의 관심은 폐허화되어가는 삶에 있다. 우리 삶의 터전이 훼손되고 있으며, 그래서 많은 아름다움들이 사라져가고 있음을 안타까워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폐허가 된 집 마당 잔풀 위로 / 노란 감꽃이 떨어지고 / 먼 기억들은 유순히 흙이 되어 있었다.
이러한 상실감은 곧 본성적인 삶에 대한 그리움으로 나타난다. 오늘날 현대적 삶은 사람들로 하여금 본성에 호소하도록 만들지 않는다. 오히려 거짓 욕망의 속박에서 놓여나지 못하게 한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자기의 터전을 스스로 파괴하고 훼손한다. 특히 생태 환경의 오염은 인간의 자기 파괴의 가장 구체적인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수도콕을 열면 / 뒤척이던 거대한 도시가 / 신기루처럼 부서지고 / 그 물 먹고 <위대한 시민>이라 / 가슴 쓸어 내리면 / 드린다, 잠들 수 없는 노래 / 흔들리는 의식 끝에서.
이 시의 화자는 허황된 신기루만 쫓는 현대적 삶의 모습을 말한다. 우리가 살고 있는 도시는 곧 우리의 무덤이 될 것임을 예고하고 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이러한 도시의 주인으로 스스로 위대한 시민이라는 자부를 갖고 있다. 그러나 도시적 삶은 그 화려한 겉과 달리 그 속은 썩어가고 있는 것이다. 어떤 점에서 현대의 삶은 진정한 삶이 도축당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혹은 우리가 도축을 기다리며 살고 잇는지도 모른다. 이러한 현실은 곧 생명체의 존명을 깊이 생각하지 않는다. 시인은 이러한 현실을 회의한다. 그리고 본성적 삶의 회복을 생각한다.
고은의 <나무 숲으로 가서>는 삶에 대한 깊은 통찰을 통한 삶의 진정성, 경건성을 추구하고 있다.
나는 나무와 나뭇가지와 깊은 하늘 속의 우듬지의 떨림을 보며 / 나 자신에게도 세상에도 우쭐해서 나뭇짐 지게 무겁게 지고 싶었다. / 아니 이런 추운 곳의 적막으로 태어나는 눈엽이나 / 삼거리 술집의 삶은 고기처럼 순하고 싶었다. / 너무나 교조적인 삶이었으므로 미풍에 대해서 사나웠으므로
고 은의 <자작나무 숲으로 가서> 일부
시인은 벗은 나무와 나무의 우듬지의 떨림을 보면서 지금까지 우쭐거리며 살아온 삶을 반성한다. 벗은 나무는 겨울이 오면 잎이 진다는 자연의 순환 이치를 그대로 보여 준다는 측면과 또 달리 옷을 벗음으로써 알몸을 내보인다는, 그래서 정직하다는 이중의 이미지가 중첩되어 있다. 그리고 교조적인 삶도 반성하면서 '눈엽'이나 '삶은 고기'처럼 순해지고 싶어한다. 인간 중심주의에서 탈피해 자연 만물과 융합하려는 시정신이 잘 드러나 있다. 시인은 이런 깨달음을 기반으로 해서 광혜원으로 가는 익숙한 길, 관습화된 삶을 버리고, '삭풍의 칠현산'으로 비유된 새로운 삶의 길을 택하게 된다.
IV. 현대시의 특성
스피어즈는 현대의 특성을 '단절'이라는 말로 요약한 바 있다. '단절'이란 어떤 대상과도 관계를 끊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하면 그것은 이 시대에 오면서 모든 사물들이 내적이든 외적이든 설 맺고 있던 관계를 상실하고 하나의 원자적 개체가 되어 존재함을 말한다. 일종의 불연속의 관계를 나타낸다고 할 수 있다. 인간과 인간의 관계, 인간과 자연의 관계, 인간과 사회의 관계, 나아가 인간과 신의 관계마저 그렇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현상을 소외라고 불러왔다. 현대인들이 보여주는 삶의 특성이 시 속에서 어떻게 드러나는가를 살피려는 것이 본고의 목적이었다. 현대인들이 서 있는 자리가 단절의 공간이라면, 그 공간을 시인들은 어떻게 인식하고 형상화하는가로부터 우리는 시의 의미를 밝힐 수 있다.
조그만 담배 연기를 내어 뿜으며 / 새로 두 시의 급행차가 들을 달린다. / 포플라나무의 근골 사이로 / 공장의 지붕은 흰 이빨을 드러내인 채 / 한 가닥 꾸부러진 철책이 바람에 나부끼고 / 그 우에 세로팡지로 만든 구름이 하나 / 자욱한 풀벌레 소래 발길로 차며
김광균의 <추일서정> 일부
이 시는 도시 문명에 의한 인간의 고독과 소외를 다룬 시다. '급행차'와 '포플라나무의 근골 사이로' 보이는 '공장의 지붕'과 '꾸부러진 철책'에 대한 표현은 모더니즘이 내용적인 측면에서 표방하는 도시 문화에 대한 비판이다. 근대라는 개념은 산업화 이후의 도시화된 인간의 삶 양식을 총체적으로 의미하는 것이다. 상업화, 도시화 이후의 인간의 삶을 집약하는 말은 '군중 속의 고독'이라는 표현에서 보이는 것처럼 인간 소외의 현상이다. 이웃으로부터의 소외, 분업화로 인한 일로부터의 소외 등이다. 이것을 '새로 두 시의 급행차'가 들을 달리는 것을 '담배연기'로, '공장의 지붕'을 '흰 이빨을 드러내인'으로 , 꾸부러진 철책'을 '바람에 나부끼고'로 각각 표현했다. 이러한 표현들은 시적 자아와 거리감을 가진 것으로 표현되어, 이 거리감 자체가 현상적 세계로부터 자아의 소외 현상을 충분히 말해주고 있다.
어두운 방 안엔 / 바알간 숯불이 피고 // 외로이 늙으신 할머니가 / 애처로이 잦아드는 어린 목숨을 지키고 계시었다 // 이윽고 눈 속을 / 아버지가 약을 가지고 돌아오시었다 // 아, 아버지가 눈을 헤치고 따 오신 / 그 붉은 산수유 열매- // 나는 한 마리 어린 짐승, / 젊은 아버지의 서느런 옷자락에 / 열로 상기한 볼을 말없이 부비는 것이었다. // 이따금 뒷문을 눈이 치고 있었다. / 그 날 밤이 어쩌면 성탄제의 밤이었을지도 모른다.
김종길의 <성탄제> 일부
이 시는 옛날 아버지의 사랑을 느낀 시인이 아버지의 사랑을 잊지 못하고 그리워하고 있다는 것이 내용이다. 즉 이 시의 주제는 현재 도시의 삶 속에서 옛날의 따뜻하고 진실한 사랑에 대한 그리움이다. 이를 시인은 어린 시절의 체험을 바탕으로 붉은 산수유 열매를 통해서 형상화하고 있다. 편리한 삶은 이루어지고 있지만 인간적인 따뜻한 사랑이 결여된 오늘의 현실을 과거의 농촌 사회에서 힘들고 어려웠지만 따뜻한 사랑이 있었던 것과 대비시켜 넌지시 비판하고 잇다는 측면에서 이 시는 모더니즘시라고 할 수 있다.
사방이 꽉 막힌 엘리베이트 거울 앞에서 주름진 얼굴과 희긋희긋하게 돋아난 흰머리카락을 보고 있는 모습이 바로 현대인의 자화상이다. 애써 달려온 삶이 어느 날 공허하게 느껴지는 그 범상인의 감정은 보지 않아도 될 거울을 보게 되는 도시 문명의 상징인 아파트에 사는 사람들의 자의식에서 잘 드러난다. 직장일로 지치고 지칠 대로 지친 상태에서 바라본 거울, 그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에서 젊은 날 땀흘려 맹렬하게 살던 노력들이 한갓 쓸쓸함으로 느껴지는 건 어쩌면 현대 사회의 특성상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 모두가 느끼게 되는 그 스산한 삶의 과정을 진경옥은 놓치지 않고 시화하고 있는 것이다.
쉬지 않고 흐를 것이다 / 11월의 달력이 또 찢겨 나가고 / 그득하던 들판도 비어 / 흙빛이 될 것이다. / 낡은 겉옷을 걸치고 / 주머니에 넣어보는 걸끄러운 손 안에 부스스 마른 잎이 몇 장 그나마 으스러질 것이다.
진경옥의 <겨울 생각> 일부
한 계절이 아니면 한 해, 그것도 아니면 어느 시간적 단위를 끊어서 그것을 보내는 것은 비애다. 그리고 우수다. 그 비애와 우수의 이미지를 겨울에서 끌어오고 있다. 겨울은 어둡고, 겨울은 불안하고, 겨울은 절망적 이미지를 안고 있는 것이 인간이 가지고 있는 보편적 심상, 으른바 원형적 심상이다. 이 원형적 심상에 정확히 들어맞는 '11월'과 '흙빛'과 '마른잎'의 이미지가 바로 시에 등장하고 있다. 이것은 시인의 세계관과 독자의 세계관에서 폭넓게 공감대를 형성하게 되는 하나의 의미망이다. 그는 현대적 심상을 시화해서 '인생'이 무엇인가를 진실하게 표현하고 있다.
현대적 인간의 특성 중에 큰 하나가 외로움이다. 이 외로움의 감정은 불안과 공포와도 오버랩된다. 싸르트르의 말을 빌지 않더라도 인간 실존을 표상하는 심리적 기제가 바로 이런 것이다. 외로움의 구체화로서 방랑을 들 수 있다. 인생은 나그네 길이란 말이 있듯이 방랑 역시 인간이 가지고 있는 본래의 모습이다. 말하자면 인간의 본질적 모습이다. 미로를 가고 잇는 인간의 모습이 때로 우리들의 자화상으로 느껴지고 있다는 데서 그의 세계 인식은 현대적 특성에 바탕하고 있다는 것이다. 진경옥은 방황하는 자아, 방황하는 동시대인의 삶을 '수묵화'라든지 '운무'와 같은 낱말을 구사하면서 적절하게 드러내 보여준다.
낮불을 켜고 / 수묵 속을 달린다 / 길은 간 곳이 없고 / 폭우와 운무 / 길 없는 길을 가며 / 수묵화로 젖는다 / 이정표도 다 지운 장대비 속을 / 하늘에나 걸리듯 / 아슬한 질주 / 겹겹의 산 속으로 헤매어 간다
진경옥의 <내륙행, 길 없는 길> 일부
'낮불'은 시인의 공포의식과 접합되어 길 찾기의 방안으로서 제시된 단어다. 어두운 낮의 불이 필요하다는 정신적 갈구는 현대인의 방황의식과 상통한다고 하겠다. 겹겹의 산 속에서 폭우와 운무 속을 헤메는 것은 산을 오르는 사람이면 누구나 경험할 수 잇는 일이다. 그러나 그 방향 상실이 수묵화로 침잠하면서 어두운 백주에 '낮불'을 켜드는 것은 누구나 하는 일도, 또 생각하는 일도 아니다. 그래서 산 속에서의 방황은 단순한 체험으로서 시의 재료에 머물지 않고 시로서 승화되는 것이다. 현대적 삶이란 이 시에서 말하고 있는 것처럼 '아득한 질주'이거나 또는 '겹겹의 산 속으로 헤매어' 가는 일이나 아닌지 모르겠다.
산 속의 방황이 삶의 모습임이 <내륙행, 운무 속으로>란 시에 잘 나타난다. 겹겹 산중, 끝없는 안개, 거기다가 밤은 깊어지는데 길이 없어 방황하는 것이 어쩌면 우리네 인생행로일 것이다. 가고자 하는 심리 또한 살아있는 사람의 심리다. 그러나 가고자 한다고 해서 어디나 함부로 갈 수도 없는 현실, 그것은 지금 우리가 처한 현실이다. <강은 흘러서>란 시에서는 이 갈등 속에서 방황하는 사람의 본래 모습이 잘 나타나 있다.
현대로 오면서 단절이 우리들의 삶의 특성으로 드러났다는 것은 삶의 본질에 대한 새로운 자각을 요구한다. 그것은 19세기적 인간관을 벗어나 소위 20세기적 인간관을 형성한다. 19세기 인간관이란 다윈이나 마르크스의 이론에서 읽을 수 있었던, 인간은 자연과 연속된 존재라는 명제를 중심으로 한다. 다윈의 경우는 그렇기 때문에 인간의 삶과 동물의 삶 사이에는 어떤 단절도 존재하지 않는다. 동물적 삶의 투쟁 원리가 그대로 인간적 삶의 원리가 되는 것이다. 마르크스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삶의 하부구조가 삶의 상부구조를 결정한다는 논리나 역사는 유물론적 변증법의 체계에 지나지 않는다는 이론이 결론은 동물적 삶과 인간적 삶의 동일시를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인간관은 전복된다. 이제까지 한결같이 수용되던 소위 자연과 연속된 존재로서의 인간, 자연 법칙의 지배를 받는 인간, 무엇보다도 합리적이고 결정적인 세계관에 종속되어 온 인간이라는 개념을 벗어난다. 우리의 삶 속에는 어떤 정확성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의식, 모든 사물의 본질 속에는 근본적으로 불연속성, 곧 단절이 존재한다는 의식이 팽배하기 시작한 것이다. 송유미는 <허난설헌은 길을 잃었다>란 시집에서 인간의 순결함을 보증할 현실이 없다는 인식에서 자기만의 위안의 세계를 찾고 있다.
가슴에 묻은 아가의 얼굴이 북두칠성이 되어 반짝인다 / 그 어느 것도 나의 구원이 될 수 없는 세상의 것들은 잠이 들었다 / 잠이 들었거든 깨어나 나의 괴로움이 되지 말고 / 이미 세상의 그 어디에도 나의 길은 무너져버렸다면 / 갑산으로 가는 길조차 폭설에 덮였으리라
송유미의 <허난설헌은 길을 잃었다> 일부
이처럼 순결함은 자아와 세계를 단절시킨다. 세상의 것들, 인간을 포함한 사회 제도 온갖 인공적인 것들은 자아의 순결함에 대한 충분한 보증이 되지 못한다. 세상의 길은 무너지고 가야 할 길은 폭설로 가려져 있다. 이러한 정황 속에서 존재의 내면은 고갈을 체험하게 된다. 그리고 길을 잃은 자아의 고립주의는 가중된다.
여기는 지상의 천국 / 숨쉬는 존재는 당연히 없다 / 여기서는 아무도 살지 않지만 / 계산되고 있다 정보를 교환하는 신과 인간 // 유한(1)과 무한(0)이 만들어내는 / 무가치한 존재의 더미 / 전세계의 사막이 점점 넓어지고 있듯이 / 묘지가 자리 넓혀 지구를 뒤덮고 있다 / 비석도 없는, 생몰년대도 모르는 / 주검들, 주검의 산, 산맥
이승하의 <이 거대한 세기말 병동에서 9>
시인은 현대를 특히 세기말을 '거대한 병동', 즉 환자들이 사는 곳으로 파악한다. 그 환자들인 인간 존재의 모습을 매우 비판적으로 성찰한다. 숨쉬는 존재가 없다. 주검들의 산맥 같은 구절들이 이것을 잘 말해 준다.
숨차하는 만년필아 / 앙상한 뼈가 드러나는 말라빠진 종이야 / 내 목구멍에서 몰아치는 탄식 때문에 / 너희들에게 무슨 일이 있는 거니?
채호기의 <수련> 첫 연
채호기는 '수련'을 통해 세기말의 불길한 징후를 읽는다. 우울한 어조로 현대적 특성인 단절과 불안, 소외를 함축하고 있다. '숨차하는 만연필', '말라빠진 종이'등의 시적 수사는 독특하다. 그 독특함은 세계 안에 놓인 대상을 비틀어 보는 시인의 시각에서 비롯한다. 숨차하고 말라빠진이라는 관형어가 결코 긍정적이고 밝은 세계 인식의 소산이라고 하기는 어렵다. 젊은 시인들은 대부분 오늘의 세계에 대해 많이 실망하고 부정하고 절망하는 것 같다.
이러한 새로운 인간의식, 새로운 사물의식은 이 시대의 시가 보여주는 가장 탁월한 양상이다. 시는 20세기에 오면서 사물의 본질에 대한 새로운 통찰을 보여 주었을 뿐만 아니라 우리 인간을 그때까지의 결정론적 태도에서 자유롭게 만들었다. 현대의 특성인 단절의식은 결국 사물의 본질에 대한 새로운 전망과 연결되고, 결정론적 태도로부터 인간을 자유롭게 만들었다는 의의를 드러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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