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화모음
소멸하는 이유
역사 연구의 대가인 아놀드 토인비는 그의 역사 연구에서 그 동안 역사의 지평에 떠올랐던 21개의 문명이 있었는데 그 가운데 19개의 문명이 소멸했다는 것입니다. 문명이 소멸하는 이유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무신론’과 ‘물질주의’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문명을 파멸시키는 주범이 신이 없다고 주장하는 무신론과 인간의 영혼보다 물질을 더 앞세우는 물질주의라는 결론입니다. 그러나 그 반대로 문명을 발전시키는 것은 신앙과 인간의 영혼 그리고 정신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살고 있는 오늘날의 모습은 문명을 망하게 하는 무신론적인 경향과 물질주의로 살고 있는 것은 아닌가요. 그렇다면 망하는 것이 역사의 법칙이겠네요. 혹시 망할 징조가 보이지 않습니까? 정말 정신 차려야 할 때죠.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 저희의 마침은 멸망이요 저희의 신(神)은 배요 그 영광은 저희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서 구원하는 자 곧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빌 3:18b-20)’
퇴화된 부분이 없는가
높은 산간 지방에 사는 인디언을 선교하는 선교사가 있었습니다. 그 인디언들은 어찌나 산을 잘 타고 내리는지 신출귀몰의 솜씨였습니다. 속도가 얼마나 빠른지 상상할 수도 없었습니다. 이에 선교사는 이들 인디언을 통해 세계 단거리 달리기의 기록을 갱신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였습니다. 산간에 비행기 활주로를 닦아 놓고 그들을 달리게 하였습니다. 100미터를 달리게 하니 놀랍게도 보통 사람보다 더 늦은 19초였습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달리기를 한 사람들이 그 다음 날 몸살이 나서 자리에 눕더라는 것입니다. 이같은 결과에 놀란 선교사가 알아보니 그 인디언들은 늘 산지에만 오르락 내리락 했기에 평지를 달리는 근육이 퇴화되어 버렸기 때문이라는 것이었습니다.
혹시 우리의 신앙 생활 부분에 퇴화된 부분은 없습니까? 찬양이 퇴화되지 않았습니까? 감사? 기쁨? 기도? 말씀 묵상? 절제? 사랑? 봉사가 퇴화되어 굳어 있지 아니한가를 성찰해야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피곤한 손과 연약한 무릎을 일으켜 세우고 너희 발을 위하여 곧은 길을 만들어 저는 다리로 하여금 어그러지지 않고 고침을 받게 하라.(히12:12-13)’
생명이 있는가
양장점 쇼 원도우에 서 있는 마네킹은 철따라 달마다 새 옷으로 갈아 입곤합니다. 그것도 유명 디자이너가 디자인한 최고급 의상과 유명 메이커의 값비싸고 아름다운 의상만 골라 입습니다. 그러나 그 누구도 마네킹을 바라보며 행복한 여인이라고 부러워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마네킹은 생명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인간은 생명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도 참 생명, 영원한 생명이 있어야 합니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자기 생명을 잃거나 빼앗기면 무슨 유익이 있겠느냐?(눅9:25)’
이는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과연 우리의 생명을 그 무엇 때문에 잃거나 빼앗기고 있지는 않은가 하고 스스로에게 조용히 묻습니다.
숫자에 붙잡힌 사람들
어른들은 숫자를 좋아합니다. 어른들에게 새 친구에 관해 이야기하면 중요한 것을 묻지 않습니다. ‘친구의 목소리는 어떠니? 어떤 놀이를 좋아하니? 나비를 수집하니?’ 하는 것들은 절대로 묻지 않습니다. 나이가 몇이니? 형제가 몇이니? 몸무게가 얼마니? 그 얘 아버지는 얼마나 버니? 하고 묻습니다. 그래야만 어른들은 그 친구를 알게 된다고 믿는 것입니다. 만약 어른들에게 “창가에는 제라늄이 피어 있고 지붕 위에는 비둘기가 나는 아름다운 붉은 벽돌집을 보았다”고 말한다면 어른들은 이 집에 어떻게 생겼는지 상상을 못할 것입니다. “십만프랑짜리 집을 보았다”고 말해야 입니다. 그러면 어른들은 “야 참 훌륭한 집이구나”하고 말하는 것입니다. 생떽 쥐베리가 지은 「어린 왕자」의 한 부분인데, 물질과 숫자에 사로잡힌 현대인을 꼬집고 있는 것이다.
‘어리석은 자여 오늘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눅12:20)’
계약 파기
유명한 사회학자가 최근 미국 사회가 앓고 있는 질병의 원인을 진단했습니다. 그 원인은 계약 파기(broken Covenant)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맺은 계약이 파기되었기에 온갖 모든 문제가 생기게 된 것입니다. 대부분의 현대인들은 안식일(주일)을 지키지 않습니다. 엿새 동안 열심히 일하고 하루를 안식하게 되면 이 사회의 많은 생태학적 문제와 인간의 질병이 치유되고 건강해 질 것입니다. 주일을 주님의 날로 잘 성수 하면 남은 엿새를 축복으로 받게 되는 것입니다.
불루 먼데이(Blue Monday)라는 말이 있습니다. 주말을 진탕 탕진하고 출근한 월요일은 몽롱하고 멍하다는 것입니다. 이미 기업에서는 중역 회의 날짜를 화요일로 옮겼다고 합니다. 불루 먼데이에는 도무지 아이디어가 나오지 않기 때문이지요.
계약을 다시 회복할 때 맑은 월요일(White Monday)을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보람
일본 이와꾸리에서는 바다 오염 때문에 생선을 못 먹게 되었습니다. 그 오염의 원인은 방직 회사의 폐수가 바다로 흘러 들어갔기 때문이었습니다. 어부들의 생존권이 문제되자 방직 회사에서는 어부들이 잡아오는 오염된 생선을 무제한 사들여 폐기하기로 했습니다. 처음에는 어부들이 돈을 받는 재미에 열심히 생선을 잡았으나 얼마 안가서 고기잡이를 포기했습니다. 왜냐하면 이 어부들은 생선이 돈으로 환산되는 것에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잡은 생선과 물고기를 사람들이 맛있게 먹어 줄 때 보람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어로 작업이 힘들었지만 그들이 잡은 생선이 사람들의 식탁에 오른다는 자부심과 보람으로 일해 왔는데 그 보람을 더 이상 느낄 수가 없었기 때문에 고기잡이를 그만 두게 된 것입니다. 돈으로만 계산할 수 없는 보람이 더 중요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신앙인의 보람은 어디에 있을까요?
낮잠을 많이 자서요
이 곳 저 곳을 떠돌아 다니는 유대교의 설교가를 보통 ‘마기드’라고 합니다. 어느 마을의 회당에서 설교를 한 마기드는 다음 날 시장에서 한 신도를 만났습니다. 그 신도가 마기드에게 말했습니다.
“랍비님, 어제 당신의 설교를 듣고 난 후 저는 밤새 한 잠도 못 잤습니다.”
“정말이세요? 내 설교가 그렇게 큰 영향을 줬군요”
“아뇨, 그게 아닙니다. 저는 낮에 잠을 자면 밤에 잠을 전혀 못 자거든요”
생각 하나 - 현대인들에겐 솔직히 잠이 부족합니다. 여러분 주무십시오. 마음놓고 주무실 수 있는 시간이 설교 시간뿐이 없다면 그 시간이라도 잠을 자야 합니다. 사실 설교 시간처럼 우리가 가만히 앉아 있는 시간이 일주일에 거의 없잖아요. 가만히 있는 것에 익숙하지 않은 거죠. 우린 너무 분주하게 살고 있습니다. 잠을 잘 수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엄청난 은혜입니다. 그래서 성서에서는 하나님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에게 잠을 주신다(시127,2)고 하지 않았습니까?
생각 둘 - 설교자에겐 청중이 졸지 않도록 해야 할 노력이 있어야 한다는 얘기 아닌 가요? 바로 이 점이 설교하는 사람을 긴장시키고 고민하게 만듭니다. 그 고민을 함께 나누시지 않으시렵니까?
말이 많으면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간다.’ 의견이 많고 말이 많으면 제방향을 잃는다는 뜻일 겝니다. 다언삭궁(多言數窮)이란 말이 있습니다. 말이 많으면 자주 궁해진다는 뜻으로 말을 많이 하다 보면 결국 필요 없는 말이 섞여 나오게 된다는 것입니다. 원래 귀는 닫도록 지어지지 않았지만 입은 언제나 닫을 수 있도록 지음 받았습니다. 두 번 듣고(귀가 둘이니까) 한 번 말하기(입은 하나 뿐이기에) - 이것이 하나님의 창조 섭리가 아닐까요? 말로서 말이 많으니 말을 말을까 하노라. 인간의 말이 멈추는 바로 그 지점에서부터 하나님의 말씀은 들려 오기 시작할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자동문
시골 노인이 대도시 큰 빌딩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출입구라고 쓰여 있는 글씨를 간신히 읽고 그 문에 가까이 가보니 대형 유리가 가로막혀 있고 아무리 찾아도 문의 손잡이가 없는 것입니다. 난감하였지만 출입구라고 했으니 돌아갈 수도 없었습니다. 좀 더 가까이 다가서자 ‘윙-’하며 유리가 열리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 나라도 그 말씀을 ‘믿고 나아가 서는 자’에게 스르르 열리는 것입니다. 인간의 공로가 없어도 눈에 보이는 것이 없어 불가능한 것 같아도 약속의 말씀 앞에 서기만 하면, 그 문은 반드시 열리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 이것이 히브리인이 가지고 있던 신앙 개념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하나님 나라의 자동문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히4:16).’
고슴도치의 사랑
놀러 나간 새끼 고슴도치가 늦도록 집에 안 들어오자 어미 고슴도치가 찾아 나섰습니다. 길 가던 토끼에게 물어 보자 토끼는 말하길 ‘어떻게 생겼는가?’라고 물었습니다. 어미 고슴도치가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예쁜 색깔과 아름다운 모습에 부드러운 털을 지닌 귀여운 고슴도치 못보았나요?’ 제 새끼는 언제나 아름답고 귀엽고 예쁘게 보이는 것입니다.
어미 고슴도치의 사랑으로 하나님도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요3:16)
꾀꼬리와 목동
어느 목동이 꾀꼬리에게 말했습니다.
“노래를 불러라”
꾀꼬리가 대답했습니다.
“개구리들이 너무 시끄러워요. 노래할 기분이 나야지요, 당신은 저 소리가 들리지 않나요?”
목동이 말했습니다.
“왜 안들리겠니? 그렇지만 네가 가만히 있으니까 저 시끄러운 소리가 내 귀에 들린단 말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노래를 부르며, 감사의 노래를 부르며 세상 한 복판을 걸어가십시오. 너무 많은 증오와 불신의 소리가 들린다면 그것은 바로 당신이 부끄러워해야 할 일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당신이 감사의 노래를 부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힘차게 예수 그리스도의 노래를 부름으로 세상이 소음이 들리지 않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그 노래를 아십니까?
이눔아 나도 색시 있다
어느 시골 마을의 한 농가에서 인절미를 만들고 있었습니다. 이때 그 집 며느리는 옆에 있는 신랑에게 손으로 떡을 소담스럽게 잘라 콩가루에 비벼서 주었습니다.
옆에 있던 시아버지는 먹고 싶은 생각은 굴뚝같이 나고 입에는 군침이 돌아도 체면이 있어서 달라고는 못하고 창 밖으로 먼 산만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그때 마침 시어미니가 들어오면서 며느리에게 “얘, 아버님께 떡 좀 드렸냐?”고 하자 “다 만든 다음 소반에 담아 드리려고요”하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러자 시어머니는 떡을 뚝 떼어 주먹만하게 만들어 콩가루를 묻혀 남편에게 “어서 이리와 우선 잡수세요. 떡은 제자리에서 식기 전에 제일 맛있는 법예요”했습니다.
시아버지는 기다렸다는 듯이 볼이 메어지게 떡을 한 입에 넣고는 “이눔아 너만 색시 있냐, 나도 색시 있다”고 했답니다. 효라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나게 하는 이야기입니다.
좋은 남편
「실락원」을 쓴 영국의 시인 존 밀턴은 자기 부인에게 잘해 주는 남편은 결코 못되었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여러 사람이 모인 파티에 가서 자상하게도 부인에게 앉아 있는 그 자리가 춥지 않은가를 묻는 것이었습니다. 주변의 친구들은 깜짝 놀랐습니다. 존 밀턴이 마음을 바꾼 모양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더욱이 그 부인은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오래 살다 보니 이런 경우도 있나 보다 생각하며 “아뇨, 전혀 안 추워요” 대답했습니다.
그랬더니 재빨리 존 밀턴이 말했습니다.
“여보, 그럼 자리를 바꾸어 앉읍시다. 여긴 너무 춥구려”
사람이 변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진정으로 예수 그리스도와 만나기만 하면 가능합니다.
그 만남을 추구하시지 않으시겠습니까?
서명
예술가들은 누구나 자기의 작품에 서명을 합니다. 그러나 르네상스 시대의 거장 미켈란젤로(Michelangelo 1475-1564)는 자기의 작품에 결코 서명을 남기지 않았습니다.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이유가 있었답니다. 시스틴 성당의 천정 벽화를 그려 줄 것을 요청 받은 미켈란젤로는 자기의 온 열과 성의를 다하여 작품에 임하여 몇 달 동안 벽화 그리기에 몰두하여 불후의 명작 ‘천지 창조’를 완성했습니다.
흡족한 마음으로 서명을 한 뒤 성당 문을 나서는 순간 눈부신 햇살과 푸른 자연의 아름다움에 그만 압도되어 넋을 잃고 말았습니다. 세상에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그 어떤 화가도 그려 내지 못할 대자연의 아름다움! 그때 문득 그에게서 한가지 깨달음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렇듯 아름다운 자연을 창조하시고도 그 어디에 서명을 남기지 않으셨는데, 나는 기껏 작은 벽화를 그리고 자신을 자랑하려고 했다니···.’그는 즉시 되돌아가 천정 벽화에서 자신의 서명을 지웠습니다. 그 후로는 어떤 작품에도 서명을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창조 신비 앞에 겸손을 배운 것입니다. 우리도 다윗처럼 다음과 같이 고백해야 하겠습니다.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시8:1)’
마음을 사진기로 찍는다면
엑스레이 사진기로 가슴을 찍으면 폐와 심장이 드러나듯 마음을 찍어 보여주는 사진기가 있었습니다. 대개의 사람들을 찍어 보니 돈 다발, 감투, 평수 넓은 집, 학위증, 자가용 등이 찍혀 나오고 남자인 경우엔 여자가, 여자인 경우엔 남자가 찍혀 나오기도 했습니다. 어린이들을 찍어보니 인형이나 꽃, 로봇트나 아이스크림이 찍혀 나오기도 했습니다.
과연 그 사진기를 가지고 그리스도인들을 찍어 본다면 무엇이 나타날까요? 만일 사도 바울의 마음을 찍어 보았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이 선명하게 나타났을 것입니다.
여러분도 그리스도의 모습이 찍혀 나오는 마음이 되시길 바랍니다.
우이독경(牛耳讀經)
어떤 총각이 새로 입사한 처녀를 보고 첫눈에 반했습니다. 기회를 보던 총각이 프로포즈를 하였습니다.
“나는 지미처럼 재규어(고급 승용차)는 못 가졌고 헤롤드처럼 어버지가 큰 보험회사 사장은 아니지만 당신을 사랑하니 나와 결혼해 주시오”
처녀가 얼굴이 빨개지며 대답했습니다.
“당신은 참으로 호감이 가는 분이시군요, 그런데 좀 전에 말씀하신 지미와 헤롤드에 대해 좀더 자세히 말씀해 주시겠어요?”
우리도 역시 주님의 프로포즈를 받고서 다른 관심사에 초점을 맞추고 있지나 않습니까? 하도 딴 것에만 관심을 갖고 있게 되자 하늘의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가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마17:5)’고 한 것 같습니다.
프로포즈를 액면 그대로 받아 들이므로 축복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색칠하소서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을 변화시킬 수 있는 힘과 용기를 부어 주시고
그렇지 못한 것이라면 받아들일 용기를 허락하소서.
그리고 이 두 가지를 분별하는 지혜를 주소서.
자신의 삶을 낭비해 온 탕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새 피조물의 빛 아래에 나아가게 하소서
남하듯 남보다 더하는 것이 무엇이냐 물으시는 당신의 음성을 듣나이다.
그 원초적인 사랑과 감격을 허락하소서.
이제사 당신 안에 내가 있었음을 깨달으오니 새 생명의 역사를 이루게 하소서.
이 봄날에 새싹의 생명 빛을 더욱 진하게 색칠해 주소서.
교육의 중요성
미국이 낳은 위대한 여가수를 둘만 들어 보라고 하면 대부분의 미국인들은 흑인이건 백인이건 간에 얼마 전에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마리안 앤더슨과 마리아 잭슨을 들기에 주저하지 않습니다. 이들은 같은 흑인이며 독실한 그리스도인이며 주로 영감 넘치는 영혼의 노래를 부른 가수들입니다. 그런데 마리아 엔더슨은 정식 음악교육을 받은데 비해, 마리아 잭슨은 악보를 읽지 못하는 까막눈이었다고 합니다. 잭슨은 그를 그림자처럼 따르는 피아니스트의 피아노 소리를 듣고 하나님이 주시는 영감으로 노래를 불렀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교육도 별 의미가 없다는 것일까요? 둘 다 위대한 가수였지만 앤더슨은 후배 양성이 가능했을 것이고, 잭슨은 후배 양성이 힘들었을 것입니다. 이것이 교육 유무의 차이라고 생각됩니다.
자기 혼자 애쓰고 힘써 일평생을 주님 안에서 살 수 있는 신앙인이 되는 것도 중요하지만, 끊임없이 영적인 후배를 양성해 내는 신앙의 선배가 되는 일은 더 중요합니다. 체계적으로 그리스도인의 삶을 배운 사람만이 그리스도인의 삶을 다른 사람에게 가르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가 다 신앙의 선배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고장난 라디오
어렸을 적에 ‘가정 환경 조사’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때 선생님은 어김없이 트랜지스터 라디오 있는 사람 손들어 보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한 녀석이 손을 든 것도 아니고 안든 것도 아닌 엉거주춤한 자세를 취하고 있었습니다.
“야, 영수 너 손 든거냐? 안 든거냐?”
선생님의 카랑카랑한 목소리에 기가 죽은 영수가 기어드는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저 있기는 있는데요. 고장났습니다.”
우리의 인격이 고장나 있지 않습니까? 고장난 라디오를 수에 넣을 수 없는 것처럼 우리의 고장난 인격은 주님의 계산에 넣을 수 없습니다. 다만 수리하면 다시 숫자에 들게 될 것입니다. 주님을 통해 우리의 고장난 인격과 신앙을 수리하여 하나님이 사용하실 수 있게 해야 하겠습니다.(히 12,12-13)
세 가지 표어
감리교회 창설자인 요한 웨슬리와 유명한 찬송 작가인 그의 동생 찰스 웨슬리는 런던 웨스트 민스터 국립묘지에 안장되어 있습니다. 요한 웨슬리의 묘비에는 세가지 표어가 새겨져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 이것이 그의 신념이며 기쁨의 원천이었습니다.
‘세계는 나의 교구다’ 이것은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라는 주님의 명령에 대한 약속 이행의 표어였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종을 묻으시나 그 종의 일을 계속하신다.’ 자신의 죽음을 뛰어 넘어서 자신의 사명이 우주적임을 고백한 것입니다.
우리도 이같은 세 가지 표어를 가질 수 있습니까?
여섯 가지 조건
행복한 생활에는 여섯 가지의 조건이 필요하다고 괴테가 말했습니다. 첫째는 즐겁게 일할 수 있을 정도의 건강, 둘째는 기본적인 생활 환경과 조건을 충족시킬 만한 경제적인 여유, 셋째는 어려움을 이겨내고 견딜 수 있을 만한 힘, 넷째는 좋은 결과가 나올 때까지 노력하는 인내력, 다섯째는 이웃을 돕는 사랑과 긍휼의 마음인 자비심, 여섯째는 장래에 대한 불안을 이겨낼 만한 희망을 가지는 것 등입니다.
과연 이같은 행복의 조건은 어떤 사람에게 주어질까요? 아무리 생각해 봐도 신앙인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해 보입니다. 여러분에게는 행복을 위해 몇 가지의 조건이 주어지고 있습니까? 나 자신에게도 여섯 가지 중 세 가지의 조건과는 거리가 멀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절반 만의 행복을 소유한 셈이군요.
더 이상 머뭇 머뭇거리지 말고 ‘오늘날 너희 섬길 자를 택하라.(수24:15)’는 여호수아와 엘리야의 권면(왕상18:21)을 들어야 하겠습니다. 완전한 행복을 향해 나아가야 하겠습니다. 신앙은 곧 행복을 의미합니다. 신앙이 곧 행복이란 말을 한 주간 동안 조용히 묵상하시기 바랍니다. 행복해질 때까지 말입니다.
소녀의 믿음
어느 동네에 몹시 가뭄이 들어 마을 회의를 거쳐 하나님께 비오게 해 달라고 기도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정한 시간에 마을 사람들은 모두 기도하기 위해 교회로 가고 있습니다. 그중에 어린 소녀가 따라 나섰는데 그의 손에는 우산이 들려져 있었습니다.
“얘야 우리 동네에 가뭄이 든지가 벌써 몇 달째인데 우산은 왜 가지고 왔냐?”
핀잔하듯 묻는 어른에게 이 어린 소녀는 대답하기를
“우리가 하나님께 비오게 해 달라고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비를 내려 주실텐데 집에 돌아올 때 쓰려고 가지고 갑니다.”
어른의 신앙은 어린이의 신앙에 비하면 상당히 때가 많이 묻어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천국의 이야기
일생 금욕 생활을 하던 한 종교인이 죽어서 천당문 앞에 서게 되었습니다. 문을 지키는 베드로가 말했습니다.
“이곳은 아무 것도 지닌 것이 없는 사람만 들어 오는 곳이오”
“내가 알몸인 것을 보지 못하오”
“나는 겉만 보는 것이 아니라 속도 보오.”
이 말이 그는 비위가 상해서 “나는 세상 사람이 다 알고 있는 부흥사요, 내 추종자들이 지상에 수만명이나 있소”하며 대들었습니다. 베드로가 하는 말이
“바로 그 점이 문제요. 그걸 버려야 하오” 했습니다.
겸손한 자가 모인 곳이 천국입니다.
신앙의 3대 적
낙심
의심
그리고
불평
짧은 말씀들
온유함과 명랑함, 이는 모든 도덕 이전에 온다. 그것들은 완전한 의무(perfect duties)이다.
-Robert Louis Stevenson-
기도는 자신을 위한 간구뿐만이 아니라 자신의 가능성 실현을 위해 하는 것이다. 기도는 얻고 거절하고 지배하는 것이라기 보다 적응하고 수용하고 주기를 배우는 배움의 기술이다.
-Edgar N. Jackson-
사랑은 인간 존재사이에서 경험할 수 있는 최대 은총의 우주적 경험이다.
-Rollo May-
돌아오지 않는 것
돌아오지 않는 것이 세 가지 있습니다.
쏘아 버린 화살은 돌아오지 않습니다. 과녁에 빗나간 것을 신학적으로 죄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뜻에서 빗나가지 않도록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지나가 버린 기회는 돌아오지 않습니다. 주님을 만날 만한 때에 반드시 만나십시오.
입에서 내뱉은 말은 돌아오지 않습니다. 그래서 야고보 사도는 말에 실수가 없는 사람은 온전한 사람이라고 하였습니다.(약3:2)
그 온전함에 도전해 보시지 않으시렵니까?
비결
여행 중인 한 변호사가 교통순경에게 교회가 어디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 교통순경은 가까운 곳에 있는 교회를 두고 먼 곳에 있는 교회를 소개해 주었습니다. 이상히 여긴 변호사가 “왜 하필이면 먼 교회를 소개합니까?”하고 물었습니다. 순경이 대답합니다. “그 교회에서 나오는 사람들의 얼굴엔 유난히 밝은 웃음과 기쁨이 있더군요?”
그렇습니다. 교회 부흥의 비결도 다른 곳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배드리고 돌아가는 성도들의 얼굴에 가득한 기쁨-바로 이것이 살아 있는 전도와 부흥의 비결이고 축복의 비결인 것입니다. 소망으로 맞이하는 새해에도 축복의 비결로 살아가시기를 기도합니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빌4:4).’
왜 다 맡기지 못할까?
어떤 부인이 외아들과 함께 신앙생활을 하면서 살고 있는데 자기는 기도할 때에 ‘하나님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하는 기도를 드리지 못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 이야기를 듣고 한 권사님이 말씀하시기를 “그러면 당신 아들이 당신에게 와서 어머니 저를 어머니께 맡길테니 저를 어머니 마음대로 뜻대로 하세요 하면 이때다 하고 그 아들에게 고통만 주고 해로운 일만 하시겠습니까? 당신의 아들에게 좋은 일을 행하려고 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은 당신보다 더 사랑이 많으신 분입니다.”하고 권면했습니다. 그제서야 그 어머니는 하나님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하고 기도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너희가 악할 지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마7:11)’
말부터 거듭나야 한다
행복하려면 일단 말부터 행복해야 합니다. 말은 존재의 근거이고 깊이입니다. 말은 생각과 행동을 지배합니다. 말은 창조의 능력이 있습니다. 말은 지배하는 힘이 있습니다. 이렇게 말이 중요함으로 성서도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고 선언하는 것입니다. 말이 무너지면 인격이 무너지고 말이 타락하면 인격도 타락하는 것입니다. 말은 인생의 키와 같습니다. 말이 바뀌면 표정이 바뀌고 태도가 바뀌고 행동이 바뀌고 인격이 바뀌고 운명이 바뀌고 세상이 바뀌는 기적이 일어납니다.
한 마디로 말부터 거듭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언어 생활이 과연 거듭난 것이었습니까? 오 주여, 우리의 말이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나게 하시옵소서. 그리하여 생명, 사랑, 기쁨, 감사의 빛을 발하게 하시옵소서.
내 부모처럼
“큰 도를 시행함에는 천하의 모든 백성이 다 잘 살아야 한다. 현명한 자를 뽑아서 능한 자와 더불어 일하게 하고 신의를 선포하며 화목하게 살도록 해야 한다. 그렇게 되면 사람들의 자기 부모만 부모로 여기지 않고 남의 부모도 자기 부모처럼 공경하며 자기 자녀만 자녀로 알지 않고 남의 자녀까지도 자기 자녀같이 알게 된다. 그리하여 노인은 노후가 염려되지 않게 하고, 장성한 이는 자기 능력껏 힘써 일하게 하며, 어린이는 잘 자라도록 될 것이다.”
공자의 정치 도덕관을 보여주는 이야기인데 남의 부모도 내 부모처럼 공경하고 남의 자녀도 내 자녀처럼 돌보는 세상이 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약속있는 첫 계명으로 부모 공경을 명하신 이유를 알아야 하겠습니다.
두 번째 이야기 셈할 시간
말 한마디 / 설교를 듣는 태도
따르는 자의 문제 / 거북이 교인
어디에서 찾고 있나요 / 그때에야
숨어 계신 하나님 / 해와 달과 별
삶의 중심 / 어떻게 알았지
누가 밀리고 있는가 / 우리를 보고 계신 하나님
자기 발결 / 남자는 똑같아요
교회에 드리는 당부 / 샬롬
가치의 기준 / 그의 길
베토벤이 작곡을 하듯 / 최상의 약
물위를 걸으신 이유 / 기독교 교육의 목적
바라볼 것 / 복의 손길
셈할 시간 / 내려서는 지혜
말 안할래 / 누가 부자인가
인격건설 / 수준
말 한 마디(A word)
부주의한 말 한 마디가 싸움의 씨앗이 되고 잔인한 말 한 마디가 삶을 파괴합니다.
쓰디쓴 말 한 마디가 증오의 씨를 뿌리고 무례한 말 한 마디가 사랑의 불을 끕니다.
은혜스런 말 한 마디가 길을 평탄케하고 즐거운 말 한 마디가 하루를 빛나게 합니다.
때에 맞는 말 한 마디가 긴장을 풀어 주고 사랑의 말 한 마디가 축복을 줍니다.
설교를 듣는 태도
설교를 듣는 태도는 남녀가 다르다고 합니다. 남자는 오른쪽 귀로 듣고 왼쪽 귀로 새어 나간다고 합니다. 그러나 여자는 남자와 달리 오른쪽 귀로도 듣고 왼쪽 귀로도 경청한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이 입으로 빠져 나간다고 합니다. 남자는 자신이 관심하는 바가 아니면 흘려 듣는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여자는 말씀을 마음에 담지만 그것으로 인격과 삶을 변화시키지 못하고 말로 소비해 버린다는 의미인 것 같습니다.
설교는 우리들 자신 한 사람 한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들을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따르는 자의 문제
‘큰 영혼을 가진 사람’이란 의미의 이름을 가진 마하트마 간디의 일화입니다. 한 번은 간디가 열차를 타고 여행을 하는데 간디의 얼굴을 모르는 어떤 한 사람이 자꾸 기차 통로에 침을 벹았습니다. 간디가 그러지 말라고 타이르자 ‘네가 뭐냐’는 태도로 계속하며 ‘내 자유’라고 하는 것입니다. 침을 뱉던 그 사람이 간디를 찬양하는 노래를 부르는 것입니다.
그때 간디가 말하길 ‘저것이 나를 따르는 사람의 문제입니다. 나를 찬양하는 노래를 부르면서도 내가 하라는 행동은 싫어하는 것이 문제입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에게도 그것이 문제입니다. ‘주여, 주여’ 하면서도 그 주님이 원하시는 일은 안하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을 따르고 부르는 만큼 그의 뜻도 준행할 수 있어야 합니다.
거북이 교인
거북이 교인(Tutle Christian)이란 말이 있습니다. 새는 9일까지 먹지 않고 살 수 있다고 합니다. 사람은 12일간 먹지 않고 살 수 있고 개는 20일 뱀은 800일, 곤충들중 어떤 종류는 1,200일 동안 음식없이 생존한다고 합니다. 거북이는 500일을 먹지 않고 견딜 수 있다고 합니다. 거북이 교인이란 양식인 하나님의 말씀 없이 사는 그리스도인에게 붙여진 별명입니다. 혹시 당신은 500일 동안이나 말씀을 먹지 않고도 거뜬히(?) 살고 있지 않습니까?
말씀 속에서 ‘네가 어디 있느냐?’ 찾고 계신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지 않으시는지요?
어디에서 찾고 있나요
어떤 사람이 길거리에서 무엇인가를 찾고 있습니다. 지나가던 사람이 묻습니다.
“무엇을 찾고 계신가요?”
“네 열쇠를 찾고 있습니다.”
“어디에서 잊어버리셨는데요?”
“집안에서요.”
“그런데 왜 여기서 찾고 있습니까?”
“네, 밝은데서 찾느라고요.”
딴 다리를 긁는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본질을 놓치고 있다는 얘기입니다. 우리의 신앙과 삶이 과연 본질을 붙잡고 있는지요.
밝은 곳만, 눈에 보이는 것만 찾고 있지는 않은가요?
그때에야
어느 날 청각 장애자가 열심히 기도를 했습니다.
“내 입을 열어 주시면 죽는 날까지 목청이 터지도록 감사하는 찬송을 부르고 전도하겠습니다.”
그러나 날이 가도 달이 가도 아무런 응답이 없었습니다. 낙망한 나머지 인생을 마감하려고 밖으로 뛰쳐 나왔는데 그때 마침 길가의 개천에 어떤 사람이 빠져서 허우적 거렸습니다. 물에 뛰어들어 그를 건져주고 보니 그는 시각장애자였습니다. 그때에야 청각장애자는 하나님께 감사하게 되었습니다. 그후부터 자신의 처지에 감사하고 살 수 있었답니다.
‘그 깨달음의 때’가 우리에게도 있어야 하겠습니다.
숨어 계신 하나님
랍비 바룩의 손자가 친구와 함께 숨박꼭질 놀이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몸을 숨기고 친구가 자기를 찾을 것으로 생각하여 오랫동안 그 자리에 숨어 있었습니다. 한참만에 밖에 나와 보니 친구는 자기를 찾는 대신 집으로 가버린 것이었습니다. 그는 서재에 있는 할아버지에게 달려가 울면서 자기 친구를 비난했습니다. 이야기를 듣고 난 랍비 바룩은 눈물을 닦아 주면서 “하나님께서도 ‘내가 숨어 있는데 아무도 나를 찾지 않는구나’라고 말씀하신단다.”
‘구원자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진실로 주는 숨어 계시는 하나님이시니이다(사45:15).’
숨어계신 하나님을 맑은 신앙의 눈으로 찾아야 하겠습니다.
해와 달과 별
바보 두 사람이 ‘별’을 놓고 한 사람은 ‘달’이라고 하고 한 사람은 ‘해’라고 싸웠습니다. 아무리 해도 결론을 내리지 못한 두 바보는 지나가는 사람을 붙잡고 물어 보기로 했습니다.
자초지종을 다 듣고 난 이 사람은 몇 번이나 고개를 갸우뚱거리다가 드디어 결론을 지었습니다.
“나는 이 동네에 안 살아서 잘 모르겠는데요”
새로운 지평이 열리는 순간입니다. 인식의 틀을 새롭게 할 때 가능한 일입니다.
우리도 하나님 중심(God-Centered)의 사고를 할 때 새 지평을 열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 새 지평에서 만나지 않으시겠습니까?
삶의 중심
예수님의 첫 말씀은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눅2:49)”였고 예수님의 마지막 말씀은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눅23:46)”였습니다. 그 사이의 예수님의 생애 역시 하나님과의 신뢰와 순종 관계가 중심이었습니다.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끊임없는 순종과 사랑은 인간이 알고 있는 사랑의 모든 형태를 초월하는 것입니다. 부모, 형제, 부부, 사제간의 사랑을 포함하면서 동시에 초월합니다. 그것은 염려하는 사랑이되 요구하는 사랑이며 후원해 주는 사랑이되 엄격한 사랑이며, 온화하되 힘찬 사랑이며, 생명을 바치되 죽음을 이기는 사랑입니다.
예수님의 삶의 중심은 바로 이 사랑에 있었습니다. 우리의 삶 속에도 이 사랑의 공간을 마련해야 하겠습니다.
어떻게 알았지
한 농부가 자기는 하나님을 지극히 사랑한다고 늘 큰 소리를 했습니다. 친구와 대화 중에 자신은 하나님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지 다 바치고 주님을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지 다 하겠다고 했습니다.
친구 : 그럼 자네에게 말 스무 필이 있다면 두필은 하나님께 바치겠나?
농부 : 아무렴, 십일조를 못 바치겠나. 스무 필이 있다면 두필을 바치지. 그런데 난 말이 없거든.
친구 : 소 열마리가 있다면 그 중에 한 마리 바치겠나?
농부 : 열 마리 모두라도 바치겠네. 하지만 난 소가 없지 않은가?
친구 : 돼지 열마리가 있다면 한 마리를 바치겠는가?
농부 : (버럭 화를 내며) 내게 돼지 열마리 있는 걸 어떻게 알았지?
누가 밀리고 있는가?
라틴어를 잘 모르는 사람이 라틴어로 학술을 토론하는 학자들의 모임에 참석했습니다. 친구가 물었습니다. “자네는 라틴어를 알아들을 수 있는가?” 그러자 그는 “알아 듣지 못하네. 그렇지만 누가 토론에서 밀리고 있는지는 잘 알고 있네.” “어떻게 안단 말인가?”라고 묻자 그는 “먼저 화를 내는 사람이 밀리는 사람 아니겠나?”라고 대답했습니다.
강자가 먼저 화내는 법은 없습니다. 은혜받은 사람은 벌컥벌컥 화를 내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성서는 해지도록 분을 품지 말라고 했습니다.
우리를 보고 계신 하나님
어느 불이 난 집에 어린 꼬마가 불을 피해 지붕 위로 올라갔습니다. 지붕 아래서 그 아버지는 안타깝게 소리 지르고 있습니다.
“얘야 뛰어 내려라. 내가 받으마. 빨리 뛰어 내려라!”
그러나 꼬마는
“연기 때문에 아버지가 보이지 않아요. 뛰어 내릴 수가 없어요.”
그때 아버지는 말하길
“얘야, 너는 내가 안 보일지도 모르나 나는 네가 보인단다. 중요한 것은 내가 너를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안심하고 뛰어 내려라.”
그 소년은 눈에 보이지는 않았지만 아버지를 믿고 몸을 던져 구원을 받았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보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자기 발견
토끼와 거북이가 달리기 시합을 했습니다. 토끼는 현실적인 즐거움에 한눈을 팔았고, 거북이는 자신의 달리기에 집중하여 먼저 결승점에 도착했습니다. 숲 속의 모든 동물들 앞에서 거북이가 이겼음이 선포되었습니다. 우쭐해진 거북이가 ‘이제부터 숲 속의 전령은 내가 맡도록 하겠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숲 속의 동물들은 아무도 찬성하지 않았습니다. ‘토끼가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너보다 빨리 달릴 수 있단 말이야’ 옆에서 지켜보던 사슴이 말했습니다.
자기를 아는 일은 너무도 중요합니다. 특히 하나님으로부터 축복 받고 산다는 사실을 아는 겸손함은 더욱 중요합니다. 하나님 은혜 안에 축복된 자신을 발견하는 교우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남자는 똑같아요
어느 집에서 딸이 약혼해야겠다고 아버지에게 말했습니다. 그랬더니 아버지께서 “네 약혼자 될 녀석은 돈이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딸이 퉁명스럽게 말했습니다. “아버지, 남자들은 다 그래요? 그 사람도 나에게 아버지가 돈이 있냐고 묻던데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무엇이 있느냐고 물어야 할까요? 곰곰히 생각해 보는 한 주간이 되시길 바랍니다.
교회에 드리는 당부
떼제의 편지 중에 ‘교회에 드리는 당부’라는 글이 있습니다. 교회여, 당신 자신의 본질적인 내면의 참 모습을 찾아 주십시오. 살아 있는 자의 터전, 화해의 터전, 단순 소박함의 터전이 되어 주십시오. ‘살아 있는 자의 터전’인 교회여, 모두가 반쯤 죽어 있는 삶에서 벗어나 충만한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내면적 삶의 문을 활짝 여십시오. 기쁨의 문을 여십시오. 남녀노소를 불러 모으고 찬양이 영원히 그치지 않는 포용력 있는 묵상 기도를 통해 우리가 하늘의 기쁨 중의 어떤 부분을 이 지상에서 볼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
교회여 ‘화해의 터전’이 되어 주십시오. 그리스도와 화해된 사람으로 살아가지 않는다면 그리스도인의 대각성이란 결코 있을 수가 없습니다. 나중으로 미루지 않고 일단 화해에 의해 우리가 변화된다면 우리는 사람들 사이에서 신뢰와 화평의 누룩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교회여, 단순 소박함의 터전이 되십시오. 단순 소박하게 살아가면 친교의 삶이 촉진됩니다. 반면 외부적인 힘의 과시는 신뢰를 손상시키고 두려움을 일으킵니다. 세상의 부가 보다 균등하게 나누어지는 길을 찾고자 깊이 심려하고 있는 많은 사람들의 희망을 잊지 마십시오. 현존하는 물질적 불평등은 무력 분쟁의 한 원천입니다. 평화의 터전이 되기 위해 우선 함께 나눔의 터전이 되어 주십시오.
교회를 향한 간곡한 당부가 여기에 들어 있습니다.
샬롬(Shalom)
유태인들은 샬롬이라고 인사합니다. 워낙 전쟁이 많은 지역에서 살다 보니 오늘 하루만이라도 평안하길 기원한 것이 유래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샬롬은 전쟁이 없다는 소극적 의미의 평화 개념에 머물러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자녀로서 사랑을 받고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화목하고 따뜻한 인간관계를 맺고 물질과의 관계에서도 만족스러운 관계를 유지하는 등 모든 바른 관계를 유지하는 종합적인 평강, 종합적인 만족, 총체적인 화평과 행복을 샬롬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 종합적인 샬롬(Shalom)의 축복을 받으시지 않으시렵니까?
가치의 기준
2차 세계대전 후 각 나라 사람들을 싣고 가던 B29 비행기가 갑자기 고장이 났습니다. 낙하산을 짊어지고 속히 뛰어 내리라고 기장이 말하였지만 모두 겁을 먹고 있었습니다. 그때 기장이 말했습니다.
“히틀러의 명령이다. 뛰어 내려?” 그러자 독일인이 “하이! 히틀러”하고 뛰어 내렸습니다. “천황폐하의 명령이다.” 했더니 “쏘데스까”하고 일본인들이 뛰어 내렸습니다. 프랑스인들에게는 펼쳐진 낙하산을 보이면서 “저 스타일이 멋지지 않소.” 하자 뛰어 내렸고, 미국인에게는 “모두 뛰어 내리니 민주주의 원칙, 다수결의 원칙에 따르시오” 했더니 거침없이 뛰어 내렸습니다. 맨 나중까지 남은 한국인에게 한참 생각하던 기장이 “뛰어 내리는 것은 공짜요.”했더니 “진짜로 공짜입니까?”하고 뛰어 내렸다는 것입니다.
가치의 중심이 어디에 있는가를 말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주님의 명령이다. 뛰어내려”하면 거침없이 그 은혜의 창공을 향해 몸을 내어 맡겨야 하지 않을까요?
그의 길
‘하나님은 내가 머물고자 할 때 가라고 하셨다. (숲속은 시원한데) 나는 그 이유를 몰랐다. 나는 내가 서 있던 길 건너에서 돌이 부서지는 소리를 들었다.
하나님은 내가 가고자 할 때 머물라고 하셨다. 그래서 나는 “뜻대로 하소서”라고 대답했다. 다음날 아침 일찍, 사람들은 내가 가려던 길 너머에서 머리가 찢어진 뱀을 발견했다. 나는 더 이상 이유를 묻지 않는다. 앞길을 알 수 없지만 나는 그의 길을 가련다. 나는 알지 못하나 그가 아시고 나를 위해 안전한 길을 선택하시리니···.’
찰스 카우만의 젊은이를 위한 명상에 나오는 글입니다. 정말 우리의 하나님은 가장 선하시고 안전한 길 그 자체이십니다.
베토벤이 작곡을 하듯
자기의 생업이 무엇이든 간에 그 일을 아주 잘해 내야 합니다. 과거에도 현재에도 그리고 미래에도 자기보다 그 일을 더 잘하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말입니다.
자기의 직업이 거리를 청소하는 일이라면 미켈란젤로가 그림을 그리듯, 세익스피어가 글을 쓰듯, 베토벤이 작곡을 하듯 거리를 쓸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하늘의 천사들과 땅위의 사람들이 거리를 지나가다 이렇게 말하도록 해야 합니다.
“여기 위대한 거리 청소원이 살다 갔구나. 그는 자기 일을 정말 잘했구나”
최고로 살아 내는 인생을 가꾸시기 바랍니다.
최상의 약
남아프리카의 고아원에서 많은 어린 아이들이 원인 모를 병으로 죽어 가고 있었습니다. 유엔에서 급파된 의사들이 원인을 분석하고 다음과 같은 처방을 내렸습니다.
“깨어 있을 때 10분간 안아 주고 입맞춤 해주고 귀여워 해 줄 것”
처방대로 어린 아이들을 대하자 아이들은 원기를 회복했고 정상적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최상의 약은 사랑입니다. 그 최상의 약을 항상 복용할 뿐 아니라 나누어 주시기 바랍니다.
물위를 걸으신 이유
미국의 유명한 작가 마크 트웨인이 성지순례를 하였습니다. 어느 날 게네사렛(갈릴리) 호숫가에 도착하게 되었습니다. 그 호숫가에는 여러 척의 배가 있었는데 배 주인들은 전부가 아랍 사람들이었습니다. 마크 트웨인이 배삯을 물어보았습니다. 배 주인은 10달러라고 대답했습니다. 이때 트웨인은 놀란 표정으로 말했습니다.
“이제야 알겠군! 예수님께서 왜 호수 위를 걸어가셨는지.”
기적은 인간의 필요에 의해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필요에 의해 일어나는 것입니다.
기독교 교육의 목적
기독교 교육의 목적은 모든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구속적 사랑과 은혜를 깨닫고 그 안에서 성장하게 하여, 그들이 신앙과 사랑으로 하나님께 응답함으로써 마침내는 그들 자신이 누구인지, 그들이 처해 있는 정황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알게 되며, 그들 자신들이 하나님의 자녀요, 교회의 한 지체라는 것을 점점 더 인식하고, 모든 관계속에서 하나님의 성령의 충만한 임재속에 살며, 이 세상에서 예수님 제자의 직분을 수행하고, 기독교 희망 안에서 살도록 돕는 것입니다.
이 긴 문장속에서 특히 동사에 관심을 가지시고 기독교교육 진흥주일을 지내시기 바랍니다.
바라볼 것
손양원 목사님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두 아들 형제가 여수·순천반란사건때 공산당원에게 학살을 당했습니다. 두 아들의 장례식 자리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참석하여 목사님을 위로하였습니다.
그러나 정작 손양원목사님은 오히려 주객들의 위로를 물리치면서 다음과 같이 감사했습니다.
“한 집안에 순교자 하나만 있어도 감사한 일인데 둘이 생겼으니 얼마나 감사한가. 맏아들을 하나님께 드리라고 했는데 나는 맏아들과 둘째 아들을 하나님께 온전히 드렸고 어린 것들의 피가 앞으로 교회의 씨앗이 되게 되었다.”
과연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한 것(골2:7)입니다. 우리의 시선은 하나님을 향해야 하는 것입니다.
축복의 손길
영국의 비평가이며 사상가인 존 러스킨(John Ruskin)이 쓴 「티끌의 윤리」라는 책에서 ‘진흙은 하나님이 들어 쓰실 때에 무엇이 될 수 있는가?’를 묻고는 이렇게 결론을 내렸습니다.
“모래와 흙과 불이 하나님의 축복의 손길에 붙잡히게 될 때에 사파이어가 될 수 있다. 모래가 하나님의 축복의 손에 붙잡히게 될 때에 오팔이 될 수 있다. 맨 진흙이 하나님의 축복의 손길을 통해 다이아몬드가 될 수 있다.”
우리의 인생이 하나님의 축복의 손길에 잡힐 때에 놀라운 창조의 능력, 생명의 축복을 얻게 될 것입니다. 은총의 새해에 축복의 손길이 교우 여러분을 꼭 붙잡아 주시길 기도합니다.
셈할 시간
탈무드에는 사람을 평가하는 기준이 세가지 있다고 합니다. 히브리어로 ‘키소, 코소, 카소’라고 합니다.
키소는 돈을 넣는 주머니인데 돈을 어디에 쓰느냐하는 것입니다. 돈 씀씀이가 그 사람의 평가 기준이란 말입니다.
코소는 술잔을 의미하는데 어디에 무엇을 즐거움으로 삼고 살아 가는가하는 것입니다. 허망한 향락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의 잔을 즐거움으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지요.
카소는 인간의 노여움을 말하는데 사람됨은 그의 인내력에 의해 평가된다는 것입니다.
셈할 시간이 되었을 때 주님은 어떤 평가 기준으로 우리를 심문하실까요.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요21:15-17)”
내려서는 지혜
슈바이쳐는 철학·신학·의학·음악 네 부문의 박사학위를 헌신짝처럼 버리고 아프리카 흑인을 위해 살겠다는 결단을 하였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미쳤다고 돌았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의 결단은 위대하였고 그의 인생은 밤하늘의 별처럼 인류 역사에 찬란히 빛나고 있습니다.
내려서는 지혜를 소유하였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내려 설 때에 하나님이 우리를 들어 높이시고 사용하여 주십니다.
성탄이란 바로 하나님의 내려서는 지혜를 보여주신 것입니다. 내려서는 삶이 되시길 기도합니다.
말 안할래
어느 정신병원에서 환자 한 사람이 담장을 넘어 용케 도망쳤습니다. 택시를 잡아탔습니다. 운전기사가 묻습니다.
“어디로 모실까요?”
정신병자가 의기 양양하게 대답합니다.
“말 안할래, 안 아르켜 주지”
도대체 어떻게 하자는 것입니까?
인간의 모습이 그와 같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인도하시려고 합니다. 주님께 맡기는 열린 마음이 필요합니다.
누가 부자인가
친구의 일이 성공적일 때 마음이 흐뭇하고 아름다운 친구의 용모에 대해 샘이나 질투가 나지 않으면 부자입니다.
남을 위해 돈을 쓸 때 주저되거나 아까운 생각이 안나면 그는 부자입니다.
아들과 딸이 보통사람(?)으로 성장하고 있는 것에 대해 감사한 생각을 가지고 있으면 그는 부자입니다.
식사기도를 드릴 때 끼니마다 정말 마음 속으로 그 음식에 대하여 감사한 마음이 있으며 그는 부자입니다.
자연의 아름다움이 눈에 들어오고 새의 노래 소리가 확성기에서 듣는 것처럼 크게 들리면 그는 부자입니다.
모자란다 더 있어야 겠다는 생각보다 이만한 것도 얼마나 감사한가하는 생각이 더 크면 그는 부자입니다.
남을 비판하는 마음보다 축복하는 마음이 더 많으면 그는 곧 부자입니다.
현재나 과거를 후회하고 한탄하는 생각보다 그 마음이 내일이라는 집에 살고 있으면 그는 부자입니다.
가장 바쁠 때 하나님을 생각할 수 있다면 그는 부자입니다.
죽음 곧 자기 생애의 청산에 대하여 자신감이 있으면 그는 부자입니다.
인격 건설 (Character Building)
인도의 유명한 지도자 마하트마 간디에게 영국의 기자가 “지금 인도의 가장 시급한 문제가 무엇인가?”라고 물었을 때 그는 인도의 지금 가장 시급한 과제는 경제 건설이나 사회복지 건설이 아니라 인격 건설(Character Building)이라고 대답한 일이 있습니다.
무너져 내린 인격을 세우는 일, 이것이 이 시대의 그리스도인의 사명이며 그리스도인은 인격 건설의 모범을 보일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신앙을 갖는다는 것은 가장 성숙한 인격 건설을 하는 것입니다. 한 걸음 뒤로 물러서서 무너진 인격을 신앙으로 다시 세우시지 않으시렵니까?
수준
한국말이 서투른 선교사가 활동하던 시절의 초창기 한국교회는 남녀를 구별하여 앉아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예배 드리기 전에 선교사가 좌석 안내를 하는 것입니다.
“오늘 예배 드리기 위해 자리 정돈합니다. 남자새끼들은 오른쪽에, 여자 새끼들은 왼쪽에, 그리고 아이 새끼들은 아무데나 앉으시오”
그 선교사는 “개조심씨 계십니까?” 수준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대로 순수와 애교가 있던 시절입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의 수준은 어디에 머물러 있습니까? 비자금, 검은 돈으로 망국의 수준에 이른 것이 아닙니까?
돌아서야 합니다. 새 지평을 열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수준을 높이기 위해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제 3 부 며느리 죄 때문에
한 번의 무례 /
감사하면 /
속셈 /
인도의 코끼리 /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 /
3년동안 /
오해하기 쉬운 발언 /
제 3의 인생 /
하나님께 아끼지 말라 /
상호이해 /
샬롬과 팍스 /
그게 사실이라면 /
하마가 불쌍해 /
며느리 죄 때문에 /
대통령의 어머니 /
아, 그분이시다 /
예루살렘 입성 /
손수하는 이유 /
그래도 믿는다 /
또 하나의 차원 /
생명의 물 /
세가지 사랑의 차원 /
누구에게 물을 건가 /
하나님의 음성 /
세가지 의문 /
함께 드리는 기도 /
남은 수명 /
새로운 명령이 있기 까지 /
3빼 /
이름을 알 수 없는 봉사
한 번의 무례
옛날 한 믿음 좋은 왕이 살았습니다. 그는 자기 신하들이 하나님께 감사할 줄 모르는 것을 늘 가슴 아프게 생각했습니다. 신하들과 함께 잔치를 벌이며 계획적으로 거지를 한 명 불러 왕의 옆에 앉게 했습니다. 거지는 왕의 곁에 앉자마자 인사도 없이 마구 먹고 마시는 것이었습니다.
신하들은 한결같이 거지를 질시하고 욕하며 내쫓으려고 했습니다. 은혜를 모르는 거지같은 인간이란 것이죠. 이 때 왕이 조용히 말했습니다.
“이 거지는 지상의 왕에게 단 한 번의 무례를 했을 뿐이다. 그러나 너희들은 날마다 세번씩 식탁에 앉으면서 우주의 주인되신 하나님께 몇 번이나 감사드렸느냐? 너희 무례는 수만 번이지만 이 거지는 단 한 번의 실수를 한 것이다.”
그후로 신하들은 큰 깨달음으로 돌아와 감사하는 사람이 되었다고 합니다. 돌아올 만큼의 감사에의 깨달음이 있으시길···.
감사하면
“우리에게 별빛을 주시는 은혜를 감사하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달빛을 주실 것이요. 우리에게 달빛을 주시는 은혜를 감사하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햇빛을 주실 것이요. 우리에게 햇빛을 주시는 은혜를 찬양하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햇빛도 소용없는 신비의 광채를 우리 마음 속에서 영원히 빛나도록 축복해 주실 것이다.”
스펄전 목사님의 글입니다. 우리 마음 속에 영원히 솟는 행복의 빛을 발견하려면 깜박거리는 작은 별빛 즉 작은 것 까지도 하나님의 은혜요 축복임을 알고 감사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작은 것에 감사하면 영혼에 빛나는 열매가 채워질 것입니다.
속셈
하나님께 능력과 축복을 받아 보겠다고 몸부림 치던 어느 교인이 작정하고 산에서 기도 생활을 하였습니다. 굶기를 밥먹듯 하다가 개구리를 잡아 먹기 시작했는데 개구리를 잡아 놓고 보니 하나님께 십일조를 드려야겠다는 생각이 난 것입니다.
고심 끝에 개구리 앞다리를 십일조로 드리고 뒷다리를 먹기로 했습니다. 개구리 앞다리를 십일조로 받으신 하나님께서 “내가 네 속셈을 다 안다”고 하셨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속셈을 다 알고 계십니다. 중심을 아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속셈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칭찬받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인도의 코끼리
인도 선교사가 전해 준 이야기입니다.
인도의 코끼리는 큰 물건을 들어올리거나 운반하는 재주와 힘이 있습니다. 그러나 조그만 말뚝에 매어 놓으면 그 코끼리는 얌전히 있다는 것입니다. 그 말뚝은 결코 뽑을 수 없으리라 믿기에 한 번도 시도해 보지 않고 매어 있다는 것입니다.
시도하지 않는 것은 시도 후 실패하는 것 보다 더 나쁜 것입니다. 새해에는 예수 그리스도 보여주기를 시도하는 성도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
신학자 한스 큉은 720쪽에 달하는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이라는 책에서 “오늘 같은 시대에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이 무엇일까? 예수 그리스도를 따름으로서 가장 인간답게 살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행복하게 살고 행동하고 고난을 받으며 죽기까지도 하는 것이다. 그렇게 살아감으로 불행할 때나 행복할 때나 생명이나 죽음 앞에서도 하나님의 도움을 받고, 그렇게 함으로서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주는 유익한 인생을 살 수 있는 것”이라고 적고 있습니다.
우리 주님이 열어 주신 제2의 기회인 새해에 전 유엔 사무총장 덕 함머슐트의 말처럼 “모든 지난 일에 대해서는 하나님께 감사, 모든 오는 일에 대해서는 주님께 아멘”하는 태도로 살아 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3년 동안
일본에서 있었던 일인데 어떤 집을 수리하려고 나무를 떼내는 도중 도마뱀 한 마리가 못에 박혀 있는 것 보았습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그 도마뱀은 죽지 않고 살아 있었습니다. 인부들이 주인에게 언제 못을 박았느냐고 물었더니 3년전에 박은 것이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래서 인부들은 하던 일을 멈추고 이 도마뱀이 어떻게 살았을까 생각하며 궁금하게 여겼습니다.
그런데 잠시 관찰을 해보니 다른 도마뱀이 못에 박혀 있는 도마뱀에게 계속 먹을 것을 날라다 주더랍니다. 3년 동안 그렇게 산 것입니다.
일개 미물인 도마뱀도 동료를 먹여 살리는데 만물의 영장이라고 하는 우리 인간은 어찌 그렇게도 제 입만 알고 사는 것일까요?
오해하기 쉬운 발언
기독교 윤리학에서 돌출되어 오해하기 쉬운 두 개의 발언이 있습니다. 그 하나는 성 어거스틴(St. Augustin)의 말로 “하나님을 사랑하고는 네 마음대로 하라.”는 말이고, 다른 하나는 종교개혁자 루터(Martin Luther)의 말로서, “용감하게 죄를 지으라”는 말입니다. 오해하기 쉬운 말이지만 그 말의 깊은 의미를 생각할 수 있다면 납득이 갑니다.
진정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아무리 무제한의 자유가 주어질지라도 하나님의 뜻을 거스리지 않을 것입니다. 문제는 하나님을 사랑하느냐는 것입니다.
대담하게 죄를 지으라는 말도 인생의 사소한 일에 대해 엄격주의로 규제하려고 하거나 입술로만 하나님을 공경하는(Lip service) 냉혹하고 형식적인 신앙에 대해 점잖게 야단을 치는 것이다.
우리는 정말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넓은 사랑속에서 감사하며 넉넉히 용납함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까?
제 3의 인생
유대인의 격언입니다. “사람이 바꾸려해도 바꿀 수 없는 것이 한가지 있다. 그것은 자기의 부모이다.” 부모와 자식은 곧 한 몸이기 때문입니다. 어버이를 밥삼아 먹고 자식이 살게 된 것입니다.
자식에게 주어진 하나의 길이 있다면 그것은 어버이를 공경하고 섬기는 것 뿐입니다. ‘효성이 지극하면 돌 위에 풀이 난다’는 속담이 있는데 지극한 효성은 하늘의 기적을 일으키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초나라의 노래자는 늙으신 어버이를 즐겁게 해드리기 위해 일흔의 나이에도 색동옷을 입고 어리광을 부렸다고 합니다. 어버이를 섬기는 일은, 기거함에 있어서는 공경을 다해야 하고 봉양함에 있어서는 즐거움을 다해야 하며, 병들었을 때에는 근심을 다해야 하고, 돌아가실 때에는 슬픔을 다해야 하며, 추모할 때에는 엄숙함을 다해야 한답니다.
성숙한 그리스도인은 제 3의 인생을 예비하고 공경을 다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께 아끼지 말라
건강하고 좋은 씨를 아깝다고 밭에 뿌리지 않으면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을 얻을 수 없는 것처럼 그리스도인으로서 좋은 것을 하나님께 드리지 않고는 결코 남는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초대교회의 교부 중 한 사람인 터툴리안은 “네가 네 자신을 아끼지 않으면 않을수록 하나님은 너를 아끼시리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께 귀한 것, 좋은 것, 아름다운 것을 드릴 때 하늘도 땅도 함께 감동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감동하실 수 있는 성도의 드림이 진하고 그윽한 향기로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안에 가득 채워지길 기도합니다.
상호 이해
상호 이해를 위한 첫째 조건은 이해하길 바라고, 그것을 찾고, 그리고 이해하려는 의지가 있어야 함을 반드시 명심해야 합니다. 이해하려고 할 때에야 이해가 되는 것입니다. 진정한 이해가 이루어지려면 서로 상대를 향하여 마음을 열려고 해야하며 그것이 삶의 대화로 나타나야 하는 것입니다.
상호 이해를 위한 둘째 조건은 자신을 표현해야 하고, 그 표현의 시간을 충분히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삶에서 중요한 것은 사실 자체가 아니라 그 사실을 보고 해석하는 우리의 태도입니다.
상호 이해를 위한 셋째 조건은 사랑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을 이해하시기 위해 십자가의 사랑을 나타내 보이셨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이해하고 이해하는 사람은 사랑합니다. 이해되었다고 느끼는 사람은 사랑받는다고 느낍니다. 그리고 사랑받았다고 느끼는 사람은 확실히 이해되어졌다고 느낍니다.
이것이 하나님 사랑이 지닌 신비입니다.
샬롬(Shalom)과 팍스(Pax)
평화라는 말은 사상적으로 둘로 나누어집니다. 하나는 샬롬(Shalom)이고 또 하나는 팍스(Pax)입니다.
샬롬은 히브리어로 성서에서 말하는 평안을 말합니다. 그러나 영어의 피스(Pesce)라는 말의 어원이 되는 팍스는 로마 사람들의 사상, 로마 철학에서의 평화를 말합니다.
샬롬은 하나님의 은총에 기인하고 팍스는 인간적인 힘에 기초합니다. 힘에 기초한 평화는 고요하지만 진정한 평화는 아닙니다. 참 평안은 자유안에 있습니다.
팍스는 힘있는 몇몇 사람만이 누릴 수 있으나 샬롬은 모두가 함께 누리는 것입니다.
이 땅에 진정한 샬롬이 오길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일본의 망언에도 불구하고 샬롬을 기도하는 성도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그게 사실이라면
한 어린이가 자기를 괴롭히는 문제를 엄마에게 물었습니다.
“엄마, 예수님을 마음에 모시고 있는 사람은 하나님 나라에 간다는데 사실이예요?”
“암, 사실이지.”
“그럼, 예수님을 마음속에 모시지 않은 사람은 나쁜 곳으로 가고 하나님 나라에 가지 못한다는데 사실이예요?”
“그래, 그것도 사실이지.”
“음, 그럼 그게 사실이라면 사람들에게 이 사실을 말해 줘야겠네요!”
신앙의 사실을 말해 주는 교우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하마가 불쌍해
까마귀 한 마리가 개구리에게 말했습니다.
“천국에서 성대한 파티가 열린대.”
그러자 개구리가 눈을 껌벅거리며 대답했습니다.
“천국에서 말이지?”
까마귀가 아는 체를 했습니다.
“거기에는 아름다운 보석도 있대. 그리고 악사들이 와서 연주하고 노래도 한다더군.”
개구리는 입을 크게 벌리고 소리쳤습니다.
“천국에서?”
그러자 까마귀가 덧붙입니다.
“그렇지만 입이 큰 동물은 들어갈 수 없대.”
그러자 개구리는 갑자기 입을 오무리고 작게 중얼거렸습니다.
“불쌍한 하마! 얼마나 실망을 할까?”
자신의 약점을 볼 수 있을 때 인격의 성숙은 시작되는 것입니다.
며느리 죄 때문에
시어머니가 학습문답을 하러 교회에 가게 되었습니다. 먼저 믿은 며느리가 문답 내용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목사님이 만일 ‘예수님을 왜 믿습니까?’하고 질문하시면 ‘구원 얻으려고 믿습니다’하세요. 그리고 ‘예수님이 누구를 위하여 죽으셨습니까?’하고 물으시면 ‘내 죄를 대신하여 죽으셨습니다’하고 대답하셔야 돼요.”
시어머니는 신이 나서 문답을 하러 갔습니다.
“예수님은 누구십니까?”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합디다.”
“예수님은 어떻게 죽으셨습니까?”
“십자가에 못 박혔다던데요.”
“왜 그렇게 죽으셨나요?”
“내 며느리 죄 때문에 죽었다고 하더군요.”
기독교 신앙은 남의 것이 아닙니다. 바로 나의 것, 내 실존의 문제입니다. 내 죄의 용서가 주님의 십자가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용서받고 용서하는 신앙이 새 세계를 열어가는 부활 신앙입니다.
대통령의 어머니
미국 조오지 워싱턴 대통령 모친의 생일날에 많은 축하객이 모였습니다. 한 손님이 대통령의 어머니를 뵙고
“당신은 어떻게 해서 아들을 훌륭하게 만들 수 있었습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이 질문에 그 어머니는
“예, 나는 아들에게 ‘하나님에 대해 절대 복종할 것’을 가르쳐 주었을 뿐입니다.”
하고 대답하였습니다. 성공적인 삶을 산 자녀의 배후엔 훌륭한 신앙의 어머니가 있습니다.
하나님께 순종하고 복종하는 것을 가르치는 어머니, 바로 그 어머니를 썬다씽은 ‘하나님의 신학교’라고 표현했던 것입니다.
아, 그분이시다
프란체스코는 유난히 나병 환자를 기피했는데, 어느 날 좁은 길로 여행하던 중 나병 환자와 마주치게 되었습니다. 순간 그는 뒤로 물러섰습니다. 그때 마음 속에서 질책하시는 주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그는 다시 나병 환자에게로 다가가서 그 당시의 인사 습관대로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춘 후 다시 길을 떠났습니다.
그러면서 뒤를 돌아 보았는데 길엔 아무도 없었고, 햇빛만 내리 쬐고 있었습니다. 프란체스크는 중얼거리며 무릎을 꿇었습니다. ‘아, 예수 그리스도셨구나.’
사순절의 기간에 숨어 계신 그리스도를 만나시길 바랍니다.
예루살렘 입성
“그리스도를 보라. 그분은 전쟁용 군마를 타신 것이 아니다. 군세있고 화려한 행차도 아니다. 오히려 사람을 위해서 온갖 수고를 견디어내는 온순한 짐승인 나귀 위에 앉아 계신다. 이를 통해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무섭게 하거나, 쫓아버리려고, 또 억압하기 위해서 오신 것이 아니라 도움을 주고 스스로 우리의 짐을 지기 위해 오셨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이는 마티 루터의 글입니다. 무기의 충돌이나 전쟁터의 통곡이 아니라 노래와 찬송, 즐거움 그리고 하나님의 축복이 그리스도의 예루살렘 입성에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이 고난 주간에 이루어진 주님의 겸손! 이것이 우리를 믿음에서부터 사랑에 이르게 하는 것입니다.
손수하는 이유
미국 23대 대통령인 루즈벨드의 부인이며, 유명한 인도주의자요 평론가였던 엘러너 루즈벨트 여사가 무더운 여름날 불우한 소녀들을 위해 파티를 베풀었습니다. 기자들이 취재하기 위해 하이드 파크를 찾았을 때 깜짝 놀랐습니다. 그 무더운 날씨에 엘러너 루즈벨트 여사는 땀을 흘리며 수 많은 빵에 손수 버터를 바르고 있었습니다. 기자들이
“어째서 손수 버터를 바르십니까? 아이들에게 발라 먹으라고 하지 않고···.”
라고 물었을 때에 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영국의 왕과 왕후가 이곳에 오셔서 빵을 드실 때에도 제가 버터를 발라 드렸지요. 이 불쌍한 어린이들이라 해서 그러지 말라는 법이 있습니까?”
라고 대답했습니다.
왕과 고아를 똑같이 볼 수 있는 눈, 그것은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어린이 속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보며 손수 수고하는 사랑을 나타내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겠습니다.
그래도 믿는다
우리가 갖는 믿음은 그 분량과 성숙도에 따라 두 가지로 나뉘인다고 생각됩니다.
‘그래서 믿는다’는 신앙이 있습니다. 조건을 다 따져 보고, 수지 타산을 다 맞추어 본 후에 ‘그래서’ 믿는 것입니다. 다른 종교와 비교해서 우월하기 때문에, 축복을 많이 주기 때문에 ‘그래서’ 믿는 믿음은 그 조건이 바뀌면 무너지기 쉽습니다.
‘그래도 믿는다’는 신앙이 있습니다. 조건과 형편과 사정이 어떠하든지 그 모든 것을 뛰어 넘어 의지적으로 믿는 것입니다. 시편 31편 14절에 ‘여호와여 그러하여도 나는 주를 의지하고 말하기를 주는 내 하나님이시라 하였나이다.’ 고백하고 있습니다.
보다 더 크고 성숙한 믿음! ‘그래도’ 믿는 신앙! 이 믿음의 주인이 되시기 바랍니다.
또 하나의 차원
폴 투루니에는 인간의 질병에 대한 두가지 차원의 진단이 있다고 했습니다. 수평적인 차원의 진단은 과학적인 문제로서 질병의 성질과 병의 원인, 진행 등에 관심 갖는 병리학적, 질병분류학적 영역으로 데이터를 중심으로 하는 병원 의사의 영역입니다.
수직적인 차원의 진단은 영적인 문제로서 질병의 깊은 의미와 목적에 관심 갖는 환자 자신의 주관적, 양심적 활동을 통해 내릴 수 있는 진단입니다. 이 질병과 사건을 통해 하나님은 나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려는가를 묻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은 수평적인 것에만 머물러서는 안됩니다. 수직적인 하나님의 계시와 간섭의 차원이 주어질 때 구원의 생명, 자유와 기쁨이 이루어지게 될 것입니다.
생명의 물
인간의 탐욕으로 물이 병들어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병들어 아파하는 물의 신음 소리를 듣고 있습니다. 우리가 마시는 물에는 창조주 하나님의 사랑과 생명이 담겨 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물은 우리가 산소를 호흡하듯 매일 마셔야 하는 생명의 기본 요소입니다. 물은 생명에 필요한 것이 아니라 생명 그 자체입니다. 이 생명의 물을 죽음의 물로 바꾼 것은 바로 우리 인간들입니다. 물이 죽으면 그 다음 차례는 누구일까요? 자연을 향하여 ‘나 하나쯤이야’하는 생각을 ‘나 하나라도’라는 마음으로 바꾸어야 할 때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생명의 물이라고 하셨습니다. 생명의 물이 그립습니다.
세 가지 사랑의 차원
사랑에는 세 가지 차원이 있습니다. 먼저 위로 향해서 존경하며 높이는 존경의 사랑, 즉 수직적인 사랑으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의미하는 사랑의 차원입니다. 그리고 나보다 못한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동정적인 사랑의 차원이 있습니다. 동정적인 차원의 사랑은 긍휼히 여기는 마음에서 이루어집니다. 그 다음 나와 동등한 위치에서 친절하게 대하는 수평적인 사랑, 성숙한 인격이 갖는 사랑의 차원입니다. 어떤 사람은 동정의 사랑은 잘 하는데 수평적 사랑은 못하는 경우가 있고, 어떤사람은 수평적 사랑을 하면서 수직적인 사랑을 못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세 가지 차원의 사랑이 함께 어우러질 수 있을 때에 성숙한 신앙인이 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누구에게 물을 것인가
터어키에서 선교하던 선교사 한 분이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하려고 했습니다.
“나는 여행을 하고 있습니다. 길을 가는데 두 갈래 길을 만났습니다. 어느 길이 내가 목적하는 곳으로 갈 수 있는 길인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누군가에게 길을 물으려고 찾고 있다가 두 사람을 만났습니다. 그런데 한 사람은 산 사람이요, 한 사람은 죽은 사람이었습니다. 내가 누구에게 길을 물어야 하겠습니까? 산 사람입니까? 죽은 사람입니까?”
“그야 물론 살아 있는 사람에게 물어야 하겠지요.”
하고 사람들이 대답했습니다.
“그렇다면 내가 살아 계신 예수님을 찾아가야지 어찌 죽어 버린 마호멧(여기에는 돈·우상·권력·명예·욕심 등이 포함됨)을 찾아 가겠습니까?”
지금도 살아 계신 동반자 예수님께 여러분의 길을 물으십시오.
하나님의 음성
나중에 종교개혁자가 된 요한 칼빈이 제네바에 여행 중이었습니다. 그 곳 제네바에서 종교개혁 운동을 하던 화렐이 칼빈도 함께 그 지방에서 종교개혁 운동에 참여해 줄 것을 요청하였습니다. 그러나 칼빈은 학자가 될 계획이었기에 그런 운동에 참여하지 않겠다고 핑계했습니다. 그 때에 화렐이
“하나님께서 너를 부르시는데도 그렇게 대답하느냐?”고 고함을 쳤습니다.
요한 칼빈이 나중에 고백하기를 ‘그때 그 음성은 우뢰와 같았고 자기 양심을 찌른 하나님의 음성이었다’고 고백했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세가지 의문
‘모든 일에 중요한 때는 언제일까?’, ‘어떤 만물이 중요한 존재일까?’, ‘세상에서 중요한 일은 무엇일까?’에 대해 의문을 갖고 있는 임금이 있었답니다.
임금은 은자를 찾아가 답을 구하였으나 은자는 아무 말이 없었습니다. 그때 피투성이의 청년이 나타나자 임금은 그를 돌봐 주었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은자는 입을 열어 세 가지 의문에 답을 말했습니다.
“중요한 때는 ‘바로 지금’이고 중요한 존재는 ‘내가 대하고 있는 사람’이며 중요한 일은 ‘그에게 사랑을 베푸는 것’이라”
고 했습니다.
톨스토이의 단편 줄거리입니다. 지금 내가 대하고 있는 사람에게 사랑을 베푸는 것, 이것이 제자의 표식아닐까요?
함께 드리는 기도
오, 주님!
‘주님’이란 말이 지닌 엄청난 의미를 알게 하소서.
하나님을 진정으로 만나게 하소서.
말씀 안에서
교회 안에서
성령 안에서
그리하여 나 자신을 보게 하소서.
그리고
나에게 주어진 사명을 깨닫게 하소서.
주님을
주님으로 모시게 하소서. 아멘
남은 수명
한국 사람의 평균 수명은 71.5세랍니다. 남자는 67.66세이고 여자는 75.67세라고 합니다. 통계상으로 보면 꼬박 8년은 미망인으로 살아야 한다는 얘깁니다.
흡연, 과음, 과식, 만성적 질병, 공격적 성격등이 단명의 요인으로 작용한다면서 40대 남성 사망률이 세계 1위라고 합니다.
모계쪽 집안이 장수 집안이고 고등 교육을 받은 뒤 건전한 가정 생활, 그리고 규칙적 운동과 융통성 있는 성격, 균형 있는 식사, 마음의 평정 등이 장수의 요인이라고 합니다.
인생은 그 날이 풀과 같으며 그 영화가 들의 꽃과 같다고 했습니다(시103:15). 그러나 하나님의 인자하심은 그 경외하는 자에게 영원까지 이른다고 하였습니다.
내가 살아 남아 있는 날이 몇 년이나 될까요?
새로운 명령이 있기까지
6·25동란이 발발하자 맥아더 장군이 동경에서 비행기로 한국에 왔습니다. 그가 한강 인도교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다리가 폭파되고 북한군이 인도교 북쪽까지 밀려와 있었습니다. 끊어진 다리를 살피던 맥아더 장군의 눈에 끊어진 다리에서 집총한 채 파수를 보고 있는 한 병사가 띄었습니다. 이상하게 생각한 장군이 그에게 다가가 그곳에 서 있는 이유를 물으니 그것이 자기 임무라는 것입니다.
“어느 때까지 서 있을 것인가?”
“새로운 명령이 하달되기까지 입니다.”
절망같은 상황 속에서도 새 명령을 기다리며 죽음을 각오하고 서 있는 보초를 보고 맥아더 장군은
“이런 군인이 있는 나라는 망하지 않는다.”
고 했습니다.
군인이 명령에 복종하는 것이 당연하데 그것이 위대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도 주님의 훌륭한 군사가 되어야 합니다.
3빼
요즘은 ‘빼’라는 말이 유행이랍니다. 그런데 그 ‘빼’라는 말이 몹시 서운하게 들린답니다. 특히 가장에게 말입니다. 직장, 가정에서의 스트레스 때문에 부어 오른 살이 보기 싫다고 구박하는 속 모르는 아내와 자식들은 ‘살빼’합니다.
치솟은 전세 값을 감당할 수 없을 때 집주인은 ‘방빼’합니다. 회사가 경영합리화와 경영난이라고 하면서 직장상사는 ‘책상 빼’합니다. 그래서 요즘 ‘책상 지키기’ 운동이 눈물겹답니다.
결코 우리 주님은 ‘빼’라고 하시지 않을 것입니다. 어느 누구도 거절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거기에 소망이 있는 것입니다.
이름을 알 수 없는 봉사
중국 선교사 허드슨이 개울에 빠져 곤경에 처했을 때 지나가던 사람이 구해주었습니다. 이름을 묻자 그 사람은 ‘성경의 착한 사마리아 사람도 이름이 없습니다.’하고 그냥 가버렸습니다.
지하 기도실에 꽃혀 있는 꽃꽂이, 계절마다 바뀌는 강단의 방석, 새벽기도에 신발을 돌려 놓는 손길, 소리 없는 화장실 청소 등 우리 교회 안에 이름을 알 수 없는 봉사들이 있습니다.
더 많은 무명의 봉사가 그리스도인의 몸을 살지게 할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앗아갈 수 없는 큰 기쁨과 축복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실테니까요.
제 4 부 엄마는 언제 와?
도망가는 이유 /
감사와 만족이 축복이다 /
합리적 또는 이타적 이기주의 /
불리움을 받는 사람 /
옥에도 티는 있다 /
모시고 살기 /
말없는 말 /
더 중요한 것 /
아인슈타인의 성공방정식 /
당신 영광 위해 살게 하소서 /
또 하나의 깨달음 /
함께 드리는 기도 /
더 큰 조건 /
엄마는 언제 와? /
비 우상화 /
분수와 주제 /
깨달음 /
백만번의 감사 /
믿음의 줄 /
신앙의 본질 /
없으면 못 사는 것 /
포인세티아 /
말씀이 육신되어 /
끊임없는 교신 /
확실한 충성 /
한 외국선교사의 송년사 /
은헤가 먼저 /
정말 알아야 할 것 /
되돌려 준 바가지 /
까닭을 아는가 /
도망가는 이유
교우들과 함께 앉을 기회가 종종 있습니다. 식사 장소이거나 예배 장소이거나 회의 장소이거나 한결같이 담임목사인 내 주위에는 아무도 앉지를 않습니다. 가까이 왔다가도 기겁을 해서 도망가는데 그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왜일까요?
대개 사람을 피하는 경우는 냄새가 나거나, 추하게 생겼거나, 무섭거나, 잘못했거나 빚진 일이 있을 때 사람을 피합니다. 가끔 그런 생각을 해봅니다. ‘내가 무섭게 생겼나, 추한가, 잘못한 게 있나’하고 말입니다.
주님이 같이 앉으실 기회가 되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갑자기 예수님 발 앞의 마리아가 생각납니다.
도망가는 이유가 뮙니까?
감사와 만족이 축복이다
제비는 닭을 향해
“끼니마다 주인이 모이를 주어 나처럼 허공을 해매지 않아도 되니 부럽기 그지없다”
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닭은 제비더러
“나는 날고 뛰고 달려 보았자 울타리 안인데 너는 사방 천지를 두루 구경하고 다니니 부럽기 그지없다”
고 했습니다.
자기 처지와 형편에 감사하고 만족하는 것 그 자체가 축복입니다. 감사하고 만족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합리적 또는 이타적 이기주의
1978년 노벨 경제학상을 받은 허버트 사이몬(Herbert Simon)의 이론을 보면 인간의 행동은 의사 결정과 함수 관계에 있습니다. 또 그 의사 결정은 ‘가치’와 ‘사실’이라는 두 변수의 함수 관계라는 것입니다. 즉 행동을 한다는 것은 의사 결정을 한 까닭이고 그 의사 결정은 가치 있는 것이 무엇인지와 체험의 사실에 근거하여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가치’는 이타적인 방향 설정에서 주어집니다. 그리고 그렇게 이타적으로 사는 것이 결국 자신에게도 이롭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때 온전한 생활 신앙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합리적 또는 이타적 이기주의’라고 부르게 됩니다.
그리스도인의 ‘가치’와 그리스도인됨의 ‘사실’을 통해 빛과 소금되는 생활신앙인이 되는 것입니다.
불리움을 받는 사람
“가난한 사람이 하나님을 의지하는 일은 얼마나 쉬운 일인지 모릅니다. 하나님 외에 가난한 사람이 의지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부자가 하나님을 의지하는 일은 참으로 힘든 것입니다. 그의 모든 재산이 소리를 지릅니다. ‘나를 의지하라’고 말입니다.”
계속해서 어떤 사람이 하나님께 헌물을 드릴 때에 랍비가 말했습니다.
“자신을 하나님께 제물로 드리는 사람만이 정말 불리움을 받는 사람이 되리라”
그래서 사도바울은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산 제사로 드리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옥에도 티가 있다
어떤 중매장이가 한 젊은 여자에게 결혼 상대로 알맞은 어느 젊은이에 대해 한바탕 칭찬을 늘어 놓고 있었습니다.
“그는 아주 대단한 친구예요. 좋은 성격은 다 갖고 있지요. 정말 멋있는 젊은이라고요”
그 젊은 여자는 머리를 끄덕이며 관심이 있는 것 같았습니다. 중매장이가 계속 말했습니다.
“그런데 딱 하나 흠이 있어요. 말을 좀 더듬어요.”
젊은 여자가 그 말을 듣고 잠시 생각하더니 물었습니다.
“그 사람, 항상 말을 더듬나요?”
중매장이가 대답했습니다.
“아뇨, 아뇨, 그렇지 않아요. 말을 할 때만 그래요.”
말더듬이도 들어 쓰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의 모든 죄와 허물을 용납해 주셨습니다.
모시고 살기
월요일, 주님이 내집에 오셨지만 문간에서 돌아가시면서 “네 마음은 아들딸로 가득 차서 내가 들어갈 자리가 없구나.”하십니다.
화요일, 노크만 하시던 주님께서 “네 집은 돈으로 가득 차 발디딜 틈도 없구나.”하십니다.
수요일, 슬픈 음성으로 주님은 “세상 재미에 귀가 먹어 내 음성을 못듣는구나.”하십니다.
목요일, 화를 내시는 주님은 “내가 찾아왔는데 피곤하다고 인사도 없느냐?”하십니다.
금요일, 울고 계신 주님은 “날 보고 다시 한 번 십자가에 못박히란 말이냐?”하십니다.
토요일, 고함치시는 주님은 “이젠 문도 안 열어 주느냐!”하십니다.
주일, 교회에 가니 주님이 반갑게 맞아 주십니다. “날마다 네 집에 가도 들어갈 자리가 없었는데 그래도 잊지 않고 잠깐 들려주니 고맙다.”하십니다.
교우 여러분, 날마다 주님을 모시는 결단으로 주님의 식탁에 참여하시기 바랍니다.
말없는 말
어느 날 성 프란시스코는 제자들에게 말하기를 오늘은 거리에 나가 전도하자고 하고는 제자들을 이끌고 거리에 나갔습니다. 그런데 성 프란시스코는 온종일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거닐기만 했습니다. 그리고 저녁이 되자 되돌아왔습니다. 제자들이 전도하러 거리에 나가자 하고는 한 말씀도 하지 않은 그 이유를 물었습니다. 그때 성 프란시스코가 대답하시기를 “우리는 행동으로 전도하였느니라!”고 대답했습니다.
우리의 눈동자, 표정, 손놀림 하나 하나가 그리스도를 보여주는 말없는 ‘말’입니다.
더 중요한 것
그리스도인인가 아닌가 보다 ‘어떤 그리스도인가’가 더 중요한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런던 타임지에 가장 행복한 사람에 대한 정의가 설문조사 되었는데 그 순위는 다음과 같았습니다.
1위 : 모래성을 막 완성한 어린이
1위 : 아기 목욕을 방금 끝낸 어머니
3위 : 세밀한 공예의 장농을 완성한 목공
4위 : 어려운 수술로 한 생명을 구한 의사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자신의 일을 충실히 끝까지 감당하고서 거기서 보람과 감사를 갖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척도는 얼마나 은혜를 알고 감사하는가에 있습니다.
아인슈타인의 성공 방정식
‘인생이 무엇이냐’는 기자들의 질문을 받고 아인슈타인은 ‘a=x+y+z’이라고 대답했습니다. 기자들이 해석을 요구하자 아인슈타인은 “a가 인생의 성공이라면 x는 일이고, y는 즐기는 것이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면 z는 무엇입니까?” 한 기자가 급히 질문하자 아인슈타인은 빙그레 웃으면서 “그것은 침묵이라”고 했습니다. 즉 인생의 성공=일+즐기는 것+침묵이라는 것입니다.
일에서 떠나 휴가를 즐기는 계절입니다. 그러나 거기에 침묵, 즉 하나님 앞에서의 자기 성찰이 없다면 휴가는 무의미할 것입니다.
주여! 우리로 하여금 침묵 가운데 ‘세미한 음성’을 듣게 하소서.
당신 영광 위해 살게 하소서
우리 위해 흘리신
십자가의 피와
당신의 자비로서
나를 구원해 주시고
새 생명력을 불어 넣어 주십시오.
나 언제나 당신 말씀의 증인되고
당신의 영광 위해 살며
당신 왕국의 기쁨을
영원히 누리게 해 주십시오.
이 기도는 4세기경 이집트의 마카리오의 기도문입니다.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것이 하나님의 부르심입니다.
또 하나의 깨달음
그냥
그저
그렇게
마냥
마침내
마땅히
주어진 일상 속에서
큼직한 손길을 본다
고개 숙일수록 감사뿐
눈을 감을수록 넉넉한 깨달음
입을 열수록 노래뿐
시간이 지날수록 새로운 생명의 충일함
은혜로다. 복이로다.
건너편에서
나즈막하게
다가온
은총이로다.
함께 드리는 기도
아프리카의 아산티 부족에 다음과 같은 설화가 전해져 내려오고 있습니다.
맨처음 사람들은 女神과 함께 땅에서 살고 있었다. 여신이 모든 것을 도와주었으므로 인간 세상에는 어려움이 없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여신이 하늘에 있는 男神을 사모하여 하늘로 올라가 버렸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여러 가지 어려운 일에 부닥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회의를 하여 온 세상의 절굿공이를 다 모아서는 그것을 하나씩 쌓았습니다. 곧 까마득한 절굿공이 장대가 만들어졌습니다. 맨 꼭대기 절굿공이에 올라간 사람이 소리쳤습니다.
“조금 더 올라가면 하늘에 닿을 수 있다. 절굿공이 하나만 더 올려 보내라!”
그런데 공교롭게도 공이는 더 없었습니다. 온 세상의 공이가 다 동원되었던 것입니다. 사람들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허둥대가가 마을의 현인을 찾았습니다.
“맨 아래에 있는 공이를 뽑아 올려 보내면 될 게 아닌가?”
사람들은 ‘옳거니, 그렇게 간단한 방법이 있는 것을 몰랐구나’하면서 맨 아래에 있는 공이를 뽑았습니다. 그 순간 높은 공이장대는 무너지고 하늘에 손이 닿을 뻔한 사람들은 떨어 졌습니다.
하나님의 은총을 의지하지 않고서는 살 수 없는 존재가 인간입니다.
더 큰 조건
인간이 살아가는데 절대로 필요한 조건이 네 가지라고 합니다. 공기, 음식, 수면, 물입니다. 공기가 없어도, 물이 없어도 생존할 수가 없고, 음식과 잠도 필수적입니다. 그러나 이 네 가지 조건이 다 갖추었다고 해서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더 큰 조건 하나가 필요한데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서는 행복하게 살 수가 없는 것입니다.
더 큰 조건을 채워가시는 여러분의 삶 속에 행복이 보입니다.
엄마는 언제 와?
이탈리아 프라스카디 마을에서 여섯 살 난 꼬마가 우물에 빠졌습니다. 구급 전문가가 로프를 의지하고 내려갔는데, 물에 빠진 아이는 기적적으로 상처를 입지 않은 채 벽을 붙잡고 물에 떠 있었습니다. 그 아이가 구출하러 내려온 사람에게 한 첫 마디는 “엄마, 울 엄마는 언제 와?”였습니다.
우물 속 흑암의 공포가 오직 엄마가 와야 해결될 수 있다는 아이의 절박한 희망과 믿음을 담은 한 마디였습니다.
교회는 우리의 어머니입니다. 거기서 생명과 구원을 얻기 때문입니다.
비 우상화
성서가 지니고 있는 변할 수 없는 진리는 비 우상화입니다. 하나님 한분 외에는 다른 신(神)이 없다는 유일신 신앙과 그 밖의 것이 하나님 자리에 있으면 질투하시며 밀어 내신다는 것입니다.
에덴 동산에서 하나님처럼 되려고 했던 아담은 그 동산에서 밀려 났습니다. 이삭을 귀하게 여긴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은 모리아산으로 그들을 몰아 내셨고, 우상을 섬기던 백성들을 땅 속으로 밀어 내셨고, 율법을 우상화한 서기관 바리새인을 ‘화 있을 진저’라고 저주하셨습니다.
하나님은 항상 하나님 자리에 모셔야 하는 것입니다. 마틴 루터는 ‘하나님으로 하나님 되게 하라.(Let God Be God)’고 외쳤습니다.
비 우상화를 통해서 하나님이 하나님 되시는 세상이 속히 와야 하겠습니다.
분수와 주제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분수를 잘 알아야 수학을 잘하고 주제를 잘 알아야 국어를 잘 한답니다. 분수를 안다는 것과 주제를 안다는 것은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첫 번째 과제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나를 발견하는 것이 신앙의 첫 걸음이기 때문입니다. 과연 우리의 분수와 주제는 무엇인가요? 분수와 주제를 알면 알수록 겸손과 감사가 넘치게 되는 이유를 아시지요?
우리는 다만 하나님의 은혜로 살고 있는 것입니다.
깨달음
사람의 행복은 소유에 있지 않고 깨달음에 있습니다. 깨달음만이 아니라 좀더 나아가서 고맙게 여기는 마음 곧 감사하는 마음에 행복이 있습니다. 사람이 어떠한 여건에 있든지 고마운 마음을 가지면 그 만큼 그는 행복한 것입니다.
참 감사는 하나님의 은혜에 깊은 깨달음에서 비롯됩니다. 그 깊은 깨달음을 소유하시기 바랍니다.
백만 번의 감사
미국의 한 성공한 실업가가 ‘백만 번의 감사’라는 책을 냈습니다. 책의 내용은 다른 내용이 전혀 없고 ‘하나님, 감사합니다.’를 백만 번 쓴 것 입니다.
미국 국회 도서관으로부터 판권을 인정받으려고 하였으나 아무런 가치가 없다는 이유로 거절당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이 실업가는 남이 인정해 주든 그렇지 않든 “우리가 하나님께 백만번이라도 감사하다고 기도하는 것이 마땅하며 그것이 축복과 성공의 비결”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 백만번의 감사를 드릴 수 있는 감사의 신앙을 세워가야 하겠습니다.
믿음의 줄
한 소년이 하늘 높게 연을 날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연이 너무 높이 올라가는 바람에 보이지 않게 되었습니다. 지나가던 사람이 그 소년을 쳐다보며 “연이 어디 있는지 안 보이는구나, 너는 아니?”라고 물었습니다. 소년이 대답했습니다. “그럼요, 이 줄을 잡아 보세요. 팽팽하잖아요. 연은 보이지 않지만 저 위쪽에서 푸른 하늘을 날고 있어요, 줄을 통해 그것을 알 수 있지요”
보이지 않지만 우리를 지키시고 복 주시는 하나님이 계심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믿음의 연줄을 당겨 보면 팽팽하기 때문입니다. 이 믿음의 줄을 꼭 붙드시기 바랍니다.
신앙의 본질
아주 옛날 한 마을에 학교가 처음 세워졌습니다. 어느 장학사가 그 학교를 방문하여 교장 선생님의 안내로 과학실에 들어가니 한 학생이 신기한 듯이 지구의를 이리저리 돌려보고 있었습니다. 장학사가 학생에게 다가가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지구의가 왜 한 쪽으로 기울어 있지?”
이 물음에 그 학생은 당황해 하며
“제가 안 그랬어요”
하고 나가 버렸습니다. 장학사는 실망하여 옆에 서 있는 교사에게 말했습니다.
“지구의가 기울어 있지요?”
이 말을 들은 교사는
“그거 사 올 때부터 그랬어요”
라는 것입니다. 장학사는 기가 막혀 교장 선생님께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교장 선생님 하시는 말씀이 걸작입니다.
“그거 국산품이라 그래요”
본질을 놓치면 코메디가 되고 맙니다. 기독교 신앙의 본질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과 은총입니다. 그 은총 안에 우리의 삶의 가능성이 깃들이는 것입니다.
없으면 못 사는 것
유명한 신학자 칼 바르트(K.Barth)는 “신앙은 우리가 그 위에 서 있는 근거지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에 대한 우리의 삶, 사고, 의지 및 감정 등 전인격에 관계되는 것이며 신앙은 우리가 거기에 매여 달리는 한 가닥의 끈이며 그것으로써 우리가 영향을 받는 유일한 음식”이라고 했습니다.
이는 신앙 없이는 살 수가 없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정말 신앙이 없이는 살 수 없습니다. 없으면 못 사는 것 바로 그 생명을 주는 신앙을 붙드시기 바랍니다.
포인세티아
오래 전 맥시코 어느 마을에 병에 걸린 어머니를 간호하는 착한 소녀가 있었습니다. 소녀는 어머니의 건강 회복을 위해 기도하면서 산에 올라가 약초를 켔습니다. 어느 날 절벽 사이에 돋아나 있는 약초를 캐다 그만 절벽 아래로 굴러 떨어졌고, 소녀가 흘린 피로 주변에 피어 있던 하얀 꽃이 빨갛게 물들었습니다.
소녀의 정신이 희미해 질 때 예수님이 나타나 “저 피 묻은 꽃을 꺽어 어머니께 갖다 드려라”하고 말씀하셨고 그 순간 소녀는 힘을 얻고 일어나 그 꽃을 어머니에게 갖다 드렸습니다. 어머니도 병석에서 일어나 건강을 찾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포인세티아 꽃에 대해 전해진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포인세티아의 꽃말은 ‘희생’ 또는 ‘축복’이라고 합니다. 희생은 항상 축복의 열매를 맺습니다. 붉은 포인세티아 꽃을 보십니까?
말씀이 육신이 되어
생명의 탄생은 신비롭고 아름답습니다. 그래서 갓난 어린아기를 중심으로 온 집안 식구의 관심이 모아 집니다. 모든 식구들이 어린이와 의사소통을 하기 위해 언어생활이 달라집니다. ‘진지 잡수세요’, ‘식사하십시오’하며 예의를 갖춘 언어 대신 ‘맘마 먹자’, ‘쭈쭈 먹자’로 바뀝니다. 이것은 사랑의 언어입니다. 어린이의 언어를 이해하여 그 언어로 뜻을 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언어를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신 것입니다. 이것이 성육신의 신앙입니다.
끊임없는 교신
지구에서 발사된 인공위성은 끊임없이 지상의 미항공 우주국(NASA)과 계속적인 교신을 해야 하고 수시로 점검하고 궤도 수정을 받아야 임무를 완수하고 지상으로 돌아올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삶도 하나님께로부터 이 세상에 보내진 것이기에 계속적으로 하나님과 교신을 하고 우리의 위치를 점검하고 궤도 수정을 받아야 하나님께로 돌아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한 해를 마무리하는 시간에 우리의 삶과 신앙의 궤도의 내용을 조용히 점검하며 하나님과 교신해야 하겠습니다.
확실한 충성
단테의 「신곡」에 보면 단테가 버질의 안내를 받아 지옥 문 앞에 당도했을 때 울음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사연을 알아본즉, 세상에서 이것도 저것도 아니고 충성도 아니하고 배반도 아니하고 차갑지도 더웁지도 않게 살았던 사람들이 천국에도 못 들어가고 지옥에도 못 들어가 지옥 문 앞에서 울고 있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은총으로 허락하신 새해에는 더욱 충성을 다해야 하겠습니다. ‘지내쳐 그리스도 교훈 안에 거하지 아니하는 자마다 하나님을 모시지 못하되 교훈 안에 거하는 이 사람이 아버지와 아들을 모시느니라(요한2서1:9).’
한 외국 선교사의 송년사
친애하는 교우 자매 여러분!
오늘 망年의 예배를 드립니다. 이제 이 밤이 지나면 이年이 가고 저年이 옵니다. 오는 年을 맞이 함에 있어, 새 年과 함께 보낼 몸과 마음의 준비가 필요하듯이 가는 年을 과감히 정리하여야 할 마음 가짐이 또한 중요합니다.
새 年이 오면 더 잘 살아야지 하고 마음을 다짐합니다. 지난 年을 돌이켜 보면 여러 가지 꿈과 기대에 미친 年도 있고, 어떤 年은 실망하고, 어떤 年은 이럭저럭 지나고, 또 어떤 年은 참 재미있었던 年도 있습니다.
사실 새 年이라고 무조건 좋기만 하겠습니까? 또 지난 年이라고 무조건 나쁘기만 하겠습니까? 다만 새 年은 어떤 年일까? 하는 호기심도 있겠죠. 그러나 여러분 어떤 年을 만나더라도 잘 살아야 합니다. 헌 年이든 새 年이든 이 모든 年들은 주님께로부터 오는 年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오늘 밤에 이별해서 갈 年도 또 올年도 주님의 것임은 물론입니다.
은혜가 먼저
마리안 엔더슨은 ‘위대한 가수’입니다. 그의 영감 있는 찬양은 사람들에게 많은 은혜를 끼쳤습니다. 상처받은 영혼을 위로하고 많은 불신자와 방황하는 영혼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하였습니다. 필라델피아 고교생 시절부터 노래 실력이 뛰어나 그녀가 다니던 작은 흑인 교회에서 189달러의 후원 기금을 지원하여 뉴욕의 타운홀에서 독창회를 가졌습니다.
그러나 독창회에 대한 음악평은 형편없이 나빴습니다. 실의에 찬 마리안에게 그의 어머니가 말씀하셨습니다.
“마리안, 은혜가 위대함보다 먼저 와야 한단다”
어머니의 이 한마디는 마리안 앤더슨을 위대하게 만들었고 그녀의 전생애를 변화시킨 금언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인간의 위대함보다 먼저 와야 진정한 성공이 되는 것입니다. 앞선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하고 따르는 신앙을 간직하기 바랍니다.
정말 알아야 할 것
미국 어느 해안에서 호화스런 요트 한척이 침몰했습니다. 침몰 직전, 해안 구조대에 SOS신호가 왔습니다. 구조대 통신원이 회신을 했습니다. “알았다. 곧 구하러 가겠다. 현재의 당신 위치를 알려라(What is your poistion?).” 이때에 대답이 왔습니다. “나는 모은행의 은행장이다.” 그리고 회신이 뚝 끊어졌습니다. 결국 이 배는 구조되지 못했습니다. 위치를 알리라고 했는데 자신의 지위를 알려 준 것입니다. 지금 구원을 필요로 하는 내가 어디에 있는가가 중요한 것이지 지위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정말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내가 어디에 있는가하는 것입니다.
되돌려 준 바가지
테레사 수녀가 감동 받은 일화입니다.
겨우 한 바가지 음식을 얻어 피골이 상접한 흰두교도 한 사람을 찾아갔습니다. 그 흰두교도는 감사하다면서 바가지를 되돌려 드리겠다고 하며 잠깐만 기다리시라고 하며 그 바가지의 음식 절반을 덜어 놓고 남은 절반을 들고 이웃집 이스람교도의 집을 찾아가 그것을 나누어 주고 바가지를 되돌려 주는 것이었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감동된 테레사 수녀는 평생 빈민의 어머니로 살게 된 원인이 되었습니다. 넉넉히 있어야 준다는 사고는 잘못된 것입니다.
한 바가지도 나눌 수 있는 그 마음! 거기에 천국이 있다고 믿습니다.
까닭을 아는가
교회학교 선생님께서 욥의 인내를 어린이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욥의 진실한 신앙과 삶, 그리고 고통을 다 이야기 해 주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단의 시험을 통해서 욥의 모든 것을 잃게 하셨는데 욥의 아내만은 그냥 두셨지요. 왜 그럴까요? 그 까닭을 알고 있는 어린이 있어요?”
제일 앞자리에서 진지하게 듣고 있던 어린이가 말했습니다. “선생님, 하나님께서는 욥이 시험을 이기자 두배로 축복해 주셨잖아요. 만약에 아내를 잃게 하셔서 아내를 두배로 주시면 하나님 입장이 곤란하시지 않겠어요?”
아내를 두신 까닭이 무엇일까요? 끝가지 인내하는가를 시험하신 것은 아닐런지요. 여하튼 인내하는 신앙이 이 시대에 필요합니다.
제 5 부 완전히 항복해야
당신 가지슈 /
포로된 자 /
믿고 지고 /
외국어 한마디 /
십자가 위에서 하신 말씀 /
두 어머니 /
어린 아이 같지 아니하면 /
선택과 결단 /
판별 방법 /
나 /
하나님의 자녀 /
정면으로 보라 /
나눔의 섭리 /
내 탓 하나님 은혜1 /
내 탓 하나님 은혜2 /
생존 너머 사명의 삶 /
교역자 주간 /
통해야 산다 /
예수님의 해법 /
줄어드는 까닭 /
믿음의 정량 /
생명의 힘 /
고난 너머 /
변화의 능력 /
함께 지는 행복 /
완전히 항복해야 /
남기는 법 /
건강과 평화 위해 /
예수 믿는다는 것 /
기 살리시는 하나님 /
당신 가지슈
기자가 채만식 선생님께 질문했습니다. “제주도를 당신에게 드린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러자 선생님은 묻는 기자보고 “당신 가지슈”하고 대답했습니다.
속을 비웠다는 뜻일겝니다. 인간이 살아가는 세상살이의 모든 문제들은 속을 비우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마음 속을 비우고 ‘사람이 무엇이관대’라는 깊은 신앙의 경지에 들어갈 수 있길 바랍니다.
포로된 자
14세기, 현재 벨기에 해당되는 곳에 레이몬드 3세라는 군주가 살고 있었습니다. 그의 친 동생이 반란을 일으켜 정권을 잡았는데 동생은 차마 형을 사형시킬 수가 없어서 감옥으로 보냈습니다. 감방의 문은 특별하게 설계되었습니다. 레이몬드 3세는 식성이 좋아 뚱뚱한 사람인데 그 몸집으로는 도저히 빠져 나올 수 없을 만큼 문을 작게 낸 것입니다. 만일 체중을 줄여 그 몸으로 빠져 나올 수 있으면 자유의 몸이 될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 감방에는 날마다 맛있는 음식이 공급되었습니다. 그것들은 안 먹고 다이어트 했으면 자유를 얻을 수 있었겠지만 그는 점점 더 뚱뚱해졌습니다. 그는 철장의 포로가 아니라 식욕의 포로였습니다.
내일의 자유보다 오늘의 욕심에 사로잡혀 사는 것은 어리석은 짓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자유이십니다.
믿고 지고
‘믿어야 할 십자가’와 ‘져야 할 십자가’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인류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해 보혈의 피를 흘리신 십자가를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과 막힌 담을 헐어 주신 십자가의 구속 은총을 믿음으로 죄사함의 은총을 받았습니다. 또한 우리에게 주신 사명을 감당하며 지고 가야 할 십자가가 있습니다.
믿어야 할 십자가, 지고 가야 할 십자가를 믿고 지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외국어 한마디
쥐 한 마리가 고양이에게 쫓기고 쫓기다 더 이상 쫓길 수 없는 막다른 골목에 이르러 도망치던 발길을 멈추고 돌아서서 고양이를 향해 냅다 소리를 질렀습니다. “야- 옹-” 그 소리가 얼마나 앙칼졌던지 쫓아 오던 고양이가 그만 기가 막혀 멍하니 그 쥐를 살려 주고 말았습니다. 겨우 목숨을 건지고 집에 돌아온 쥐가 새끼쥐들을 다 모아 놓고 한 마디 훈계를 했습니다.
“얘들아, 외국어도 한마디쯤은 해야 되겠더라.”
신앙인들도 천국 언어를 익혀야 하겠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하신 말씀
저 사람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눅23:34).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눅23:43).
어머니,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요19:26-27).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마27:46)?
내가 목마르다(요19:28).
다 이루었다(요19:30).
아버지, 제 영혼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눅23:46).
예수님은 마침내 숨을 거두셨습니다. 곁에 섰던 백부장이 말했습니다. ‘이 사람이야 말로 정말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막15:39).’ 우리 죄를 대속하신 십자가의 주님을 더욱 사모하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두 어머니
로마가 세계를 지배할 당시 두 어머니가 있었습니다. 네로의 어머니 ‘아그리피나’는 남편 클라우디오 황제를 암살시키고 자기 아들 네로를 황제로 즉위시켰으나 결국은 아들에게 살해당했습니다.
어거스킨의 어머니 ‘모니카’는 아들이 극도의 방종과 방탕의 생활 속에 빠져 있었을 때 눈물로 기도하며 신앙으로 인내하여 탕자를 성자로 만들었습니다.
위대한 인물 배후에는 위대한 어머니가 있었고, 위대한 어머니 배후에는 위대한 신앙이 있었습니다. 이 세상에 신앙의 어머니만큼 위대한 것은 없습니다.
어린 아이 같지 아니하면
초등학교 시험에 ‘미닫이’를 소리나는 대로 쓰라는 문제가 나왔습니다. 그 중의 한 어린이가 곰곰히 생각하고는 ‘드르륵’이라고 썼습니다. 정답은 아닐지 모르지만 틀린 것은 아닙니다. 그 어린가 보고 있는 세계는 순수하고 꾸밈이 없습니다.
어쩌면 어른이 볼 수 없는 것을 볼 수 있는 순수함과 겸손함이 어린이에게 있기에 예수님께서는 돌이켜 어린아와 같이 되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천국을 차지할 어린아이와 같게 되길 기도합니다.
선택과 결단
인생의 가장 큰 어려움은 선택과 결단입니다. 철학자 키에르케골은 말하길 선택과 결단할 것이 많기에 “인간은 불안과 현기증을 느낀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선택하고 믿음과 사랑을 선택하고 생명을 선택함으로 성공적이고 복된 삶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눅10:42).’
항상 좋은 편을 선택하는 지혜와 신앙을 간직하시길 바랍니다.
판별 방법
언젠가 부화장에서 병아리 감별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병아리 꽁무니를 들여다 보고 금방 감별하여 따로 분리하는 것이었습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인지의 여부를 판별하는 두 가지 테스트가 있습니다. 하나는 “예수님을 구주로 고백하고 영접하여 죄사함 받았는가?”하는 믿음 테스트와 나머지 하나는 “예수님의 교훈과 말씀대로 사는가?”하는 생활 테스트입니다.
주님이 우릴 들여다 보시고 어떻게 판별하실까요? 참된 그리스도인으로 판별되는 교우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나
나에게는 세 개의 ‘나’가 있습니다.
곧 ‘하는 나’, ‘보는 나’ 그리고 ‘보여지는 나’가 그것입니다.
‘하는 나’는 행동하는 나로서 이 부분만 발달하면 급진적 행동주의가 됩니다.
‘보는 나’는 사물을 관찰하는 나로서 사물을 객관화하는 역량이 여기에서 나오지만, 역시 이 부분만 발달하면 실행없이 생각과 말만 많게 됩니다.
‘보여지는 나’는 남이 나를 어떻게 볼까를 의식하는 나로서 이 부분만 발달되면 주체성이 없이 눈치와 체면 위주로 살게 됩니다.
이 세 개의 내가 서로 균형을 이루고 조화되었을 때에 이상적인 인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은 ‘하나님이 보시는 나’를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고 살아야 합니다. 거기에 신앙과 축복의 뿌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보시는 나’를 의식하며 신앙과 경건을 회복하는 교우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자녀
교회학교 선생님이 철이에게 말했습니다.
“목사님께서 ‘너는 누가 창조했지?’하고 물으시면 ‘하나님이요’하는 거야, 알았지?” 철이는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런데 철이는 급하게 화장실을 가고 그 시간에 목사님이 오셔서 다른 학생에게 물었습니다. “너는 누가 창조했니?” “우리 엄마하고 아빠가요” “아니, 하나님이 창조하신게 아니고?” 그러자 그 학생이 대답했습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애는 지금 화장실에 있어요.”
‘너’와 ‘우리’는 차이가 많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그 자녀됨의 축복이 창조 신앙입니다.
정면으로 보라
‘지구야 멈추어라. 나는 내리련다’
어느 대학 벽에 쓰여진 낙서입니다. 배포는 커서 좋은 데 내려서 될 일이 아닙니다. 죽도록 괴로워도 여기 이대로 버티고 설 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병리적인 사회의 모습은 우리의 가슴을 납덩이처럼 무겁게 만듭니다. 하지만 피하고만 있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정면으로 바라보고 아파하면서도 대결해야 합니다. 특히 우리의 미래 청소년의 문제는 우리가 정면으로 부딪치면서 매만져가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 일을 위해 우리를 부르셨고 남겨 놓으셨습니다.
나눔의 섭리
핀란드 쿠오피오에 있는 공중 보건연구소는 영국의 의학 전문지 브리티시메디컬 저널에 발표한 연구보고에 2천6백82명의 중년남자를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 결과 헌혈 경험이 있는 사람이 그렇지 않은 사람에 비해 심장마비 발생 위험이 86%가 낮은 것으로 나타났다고 밝혔습니다. 조사 대상자 중 헌혈 경험이 있는 사람은 153명, 헌혈을 한 번도 하지 않은 사람은 2,529명이었는데, 심장마비를 일으킨 사람은 헌혈한 사람중엔 1명이었는데 헌혈 안한 사람들 중에는 226명이나 되었다는 것입니다.
심장마비는 혈액상실로 체내의 철분 저장량이 줄어드는 것과 연관이 있는 것으로 분석되었습니다.
우리에게 있는 것을 나누도록 창조하신 하나님의 섭리를 볼 수 있습니다. 나누어야 생명적인 삶을 누릴 수 있습니다. 나눔은 하나님의 섭리이며 뜻입니다.
내 탓 하나님 은혜1
고등학교 다니는 딸을 둔 아버지가 있었습니다. 성실하던 아이가 친구를 잘못 사귀어 비뚤어졌습니다. 때로는 타이르고 때로는 나무라며 온갖 정성을 기울였습니다. 어느 날 아버지가 참다 못해 매를 들었습니다. 이 때 그 딸은 “나에게 뭐 해준게 있다고 때리는 겁니까?”라고 대들었습니다. 아버지는 온 몸에 맥이 쭉빠졌습니다. 보는 눈에 따라 해준 것이 있기도 하고 없기도 했습니다.
감사할 것이 얼마나 많습니까? 건강한 것 감사, 몸이 좀 불편해도 병원에 입원 안하니 감사, 입원했다 해도 죽을 병이 아니니 감사, 예수 믿으니 감사, 북한 땅에 태어나지 않고 자유의 땅에 태어나니 감사, 아버지 계신 것 감사, 감사할 마음 주시니 감사, 사실 깊이 생각하면 감사할 것 뿐입니다.
여러분은 어떠한가요?
내 탓 하나님 은혜2
항상 불평과 남탓만 하는 할아버지가 낮잠을 즐기고 있었습니다. 장난꾸러기 손자가 낮잠 주무시는 할아버지 콧수염에다 썩은 치즈를 묻혀 놓았습니다. 잠에서 깨어 침실을 나오면서 “침실에서 이상하게 썩은 냄새가 나는구만”하셨습니다. 그리고는 방방을 다니면서 “온통 집안에서 고약한 냄새가 나는군”하시고 집 현관 밖으로 나와서는 더 큰소리로 “온 세상에서 냄새가 난다. 에이 더러운 세상”이라고 외쳤습니다.
사실은 할아버지가 냄새를 내고 있는 것입니다. 문제는 코 밑 수염이었습니다. 남 탓만 하지 말고 자신을 돌아보며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것이 풍성한 삶의 원리입니다.
생존 너머 사명의 삶
‘세상에는 두종류의 인간이 있다. 그 하나는 우리들이 행복할 때에는 지극히 애교가 있고 다정하게 굴지만, 우리가 불행에 처하게 되면 어느 덧 살짝 몸을 숨기는 자들이다.
또 다른 하나는 휠씬 애교는 적지만 우리가 불운할때에도 우리를 버리지 않는 사람들이다. 친애하는 독자여! 당신은 어느 편에 속하는가?’
스위스의 역사가 칼 할티가 잠을 이루지 못하는 사람을 위해 썼다는 11월4일자 일기 내용입니다.
생존에만 능한 현대인에게 창조적인 삶, 사명의 삶을 향해 나서라는 권면입니다. 생존을 넘어서서 사명을 향해 나아가는 교우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교역자 주간(Minister's Week)
교우들이 종종 묻습니다.
“우리 교회는 성장하고 있습니까?”
그러나 이제는 이렇게 물어야 합니다.
“우리 교회 목회자는 성장하고 있습니까?”
이것이 교역자 주간(Minister's Week)을 지키는 이유입니다. 교역자를 위해 기도해 주시고 성장을 도와주는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되시기 바랍니다.
통해야 산다
결혼 10주년 기념일 아침 식탁에 마주 앉은 아내가 ‘여보, 오늘이 무슨 날인지 알아요?’하고 말해도 깨닫지 못하는 남자가 있었습니다. 아내가 하는 수 없이 다시 말합니다. ‘당신, 오늘이 우리가 이 똑같은 자리에 10년동안이나 앉았다는 걸 알아요?’ 이렇게 힌트를 주는데도 남편은 아내를 쳐다보며 ‘그래서, 이사를 가자는 얘기요, 아니면 자리를 바꿔 앉자는 얘기요?’ 하더랍니다.
간이 상당히 큰 남자임에 틀림없습니다. 뭔가 통하는 것이 있어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계속 프로포즈를 하시는데 멀뚱 멀뚱 딴 곳만 쳐다 보고 있지 않습니까? 주님과 통해야 삽니다.
예수님의 해법
현재 갖추고 있는 조건 때문에(because)하는 사랑이 있습니다. 조건이 달라지면 사랑도 식어지게 됩니다.
미래의 조건을 전제로 하는 만약(if)의 사랑이 있습니다. 만약 그 조건이 안 이루어진다면 낭패입니다.
아무 조건 없이 그럼에도 불구하고(in spite of)하는 사랑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이 여기에 해당됩니다.
예수님은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사랑으로 모든 문제를 풀어 가셨습니다. 예수님의 해법을 배우시지 않으시렵니까?
줄어드는 까닭
어느 의사가 왜 자기 병원에 환자가 줄어드는지 의아하게 생각하고, 자기 친구에게 며칠간 자기 병원에 와서 자기가 무엇을 잘못하는지를 살펴봐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그 친구가 병원에 와서 몇 시간 지난 후에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습니다.
“이 친구야, 자네는 앞으로 처방전을 쓸 때, ‘요단강 건너가 만나리’라는 찬송을 더 이상 흥얼거리지 말게나”
우리는 오히려 ‘내 몸의 약함을 아시는 주 못고칠 질병이 아주없네’를 찬양하는 치유의 신앙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믿음의 정량
거지나 다름없는 어린 소년 콜게이트(Colgate)가 돈을 벌기 위해 뉴욕으로 간다는 말을 듣고 한 믿음 좋은 아저씨가 말했습니다.
“네가 성공하고 싶거든 예수님을 잘 믿어라! 십일조를 하나님께 꼭 드려라! 아주 품질 좋은 비누를 정량을 채워서 만들어라!”
이 말대로 실천하여 비누공장에 들어간 콜게이트는 나중에 세계적으로 유명한 큰 부호가 되었습니다.
말씀을 쫓아 정량을 채우는 삶을 하나님이 원하십니다. 말씀을 쫓을 때에야 정량이 채워지는 것입니다. 믿음의 정량을 채우시지 않으시렵니까?
생명의 힘
독일 하노바시 공동묘지에는 굉장히 큰 화강암과 대리석을 덮개로 하여 시멘트에 튼튼한 쇠고리를 걸어 잠가 놓은 묘지 하나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부활을 믿지 않았던 한 여인의 무덤입니다. 이상하게도 그 여인은 부활이 있더라도 자기는 무덤에서 일어 날 수 없도록 해 달라고 했기 때문에 그녀의 무덤은 토치카처럼 견고히 만들었습니다. 비석에 새긴 글은 ‘이 무덤은 결코 열지 못하리라!’였습니다.
그런데 씨앗 하나가 무덤의 돌 사이에 떨어져 자라기 시작했습니다. 땅 속에서 나온 생명의 싹은 큰 돌바닥을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하여 결국은 쇠고리를 끊었고 화강암을 깨뜨리고 시멘트를 부수고 무덤을 깨뜨렸습니다. 생명의 힘을 막을 수는 없었습니다.
산 자이신 예수님의 생명의 힘이 우리 속에 있습니다. 그 부활 생명의 힘을 찬양하고 축하합니다.
고난 너머
어거스틴(A·D 354-430)은 소논문 「질서」에서 고난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고난이란 수를 놓은 천을 보는 것과 같다. 천의 뒷 면을 보면 많은 색깔의 실이 무질서하게 얽혀 있기에 보기에 나쁘다. 고난을 다만 괴로움과 부조리로 보는 것은 뒷면만을 보기 때문이다. 천의 앞면을 본다면 혼란하던 실들의 형태와 색채가 아름답게 조화되어 있음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 역사를 움직이신다는 사실을 믿는 사람은 고난의 혼란과 혼잡을 뚫고 아름다운 미래를 본다.”
하나님의 뜻을 믿는 신앙인은 현재의 고난이나 고통의 어려운 환경 여건 그 뒷면에 하나님이 준비하고 계신 아름다운 내일을 볼 수 있습니다. 고난 너머를 신앙의 눈으로 응시하는 그리스도인이 되시기 바랍니다.
변화의 능력
옛날의 구라파나 영국이나 미국은 부유한 국가가 아니었습니다. 문명은 아시아 쪽에서 출발했습니다. 그리스도 복음이 전파되자 그 복음을 받아 들인 나라마다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서 형통하여 잘 살게 되었습니다. 복음으로 인해 해적의 나라 영국이 신사의 나라가 되었고, 청교도 신앙을 건국이념으로 한 미국은 초강국이 되었습니다. 이 복음이 개인의 중심, 국가의 중심을 변화시켰습니다. 복음은 변화의 능력입니다.
주여, 이 복음의 능력으로 우리의 삶을 변화시켜 주소서.
함께 지는 행복
영국 토마스 칼라일에 관한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의 부인이 결혼하기 전 아주 미인이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영국의 유명한 가문의 청년들로부터 구혼의 편지가 날아들었습니다. 그 중에는 영국에서 손꼽히는 정치가의 자녀, 실업인의 아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들의 편지내용은 요즘말로 표현하면 대개 다음과 같았습니다.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만일 당신이 저와 결혼해 주신다면 나는 당신을 위해 좋은 아파트, 고급 가구, 편리한 전자 제품, 고급 승용차를 사겠습니다.”
그러나 그 중 한 편지만은 내용이 달랐습니다.
“나는 아직 고급 승용차나 문화 주택을 지을 만한 돈이 없습니다. 그러나 만일 당신이 나와 결혼한다면 나는 당신과 함께 우리에게 주어진 인생의 짐을 함께 짊어질 마음의 각오가 서 있습니다.”
지혜로운 처녀는 시골 무명의 수학 선생 토마스 칼라일의 편지를 합격시켰습니다.
그 후 오랜 세월이 흘러 칼라일은 스코틀랜드에서 가장 유명한 에딘버러대학의 총장직에 취임하게 되었습니다. 그 총장 취임 석상에서 토마스 칼라일은 유명한 취임사 한마디를 남겼습니다.
“오늘 내가 이 영광스러운 자리에 서게 된 것은 나와 행복만을 위해 결혼하지 아니하고 주어진 생의 짐을 함께 져 주기 위해 결혼한 내 아내 덕분입니다.”
이 때 수많은 관중은 우뢰와 같은 박수갈채를 보냈습니다. 그는 이 박수갈채 속에서 총장에 취임하였습니다.
주어진 생의 짐을 함께 지고자 하는 마음에서부터 행복은 비롯되는 것입니다.
완전히 항복해야
실수로 사람이 강물에 빠졌습니다. 허우적거리며 살려달라고 소리지릅니다. 구조대원이 달려 왔습니다. 그러나 그는 사람을 건질 생각은 않고 구경만 하고 있습니다. 옆에 섰던 사람들이 빨리 들어가서 건지라고 야단을 해도 대꾸도 않고 가만히 보고만 있습니다. 물에 빠진 사람이 허우적 거리다가 기진 맥진합니다. 그제서야 구조대원이 뛰어들어 건져냅니다. “왜 빨리 건지지 않았소?”묻는 사람들에게 “기운있을 때 들어가면 날 꼭 붙잡고 놓지 않아 같이 죽을 수도 있습니다. 자기 노력을 포기한 후에야 건질 수 있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하나님께 완전히 항복해야 구원이 있습니다.
남기는 법
감자를 캐서 거두는 농장 주인에게 딸이 있습니다. 아버지는 딸에게 감자를 거두도록 일을 시켰습니다. 열심히 감자를 쌓아 두었는데 그녀에겐 한 가지 불평이 있었습니다. 그 아버지께서는 집에 찾아오는 손님과 교회식구들에게 애써서 거둔 감자를 아낌없이 나누어 주기 때문입니다. “왜 한 여름 동안 고생해서 거둔 감자를 마구 나누어 줍니까?”
아버지는 빙그레 웃으시며 “얘야, 감자란 나누어 주어야만 우리에게 남는 법이란다. 나누어 주지 않으면 남은 감자가 썩어 버린단다”
그 이듬해에 보니 쌓아 두었던 다른 집 감자는 다 썩었는데 그 소녀 가정의 감자는 상하지 않아서 마음껏 먹을 수 있었으며 씨로 사용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나누어 주어야 생명이 남습니다. 이 진리가 기독교의 근본 진리입니다. 나눔으로 남기시지 않으시렵니까?
건강과 평화 위해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지 스트레스를 안 받고 살 수는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스트레스에 눌려서 살지 마시고 스트레스를 기회로 삼아 살아가면 어떨까요? 건강하고 평화로운 삶을 위하여 다음의 것들을 시도하시기 바랍니다.
첫째는 서둘지 마십시오. ‘오늘 못 죽으면 내일 죽지’ 이런 마음을 가지고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전진하시기 바랍니다.
둘째는 가정 분위기를 밝게 만드시기 바랍니다. 가정은 쉼터이며 사랑의 요람이어야 합니다.
셋째는 긍정적이고 낙천적인 친구들을 만남으로 감정을 풀어 내시기 바랍니다.
넷째는 믿음을 가지시고 하나님을 의지하고 성령님께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아브라함 요수아 헤셀의 말처럼 사람은 혼자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십니다.
예수 믿는다는 것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새롭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심판자를 이제는 아버지로, 그리고 항상 두려워하던 하나님을 이제는 사랑의 하나님으로, 공포의 대상을 사랑의 대상으로 바꾸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웃에 대해서는 증오의 대상을 사랑의 대상으로, 이기적인 생각에서 봉사하는 마음으로, 질투나 앙심에서 용서하는 마음으로 바꾸게 되며, 그리고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아주 쓸모 없는 존재로 알았으나 이제는 그리스도 안에서 소중한 존재로, 실패한 것이 아니고 모든 것을 성공한 것이라고 이해하고, 허무한 것이 아니라 여기에 커다란 의미가 있다는 것으로 생각이 바뀌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 믿는 진정한 의미입니다.
하나님과 이웃과 올바른 관계를 갖는 것이 곧 올바른 신앙입니다.
기 살리시는 하나님
남편의 기를 살리는 법이 있다고 합니다.
첫째, 하루 한 번 이상 남편을 웃긴다.
둘째, 하루 한 번씩 남편을 칭찬한다.
셋째, 남편만의 시간과 공간을 준다.
넷째, 상냥한 말투를 사용한다.
다섯째, 남편의 하는 일에 관심을 갖는다.
여섯째, 부부만의 시간을 만들어 남편의 이야기를 들어준다.
일곱째, 남편을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 않는다.
여덞번째, 남편의 손님을 초대하여 편안한 자리를 마련한다.
이상이 기살리는 비결입니다. 그러나 남편만이 아니라 모든 인간의 기를 살려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심(임마누엘)은 우리의 기를 살리시는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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