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 겨울 어느 밤. 서울 도심의 고층 빌딩에서 계약직사무보조 일을 마친 나는 퇴근길의 버스에서 목격했던 풍경을 잊을 수 없다. 20여 년간 익숙하게 보고 지나치던 도시의 상징적인 지표가 눈앞을 모두 가릴 정도의 화염에 휩싸여 불타고 있는 것이었다. 지친 모습으로 집으로 돌아가던 버스 안의 사람들은 경악스러움을 감추지 못해 탄성을 지르면서도 기이한 매혹에 끌려 멍하니 그 풍경을 넋 놓고 바라보았더랬다.
오늘날 우리는 이런 경악스럽고도 스펙터클한 풍경들이 넘쳐흐르는 잔혹한 시대를 살고 있다. 끝없이 계속되는 '비정규직' 인생과 삶의 빈곤화에 지친 30대 초반의 어느 청년은 지난 직장에서 자신을 따돌렸던 동료 노동자들에게 묻지마 칼부림을 하고, 국가권력은 자본의 재개발 논리에 쫓겨나는 시민들을 쫓아내다 다섯 명의 시민과 한 명의 청년 경찰을 죽게 만들었다. 그럼에도 멀쩡하고 세련된 모습으로 탈바꿈하는 도시의 외관을 보면 이 도시에 과연 사람이 살 만한가 의심을 품게 된다. 사람이 돈에 내쫓기고 그 쫓겨난 사람이 불을 지르고 또 그 모습을 보고 많은 사람들이 절망하는 이곳이 바로 지옥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러나 "무수한 칸막이에 갇혀 잘게 쪼개졌던 우리의 시각이 죽음 및 사후 세계를 상기함으로써 놀랄 만큼 효과적으로 통합되어 전체의 지평을 획득"(장석만)할 수 있다면 차라리 "인문학자에게는 지옥이 필요"한지도 모른다. "우리 눈에 덮여 있던 격자를 치워버리고, 지옥의 거울에 투영된" 인문학을 새롭게 살펴볼 수 있기 때문이다.
우선 우리는 어떤 성찰도 없이 달리는 기차 위에 선 우리를 잠시 멈추게 하기 위해서라도 잠시간 피폐한 얼굴로 이런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 그 무엇도 문명-세계와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 누군가는 "'사람 사는 세상'답지 못해!"라고 표현할, 이 세계에서 나는 대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우리는 왜 이런 끔찍한 파국을 맞이했으며, 어떻게 삶과 대면해야 모종의 희망을 재건할 수 있는가.
▲ <싸우는 인문학 - 한국 인문학의 최전선>(서동욱 외 지음, 반비 펴냄). ⓒ반비
<싸우는 인문학 – 한국 인문학의 최전선>(반비 펴냄)의 출간을 기획한 철학자이자 시인 서동욱은 이 책의 필자들이 다루고 있는 스티브 잡스, 안철수, 프랑스 철학, 동양고전, 저항, 사회과학, 독일어, 심리학, 과학, 대하소설, 비평, 성폭력, 영화, 시, 사도 바울, 노동자, 정신분석, 지옥, 역사학, 번역, SNS 등의 모자이크 조각들 같은 토픽들에 "너는 지금 잘 살고 있는가?"라는 물음이 들러붙는다고 말한다. 이는 자리를 잃은 채 부유하는 오늘날의 '인문학'에게 제 몫을 부여하는 나침반 같은 물음이다.
서동진, 한보희, 서동욱, 신정근, 표정훈, 노정태, 김원, 김태환, 이남석, 이상헌, 정영훈, 우찬제, 전상진, 진태원, 신상숙, 강유정, 강양구, 강응천, 맹정현, 장석만, 윤성우, 최정우 등 우리 시대 가장 '불온하고 비판적인(혹은 그렇게 보이는)' 인문·사회학 연구자들의 인문학에 대한 날카로운 질문들로 이루어진 이 책은 지난 해 <경향신문>과 <프레시안>에 연재되었던 '인문학'을 주제로 한 스물다섯 개의 글들을 하나로 모은 것이다. 주류 인문학과 지배 이데올로기에 대한 불편한 문제제기인데다 정치철학부터 사회과학, 문학, 정신분석까지 인문학 자신의 광범위한 범주를 짧은 논의로 이루어진 글들로 포괄하고 있기에 쉽사리 소화할 수 있는 책은 아니다.
불과 7~8년 전, 일군의 학자들이 자못 의미심장하게 "인문학의 위기"를 선언했을 때만 해도 이런 '위기'(라고 호명된) 상황이 우스꽝스러우리만치 쉽게 뒤집혀지리라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오늘날 "새로운 자본주의가 인문학을 끔찍이도 애호한다는 것은 너무나 뻔한 사실"이 되었으며, "신자유주의가 애호하고 장려하는 새로운 인간 모델"인 기업가는 "열정적이고 창의적이며 자발적이고 반규범적인 인물"(서동진)을 가리키게 되었고, "대한민국이라는 정치체에 뚫린 거대한 상처이자 구멍"(한보희)에는 많은 이들이 '인문학적 정치인'이라고 부르고 싶어 하는 '안철수'가 등장했다. 요컨대 인문학은 "엉뚱한 탈을 쓰고"(서동욱) 우리 앞에 다시 나타난 것이다.
불행히도 나는 (이렇게 인정하는 것이 마냥 비겁한 일은 아닐 것이다.) 이 어마어마한 질문들을 품고 있는 책에 어떤 총평을 내릴만한 깜냥을 갖고 있지 못하다. 몇 시간 후 해가 뜨면 다시 온갖 소음과 악다구니로 가득한 노동의 현장으로 출근해야할 운명이라는 사실을 인정한다면, 이 책에서 거두어들인 질문들을 내 삶의 공백과 곤경들에 어떻게 스며들게 하느냐가 뾰족한 긴장감을 안겨주는 중요할 문제일 뿐이다.
사실 이 책을 읽는 내내 어떤 입장에서든 혼란에서 벗어나기 힘들다. 이를테면 세상과 자신을 동시에 수리하는 '싸우는 인문학'의 정신에 따라 가늠할 때, 신자유주의와 자기계발하는 주체의 이데올로기를 비판하는 서동진의 관점과 "지시를 받는 걸 이행하는 30대"를 벗어나 '마흔'이 되면 논어를 읽으며 삶을 돌아보고 '자기주도적 삶'을 기획하고 창조해야 한다(<마흔, 논어를 읽어야 할 시간>(21세기북스 펴냄))며 "변화의 시기에 인문학이 주는 통찰력이 유용하다"고 말하는 동양고전 연구자 신정근의 관점은 마주치기 어려워 보인다. 이 책에서 신정근은 "동양고전은 왜 처세술로 읽히"는가, "동양 현대철학은 가능한가" 등 자못 첨예한 질문을 던지지만, 그 답을 대강 요약하자면 처세술로 읽히는 것은 텍스트 자체의 한계에서 기인하는 바도 있어 "한계를 인정해야"하며 동양 현대철학이 가능하려면 "근본주의와 환원주의의 오류에서 벗어나" 치열하게 공부하면 된다는 식이다. 그러나 이런 고상한 체념은 우리에게 어떤 나침반이 될 수 있는 질문과 답이 되지 못한다. 동양철학이 왜 사회의 지배적 이데올로기 속에서 비판적 역할을 자임하지 못하는가에 대한 근본적 비판이 제거되어 있는 채 여러 동양 철학자들에 대한 지식들을 주마간산식으로 나열하는 것에 그치기 때문이다.
"심리학은 뇌과학에 자리를 내주어야 하는가"(이남석)라는 질문에 있어서는 다소 타협적인 결론을 내놓는다. 인문학의 갈래인 '심리학'은 '마음'이라는 불가해한 영역과 여타의 사회 환경, 인공물, 사회적 자원을 살피는 것을 맡고, 뇌과학은 뇌를 맡으면 된다는 식이다. 그의 논점이 뇌결정론에 대한 논리적 비판에 그치기 때문에 이런 타협에 대해 뇌과학이 그리 무리 없이 받아들일만 하다고 느껴지기까지 한다. '싸우는 인문학'의 정신에 따르자면 '전의'를 상실한 것으로 보일 따름이다.
주지하다시피 오늘날 정신분석은 '사망선고'를 받은 지 오래다. "우리의 정신은 데이터 처리과정의 연산기계에 불과하며, 자유와 자율에 대한 감각도 기계 사용자의 환영에 불과하다"며 인간 주체에 대한 조롱을 일삼는 뇌과학과 비교한다면, 슬라보예 지젝이 말했듯 정신분석학은 "전복적이기는커녕 오히려 최근의 모욕에 의해 위협받는 인간주의적 전통"(<How to read Lacan>)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정신분석에 대한 뼈저린 진단에서 이를 구제하고 진정 '싸우는 인문학'의 자리를 찾으려면, 그 방법은 이런 파괴적인 비아냥들에 대적해 '인문학'의 지평을 밝히고 인지주의-신경생물학이 짓밟은 인간 주체의 토양을 되찾을 수 있는 기나긴 싸움의 표적을 가리키는 것이어야 할 게다.
물론 "과학에 대한 과도한 신뢰와 이에 대한 일부 과학 공동체의 잘못된 반응"은 "인간의 독특성을 인정하는 세계관을 끊임없이 의심하게 만들고, 나아가 과학적 세계관이 현시적 영상을 대체할 수 있다는 생각을 퍼뜨리고 있"(이상헌)으며, "한국에서 정신분석은 환자를 치료하는가"(맹정현)라는 의문을 품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우리에겐 빈약하고 황폐한 이념적 토양이 뒤로하고 있다는 점을 부정할 순 없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 싸움에는 지난하고 끈질긴 과정이 필요하며 '표적'을 지칭하는 '싸우는 인문학'의 정신도 요구된다.
이 책 <싸우는 인문학>의 목표가 동시대성, 현재성, 이데올로기 비판을 위해 인문학이 나서야 할 전쟁터의 전선을 그어 놓는 것이라면 각각의 글들에 담긴 질문과 비판 정신은 전선의 참전자들이다. 그들이 응시하는 전쟁터의 고지 위에 펄럭이는 깃발이 하나 있다면 바로 이런 문구가 적혀 있을 게다.
"눈은 내리고, 저녁은 매일 매일 오늘이 너의 마지막이어도 좋은가 물으며 할 일을 재촉하지만, 눈은 쌓이고 세상은 속절없이 계속 치워야 하는 백색의 장애로 가득하다. 그래서 늘 문제는 제설차의 기동력 또는 비판 정신이다. 세상과 자신을 동시에 수리하는 '싸우는 인문학'의 정신 말이다." (서동욱)
서문에서 밝혀놓은 이 '슬로건'은 싸움의 지표로서는 손색이 없다. 오늘날 인문학이 여느 학문, 여느 학자들을 불문하고 저 비판 정신을 상실한 채 부유한 지 오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전히 문제는 남는다. 이를테면 오늘 우리는 '인문학이 누구의 것인지' 물을 때 쉽사리 대답할 수 있는 현실 동력과 끈을 상실해버렸다. 그것은 현실 운동만의 과제로만 남을 것인가? 아무도 그렇다고 말하진 않을 게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오늘날 한국의 영화평론가들은 그들의 살롱 안에서는 '영화주의자'다운 유희를 즐기며, 인터넷 포털 사이트에선 대중과 아슬아슬한 긴장선 상에서 별점 놀이에 빠져 있다. 그들은 영화에 대해, 특히나 홍상수나 김기덕, 박찬욱 영화에 대해 말하기를 좋아한다. 이를테면 홍상수는 "니체로부터 시작해, 프로이트와 레비나스, 하이데거까지 동원"해 이야기할 수 있으며, 김기덕은 "정신분석학이나 원형적 이미지에 대한 고고학적 분석을 요구"(강유정)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기에 현실의 몇몇 지표와 풍경, 사건, 이데올로기와 짝짓기를 하면 '평론'은 완성된다. 일종의 유희가 된 셈이다. 그러나 비평이 한국 사회의 분열증적 풍경과 영화가 드러낸 공백을 비집고 들어가는 경우는 매우 찾기 힘들다. 오히려 한국영화와 인문학이라는 토픽을 마주할 때 우리는 이렇게 질문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도대체 왜 이토록 평론가들이 좋아하는, 인문학적 토양이 풍부한, 한국(세계)의 작가 영화들은 어떤 시기의 '르네상스' 이후 대중들에게 끊임없이 외면 받고 있는가, 라고 말이다.
얼마 전 개봉했던 블록버스터 영화 <클라우드 아틀라스>(앤디 워쇼스키, 라나 워쇼스키, 톰 티크베어 감독)는 관객과 평론가들에게 "2012년 최악의 영화"(<타임>)로 꼽힐 정도로 혹평을 받았다. 한국에서도 그리 다르지 않았다. 이동진 등 평론가들은 이 영화의 만듦새에 대해 혹평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이 영화가 결코 에둘러 가려 하지 않았던 인문학적 정치성의 쟁점에 대해서는 하나 같이 입을 다문 채 아무 응답도 하지 않았고, 워쇼스키 남매가 윤회 사상이랄지 동양 철학에 심취해 있다는 힌트 하나만을 근거로 공염불을 되뇌일 뿐이었다. 비록 이 영화가 디테일함에 있어서 어떤 결격을 지닌다는 점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나는 이 영화가 동시대 대중 이데올로기의 가장 약한 고리를 건드리고 있다고 생각한다. 세계 체제의 위기 양상 속에서 자본주의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는 저항들과 그 소멸 이후 우리는 얼마나 적실하게 '주체성'의 문제를 응시하고 있는가. 놀랍도록 광범위하고 통시적인 시야를 갖고 동시대 세계의 균열과 주체성, 해방의 정치학이 무엇인가에 대해 질문을 던지고 있는 <클라우드 아틀라스>가 지독한 외면을 받았다는 점에서 이 영화는 불운하다. 평론가들은 이런 정치에 대한 질문과 관객 대중이 갖는 의문의 틈을 '비평'을 통해 연결시켜주어야 할 자신의 '정세적 역할'을 방기했고, 그런 점에서 "비평은 어떻게 전체에 대한 통찰을 회복할 것인가"(우찬제)라는 질문은 여전히 절실하다.
한편 강응천은 "새로운 민중사학은 가능한가"라며 민족사학과 민중사학이 기묘하게 공존해 온 한국 사학계에서 새로운 지표가 필요하다는 점을 적확하게 지적한다. 그리고 동시에 "국사란 국가 권력을 정당화하기 위해 민족의 역사를 신화화하는 것"이라고 비판하며 등장한 '트랜스내셔널 역사학' 역시 자본주의 체제의 현실을 마주하고 있는 한국 민중들의 주체성을 탈각시킨다고 비판한다.
정말이지 "사람들은 새로운 것에 혹하는 경향이 있다."(강응천) 이는 급진 페미니즘 이론의 여러 갈래들이나 포스트모던 영화 이론에 대해서도 똑같이 던질 수 있는 질문이 될 것이다. "인문학이 노동자의 무기가 될 수 있는가"(강양구)라 질문할 수 있듯, '페미니즘'이 정녕 다시금 빈곤의 여성화와 불안정 노동의 여성화 앞에 무방비 상태로 내던져지는 여성들의 현실에 무기가 될 수 있는지, 영화가 대기업 자본이 아닌 영화를 직접 만들고 보는 "자전거 타는 소년"(이것은 다르덴 형제의 뛰어난 영화의 제목이지만 우리는 영화 앞에서 내내 이렇게 질문하지 않을 수 없다. 정말 이 땅의 '자전거 타는 소년들'은 아트하우스에 찾아가 이 영화들을 볼 수 있는가?)들의 것이 될 수 있는지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이런 모든 질문들을 포괄하며 '소위 인문학'에 있어서 가장 문제적인 공백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이는 진태원이다. 그는 "마르크스주의를 대체할(계승할) 저항의 철학은 어떤 것인가"라고 물으며 대체 혹은 계승이라는 애매성이 남는 이 질문을 '바깥의 정치'라고 묶을 수 있는 오늘날의 유럽 사상의 갈래 속에 위치시킨다. 이런 질문을 곡해 없이 받아들일 수 있는 준비가 되어있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다. "어떻게 마르크스주의의 '죽음'을 인정하면서 동시에 그것을 살려낼 것인가?"(진태원) 어쩌면 "지옥의 절망을 거쳐야 비로소 인문학의 희망이 도래하지 않겠는가?"(장석만)라고 묻는 이 장송곡의 딜레마가 마르크스주의가 마찬가지로 처한 난관을 지칭하지 않겠는가. 진태원은 그 질문에서 봉기와 헌정, 운동과 제도 사이의 이율배반이 낳는 탈민주주의 경향에 맞서기 위해 "민주주의 제도 자체를 민주화하려는 노력, 민주주의 헌정을 봉기적인 민주주의 운동에 의해 개조하고 변혁하려는 노력"(진태원)이 필요하다며 그것이 "과거 마르크스주의 및 오늘날의 바깥의 정치에 내포된, 전부 아니면 전무라는 허무주의적이고 종말론적인 관점으로부터 우리를 구해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이는 대단히 논쟁적인 주제이기에 이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소화하느냐는 여전히 지난한 과정으로 남을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딜레마에 빠진 인문학의 정치성을 어떻게 다시 구제해내느냐는 처절한 질문을 얼마나 깊게 받아들이느냐에 달려있다. 그것을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이들이건 대수롭지 않게 여기거나 오염된 포스트모던 이념의 것으로 받아들이는 이들이건, 이 이념과 실천의 '전쟁'에 참전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운명일 것이다. <싸우는 인문학>이 펼쳐놓은 전장의 폭음(爆音)을 환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