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이 오면, 그날이 오면은
삼각산이 일어나 더덩실 춤이라도 추고
한강물이 뒤집혀 용솟음칠 그날이
이 목숨이 끊기기 전에 와 주기만 하량이면
나는 밤하늘에 날으는 까마귀와 같이
종로의 인경을 머리로 들이받아 울리오리다.
두개골은 깨어져 산산조각이 나도
기뻐서 죽사오매 무슨 한이 남으오리까.
그날이 오면 오오 그날이 와서
육조 앞 넓은 길을 울며 뛰며 뒹굴어도
그래도 넘치는 기쁨에 가슴이 미어질 듯하거든
드는 칼로 이 몸의 가죽이라도 벗겨서
커다란 북을 만들어 들쳐 메고는
여러분의 행렬에 앞장을 서오리다.
우렁찬 그 소리를 한번이라도 듣기만 하면
그 자리에 거꾸러져도 눈을 감겠소이다.
심훈 선생의 '상록수'는, 학창 시절 국어교과서를 통해 접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지금도 중학교 교과서에 실려 있다.
러시아의 브나로드 운동(V.Narod, 민중속으로)의 영향을 받아
농촌에서 계몽운동에 헌신하는 실천가를 모델로 한 작품이다.
그 당시엔 내 나름 문학에 한껏 빠져있었던 시기였음에도,
교과서에 실리는 작품엔 묘한 거부감과 땡땡이 심리가 작용하고 있었기에
시험을 대비하는 교과서의 모든 텍스트들이 지겨움의 대상이었다.
최소한 중학 당시까지는 공부 지지리도 안했다.
그러나, 누군가 권한 어느 시집 속에서
심훈 선생의 '그날이 오면'을 접했던 날의 감동과 전율은 아직까지 잊혀지지 않는다.
특히, "나는 밤하늘에 날으는 까마귀와 같이 / 종로의 인경을 머리로 들이받아 울리오리다. / 두개골은 깨어져 산산조각이 나도 / 기뻐서 죽사오매 무슨 한이 남으오리까." 구절은 감동을 넘어 큰 충격이었음을 기억한다.
웬만한 시들이 언어의 조탁을 구실로 보다 더 세련되고 아름다운 조어를 찾아내려 할 때,
그 시는 감동보다는 미적 유희에 머무는 경우가 많다.
일상 속의 진솔한 감정과 의지가 숨막히는 고뇌 끝에 가슴으로부터 토해내질 때,
이는 여느 꾸밈이나 채색과는 비교할 수 없는, 굳건한 경종만큼의 울림을 주지 않는가.
당시 중학생의 어린 소년은, 시에 대한 나름의 똥꼬철학을 가지고 있었다.
뭐랄까.
당시 식민시대를 살아가는 지식인의 깊은 고뇌와 울분, 그리고 애절한 갈망이 생생히 전해져 온다는 식의 피상적인 말로는 도저히 설명이 되지 않는...
읽는 순간에 내 가슴을 울컥하게 만드는 그 크-은 함성,
너무나 아프고 아픈 식민시대의 통곡이 수십 년을 건너뛰어와 나를 준엄하게 가르치고 이끄는 듯한 느낌, 그것이었다.
2008년
누군가는 빨갱이를 물리치고 '예수천국, 불신지옥'이라는 신의 역사성이 증명되었다고 목소리를 드높이고,
누군가는 편협한 민족주의적 시각이 낳은 그릇된 일제역사관을 극복하자 외치면서 친일의 행태를 공공연히 논하는 세상.
역사란 무엇인가!
왜 우리는 과거의 궤적을 연구하고 학문화하는 것인가!
역사란, 과거의 사태와 종적을 오늘의 거울 삼고, 또 그것으로 미래를 진단하기 위한
한 민족 또는 한 국가의 소중한 은원의 자산이 아니던가.
건국60주년으로 치장된 8월15일이 다가오고 있다.
조선 민족의 독립을 꿈꾸며 자신의 머리부터 발끝까지의 모든 피를,
그 남김없는 한 방울조차 아낌없이 모국에 바친 선조들이 드디어 '독립만세'의 가슴애이는 통곡을 쏟아내던 그 날 8월15일이-
'망각의 역사인'들에 의해 '건국'을 앞세워 다가오고 있다.
어느 무엇보다 숭엄히 회고하고 고개 숙여야 할 그 날을 우리는 도대체 무슨 면목으로 뵈어야 할 것인가. 선조들의 고귀한 목숨과 우러르기조차 경외한 그 희생의 대가 앞에서 이 민족의 위정자들은 지금 도대체 무슨 짓을 하고 있단 말인가.
부끄럽고 염치없기 한량 없다.
2008년 8월15일
종로에서, 종로 한복판에서 심훈 선생을 부르고 싶다.
심훈 선생의 '그날이 오면'에 맞추어 종로 앞의 진을 치는 친일의 공권력에 맞서 '머리로 들이받아' 몽매에 잠자는 이 시대를 울리고 싶다.
'두개골은 깨어져 산산조각이 나도' 최소한 선조들 앞에 떳떳할 수 있지 않겠는가.
대한민국의 청년아!
너의 오늘을 부끄럽지 않게 닦아라!
대한민국의 청년아!
독립투쟁의 산화 선조들 앞에 너의 핏줄기에 고동치는 의혈을 뽐내어라!
대한민국의 청년아!
네가 나의 손을 잡아끌고 종로로, 종로로 쏟아져 나아가는 그날을
정말이지 간절히 고대하며 수심(愁心)의 밤을 적신다.
첫댓글 참 좋은 글 감사합니다. 비장함을 담습니다. 꾸벅....
비장함 작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