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밑에는 조영남이 경주 감포, 포항 양포를 도보여행한 글과 사진이 올라와 있다. 내가 6년 전에 그 구간을 걸으면서 겪은 에피소드가 생각나서 이 글을 올려본다.
감포 송대말등대를 돌아서 한참 걸어가면 오늘의 종착지인 연동 마을이다. 감포깍지길 1코스인 문무대왕수중릉에서 연동체험마을까지 18.8km의 종점이기도하다. 연동 마을은 자그마한 포구다. 바다를 굽어보는 마을 입구의 언덕에는 모텔들이 줄지어 있다. 창밖의 뷰가 끝내주겠다. 그 뷰도 소중한 사람과 같이 해야 진한 추억으로 남을 것이다.
바닷가 포구에는 연무가 자욱하게 끼어 있었다. 땅거미가 지고 있었다. 곧 어둠이 내린다. 문무대왕수중릉에서 8시간을 걸었다. 피곤하고 배가 고팠다. 우선 저녁을 먹어야 된다. 3시경 전촌항에서 늦은 점심으로 만두 2인분을 먹었는데 어찌나 배가 부른지 저녁은 안 먹어도 될 것 같았다. 웬걸, 걸으니 소화의 속도가 엄청 빠르다.
마을에는 횟집이 두 군데 있었다. 한 집에 들어가니까 주인아주머니는 방 벽에 기대앉아 TV를 보고 있었다. 밥이 되는가 물어보았다. 고개를 짤짤 흔들며 이내 TV로 눈길을 돌렸다. 수족관에는 물고기 몇 마리가 한가하게 수영을 즐기고 있었다. 회를 먹겠다 하면 아주머니는 총알같이 튀어나올 것이다.
또 한 횟집에 들어갔더니 마을 사람 여러 명이 왁자지껄하게 떠들며 술판을 벌리고 있었다. 여기도 물론 밥은 안 된다. 비수기 평일이어서 이 외진 곳에 올 손님은 없는 모양이다. 그것도 밤에. 연동체험마을이라고 해서 저녁 먹을 식당은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감포에서 저녁 먹고 숙박해야 되는데 생각없이 여기까지 왔다. 체력 낭비하고 생배 곯는다. 골 때리네. 미니슈퍼가 있지만 빵으로 저녁을 먹을 수는 없었다. 내일 아침은 어떻게 하고.
식당을 찾으며 마을 위의 2차선 도로를 따라 걸었다. 31번 국도다. 도로변에 ‘여기서부터는 포항입니다’ 라는 경계석이 있었다. 포항시 장기면 두원리로 들어간다. 어느새 사위가 캄캄해졌다. 불빛이 있어서 가면 모텔이었다. 식당이 있을 만한 도로도 아니었다. 어두운 도로를 무작정 터벅터벅 걸었다. 캄캄한 밤에 차가 씽씽 다녔다. 갓길도 없다시피 했다. 위험했다. 차에서도 경적을 울렸다.
조금 전에 버스 정류장을 지나왔다. 더 이상 가봐야 별볼일 없을 것 같았다. 다시 정류장으로 돌아가서 의자에 앉았다. 버스를 타고 양포까지 가는 수밖에 없었다. 어차피 내일 가야할 곳이다.
4월 초의 밤은 추웠다. 파카를 꺼내 입었다. 차량 통행도 많지 않았다. 승용차들이나 가끔 한 대씩 지나다녔다. 낯선 어둠 속에 우두커니 앉아 있으니 불안과 공포가 엄습해왔다. 어두운 광야에 홀로 앉아 있는 것 같았다. 서글펐다. 이게 무슨 짓이고. 낯선 데 와서.
건너편 도로변은 산자락인데 작은 촌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창문에서 새어나오는 불빛이 따스하게 보였다. 그 집에 사는 사람들이 부러웠다. 집안에서는 식구들이 TV를 보며 저녁을 먹고 있을까. 요새 촌에는 사람도 없다. 노인들뿐이다. 꼬부랑할매 혼자 사는 집도 쌨다. 하루 세 끼 찌지묵기도 힘겨울 것이다. 서글픈 현실이다. 외진 이런 곳에서 살면 불편할 텐데 매일 뭘 해먹고 살까.
버스가 오기나 올까. 별 생각이 다 들었다. 만일 버스가 안 오면 어디로 가나. 다시 연동 마을로 돌아갈까. 거기 가면 뭐하노? 감포까지는 걸어서 한 시간 넘어 걸린다. 밤중에 가지도 못한다. 나는 왜 늘 출구부재의 연속일까. 나에게는 껌딱지처럼 붙어 다닌다. 무심한 승용차들은 불빛을 길게 비추면서 오다가 순식간에 어둠 속으로 사라진다. 마치 혀를 날름거리며 나를 조롱하는 것 같았다. 야 임마, 이 추운 밤에 거기 앉아서 뭐하노. 도 딲나?
드디어 올 것 같지 않던 버스가 어둠 속에서 육중하게 모습을 나타냈다. 불행 끝이다. 웃음이 나왔다. 버스는 헤드라이트를 환하게 비추며 오고 있었다. 눈이 부셨다.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구세주 같았다. 마치 나를 실으러 오는 버스 같았다. 이때는 빠반빠♪♫~~ 빠반빠♪♫~~ 하면서 미국 영화 ‘로키’의 주제곡이 쾅쾅 울려 나와야 되는데.
어둠에 묻혀 40분을 멍청하게 앉아 있었다. 블랙홀에 빠진 듯한 절망의 시간이었다. 버스에 오르니 승객은 한 명도 없었다. 5분 정도 가니 양포삼거리가 나왔다. 편의점과 식당의 불빛들이 보였다. 아, 이젠 살았구나. 드디어 사람 사는 곳으로 왔다.
아구 전문 식당이 있었다. 양포항에는 아구가 유명하다. 도보여행을 하면서 그 지방의 이름난 음식을 시식하는 것도 빼놓을 수 없는 재미다. 식당 문을 밀고 안으로 들어갔다. 아구 찌개와 소주 한 병을 시켰다. 어둠에만 익숙해 있다가 밝은 식당 안에 들어오니 전혀 다른 세상에 온 느낌이었다. 좀 어리둥절했다. 그 흔한 형광등도 눈부시고 새삼스럽게 보였다.
시계를 보니 8시였다. 이렇게 밖에 안 됐나? 나는 더 늦은 시간으로 착각하고 있었다. 방 안에 손님들이 제법 있어서 이 시간에 무슨 손님들이 있노, 하고 의아하게 생각하고 있던 중이다. 어둠과 불안과 초조와 허기 속에서 헤맨 시간은 불과 1시간이었다. 물리적인 시간은 1시간이었지만 체감시간은 길게 느껴졌다. 시간감각을 잃어버렸던 것이다.
아주머니가 반쯤 익힌 아구 찌개 냄비를 상 위의 휴대용 버너에 올렸다. 좀 더 끓여서 먹으라고 한다. 잠시 후, 냄비 안에서는 크고 작은 방울들이 솟았다 터지며 벌건 국물이 파도를 쳤다. 살코기가 오동통했다. 생아구여서 육질도 보드랍고 탱글탱글했다. 배가 고프니까 한맛이 더 났다. 소주잔 비는 속도가 빨라졌다.
살코기 옆에 연분홍 빛깔의 간이 한 덩어리 있었다. 숟가락으로 반을 짜개서 먹었다. 갑자기 두 눈이 정지되며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니, 이게 무슨 맛이야!’
말랑말랑하고 고소하면서도 감쳤다. 입안에서 살살 녹았다. 여운이 진하게 남았다. 너무 맛있어서 정신까지 혼미해졌다. 마음이 급해졌다. 혼자 먹기 다행이지 다른 사람과 먹으면 한 덩어리 갖고 마음 상하겠다.
암흑을 헤매다가 이런 황홀한 맛을 보다니. 꿈결 같았다. 지옥과 천당을 오가는 기분이었다. 분명 보이지 않는 어떤 손이 나를 들었다 놨다 하고 있었다. 하지만 완전히 놓지는 않는다.
생각만 해도 웃음이 나왔다. 훗날 생각하면 그럴 수 없이 짜릿한 순간이다. 고통이 클수록 짜릿함도 비례한다. 즐거운 개고생이다. 도보여행의 재미가 한층 더 난다. 드라마나 영화에서 주인공이 온갖 고난을 다 겪다가 마지막에 극적인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컨셉이다. 엔딩은 즐겁지만 과정은 험난하다.
양포 아구의 추억은 영원히 잊어버리지 않을 것이다. 양포삼거리에 또 가고 싶다. 다시 가도 그때 그 맛이 날까. 극심한 시장기와 절박한 상황이 더 맛있게 했을 것이다. 도루묵의 전설처럼.
첫댓글 양포삼거리 버스정류장 바로 앞의 그 생아구탕집...
유명 맛집인지 버스기다리는 20여분 동안 많은 사람들이 들락날락하데.
아구 간이 그렇게 맛있었다면 거기서 점심을 먹을걸 그랬네~
감포 할매식당에 가서 먹을 거라고 고픈 배를 주려잡고 애써 외면했는데^^
감포에서 숙박하려고 계획했는데 도착하니까 5시였다.
너무 이르데. 그래서 연동마을까지 천천히 갔지.
전촌항에서 해안 산길로 감포에 가니 어촌 마을이데.
사각형 망에 납세미 새끼를 말린다고 가지런하게 놓은 걸 보니 예술이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