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장 사람인 자
북경 명문가를 꼽을 때 항상 언급되는 구림세가는 최고란 말이 가장 어울리는 가문이다. 명 제국을 개국했던 개국공신 가문의 한 곳으로 제국 초창기에 벌어졌던 태조의 무자비한 숙청에서도 살아남았고, 그 후로도 승승장구했다. 현 가주 이연은 금의위 영반과 병부상서의 요직을 두루 거친 자로 비록 현역에서 은퇴했지만, 그의 영향력은 여전하여 북경 정계의 거물로 통한다.
당연 그가 만나는 사람도 정계의 고위급 인사가 대부분이다. 평민은 설사 아무리 가진 게 많다고 해도 이연을 만난다는 건 하늘의 별을 따는 것보다 더 어렵다.
그랬던 그가 평민이 아닌 빚쟁이의 방문을 받은 것이다. 이연은 황당한 얼굴로 연우강을 보았다.
“ 정말이렸다!”
이연의 입에서 엄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 이 소저, 아니 소명공주님께 연락 받지 못했습니까?”
“ 묘아의 연락을 받지 않았다면 넌 구림세가에 발을 들여놓지도 못했을 거란 사실을 모르느냐?”
“ 제 말은 빚에 대해 아무런 말이 없었느냐는 겁니다. 어르신.”
“ 단 한마디도 없었다.”
“ 끄응! 이 아줌마가 사람 황당하게 만드네.”
연우강은 얼굴을 찌푸리고는 옆에 둔 궤짝 뚜껑을 열었다. 그런 연우강을 옆에서 지켜보는 이연의 표정이 흥미롭게 변했다.
사실 녀석에 대해서는 독고철응으로부터 들었다. 그래서 어떤 녀석인지 내심 궁금하여 빚에 대해서는 전혀 아는 바 없다고 하였는데 딸을 향해 ‘ 이 아줌마.’란다.
“ 이건 소명공주님이 본인의 손을 작성한 계약서고, 이건 지난 일 년 육개월 동안 외상값입니다.”
연우강은 계약서와 외상 장부를 이연 앞으로 내놓았다.
“ 외상값도 있더냐?”
이연은 장부로 시선을 주었다.
“ 자투리 금액을 빼고 외상값이 칠십만 냥 있습니다.”
“ 치, 칠십만 냥이라고?”
“ 소명공주님과의 거래 현황은 여기에 적혀 있습니다.”
연우강은 장부의 중간쯤을 펼쳐 보였다.
“ 허!”
이연의 입에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전부 지약의 손으로 직접 작성한 듯 보이는 장부는 물건, 물건을 사간 날짜, 금액 등이 세세하게 기록돼 있었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놀라운 사실은 지약이 사 간 물건의 목록이었다.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물건은 물론이고 심지어는 속옷과 달거리용 용품까지 있었다.
믿어지지가 않았다.
아무리 물건이 마음에 든다고 해도 사내에게 살 게 있고 살 수 없는 게 있다. 속옷과 달거리용 용품이 바로 그것이다. 그런데 녀석은 그런 것들을 아무 거리낌 없이 연우강에게서 구입해 쓴 것이었다.
“ 원래 처음 시작하는 게 어렵지 한번 시작하게 되면 그 다음부터는 어렵지 않습니다. 어르신.”
“ 그럼 이 호위비용은 뭐냐?”
이연은 비교적 최근에 작성된 듯한 항목을 가리켰다.
“ 대야벌은 암살대전이라는 게 있지 않습니까. 네 명의 호위를 붙여준 값입니다.”
“ 그러니까 네 명의 호위를 댄 값이 오십 만 냥이란 말이냐?”
“ 그렇습니다. 어르신.”
“ 금릉 연씨 가의 장자라고 했느냐?”
“ 그렇습니다.”
“ 군에도 다녀왔고?”
“ 오 년 근무했습니다.”
“ 정천호였다고 들었다.”
“ 군에서는 사람을 많이 죽이면 주는 벼슬이라 그다지 자랑할 만한 건 아닙니다.”
“ 사람이 적이지.”
“ 간혹 사람으로 보일 때도 있습니다. 어르신.”
“ 너를 포함해 여섯 명만 살아남았다고 들었다.”
“ 운이 좋았습니다.”
“ 무상에게 미안하지 않는?”
“ 무상뿐만 아니라 모든 부하들에게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 무상은 내 사위였다.”
“ 저는 외상값을 받으러 왔습니다. 어르신.”
“ 그때 이야기는 하고 싶지 않다는 말이냐?”
“ 기억하고 싶지 않은 과거라서 그렇습니다.”
“ 너는 잊어버리면 끝이지만, 평생 그 기억을 안고 살아야 하는 사람도 있다. 연우강.”
“ 오늘은 이야기할 기분이 아니신 듯하군요.”
연우강은 계약서와 장부를 챙겨 들고 일어났다.
“ 묘아는 가문을 위해 스스로를 희생했다.”
“ 권력이나 부는 누군가의 희생을 먹고 자란다고 들었습니다. 그 누군가는 권력이나 부를 가진 다른 사람이 될 수도 있고, 자신과 가장 가까운 사람이 될 수도 있다고도 하였습니다.”
“ 내가 권력을 위해 딸을 팔았다는 말을 하고 싶은 게냐?”
“ 거기에 대해선 전 판단할 능력이나 권한도 없습니다. 어르신. 마찬가지로 무상이 내린 결정에 대해서도 잘잘못을 따지지 않습니다. 다만 녀석은 운이 없었고, 나를 비롯한 여섯 명은 운이 좋았을 뿐입니다.”
연우강은 고개를 숙이고는 궤짝을 둘러메고 문으로 향했다.
“ 저녁 준비를 하라고 일러두었다.”
그 말에 연우강은 우뚝 걸음을 멈추고 이연을 돌아다보았다.
“ 내 쫓는 게 아니었습니까?”
“ 정보를 교환하고 싶어 들른 게 아니었더냐?”
구림섿가의 가주 이연.
금의위 영반과 병부상서를 지낸 관록은 결코 녹록치 않았다. 그는 연우강이 구림세가를 방분한 목적을 한눈에 간파하고 있었다.
“ 원래 목적은 그랬습니다.”
“ 지금은 아니란 말이냐?”
“ 이차 팔황정벌은 실패합니다. 어르신. 실패가 예견된 작전에 동원돼 개죽음 당하는 건 사양하고 싶습니다.”
“ 넌 이미 경험이 있다.”
흑랑기를 이끌고 적진으로 들어갔던 것을 두고 하는 말이었다.
“ 그땐 국가를 위한다는 명분이 있었습니다.”
“ 이번엔 명분이 없단 말이냐?”
“ 담대만승은 황제가 아닙니다. 그리고 전 그의 부하도 아니고요.”
“ 그렇구나. 그런데 왜 실패한다고 생각하느냐?”
“ 중원과 새외에서는 지난 세월 동안 많은 왕조가 나타났다가 사라졌습니다. 하지만 팔황새는 무려 천오백 년 동안 명맥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 팔황새를 쉽게 생각한다는 말이냐?”
“ 모름지기 작전의 성패는 얼마나 집중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유람 보내듯 애들을 보내놓고, 그 아이들이 뭔가를 해주길 바란다는 것 자체가 우스운 일이지 않습니까?”
“ 잠룡들만 갈 거라고 생각한 게냐?”
“ 물론 담대만승 그자는 잠룡들이 속한 각 가문이나, 잠룡들을 지원하고 있는 대야벌 각 세력이 나설 걸로 보고 잠룡강호행을 강행했을 겁니다. 하지만 팔황새는 지휘체계조차 제대로 잡혀 있지 않은 자들이 공격해 몰라시킬 수 있는 그런 나약한 곳이 아닙니다.”
“팔황새에 대해 잘 아느냐?”
“ 자세히는 모릅니다. 하지만 그들은 살아남기 위해 많은 준비를 했다는 건 알고 있습니다.”
“ 구체적으로 어떤 준비를 말하는 것이냐?”
“ 정보는 오고 가야 하는 겁ㄴ다. 어르신. 그리고 신분에 상관없이 일단 손님으로 받아들였으면 차 한 잔 정도는 대접하는 게 도리라고 알고 있습니다. 차를 내주지 못할 정도면 아예 집안으로 들이질 말아야 하고요.”
연우강은 꾸벅 고개를 숙이곤 밖으로 등을 돌렸다.
“ 허허허”
이연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이곳에서 손님을 접대한 지 수십 년이다. 그런데 이곳을 거쳐 갔던 많은 손님들 중 자신 앞에서 인간의 도리 운운하는 녀석은 처음이었다.
당돌한 녀석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 자네 생각은 어떤가?”
이연은 안쪽을 향해 물었다.
“ 클클클! 가주께서 강적을 만나 것 같습니다.”
나직한 웃음과 함께 안쪽에서 노인이 걸어 나왔다. 특이한 노인이었다. 깔끔하게 차려입은 옷과 잘 정돈된 머리는 마치 학자를 보는 듯하다. 하지만 노인이 눈을 깜빡일 때마다 붉은 광채가 나타났다가 사라지곤 했다.
극강을 넘어 평범하게 변해버린 인물.
그는 구림세가 수신호위 중의 한 명인 대천무존 구양을이었다.
“ 강적이 문제가 아니네. 무존. 내가 걱정하는 건 묘아 그 아이네. 묘아는 황궐에 말하면 간단하게 풀릴 일들을 전부 그 녀석에게 부탁했네. 그게 무슨 뜻이겠는가?”
“ 군왕태자의 사인에 대해 조사하기 위해 일부러 그렇게 하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가주님.”
“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는가?”
“ 실제 이야기를 나눠보지 않은 채 판단하는 건 그렇지만 독고 형님의 말과 지금까지 상황을 종합해 볼 때 그 친구는 충분히 매력이 있습니다.”
“ 묘아가 녀석을 이성으로 대하고 있다는 말이군.”
이연의 눈빛이 차갑게 변했다.
“ 성급하신 결론입니다. 가주님.”
“ 묘아는 응천부의 며느리네. 성급 여부를 떠나 묘아가 녀석에게 관심을 보였다는 것 자체가 있을 수 없는 일이네.”
“ 그 친군 비밀이 많은 친굽니다. 가주님.”
“ 문제가 커질수도 있다는 말인가?”
“ 먼 발치에서 그 친구와 함께 들어왔던 자들을 잠깐 보았습니다.”
“ 그런데?”
“ 제 손에 땀이 맺혔습니다.”
“ 자네 손에 땀이 맺혔다고?”
이연은 깜짝 놀란 얼굴로 구양을을 보았다.
대천무존 구양을. 삼십 년 전에 활동했던 그는 대야벌 무인을 제외한 강호 무림 최강이라는 소리를 들었고, 대야벌로 들어간다면 십위 권 안에는 들 거라고 하였다. 그런 구양을이 손에 땀을 흘릴 정도로 긴장했다면 상대는 구양을과 비슷한 수준에 오른 무인이라고 봐야 할 터였다. 놀라운 말이 아닐 수 없었다.
“ 그렇습니다. 가주님. 그런데 그런 자들이 한둘이 아니라는 겁니다.”
구양을은 고개를 끄덕였다.
“ 호위로 들어온 자들 대부분이 그렇다는 말인가?”
“ 그렇습니다.”
“ 놀라운 녀석이군.”
이연은 고개를 갸웃했다.
그동안 황궐과 금황련을 통해 녀석에 대해 많은 조사를 했다. 하지만 야장 무인들을 빼곤 녀석 곁에 다른 무인들이 있다는 보고를 받지 못했다. 그런데 대야벌을 나서자마자 구양을을 긴장시킬 정도로 엄청난 무인들이 녀석을 따르고 있는 것이다.
“ 일단은 좀더 지켜보는 게 나을 듯 싶습니다.”
“ 그렇게 하겠네.”
“ 가주님, 접니다.”
그때 밖에서 총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왜 그러는가?”
“ 손님 일행이 떠난다고 합니다.”
“ 떠난다고?”
“ 그렇습니다. 가주님. 지금 떠난다면서 외상값을 받아갔으면 한다고 전해 달라고 하였습니다.”
“ 어디 있느냐?”
“ 밖에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 당돌한 놈!”
이연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 돈을 갚지 못할 경우에 머리를 내주기로 했다고 전해 주게. 총관.”
“ 저런 쳐죽일 놈 봤나?”
이연은 벌떡 일어나 밖으로 튀어나갔다. 접견실 앞 정원에는 궤짝을 등에 진 연우강이 서 있었다.
“ 방금 뭐라고 했느냐?”
이연은 연우강을 보며 고함을 내질렀다.
“ 내가 한 말이 아니외다. 사백만 냥을 비롯한 외상값을 갚지 못할 경우엔 머리로 대신하겠다고 본인이 맹세를 하고 글로 남겼소이다. 나는 그 약속을 믿고, 스무개에 달하는 잠룡쟁패를 그녀에게 넘겼고, 지난 일 년 육 개월 동안 그녀가 원하는 모든 물건을 공급해 주었소이다. 방향이 잘못됐소이다.”
“ 정녕!”
분노로 인해 이연의 눈꺼풀이 파르를 떨렸다.
“ 무례하구먼.”
듣고 있던 구양을이 끼어들었다.
“ 이 소저는 나와 계약할 때 남경의 응천부가 아니라 구림세가에서 돈을 줄 거라고 하였고, 난 그 말을 따랐을 뿐이오. 영감. 나와 거래를 원했던 사람도 그녀였고, 금액은 흥정 끝에 결정됐소이다. 내가 어떤 면에서 무례를 저질렀다는 거요?”
“ 가주님께서는 손수 식사를 준비하라고 지시를 내렸네.”
“ 구림세가에서는 준비해 준 밥을 먹지 않고 그냥 가면 무례라고 하시오?”
“ 무례가 아니라 모욕으로 여길 수도 있네.”
“ 혹시 이마에 사람 인 자를 써본 적이 있소?”
“ 없네.”
“ 그럼 언젠가 시간이 나면 누군가를 앞에 두고 한 번 써보시오. 그런 다음 영감 앞에 있는 사람에게 무슨 글자냐고 물어보시오.”
“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겐가?”
“ 가겠소.”
연우강은 구양을을 가만히 쳐다보다가 몸을 돌렸다.
“ 가란 말을 하지 않았다. 연우강!”
이연은 버럭 소리쳤다.
“ 외상값을 받을 곳이 없었다면 가라고 내쫓아도 가지 않았을 거요. 여기서 받지 못한 외상값은 응천부에서 받아가도록 하겠소. 그리고 영감도 이마에 사람 인자를 써보도록 하시오. 아니 두 영감이 서로를 쳐다보며 써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소이다.”
연우강은 고개를 저레절레 흔들며 걸어갔다.
“ 여봐라!”
“ 부르셨습니까?”
이연의 외침이 터져 나오자마자 사방에서 무복을 걸친 자들이 연우강의 앞을 가로막았다.
“ 빌린 돈을 갚기 싫으면 사람을 죽이는 게 북경의 율법인 모양이군. 환랑!”
“ 말해요, 우강.”
“ 헉!”
연우강의 앞을 막아섰던 무인들의 입에서 신음이 새어나왔다. 그들은 어떤 기척도 감지하지 못했다. 그런데 연우강 바로 옆에서 사람의 얼굴이 나타난 것이었다.
“ 검을 뽑는 놈은 바로 죽여!”
“ 알겠어요, 광랑!”
“ 백랑!”
“ 말하세요, 광랑!”
수여설의 목소리는 문밖에서 들려왔다.
“ 문이 얼마나 단단한지 확인해 봐.”
“ 알았어요. 광랑!”
나직한 목소리와 함께 차가운 기운이 몰아쳤다.
그리고,
쩌엉!
꽁꽁 언 얼음에 금이 가는 듯한 소리가 들리오더니 커다란 문이 순식간에 얼음가루로 흩어졌다.
“ 빙하빙백강?”
구양을은 경악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바싹 마른 나무임에도 불구하고 얼음으로 만들어버리는 무공은 천마의 무공이라고 알려진 백옥수와 북해빙궁의 빙하빙백강밖에 없다. 두 무공을 펼치면 비슷한 결과가 나오지만 천마의 백옥수를 더 높게 쳐주는 이유는 빙하빙백장이 불완전한 무공이라는 사실 때문이었다.
손이 하얗게 변하는 백옥수는 여자면 누구나 익힐 수 있는 무고이지만 빙하빙백강은 천음지체에 버금가는 음기를 타고나거나 음기를 간직한 영약을 복용해야만 익힐 수 있다. 더불어 빙하빙백강은 펼칠 때 머리가 하얗게 변하는 특징이 있으며 완성하지 못하면 평생 빙인으로 살아야 하는 부작용이 있다. 그런데 부서진 문 앞에 서 있는 백랑이라는 여인은 머리만 하얗게 변했을 뿐이다. 빙백빙하강을 완성했다는 의미였다.
“ 맞소. 영감. 백랑은 백옥수에 버금간다는 무공을 익히고 있을 뿐 아니라, 성질머리가 아주 더러워서 한번 화가나면 아무도 말릴 수 없소. 나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오.”
연우강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연우강을 막아섰던 무인들은 일제히 이연을 보았다.
“ 죽일놈! 감히 내게... 당장 저것들을....”
“ 멈춰라!”
허공에서 내리꽂힌 창노한 목소리가 이연의 말을 잘랐다. 곧 흰옷을 걸친 노인이 연우강 뒤편으로 날아내렸다.
“ 아, 아버지.”
“ 태상 가주님.”
이연을 비롯한 일행은 고개를 숙였다.
[ 봤어요?]
몽요는 연우강에게 전음을 보냈다.
[ 뭘 말입니까? ]
연우강은 전음으로 되물었다.
일 갑자의 공력을 지닌 걸로 돼 있기 때문에 굳이 무공을 전혀 모른 척할 이유가 없었다.
[ 방금 저 노인은 허공답보의 경공을 펼쳤어요.]
[ 무공이 강하다는 말? ]
[ 일승 할아버지보다 더 강한 것 같아요.]
[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죠.]
[ 무슨 말이죠?]
[ 황궐의 전전대 궐주였습니다.]
[ 별호가 뭐였죠? ]
[ 태황야 이자승입니다.]
[ 저, 저 사람이 태황야 이자승이라고요? ]
몽요는 깜짝 놀란 얼굴로 이자승을 보았다. 이자승은 황궐이 지금껏 배출한 고수 중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초강자다.
입고 있는 옷은 평민이나 걸치는 마의였고, 무릎까지 걷어 올린 바지 아래로는 신발도 신지 않고 있었다.
[원래 괴짜라는 소문이 있었답니다.]
[ 논에서 막 돌아온 행색이네.]
[실제로 그랬을지도 모르지요. ]
연우강은 이자승을 살펴보았다.
몽요의 말처럼 논에서 막 돌아온 것처럼 이자승의 발에는 흙이 덕지덕지 묻어 있었다.
“ 어쩐 일이십니까, 아버지?”
“ 써 보아라.”
이자승이 대뜸 말했다.
“ 뭘 말입니까?”
“ 네 이마에 사람 인 자를 써보란 말이다.”
“ 아버지!”
이연은 곤혹스러운 얼굴로 아버지를 보았다.
사람 인 자를 운운하는 걸 보면 처음부터 다 보고 있었다는 뜻이었다.
“ 지금 내가 늙었다고 무시하는 게냐?”
“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 그럼, 아비가 시키는 일도 못 하는 이유가 뭐냐?”
“ 하지만 여긴.....?”
“ 이마에 글자 하나 쓰는 게 창피하다는 말이렷다.”
“ 끄응! 알았습니다. 아버지.”
이연은 이마로 손을 가져갔다.
“ 구양을! 너는 뭐 하고 있는 게냐?”
“ 저, 저도 쓰란 말입니까?”
“ 저 녀석 말을 듣지 못한 게냐. 서로 마주 보며 써야 한다고 하지 않았느냐?”
이자승은 버럭 소리쳤다.
“ 아, 알겠습니다. 태상가주님.”
두 사람은 서로를 마주 보며 이마에 사람 인 자를 썼다.
“ 썼습니다. 아버지.”
“ 뭐라고 썼느냐?”
“ 인 자를 .....”
“ 네 이마에 쓴 글 말고 구양을이 제 아마에 쓴 글을 읽어보란느 거다.”
“ 무존 역시 사람 인 자를 .....”
“ 다시 쓰거라.”
“ 네?”
“ 이번엔 상대방이 쓴 글자를 확실하게 보면서 다시 쓰란 말이다.”
“ 끄응!”
두 사람은 신음을 흘리며 다시 글자를 썼다.
“ 뭐라고 썼느냐?”
이자승은 다시 물었다.
“ 무존은 들 입 자를 썼습니다.”
“ 구양을 너는?”
“ 가주께서도 들 입 자를 쓰셨습니다.”
“ 못난 녀석들. 보기 싫으니까 들어가거라!”
이자승은 손을 휘 저으며 몸을 돌렸다. 그러고는 연우강의 앞으로 걸어갔다.
“ 따라오너라.”
“ 아닙니다. 전 그만 가보겠습니다. 어르신.”
“ 따라오라면 따라올 것이지 무슨 말이 그렇게 많아. 녀석아.”
이자승은 연우강의 귀를 틀어쥐고는 끌고 갔다.
“ 아픕니다. 영감님. 이러다 귀 떨어집니다.”
“ 구림세가의 심처에 와서 가주를 협박까지 한 녀석이 이까짓 게 아프다고 하면 지나가던 개가 웃는다. 녀석아. 너희들도 따라오너라.”
문을 나선 이자승은 멍한 얼굴로 서 있는 수여설을 보며 말했다.
“ 아, 알겠습니다.”
수여설은 고개를 끄덕이며 질질 끌려가는 연우강의 뒤를 따랐다.
‘ 이상하네, 왜 입 자라고 했지?’
문득 조금 전 상황이 떠올라 그녀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런 수여설의 모습에 몽요가 물었다.
[ 수 소저, 왜 그래요?]
[ 우리도 어제 이마에 사람 인 자를 썼잖아요.]
[ 그랬죠.]
[ 난 몽요가 이마에 쓴 글을 사람 인 자로 읽었거든요?]
[ 그건 나도 그래요.]
“ 그런데 왜 저들은 들 입자로 읽은 거죠?]
[ 그건 우강에게 물어봐야 할 것 같은데요?]
[ 그렇네요.]
연우강을 끌고 간 이자승은 어느새 연회실로 들어가 있었다.
“ 동영 처자는 가서 식구들을 데리고 오너라.”
“ 알았어요.”
이자승이 대번에 은밀막부의 무공을 알아차리자 깜짝 놀란 몽요는 몸을 날려 밖으로 나갔다. 잠시 후, 십 조 조원과 욱일승 일행이 의아한 얼굴을 한 채로 연회실로 들어왔다.
모두 들어서자 이자승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 아들 놈을 대신해서 내가 사과하겠네. 손님을 모셔놓고.....”
사과의 말을 하던 이자승의 시선이 한 곳에서 딱 멈췄다. 그의 시선이 멈춘 곳은 다름 아닌 욱일승의 얼굴이었다. 잠시 그를 쳐다보던 이자승의 시선이 옆에 앉은 수천월과 갈인효에게로 옮겨졌다.
“ 제기랄!”
느닷없이 그의 입에서 욕설이 흘러나왔다.
욕설을 내뱉은 사람은 이자승뿐만이 아니었다.
연우강 또한 이자승과 욱일승을 번갈아 쳐다보며 욕설을 내뱉었다. 이자승이 황궐의 궐주를 그만둔 것이 사십 년 전이라는 사실이 문득 떠올랐다.
전혀 생각지도 않은 변수가 생긴 것이다.
바로 그때 이자승은 욱일승을 향해 전음을 보내고 있었다.
[너지?]
[ 네 녀석도 안 죽었구나.]
털썩!
욱일승의 전음에 이자승은 그 자리에 힘없이 주저앉고 말았다.
“ 자자! 오늘은 여기서 쉬고 내일 떠날 거니까 식사부터 해.”
연우강은 말을 하면서 장사덕에게 눈짓을 했다.
“ 잘 먹겠습니다.”
장사덕은 크게 소리친 후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한 지역에서 수재 소리를 듣던 잠룡들은 눈치가 없는 자들이 아니었다. 태상가주라는 사람과 노인들 사이에 어떤 사연이 있음을 눈치 챈 잠룡들은 일부러 게걸스럽게 식사를 했다.
곧 연회실은 왁자지껄해졌다.
[ 욱 영감, 화장실이나 다녀오시오.]
안쪽이 잔칫집 분위기로 변하자 연우강은 욱일승에게 전음을 보냈다.
[ 알았네.]
욱일승은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여전히 멍한 얼굴을 하고 있는 이자승을 쳐다보다가 밖으로 나갔다. 그가 나가자 수천월과 갈인효가 뒤를 따랐고, 곧이어 이자승이 나갔다.
[ 영감!]
연우강은 다시 전음으로 욱일승을 불렀다.
[ 알았네. 자네에 대해서는 비밀로 하겠네. ]
욱일승의 전음을 들은 연우강은 비로서 편안한 얼굴로 젓가락을 들었다.
“ 이제 말해 주세요.”
음식을 먹다 말고 몽요가 연우강을 보며 말했다.
“ 이마에 글씨 쓰는 거?”
“ 네.”
몽요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뿐만이 아니었다. 간밤 이마에 글을 썼던 조장들 또한 전부 연우강을 보았다.
“ 재미삼아 하는 놀이에 불과해요.”
“ 어떤 재미를 말하는 거죠?”
“ 어젯밤에는 인 자를 봤는데 오늘은 입 자를 봤잖아요.”
“ 맞아요. 조금 전 두 사람은 입 자를 썼어요.”
몽요가 고개를 끄덕였다.
“ 하지만 그 사람은 입자가 아닌 인 자를 썼습니다. 몽요.”
“ 그런데 어떻게 입 자로 보이는 거죠?”
몽요는 고개를 갸웃했다.
“ 관점의 차이 때문입니다. 몽요를 비롯한 조장들은 앞에 있는 사람이 보기 편하도록 인 자를 썼고, 이연과 그의 호위는 자기들이 보기 편하도록 인 자를 쓴 겁니다. 몽요나 이연 그 양반이나 같은 인 자를 쓴다고 썼지만 외부로 보여지는 건 인 자와 입 자가 되는 겁니다.”
“ 아!”
연우강의 말을 듣고 있던 조장들은 탄성을 내뱉었다.
“ 인 자가 아닌 입 자로 나타나는 자들은 자기중심적인 사고를 가진 자란 뜻이군요.”
“ 주로 권력을 지닌 자나, 한 방면에서 성공한 자들은 세상이 자신을 중심으로 돌아간다고 행각한다네요. 그런 사람들은 대부분 입 자로 보여지고요.”
“ 일리가 있네요.”
몽요는 감탄한 얼굴로 연우강을 보았다.
단순한 듯하며서도 많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놀이였다.
“ 제 할아버지 말입니다. 항상 사람 인 자가 보여질 수 있는 삶을 살라고 하였거든요.”
“ 타인을 배려하는 삶을 살라는 말이죠?”
“ 그게 젊었을 때는 그렇게 살다가도, 성공해 최고가 되면 그랬던 사실을 쉽게 잊어버리곤 한답니다.”
“ 개구리 올챙이 적 생각 못 한다는 말인가요?”
이번엔 남궁운화가 말을 받았다.
“ 생각을 못하는 게 아니라 올챙이로 살았던 사실을 기억 속에서 지워버리고, 자신은 처음부터 개구리였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남궁 소저.”
연우강은 남궁운화를 빤히 쳐다보았다.
“ 왜 그런 눈으로 보는 거죠?”
“ 여기서 그럴 가능성이 가장 높은 사람은 남궁 소저잖습니까?”
“ 제가 그런 사람이 되면 연 공자가 볼기를 때려주면... 어머!”
손으로 입을 가리는 남궁운화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 알았습니다. 남궁 소저. 이제부터 철사장을 연마해서 남궁 소저가 힘들었던 과거를 잊을 때마다 엉덩이를 사정없이 후려치겠습니다.”
연우강이 오른손을 휘둘러 때리는 시늉을 했다.
“ 고, 공자!”
남궁운화는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 호호호! 연 공자 할아버지는 좋은 분이셨네요!”
남궁운화가 안절부절 못하자 수여설이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다. 어쩔 줄 몰라하는 남궁운화의 모습에 빙그레 웃고 있던 그녀는 다시 연우강의 할아버지의 이야기로 화제를 돌렸다.
“ 부러운 얼굴이네요?”
“ 솔직히 부러워요. 우린 어린 시절부터 혹독하게 키워졌거든요. ㅏ마 우리 어린 시절을 글로 기록해 보면, 먹고, 자고, 공부하고, 무공 익히고, 이 네 가지로 축약시킬 수 있을 거예요. 그렇게 살았음에도 이 정도밖에 안 된다는 건 슬픈 일이죠.”
“ 그건 수 소저가 위만 보아서 그런 겁니다. 때론 아래를 내려다보는 여유를 가져보십시오. 그럼 세상이 다르게 보일 겁니다.”
“ 그럴까요?”
“ 그래서 여행이 필요한 겁니다.”
“ 하지만 이번 여행은 일반 여행과 다르잖아요.”
“ 즐거운 여행이라고 생각하면 되지 다를 게 뭐 있습니까? 여행은 내일 일이고 일단은 먹죠.”
“ 그래야겠네요.”
수여설은 배시시 웃으며 음식으로 젓가락을 가져갔다.
한편,
밖으로 나온 네 사람은 서로를 쳐다보고 있을 뿐 입을 열지 못했다.
“ 미안하다.”
먼저 입을 연 사람은 이자승이었다.
세 사람을 보는 이자승의 눈동자에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그 당시 욱일승은 철무련 련주였고, 갈인효는 만독림의 림주, 수천월은 군마련에 소속돼 있었다.
녀석들은 벌주 자리를 놓고 경쟁하던 경쟁자이자 친구들이었다. 그랬던 녀석들이 거의 비슷한 시기에 주화입마에 들고 말았다. 폐인으로 변한 녀석들이 지옥으로 수감되자 자신도 황궐을 떠났다.
그랬던 녀석들을 사십여 년이 훌쩍 지나 다시 만난 것이다.
“ 우리 욕심 때문에 그렇게 된 건데, 네가 미안할 일이 뭐 있냐. 그보다는 다시 보니까 좋긴 하다.”
무표정하게 있던 욱일승의 입가에 헤벌쭉 미소가 어렸다.
“ 반갑다.”
“ 그래 반갑다. 녀석아.”
“ 살아 있어줘서 고맙다.”
“ 정말 고맙다.”
마치 아이들처럼 네 사람은 서로의 손을 굳게 잡았다. 맞잡은 주름진 손에서 따스한 기운이 흘렀다.
“ 어떻게 극복한 거냐?”
마음이 조금 진정되는 듯하자 이자승은 궁금했던 사항을 물었다.
“ 그건 비밀이라 말 못한다.”
욱일승은 잠룡들이 모여 있는 연회실을 흘끔 보며 말했다.
“ 그럼 넌 짧게 대답만 해라. 그 녀석이 구해준 거냐?”
“ 응!”
“ 주화입마에 든 너희들을 구해준 걸 보면 녀석이 지옥으로 들어갔다는 말이구나”
“ 응!”
“ 지옥엔 무영들이 있었던 걸로 아는데.....”
“ 무영 중 한 놈인 야효가 풍천마인을 만들고 있었다.”
“ 천마의 무공인 그 풍천마인을 말하는 거냐?”
“ 응!”
“ 그 녀석이 그들을 다 죽인 거냐?”
“ 응!”
“ 얼마나 강하냐?”
“ 비밀이다.”
“ 너 정도는 되느냐?”
“ 아니!”
“ 너보다 약하단 말이냐?”
“ 아니!”
“ 알았다. 들어가자.”
욱일승을 빤히 쳐다보던 이자승은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연회실로 들어온 세 사람은 잠룡 일행과 어울려 식사를 하고 술잔을 비웠다.
“ 운상은 잘 있느냐?”
술잔을 기울이던 이자승이 연우강을 보며 물었다.
“ 내가 운상을 어떻게 안다고 그러십니까?”
“ 몰라?”
“ 영감님은 나이가 구십이 넘었을 거 아닙니까. 더구나 강호 활동도 하지 않으셨고요. 제가 운상이 누군지 안다면 그게 더 이상한 겁니다.”
“ 그러니까 연운상을 모른다고?”
“ 성이 운 씨가 아니고 연 씨였습니까?”
“ 그래 이놈아!”
“ 들어본 것 같기는 한데.....”
연우강은 고개를 갸웃했다. 많이 들어본 이름은 분명한데 가물거릴 뿐 기억이 나지 않았다.
퍼억!
한심한 얼굴로 연우강을 쳐다보던 이자승은 느닷없이 연우강의 뒷통수를 사정없이 후려쳤다.
“ 아고, 영감님!”
“ 네 할아버지 이름이다. 이놈아!”
“ 아! 맞다. 할아버지 함자가 연 운 자 성 자였지. 그런데 영감님이 할아버지 함자를 어떻게 아십니까?”
연우강은 깜짝 놀라 물었다.
“ 너희 연씨 세가가 대야벌에 매년 백만 냥씩 기부를 했던 게 나 때문이었다. 녀석아.”
“ 두 분이 친구셨습니까?”
“ 그럼 이마에 사람 인 자 쓰는 걸로 사람을 평가하는 방법을 내가 어떻게 알고 있었겠느냐?”
“ 할아버지께 들으셨습니까?”
“ 그래, 이놈아. 그 친구가 맨 처음 내게 했던 말이 이마에 사람 인 자를 써보라고 했다.”
“ 영감님도 아드님처럼 인 자가 아니라 입 자를 쓰셨군요.”
“ 그랬다. 녀석아.”
그때를 떠올리는 듯 이자승의 눈빛이 아득해졌다. 꿈도 컸고, 혈기로 두려울 게 없었던 시절, 연운상을 만나지 못했더라면 평생 인 자를 쓰고 살았을 것이다.
연운상은 마음의 스승이나 다름없는 사람이었다.
“ 쯧! 본인만 쓰면 뭐합니까. 자식이.....”
퍼억!
“ 그게 교육으로 되는 건 줄 아느냐?”
“ 손녀딸은 되는 것 같던데요, 뭘.”
“ 지 애빌 안 닮고 날 닮았으니까 당연하지. 술이나 따라, 녀석아.”
아지승은 연우강 앞으로 술잔을 내밀었다.
“ 아무래도 저승에 한번 다녀와야겠습니다.”
연우강은 술을 따르며 말했다.
“ 저승엔 왜?”
“ 염라대왕 그 자식이 군기가 빠진 것 같아서 그렇습니다. 요괴들이 사방에서 출몰하고 있는데 뭐 하고 자빠졌는지.”
“ 그러니까 너무 오래 살았다는 말이렷다.”
“ 영감님 말고 승천비고와 천무비고에 죽치고 있는 그 요괴들 말입니다.”
“ 그들이 아직도 살아 있느냐?”
“ 아직 살아 있는 정도가 아니라 영감님보다 훨씬 정정합니다.”
“ 원래 욕심이 많은 사람이 더 정정하기 마련이다. 녀석아.”
“ 데려가십시오.”
“ 어딜 데려가라는 거냐?”
“ 어디겠습니까, 저승이지.”
“ 에라! 이 나쁜 녀석아, 아예 땅을 파서 묻어라, 묻어!”
눈은 연우강을 노려보고 있었지만 입은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거친 말투에서 느껴지는 따스함.
문득 세 녀석이 말년에 보이 터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 외상값은 주시겠지요?”
“ 당연히 줘야지.”
이자승은 시원스럽게 말을 뱉었다.
“ 조금 많습니다.”
“ 구림세가를 우습게보지 마라. 너희 금릉 연씨 세가만큼은 아니지만 그래도 북경에서 최고 재력을 자랑하는 곳이다.”
이자승의 말투엔 자신감이 넘쳤다.
하지만 그의 자신감은 그날 밤까지였다. 다음날 아침 연우강으로부터 이번에 받아갈 돈이 백이십만 냥이고, 칠 년 동안 매년 오십 만냥 씩 더 받아가야 한다는 말을 듣고는 게거품을 물었다.
하지만 어쩔 것인가.
이미 약속을 했고, 이곳에서 주지 않으면 계약서와 외상 장부를 들고 사돈댁인 응천부를 찾아간다고 하는데.
이자승과 이연은 백이십만냥을 내줄 수밖에 없었다.
돈을 받아든 연우강은 일행을 데리고 구림세가를 떠났다.
“ 나도 여행이나 가련다.”
이자승은 아들을 보며 말했다.
“ 여행이라고요?”
이연은 깜짝 놀란 얼굴로 아버지를 보았다.
“ 그동안 너무 틀어박혀 살았어.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궁금하기도 하고.”
“ 그 일은 이미 끝났습니다. 아버지. 묘아는 응천부의 며느립니다.”
“ 걱정 마라. 네 일을 방해하고 싶은 생각은 없으니까.”
“ 제 일이 아니고 구림세가의 일입니다. 아버지.”
“ 묘아가 응천부로 가지 않으면 구림세가가 망한다고 하더냐?”
“ 정혼은 응천부와 구림세가의 약속이었습니다. 약속을 지키지 않는 가문은 북경에서 살아갈 수 없다는 사실을 아버지도 아시잖습니까? 그리고 묘아도 원했고요.”
“ 묘아가 원했다고 믿고 싶은 거겠지.”
“ 아버지!”
“ 아무튼 난 떠나겠다.”
“ 그녀석 근처엔 가지 마십시오. 아버지.”
“ 가면 어떻게 할 참이냐?”
“ 전 구림세가를 지키기 위해 무슨 짓이라도 할 겁니다. 아버지.”
“ 멍청한 놈! 아무튼 잘살거라. 이제 구림세가는 네거다.”
이연을 빤히 쳐다보던 이자승은 몸을 돌려 밖으로 나갔다. 그러고는 훌쩍 허공으로 몸을 띄워 올렸다.
“ 무존!”
“ 하명하십시오. 가주님.”
“ 금의위 영반과 약속을 잡게.”
“ 언제로 하시겠습니까?”
“ 가장 빠른 날로 잡고, 올 때 북로정군의 흑랑기에 대한 모든 자료를 챙겨 오라고 하게. 단 하나도 남김없이 전부.”
“ 알겠습니다. 가주님.”
구양을은 고개를 꾸벅 숙이곤 밖으로 나갔다.
“ 어쩌면 그랬는지도 모릅니다. 아버지. 네 맞습니다. 전 구림세가를 위해 딸을 희생시켰습니다. 그래서 더욱 포기를 못 합니다.”
조금 전 아버지가 앉아 있던 자리를 노려보며 이연은 주먹을 불끈 틀어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