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한의 전신으로 다섯 자루의 칼이 그어졌다. 칼 그림자가 첩첩이 일어났다. 그의 눈이 무섭게 빛났다. 그는 정면에서 복부를 찔러오는 칼을 든 자의 손목을 부여잡았다. 그자의 눈이 경악으로 두 배는 커졌다. 한이 그자의 몸을 끌어당겼던 것이다. 한과 그자의 몸이 찰나지간 자리를 바꾸었다. 결과는 참혹했다.
"으아악!"
옆구리와 복부, 어깨에 네 자루의 칼이 꽂힌 자의 얼굴이 고통으로 일그러지며 통나무처럼 쓰러졌다. 동료의 몸에 칼질을 한 자들의 얼굴이 허옇게 변했다. 넋을 잃은 듯한 그 얼굴들을 한의 쇳덩어리 같은 주먹이 연이어 강타했다.
"퍼퍼퍼퍽!"
"후악!"
괴상한 신음소리와 함께 네 개의 몸뚱아리가 사방으로 날아갔다. 부러진 이빨이 허공에 뿌려지고 있었다. 하지만 한은 그 광경을 볼 수 없었다. 그의 허리가 부러질 듯 뒤로 휘어졌다. 칼 한 자루가 바람을 가르며 그의 콧날을 스쳐 지나갔다.
그의 오른손이 스쳐 지나는 팔꿈치를 슬쩍 쳤다. 칼을 회수하려던 그자의 몸이 중심을 잡지 못하고 반바퀴를 더 돌았다. 상체를 젖히던 한의 몸이 그대로 한 바퀴 허공에서 뒤로 회전하며 그의 발끝이 그자의 뒷목을 찍었다.
"퍽!"
"커헉!"
숨막히는 비명과 함께 그의 발에 찍힌 자가 앞으로 굴렀다. 그자의 손을 벗어난 회칼이 2-3미터 밖의 땅에 꽂혔다. 남은 자들의 몸놀림이 둔해졌다. 공격하면 병신이 된다.
두렵지 않을 리가 없었다. 그들은 자신도 모르게 문진혁을 곁눈질 하고 있었다. 하지만 문진혁의 얼굴은 굳어있을 뿐 변화가 없었다. 그는 입을 굳게 다물고 지켜보고 있었다. 남은 자들은 어금니를 악물었다. 명령이 없으면 후퇴할 수도 없는 것이다. 그 멈칫거림이 싸움의 흐름을 바꾸었다.
한의 몸이 문진혁이 있는 방향으로 일보 전진했다. 남은 아홉 명이 세 겹의 병풍이 되어 그 앞을 막아섰다. 싸움의 양상이 바뀐 것이다. 문진혁의 눈이 충혈되고 있었다.
이십여 명이 넘는 자들의 억눌린 비명소리가 공터에 가득했다. 절반은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있었다. 기절한 것이 틀림없었다. 어느 틈에 자신들은 방어로 전환되어 있었다. 상대의 기세에 눌리고 있는 것이다.
한의 앞을 막아선 자들의 손에 들린 칼들이 무섭게 휘둘러졌다. 그들도 필사적인 것이다. 쓰러진 자들처럼 될 수 없다는 각오가 그 칼 끝에 실려 있었다. 그렇지만 그들의 각오가 아무리 대단해도 한이 얌전히 칼에 맞아줄 이유는 없었다.
그의 몸이 일보 전진하며 정면에서 찔러오는 칼을 쥔 자의 손목을 왼손으로 잡았다. 동시에 그의 오른쪽 팔꿈치가 옆을 스쳐지나가는 자의 관자놀이를 세차게 찍었다.
"쿵!"
"허억!"
고개가 반쯤 옆으로 꺽인 자의 몸이 꺽인 방향으로 나뒹굴었다. 한의 팔꿈치가 날아드는 속도가 너무 빨라서 관자놀이를 강타당한 자는 자신이 무엇에 맞아 쓰러지는 지도 알지 못했다. 손목을 잡힌 자의 얼굴은 사색이 되었다. 아무리 용을 써도 강철집게에라도 잡힌 듯 손을 움직일 수가 없는 것이다.
상대의 얼굴을 본 그자의 눈이 반쯤 돌아가며 입에 거품을 물었다. 그의 코앞에서 소리 없는 웃으며 눈을 빛내는 상대가 너무나 공포스러워 그의 정신이 육체를 잠시 떠난 것이다.
선 채로 기절한 그자의 바지춤으로 축축한 물기가 배어 나왔다.
손목을 비틀어 기절한 자를 내던진 한이 고개를 옆으로 기울였다. 기절한 자의 뒤에서 칼 한 자루가 불쑥 튀어나왔던 것이다. 그는 귀밑으로 칼을 흘리며 다가서던 자를 내질렀다. 한의 발질에 고환을 얻어맞은 자는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앞으로 고꾸라졌다.
문진혁의 앞을 막고 있던 첫 번째 방어벽이 무력화되었다. 그의 몸이 넘어진 자의 등을 밟으며 다시 일보 전진했다.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세 자루의 칼이 동시에 그의 몸을 난자했다. 이제는 칼이 향하는 방향에 배려라고는 눈꼽만큼도 없었다. 그의 목으로도 칼이 그어졌던 것이다.
칼질을 하는 자들의 마음에 여유가 사라졌다는 뜻이었다. 스물 네 명이 숨 몇 번 쉴 동안 반시체가 되었다. 그들에게 여유가 있다면 그게 더 이상할 일이었다.
한의 무릎이 땅에 닿을 듯 굽혀졌다. 목과 가슴으로 그어지던 칼들이 바람소리를 내며 그의 머리위를 지나갔다. 그들이 칼을 회수할 때 한의 굽혀졌던 무릎이 펴졌다. 그의 한쪽 어깨가 포탄처럼 정면에 있던 자의 가슴을 쳤다.
"쾅!"
"우아악!"
북치는 듯한 소리와 함께 가슴의 뼈들이 한꺼번에 함몰된 그자의 몸이 폭탄에라도맞은 듯 뒤로 튕겨나갔다. 그자는 정말 재수가 없었다. 문진혁의 바로 앞을 막고 있던 동료의 가슴에 내던져지듯 날아간 그자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칼이었다. 미처 피하지 못한 동료가 손에 들고 있던 칼을 치우지 못한 것이다. 등에 동료의 칼이 꽂혔지만 그자의 입에서 더 이상의 비명은 없었다. 칼을 맞기 전에 이미 정신을 잃었던 것이다. 동료의 등에 칼을 꽂은 자의 얼굴이 처참하게 일그러졌다.
"이 악마같은 놈!"
비명처럼 고함을 지른 그자는 동료의 등에 꽂힌 칼을 뽑지도 못한 채 맨주먹으로 한에게 달려들었다. 한의 손끝이 머뭇거림 없이 그자의 목젖을 쳤다. 얼굴이 노랗게 변한 그자의 몸이 나무토막처럼 앞으로 쓰러졌다. 자신쪽으로 쓰러지는 그자의 몸을 잡아 밀치려하던 한의 얼굴이 약간 변했다. 그의 몸이 미끄러지듯 뒤로 이보 물러났다.
물러나는 한의 몸이 바람앞의 풀잎이 눕듯 뒤로 똑바로 넘어갔다. 그의 머리와 가슴, 복부로 날아들던 20여센티의 작은 칼들이 목표를 잃고 뒤편의 숲속으로 사라졌다. 그의 눈이 차가워졌다. 문진혁이 비도를 날린 것이다.
남은 자들의 얼굴이 악귀처럼 변했다. 문진혁이 직접 싸움에 개입한 이상 그들에게도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었다.
한의 몸은 뒤로 반듯하게 쓰러져 있었지만 등이 땅에 닿고 있지는 않았다. 땅에 대어져 있는 부분은 발뒤꿈치뿐 이었다. 철판교의 경신공부가 이름없는 야산의 공터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그의 몸이 누운 상태에서 빙글 90도 회전했다.
그의 몸이 누가 끌어당기듯 무릎도 굽히지 않은 채 일어섰다. 강시를 연상케하는 움직임이어서 보고 있던 자들의 입이 벌어졌다. 하지만 그들 중 두 명은 벌어진 입을 다물 사이도 없었다. 일어선 한의 몸이 그들의 코앞에 서 있었던 것이다.
그들의 칼이 반사적으로 한을 향해 사선으로 그어졌다. 한의 몸이 그들이 그리는 칼의 궤적 틈을 파고들었다. 한의 신형을 놓친 그들의 얼굴이 시퍼렇게 변했다. 그의 신형이 그들 사이에 나타났다. 그림자가 스며드는 듯했다. 그의 양손 수도가 양편에 섰던 자들의 목을 끊어 쳤다. 목의 측면을 강타당한 그들은 미처 칼도 회수하지 못했다. 목이 기형적으로 꺽이며 주
저앉는 그들의 손에는 아직도 칼이 쥐어져 있었다. 하지만 그도 한가하지는 못했다.
다시 네 자루의 비도가 그를 향해 날아들었던 것이다.
"쐐애액!"
날카로운 파공음이 그의 몸을 파고들고 있었다. 한순간 그의 상체가 서너 개로 분리되는 듯한 장관이 연출되었다. 그의 몸이 너무나 빨리 움직여서 그 잔영이 겹치듯 나타났다. 문진혁의 눈이 더 이상 커질 수 없을 만큼 커졌다. 이런 장면을 다시 볼 수 있으리라고는 상상해 본 적도 없는 그였다.
문진혁의 비도를 피한 그의 몸이 문진혁의 앞을 막고 있던 남은 두 명에게
쇄도했다. 칼을 휘두르는 그들의 얼굴에 절망적인 기색이 가득했다. 체념한 자들의 칼에 힘이 들어있을 리 만무였다. 그의 손이 간단하게 칼을 쥔 그들의 손을 제쳤다. 그의 강력한 어깨공격이 남은 두명의 가슴을 연이어 강타했다.
3-4미터를 튕겨나가 나뒹구는 그들 사이로 문진혁의 몸이 공중에 떠 있는 것이 보였다. 그의 양발이 한의 얼굴을 찍었다. 한이 옆으로 반보를 움직여 그 발을 피했다. 옆을 스쳐가는 문진혁의 옆구리를 쥐어박으려던 그의 몸이 바닥에 넙죽 주저 앉았다. 그의 얼굴을 스쳐가던 문진혁의 양손에 날이 시퍼렇게 선 사시미 두자루가 쥐어져 있었다. 그 칼들이 그의 목을 향해 그어졌던 것이다.
주저 앉았던 그가 몸을 일으킬 때 착지와 동시에 문진혁의 오른 발이 그의 턱으로 날아들었다. 한의 머리가 바람소리가 날 정도로 급하게 뒤로 젖혀졌다. 문진혁의 발이 그의 턱끝을 스치듯이 지나갔다. 그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문진혁이 내지른 구두의 앞끝에 5센치 정도의 칼날이 예기를 뿌리고 있었던 것이다.
문진혁의 발끝이 번갈아 그의 목젖과 명치로 날아들었다. 그의 몸이 허공으로 뛰어 올랐다.
문진혁의 발이 그의 발밑으로 지나갔다. 그의 두 다리가 허공에서 문진혁의 머리를 걷어찼다. 허공을 걷는 듯한 그의 발질에 문진혁의 몸이 주저앉으며 옆으로 굴렀다.
한의 몸이 허공에서 문진혁이 구른 방향으로 2미터를 미끄러졌다. 자리에서
일어나며 그 광경을 본 문진혁의 눈이 부릅떠졌다. 오늘은 더 이상 놀랄 일이 없을 것 같았는데 상대는 그의 예상을 비웃듯 믿기지 않는 장면을 보여준 것이다.
허공에서 떨어져내리는 한의 몸을 향해 그의 양손에 들린 칼이 무섭게 그어졌다.
원을 그리듯 그어지는 칼의 궤적에 빈틈이 보이지 않았다. 평소 그가 어떤 수련을 했는지 여실히 보여주고 있었다. 한의 몸이 아래에서 누가 잡아다니기라도 하듯 뚝 떨어졌다.
문진혁의 칼이 그의 머리위에서 공기를 갈랐다. 그의 몸이 낮은 자세에서 우전방으로 반보 전진했다. 그의 양손이 기타를 연주하듯 땅을 디디고 있는 문진혁의 왼쪽 다리 허벅지를 두드렸다.
"두드드드득!"
"허어억!"
문진혁의 입에서 숨넘어가는 듯한 낮은 비명이 터져 나왔다. 허벅지의 뼈가 조각나는 참을 수 없는 고통이 굳게 다물어져 있던 그의 입을 벌리게 했다. 문진혁이 모로쓰러졌다.
바닥에 넘어져 허벅지를 부여잡고 이를 악문 채 고통을 참고 있는 문진혁을 바라보는 한의 눈은 무심했다.
문진혁의 살기에 찬 눈이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한이 다가서려 하자 문진혁은 아직도 그의 양손에 쥐어진 칼을 발악하듯 휘둘렀다. 근성이 있는 자였다. 근성은 인정할만하지만 그렇다고 그냥 돌아갈 한은 아니었다. 이 정도의 실력을 가진 자 30여명을 자신 하나 데려가려고 투입하는 자들이었다. 물어보고 싶은 것이 한둘이 아닌 것이다.
문진혁의 양손이 멈췄다. 그의 손에서 춤을 추던 칼이 힘없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의 눈이 풀리고 있었다. 한의 눈에서 벽록색의 광채가 일렁이면서 일어난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