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초의 말씀 이전에 무엇이 있었던고?”
요한복음의 첫 구절 ‘말씀’은
선가귀감 첫 구절의 ‘일물’로
재해석해 볼 수도 있어 …
‘태초의 말씀 이전에 무엇이?’
기독교를 종교로 가지고 있는
이들에게 이 구절은 최고 화두
通古覺今 종교 간의 대화는
이제 동서문명 인류가 당면한
가장 중요한 과제로 다가와
이 도상은 필자가 직접 만들어 본 것으로 요한복음의 첫 구절과 선가귀감의 첫 구절을 원상(圓相) 안에 함께 배치하여 태초의 ‘말씀’과 근본이래의 ‘일물’이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은 것임을 표현해 본 것이다.
불교와 기독교의 대화와 소통에 관해서 내가 본격적으로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것은 2015년에 있었던 광화문 국제 무차선대법회를 준비하면서였다. 당시 종정이었던 진제 큰스님의 부촉을 받고 세계의 종교지도자 가운데 미국 성공회를 대표하여 방한한 뉴욕 세인트 존 더 디바인 대성당의 수석 사제 코왈스키 신부와 가톨릭을 대표하여 방한한 세계 가톨릭대학연합회의 의장 앤서니 써레나 교수를 의전했을 때의 일이다.
불교와 기독교는 과연 소통 가능한가?
처음 만나자마자 대뜸 코왈스키 신부는 불교와 기독교 문명의 대화가 과연 가능한가에 대해 날 선 질문을 해 왔다. 일종의 선사들 법거량처럼 젊은 스님을 한번 시험해 보겠다는 의도가 여실히 보이는 순간이었다. 나는 통역을 부탁하고는 ‘요한복음’ 1장 1절 구절을 들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불교에 대해서는 기본지식이 있었지만 기독교 텍스트에 문외한이었던 통역자는 난색을 보이며 통역을 못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서툰 영어이긴 하지만 직접 영어로 외우고 있었던 요한복음 첫 구절을 읊어대기 시작했다. “In the beginning was the Word, and the Word was with God, and the Word was God(태초에 말씀이 계셨나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이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렇다면 이 ‘말씀 이전’에는 무엇이 있었습니까? 한번 대답해 보시죠!”
한참 동안 침묵이 흘렀다. 중학교부터 대학원까지 줄곧 기독교 계통의 학교를 16년 동안 다녔던 나에게 늘 선문답의 화두와도 같이 자리 잡고 있었던 의문을 가톨릭을 대표하는 세계적인 종교지도자들에게 던져 버렸던 것이다. 적막이 흐른 뒤에 나는 말을 이어나갔다.
“이 말씀(로고스)이라는 것은 말이 끊어지고 생각이 끊어진 자리이며, 이것은 증득의 대상이자 깨달음의 영역이다. 우리 동양에는 ‘천하에 두 도(道)가 없고 성인에게 두 마음이 없다’라는 말이 있는데 성인에게 두 마음이 없다는 것은 성인들은 무심(無心)을 체험한 분들이며 석가와 예수가 모두 성인이라면 이 무심을 증득했을 것이 틀림없다. 이를 통해 본다면 불교와 기독교는 근본의 자리에서부터 대화를 시작할 수 있을 것이며, 언어와 문자가 끊어진 요한복음의 ‘말씀’의 세계와 ‘선(禪)’의 불립문자(不立文字)의 세계는 본질적으로 통한다고 볼 수 있으니 여기에서부터 시작한다면 두 종교는 완전하게 대화를 풀어나갈 수 있을 것이다”라는 요지의 설명을 했다.
태평양을 건너 서양을 가본 적도 없고, 영어 회화학원이라고는 한 달을 넘게 다닌 적이 없었던 나로서는 정말이지 긴 영어스피치를 했던 순간이었다. 하지만 뭔가 가슴속에 깊이 간직하고 있었던 내면의 말을 뿜어내듯 한바탕 쏟아내고 나니 속이 후련하였다.
그랬더니 이 두 분의 가톨릭 지도자들은 환하게 웃으며 너무나 반가워하며 맞장구를 치기 시작했다. 서양의 신학계에서도 1960년대에서부터 과연 이 ‘말씀’이 도대체 무엇인지, 로고스라는 것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 것인지에 대해서 너무나 다양하고도 진지한 담론의 역사가 진행되어 왔다는 이야기였다.
그런데 ‘말씀이 끊어진 말씀’, ‘생각 이전의 말씀’과 같은 나의 표현은 로고스에 대한 기가 막힌 해석이라며 상기된 얼굴로 한껏 들떠서 이러한 주제로 대화를 한다는 것은 종교 상호 간의(inter-religious) 대화를 위해 매우 중요하다고 하면서 1시간 가까이 열변을 쏟아내는 것이었다. 그 첫날의 대화 이후 법회와 행사가 끝날 때까지 며칠 동안 우리는 조금의 거리낌도 없이 아주 편안하게 소통할 수 있었고 늘 웃으며 서로를 바라보게 되었다.
‘빛’보다 먼저 있었던 ‘소리’
기독교 <성경>의 ‘창세기’를 보면 ‘요한복음’과는 달리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고 되어있다. 그런데 그다음 구절에 매우 독특한 표현이 등장한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고 그 빛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이 구절을 보면 빛이 있으라고 하여 빛이 있게 되었다는 것이니 분명히 빛보다 빛이 있으라는 ‘말씀’이 먼저 있었던 것임을 알 수 있다.
즉 태초에 있었다는 말씀이 빛이 있으라는 것과 연관이 있다는 것인데, 하나님과 함께 있었고 그 자체로 하나님이라는 요한복음에서 언급된 ‘말씀’은 창세기의 ‘빛’보다 선재하는 그 무엇인 것이다.
나는 동국대 학부 3학년 시절에 <화엄경>의 ‘비로자나품’을 읽을 때 기독교에서 말하는 ‘말씀’과 ‘빛’의 오묘한 미스터리는 단번에 빙소와해(氷消瓦解) 되는 경험을 하게 되었다. 비로자나품에는 광명의 부처님인 비로자나불의 성불 이전의 전생 이야기가 나온다. 즉 비로자나불의 본생담이자 자타카가 이 품인 셈이다.
비로자나불은 성불하기 전에 ‘대위광(大威光) 태자’였다고 한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거대한 위엄을 갖춘 빛의 태자였던 것이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이 태자가 살던 세계가 바로 ‘지나간 세상 말할 수 없이 오랜 겁 전에 있었던 승음(勝音) 세계’라는 것이다. 즉 광명변조의 법신불인 비로자나불이 성불하기 이전에 태자로 있었던 세계가 바로 ‘수승한 소리’의 세계인 ‘승음(勝音) 세계’라는 것이니 기독교에서 말한 것처럼 빛보다 소리가 먼저 있었다는 것과 정확히 부합하고 있다.
출가한 지 몇 년 되지 않았던 사미승 시절에 나는 기독교 성경의 요한복음과 불교 화엄경의 비로자나품을 비교종교학적인 차원에서 분석하다 보면 뭔가 어마어마한 발견을 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품고 매우 고무되었다.
원효의 멋들어진 ‘원음(圓音)’ 해석
이러한 나름의 발견이 있고 난 이후로 나는 불교와 기독교, 유교와 노장사상에 이르기까지 빛과 소리의 관계에 대한 많은 자료를 모으기 시작했다.
<능엄경>에서 25 원통 가운데 가장 수승한 것이 ‘이근원통(耳根圓通)’이라고 했던 것, 세상의 모든 소리를 관한다는 ‘관세음(觀世音)보살’의 의미, 한자 문명에서 성인을 의미하는 ‘성(聖)’자는 <설문해자>에 입각해서 보면 ‘귀(耳)’를 의미한다는 것, 공자를 ‘집대성(集大成)’이라고 평가했던 맹자의 표현에서 대성(大成)의 ‘성(成)’은 음악용어였다는 것, 그리고 노자가 말한 큰 음은 소리가 없다는 ‘대음희성(大音希聲)’, 장자가 말한 하늘 피리인 ‘천뢰(天)’는 소리가 끊어진 소리라는 것 등은 모두가 소리의 세계가 미묘의 극치이자 현묘의 궁극임을 말하는 예시들이었다.
이들을 묶어 ‘소리 철학’이라고 명명해도 전혀 부족함이 없을 정도로 방대한데 나는 10여 년 전부터 이에 대한 자료를 축적하며 강의를 지속해 왔다.
이 방면에서 내가 가장 주목한 인물은 역시 우리 한국의 원효대사로 <기신론>의 ‘원음(圓音)’에 대한 그의 주석은 천고의 절창이라고 할 수 있다. 간략히 요약해 보자면 ‘원음’이란 ‘일음(一音)’이라 할 수 있는데, 이는 ‘일체음(一切音)’에 다름 아니요, ‘중음(衆音)’이기도 하며, 궁극에는 ‘무음(無音)’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관음성지에서 쉽게 볼 수 있는 대련인 ‘백의관음은 무설설(無說說)하고 남순 동자는 불문문(不聞聞)한다’는 설한 바 없이 설하고 듣는 바 없이 듣는 세계는 바로 원효가 주석한 것처럼 원음(圓音)이 결국은 무음(無音)임을 깨닫는 것과 다른 것이 아니다.
이렇게 본다면 기독교에서 말하는 빛보다 먼저 있었다는 말씀과 소리의 세계 역시 무설설(無說說)의 말씀이자 무음(無音)의 소리임을 간파해야 할 것이다. 기독교에서의 태초의 ‘말씀’을 ‘있음’과 ‘유형(有形)’의 것으로 상정할 때 그것은 권력이 되고 권위가 되고 갑(甲)이 되어 을(乙)을 규정짓는 그 무엇으로 전락할 소지가 있는 것이다.
서구 해체철학의 대표사상가인 자크 데리다(Jacques Derrida)가 로고스 중심주의(logocentrism)를 해체하여 문자(文字)를 강조하는 <그라마톨로지>를 저술했던 것도 이와 같은 이유 때문이었지만, 데리다가 불교의 화엄학이나 원효의 주석을 통해 소리 철학을 공부해 보았다면 향상(向上)의 지평을 펼칠 수 있었을 것이라는 아쉬움은 진하게 남는다.
로고스(Logos)와 일물(一物)
“태초의 말씀 이전에 무엇이 있었던고?” 이 구절은 기독교를 종교로 가지고 있는 이들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화두가 될 수 있다. 서양인들이 간화선 수행을 하고자 한다면 이 화두를 주면 어떨까?
요한복음의 첫 구절의 ‘말씀’은 <선가귀감>첫 구절의 ‘일물(一物)’로 재해석해 볼 수도 있다. “여기에 한 물건이 있으니, 태초로부터 밝고 밝으며 신령스럽고 신령스러운데, 일찍이 생한 바도 멸한 바도 없으며, 이름 지을 수도 모양 지을 수도 없다.” 이 ‘한 물건’에 대해 서산대사는 주석에서 원상(圓相) 하나를 그려놓았을 뿐이다. 묵묵히 참선하여 선정에 들어서 증득해야 하는 세계인 것이다.
언어가 끊어진 언어, 말씀이 끊어진 말씀의 세계에 대해 억지로 ‘로고스’나 ‘한 물건’이라는 표현을 썼을 뿐이지만 동서고금의 선지식들은 이미 무심(無心)의 증득을 통해 이를 분명히 깨닫고 있었을 것이다.
요한복음과 창세기, 비로자나품과 선가귀감은 이렇게 시공을 초월하여 만나고 있었다. 동서 문명의 고전을 통해 현재를 깨달아 들어가는 ‘통고각금(通古覺今)’의 종교 간의 대화는 이제 인류가 당면한 가장 중요한 과제로 우리 앞에 성큼 다가와 있다.
첫댓글 불교 ~ 예수교
서로 다른점도
있지만 결과는
좋은미미를 지닌
말씀에 즐감합니다
감사합니다 ()