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을 죽이는 서른 가지 방법
<대본> 남편을 죽이는 서른 가지 방법 원작 서미애 각색 김혁수 연출 이석형 삼성동 현대토아트홀 6/24 ~8/7 [페이지] 001 남편을 죽이는 서른가지 방법 원작 서미애 각색 김혁수 연출 이석형 <등장인물> 정미연 그녀 (정미연의 내면의 세계) 한인수 (정미연의 남편) 정명준 (신경정신과 의사) 김형사 <무대> 상징적인 무대. 중앙은 정미연의 아파트 내부로 쓰이고 그 양옆의 공간은 각각 취조실. 병원 기타 장소로 쓰인다. 그녀는 정미연 의 내면을 표현하는 인물로 정미연의 머리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상상력은 그녀에 의해 표현된다. 당연히 그녀의 행동이나 말은 억압된 정미연의 심리를 표현하는 것이므로 현실의 정미연이 순종적이고 내성적인 여자로 보인다면 그녀는 지극히 도전적이고 자기표현이 분명한 여자로 보인다. 또한 그녀는 김형사의 아내로도 활용된다. 정미연과 그녀가 단둘이 있을 때 나누는 대화는 모두 정미연의 머리속에서 일어나는 자신과의 대화인 셈이다. [장] 1장 (조명 들어오면 무대 중앙을 사이에 두고 한인수는 소파에 앉아 텔레비젼을 보고있고 반대편에는 한인수에게 등을 보이고 앉아 가계부를 적고 있는 정미연. 미연의 뒤에 서서 가계부 적는 걸 보고있는 그녀. 텔레비젼에서는 보비 트 사건이 무죄로 선고되었음을 알리는 뉴스가 방송되고 있다.) [한인수] 미친 놈들, 그게 어떻게 무죄야? 세상 남자들 겁나서 자기 마누라 옆에서 자기나 하겠어? [그녀] 진짜 멋진 뉴스야. 안그래? 그녀를 직접 만나보고 싶어. [정미연] 그 여자를 만나? [그녀] 그래. 만나면 다른 말은 필요없어. 이 한마디면 충분해. [페이지] 002 [정미연] (그녀를 쳐다보면) --- [그녀] (마치 건배를 하듯이) 부라보! (정미연 웃으며 다시 가계부를 적다가 텔레비젼 소리에 질려 귀를 막는다.) [그녀] 망할 자식 좀 줄일 수는 없는거야? [한인수] 당신 생각은 어때? (못들은 미연, 다시 가계부를 적는다.) [한인수] (슬그머니 일어나) 여보--- [그녀] 그 여자 말이야. 가위로 잘랐을까? 면도칼로 잘랐을까? [정미연] (가계부에 적으며 소리낸다) 면도칼--- [그녀] 생각만 해도 짜릿하지 않아? 자다가 일어나서 없어진 자기 물건을 찾아서 허둥지둥 헤매는 꼴을 상상해봐. [정미연] (가계부를 적다가 볼펜을 놓고 생각에 잠기다 조금 웃는다) [그녀] 그걸 들고 바지춤을 쥐고서는 열심히 병원으로 달렸겠지? (애원하듯) 살려주슈, 의사양반. 이게 없으면 내 인생은 그날로 끝장이오. (미연과 그녀 마주보고 깔깔거리고 웃는다.) (얘기를 하는 사이 한인수는 텔레비젼을 끄고 정미연의 뒤에 와 선다.) [한인수] (정미연의 바로 뒤에서) 여보! (미연 깜짝 놀라며 가계부를 급하게 덮는다) [정미연] (겁먹은 듯) --- 네? [한인수] 뭘 그렇게 열심히 적는거야? [정미연] 가-- 가계부요. [한인수] 요즘엔 하루도 빠짐없이 가계부를 쓰는군. [정미연] 다--- 당신이 선물한거 잖아요? [한인수] 그래. 난 당신이 내가 선물한 가계부를 하나도 쓰지 않은채 버리는거 같아서 앞으론 선물하지 않으려고 했었지. [정미연] 텔레비젼 안보세요? [한인수] 한심한 뉴스들 뿐이야. 세상이 미쳐돌아가는지는 알고있지만 오늘은 더 하군. 당신은 어떻게 생각해? [정미연] 뭘요? 세상이요? [한인수] 방금 텔레비젼에서 나온 뉴스. [정미연] 아!--- 글놁요. [한인수] 한심한 놈이지? 자기 마누라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줄도 모르고 있었으니 말이야. [그녀] 그건 당신도 마찬가질껄. 세상의 모든 남편들이 그렇지. 살을 맞대고 산다고 해서 그 살갗속의 생각까지 모두 알고 있다고 자신할수 있어? [한인수] 나라면 그렇게 미련스럽게 아내를 믿지 않겠어. 아, 물론 당신을 [페이지] 003 못믿는다는게 아니야. 당신은 오로지 나와 가정밖에는 모르는 착한 아내니까. [그녀] (정미연에게 얘기하듯) 그동안 들어본 얘기중에 제일 웃기는 얘기군 안그래? [한인수] 아니, 어쩌면 당신도 그런 생각을 해본적이 있을지 모르겠군. [정미연] (일어나 가계부를 서랍에 넣으며) 어떤--- 생각이요? [한인수] 나를 죽이고 싶다거나 하는 생각말이야. [정미연] 왜 그런 질문을 하는지 모르겠군요. [한인수] 가끔 당신 눈이 먼곳을 보고있는걸 느끼거든. 마치 나와 함께 있어도 당신 혼자 먼 세계에 가있는것처럼 말이야. [정미연] 당신이 예민해서 그렇겠죠. [한인수] 아니야. 난 느낄수 있어. 뭔진 모르지만 당신은 이제 내얼굴도 제대로 쳐다보지 않아. [정미연] --- [한인수] 무슨 일이 있는건 아니겠지? [정미연] 일은요. 당신 말대로 난 당신과 가정밖에 모르는 사람인데--- [그녀] 그래.난 당신과 가정밖에 모르지 매일 매일 한순간도 당신 생각을 안하는 날이 없어. 당신의 표정,말투, 몸 짓 그 모두를 말이야. [정미연] (다시 의자로 가 앉아 차를 마시며) 더 필요한게 있으세요? [한인수] (미연의 어깨를 지그시 누르며) 당신! [정미연] (흠짓) 아--- 아직 일이 남았어요. [한인수] (약간 강하게) 난 바로 지금 당신이 필요해. [그녀] 너도 그 남편과 다를게 없어. 아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그런건 아예 관심도 없지. 그저 너에게 필요한건 언제든 손가락만 까딱이면 뜻대로 움직여주는 아내뿐. 숨이 막혀. [한인수] (정미연의 어賁를 어루만지며) 당신 긴장하고 있군. [정미연] 좀 피곤해요--- [그녀] 당신은 늘 날 피곤하게 해. 커피 한잔을 마셔도 설탕과 프림을 정확하게 타야 하지. 설탕 한스픈에 프림 3분의 2스푼. 그렇게 커피를 타고 있으면 꼭 약을 제조하고 있는 기분이야. 비소 0.2그람, 청 산가리 0.5그람-- [한인수] 날 기다리게 하진 않겠지? (한인수 다짐이라도 하듯 정미연의 어깨를 지그시 누른다.) [정미연] --- 네. (들어가는 한인수. 정미연, 잠시 그대로 있다가 몸서리를 친다.) [정미연] 더 이상 견딜수가 없어. (그녀, 서랍에서 가계부를 꺼내 정미연에게 준다) [그녀] 적어. 붉은 볼펜으로 마지막 남은 한칸에 써 넣으라구. [정미연] (볼펜을 들고 생각하다 또박또박 쓴다) 잔디용 비료. [그녀] 잔디용 비료? [정미연] 거기엔 비소가 함유되어 있거든. [페이지] 004 [그녀] 그래? 그거면 더 이상 남편의 커피에 신경을 쓸 필요가 없겠군. 마지막 커피라--- 이번엔 설탕을 조금 더 넣어서 아주 달콤하게--- [정미연] 하지만 뒷맛은 아주 쓰게 느껴질껄. (그녀, 정미연의 가계부를 뺏아 들고 한페이지씩 읽는다) [그녀] 면도칼. 이붉은 글씨가 너무나 잘 어울리는군. [정미연] 그렇지? 남편의 턱밑에 가늘게 그어질 한줄기 칼자욱을 상상하면 온몸이 짜릿해. 그 선을 따라 흐르는 붉은 핏방울. [그녀] (다음장을 보며) 욕실용 슬리퍼. [정미연] 언젠가 신문에서 읽었지. 미끄러운 욕실에서 넘어져 뇌진탕을 일으키고 사망한 사람이 있었어. [그녀] 하지만 욕실에서 넘어진 남편이 뇌진탕으로 사망할 확률은? [정미연] 그래도 없는거 보단 났잖아? [그녀] (미소짓는) 물론이지. (다음 장보며) 테이프. 코와 입을 한꺼번에 막을수 있는 폭넓은게 좋겠지? [정미연] 이젠 그 지겨운 코고는 소리를 안듣게 되는거야. 사실 이것도 그 소리를 들으며 이를 갈다가 생각했지. 잠에 골아떨어져 있는 남편의 얼굴에 손을 갔다 대고 아주 조금 힘을 주고 있으니까 숨이 막히는지 고개를 흔들지 뭐야. 그래 바로 이거야! [그녀] 난 이 방법이 더 좋아. 정육점용 칼. 저 남자의 살속으로 파고 들어가는 칼자루의 느낌이 아주 생생할꺼야. [정미연] 결국 비게덩어리밖에 안되는 몸뚱아리지. [그녀]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야. (정미연의 뒤로 가 마치 한인수처럼 흉내를 낸다.) [그녀] 난 바로 지금 당신이 필요해. 당신의 생각, 감정따윈 필요없어. 지금 내게 필요한건 오로지 당신의 이 부드 러운 몸뿐. 왜, 나를 거부하고 싶나? 피곤하다구? 그러면 안되지 당신은 내가 원하면 언제든지 몸을 열어야 한다 구. 왜냐하면 당신은 내 아내니까. [정미연] (손을 탁 치며) 아내에게도 거부할 권리가 있어. 나도 생각하고 느끼고 소리칠줄 아는 인간이야. [그녀] 그래, 바로 그거야. 그런데도 저 인간은 그걸 몰라. [정미연] 하지만--- [그녀] 하지만? [정미연] 다른 여자들도 나처럼 이런 생각을 할까? [그녀] 그걸 말이라고 해? [정미연] 아니야. 그렇지 않을지도 몰라. 세상에서 가장 가까운 사이가 바로 부부잖아? [그녀] 가장 먼 사이일수도 있지. [정미연] 이렇게 지독하게 죽이고 싶을만큼? [그녀] 그래. 그리고 그게 바로 네가 원하는거 잖아? [정미연] (가계부를 뺏아 품에 안고) 그래. 그게 바로 내가 원하는거야. (한인수, 침실로 들어가다 돌아본다) [페이지] 005 [한인수] 어서 들어와. 가스밸브하고 창문 확인하는거 잊지말구. [정미연] (화들짝 놀라며) 네. 알았어요. (정미연과 그녀, 한인수가 침실로 들어가는걸 확인하고 그제야 깨달은 듯 서로 마누쳐다본다.) [정미연] 그래, 바로 그거야. [그녀] 가스. [정미연] 이집안 곳곳에 살인흉기가 숨어있는걸 저사람은 알까? [그녀] 그저 안락한 휴식처라고만 생각하겠지. [정미연] 살인은 아주 쉬운일이야. 마음만 먹는다면. [그녀] 그는 아직 살아있어. [정미연] 그래 아직은! (둘, 서로 마주보며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암전) [장] 2장 정미연, 식사준비를 하고 있다. 한인수가 식탁에 앉아 신문을 읽고 있다. [한인수] 당신 어제 외출했었나? [정미연] 네? [그녀] (놀라 돌아보며) 그걸 어떻게 알지? 혹시 언젠가 처럼 출근도 안하고 지키고 서있었던거 아냐? 이니야, 유 도심문인지도 몰라 넘어가지 마. [정미연] 궁금해요? [한인수] 당연히 집에 있어야 할 사람이 없으니까 하는 소리야. 집밖에 나가는거 별로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잖아. 당신? [그녀] 그건 당신이 원하는 모습이겠지. [정미연] 시장에 갔었어요. [한인수] 그랬군. 난 함께 밖에서 저녁이라도 할까 했는데--- [그녀] 당신이 외식을? 웃기는군. 그동안 전화를 받았던 그 많은 날들은 외식을 할 마음이 없었나? 당신은 내가 전화를 받으면 늘 몇시에 들어오겠다는 말밖에 없었어. [정미연] 다음에 기회가 있겠죠. [한인수] 물 좀 마실까? (정미연이 식탁위에 잇는 물병과 컵을 챙기나 한인수는 거들떠보지 않고 냉장고를 연다) (한인수 냉장고 안을 살피 다가 정미연의 얼굴을 힐끗 쳐다보고는 아무 말도 않고 물을 꺼내 마신다.) [그녀] 그럴줄 알았어. 왜? 큰소리라도 쳐보시지 그래? 넌 시장에 간게 아니야. 냉장고속에 이 말라비틀어져 가는 야채가 그걸 말해주고 있어. 솔직히 말해봐 도대체 어딜 다녀온거지? [페이지] 006 뭘 감추고 있는 건지 말해. 이렇게 추궁하란 말이야. (한인수 물을 소리내서 마신다) (보다가 치를 떠는 정미연 돌아서 다시 식탁에 식사를 준비한다) [한인수] 오늘은 뭘 할꺼지? [정미연] 글쎄요. 오늘 뭘 할껀지 나도 모르겠어요. 누구나 자기마음대로 하고싶은대로만 하고 살수는 없잖아요? [한인수] (뜻밖이라는 듯) 아침부터 날카롭군. [그녀] 왜 놀랬어? 언제까지나 당신 발등에 몸을 비벼대며 얌전히 있던 고양이가 발톱이라도 세운 것 같은 기분인 모양이지? [한인수] 그 소린 꼭 내가 당신을 마음대로 움직이지 못하게 가로막고 있다는 뜻으로 들리는데. [정미연] 아니예요. 단지 좀 피곤해서. [한인수] 피곤하다고? 당신은 늘 그소리만 하는군. 내게 숨기는게 있지? 말해봐 뭐든 들어주겠어. [정미연] 수--- 숨기는거 없어요. [한인수] 말해, 뭐든. 사람 신경 건드리지 말고. [정미연] --- [한인수] (물 컵을 딱 소리나게 내려놓는다) 당신이 그러고 있을 때마다 무슨 생각이 드는 줄 알아? 차가운 얼음 덩어리를 보고 있는 거 같다구. 불만이 있으면 얘기를 해. [그녀] 불만? 당신은 자신이 완벽한 남편이라고 생각하지? 불만을 얘기하면 아마 재떨이라도 집어던지면서 흥분할 걸. [한인수] (조금 화를 삭이며) 언제부터 우리가 이렇게 됐지? 당신과 나--- 제대로 대화를 나눈 게 언제였지? [그녀] 당신은 대화라는 걸 모르는 사람이야. 하루종일 내게 하는 말을 생각해봐. 나 왔다. 밥 먹자. 자자. 이 세마디 밖에 더있어? [한인수] (미연에게 다가가며) 여보, 우리 가까운 곳에 가서 바람이라도 쐬고 오는게 어 ?[정미연] 당신이 좋으시 다면요. (한인수 가볍게 포옹을 하는데 정미연의 손은 한인수의 가슴위에 있다) [그녀] 목을 졸라. 있는 힘껏. 벌건 혀를 내밀며 죽어가는 꼴을 볼수있게 목을 조르라구. (한인수. 정미연의 손을 잡아 자신의 어깨위로 올린다. 그리고 좀 더 강한 포옹) [한인수] 당신 머리를 안빗었군. [정미연] 네? [한인수] 내가 얘기했지 난 남편의 식탁을 준비하면서 머리도 빗지 않는 아내는 경멸한다고? [정미연] 미안해요 지금 빗겠어요. [한인수] 3일전 아침에도 당신은 머리를 빗지 않았지? 엘리베이터를 타는 사람들 앞에서 내가 얼마나 창피했는줄 아나? [페이지] 007 이웃에 사는 사람들 모두, 출근하는 남편을 위해 엘리베이터까지 나와서 손을 흔들어주는 당신을 보고 부러워하는 데 그렇게 모습을 보이면 되나? [정미연] 주의할께요. [한인수] 하지만 화장은 너무 진하게 하지 말라구. 닌 아침부터 요란하게 화장하는 여자 싫으니까. [정미연] 네. [그녀] 목을 졸라 어서 바로 지금이야 목을 조르라구. [한인수] 당신은 화장같은거 안해도 아름다운 여자야.여보--- (한인수, 그녀를 더욱 강하게 포옹한다. 정미연의 손이 그의 목을 향해 마치 칼이라도 든 듯 내리치려다가 힘없이 툭 떨어진다.) (한인수의 뒤에 선 그녀, 한인수의 목을 조르려는 듯 다가가는데 암전) [장] 3장 (조명 들어오며 텅 빈 무대. 잠시 후 정미연이 들어온다. 그리고 그녀도. 황급히 베란다로 달려가 밑을 향해 손을 흔드는 정미연) [그녀] 위선자. 출근길에 아내가 현관이 아닌 엘리베이터까지 나와서 손을 흔들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남자. 남들 에게 완벽한 부부로 비치고 싶어서 아내를 아주 가정적으로 꾸며서 손을 흔들게 하지. 어디 그뿐이야? 베란다에서 다시 한번 그는 내모습이 보이길 기다리며 고개를 쳐들고 있어. 우스운 일이야. 남편이 탄 엘리베이터가 1층에 도 착하기전에 줄이 끊어지길 바라는 아내를 보면서 다른 남편들은 부러운 눈길을 보내니 말이야. 그만 흔들어. 지겹 지도 않아? (정미연 돌아서서 천천히 테이블로 돌아온다. 그녀가 가계부를 꺼내 뒤적거린다. 정미연은 곧 옷들을 꺼내 몸에 대 보며 외출준비를 한다. 이와 함께 시계의 초침소리가 시간의 경과를 알리는 효과음으로 깔린다.) [그녀] 언제까지 생각만 할꺼야? [정미연] (옷을 대보다가 그녀를 본다) --- [그녀] 생각만으론 그를 죽이지 못해. 면도칼? 그저 턱밑에 흉터만 남기고 끝날수도 있어. 욕실용 슬리퍼. 이건 아주 작은 활률에 기대를 거는 정도고. [정미연] 완전범죄여야만 해. 그를 죽이고 나서 내가 안전할수 있는 방법. [그녀] 물론이지. 그를 죽이는건 우리가 자유롭기 위한거니까. 하지만 자유롭기 위해서 그를 빨리 없어야 해. [정미연] 알아 안다구. [그녀] 테이프도 약해. 만약 테이프를 붙이는 순간 그가 발악이라도 한다면? 아니 그가 눈을 부릅뜨기만 해도 넌 그대로 얼어붙어버릴껄. [정미연] 칼이라면? 정육점 칼말이야? [페이지] 008 [그녀] 그 칼이라면 토막이라도 낼수 있겠지. 토막살인. 자신있어?(정미연. 자신의 손을 바라본다. 마치 피라도 묻 어있는것처럼 자신의 손을 내려다 보고는 부들부들 떤다.) [그녀] 자유야? 아니면 평온을 가장한 이 지긋지긋한 감옥이야? [정미연] 더 이상은 참을수 없어. 내가 먼저 미쳐버릴꺼야. [그녀] 그래. 미칠거야. 그러니까 빨리 끝을 내라구. (정미연, 결심한 듯 벌떡 일어나 외출복을 입는다. 이때 울리는 전화 벨소리. 주춤하는 정미연. 망설이다 전화를 받는다.) [정미연] 여보세요? [그녀] 안들어도 뻔하잖아? (한인수처럼) 나야. 집에 있었군. 오늘은 좀 늦을꺼 같아. 아, 그렇다고 너무 늦지는 않 아. 일이 빨리 끝나면 조금 더 빨리 갈수 있을꺼야. 별일없지? [정미연] 네 아무 일없어요. 걱정마세요. [그녀] 그래, 그럼 저녁에 보자구. 사랑해 여보. [정미연] 저두요. 그럼 끊어요. (수화기 내려놓는다.) [그녀] 뭐래? [정미연] 오늘은 11시는 되야 일이 끝난다는 통보. 누가 기다리기나 하는거 처럼 먼저 저녁을 먹으라는데? [그녀] (비아냥거리듯) 자상도 하셔라. (정미연 핸드백을 들고 나가려다 사이) [정미연] 그래. [그녀] 뭐? 그래. 바로 그거야. [정미연] 11시에 일이 끝난다? [그녀] 그 시간이면? [정미연] 회사앞은 한적하지. [그녀] 지나 다니는 사람도 없고 [정미연] 오늘은 달도 없는 밤이지. [그녀] 비라도 내리면 무대는 완벽한데--- [정미연] 그래. [그녀] 그래. (둘 손바닥을 마주치고 밖으로 나가는데 암전) [장] 4장 (정명준의 신경정신과 의원. 정명준은 차분하게 앉아서 정미연을 주시하고 있고 정미연과 그녀는 초조한 듯 방안 을 서성이고 있다.) [명준] 그래서요? [페이지] 009 [미연] --- 네? [명준] 그래서 실행에 옮겼나요? [미연] 수십번도 더 실행에 옮겼죠. 등을 돌리고 선 그이의 머리에 벽돌을 던지기도 하고, 잠이 든거 같으면 그 벌린 입속으로 지기탈리스를 먹이기도 했죠. [명준] 지기탈리스라면--- [미연] 아시잖아요 심장약으로 쓰이는 약초--- [명준] 아, 조금만 많이 먹으면 심장마비를 일으키는 바로 그--- [그녀] 그건 상상일뿐이였어. 그는 아직 살아있다구. [미연] 이젠 다른 생각을 할 수가 없어요. 그 인간을 이 두손으로 죽이는 생각만으로 하루를 보내요. 내 머리속에 서 난 자꾸 나와 얘기를 하죠. 그 목소리는 어서 그를 죽이라고 말해요. 더 이상 이렇게는 살수 없다고 말이예요. [명준] 목소리라--- 그건 당신의 내면에서 외치는 바로 당신의 목소리입니다. [정미연] 그게 누구의 목소리든 상관없어요. 문제는 내가 언젠가는 그 목소리가 시키는대로 할꺼라는 생각이 들어 요. [명준] 결국 모든건 생각뿐이란 얘기군요. [미연] (힘없이 명준의 앞에 앉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 (그녀 역시 힘없이 한쪽 구석에 가 앉는다.) [명준] 마음 깊은 곳을 들여다 봐요. 정말 남편에 대한 적대감이 그렇게 큰것인지, 아니면 생각만이라는 안전한 곳에서 즐기는 게임인지. [미연] 게임이라구요? [명준] 그렇습니다. 게임--- 현실에서는 도저히 남편의 권위에 도전할수 없는 당신이 만들어낸 상상의 상황들. 거 기서 당신은 남편을 이겨보고싶은 욕구를 충족하기 위해 게임을 하고 있는 건 아닌가요? [미연] 그럼 내가 진짜로는 남편이 죽는걸 원하지 않는다는 얘긴가요? [명준] 정말 절실히 원할 수도 있겠죠. 하지만 당신은 아직 한번도 남편에게 직접적인 어떤 위해를 가하지 않았어 요. [미연] 난 완전범죄를 원한다구요. 그런 인간 때문에 내가 다치고 싶지는 않아요. [명준] 그건 살인을 현실로 옮기지 않는 자신에 대한 변명일수 있죠. [미연] (천천히 고개를 들어 명준을 본다) 선생님과 함께 있으면 점점 더 분명해져요. 머리속에 나를 가로막고 있 던 안개가 걷히는 기분이예요. 안개가 걷히면 미소를 짓고 있는 내가 보여요. 이미 죽어서 뻣뻣하게 굳어진 남편 의 시체를 내려다 보며 웃고 있는 내모습이 말이예요. 선생님은 내게 용기를 줘요. 내 머리속에 가득한 죄의식을 사라지게 해주죠. --- 선생님은 내가 남편을 죽이길 바라시죠? [명준] 아니, 난 당신이 남편을 죽이는 상상을 더 이상 하지 않기를 바랄 뿐입니다. 당신이 나를 찾아 정신과를 오는것도 그것 때문이 아닌가요? [미연] (혼란스러운 듯 머리를 흔들며) --- 선생님 제가 미친걸까요? [명준] 아니. 만약 우리 인간의 머리속을 들여다 볼수 있는 거울이 있다면 인간들이 얼마나 추악하고 더러운 동물 인지 알꺼요. 내 머리속에서 일어나는 일을 당신에게 말하면 당신은 아마 날 경멸할껄? (미연,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명준의 시선을 보다가 옷을 추스리고 단정하게 몸가짐을 가다듬는다.) [명준] 그건 자연스러운 일이예요. 자신을 미쳤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페이지] 010 오히려 순수한거지--- [미연] 그렇다면 선생님은 여기서 뭘 하시는건가요? 더 많은 정신병자들이 버젓이 활개를 치고 사는 세상이라면 선생님도 여기 있는거 보다는 밖으로 뛰쳐나가셔야 하는거 아니예요? [명준] 난 그런 정신병자들을 상대하지는 않아요. 그들은 너무나 오만해서 자신이 정상이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하 지 않으니까. [미연] --- [명준] 다만 난 당신같은 사람들을 만날뿐이지. 당신은 섬세하고 연약한 마음을 가지고 있어요. 아주 다치기 쉬운 마음이죠. 당신의 마음에 생긴 상처를 어루만지고 함꼐 그 상처를 치료하는게 바로 내가 하는 일이요. 당신은 남 편에게 받은 상처 때문에 아주 많은 고통을 겪고 있어요. [미연] 그래요. 그이는 말한마디로 내게 칼자욱을 남기는 사람이예요. [명준] 남편을 만난걸 후회하나요? [미연] 후회요? 아니요 지금은 그런 걸 생각할 틈도 없어요. 되돌릴수 없는 과거를 생각하기 보다는 지금의 상황 이 미래에 까지 연결되지 않기를 바라는게 더 급하니까요. [명준] 이혼이라는 지극히 평화적인 방법은 생각해보지 않았나요? [미연] 이혼이요? 선생님은 내가 한 얘기를 다 흘려 버리셨군요. 남편은 이 세상에 이혼이란 단어는 없다고 생각 하는 사람이예요. 결혼을 한 이상 함께 불속으로 들어가는 한이 있어도 부부라는 사슬은 풀수 없다고 믿는 사람이 라구요. 내가 왜 남편을 죽이는 생각으로 아까운 시간을 보내는지 전혀 이해하지 못하시는군요. [명준] 이해합니다. [미연] 그럼 내 얘기를 듣지만 말고 방법을 얘기해주세요. 어떻게 하면 그 인간에 대한 생각을 더 이상 안할 수가 있죠? [명준] 그 해답은 당신이 가지고 있어요. [미연] 내가요? 내가 그 방법을 알고 있다구요? [명준] 물론입니다. 문제는 시작한 사람이 풀기 마련이니까요. [미연] (천천히 생각을 하다가 명준을 본다) 전 선생님을 만날때마다 안개가 걷히는 기분이 들어요. (미연과 명준이 마주본다. 그녀 천천히 일어나 그 둘을 주시하는데) [미연] 그래요. 난 방법을 알고 있어요. 아주 확실한 방법이죠. (두 사람의 시선이 그대로 인채 잠시 있다가 암전) [장] 5장 (한인수의 회사 앞길. 자동차소리 멀리 들리고 천천히 걸어오는 한인수의 모습이 상징적인 모습으로 보인다) [정미연] (목소리) 이것 보다 더 확실한 방법은 없어. 아니야--- 모르겠어. 내가 정말 저이를 죽일 생각이 있는건 지--- 돌아가자 돌아가--- [그녀] 기회는 지금이야. 넌 자유를 원하잖아? [페이지] 011 [정미연] 자유? 그래--- 난 더 이상 참을수가 없어. (한인수, 서류봉투를 떨군다. 줍기위해 허리를 구부리는데 이때 무대 뒤쪽에서 강렬하게 비치는 조명. 마치 자동차 의 헤드라이트 불빛같다. 놀라는 한인수, 손으로 빛을 가리는데 그 위로 질주하듯 밀려오는 자동차소리. 한인수의 비명소리 그리고 침묵) [장] 6장 (주차장. 차문 닫히는 소리와 함께 조명 들어오면 정미연과 그녀의 상징적인 모습) [정미연] 이렇게 간단하다니--- [그녀] 불쌍한 사람. 겨우 뺑소니 차에 치어서 죽다니--- [정미연] 이제 다 끝났어. [그녀] 이제 그 얼굴을 다시 안본다고 생각하니까 속이 다 시원하군. [정미연] --- [그녀] 떨고 있는거야? [정미연] 그사람의 눈을 봤어. 헤드라이트 불빛에 반사되서 번뜩이는 눈으로 나를 쳐다봤어. [그녀] 아니야. 그건 단지 환상일뿐이야. 우린 눈을 감은 채 엑셀레이터를 밟았잖아? [정미연] --- 그사람 몸뚱이에서 피가 흐르고 있을까? 혹시 그 피가 강물처럼 우리의 뒤를 따랄 흐르고 있는건 아닐까? [그녀] 그 인간에게 그렇게 따뜻하게 흐르는 피가 있다고 생각해? 잊어 버려. 이제 다 끝났어. 우리는 자유야. 자 유. [정미연] 그래--- 자유--- (조명. 오버랩되어 실내가 밝아지면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오는 정미연과 그녀. 주저 앉듯이 의자에 앉는 정미연. 그녀, 주방으로 가며 잔을 찾아 든다) [그녀] 자 축배를 들어야지. 우리가 고대하던 일을 무사히 마친 기념으로. [정미연] 축배를? [그녀] 조금전 일은 잊어버려. 우리하곤 아무 상관도 없는 일이야. 우린 이제 미망인이란 근사한 이름을 단 자유 로운 새라구. [정미연] 그래. 정말 건배를 해야 할 일이지. [그녀] (잔을 들고 다가오며) 남편을 없애준 고마운 자동차를 위해. [정미연] 그리고 내 미래를 위해. (둘 건배하고 술을 마시는데 한인수가 문을 열고 슬며시 나온다) (이상한 느낌 때문에 그대로 몸이 굳는 정미연. 그녀, 그대로 얼어붙어 한인수를 본다) [한인수] 늦었군. 도대체 어딜 갔다 오는거야? [그녀] 다--- 당신은 죽었어. [페이지] 012 [정미연] (휙 돌아서며) 악! (암전) [장] 7장 (취조실. 앉아있는 정미연. 그리고 저쪽에 서있는 그녀. 서성거리는 김형사.) [김형사] 도대체 이해를 못하겠군. 당신은 지금 자신이 무슨 얘기를 하고 있는지도 모르고 있어요. [정미연] --- [김형사] (휴 한숨을 내쉬며) 이봐요 지금부터 다시 시작합니다. 한마디도 더 보태지 말고 빼지도 말고 있는 사실 그대로 얘기해요. 이름은? [정미연] 정미연--- [김형사] 죽은 사람, 알아요? [정미연] 네--- [그녀] 정말 그를 알았을까? 그가 나를 모르듯 나도 그를 모른건 아닐까? 도대체 안다는게 뭐지? [김형사] 그의 이름은? [정미연] 한--- 인수. [김형사] 한인수와는 어떤 관계였지. [정미연] 남편입니다. [그녀] 남편이라--- 한때는 그런 관계였지. [김형사] 그를 어떻게 했다구요? [정미연] 그를--- 죽였어요. [김형사] 확실한가요? [정미연] 네. [김형사] 어떻게 죽였죠? [그녀] 당신이 알고 싶은건 어떻게 죽였느냐군. 하지만 더 중요한건 왜 무엇 때문에 남편이라는 사람을 죽였는가 하는거 아닐까? [정미연] --- 그건--- [김형사] 말하세요. 당신은 분명 자신이 남편인 한인수를 죽였다고 자수를 했고 그래서 지금 경찰서에까지 온 거 아닙니까? [정미연] --- [김형사] 다시 한번 묻죠. 어떻게 죽였죠? [정미연] 어떻게? [김형사] 그를 죽인 방법 말입니다. [정미연] (그녀에게) 그가 어떻게 죽었지? [그녀] 독약을 먹였지. 아니, 아니--- 면도칼이였어. 아냐, 그것도 아니야. 주사기로 목을 찔렀던가? [김형사] 당신 진짜 범인입니까? [정미연] --- 남편은 내가 죽였어요. 그건 내가 확실해요. [김형사] 그럼 방법을 얘기해봐요. 어떻게 죽였는지--- [페이지] 013 [정미연] 모르겠어요 지금은 머리가 어지러워요. [김형사] (손으로 탁자를 탁 치며) 말이 안되잖아요. 자신이 죽였는데 방법을 모르겠다니--- [정미연] 이미 내가 알고 있는건 다 말했어요. [김형사] 이봐요 정미연씨 당신이 말한대로 매번 남편을 죽였다면 당신의 남편은 불사조예요. 당신 남편이 목숨이 아홉 개 있는 고양이쯤아라도 된다는 겁니까? [정미연] 하지만 난 내가 알고 있는걸 말씀드렸어요. [그녀] 한마디도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이군. [김형사] 으리 피곤하게 이러지 맙시다. 당신이 남편을 죽였다고 자수를 했으니까, 이제 그 방법에 대해서도 솔직 히 얘길해요. [정미연] 말했잖아요 죽일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했다구--- [김형사] 당신 남편은 그렇게 죽지 않았어. 욕실에 미끄러져 죽지도 않았고 면도칼에 찔리지도 않았고 독약을 먹 은 것도 아니야. [정미연] 하지만 남편은 죽었잖아요? 죽은건 확실하죠? [김형사] 남편이 죽지 않았다면 우린 당신을 정신병원으로 보내는 걸로 이 일을 마무리 지었을겁니다. [정미연] 정신병원? 날 미쳤다고 생각하나요? [김형사] 그럴수도 있죠. 죽이지도 않은 사람을 죽였다고 한다면. [정미연] --- [김형사] 좋습니다. 계속 자기 남편을 죽였다고 주장을 하는데는 뭔가 이유가 있겠죠. [정미연] --- 이--- 유--- (피식 웃는다) [김형사] 이거 보세요 지금 웃음이 나옵니까? [정미연] (미소를 띠운채) 미안하지만 코트 좀 가져다 주시겠어요?(한심하다는 표정으로 보다가 코트를 가져다 주 는 김형사 정미연, 코트 주머니에서 약봉지를 꺼내 커피와 함께 먹는다.) [김형사] 그건 무슨 약이죠? [정미연] 가끔 두통이 있어요. [김형사] 두통도 전염병인가 보군요. 지금 내 머리도 빠개질꺼 같습니다. [정미연] 약 드릴까요? [김형사] 당신이 사실대로만 얘기한다면 이 두통은 금방 풀리죠. (김형사, 다시 미연에게 코트를 건네받고 옷거리에 건다) [정미연] (종이컵을 들고 마시며) 커피를 아주 잘 끊이시는군요. [김형사] 혼자 지내다보면 느는건 이런거 뿐이죠. 빨래감 안만들고 버티는 법, 간단하게 한끼를 때우는 법--- [김형사] 결혼 안하셨나요? [김형사] 나를 취조하고 싶습니까? [정미연] 안하셨다면 하지 마세요. 그건 너무 잔인한 구속이예요. [김형사] 그러는 당신도 결혼을 했잖습니까? [정미연] 했었죠. 그래서 이런 충고도 할 수가 있는 거예요. 지옥에 가보지 않은 사람이 유황불이 얼마나 뜨거운 지 얘기할 수 있을까요? 유황불에 온몸을 태우고 나서야 지옥이라는 곳이 어떤 곳인지 [페이지] 014 실감을 하죠. (그녀, 천천히 김형사의 뒤로 와 김형사의 아내역을 맡는다) [그녀] 그래요 난 당신과의 결혼생활이란게 이런건줄 몰랐어요. 사건이 터졌다 하면 그날부터 당신은 사라져버리 죠. 난 이따금 당신의 내복이나 챙겨들고 찾아가서야 당신의 얼굴을 볼수가 있어요. 우리가 정말 부분가요? 이런 것도 결혼생활이라고 할수 있어요? [김형사] 당신은 그런걸 알고 시작했잖아? [그녀] 하지만 이렇게 나를 내팽개쳐 둘줄은 몰랐어요. [김형사] 난 한번도 당신을 팽개쳐 두고 있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어. [그녀] 그렇겠죠. 하지만 난 붙박이 가구처럼 당신의 속옷만 챙겨두는 여자가 아니예요. [정미연] 처음 결혼이란걸 했을 때 난 행복했어요. 누군가 내 옆에 있어줄 사람이 생긴다는 안도감 그리고 그 사 람을 사랑하고 있다는 착각이 내눈을 멀게 했던거죠. 하지만 그건 잠깐이였어요. 곧 난 내 눈에 씌워져 있던 베일 을 벗고 결혼이 어떤 현실인지를 바라보았죠. [김형사] 그건 당신이 너무 결혼에 대해 큰 환상을 품고 있던 때문 아닌가요? [정미연] 큰 기대라구요? 여자들이 결혼생활에서 뭘 기대하는데요? 그걸 아세요? [그녀] 난 당신이 해줄 수 없는 걸 원하는 게 아니예요. 잠복근무 때문에 며칠씩 자리를 비운다고 이러는 것도 아 니예요. 잠깐동안 함께 있는 시간, 그 시간만이라도 난 당신이 정말 내 곁에 있다는 걸 느끼고 싶어요. 집에 돌아 오면 피곤하다는 핑계로 그대로 이불 속으로 파고 들어가 등을 돌리고 銜는 당신을 보고 싶은게 아니라구요. [정미연] 함께 산다는건 그 시간만큼 서로에게 무관심해져 간다는거예요. 늘 똑같이 반복되는 생활, 서서히 쌓이 기 시작하는 권태, 그러다 보면 사랑했던 사람의 얼굴이 어느날 낯선 사람보다 더 멀게 느껴지죠. 정말 이사람이 내가 사랑했던 사람인지 스스로 의심을 품게 될 만큼요. [그녀] 지금은 내가 정말 당신을 사랑했었는지 조차 의심스러워요. (김형사, 정미연의 말에 끌려드는 것 같은 기분을 지우기 위해 담배를 꺼내문다. 그리고는 천천히 일어나 마치 혼 자 있는 것같은 조명이 김형사를 비춘다.) [김형사] 왜 갑자기 아내 생각이 나는 거지? 저 여자와 아내는 전혀 닮지도 않았는데--- (고개를 저으며) 모르겠 군. 아내라는 입장에 선 여자들은 모두 한핏줄을 가진 형제같은건가?[정미연] 저도 한 대 주시겠어요? (김형사, 생각에서 깨어난 듯 정미연에게 다가와 담배를 건넨다.) [김형사] 그래서 남편을 죽였습니까? [정미연] --- [김형사] 솔직히 말하자면 난 아직도 당신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잘 이해가 안됩니다. 대 부분의 부부가 결혼생활의 초라한 일상을 [페이지] 015 현실로 받아들이면서 잘 살고 있는데 [정미연] 왜 나만 유독 남편에게 살의를 품고 사느냐 이건가요? 당신이 여자들의 마음을 어떻게 알죠? 웃으면서 남편의 식탁을 준비한다고 해서 그일을 즐기고 있다고 생각하는건가요? [김형사] 정말--- 남편을 죽였습니까? [정미연] --- [김형사] 남편을--- 어떻게 죽였죠? [정미연] (단호하게) 몰라요. [김형사] 지금껏 남편을 죽였다고 해놓고 방법은 모른다니 [정미연] 다 말했잖아요? [김형사] 다시 시작합시다. 이젠 어떤 얘기도 그냥 흘려듣지 않겠소. [정미연] (주저하지만 차분하게, 마치 혼잣말을 하듯이) 자다가 깨어나니까 남편이 없었어요. 난 갑자기 불안한 생각이 들었어요. 단 한번도 자다가 없어진 적이 없는 사람이였으니까요. 그래서 거실로 나갔죠. 남편은 등을 보인채 베란다에 서있더군요. 남편은 내가 다가가고 있는 것도 모르고 무엇을 보려는지 베란다 나간에 몸을 기댄채 아파트 주차장에 시선을 주고 있더군요. 그때서야 알았죠 내가 뭘 원하는지. 난 나도 모르게 손을 뻗어 남편의 등을 힘껏 밀었어요. 남편의 몸이 이미 밖으로 많이 기울어져 잇어서 그를 미는 게 힘들지는 않았죠. 남편은 비로소 난간을 붙잡으려고 안간힘을 쓰면서 나를 돌아보더군요. 내가 자기를 밀어 떨어뜨리려 한다는 걸 알고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어요. 불빛에 비치던 그의 얼굴이 어둠 속으로 떨어지고 나서 도 나는 아무 생각을 할 수가 없었어요. 나를 쳐다보던 그 눈동자가 나를 그 자리에서 조금도 움직일수 없게 만들 어 놓은거죠. 겨우 용기를 내서 베란다 아래를 쳐다보았어요. 7층이라서 그의 얼굴이 보일리 없는데 난 그의 표정 까지도 읽을 수가 있었어요. 난 기겁을 하고 베란다에서 물러섰어요. 그리고 바로 당신이 올 때까지 벽 한쪽에 웅 크리고 서 있었어요. [김형사] 이번엔 내가 한번 얘기해 볼까요? 당신은 내가 찾아갔을때까지도 남편이 없어진줄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자다가 나온 듯 헝크러진 머리로 늦은시간에 찾아온 나를 의아한 눈으로 쳐다보고 있었죠. 당신은 내가 말을 꺼내 기전까지는 아무것도 모르는 표정이였습니다. [정미연] --- [김형사] 남편이 죽었다는 사실을 알리자 당신은 허둥거리기 시작했죠. 온집안을 찾아헤매다가 당신은 주저앉으면 서 말했어요. 당신이 남편을 죽였다고 말입니다. [정미연] 내가 죽였어요. [김형사] 남편은 아파트 베란다에서 떨어져 죽은게 아닙니다. [정미연] 확실해요 내가 등을 밀었어요. [김형사] 아니예요. [정미연] (강하게) 아니예요 아니예요 남편을 죽인건 나예요. [김형사] 아니야 도대체 무슨 속셈으로 그러는진 모르지만 난 당신의 말을 믿지 않아. [그녀] 왜 화를 내는거지? 그래 자존심에 상처를 받았군. 이런 말도 안되는 놀이가 이젠 싫증이 나셨다는 표시지. [김형사] (화를 가라앉히며) 더 이상의 싸움은 아무런 의미가 없어요. [페이지] 016 [정미연] --- 커피가 식었군요. (김형사 정미연을 쳐다보는데 암전) [장] 8장 (정미연의 아파트. 혼자 서있는 김형사. 무표정한 모습으로 서성이다 서랍을 뒤진다. 가계부를 찾아 뒤적이는 그.) [김형사] 면도칼--- (한 페이지를 넘기고) 욕실용 슬리퍼--- (또 넘기고) 테이프--- (넘기고) 가스--- 도대체 이 붉은 글씨들은 뭘 말하고 있는거지? 그렇다면 이건--- 정미연--- 남편을 죽이는 아내--- 아내--- (이때 조명 바뀌면서 상징적인 음악이 흐른다) [김형사] 아내--- 나의 아내--- (황급히 마임동작으로 공중전화를 건다) [김형사] 당신이군. 나야--- 아니 갑자기 생각이 나서 --- 난 잘 지내고 있어. 당신은? --- 아직도 내게 화가 나 있나? (음악과 함께 상상의 세계로 빨려 들어가면서 암전) [장] 9장 (김형사의 아파트. 그러나 실내는 정미연의 아파트 그대로다. 모든 것이 같은 상황이다. 지금부터는 정미연이 그녀가 되고 그녀가 김형사의 아내가 된다. 가계부를 적고있는 그녀. 어디선가 들려오는 텔 레비젼의 끝나는 소리 시계소리가 들리고.) [정미연] 남편은 오늘도 오지 않는다. 바쁘다는 이유로 전화 한통화도 없이 또 나를 혼자 내버려둔다. 이젠 뭔가 결단을 내려야 한다. (김형사가 문을 열고 들어온다) [김형사] 당신 아직 안자고 있었군. [그녀] (김형사를 노려보다가 다시 가계부를 쓴다.) --- [김형사] 화가 나있군. [그녀] 화가 나요? 내가 왜? [김형사] 당신도 알잖아. 관내에 큰 사건이 계속 일어나고 있어. [그녀] 알아요. 나도 신문과 텔레비젼을 통해서 뉴스를 보니까. [김형사] --- [정미연] 당신과 나, 우리 사이에 더 큰 사건이 일어나고 있는건 왜 모르지? [페이지] 017 [김형사] 가계부를 적고 있군. [그녀] 별로 적을 것도 없죠. 당신이 가져다주는 그 알량한 월급으로는. [정미연] 맨 아래에 남아있는 빈칸. 그 빈칸은 나에게 무엇인가를 적어 넣으라고 조르고 있는 것 같았다. 난 붉은 글씨로 이렇게 적었다. [그녀] 면도칼. [김형사] 면도칼이라구? [그녀] 그래요. 당신의 턱밑에 붉은 칼자욱을 남길 칼이죠. [정미연] 이런 상상이라도 하지 않으면 난 미쳐버릴껄요? [그녀] 난 매일 이 가계부에 당신을 죽일 방법 한가지씩을 적고 있어요. [김형사] 여--- 여보--- [정미연] 그동안 얼마나 많은 방법을 생각해 냈는지 궁금하지 않아요? 보여드려요? [그녀] 당신이 원하는 방법으로 골라봐요. 당신은 내기분 같은걸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지만 난 당신의 의견을 존 중해요. 원하는 방법으로 죽여줄 아량정도는 있어요. (정미연과 그녀가 천천히 김형사에게 접근한다. 겁먹은 표정으로 둘을 번갈아보는 김형사.) [정미연] 가스 사고는 어때요? 당신의 그 잘생긴 얼굴과 몸뚱아리가 한꺼번에 날라가 버리는거죠. [그녀] 아니면 청산가리는? 죽는게 좀 고통스럽기는 하겠지만 당신의 몸은 그대로 보존할 수 있지. [정미연] 정육점용 칼도 있어. 애인의 몸을 토막내서 냉장고에 넣고 매일 그 고기를 먹었다는 사람 얘기 들어본 적 있어? (김형사, 물러서다가 머리를 감싸안고 주저앉는다.) [김형사] 그만, 그만! (정미연과 그녀의 차가운 표정이 김형사를 주시하고 천천히 암전 김형사만이 조명을 받는다.) [김형사] (고개를 흔들며) 세상의 모든 아내들이 다 그런건 아니야. 정미연이나 내 아내--- 그들은 무엇 때문에 그런 무서운 음모를 꾸미는 것일까? 정말 세상의 남편들은 아내의 마음을 조금도 눈치채지 못하고 있는것인가? 이 게 단지 내 상상에 불과한 일일까?(암전) [장] 10장 (정명준의 병원. 명준이 가볍게 맨손체조를 하고 있고 김형사가 들어온다) [정명준] 죄송합니다만 지금은 점심시간입니다. [김형사] 경찰서에서 나왔습니다. 아까 전화 드렸죠. [페이지] 018 [정명준] 아, 잠깐만 기다리시겠습니까? (김형사, 말없이 소파에 가 앉는다) [정명준] 이렇게 점심시간이라도 잠깐 몸을 움직이지 않으면 하루종일 앉아만 있어야 해서요. [김형사] 괜찮습니다. 기다리죠. (이때, 어슴프레 보이는 그녀. 지금부터 그녀의 공간은 정명준과 김형사가 있는 공간과는 다른 공간의 개념으로 쓰 인다.) [그녀] (정명준과 김형사를 주시하는) --- [정명준] (자리에 앉으며) 죄송합니다. 일부러 여기까지 찾아오셨는데--- [김형사] (주머니에서 약봉지를 꺼내며) 이 약봉지, 여기꺼죠? [정명준] (보고) 그런데요. [김형사] 정미연씨가 이 약봉지를 가지고 있더군요. 신경정신과 전문의 정명준이라 쓰인 이 약봉지를 말입니다. 전 이제야 해답을 찾을 것같은 생각이 듭니다. [정명준] --- [김형사] 정미연씨가 여길 왜 왔습니까? [정명준] 환자와의 면담은 밝힐수가 없게 되어 있습니다. 그건 환자의 권리이자 의사의 의무이기도 하죠. (이때, 취조실에 앉아있는 정미연의 모습이 보인다.) [정미연] (허공을 보고 있다) --- [김형사] 그러시겠죠. 하지만 지금 정미연씨가 살인혐의로 경찰서에 있습니다. [정미연] 난 남편을 죽였어요. 내가 범인예요. [그녀] 너무 간단한 일이였지. [정명준] (놀라는) 살인--- 혐의라구요? [정미연] 그래요 내가 죽였어요. 늘 말했었죠. 남편을 죽여야겠다고. [그녀] 이제 난 자유예요 자유.(미친 듯이 웃어댄다) [정명준] 아냐, 이--- 이건--- (정명준 일어나 서성거린다) [김형사] 정미연씨가 여길 왜 왔는지, 어떤 치료를 받았는지 알아야 합니다. [정명준] 그 남편이 죽은게 확실합니까? 시체를 확인하신거냐구요? [정미연] 정말 그가 죽었을까? [그녀] 당연하지! [김형사] 경찰은 확인된 사실을 가지고 수사를 합니다. 어제밤 아파트 경비원의 신고를 받고 현장에 나가 시체를 확인했습니다. [정명준] 믿을수가 없군. [정미연] 아직도 그가 죽었다는걸 믿을수 없어. [그녀] 그는 죽었어. 이건 완벽한 계획이였어. 우리가 꿈꾸던. [김형사] 정미연은 자신이 남편을 죽였노라고 시인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녀의 진술과 살인형장의 상황이 하 나도 맞지 않습니다. 자신이 죽였다면 그 방법을 알고 [페이지] 019 있었을텐데--- [장미연] 난 내가 알고 있는 모든 방법을 얘기했어. [그녀] 하지만 그가 죽은건 딱 한가지 방법에 의한거야. 김형사가 원하는 것도 바로 그거지. 도대체 그는 어떻게 죽은거지? [정명준] 그녀는 뭐라고 하던가요? [김형사] (어이없는 웃음) --- [정명준] 어떤 이야기든 상관없습니다. 그녀가 한말들을 하나도 남김없이 말해주십시오. 이건 아주 중요한겁니다. [정미연] 이제 와서 그게 무슨 상관이야. 중요한건 그사람이 죽었다는거야. 이제 이세상에 그 사람이 없다는 거 바로 그거라구. (김형사, 천천히 일어나 취조실로 간다) [김형사] 그를 어떻게 했다구요? [정미연] 그를--- 줄였어요. [김형사] 확실한가요? [정미연] 네. [김형사] 어떻게 죽였죠? [정미연] --- 그건--- [김형사] 말하세요. 당신은 분명 자신이 남편인 한인수를 죽였다고 자수를 했고 그래서 지금 경찰서에 까지 온거 아닙니까? [정미연] --- [김형사] 다시 한번 묻죠. 어떻게 죽였죠? [정미연] 어떻게? [김형사] 그를 죽인 방법 말입니다. [정미연] 독약을 먹였죠. 아니, 아니--- 면도칼이였여. 아냐, 그것도 아니야. 주사기로 목을 찔렀던가? [김형사] 당신 진짜 범인입니까? [정미연] --- 남편은 내가 죽였어요. 그건 확실해요. [김형사] 그럼 방법을 얘기해봐요 어떻게 죽였는지--- [정미연] 모르겠어요 지금은 머리가 어지러워요. [김형사] (손으로 탁자를 탁 치며) 말이 안되잖아요. 자신이 죽였는데 방법을 모르겠다니--- [정미연] 이미 내가 알고 있는건 다 말했어요. [김형사] 이봐요 정미연씨 당신이 말한대로 매번 남편을 죽였다면 당신의 남편은불사조에요. 당신 남편이 목숨이 아홉 개 있는 고양이쯤이라도 된다는 겁니까? [정미연] 하지만 난 내가 알고 있는걸 말씀드렸어요. [김형사] 우리 피곤하게 이러지 맙시다. 당신이 남편을 죽였다고 자수를 했으니까. 이제 그 방법에 대해서도 솔직 히 얘길해요. [정미연] 말했잖아요 죽일 수 있는 방법을 동원했다구--- (취조실의 조명 흐려지며 김형사 다시 병원으로 와 앉 는다) [김형사] 도대체 왜 그런 얘기를 하는지 알아야 합니다. [정명준] (잠시 생각하다 챠트를 찾아 건넨다) --- [김형사] (호기심어린 눈으로 차트를 건네 받아 본다) --- 이게 무슨 소립니까? [페이지] 020 [정명준] 그녀의 진찰기록푭니다. 그녀는 정신장애가 있었죠. [정미연] (관객석으로 시선을 돌리고) 선생님 내가 미친건가요? [그녀] 아니 그건 자연스러운 일이야. 누구나 그런 상황에 부딪치면 탈출하고 싶어할꺼야. 어떤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정명준] (혼자말처럼) 남편이 진짜로 죽었다.. 그런 상황이라면 상태가 더 심각해질지도 모르는데--- 정말 남편 을 죽인게 자신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김형사] 무슨 말씀입니까? 그녀는 이미 자기가 범인이라고 자백을 했어요. [정명준] 아닙니다. 그녀는 남편을 죽이지 않았습니다. [정미연] 너무나 생생해요. 남편의 목을 조르고 그가 마지막 숨을 헐떡이던 모습이 말이예요. 손끝으로 그의 몸 속에 흐르는 피의 속도를 느꼈어요. 난 손에 더 힘을 주었죠. 내가 움켜쥔 그의 목 줄기 속을 흐르던 피가 천천히 멈추는걸 느꼈어요. 피가 돌지 않는 그이 몸은 고깃덩어리 바로 그거였어요. [김형사] 남편을 죽이지 않았다구요? [정명준] 물론 그녀가 남편을 죽였다고 한 말들은 다 맞는 얘깁니다. [김형사] 아니 방금--- [정명준] 머리속에서 일어난 일들을 생각하면 그녀의 말은 다 옳죠. 현실에선 그렇지 않지만 말입니다. 일종의 강 박관념이라고나 할까요? 남편에 대한 미움이 커진 나머지 매순간 그녀는 남편을 죽이는 상상을 해왔습니다. 그런 데 진짜 남편이 죽었다는 얘길 들으니까 자신이 정말 죽인걸로 착각을 하는거죠. [김형사] 예? [정미연] 그래요 난 남편을 하루도 빠짐없이 매일 죽여왔어요. [김형사] 그렇게 남편을 미워했다면 착각이 아닐수도 있는거 아닙니까? 상상만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결국 살의를 실행에 옮겼다면? [정명준] 아닙니다. 전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녀가 상상과 현실을 구분하지 못하고 당황할 때가 있는건 사 실이지만 그렇다고 직접 행동에 떬겼다는건 믿기 힘든 일입니다. (정미연과 그녀가 빙그시 웃는다) [김형사] 하지만 선생님 얘기로는--- [정명준] 정말 죽일 마음이 있었다면 나를 찾아왔을까요? [김형사] 그거야--- [정미연] 남편은 죽었어요. [정명준] 두려웠던 겁니다. 그런 생각을 하는 자신이, 그리고 마음깊은 곳에서는 누군가 자기의 그런 생각을 말려 주기를 바라고 있었던거죠. 그래서 그녀는 내게 도움을 요청했던겁니다. [김형사] (혼잣말처럼) 그럼--- 그래서 정미연은 진술을 하면서도 그렇게 당황했었던건가? 정말 그녀는 자기가 상상한 방법으로 남편을 죽였다고 믿고 있는건가? 하지만 내가 본 상상은--- 상상과 현실의 경계란 뭐지? 남편을 죽이지는 않았지만 매일 머리속에서 남편을 죽이는 아내. 뭐가 다르지? [정명준] 한달전쯤인가 그녀로부터 전화를 받았습니다. 그녀는 당황한 목소리로 자기가 남편을 죽였다고 하더군 요. 남편의 회사앞에 차를 대고 있다가 회사에서 나오는 남편을 자동차를 죽였다고 말입니다. 전 그녀의 목소리를 [페이지] 021 듣고 정말로 그녀가 남편을 죽였는줄 알았습니다. 상담을 하면서 계속 그녀의 상태를 알고 있었는데도 말입니다. 그녀의 다급한 목소리를 듣는 순간 그게 현실처럼 느껴졌거든요. 자세한 얘기를 들어보려고 더 말을 시켰지만 그녀는 곧 전화를 끊었습니다. 그날 밤 내내 정말 그녀가 남편을 죽 였는지 불안해서 잠을 못이룰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결과는 어땠는줄 아십니까? [정미연] 남편은 아직도 죽은게 아닐지도 몰라. 어쩌면 어딘선가 나를 지켜보며 어디 더 죽여보시지 하고 있을지 도 몰라. [정명준] 남편은 살아있었습니다. 그녀는 자기가 상상한 일을 실제로 했다고 믿고 있었던겁니다. [그녀] 그래, 어쩌면 지금도 현실이아닐지 몰라. [김형사] 도무지 뭐가 뭔지 모르겠군요. 저지르지도 않은 일을 했다고 믿는다--- 하지만 지금은 실제로 남편이 죽었습니다. 아파트 주차장에 등에 칼을 맞은 상태로 죽어 있었단 말입니다. [정미연] 그래 확실히 이번엔 죽었어. [그녀] 우리가 죽였지. [정명준] 우연의 일치가 아닐까요? 조금전 제가 하신 말처럼 그녀의 진술과 현장상황이 하나도 맞지 않은데 그녀 가 범인이라고 생각할 수는 없죠. [김형사] 정말 그녀가 했을 가능성은 없는걸까요? [정명준] 진짜 그럴 마음이 있었다면 벌써 행동으로 옮겼을겁니다. 이건 좀 다른 얘기같지만 잠을 자다가 소변이 마려우면 우리는 꿈속에서 소변을 봅니다. 그리고는 다시 깊은 잠속으로 빠져들지요. 생각이란 이렇게 욕망을 채 워주는 역할을 합니다. [김형사] 그러니까 그녀는 살인하는 생각만으로 남편을 죽이고 싶다는 욕망을 충족시켰다 이겁니까? [정명준] 그렇습니다. 그래서 한동안은 또 남편에 대한 증오를 견디며 살아가는 거죠. [김형사] (혼잣말로) 남편에게 살의를 품은 여자--- 아내--- [정미연] 난 그의 아내였어요. [그녀] 모든 여자는 다 똑같은 거야. 그런 마음을 실행에 옮기느냐, 못 옮기느냐의 차이가 있을 뿐--- [김형사] 이유가 무었이였을까요? [정명준] 환자는 어린 시절 무서운 아버지 밑에서 엄하게 자랐습니다. 아버지의 한마디가 곧 그녀의 모든 행동을 결정하는 열쇠였죠. 아버지가 원하는 대로 살면서 그녀는 점점 자기 안에 자신을 억압하는 대상에 대한 미움을 만 들어가고 있었던거 같습니다. 귀가시간이 조금만 늦어도 머리를 짤라버리는 아버지, 그러나 감히 아버지의 권위에 도전할 수는 없어서 탈출 할 기회만 기다린거죠. 그 기회는 바로 결혼 이였습니다. 하지만 남편은 그녀가 생각했 던 것처럼 평화를 약속하는 탈출구가 아니였나 봅니다. [정미연] 남편은 내가 집에서 무엇을 하는지, 누구와 만나고 어떻게 시간을 보내는지 늘 물었습니다. 난 또 다시 나를 옭아매는 시선속에 갇히고 말았어요. [정명준] 그녀는 자신의 예민한 성격 때문에 남편의 애정도 제대로 받아들일 마음의 준비가 안되있었습니다. 남편 이 그걸 파악하고 조금만 그녀를 자상하게 돌봐주었더라면 그녀도 상처를 씻고 남편을 사랑했을지 [페이지] 022 *누락 [페이지] 023 모르죠. 사실 우리는 함께 사는 아내나 남편의 마음이 어떤 모양을 하고 있는지 잘 모르죠. 겉으로 보이는 관계에만 만족하고 있다고 할까요? [김형사] (혼잣말) 남편과 아내--- 내아내도 나를 죽이고 싶어 했었을까? [정명준] 제가 할수 있는 얘기는 이게 답니다. 난 그녀의 머리속에서 일어났던 살인을 비난할수 없습니다. 사실 우리는 머리속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을 죽이고 살리고 합니까? [김형사] 그렇죠--- 난 그녀를--- 내 아내를 비난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정명준] 당신은 남을 죽이고 싶은 욕망을 느껴본 적이 없었습니까? 단지 상상이기 때문에 안심하고 살인을 꿈꾼 적이 없나요? (대답하지 못하는 김형사.) (조명이 바뀌면서 김형사만이 서있다. 그곁에 와 서는 그녀) [그녀] 그래요 난 당신과의 결혼생활이란게 이런건줄 몰랐어요. 사건이 터졌다 하면 그날부터 당신은 사라져버리 죠. 난 이따금 당신의 내복이나 챙겨들고 찾아가서야 당신의 얼굴을 볼수가 있어요. 우리가 정말 부분가요? 이런 것도 결혼생활이라고 할수 있어요? [김형사] 당신은 그런걸 알고 시작했잖아? [그녀] 하지만 이렇게 나를 내팽개쳐 둘줄은 몰랐어요. [김형사] 난 한번도 당신을 팽개쳐 두고 있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어. [그녀] 그렇겠죠. 하지만 난 붙박이 가구처럼 당신의 속옷만 챙겨두는 여자가 아니예요. 처음 결혼이란 걸 했을 때 난 행복했어요. 누군가 내 옆에 있어줄 사람이 생긴다는 안도감 그리고 그 사람을 사랑 하고 있다는 착각이 내 눈을 멀게 했던 거죠. 하지만 그건 잠깐뿐 이였어요. 곧 난 내눈에 쓰워져 있던 베일을 벗고 결혼이 어떤 현실인지를 바라보았죠. [김형사] 그건 당신이 너무 결혼에 대해 큰 환상을 품고 있던 때문 아닌가요? [그녀] 큰 기대라구요? 여자들이 결혼생활에서 뭘 기대하는데요? 그걸 아세요? 난 당신이 해줄수 없는걸 원하는게 아니예요. 잠복근무 문에 며칠씩 자리를 비운다고 이러는 것도 아니예요. 잠깐동안 함께 있는 시간, 그 시간만이 라도 난 당신이 정말 내 곁에 있다는 걸 느끼고싶어요. 집에 돌아오면 피곤하다는 핑계로 그대로 이불 속으로 파 고 들어가 등을 돌리고 銜는 당신을 보고 싶은게 아니라구요. 지금은 내가 정말 당신을 사랑했었는지 조차 의심스 러워요. 아니 어느땐 정말 당신이란 사람을 죽이고 싶기도 해요. [김형사] 그만 그만-- 이제 당신에게 더 이상 그런 얘기 듣고 싶지 않아. 난 당시이 만족스러워서 입을 다물고 사 는줄 알아? 당신은 나를 쥐꼬리만한 월급을 믿고 사는 나약한 남자로 만들고 있어. 다른 남편들과 나를 비교하면 서 빈정거릴땐 나 역시 당신의 목을 조르고 싶다구. 그 입을 다물게 하고 싶단 말이야. [그녀] --- 우린 서로 죽이고 싶어하면서도 함께 살고 있군요. 도대체 남편과 아내란게 어떤거죠? (김형사 그녀를 쳐다본다 둘의 시선이 부딪치면서 얌전) [장] 11장 [페이지] 024 [김형사] (목소리) 그 후 내가 들은 얘기는 모두 그녀가 범인일수 없다는 상황뿐이였습니다. 남편의 등뒤에 꽃혀있던 칼은 무디고 녹이 쓸어 여자의 힘으로는 사망에 이르게 할수 없다는 국립과학수사 연구소 의 의견, 그리고 그녀의 알리바이. 경비원의 말에 의하면 그 아파트는 출입구가 하나밖에 없고 자신이 마침 문밖 에 의자를 놓고 앉아있었기 때문에 출입을 한 사람을 다 알고 있다고 했습니다. 결국 그녀는 거짓말 탐지기로 자 백의 진실을 조사받아야 했습니다. 그녀가 거짓말탐지기로 조사를 받고 잇는 동안 난 밖에 잇는 모니터를 통해 그 녀의 얼굴을 다시한번 찬찬히 바라보았습니다. 왠지 조사가 끝나기도 전에 난 그녀가 무죄라고 믿고 있었습니다. (조명이 켜지고 정미연과 김형사가 들어온다. 김형사, 그녀에게 코트를 입혀준다) [정미연] 이제 다 끝난건가요? [김형사] 그렇습니다. 이제 당신은 더 이상 남편을 죽이지 않아도 됩니다. 비록 상상이라고 해도 이제는 끝내요. [정미연] --- [그녀] 당신은 내가 현실과 상상도 구분하지 못하는 가여운 여자로 보이지? 그렇게 나를 동정어린 눈으로 볼꺼 없 어. 어쨋든 난 남편을 죽인 여자니까. [김형사] 난 이제부터 시작입니다. [정미연] 네? [김형사] 범인이 누군지 이제부터 찾아야죠. (정미연, 말없이 김형사에게서 몸을 돌려 그녀에게 다가간다.) [김형사] 범인은 누구지? (조명이 모아지면) [김형사] (돌아가는 정미연에게) 정미연씨! [정미연] (움칠해서 돌아보는) --? [김형사] 누가 남편을 죽일 이유를 가지고 있었을까요? [정미연] 정말--- ? 정말 제 남편이 죽은 게 확실 한가요? [김형사] 네? [정미연] 두려워요. 지금 집에 돌아가 현관문을 열면 또 다시 남편이 저를 노려보며 서있을 꺼 같아서--- [김형사] 그런 일은 없을겁니다. [정미연] 남편을 죽인게 제가 아니라면 누가 남편을 죽였을까요? [김형사] --- ! [정미연] --- 이런 말 하면 욕하실지 모르지만 전 그런거 우무래도 상관없다는 생각이 들어요. 이미 내 마음속에 서 수십번 죽은 남편이니까요. 그럼--- [김형사] 하지만 남편을 죽인 살해범을 꼭 잡겠습니다. 그게 바로 제가 해야 할 일입니다. [페이지] 025 (잠깐 주춤하던 정미연, 그대로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녀에게 다가간다. 시선 마주치고 빙그시 웃는 사이) [김형사] 범인은--- 누구인가?--- (김형사는 반대편으로 걸어간다. ) (정미연은 그녀에게 다가가 선다. 그녀는 서있고 정미연은 앉아있다. 송수화기를 들고 객석을 향해 앉은 미연.) (이때 반대공간의 김형사도 송수화기를 들고 객석쪽으로 돌아간다) [김형사] 당신이야? 나야--- 우리 다시 만나서 얘기 하지--- 아니 난 이야기를 해야해. 난 당신에 대해서 아무 것도 모르고 있다는걸 알았으니까--- 10년 넘게 함께 살면서도 난 당신을 몰라--- 모르겠어--- (하지만 김형사 는 아무도 받지 안 는 신호음 위에 대사를 하는 것이다. 멍한 표정으로) (전화기에서 지금 거신 전화번호는 결번이오니 다시 확인하고 걸어주십시요하는 안내방송이 나온다. 송수화기를 든 손이 떨어지며 허털해 하는데 조명이 천천히 꺼지고. 정미연 쪽의 공간만 남는다.) [정미연] 정명준 신경정신과죠? 정명준씨 부탁합니다. (사이) 저예요. 저 미연이예요--- (소리나게 웃으며) 그래요 다 끝났어요. 완전범죄죠. 당신이 그이를 어떻게 죽였는지 궁금한데요? 그래요, 곧 당신에게 달려가겠어요. 당신을 사랑해요--- 이제 난 당신의 아내예요--- 당신은 제 남편이구요. (방긋이 웃는 그녀의 차가운 표정과 함께 조명 천천히 꺼진다)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